매일이, 여행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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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남겨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사람은 여행에서의 자유를 잃게 된다. 여행이 곧 빡빡한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인 도시내기들에게 기실 여행은 자유와 진배없음에도 우리는 종종 자유는 마치 여행에서 거저 주어지는 덤인 양 생각한다. 그러나 여행에서의 자유는 덤이 아니라 여행의 전부였음을 뒤늦게 깨닫곤 한다. 자유가 없는 여행은 그야말로 '앙꼬없는 찐빵'이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것을 보기 위해 떠나는 여행의 스케줄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빈 시간'이 핵심이라는 건 모순이 되는 느낌도 없지 않지만...

 

지난주에는 연예계 쪽에 몸담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이 내가 평일에 머무는 숙소에서 하룻밤을 묵고 갔다. 마침 내가 사는 지역으로 출장을 왔다가 오랜만에 얼굴도 볼 겸 겸사겸사 찾아왔던 것인데 어쩌다 보니 시간도 늦고 하여 내게 하룻밤 신세를 진 것이다. 전작이 있었던지 친구는 자신이 사온 소주 몇 잔에 벌써 혀 꼬부라진 소리를 했다. 헝클어진 눈빛과 풀어진 옷매무새의 친구는 세간에 알려지지 않은 연예계 뒷얘기며 대중이 알지 못하는 그쪽 분야 사람들의 고충에 대해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TV를 보지 않는 나로서는 그닥 관심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하는 내용인지라 대꾸도 없이 그저 간간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나마 관심이 있었던 건 다양한 분야에 종사하는 온갖 연령대의 사람들을 만나야만 하는 그들도 관계에서 오는 심한 스트레스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즐기기는커녕 그것으로 인해 고통을 받는 까닭에 제 스스로 관계를 아예 차단하거나 마음에 드는 몇몇 사람만으로 관계를 축소하는 연예인이 점차 늘고 있다고 친구는 말했다.

 

만남이 일상이자 직업인 그들도 관계맺기를 두려워한다면 우리와 같은 일반인들이야 오죽하랴 싶었다. 과학기술의 발달로 소통의 창구나 속도는 과거에 비해 획기적으로 늘었지만 만남 그 자체를 즐기지 못하고 오히려 고통만 호소한다면 과학의 발달이 시나브로 고독을 유발하는 셈이지 않은가. 자발적으로 고독을 선택하고 또 한편으로는 견디기 힘든 외로움을 호소하게 되는 딜레마. 만남 자체를 즐겼던 게 그리 오래 전의 일도 아닌데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까 생각하니 괜스레 울적해졌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매일이, 여행>을 읽었던 오늘, 불콰해진 얼굴로 횡설수설 이야기를 이어가던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작고 소소한 것에서 자신이 발견한 보석 같은 깨달음을 담담한 필체로 써내려 간 이 책은 우리가 잃어가고 있는 소중한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여행이란 참 묘한 것이다. 여행하는 동안은 저절로 자신의 몸 컨디션에 중점을 두게 된다. 일상 생활에서는 그렇지 않다. 대개 정신에 중점을 둔다. 그만큼 긴장하고 날카롭게 신경이 곤두서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여행에서 돌아와 여행 중에 찍은 사진을 보면 그런 육체적인 피로감이나 혹독한 날씨의 흔적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또 산들 부는 상쾌한 바람과 햇살의 감촉도 상실되어 있다. 그저 아름다운 경치가 소리 없이 거기 서 있을 뿐이다." (p.53)

 

작가는 자신이 방문했던 세계 여러 나라의 풍경과 일상으로 복귀해서 만나는 여행지의 추억을 소개하고 있다. 남미의 짙은 녹음과 강렬한 햇살을 되살리는 마테차, 서쪽을 향해 툭 떨어지는 나일 강의 낙조와 밤의 풍경 등 생각지도 않은 지점에서 툭툭 불거져 나오는 작가의 추억 한토막이 나로 하여금 새삼 추억에 젖게 했다. 추억이란 일상이 던져주는 우연과 같은 선물이라는 듯 말이다.

 

하나 신기할 것도 없는 작가의 글이 뭉근하게 가슴을 파고 들었던 이유는 따로 있는 듯했다. 우리가 일상에 치여 서서히 잊어가고 있는 것들, 예컨대 하늘에서 무수히 떨어지는 꽃잎 같은 도쿄의 눈을 질리도록 바라보았던 고요한 새벽이나 비 내리는 거리를 한없이 걸어 머나먼 곳까지 갈 수 있을 것 같았던 첫사랑의 추억 등이 겨울로 가는 시린 계절을 한결 따뜻하게 해주는 듯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의 6년간이라, 지금의 10년에 해당할 정도로 농밀한 시간의 흐름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긴 시간 동안, 한 번도 좋아한다는 감정이 흔들리지 않았으니 그 사람은 매력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p.220)

 

소설가가 된 후에도 웨이트리스 아르바이트를 했던 가게의 점장과 10여 년 동안 모임을 가졌던 추억과 암으로 세상을 떠난 점장을 추억하는 작가, 열두 살 나이에 작가와 이별한 사랑하는 개. 작가는 우리가 필연적으로 겪을 수밖에 없는 상실의 고통으로부터 관계와 죽음에 대해 생각하기도 한다. 비 내리던 밤 개와 함께 마지막으로 산책을 했던 그 순간을 작가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 비 내리던 날, 가장 슬펐던 날, 사랑하는 개의 영혼이 내게 작별을 고하려 왔다는 것을, 나는 분명하게 느꼈다고 생각한다. 그전까지는 앞으로 반년은 버텨 줬으면 좋겠다고 절실하게 기도했지만, 그날 '이제는 더 힘을 낼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아. 하지만 헤어지는 건 슬퍼.' 하는 것이, 말로서가 아니라 그냥 절절하게 전해졌다." (p278~p279)

 

어른이 된다는 건 마치 그 모든 고통을 담담히 이겨낼 수 있을 만큼 강인한 정신력을 갖추는 것이라고 착각하며 사는 게 인생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겨우 견딜 수 없는 것과 아무렇지도 않게 견딜수 있는 것을 간신히 구분할 수 있을 뿐인데 말이다. 안 되는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다는 걸 담담히 받아들일 나이가 되면 저 헐벗은 가로수 나목의 쓸쓸한 풍경도 그저 묵묵히 바라볼 수 있게 될까? 바람이 마른 가지를 크게 흔드는 살풍경한 오늘, 요시모토 바나나의 글이 마음을 요동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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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내려앉은 새벽 숲길은 차라리 강(江)이다. 산길을 걷다 보면 강물 위로 뿌옇게 번지는 새벽 물안개처럼 생각의 운무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몸은 오롯이 어둠에 묻은 채 앞서 가는 시선만 간신히 플래시 불빛의 좁은 동심원 속에 우겨넣는다. 등 뒤의 어둠은 아주 어릴 적 동네 형들로부터 들었던 무서운 이야기들을 한 보따리 메고 따라오면서 이따금씩 이야기 한 토막을 풀어놓곤 한다. 나는 어둠이 들려주는 무시무시한 이야기에 오싹한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고 옛 추억에 젖어 모든 걸 다 잊기도 한다. 등에선 식은땀이 흐르고, 머리털이 쭈뼛 서다가도 플래시 불빛에 놀란 꿩이 푸드덕 날아 오를 때마다 슬몃 미안해진다. 어둠을 배경 삼아 어룽어룽 달빛이 새긴 산길 그림을 밟으며 한 발 한 발 걷다 보면 어느새 정상이 눈앞이다. 누군가 올려다 놓은 나무 벤치에 앉아 잠시 숨을 고른다. 산 아래 펼쳐진 도시의 야경. 저 멀리 보이는 주택가 불빛이 따사롭다.

 

부쩍 추워진 아침 기온 탓인지 산을 오르는 사람들도 많지 않다. 인적이 끊긴 아침 산길은 괴괴하다. 취향이나 기호로 따질 문제는 아니지만 나는 겨울 산행을 더 좋아한다. 인적이 끊긴 산길을 걷다 보면 반가운 추억들을 만나게 된다.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기억들과 잊혀진 얼굴들. 무작위로 떠오르는 시 한토막.

 

물안개

              

-류시화-

 

세월이 이따금 나에게 묻는다.

사랑은 그후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안개처럼

몇 겁의 인연이라는 것도

아주 쉽게 부서지더라.

 

세월은 온전하게 주위의 풍경을

단단하게 부여잡고 있었다.

섭섭하게도 변해버린 것은

내 주위에 없었다.

 

두리번거리는 모든것은 그대로였다.

사람들은 흘렀고

여전히 나는그 긴 벤치에 그대로였다.

 

이제 세월이 나에게 묻는다.

그럼 너는 무엇이 변했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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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7-11-11 1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쥐 님 글은 저 멀리 떠나가 있던 기억들을 불러냅니다. 그래서 여운이 길게 남아요.

꼼쥐 2017-11-14 17:09   좋아요 0 | URL
가을이 깊어지니 마음도 감상적으로 변하는가 보네요. ㅎ
 
마왕 Isaka Kotaro Collection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소영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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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한테 한 문장만 주면 누구든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라고 했던 파울 요제프 괴벨스(Paul Joseph Goebbels)의 말을 들어본 적 있는지요. 맞습니다. 나치 정권의 선동가로서 그는 히틀러를 최고의 권위에 올려놓은 일등 공신이기도 했습니다. 미디어를 통한 대중 선동을 논할 때 가장 먼저 언급되는 인물이기도 하지요.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천재 선동가'로 평가받고 있는 괴벨스에 대해 그의 개인 속기사였던 오토 야콥스는 "그는 결코 성급하지 않았다. 주도면밀하고 냉철했다. 얼음처럼 차가웠고 악마적이었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우니베르줌 필름 주식회사를 구입하는 등 영화산업을 사실상 국유화하고 당시에 대중 선동에 있어 가장 중요한 선전 도구로 간주되었던 라디오 방송국을 장악하기도 했지요.

 

국정원이나 군 사이버사령부를 동원하여 댓글 공작을 지시하고 공영방송 KBS와 MBC를 정권의 선전도구로 활용하고자 했던 박근혜, 이명박 정권의 실상을 뉴스에서 접할 때마다 나는 나치 체제의 괴벨스를 떠올리곤 합니다. 역사는 반복되는 거라고는 하지만 그들은 어떻게 역사적으로 지탄을 받는 괴벨스를 모방하려고 했을까요. 그것도 우리의 선조도 아닌 먼 나라의 오래 전 인물을 말이지요. 그들이 저질렀던 일들이 괴벨스가 생각하고 실천했던 것과 어쩌면 그렇게 판박이로 닮아 있는지 섬뜩한 느낌에 소름이 돋기도 합니다. 게다가 광우병 촛불집회 즈음에 SNS에 올렸던 한 줄 문장으로 인하여 영화계에서 10여년 동안 철저히 배제되었던 어느 여배우를 생각할 때, '나한테 한 문장만 주면 누구든 범죄자로 만들 수 있다.'고 했던 괴벨스의 말이 현실에서 되살아난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습니다. 권력자는 누구나 자신의 뜻과 생각이 국민들에게 일사분란하게 전달되고 어떠한 반대 의견도 없이 신속하게 이행되기를 바라겠지요. 권력자도 인간이기에 그런 유혹에 항상 이끌릴 수밖에 없다는 걸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닙니다. 다양한 의견이 상존하는 민주주의 체제에 무력감을 느끼는 권력자라면 괴벨스의 본보기는 그야말로 참을 수 없는 유혹이겠지요. 그러나 권력자가 국민의 생각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겠다는 발상은 민주주의를 부정하고 전체주의로 회귀하겠다는 선언이나 진배없기에 현명한 국민이라면 권력자의 의도를 끝없이 의심하여야 마땅하겠지요.

 

이사카 고타로의 소설 <마왕>은 이러한 주제로 쓰였습니다. 소설에는 감성적인 언어와 탁월한 연설 실력으로 이탈리아 국민을 전체주의로 이끌었던 무솔리니와 비견되는 정치인 이누카이가 등장합니다. 텔레비전에서 신예 정치인 이누카이의 연설을 우연히 듣게 된 안도는 그가 위험 인물임을 직감합니다. 단테의 시를 인용하며 이탈리아 국민들의 감성적인 정서를 파고들었던 무솔리니처럼 이누카이 또한 미야자와 겐지의 시를 인용하여 자신의 지지세를 넓혀갑니다. 이누카이는 단호한 어법과 탁월한 정보력으로 어느 토론에서건 상대 토론자를 압도합니다. 그에 따라 그를 지지하는 국민들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갑니다. 이누카이의 목표는 명확합니다. 평화헌법의 개정이었지요.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본은 미국이라면 설설 기었지. 미국한테 왜 군대를 파견하지 않느냐는 꾸지람을 듣고는 쩔쩔매기나 하고. 그때 단호한 태도로 '이건 미국이 만든 헌법이 아닌가? 어떻게 자위대를 해외에 보내란 말인가. 자업자득이지!' 하면서 딱 잘라 거절할 배짱도 없었어. 골목대장의 눈치를 살피는 코흘리개처럼 어떻게든 미국의 비위를 맞추고 싶어햇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돈만 내고 있을 수는 없다고 변명했지만 나는 어디까지가 진심인지, 무슨 생각으로 그러고 있는지 의문이었어. 그저 대장의 질책에 견디지 못했던 것뿐이 아닐까, 그건." (p.204~p.205)

 

안도에게는 남들에게는 없는 특별한 재능이 있습니다. 30보 이내의 거리에서는 자신의 의도대로 다른 사람의 말을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이었습니다. 거리가 너무 멀거나 TV 속의 인물에게는 통하지 않는 보잘것없는 능력이지만 말이죠. 어렸을 때 부모님을 여의었던 안도는 결혼한 동생 준야와 그의 아내 시오리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학창시절부터 생각이 많았던 안도와는 달리 준야는 형의 의견이라면 무조건 옳다고 믿고 따랐습니다. 골똘히 생각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죠. 소설은 1부 '마왕/형 안도의 이야기'와 2부 '호흡/동생 준야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고 1부에는 주로 안도 주변의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안도의 직장 동료와 고등학교 동창 시마, 안도가 자주 찾는 카페 '두체'의 지배인 등이 주요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안도가 평범한 소시민으로서 이누카이에 저항하는 인물이라면 시마는 시류에 휩쓸리는 생각이 없는 보통의 소시민으로서 이누카이의 지지자입니다. '두체'의 지배인은 이누카이의 열혈 지지자로서 보이지 않는 위험으로부터 이누카이를 지켜주곤 합니다. 안도가 이누카이에 대항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두체'의 지배인은 안도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그럼 민주주의는 선인가? 민주주의는 몇 명을 죽였지? 사회에는 곱게 자라서 콧대만 높아진 젊은이와, 오직 자신한테만 관심이 있는 인간들만 등장했어. 인터넷을 통하지 않으면 사회와 접촉하지 못하는 녀석들뿐이야. 정보로 머릿속을 마비시키고 있어. 주택가에서는 끊임없이 아이들이 유괴를 당할 처지에 놓여 있고, 10대들 사이에 성병이 만연하고 있지. 과연 이 세상이 올바른 세상인가?" (p.132)

 

'나는 고찰하는 것을 좋아한다. 아니, 좋아한다기보다는 거창하게 말하자면 산다는 것은 곧 고찰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는 안도는 이누카이가 하는 거리 연설에서 자신의 초능력을 이용하려 합니다. 이누카이로 하여금 엉뚱한 말을 하게 함으로써 국민들의 신뢰를 잃게 만들려는 의도였지요. 그러나 안도의 계획은 '두체' 지배인에 의해 무산되고 오히려 안도 자신이 뇌일혈로 사망하게 됩니다.

 

"엉터리라도 좋으니까 자신의 생각을 믿고 나간다면."

"나간다면?"

"그렇게 하면 세상이 바뀐다. 형은 그렇게 말했어." 준야는 깨어 있으면서도 잠꼬대를 하는 것만 같았다.(p.293)

 

안도가 이누카이의 거리 유세 현장에서 어이없이 죽은 후 준야와 시오리는 도쿄를 떠나 센다이로 이사합니다. 죽은 안도의 영혼이 그들 두 사람을 돌보았던 까닭인지 준야에게는 뜻하지 않았던 행운이 찾아옵니다. 1/10 이상의 확률에서는 어떤 게임에서든 결코 지는 법이 없는 능력을 지니게 된 것이죠. 가위바위보든 경마든 말입니다. 센다이로 이사할 때만 하더라도 준야는 아주 쉽게 일자리를 구했고, 안도가 죽은 후 TV조차 없애버린 그들 부부는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둔 채 유유자적 살아갑니다. 그리고 준야는 멸종 위기 맹금류를 관찰하는 그의 일에 만족하는 듯 보였습니다.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고 머리를 뒤로 젖혀 내 머리 위의 하늘을 바라봤다. 하늘이 펼쳐져 있다. 느릿하게 흐르는 흰 구름 조각을 보고 있자니 모래시계에서 흘러내리는 모래를 보고 있는 듯한 안도감이 느껴져 어깨에서 힘이 빠지고 뻣뻣한 몸이 풀린다. 전방을 보면 삼나무가 들어찬 작은 산이 태평스럽게 위엄을 자랑하고 있다. 시간 감각이 없어진다. 당연하지만 정치도 사회 문제도, 국민투표를 둘러싼 논쟁도 이곳에서는 사라지고 없었다. 나와 준야와 매, 그리고 논의 벼이삭과 개구리가 있을 뿐이었다." (p.258)

 

가위바위보에서 늘 이기기만 하던 준야는 자신의 능력을 테스트하기 위해 시오리와 함께 경마장을 찾습니다. 그는 겁도 없이 1등마에게만 베팅하는 단승식 마권을 구입합니다. 딴 돈을 모두 베팅하는 방식으로 마권을 사다 보니 돈은 어느새 거액으로 변해 있었고 준야와 시오리는 그 돈 전부를 1/12 확률의 단승식 마권에 최종 베팅을 합니다. 그러나 모두 잃고 말았지요. 준야의 능력은 1/10 이상의 확률에서만 승산이 있다는 걸 몰랐었던 것입니다. 형의 고등학교 동창인 시마를 만나 세상을 바꾸려면 돈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를 들은 준야는 도쿄를 오가며 돈을 모으는데...

 

소설에서 안도는 '인간이란, 더구나 머리가 좋은 놈일수록 평화나 건강 같은 걸 촌스럽게 생각한다고. 그렇게 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댓글공작을 지시했던 이전 정부의 권력자들은 북한과의 평화나 국민의 건강 모두 뒷전이었죠. 그들은 아마도 머리가 좋은 사람이었던가 봅니다. 누군가로부터 들은 한 줄의 문장만으로도 평범했던 한 사람을 회복할 수 없는 범죄자로 만들 수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문제일 뿐 역사는 정의를 향해 수렴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미처 몰랐던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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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입동, 겨울은 아직 저만치 멀기만 한 듯한데 달력은 이미 겨울을 알리고 있다. 며칠 전 고등학교 동창 모임에서는 송년 모임 일정과 약속장소를 알려왔다. 다음달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하는 국립발레단의 '호두까기 인형'을 관람하자고 했다. 벌써 1년이 다 간 느낌이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방한이 예정되어 있는 오늘, 세상에는 트럼프처럼 다양한,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특이한 사람들이 많이도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정치권에서는 대개 국정감사와 내년도 예산 심사를 끝으로 한 해를 마감하게 되지만 생방송으로 중계되는 국정감사 현장을 보고 있노라면 국민을 대신하는 국회의원들의 노고에 감사하기보다는 짜증 지수가 절로 높아지게 된다. 혹여라도 어쩌다 본 뉴스에서 자신의 지역구 국회의원이 등장하여 의미도 없는 '뻘~짓'을 하거나 심한 막말로 실검 순위에 오르내리게 되는 경우에는 쥐구멍에 숨고 싶은 건 물론 자신의 손가락을 부러뜨리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나는 올해 그런 경험을 여러번 했다. 그건 순전히 야당 원내대표를 하는 내 지역구의 국회의원 때문이었다. 낮술을 한 듯 불콰해진 그의 얼굴을 볼 때마다 저런 인간을 누가 국회의원으로 찍어줬는지 한심한 생각이 절로 들고 낯을 들고 다니기가 부끄러워진다.

 

어제는 '전희경'이라는 특이한 인간이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았다. 그녀는 어떻게든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려는 듯 별 미친 짓을 서슴지 않았다. 마치 미친 개가 입에 거품을 문 것처럼 말이다. 그녀의 나이를 보건대 대통령 비서실장은 그녀보다 나이도 많고, 그녀는 군부독재가 자행되던 80년대 대한민국의 실상을 잘 알지도 못할 터인데, 게다가 독재에 저항했던 많은 시민들의 희생을 직접 목격했던 것도 아닐 터인데 그분들의 숭고한 희생에 감사는 하지 못할망정 케케묵은 이념 논쟁으로 국감장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더욱 가관인 것은 그녀가 속한 자유당의 행태였다. 사과는커녕 그녀의 도를 넘은 막말이 '야당으로서는 할 수 있는 질문이고 많은 국민이 공감하는 질의내용'이라고 했다. 도대체 어떤 미친 사람이 그녀의 말에 공감하는지 묻고 싶다.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인간이 산다. 이 좁은 땅덩어리에도 '전희경'과 같은 특이한 인간이 존재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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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것들 - 손미나의 사람, 여행
손미나 지음 / 씨네21북스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손미나의 작품을 읽은 건 이번이 세 번째다. 남들이 들으면 손미나의 애독자라고 할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실상은 아주 달라서 나는 그녀의 작품에 그닥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그럼에도 다른 유명 작가의 작품을 제쳐두고 그녀의 작품을 벌써 세 권씩이나 읽었으니 우연 치고는 묘한 인연이 아닐 수 없다.

 

2006년 발간된 <스페인, 너는 자유다>를 읽었을 때 나는 KBS 아나운서였던 저자의 이력에 끌렸던 게 사실이었지만 책에서 보여준 저자의 자유분방함과 솔직함이 꽤나 인상적이이라고 느꼈다. 기회가 되면 그녀의 작품 한두 권쯤 더 읽어도 괜찮겠다고 막연히 생각했었는데 지난해 초에 <페루, 내 영혼에 바람이 분다>를 우연히 읽게 되었다. 그러나 두 번째 읽은 그녀의 여행기에서는 <스페인, 너는 자유다>에서 보여준 솔직하고도 자유분방한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다. 어느 여행기에서나 읽을 수 있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들이 주였다. 두 번째 여행기를 읽고 어지간히 실망했던 내가 같은 작가의 작품을 다시 손에 잡게 될 줄이야. 아무튼 나는 우여곡절 끝에 손미나의 작품을 세 권째 읽었다.

 

<여행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것들>은 일반 여행기가 아니다. 여행과 인연이 깊은 열네 명의 인물을 선택하여 저자가 인터뷰한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손미나의 사람, 여행'이란 부제가 붙은 이 책은 홈스쿨링을 하는 십대의 소년에서부터 칠십대의 세계장신구박물관 관장에 이르기까지 연령도, 직업도 다양한 사람들이 여행에 대한 자신만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열네 명의 여행자를 만나 대화하는 것은 내게는 또 다른 여행과 같았다. 여행이 줄 수 있는 설렘과 호기심, 통찰과 지혜를 대화를 통해 선물 받을 수 있었으니. 그들이 이야기하는 여행이란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 다름을 알고 인정하며, 몰랐던 자신의 뒷모습을 마주하며, 다시 돌아올 일상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것, 그렇게 자기만의 우주를 넓혀가는 일이었다." (p.6)

 

저자가 만난 사람은 나영석 피디, 가수 윤상, 개그우먼 송은이, 개그맨 김영철, 팝페라 가수 임형주, 영화감독 류승완, 로봇공학자 데니스 홍, 배우 엄지원 등 누구나 아는 유명인뿐 아니라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최인아, 열여섯 살 소년 임하영, 세계장신구박물관장 이강원, 국제변호사 이소은, 역사 여행가 권기봉 등 다소 생소한 인물들도 등장한다. 사실 인터뷰의 생명은 인터뷰이로부터 솔직하고도 진정성 있는 답변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터뷰어와 인터뷰이의 친밀도도 중요하겠지만 인터뷰어의 적절한 질문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핵심을 찌르는 질문과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가도록 하는 인터뷰어의 능력이야말로 좋은 인터뷰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다.

 

"혼자서 자율적으로 책을 읽는 것이 그동안 해왔던 공부의 방식인데, 어떤 책을 읽었는지 소개해주시겠어요?

초등학교 때는 주로 소설이나 판타지를 많이 읽었는데요,『나니아 연대기』나 미하엘 엔데 작가도 좋아했어요. 중학교 때는 책을 계속 읽다 보니까 관심 가는 분야가 생기더라곤요. 홍세화 선생님이나, 박노자 선생님, 장하준 교수님 책들도 재미있게 읽었고, 외국 작가는 인문학 경우는 노엄 촘스키, 하워드 진, 문학 경우는 조지 오웰……" (p.43)

 

흔히 인생을 여행에 비유하곤 한다. 또는 등산에 비유하기도 한다. 비유의 대상이 무엇이든 인생은 그 자체로서, 여행이나 등산을 품 안에 아우르면서 끝을 향해 나아간다. '삶이 소중한 이유는 언젠가 끝나기 때문'이라고 햇던 카프카(Franz Kafka)의 말처럼 여행이 소중한 이유는 여행의 끝이 존재하고 언제든 돌아갈 수 있는 일상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여행을 통해서 '나에게 솔직해져야겠다는 것'을 깨우쳤다는 나영석 피디나 페루 여행을 통해 자신의 뒷모습을 보게 되었다는 가수 윤상의 말처럼 우리는 낯선 여행지에서 자신의 본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인생이 곧 영화와 같고 영화 자체가 일종의 여행인 것 같아요. 그래서 사람과 인생을 다루는 영화와 여행은 아주 잘 어울리는 테마인 것 같아요.

한국 제목으로 <아메리카의 밤 La Nuit Americaine>이라는,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이 만든 영화가 있는데요, 영화 만드는 과정에 관한 영화예요. 트뤼포 감독이 실제로 극중 감독으로 출연하기도 하는데요, 그 영화 오프닝은 지금 말씀하신 것처럼, 영화 만드는 것을 여행에 비유하는 내레이션으로 시작해요. 영화 만들기란 역마차 여행과 같다. 처음 출발할 때는 모두가 들떠 여행을 기대하지만 여행의 중간을 지나면 지치기 시작하고 끝날 때쯤 되면 모두가 제발 이 여행이 빨리 끝나기를 바란다. 그런데 여행이 끝나는 그 순간 다시 또 여행을 떠나고 싶어한다. 그런 측면에서 영화 만들기는 역마차 여행과 비슷하다고 표현하거든요." (p.356)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 노력에 의해 그럴 것이라고 막연히 추측했던 일들이 하나둘 사실로 밝혀지거나 설마 그렇게까지야 반신반의했던 것들조차 확연한 증거나 증언을 통해 입증되고 있는 요즘, 나라 같지도 않은 나라의 시스템으로도 망하지 않고 버텨온 게 더 이상하게 생각되는 요즘, 그럼에도 그들의 결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제 목소리를 내는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게 되는 요즘, 여행은 분명 그 모든 게 보기 싫어서 떠나는 것은 아닐 터,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망명이지 여행은 아닐 것이므로. 여행이 아니면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는 것처럼 드러내놓고 확인하지 않으면 영원히 고쳐지지 않는 것들이 있음을 우리는 지난 정부로부터 배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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