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소설(小雪), 이맘때면 살얼음이 잡히고 땅이 얼기 시작한다죠. 아침부터 흐렸던 날씨는 이따금 비를 뿌리기도 했습니다. 오는 듯 마는 듯 가늘었던 빗줄기는 가을비의 낭만과는 한참이나 멀어보였습니다. 옷깃을 파고드는 한기에 뜨끈한 아랫목 생각이 간절했었죠. 오늘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거 2주기이도 하더군요. 대한민국 민주화의 한 축을 담당했던 지도자인 동시에 문민정부 말기 IMF 경제위기를 촉발시킨 당사자이기도 했던, 어찌 보면 그 분은 영욕의 삶을 살다 가시지 않았나 싶습니다.

 

어제 점심시간에는 밥이나 같이 먹자며 친구 한 명이 찾아왔었습니다. 말인 즉 지나던 길에 들렀다고는 하는데 일부러 찾아온 티가 역력했습니다. 사람 좋아하고 놀기 좋아하는 그가 어떤 볼일이 있어야만 오는 건 아니지만 그의 표정이나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전과는 달라보였습니다. 그의 차에 올라타자 그는 시 외곽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내 대답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붕어찜이나 먹으러 가자는 것이었습니다. 식탐은 고사하고 식사는 그저 생명 유지를 위한 영양공급의 한 방법일 뿐이라고 믿는 나로서는 밥 한끼 먹자고 멀리까지 가겠다는 그의 발상이 영 탐탁지 않았지만 운전은 그가 하고 있었으니 달리 방법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죠.

 

시골집 분위기가 나는 어느 식당으로 나를 안내했던 그는 붕어찜을 잘하는 유명한 맛집이라면서 생색을 내더군요. 밥이 나오고 통통하게 살이 오른 큼지막한 붕어가 식욕을 자극하였습니다. 늦어진 점심을 허겁지겁 먹고 있는데 친구는 대뜸 "나 이제 한화 팬클럽에서 탈퇴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야구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광적인 애착을 보였던 그가 팬클럽을 탈퇴했다는 건 빅뉴스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한화 이글스 팀이 꼴찌를 할 때에도 그는 아내의 눈치를 봐가며 원정경기 응원을 가곤 했었습니다. 아무리 먼 곳에서 하는 경기도 놓치는 법이 없었죠. 심지어 전지 훈련지를 보기 위해 일본도 여러 차례 다녀왔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야말로 한화 이글스의 열성팬이었던 그가 팬클럽을 탈퇴했다기에 "왜? 만년 꼴찌팀을 응원하는 것도 이제 지쳤냐?" 했더니 그게 아니라 한화 이글스 선수 중 한 명이 Sns에서 진상짓을 한 것으로도 모자라 한화 그룹 오너의 아들이 또 갑질을 했다면서 그런 기업의 지원을 받는 구단이 오죽하겠냐는 게 그의 대답이었습니다. 이제 다른 팀을 응원하거나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야구계를 영원히 떠나야겠다며 쓸쓸해 하는 눈치였습니다.

 

야구를 직접 하는 건 싫어하지 않지만 멀뚱히 지켜보는 건 그닥 취미가 없는 나로서는 그의 마음을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니 자연 말이 없어질 뿐이었죠. 달리 위로할 마땅한 말도 떠오르지 않았고요. 일찌기 부모를 여읜 그는 물려받은 재산으로 한량처럼 살고는 있지만 어쩌면 그는 공허한 마음을 야구에서 풀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를 데려다주고 돌아서던 그의 뒷모습이 왠지 짠해 보였습니다. 오늘 하늘은 우중충하니 어둡고 오락가락 가을비가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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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 (밀리언 특별판) - 20년 연속 와튼스쿨 최고 인기 강의
스튜어트 다이아몬드 지음, 김태훈 옮김 / 8.0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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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을 읽고 난 후의 생각이나 느낌은 사람에 따라 다 다를 수 있다지만 책을 쓴 저자는 이러한 독자들의 생각을 전해들었을 때 과연 어떤 느낌일까? 아무리 하찮고 어리석은 생각일지라고 그럴 수 있지, 생각하며 오롯이 독자의 권리로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저자가 의도했던 주제와는 상당히 동떨어진 생뚱맞은 견해를 제시했을 때에도 말이다.

 

스튜어트 다이아몬드(Stuart Diamond) 교수가 쓴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Getting More)>를 읽고 난 후 나의 느낌은 뭐랄까, 다소 엉뚱한 것이었다. 변호사와 컨설턴트로 활동하며 협상 전문가로도 널리 알려진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했다. 효과적인 협상 전략과 수법으로 자신이 원하는 바를 협상 상대방으로 이끌어내는 것,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가 배우고 익혀야 할 협상의 속성과 기법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저자는 여러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내게 문득 떠올랐던 생각은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누구나 협상 전문가가 될 수만 있다면 세상은 정말 평화로운 곳이 되겠구나' 하는 것이었다. 저자가 제시하는 협상에 필요한 여러 방법이나 기술은 차치하고라도 저자는 협상의 상대방에 대한 이해, 즉 사람에 대한 이해를 우선시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즉 협상을 잘하기 위해서는 사람을 이해하고 꾸준한 연습과 인내가 필요하다는 점을 저자는 누누이 강조하고 있었다.

 

"협상이 실패하는 가장 큰 원인은 의사소통의 실패다. 그리고 의사소통이 실패하는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인식의 차이다. 그렇다면 인식 차이가 생기는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람마다 관심사와 가치관 그리고 감성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인식 체계에 맞지 않는 정보들은 무시한다. 그리고 협상을 할 때 자신의 시각을 뒷받침하는 정보를 선택적으로 수집하고 기억한다. 인식 차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거의 모든 갈등의 주요 원인이다. 그래서 인식 차이가 갖는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p.67)

 

책의 구성은 Part 1 '통념을 뒤엎는 원칙들', Part 2 '원하는 것을 얻는 비밀'로 비교적 단출하고 명확하지만 제1강에서 제16강에 이르는 그의 강의는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 협상에는 언제나 협상 파트너가 있게 마련이고 때에 따라서는 제3자가 개입하기도 하기 때문에 사람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지 않고서는 아무리 좋은 협상 전략과 협상 내용을 구비한다 할지라도 자신이 의도했던 성공적인 협상으로 이끌기 어렵다는 게 저자의 설명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원하는 것을 얻는 협상 모델을 위한 열두 가지 전략' 목록만 보더라도 저자가 어떠한 관점으로 협상을 이해하고 있는지 어렴풋하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 목표에 집중하라, 2. 상대의 머릿속 그림을 그려라, 3. 감정에 신경 써라, 4. 모든 상황은 제각기 다르다는 것을 인식하라, 5. 점진적으로 접근하라, 6. 가치가 다른 대상을 교환하라, 7. 상대방이 따르는 표준을 활용하라, 8. 절대 거짓말하지 마라, 9. 의사소통에 만전을 기하라, 10. 숨겨진 걸림돌을 찾아라, 11. 차이를 인정하라, 12. 협상에 필요한 모든 것을 목록으로 만들어라, 이와 같은 목록에서 알 수 있듯이 협상은 줄곧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이해로 이루어진다. 그러자면 자신의 감정을 절제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가치관과 다른 사람의 시각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져야만 한다.

 

"가족을 제외한 모든 인간관계는 일시적 만남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잠시 스쳐가는 인연이라도 그 사람에게 정성을 들이면 장기적인 인간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풍부한 인간관계는 삶에 더 많은 것을 안겨준다. 그러니 주위를 둘러보고 시간과 에너지가 허락하는 대로 가능한 한 많은 대화를 나누어라. 그러면 평생에 걸쳐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p.313)

 

상대방에 대한 적극적인 이해와 배려는 진심이 담기지 않은 의례적이거나 통상적인 그것과는 구별된다. 내게 손해가 되지 않는다면 나를 진심으로 위하고 배려하는 사람에게 끌리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자면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고 오로지 상대방의 관점에서 문제를 관찰하여야 한다. 그것은 결코 쉬운 노릇이 아니다. 말하자면 감정에 좌지우지 되지 않을 만큼의 정신적 수양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언론을 통해 보도된 바가 있지만 지난 정권의 대통령조차 국방부 장관에게 지시하기를 '우리 편을 뽑아라'고 했다지 않은가. 국민 전체를 아우를 책임이 있는 대통령조차 내편, 네편으로 편가름을 할 지경이니 일반인이야 말해 뭐하겠는가. 단지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기 위해 나와는 정반대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에게조차 진심을 다한다는 건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내가 서두에서 이 책을 읽고 세상 모든 사람들이 협상 전문가가 된다면 세상은 정말 평화로운 곳이 될 거라고 말한 이유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무인도에서 혼자 살아가지 않는 한 우리의 삶은 협상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아이들이 내 말에 자발적으로 따르게 만드는 것도 협상이요, 배우자를 설득하는 것도 협상이다. 우리는 협상 없이 한시도 살아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협상에 번번이 성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협상에 실패하고도 기분이 좋다고 말할 사람도 물론 없을 것이다. 실패한 협상을 이끈 두 사람이 협상 후에도 좋은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한다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다. 결국 협상의 실패는 세상을 갈등과 긴장 국면으로 이끌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협상을 성공으로 이끌어 원하는 것을 얻는다는 건 결국 상대방을 이기는 게 아니라 나를 이기는 것은 아닐런지. 한 해를 마무리짓는 이맘때면 나 자신을 뒤돌아보게 된다. 나는 올 한해 나를 이기는 일에 얼마나 소홀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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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한점 없는 드맑은 하늘입니다. 거리에는 사람의 발길도 뚝 끊긴 듯 한산하고 도시의 텅빈 공간을 거침없는 바람만 내달립니다. 가을에서 겨울 쪽으로 한 발 더 다가선 듯한 만추의 햇살이 으스스한 도시에 한 줌 온기를 더하는 오후, 스튜어트 다이아몬드의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를 읽었습니다. 거실창으로 비껴드는 부드러운 햇살에 책은 몇 쪽 넘어가기도 전에 까무룩 잠에 빠져들고, 잠에 취해 나도 모르게 머리를 끄덕이다 어느 순간 퍼뜩 잠에서 깨어서는 몇 번 머리를 흔들어 봅니다. 한 번 달라붙은 잠은 좀체 떨어질 줄 모릅니다.

 

밖은 벌써 어둑어둑 땅거미가 지고 있습니다. 내 손을 벗어나 소파에서 뒹굴고 있는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와 다음에 읽으려고 티테이블에 올려놓았던 <소설, 여행이 되다>와 <칼과 혀>는 나와 함께 가을 햇살만 쐰 채 저녁을 맞고 있습니다. 내게 한 약속이란 얼마나 가벼운 것인지요. 생각해 보면 나의 기준으로 세상을 보던 때가 있었습니다. 나는 되는데 너는 왜 못하느냐는 식의 비난이나 비아냥이 주가 되기도 했었던, 타인의 입장에서 나는 성질머리가 고약한 사람으로 비쳤을지도 모르는 그런 시기였습니다.

 

영혼의 성장이란 타인의 입장을 이해하고 열린 마음으로 누군가의 말에 귀 기울일 준비가 되었을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나만의 기준, 아집, 편견에 사로잡혔을 때는 진심어린 충고나 귀중한 교훈도 그저 바람소리인 양 스쳐갈 뿐이죠. 약간의 게으름이 하루의 당연한 일상인 양 이해되는 요즘, 저는 이제야 비로소 배울 준비가 된 듯합니다. 저에게는 배움의 시작인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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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남 오빠에게 - 페미니즘 소설 다산책방 테마소설
조남주 외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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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사라졌나 모르지만 내가 군에 입대했던 시절, 고참이 된 군인들은 흔히 후임 병사들을 향해 '본전 생각난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내뱉곤 했다. 이 말인 즉 자신이 신병이었을 때는 지금보다 군기도 세고 고참들의 괴롭힘도 훨씬 심했는데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고 있으니 자신의 군대 생활은 뭔가 밑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는 의미였다. 이 말과 함께 '(군기가) 빠졌다'는 말도 흔히 들었다. 고참들이 후임 병사를 편하게 대해주는 바람에 병사들의 군기가 예전보다 흐트러졌다는 의미로 쓰이던 말이다. 군대 폭력이 사라지지 않는 주된 이유는 이 두 문장으로 압축할 수 있었다. 자신이 받은 고충을 누군가에게 똑같은 크기로, 또는 더 크게 되갚아야만 속이 후련하지 그렇지 못했을 때는 큰 손해를 본 듯 느껴지는 그릇된 심성, 그것이 갓 입대한 신병들에게 대물림 되듯 전해졌다.

 

페미니즘 소설 <현남 오빠에게>를 읽으며 나는 문득 오래전의 군 생활을 떠올렸다. 시어머니에서 며느리로 이어지는 시집 문화가 군대 문화와 어쩜 그렇게 닮아 있는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하나 다른 게 있다면 군대에서는 상급 부대에서 파견된 사람이 예하 부대의 사병들에게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부당한 대우를 조사하기 위해 이따금 '소원 수리'라는 걸 받지만 며느리에게는 시아버지나 시조부모로부터 행해지는 '소원 수리'가 일체 없다는 점일 것이다. 게다가 군대는 복무 기간만 지나면 제대를 할 수 있지만 며느리는 복무 기간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니...

 

"유진의 할아버지는 효자였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아내를 자기 집안, 자기 어머니의 사노비 보듯 했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아빠는 자랐다. 아빠에게 본인의 어머니는 세상에서 가장 가여운 존재였다. 그는 자기 어머니에게 보상을 해줄 여자를 구했다. 어머니의 모든 짐을 대신 짊어져줄 여자, 어머니를 대신해 집안의 모든 궂은일을 맡아 해줄 여자, 친구 하나 없는 어머니의 말벗이 되어주며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어머니의 생일상을 새벽부터 일어나 차려줄 여자, 떡두꺼비 같은 손자를 낳고 현명하게 키워낼 수 있는 여자, 아빠는 고액 연봉을 받는 파일럿이었고, 그런 여자를 얻을 자격이 있었다." (p.55 '당신의 평화' 중에서)

 

표제작인 조남주 작가의 <현남 오빠에게>를 비롯하여 최은영 작가의 <당신의 평화>, 김이설 작가의 <경년更年>, 최정화 작가의 <모든 것을 제자리에>, 손보미 작가의 <이방인>, 구병모 작가의 <하르피아이와 축제의 밤>, 김성중 작가의 <화성의 아이>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여성작가 7인의 작품을 한 곳에서 만날 수 있다. 남자인 나로서는 '페미니즘 소설'이라는 표지의 글귀가 목에 걸린 생선가시처럼 거북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말이다.

 

<현남 오빠에게>는 무려 십년 동안을 현남 오빠의 여자친구로 지냈던 여자가 그로부터 청혼을 받고 고민하다가 만나기로 했던 단골 카페에서 청혼 거절의 편지를 쓰는 내용이다. 시골에서 상경하여 낯선 도시에서 대학 생활을 시작하게 된 여자가 우연히 만난 현남 오빠로부터 다방면의 도움을 받으면서 사랑을 키워간다. 그러나 친구 지은의 조언과 현남 오빠와의 부딪힘을 통하여 잃었던 자아를 찾아가게 된다. 매번 자신을 가르치려 드는 현남 오빠에게 자신은 그저 의지하고 길들여지고 있었을 뿐 기실 그를 사랑하는 게 아니었음을 아프게 깨닫는 동시에 이별을 결심한다.

 

"저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어요. 오빠가 헤어지자고 할까봐 겁이 났거든요. 오빠의 도움 없이 학교생활을 잘할 수 있을까, 내 일상이 유지될 수 있을까 두려웠습니다. 게다가 저는 '강현남 여자친구'로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었으니까요. 아시잖아요. 캠퍼스커플이 헤어지면 어떤 소문이 도는지, 어떤 시선을 받아야 하는지요. 여자들은 특히 더하죠." (p.21 '현남 오빠에게' 중에서)

 

최은영 작가가 쓴 <당신의 평화>는 결혼을 약속한 남동생 준호가 아빠의 생일에 맞춰 여자친구 선영을 집으로 초대하면서 벌어지는 갈등을 준호의 누나 유진의 시각으로 그린 작품이다. 노예와 같은 시집살이를 대물림하듯 물려받은 엄마 정순을 곁에서 지켜보며 자랐던 유진은 정순의 한탄과 불만을 군말 없이 들어주며 정순의 편에서 딸처럼, 친구처럼 지내왔다. 그러나 예비며느리 선영에게도 자신이 살아온 삶을 고집하려 드는 정순의 모습에 실망한 유진은 모진 소리를 하고 집을 떠난다. 정순은 옳고 그름은 물론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음을 고백한다.

 

김이설 작가가 쓴 <경년更年>은 다소 충격적인 작품이었다. 중학교 2학년인 아들과 초등학생 딸을 둔 '나'는 이제 막 갱년기를 겪고 있다. 아들 세훈은 공부를 잘하는 우등생이다. 학부모 모임에 나갔던 어느날 '나'는 아들 세훈이 같은 학교 여자애들 여럿과 관계를 맺었고, 그것을 통하여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있다는 충격적인 소문을 듣게 된다. 도무지 이 사실을 믿을 수 없었던 '나'는 아들이 관계했다는 여자애들 연락처를 윤서 엄마를 통하여 받는다. '나'는 그애들에게 사과를 하고 싶었지만 남편은 아무일도 아니라는 듯 여자애들이 문제가 많은 애들이라는 식으로 말한다. '나'는 초경을 한 딸을 품에 안고 아들과 관계했던 여자애들을 생각한다.

 

"네가 여자여서, 세상의 온갖 부당함과 불편함을 이제 어린 너와도 나눠 갖게 된 것이 서글프기 때문이라는 걸 말할 수는 없었다. 영문을 모르는 채 내 등을 쓰다듬던 딸아이는 금세 울음을 그치고는 생리대를 혼자 붙여보겠다고 끙끙댔다. 그렇게 어린애였다." (p.119)

 

'페미니즘 소설집'을 표방하는 이 책은 그 외에도 리얼리즘 소설이 아닌 다른 기법, 이를테면 느와르나 SF, 추리소설 기법 등으로 쓰인 여러 작품들이 실려 있다. 독이 있는 연못에서 태어난 물고기는 독의 존재를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얼마나 유해한지 알 수 없다. 남존여비 사상이 팽배한 유교 문화에서 태어난 대한민국의 남자들 또한 부지불식간에 저지르는 자신의 잘못을 미처 깨닫지 못한다. 그것이 이 나라에 사는 많은 여성들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게 하는지도...

 

세상의 모든 편견은 사실을 사실로서 받아들이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 오늘은 옷깃을 여밀 만큼 날이 차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듯 어둡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오늘 날씨를 두고 '을씨년스럽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듯하다.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이 나라에 사는 여성들이 부당한 대우를 받아왔고, 지금도 그러하여 슬프다고 한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사실인 것이다. 사실을 사실이 아니라고 우긴다면 자신만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만다. 단풍나무가 유난히 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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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란 가슴을 쓸어 내렸던 하루였습니다. 휴대전화에 뜬 재난문자는 규모 5.5의 지진이 포항에서 발생했다는 내용이었고, 재난문자를 받고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많은 문자가 오갔으니까 말이죠. 속수무책의 이런 재난을 겪을 때마다 인간은 자연 앞에 정말 아무것도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다 문득, 하느님을 노하게 하는 어떤 일을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저질렀던 건 아닌지 급 반성 모드로 돌아서게 되지요. 서울의 규모가 큰 어느 교회의 목사가 자신의 아들에게 담임 목사 자리를 세습하는 바람에 하느님이 대로하신 건 아닌지, 각종 부정부패로 온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지난 정권의 잘못 때문은 아닌지, 그런 잘못에도 불구하고 '나는 죄가 없다' 뻗대며 정치보복으로 몰고가는 소망교회의 어느 장로 때문은 아닌지 별의별 생각이 스쳐갑니다.

 

오늘 아침, 제가 운동을 나서는 새벽 5시 30분만 하더라도 바람 한 점 없이 참으로 고요했습니다. 고즈넉한 산길을 1시간 넘게 걸으며 내려오는 길에는 사진도 한컷 찍었더랬습니다. 엷게 구름이 낀 하늘 위로 붉은 햇살이 번지는 장면이었지요. 언제나 그렇듯 벅찬 순간이었습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더없이 평화로운 하루가 보장될 줄 알았었지요. 다른 날과 크게 다르지 않은.

 

 

 

교회도, 기업도 오직 규모만 강조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씁쓸한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익이나 욕심을 추구하는 기업의 행태를 신성해야 할 종교가 쫓아간다는 게 얼핏 말이되지 않는 듯 보이지만, 오직 대한민국에서는 예외인 듯합니다. 자유주의 시장원리를 금과옥조처럼 여겼던 지난 정부의 소망교회 어느 장로는 교회마저도 신자유주의 이론을 채택하도록 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수능을 하루 앞둔 오늘, 스산한 바람이 불고 기온마저 뚝 떨어져 으스스한데, 남녘에서 들려온 지진 소식이 마음을 더 무겁게 합니다. 국민들의 지탄을 받는 누군가는 자신의 아들에게 다스를 물려주려 한다는데 저는 '스타워즈'를 좋아하는 아들에게 다스베이더 피규어라도 물려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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