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
콜슨 화이트헤드 지음, 황근하 옮김 / 은행나무 / 201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격변기를 살아온 앞세대의 사람들은 그 고단했던 세월을 무사히 견뎌온 것에 대해 은근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내가 살아온 얘기를 책으로 쓰면 열 권으로도 부족할거야." 하는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산다. 때로는 3박 4일 동안 말로 풀어도 오히려 시간이 부족하다는 그 기나긴 이야기를 무용담처럼 반복하기도 한다. 그 엄혹했던 시절을 살았던 게 마치 뒷세대를 대신한 희생의 결과물인 양 말하는 걸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그 시절에는 자신이 살고 싶은 시기를 손쉽게 골라잡을 수 있었던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간혹 섬찟한 느낌이 들기도 해서 시쳇말로 "이거 실화냐?" 는 말을 나도 모르게 내뱉게 된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자신이 직접 겪는 경험은 소설이나 타인이 들려주는 이야기보다 다소 무디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아서 남들이 볼 때에는 참혹한 일이지만 자신은 그저 무덤덤하게 지나치는 경우가 종종 있지 않은가. 자신이 직접 겪는 일조차 매 순간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끔찍한 일이라고 여겨진다면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사람은 지상에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주어진 환경에 대한 인간의 적응력이란 그만큼 놀랍다.

 

콜슨 화이트헤드가 쓴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는 1800년대 미국 남부에서 태어난 한 흑인 여성의 고통스러운 삶을 사실적으로 다루고 있다. 실존했던 흑인 탈출 비밀 조직 '지하철도'를 실제 '지하철도'로 상상해 쓴 소설로 흑인 노예에 대한 끔찍한 고문과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처참한 살해 장면 등 소설 곳곳에 드러나는 신랄한 묘사는 책을 읽는 독자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코널리는 그다음 날 해가 뜨자마자 둘을 살갗이 벗겨지도록 매질했다. 죄를 지은 순서대로 우선 체스터부터 시작했고, 그런 다음 피투성이가 된 그들의 등을 후춧가루 푼 물로 문질렀다. 그렇게 호되게 당한 것이 체스터는 처음, 코라는 반년 만이었다. 코널리는 이후로도 이틀 동안 아침마다 매질을 반복했다."    (p.49)

 

소설의 주인공인 코라는 그녀의 할머니 아자리가 아프리카에서 랜들가(家) 대농장으로 292달러에 팔려온 후 그녀의 엄마 메이블이 태어났고, 메이블은 자신의 딸 코라가 열 살이던 해에 농장을 탈출했다. 그렇게 혼자가 된 코라는 문제가 있는 노예들의 거주지인 호브에서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북부에서 팔려온 시저가 그녀에게 함게 탈출하자고 청한다. 단 한 번도 농장을 벗어나 본 적 없는 코라는 시저의 청을 거절한다. 탈출을 시도한 노예의 결말이 어떻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저는 포기하지 않고 탈출을 계획한다. 노예로 팔려오기 전, 부모와 함께 살았음은 물론 글도 읽을 줄 알았던 시저는 매주 일요일마다 시장에 나가 동향을 살핀다. 그러다 우연히 플레처 씨를 만나게 되고 그의 도움을 약속받는다. 탈출을 시도했던 흑인이 백인 구경꾼들 앞에서 산 채로 불에 태워지는 걸 목격한 코라는 시저와 함게 탈출할 것을 결심한다.

 

"그들은 잔디밭에 모였다. 랜들가에 온 손님들은 사람들이 빅 앤서니에게 기름을 바르고 불에 굽는 동안 향신료 넣은 럼주를 홀짝였다. 목격자들은 첫째 날 그의 남근이 잘려 입안에 넣고 꿰매졌기 때문에 그의 비명을 듣지 않아도 되었다. 장치는 연기를 피워 올리며 새까맣게 타들어갔고, 나무에 새긴 형체들은 살아 있는 듯 얽혀 들었다."    (p.60)

 

코라와 시저의 탈출은 험난했다. 사우스캐롤라이나에 도착한 코라와 시저는 자유인처럼 행동하는 연습을 하면서 잠시 동안 안정된 생활을 한다. 코라는 읽고 쓰기를 배우기도 했다. 그러나 농장주의 추격은 집요했다. 그들을 돌봐주던 샘의 도움으로 코라는 추격조를 따돌리고 탈출한다. 마틴의 도움으로 그의 집 다락에서 숨어 지내던 코라는 결국 노예 사냥꾼에게 잡히고 만다. 노예 사냥꾼에게 잡혀 끌려가는 동안 코라는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헤어진 시저가 참혹하게 죽었다는 소식과 랜들가에서 함께 탈출했던 러비도 그들에게 붙잡혀 농장에서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그리고 코라가 열 살이었을 때 농장을 탈출했던 엄마 메이블의 소식도... 

 

"그녀는 가짜 안식처와 끝없는 사슬을, 밸런타인 농장의 학살을 남겨두고 앞으로, 앞으로 갔다. 터널에는 어둠뿐이었고, 저 앞 어딘가에 출구가 있을 것이다. 혹은 운명이 그렇게 결정한다면, 막다른 골목 - 텅 빈 무자비한 벽뿐이리라. 마지막 쓸쓸한 농담. 마침내 녹초가 되었을 때 코라는 핸드카 위에서웅크리고 잠들었다. 가장 깊은 밤하늘에 안긴 것처럼 어둠 속에 홀로 떠서."    (p.340)

 

헤택을 누리는 사람이 소수일 때 인간의 잔인함은 그 빛깔을 더하여 선명하게 드러내는 법이다. 목화 산업이 번성했던 1800년대, 노예제도가 폐지되지 않았던 미국 남부의 대농장은 흑인 노예들의 노동력을 바탕으로 몇몇 농장주와 그에 동조하는 소수의 백인들이 온갖 혜택을 누리고, 그 혜택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 이하의 갖은 악행을 저질렀다. 일인 독재 체제를 유지하는 북한 정권도 다르지 않다. 일본 제국주의 지배를 받았던 우리나라 국민의 고통도 그와 같았을 터, 해방 이후 남한의 군부 독재 시절인들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자들은 따지고 보면 군부 독재로 혜택을 누렸던 몇몇 부역자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 시절의 우리 국민 대다수는 '책으로 쓰면 열 권으로도 부족'한 고단한 삶을 살았던 것이다. 소득양극화가 심화되는 걸 우려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부의 대물립과 부의 집중이 심화되는 한 1800년대 미국 남부의 백인들에 의해 자행된 비인간적 만행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 시절의 우리는 무척이나 정이 많고 순박했습니다. 그렇게 오래된 일도 아니죠. 몰강스러운 세상을 향해 주체할 수 없는 분노를 거리낌없이 표출하는 지금의 젊은 세대와는 많이 달랐던 듯합니다. 자신의 기구한 운명에 대한 분노는 단지 안으로만 삭일 뿐이었습니다. 마땅히 그래야 하는 줄 알았지요. 가파른 산과 산 사이를 이따금 덜컹거리며 열차가 오갔습니다. 사람들은 직접 그 열차를 타고 오갔던 건 아니지만 소문으로만 들었던 도시의 소식들이 열차에 가득 실려 있다고 믿었던 듯합니다. 철길로부터 먼 산비탈의 밭에서도 사람들은 규칙적으로 오가는 열차 소리를 귀신같이 알아들었습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구부렸던 허리를 펴고 달리는 열차를 향해 손을 흔들었습니다. 누군가의 기다림에 답을 주려는 듯 열차 안의 승객들 또한 열차 밖 사람들을 향해 하염없이 손을 흔들었습니다.

 

덜컹거리는 열차 소리가 사람들의 가슴을 향해 그윽이 커지다가 산 너머로 아스라히 멀어질 때까지의 그닥 길지 않은 시간이 그 시절의 사람들에게는 마치 영원처럼 아득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시간이 아니라 그리움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리적인 시간이 주관적인 어떤 계기로 인해 그리움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으로 치환될 때 우리는 현실의 세계에서 상상의 세계로 도약하곤 합니다. 불가능이 없는 상상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무척이나 행복했습니다.

 

마을 입구의 신작로에는 하루에 서너 번 버스가 오갔습니다. 버스가 지날 때마다 뿌연 흙먼지가 일고, 동네의 꼬마녀석들은 버스를 쫓아 한동안 달려가곤 했습니다. 그 많은 먼지를 다 뒤집어쓰고 말이지요. 열차가 지날 때처럼 어른들은 저만치 먼 발치에서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었습니다. 버스도, 열차도 닿을 수 없는 어떤 그리움인 양 여기던 시절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리 멀지도 않았던 시절. 그러나 자신이 살아보지 못한 과거는 가깝든 멀든 그냥 다 같은 과거일 뿐 몸에 착 붙은 옷감처럼 그 감촉을 느낄 수는 없는 일이지요. 50대의 어느 배우가 자신의 오피스텔에서 홀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추억 속 앨범을 펼치듯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른 풍경이었습니다. 겨울 오후의 순한 햇살이 이제 막 산을 넘고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당신은 모를 것이다 - 그토록 보잘것없는 순간들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정태규 지음, 김덕기 그림 / 마음서재 / 201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줄곧 병을 앓아온 사람이 쓴 책은 왠지 모르게 믿음이 간다. 확고한 믿음이 가는 것은 물론 한 문장 한 문장, 낱글자 하나하나에 주목하게 된다. 그런 까닭에 한 권의 책을 읽는 데 더 많은 시간이 들곤 한다. 뿐인가, 책을 읽은 후 어수선한 마음을 진정시키거나 가슴에 남은 글귀를 생각하느라 책을 읽을 때보다 더 많은 시간을 쓰곤 한다. 줄잡아 며칠은 걸리는 셈이다. 그 며칠의 시간으로 책에 대한 모든 것들이 메지 지어지는 건 물론 아니다. 그 후로도 오랫동안 홀로 있는 시간에 이따금 책을 떠올리거나 되새김질 하듯 곰곰 책 속의 글귀를 음미하기 때문이다. 정신분석 전문의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한 김혜남 작가의 책이 그랬고 지금은 고인이 된 위지안, 랜디 포시, 폴 칼라니티의 책이 그랬다.

 

최근에 읽은 정태규 작가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소설가이자 국어 선생님이기도 했던 그는 지금 루게릭병을 앓고 있다. 그의 이야기는 마치 미치 앨봄의 책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의 주인공 모리 슈워츠 교수와 흡사하다. 후학을 양성하는 선생님의 신분이었던 것도, 같은 루게릭병을 앓는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점이 그렇다.

 

"그렇다. 삶이란 어차피 저마다 고통의 몫을 짊어지고 가는 좁은 오솔길이 아니던가. 명부에 내 육신은 없을 것이다. 굽이굽이 살아온 나의 오솔길만이 적혀 있을 뿐. 망가진 육신을 원망하기보다는 내가 가야 할 길을 긍정하면서 묵묵히 걸어갈 일이다. 길이 길을 안내할 때까지." (p.83)

 

오른손 엄지와 검지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와이셔츠의 단추를 단춧구멍에 끼울 수 없었던 어느 날, 작가의 나이는 쉰네 살이었다고 한다. 젊다면 젊고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다고 해도 크게 욕 먹지 않을 그런 나이였다. 많은 교사들이 유행처럼 명예퇴직을 하던 그해에 작가 또한 명예퇴직을 신청했고, 절차가 마무리되지 않아 작가는 굳어가는 몸을 이끌고 학교에 나갔었다고 회고한다. 병의 진행을 지연시키기 위해 무리해서 운동을 하고 치료를 위해서 살던 곳 부산에서 서울로 그 먼 길을 오가야 했던 세월을 작가는 이 책에 기록하고 있다.

 

"루게릭병이 내 몸에서 근육을 모두 앗아가도 절대 빼앗아가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정신이다. 신이 내게 정신과 육체 중 하나만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조금도 망설임 없이 정신을 선택할 것이다. 내 정신이 곧 내 소설이고, 소설을 쓸 때 비로소 내가 존재하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p.69)

 

작가는 안구 마우스를 사용하여 컴퓨터의 글을 읽고 자신의 글을 쓴다고 한다. 책의 2부에 실린 단편소설 '비원'은 루게릭병 확진을 받은 뒤에 쓴 소설이고,또 다른 단편소설 '갈증'은 안구 마우스를 이용하여 꼬박 한 달이 걸려 쓴 작품이라고 했다. 루게릭병을 앓고 있는 두 남녀의 만남을 그린 '비원'은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기도 하다. 페이스북을 통하여 세상 사람들과 소통하는 작가는 자신의 소설집 <청학에서 세석까지>에 실렸던 단편소설 '모범 작문'을 페이스북에 다시 연재하여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고도 한다.

 

"또한 소설은 힘이라고 생각했다. 진실한 영혼이 경박한 현실에 지쳐 쓰러지지 않게 받쳐주는 힘이 소설이고, 그러한 영혼을 응원하며 조용히 펄럭이는 깃발이 소설이라고 나는 믿었다. 그래서 부끄럽지만 학교는 생계를 위해 잠시 머무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p.25)

 

1부 '영혼의 근육으로 쓴 이야기 - 병상에서', 2부 '모범 작문 -소설', 3부 그대 떠난 빈집의 감나무 되어 -에세이'로 구성된 이 책은 눈 깜박임만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정태규 작가가 세상을 향해 외치는 침묵의 함성처럼 들린다. 그 외침은 고통에 대한 거부나 원망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근사한 소설을 쓰고 싶어하는 한 소설가의 갈증에서 비롯된다.

 

"진정한 소설 쓰기에 필요한 것은 진정한 외로움이다. 저 세상의 부조리와, 우리 인생의 부조리와, 저 우주의 부조리에 당당하게 홀로 대면하고 선 자의 외로움. 그런 외로움이 진정한 소설을 낳는 것일 게다." (p.241)

 

글을 쓴다는 건 현실이나 실제와 같은 원재료에 감정이라는 양념을 적당히 섞어 버무리는 일이다. 대중의 입맛에 맞는, 보편적인 글을 쓰는 것은 그닥 어려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세상에 널리 알려진 맛집이라면 저마다 그들만의 비법 양념을 지닌 것처럼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감정에 더하여 자신만의 색깔이 드러나는 특별한 감정이 있어야 할 터이다. 죽음이 가까운 시기에 그 특별한 감정을 발견한다는 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랴. 나는 그의 책에서 용기를 배운다. 세상을 향해 첫발을 내딛는 아이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대한민국 범죄혐의자의 인권이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이런 것을 두고 좋다고 해야 할지 나쁘다고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는다. 범죄혐의자의 인권은 높아지는 반면 국민 전체의 인권이나 사법부의 신뢰도가 높아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법부의 신뢰도는 나날이 떨어지고 있는 추세라고 말할 수 있다.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범죄혐의자의 천국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범죄혐의자들이 함박웃음을 지을 때마다 국민들의 한숨은 깊어만 간다. 이게 다 몰지각한 영장전담 판사들이나 신광렬 부장판사와 같은 사람들의 공(?)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범죄자나 범죄혐의자의 인권이 강조되는 반면 범죄 피해자인 대다수 국민의 인권을 무시하거나 민주주의 제도 자체를 파괴하는 이런 자들을 우리는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신광렬 부장판사는 '일부 혐의에 대해 다툼의 여지가 있다. 증거 인멸이나 도주의 염려가 없고 피의자의 방어권 차원'에서 석방한다는 판에 박은 듯한 말로 김관진 씨와 임관빈 씨를 내보냈다. 그러나 피의자들은 자신들의 인권 신장에 앞장서는 판사들에게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판사들을 우습게 여기는 기색이 역력하다. 판사가 마치 자신들이 고용한 하수인이라도 되는 양 안하무인인 것이다. 엄숙해야 할 재판정에서 '분해서 못 살겠다.사형시켜 달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난동을 부리지 않나 법정 경위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방청객 중 일부가 피의자를 향해 인사를 하지 않나 가관도 그런 가관이 없다.

 

범죄혐의자 우병우 씨와 고향도 같고, 사법연수원 동기이자 출신 대학마저 같은 신광렬 부장판사는 피의자의 인권신장을 위해 자신의 명예나 사법부의 신뢰도는 안중에도 두지 않았다. 그의 용기가 참으로 가상하다. 그로 인하여 대한민국은 범자혐의자들의 인권은 몇 단계 올라갔고 국민들의 원성은 몇 데시벨 높아졌으며 사법부의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칼과 혀 - 제7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권정현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달디단 꿈을 꾸었던 것인지도 몰라. 눈발이 날리는 거리를 검은 패딩을 입은 아이들 서넛이 걸어가고 있었지. 거리는 온통 아이들의 함박웃음으로 채워지는 듯했지. 가벼웠던 그 미소 속에 첫눈이 주는 기쁨은 이미 다 숨겨져 있었던 거야. 아이들 웃음이 수능으로 공짜 휴가를 얻은 주체할 수 없는 기쁨으로부터 발원한 것인지, 바람에 나부끼는 첫눈의 거침없는 눈발이 그들에게 내재된 푸른 생명력을 자극햇던 것인지 나로서는 알지 못해. 다만 눈발 성성하여 뿌옇게 흐려진 인도를 아이들 웃음이 하얗게 번졌다는 걸 기억할 뿐이야. 마치 꿈만 같았던 그 풍경이 반짝 해가 드러난 지금도 생생해.

 

오늘 아침 첫눈이 내리는 창밖 풍경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이다. 아름다운 경치를 보거나 인상 깊은 장면 앞에서 우리는 누구나 현실과 비현실이 한꺼번에 뒤섞이는 경험을 한다. 누군가 내 머릿속 회로를 팍팍한 현실에서 몽롱한 비현실의 세계로 옮겨 놓은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와 같은 경험은 비단 현실의 체험에서만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아름다운 선율을 듣거나, 빠져들 듯한 그림 앞에서, 누군가 읊어주는 아름다운 시를 들으며, 또는 잘 쓰인 소설을 읽을 때에도 비슷한 경험을 하게 된다.

 

권정현 작가의 <칼과 혀>는 1945년 일제 패망 직전의 붉은 땅 만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체구가 작고 깡마른, 꼽추처럼 목과 등이 붙어 있으며 어깨는 공처럼 둥글고 배에도 살이 늘어져 있는 볼썽 사나운 생김새의 중국인 첸을 만날 수 있다. 비밀 자경단원이자 천재 요리사인 그의 손에는 불과 싸운 흔적이 무수히 남아 있다. 첸이 노리는 사람은 일본군 사령관 모리(야마다 오토조)이다. 등장인물 중 유일한 실존인물이기도 한 그는 궁극의 맛과 미륵불의 미(美)에 집착하는, 군인이라기보다 예술가적 기질이 다분한 유약한 인물로 그려진다. 실제로 그는 백만 명의 관동군을 소련군에게 모두 항복시켜 칠십만 관동군을 포로로 잡히게도 했다. 일본군 위안부로 고초를 겪다 도망쳐 나온 조선 여인 길순은 독립운동가인 오빠와 연락을 취하면서 사령관 암살 기회를 노린다.

 

"전황을 보고받을 때마다 나는 죽음과 삶 사이에 끼인 수많은 생명들을 생각한다. 죽음을 앞둔 운명만큼이나 절박하고 아름다운 것은 없다. 식탁에 차려진 갖가지 산해진미가 아름다운 이유도 그것이 누군가의 입으로 들어가 소화될 운명이기 때문이다. 소멸되지 않는 장식품은 아무런 미적 가치가 없다. 극락사의 반가사유상이 아름다운 이유도 그것이 긴 세월 동안 조금씩 부패해왔기 때문이다. 언젠가 그것의 몸엔 녹이 잔뜩 슬고 미소는 기괴하게 일그러질 것이다. 그러기에 시시각각 변하는 그 미소를 사랑할 가치가 있다." (p.117~p.118)

 

소설은 사령관 모리와 첸, 길순 세 명이 번갈아가며 이야기를 들려준다. 동료 자경단원과 함께 황궁 주변에서 체포된 첸은 자신이 요리사임을 주장하고 사령관은 까다로운 문제를 내어 기회를 준다. 사령관의 테스트를 통과했던 첸은 요리로서 사령관의 신임을 얻게 되지만 결국 암살자라는 그의 신분을 들키고 만다. 혀의 1/3이 잘리고 발목에 튼튼한 쇠줄이 채워지는 첸. 사령관은 그에게 다시 '하루에 한 가지, 매일 다른 요리를 해서 바치라'고 명령함으로써 목숨을 살려준다. 그렇게 소설의 1부가 끝난다.

 

소설의 2부는 첸의 어머니인 베베와 길순이 사령부로 끌려와서 고문을 받는 것으로 시작된다. 사령관의 눈에 띈 길순은 사령부에 머물게 되고 사령관을 죽여야 한다는 오빠의 망령과 사령관에 대한 애틋한 마음 사이에서 갈등한다. 일본 패망의 순간으로 다가서면서 소설도 점점 끝을 향해 가는데...

 

작가는 소설이라는 틀에 다양한 음식과 역사적 사실들을 녹여내고 있다. 어찌 보면 맛과 생명은 본능의 차원에서 서로 닮아 있는지도 모른다. 강력한 중독성마저도. 음식에 대한 작가의 풍부한 지식은 음식을 만드는 첸과 음식을 소비하는 사령관의 입을 통해 탄생과 소멸이 입체적으로 그려진다. 그것은 끝없이 반복되는 생과 사의 윤회를 떠올리게도 하며 필연적으로 불교적 공간(소설에서는 극락사)에 이르도록 한다. 한, 중, 일의 주인공을 일제강점기라는 역사적 무대에 세워놓고 음식을 매개로 스토리를 엮어가는 작가의 상상력은 탁월하다. 물론 길순의 뜬금없는 페미니즘적 사고나 거듭되는 첸의 구명도 석연치 않기는 하지만 말이다.

 

첫눈이 내렸고, 소설 속 첸이 사령관의 테스트를 가볍게 통과하는 것처럼 고3 수험생들의 수학능력평가시험이 치러졌다. 현실이 때로 비현실의 세계로 훌쩍 도약을 하듯 시험을 치른 학생들도 이제 성인으로 향하는 알차 관문을 무사히 통과한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자신의 삶을 시간 속에 기록하게 된다. 첫눈이 오던 날 나는 수능을 보았노라고. 또는 첫눈이 오던 날 나는 권정현 작가의 소설 한 권을 읽었노라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