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겨울 칼바람의 맹위가 대단합니다. 그래도 지금은 방한용품의 질이나 그런 것을 향유할 수 있는 소득 수준 등이 높아져서 겨울을 나는 일이 여름 더위를 이기는 것보다 더 수월해진 게 사실이죠. 어린 시절을 첩첩산중의 강원도 산골에서 보냈던 나로서는 여름보다는 겨울에 그 시절이 더 생각나곤 합니다. 모든 게 허술하기만 하던 때인지라 누이가 대바늘로 떠서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장갑과 스웨터를 입고 학교에 다니는 건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겨울이면 손과 발에 동상을 달고 살았고 등하굣길의 찬바람을 온 몸으로 맞받아야만 했었죠. 돌이켜 보면 아득했던 시간이었습니다.

 

뉴스를 보니 며칠 전에 있었던 야당 대표의 부적절한 발언이 국민들의 공분을 사는 듯하더군요. 중국을 국빈 방문한 대통령에 대해 '알현, 조공외교' 등 듣기에도 민망한 말을 쏟아냈다죠? 그 사람은 도대체 어느 나라 국민인지 묻고 싶었습니다. 정치인은 미국 뒷골목의 쓰레기만도 못하다는 게 중론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자국의 대통령의 행보를 그런 식으로 비하한다는 건 상식 선을 크게 벗어난 듯 보입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이런 장면에 대해 일침을 가해야 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일국의 제1야당 대표라는 작자가 일본 총리의 꼬붕도 아니고 도대체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우리나라 보수당의 행태는 이런 일이 한두 번은 아니었죠. 자위대 창립 기념일에 축하 사절로 참석하기도 하고, 대통령이었던 이모 씨는 일왕에게 머리를 숙이는 등 온갖 볼썽사나운 모습을 보였었죠.

 

 

야당의 행태를 보면 국가의 이익이나 위신은 관심도 없고 오직 여당을 흠집내어 자신들의 존재감을 높이려는 작태로만 보입니다. 그들에게 애국심을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긴 하지만 말이죠. 그래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자신들의 체면보다는 국격을 먼저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요? 참으로 부끄러운 모습임에도 그들은 어떤 생각으로 이런 꼬라지를 보였을지 궁금하기만 합니다. 날씨가 추우니 국민들의 화를 돋우어서 국민 전체의 체온을 조금이나마 높여주려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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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집스러운 시간이 묵묵히 흘러가는 동안 나와 당신의 틈새를 메웠던 삶의 질료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따금 생각하곤 합니다. 말하자면 그런 것이지요. 조급하거나 성마른 성격의 내가 어느 날 갑자기 당신과의 관계를 무 자르듯 싹둑 단절하거나 데면데면 멀어지지 않고 그토록 오랜 세월을 한결같이 지켜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랄까 원천이랄까 뭐 그런 게 궁금했던 것이지요. 우정이나 공감 또는 배려와 같은 추상적인 언어로 대답을 갈음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뭔가 미진한 부분이 남는 게 사실입니다. 우리는 헤어지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쓴 것도 아니요, 남녀 간의 사랑과 같은 본능적 관계에 의지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나는 우르술라 누버가 쓴 책 <나는 ‘아직도’ 내가 제일 어렵다>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당신과 내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오랜 세월 서로의 우정을 확인하며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에 대한 작은 단서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자는 자신의 책 서문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만약 아무것도 숨길 수 없다면 우리는 ‘발가벗은’ 채로 다른 사람과 마주해야 한다. 이마에 적혀 있기라도 한 것처럼 타인이 내 생각을 훤히 읽을 수 있다면, 우리의 감정이나 희망사항, 계획을 호기심 가득한 낯선 사람의 시선에서 지켜낼 수 없다. 비밀이 없다면 무방비 상태로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의도, 희망, 욕구에 휘둘리기 쉽다. 즉 비밀은 우리 인생에 어떤 권한도 없는 사람이 우리 삶에 함부로 기웃거리지 못하게 막아주는 울타리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으로도 비밀은 윤활제 역할을 한다. 모든 것을 밝히고 드러내야 한다면 사회 공동체는 제대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절대적 진실’만 존재하는 사회는 스스로를 감당하기 힘들다. 긍정적인 비밀에는 절대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는 매력적인 사회적 가치가 있다.” (p.13)

 

그렇습니다. 나는 지금 당신과 나 사이에 존재했던 ‘비밀’에 대해 말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관계를 발전시키겠다는 어떤 특별한 목적도 없이 서로의 비밀을 조금씩 공유해왔던 것입니다. 삶의 고통을 견뎌야 하는 어떤 순간에도 우리는 기회가 될 때면 언제나 자신이 간직해온 비밀을 조금씩 조금씩 상대방에게 주입했던 것이지요.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각자가 정한 삶의 테두리 속으로 상대방의 출입을 무시로 허락하게 되었고, 서로가 서로의 손을 맞잡지 않았어도 우리는 단단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습니다.

 

언젠가 당신이 내게 언제부터 책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어떤 계기로 책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진지하게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나는 그때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한 채 우물쭈물 얼버무렸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의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비밀’이 내 인생에 있어 하나의 전기로 작용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책을 좋아하게 된 계기나 특정 시점을 명시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나에게도 하나둘 비밀이 생겨나면서부터 책과 가까워졌다는 건 분명한 듯합니다. 독서란 결국 타인의 비밀을 공유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밝힐 수 없는 어떤 비밀을 끌어안게 된 어느 날,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다른 누군가의 비밀도 궁금해지게 마련이지요. 타인의 ‘비밀’을 정당한 방법으로 엿보는 유일한 수단이 독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최은영의 소설집 <쇼코의 미소>에도 ‘비밀’이 가득합니다. 소설에서 고등학생이던 ‘나’는 일본의 자매학교 교류로 한국을 찾은 일본인 친구 쇼코를 일주일간 집에서 재우게 되지요. 일제 강점기에 일본어를 배웠던 할아버지는 ‘나’보다 쇼코와 더 잘 지냅니다. 이후 쇼코는 할아버지에게는 일본어로, ‘나’에게는 영어로 편지를 꾸준히 써서 보내지요. 대학에 가고 바빠지면서 ‘나’와 쇼코는 연락도 끊기고 관계도 멀어집니다. 소설 속 주인공 ‘나’가 쇼코와 멀어지는 동안에도 할아버지와 쇼코는 자신의 비밀을 서로에게 내보이며 한동안 관계를 이어갑니다. <쇼코의 미소>에 실린 또 다른 단편 소설 ‘씬짜오, 씬짜오’에는 마음으로 공감할 수 없는 두 가족의 비밀이 소설 전반에 드러납니다. 말하자면 비밀을 공유할 수 없다는 건 관계를 지속할 수 없다는 걸 의미하기도 하지요.

 

 

“시간이 지나고 하나의 관계가 끝날 때마다 나는 누가 떠나는 쪽이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생각했다. 어떤 경우 나는 떠났고, 어떤 경우 남겨졌지만 정말 소중한 관계가 부서졌을 때는 누가 떠나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알 수 없었다.” (p.89 '씬짜오, 씬짜오‘ 중에서)

 

 

<쇼코의 미소>에서 작가 최은영은 표제작인 ‘쇼코의 미소’를 비롯하여 7편의 이야기를 이 책에 싣고 있지만 결국 작가는 ‘비밀’이 들려주는 여러 변주를 독자들에게 말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애란의 소설집 <바깥은 여름>에도 가슴 아픈 ‘비밀’이 등장합니다. 어린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고 상실감으로 어찌할 바 모르던 부부는 찬바람이 부는 입동의 자정 무렵, 복분자의 붉은 물이 튄 벽에 도배를 다시 하기로 합니다. 어쩌면 부부에게 도배는 죽은 아들을 잊고 새 출발을 다짐하는 의미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도배를 하기 위해 가구를 치웠을 때 그 밑에서 아들의 삐뚤빼뚤한 낙서가 나옵니다. 말하자면 시간이 가면 자연스럽게 잊혔을지도 모르는 아들의 비밀 한 조각이 부부에게 드러난 셈이지요. 부부는 마지막 남은 한 장의 벽지를 마저 붙이지 못한 채 오열합니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가슴이 저릴 정도로 무고한 얼굴로 잤다. 신기한 건 그렇게 짧은 잠을 청하고도 눈뜨면 그사이 살이 오르고 인상이 변해 있다는 거였다. 아이들은 정말 크는 게 아까울 정도로 빨리 자랐다. 그리고 그런 걸 마주한 때라야 비로소 나는 계절이 하는 일과 시간이 맡은 몫을 알 수 있었다. 3월이 하는 일과 7월이 해낸 일을 알 수 있었다. 5월 또는 9월도 마찬가지였다.” (p.18 '입동‘ 중에서)

 

‘비밀’은 글로 쓰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말하여지기도 합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비밀’은 때로는 마음의 병이 되어 한 사람을 쓰러트리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비밀을 들어주고 그 아픔을 다른 누군가에게 토로하지 못한 채 자신의 가슴에만 담아야 하는 이도 있습니다. 정신과의사가 바로 그런 사람이지요. 정신과의사 김진세가 쓴 <길은 모두에게 다른 말을 건다>는 정신과의사의 고충을 담고 있습니다. 김진세의 산티아고 순례기이기도 한 이 책은 개인이 만들어가는 ‘비밀’을 우리는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삶은 음미하는 것이다. 급하게 보내면 언제 갔는지도 모르게 지나가버리는 삶, 비록 지긋지긋한 삶이라도 그 고통에서 헤어나오고 싶은 것이지, 실제로 인생이 빨리 흘러가길 바라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인생을 즐기려면, 마치 음식을 천천히 씹으며 참맛을 느끼듯, 천천히 살아가야 한다.” (p.31)

 

 

지금 이 시간에도 나와 당신은 각자의 ‘비밀’을 짓고, 기억하고, 편집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그렇겠지요. 만들어진 ‘비밀’은 차후 당신과 나의 만남에서 서로 교환될 수도 있고, ‘비밀’로 숨겨질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나는 당신의 비밀을 언제든 응원한다는 사실을 당신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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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루의 어드벤처 - 사막, 그 빈자리를 찾아서
김미루 지음 / 통나무 / 2017년 11월
평점 :
절판


새벽 숲은 고요했다. 등산로를 따라 드문드문 잔설이 보였고 뚝 떨어진 기온에 모든 게 얼어붙는 듯했다. 사람의 발길이 끊긴 새벽의 등산로는 그야말로 적막강산. 괴괴한 느낌마저 감도는 새벽 산길을 그믐달 여린 달빛이 어둠의 한 귀퉁이를 도려내고 있었다. 숨을 내뿜을 때마다 하얗게 쏟아지는 입김이 마치 흰 연기처럼 흩어졌다.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는 도시의 불빛을 등지고 하늘에는 듬성듬성 새벽 별빛이 어지러웠다.

 

다른 계절과는 달리 겨울 산행은 많은 상념을 떠올리게 한다. 한 어미 자식도 오롱이조롱이라지만 갑작스러운 추위에 잔뜩 옹송그린 채 내달리는 퇴근길 사람들의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 사람이 그 사람인 듯 옛말조차 무색해진다. 사람 사는 게 다들 비슷하구나, 생각되어지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삶은 자연이라는 같은 외투를 입고 한 세상을 제각각 살다가 목숨이 다하는 날 가볍게 벗어놓고 떠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연을 내 몸처럼 소중히 여겨야 하는 이유도 그런 까닭일 터였다. 내 뒤를 잇는 사람들이 또 다시 그 외투를 입고 한 세상을 살아가야 할 테니 말이다.

 

"사막은 결국 모든 인간관계를, 각자의 배경이나 경제적 지위와 무관하게 평등으로 몰고 간다. 순간순간 닥치는 허무의 느낌은 운명공동체라는 의식 속으로 모두를 휘몰아간다. 서양문화에 깔려있는 평등의식은 이러한 사막문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초월자의식도 강렬하게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    (p.104)

 

도올 김용옥 한신대 석좌교수의 딸인 김미루가 쓴 책이 출간되었다기에 구해서 읽어보았다. 미국 매사추세츠 주 스톤험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란 후 1995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가 컬럼비아대학교 불문학과를 졸업했다는 그녀는 전위적 예술행위로 우리나라 언론에도 몇 번인가 오르내렸던 걸로 기억한다. 돼지우리에서 파격적인 누드 퍼포먼스를 펼치는가 하면 터키 이스탄불에서 누드 사진을 찍다 터키 경찰에 체포되기도 했던 그녀가 이번에는 사진이나 회화가 아닌 자신의 글을 통해 독자들과 만난다기에 어떤 책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맨해튼에서 상실했던 삶의 요소들을 이곳에서 되찾은 듯했다.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단순함, 소박함? 아마도 사막에서 내 뺨을 스치는 다양한 공기의 감촉이었을까? 동물들의 여운 있는 울음소리였을까? 맨발로 걸어갈 때 느끼는 모래의 감촉이었을까? 질병과 더러움의 공포를 근원적으로 상실했을 때, 나는 이전에 느낄 수 없었던 평화와 아름다움의 감각을 획득했다."    (p.136~p.137)

 

<김미루의 어드벤처>라는 제목의 이 책에서 그녀는 사막 속으로 들어갔다. 아프리카 말리의 사하라사막 팀북투지역과 몽골의 고비사막을 탐험하며 그녀는 사막의 상징과도 같은 낙타와의 교감을 자신의 작품 속에 표현하고 싶었던 듯했다. 끝없는 모래언덕과 황폐한 땅에도 생명은 존재하고 외부와의 단절된 삶을 살아가는 그곳 사람들의 모습을 작가는 자신의 사진에 담는다.

 

"제일 먼저, 사막의 황폐함이 지니고 있는 이국적이고도 로맨틱한 관념이 불러일으키는 포스가 나를 사로잡았다. 그리고 그 포스는 손상된 인간관계의 현실태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나의 욕망을 부추겨댔다."    (p.28)

 

작가는 안락한 도시 생활에 익숙했던 자신의 오래된 생활방식을 사막이라는 극한의 지역에서 여러번 되새긴다. 자신이 자연이라는 틀에서 인위적인 어떤 것으로 얼마나 많이 기울었던가, 하는 반성과 자책으로 읽히는 대목이었다. 사람의 발자국이 찍히지 않은 순수한 사막의 속살을 향해 낙타와 함께 걸어가는 그녀의 사진 속 모습은 구도자의 그것처럼 경건해 보였다.

 

"아마도 낙타가 그들의 동반자로서 우리 인간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들은 우리가 그들의 삶의 방식을 배우기를 지금도 갈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버려진 사막에서 평화를 찾는 그 놀라운 지혜를! 지금은 사막의 커뮤니티가 종교, 권력, 정치, 자원, 이권 등등의 문명의 요소로 인하여 오염된 측면이 있지만, 낙타와 인간이 사막에서 공생하는 최초의 순결한 삶의 방식은 평화 그 자체였을 것이다."    (p.155)

 

작가의 다음 계획을 묻는 어느 인터뷰에서 작가는 이제 정글로 향하겠다고 말했다. 과거에는 결벽증을 극복하기 위해 돼지우리 속으로 들어갔었고, 애벌레 공포증을 벗어나기 위해 이제 정글로 향한다는 그녀의 모험정신은 나와 같은 도시내기에게도 작은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이 자연을 떠나서 살 수 없는 것처럼 우리는 자연이라는 외투를 입고 한 평생을 살아간다. 자신의 외투에 흠집을 낸다는 것은 곧 나의 삶을 망가뜨리는 어리석은 짓임을 나는 <김미루의 어드벤처>를 통해 반성해 본다. 날이 춥다. 생명을 지키기 위해 저토록 애쓰는 모든 생명체의 경건한 몸짓을 나는 이 책 <김미루의 어드벤처>를 통해 조용히 음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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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체제에서 '상생'이라는 말만큼 공허하고 헛된 구호도 다시 없을 듯합니다. 말하자면 겉만 번지르르할 뿐 실속이 없는 말이라는 뜻이지요. 자본주의는 애초에 개인의 욕심을 부추겨서 기술진보와 경제성장을 일구워왔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욕심은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성장동력이었던 셈이지요. 그러므로 '상생'이니 '이타주의'니 '헌신'과 같은 말은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자본주의 국가에서 이런 것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성자와 같은 인격체에서만 볼 수 있는 희귀한 장면일 뿐이라는 것이죠. 그렇다면 자본주의 국가에 속한 종교단체는 온전할까요? 제 생각으로는 기대하기 어려울 듯합니다. 종교단체의 지도자가 성인의 경지에 있는 완벽한 정신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말이죠.

 

트럼프가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공표한 것도 비슷한 이유일 듯합니다. 누구보다도 욕심이 많은 그가 돈이 된다면 못할 일이 없었던 것이죠. 가뜩이나 세계 제1의 경제대국인 미국의 대통령이 된 그의 위치를 감안할 때 그런 일쯤이야 전혀 두려울 게 없었을 듯합니다. 처음부터 그는 인도주의니 윤리니 하는 것에는 관심조차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슬람 국가의 저항으로 인해 몇 백, 몇 천 명이 죽건 관심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의 본심으로는 이번 기회에 이슬람교를 믿는 사람들이 모두 제거되었으면 하고 바랄지도 모르죠. 미국인들은 개인의 윤리라고는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는 반미치광이를 자국의 대통령으로 뽑은 셈입니다.

 

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담임목사 자리를 아들에게 세습한 명성교회만 하더라도 자본주의의 전형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들을 탓할 일은 아니지요. 그것은 애초부터 종교단체가 아니었으니까 말입니다. 종교단체를 가장한 개인기업이라고 하는 편이 더 옳지 않을까 싶습니다. 땅을 사서 축재를 하고 축적된 재산을 고스란히 상속하기 위한 재단을 만들고 하는 행위는 자본주의 국가에서 오히려 자연스러운 행동인 셈이지요. 종교인이 아닌 개인에게서는 말이죠.

 

오늘은 문재인케어를 반대하는 의사들이 광화문 광장에 모여 도심집회를 하고 있습니다.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거리로 불러냈던 동인은 무엇이겠습니까. 돈에 대한 욕심이지요. 비급여 축소는 그들에게 수입의 감소를 가져올 게 너무도 뻔한 사실이니까요. 세상에는 돈 때문에 미쳐가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트럼프도, 명성교회도, 대한민국의 의사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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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11 10: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12-13 18: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길은 모두에게 다른 말을 건다 - 위태로운 정신과의사의 행복한 산티아고 피신기
김진세 지음 / 이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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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잠에서 깨자마자 무작정 걷고보는 게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나의 오래된 일상이다. 학창시절부터 지켜온 워낙 오래된 습관인지라 뇌가 명령하거나 의무적인 사명감으로 움직여지는 게 아니라 으레 그렇게 하는 것으로 몸은 기억하고 있다. 그런 까닭에 나는 매년 연초의 신년 계획에 남들 다 하는 '운동하기'를 목록에서 뺄 수 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어깨가 으쓱해진다. 사실 제 몸을 위하는 일인데 굳이 다른 사람의 칭찬이나 부러움이 필요한 건 아니지만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찬하는 '걷기'에 대하여 곰곰 생각해보는 경우는 더러 있다. 그렇다고 걷는다는 행위 자체에 대한 무의미한 열광 대열에 무작정 동참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보다는 오히려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 예찬>을 이따금 들춰보며 맘에 드는 구절을 소리 내 읽어보는 게 더 낫지 않나 싶기도 하고 말이다. '시간이 흘러가면서 발걸음을 앞으로 밀어내는 것은 그 무시무시한 괴로움의 씨앗이 아니라 자기변신, 자기 버림의 요구,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 길과 몸을 한덩어리로 만드는 연금술을 발견해야 한다는 요청이다. 여기서 인간과 길은 행복하고도 까다로운 혼례를 올리며 하나가 된다.'('걷기 예찬' 중에서)

 

정신과의사 김진세의 산티아고 순례기 <길은 모두에게 다른 말을 건다>는 저자가 찍은 사진과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 그때 그때의 순간적인 감성과 스치는 생각들을 메모식으로 기록한 일반적인 산티아고 순례기와는 조금 다른 책이다. 사진도 없을 뿐만 아니라(아주 없는 건 아니고 책의 맨뒤에 부록처럼 묶였다) 생각의 편린들을 쥐어짜듯 그러모은 듯한 느낌도 들지 않는다. 적어도 내가 읽기에는 그러했다.

 

"삶은 음미하는 것이다. 급하게 보내면 언제 갔는지도 모르게 지나가버리는 삶, 비록 지긋지긋한 삶이라도 그 고통에서 헤어나오고 싶은 것이지, 실제로 인생이 빨리 흘러가길 바라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인생을 즐기려면, 마치 음식을 천천히 씹으며 참맛을 느끼듯, 천천히 살아가야 한다." (p31)

 

정신과의사로서 저자는 서울에서 환자를 많이 보기로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평일 진료는 말할 것도 없고 주말이나 야간 진료도 마다하지 않는 저자가 수백 편의 정신의학 칼럼과 인간 심리에 대한 단행본만 여덟 권, 방송 출연과 강연까지. 그야말로 저자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던 것이다. 남들 두 배, 세 배 몫의 일을 하면서도 거뜬했던 그에게도 슬럼프가 찾아왔다. 일상이 무너지고 상담조차 귀찮은 일이 되더니 급기야 환자에게 짜증을 내는 사태까지 이르렀다. 결국 그는 자신의 버킷리스트에 있던 '산티아고 길 순례'를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했다. 단순히 버킷리스트로만 간직할 줄 알았던 일을 실행에 옮긴다는 게 말처럼 쉽지만은 않았을 터, 가뜩이나 정신과의사라는 자신의 직업에서는 더더욱.

 

"누구나 상실을 겪는다. 아버지를 잃은 야스퍼도, 동생을 잃은 라우라도, 그리고 우리 모두가 마찬가지다. 살다보면 어느 날, 한 번 이상의 상실을 마주해야 한다. 상실은 피할 수 없는 삶의 한 과정이다. 너무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인간의 상실은 역설적으로 축복이다. 우리는 상실을 통해서 커다란 아픔을 맛보지만, 그 아픔이 우리를 성숙하게 한다. 삶은 그렇게 상실을 통해 깊어진다." (p.232)

 

무작정 걷다 보면 생각이 없어지거나 반대로 생각이 많아지는 순간이 온다. '걷기'라는 단순한 반복운동이 주는 효과일 것이다. 아무 생각도 없이 아주 먼 거리를 걷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지만 하나의 생각에 몰두하여 아주 깊이 빠져드는 일도 더없이 즐겁다. 사는 게 걷는 것만큼이나 단조로웠으면... 하고 생각할 때도 있다.

 

"처음에는 낯선 길이었다. 시간과 공간이 다른 지구별의 낯선 지점에 서 있었다. 걷다보니 그 길이 친근해졌다.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하지만 이제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두렵다. 그 두려움 속에서 내게 기적이 일어났다. 기적은 '혼자가 아니다'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내가 사는 이 세상에는 나말고도, 커다란 나무를 꺾을 만큼 거친 바람도 있고, 영화의 한 장면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은혜를 갚은 사울도 있다. 그리고 그 순간에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펼쳐지는 기적을 주관하는 '존재'가 있다. 사람과 자연, 그리고 '존재'는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래서 기적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사람과 자연에 대한 배려와 존중은스스로를 위한 것이다. 좀더 신중하고 진지히게 인생을 살자. 누군가 지켜보고 있으니 말이다.' 별똥별이 떨어진다." (p.333)

 

나이가 들수록 삶에서 오는 두려움을 이기고 좀더 초연해질 수 있는 까닭은 그것이 비단 나만 겪는 일이 아니라는 걸 경험이나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 알게 되기 때문이다. 상실의 고통도, 경제적 어려움도, 인간관계의 복잡한 얽힘도 언젠가는 다 지나가게 마련이고, 현실에서 바라보는 과거는 누구에게나 아릿한 그리움으로 남는다는 사실을 저절로 알게 된다. 우리가 순례길에 매료되는 것도 다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인생에서 겪는 보편적인 경험들을 그 길에서 압축적으로 맛볼 수 있고, 그런 고통들을 나만 겪었던 게 아니구나, 하는 안도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만남과 헤어짐, 절망과 기쁨, 기대와 한탄 등이 지금 당장은 나로 하여금 울고 웃게 하지만 시간의 저편으로 밀려나는 순간, 흐릿한 기억으로 변질되어 내게서 점차 멀어진다는 걸 수많은 만남과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배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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