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의 발걸음이 간신히 발만 떼었을 뿐 길게 뻗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대개는 갑자기 끼어든 다른 생각이 처음 생각을 가로막거나 급하게 처리할 일 때문에 생각에 방해를 받거나 하는 경우이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더러 있습니다. 생각의 발걸음을 원하는 곳까지 길게 이어가는 게 두려운 경우가 그러하지요. 생각의 발걸음이 최종적으로 멈추는 지점에서 내가 느낄 좌절이나 속절없음이 지레 겁나고 두렵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가족 중 누군가가 회복할 수 없는 중병에 걸렸다거나 팍팍한 살림살이와 나아지지 않는 형편으로 도무지 앞이 보이지 않는 경우 문득 떠오르는 생각도 더이상 진전시키지 않은 채 생각 자체를 아예 닫아버리게 되지요.

 

새해가 시작되는 1월에는 으레 밝고 긍정적인 이야기만 해야 하지 않나 싶지만 최근에 보도된 끔찍한 뉴스를 보면 차마 그런 말을 쓸 수조차 없겠다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이불에 담뱃불을 끄는 바람에 옮겨 붙은 불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 세 명의 아이들과 조현병을 앓던 엄마가 어린 두 자녀를 아파트 밖으로 내던지고 자신도 투신하였다는 기사 등 어떻게 그런 끔찍한 일을...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아무리 힘든 순간에도 우리는 생각을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생각을 멈추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선천적으로 술을 마시지 못하는 나는 친구들에게 이따금 실없는 농담을 하곤 합니다. "내가 술을 마시지 못하는 것은 워낙 지은 죄가 많아서 취하지 않은 말짱한 정신으로 내 삶의 모든 순간을 두 눈 크게 뜨고 지켜보라는 형벌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그러니 차마 바라볼 수 없는 힘든 순간이 찾아올 때 술에 취해 몽롱한 정신으로 눈을 감거나 다른 곳을 바라볼 수 있는 너희들이 축복을 받은 것이라고 말이죠. 새해에는 우리 모두가 즐거운 생각만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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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페퍼 - 아내의 시간을 걷는 남자
패드라 패트릭 지음, 이진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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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넘게 병원에 입원해 계시던 아버지가 가족의 곁을 영원히 떠난 지 만 1년쯤 지났을 무렵,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해 내가 아는 게 거의 없구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었다. 자신의 뜻대로 풀리지 않는 세상일에 대한 불만을 아버지는 오직 술로 풀어보려 했고, 술에 만취해 귀가한 날이면 여지없이 어머니에게 욕을 퍼붓고 물건을 집어던지는 등 폭력을 행사했고 겁에 질린 자식들이 조심스레 말리기라도 할라치면 그 불똥이 급기야 우리 형제들에게 옮겨 붙곤 했었다. 대상도 불분명한 분노를 아버지는 술과 폭력으로 풀었던 셈이다. 살면서 정신이 말짱했던 때보다 술에 취해 분간을 할 수 없었던 때가 더 많았던 아버지였으니 가족 중 누구도 곁에 가려 하지 않았고 아버지의 고민과 두려움을 이해하고 살갑게 대화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아버지의 고립과 외로움이 커질수록 아버지는 점점 더 술에 의지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건강이 악화되어 병원 신세를 지게 되면서부터 어쩔 수 없이 술과도 멀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미 술과 함께 멀어진 가족과의 거리가 갑자기 좁혀지지는 않았다. 우리는 그렇게 데면데면한 관계를 이어가다가 영영 이별하고 말았다.

 

나는 정말로 나의 아버지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 젊은 시절의 꿈은 무엇이었는지,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때는 언제였는지, 무엇이 그렇게 아버지를 힘들게 했는지 나는 도통 아는 게 없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전혀 궁금하지 않았던 이런 질문들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그러나 나의 궁금증을 해결해줄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여기에 없다. 나는 오직 대답 없는 질문만 늘어 놓을 뿐이다.

 

패드라 패트릭의 소설 <아서 페퍼: 아내의 시간을 걷는 남자>를 읽는 내내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평생을 함께 한 아내를 잃고 깊은 상실감에 빠져 있던 주인공이 자신도 까맣게 몰랐던 아내의 젊었던 시절의 과거를 따라 여행하게 된다는 설정의 이 소설은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 거주하는 구성원들이 각자에 대해 얼마나 무관심한 채 살아가고 있는지 깊이 반성하게 한다.

 

"꼭 1년 전 오늘, 그의 아내가 죽었다. 세상을 떠났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죽었다라는 말이 욕이라도 된다는 듯이. 아서는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증오했다. 그 말은 잔물결이 일렁이는 운하를 가르며 지나가는 보트처럼, 혹은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떠다니는 비눗방울처럼 온화하게 들렸다. 그러나 그녀의 죽음은 그렇지가 않았다." (p.10)

 

곧 일흔 살이 되는 주인공 아서는 그의 아내 미리엄이 살아 있었을 때 행동했던 것처럼 7시 30분에 침대에서 일어나고, 샤워를 하고, 옷을 입고, 면도를 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정각 8시에 토스트 한 쪽과 마가린으로 아침 식사를 준비한 다음, 널찍한 소나무 식탁에 혼자 앉아 식사를 하고, 식사를 마친 8시 30분이면 설거지를 하고 부엌 조리대 상판을 손바닥으로 쓸어낸 다음 레몬향이 나는 물티슈 두 장으로 닦는다. 그러고 나면 비로소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 아서에게는 오스트레일리아에 사는 아들과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딸이 한 명 있지만 그는 여전히 혼자서 생활한다. 독립을 한 자식들은 혼자가 된 아서에게도 무관심하다.

 

어느 날 아서는 아내가 쓰던 유품을 정리하기로 마음먹는다. 아내를 잊고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서라도 그래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아서는 아내의 옷장에서 못 보던 참(charm) 팔찌 하나를 발견한다. 여덟 개의 참이 묵직하고 화려한 금팔찌로부터 그림책에 나오는 태양처럼 뻗어 나가며 달려 있었다. 코끼리, 꽃, 책, 팔레트, 호랑이, 골무, 하트, 그리고 반지.

 

단 한번도 영국을 벗어난 적 없었던 아서는 참을 수 없는 호기심에 이끌려 모험을 떠나게 된다. 모험을 통해 아서는 여행이라고는 자신과 근교에 다녀온 게 전부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그의 아내는 그들이 사는 영국이 아닌, 인도와 파리에서도 살았었고, 유명한 소설가와의 친분도 있고, 누군가를 위해 누드모델이 되기도 했었던 사실을 알게 된다. 심지어 자신이 미리엄의 첫사랑이려니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아내의 연인이 불의의 사고로 죽었고, 절친했던 단짝 친구와도 멀어지는 바람에 그 친구는 미리엄을 여전히 증오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아서는 자신도 몰랐던 아내의 여러 모습을 새롭게 알게 된 후 놀라고 당황하는 한편 배신감도 느끼는 듯했다.

 

"아서는 새벽 2시까지 아내가 소니에게 보낸 편지를 읽었다. 마지막으로 미리엄이 소니에게 자신에 대한 사랑을 처음 밝힌 첫 번째 편지를 한 번 더 읽었다. 그러고는 편지들을 차례로 조그맣게 찢었다. 다음 날 쓰레기통에 버리려고 종잇조각들을 쓸어 모아 손수건으로 싸놓았다. 그는 그의 아내를 잘 알았다. 두 사람은 40년 넘는 세월을 함께했다. 이제 그녀를 놓아줘야 할 때였다." (p.398)

 

아내의 과거를 따라 모험을 떠났던 아서는 모험을 통해 그의 아내 미리엄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을 뿐 아니라 모험은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생각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프랑수아 를로르가 쓴 <꾸뻬 씨의 행복 여행>을 읽었을 때처럼 마음이 푸근해지는 소설이었다. 우리는 사랑한다는 사실 하나로 상대방에 대해 속속들이 다 알고 있는 듯 행동할 때가 종종 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이 영영 우리 곁을 떠났을 때 그제서야 비로소 우리가 그에 대해 아는 게 그닥 많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냈을 때의 상실감은 우리가 미처 몰랐던 그의 과거에 대한 궁금증의 크기와 비례하는지도 모른다. 내가 나의 아버지에 대한 애증이 깊은 까닭도 그런 이유가 아닐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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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 듯 저물지 않는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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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흔히 말하길 나이들면 감동이 줄어든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종종 해본다. 감동이란 건 처음부터 없었거나 우리가 가상의 세계, 이를테면 상상 속에서 지어낸 게 아닌가 하고 말이다. 다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런 사실을 조금식 깨닫게 되는 까닭에 호들갑을 떨며 감동한 척 행동하는 그런 유치한 일에는 숫제 흥미가 없어졌거나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의 관심과 이목을 끌어야 하는 젊은 시절에는 별것 아닌 일에도 일부러 과장된 행동을 보이기도 하고 그런 일을 여러번 반복하다 보면 자신의 행동에 자신조차 속아넘어가는 경우가 종종 있게 마련이다. 그 시절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파블로프의 개'처럼 나는 마땅히 감동해야 하는 어떤 상황에서 조건반사처럼 그렇게 행동했던 게 아닐까.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어쩌면, 원하는 게 없어진다는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면, 안도해도 좋을지 어떨지 사야카는 판단이 서지 않는다. 원하는 게 많은 인생도 피곤하고 성가실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하나도 없는 인생은 어떨까." (p.83)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저물 듯 저물지 않는>은 주인공 미노루가 읽고 있는 소설의 스토리를 이 소설 속에 중간중간 삽입함으로써 책을 읽는 독자는 미노루가 겪는 일과 읽고 있는 소설의 다음 내용에 대해 동시에 궁금해하게 된다. 마치 2권의 소설을 한꺼번에 읽는 느낌이다. 그러나 그게 꼭 장점으로만 작용하는 건 아닌 듯싶다. 소설과 현실 세계를 교묘히 섞음으로써 쉰의 나이에도 아직 철이 들지 않은 주인공 미노루의 현실 인식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책을 읽는 독자 역시 소설과 소설 속 현실을 구분하지 못한 채(또는 소설 속 현실보다는 미노루가 읽는 소설의 스토리에 더 집중한 채) 책을 읽게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나기사는 어떻게 된 일인지 책 읽는 버릇을 물려받은 듯한 하토가 걱정이다. 지금도 옆방에서 다다미 위에 다리를 쭉 뻗고 벽에 등을 기댄 자세로 두꺼운 어린이 책을 읽고 있다. 책에 몰두하는 딸이 나기사에게는 현실을 (또는 엄마를?) 거부하고, 자신의 껍데기 안에 틀어박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기사와 둘이 있을 때 미노루가 그랬던 것처럼." (p.112)

 

주인공 미노루는 부모로부터 물려 받은 유산으로 부족함 없이 살고 있다. 특별한 목표도 없고 그렇다고 모험을 즐기는 성격도 아니다. 그가 즐기는 유일한 취미는 독서다. 미노루와 사귀었던 나기사는 책에만 집착하는 그의 모습에 질리고 만다. 결국 나기사는 딸 하토를 낳은 후 미노루와 결별하고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 나기사는 미노루가 지불하는 하토의 양육비마저 거절한다. 그렇다고 부녀간의 만남조차 가로막는 것은 아니다. 미노루의 재산은 미노루의 친구이자 세무사인 오타케가 전적으로 관리한다. 다양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재산을 늘렸던 부모 세대와는 달리 미노루와 그의 누나인 스즈메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그닥 즐겨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담스러워하는 측면이 더 강하다. 그러다 보니 스즈메는 일본을 떠나 독일에서 머물고 미노루 또한 연신 책에 빠져든다. 성향도 비슷하고 서로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미노루와 스즈메는 남매 이상으로 가깝다. 틈만 나면 스카이프로 통화를 하고 싶어하는 스즈메와 그런 누나를 부담스러워 하거나 귀찮아 하지 않는 미노루.

 

"지금 스카이프 할 수 있어? 하는 스즈메의 문자가 날아왔을 때, 미노루는 저녁을 벌써 먹고 잠옷 차림으로 침대의자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응. 잠깐 기다려. 그렇게 회신을 보내고 컴퓨터를 켠 다음 스카이프를 실행한다. 연결되는 짧은 시간에도 그만 책으로 눈을 돌리고 만다." (p.311)

 

미노루 주변에 배치된 인물들은 단조롭다. 사진작가인 스즈메가 독일에서 상을 받았을 때, 이를 기념하기 위해 문을 연 소프트아이스크림 가게 '슈프레 파크'의 정직원인 유마, 미혼모인 유마가 출산 때문에 일을 하지 못하게 되자 아르바이트생으로 고용된 유마의 친구 아카네, 미노루의 건물에 세들어 사는 사야카와 치카 커플, 미노루의 학창시절 친구이자 나이가 들어 재회한 준코, 미노루의 옛연인 나기사와 그녀의 딸 하토, 미노루의 친구이자 재산 관리인 오타케, 미노루의 친누나인 스즈메 등이다.

 

나이가 쉰이 되었는데 현실에 무감각하고 책에만 빠져 사는 미노루를 주변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미노루는 자신이 읽고 있는 소설의 배경이 오히려 더 현실감있게 느끼곤 한다. 조금만 걸어도 땀이 송글송글 맺히는 일본의 여름을 살면서도 그의 생각은 하얀 눈이 쌓인 북유럽의 어느 겨울에 가 있는 것이다. 그날이 그날 같은 현실의 단조로운 일상은 미노루에게 전혀 자극을 주지 못한다. 그가 읽고 있는 미스터리 소설이 오히려 더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러나 그것이 꼭 미노루가 코앞의 미래를 걱정할 정도로 가난하지 않기 때문은 아닌 듯하다. 미래를 걱정하는 보통의 사람들도 몸은 비록 현실 세계에 머물고 있지만 현실이 고달플수록 우리의 생각은 미래에 자신이 살고 싶은 화려한 별장이나 자신이 꿈꾸는 이상의 한 장면을 헤매게 되지 않던가. 사람들은 미노루처럼 오직 상상의 세계를 탐하면서 현실에서 극단적으로 내몰리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상상과 현실을 빈번하게 오가며 살게 마련이다.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로 등장하는 미노루의 친구 오타케 역시 완벽함을 추구하는 그의 성격과는 달리 재혼한 어린 아내의 일상을 머릿속에서 수시로 그려보곤 한다.

 

작가인 에쿠니 가오리는 미노루의 무덤덤한 일상과 그가 읽는 소설의 드라마틱한 장면을 대비시킴으로써 책을 읽는 독자들 또한 나이듦에 대해 한번쯤 생각하도록 한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바쁜 일상을 살고 있는 우리들이기에 소설 속 미노루처럼 현실을 그저 아무런 흥미도 없이 몽롱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건 아닌지 한번쯤 점검해보라는 권유일 수도 있다. 나이가 들수록 감동이 사라진다는 건 자신의 삶으로부터 멀어지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자신의 삶을 그때 그때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 시간만큼 우리는 살았으나 살지 않았던 것과 진배없다. 하루 종일 눈이 내렸다. 무덤덤했던 하루가 금세 저물고 있다. 나는 하루를 살고 있는가. 아니면 하루를 지우고 있는가. 나는 지금 스스로에게 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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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를 시작하는 이맘때면 몸도 마음도 으레 바쁘다. 딱히 할 일이 많아서 시간에 쫓긴다기보다는 뭔가 해야 할 일이 여전히 남아 있는 것 같은 막연한 불안감이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새해라고 다들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느라 분주한데 나만 혼자 손을 놓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지나친 우려가 그렇게 만드는 듯도 싶다. 이런 까닭에 잠을 충분히 잔 듯한 날도 여전히 피곤하고 온몸이 녹작지근한 밤에도 쉽사리 잠들지 못한다.

 

하루 종일 눈발이 날렸다. 조금 그치는가 싶다가도 내다보면 어느새 눈발이 흩날리고 그러다가 반짝 해가 나기도 했다. 남과 북의 협상 대표단이 2년만에 얼굴을 마주한 오늘, 지난 정부의 실정으로 어수선했던 나라가 조금씩 안정을 되찾아가는 느낌이다. 일본과의 어처구니없는 위안부 협상도, UAE와의 외교문제도 이제야 서서히 제자리를 찾는 것이다. 이처럼 산적했던 문제들이 조금씩 풀려갈 때마다 선거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된다. 지도자 하나 잘못 뽑는다고 나라가 망하기야 하겠어? 하는 생각이 얼마나 안일했던가 반성하는 마음이 절로 드는 것이다.

 

뉴욕에 사는 여동생에게 전화를 했다. 체감온도 영하 70도라는데 어떻게 지내고 잇는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함께 집안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고 갇혀 지내는 신세라고 했다. 얼마나 춥고 바람이 거센지 나갈 수도 없다고 했다. 사람이 저지른 잘못을 고스란히 되돌려 받는 듯한 느낌이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40도가 넘는 폭염으로 동식물이 죽어나가고, 사하라 사막에는 폭설이 내리고... 나만 편하면 된다는 이기심이 지구 환경을 이토록 나쁘게 만들지 않았을까. 누구를 탓할 것도 없이 자신의 잘못을 진심으로 되돌아볼 시점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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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라쉬 브런치 - 번역하는 여자 윤미나의 동유럽 독서여행기
윤미나 지음 / 북노마드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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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온통 고통이거나 악몽으로 보일지라도 그 자리에서 망연히 붙박인 듯 서 있을 일은 아니다. 그 사이사이의 아주 작은 기쁨이나 희망을 찾아 어렵사리 발을 딛고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갈 일이다. 그러다 보면 고통의 색깔은 점점 옅어지거나 완전히 잊혀지게 마련이다. 적어도 삶의 빛깔이 휘황찬란한 무지개빛은 아닐지라도 공포의 신음은 조금쯤 덜 수 있지 않을까. 오르한 파묵의 소설 <검은 꽃>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인생만큼 경이로운 것은 없다. 유일한 위안인 글쓰기를 제외하고는." 삶의 위안이 되는 글쓰기가 없다면 고통으로부터 잠시 피할 수 있는 도피처나 은신처를 잃는 것과 같다.

 

강원도에서 책을 읽고 번역을 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윤미나. 다른 사람의 글을 번역한다는 건 또 다른 창작일 수도 있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쓰고 그것으로부터 작은 위안을 얻는 것과 번역은 사뭇 다른 차원의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인지 작가의 독서여행기 <굴라쉬 브런치>는 솔직하다 못해 직설적이라는 느낌마저 든다. 작가의 여정은 체코의 프라하와 베네쇼프,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브니크와 자그레브, 슬로베니아의 류블라냐와 블레드로 이어진다.

 

"여행이란 게 원래 시시하다. 성당을 하나 더 보고, 바로크니 고딕이니 꽥꽥거리는 것이 중요한 것 같지는 않다. 물론 그것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아는 만큼 더 보인다는 것은 명징한 진실이다. 하지만 나는 그냥 그 순간을 살았다는 것이 중요하다. 무지의 소치로 눈부신 건축과 역사를 상한 우유처럼 미련 없이 포기해야 했지만, 흐리멍덩한 눈빛으로 오직 시간을 앞으로 밀어내기 위해 걷고 또 걸었던 그 시간도 좋았다. 어차피 여행은 각진 다면체 세상을 내 맘에 맞게 이리저리 둥글리는 작업이 아닐까." (p.86)

 

애초에 나는 무엇이거나 무엇이기를 바라는 존재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시간의 추이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나의 모습과 그 변화를 매순간 확인하고 싶은 나는 무엇이었다가 또 다른 무엇이 되고 싶어 앞으로 나아가는 존재라는 걸 일상에서 벗어날 때마다 수시로 생각하는 것이다. 작가도 그랬던 모양이다. 여행은 몸이 떠나는 게 아니라 나로부터 마음이 벗어나는 것임을 새삼스레 느낀다. 여행지의 고독은 익숙했던 내 몸으로부터 멀어지는 의식과도 같다. 여행의 침묵 속에서 작가도 어쩌면 자신의 진짜 모습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침묵에도 무늬가 있다는 말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난다. 고독하거나 지루하거나, 두려움에 짓눌려 있거나 거짓말을 꾸며내는 중이거나.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침묵한다. 지금 이 순간의 침묵은 아무 무늬도 없는 순전한 것이다. 텅 빈 지구에 평화가 수북이 쌓여 있다." (p.109)

 

여행의 좋은 점은 같은 일상을 살아도 그 일상에 쉽게 중독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러므로 하루하루의 일상이 마치 개성이 뚜렷한 원시림처럼 개별적인 것으로 느껴진다. 반대로 실생활에서의 일상은 아무리 개성이 뚜렷한 일상으로 하루를 채워본들 그날이 그날 같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작가 역시 프라하의 카를교를 오가고 두브로브니크의 스트라툰 거리를 목적도 없이 걷고,슬로베니아의 류블라냐와 블레드를 슬슬 어루만지면서도 각각의 날들은 더없이 특별했던 날들로 기록한다. 무늬도 없을 듯한 이런 흔한 일상이 여행지에서는 기억의 큰 파도를 넘어 뚜렷한 흔적을 남기곤 한다.

 

"평소엔 여자라는 신분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다. 많은 경우 그것은 김칫국물이 흐르는 도시락처럼 난감한 현실이다. 늘 몸가짐을 조심해야 하고 욕망을 사려야 하고 본심을 감추어야 한다. 대충 여자 흉내라도 내고 다니려면 싸지고 다녀야 할 짐이 가방 하나 가득이다." (p.139)

 

작가는 프라하를 거닐며 영화 <타인의 삶>, 보후밀 흐라발의 소설 <엄중히 감시받는 열차>,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남아 있는 나날>을 떠올리는가 하면 두브로브니크에서는 존 레넌의 노래 <노르웨이의 숲>, 토마스 만의 소설 <베네치아에서의 죽음>, 조지프 헬러의 소설 <캐치-22>, 영화 <이터널 선샤인>을 생각한다. 슬로베니아의 블레드에서는 슬라보예 지젝의 <이라크: 빌려온 항아리>와 토니 마이어스의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 영화 <남아 있는 나날>, 가리타니 고진의 <세계 공와국으로>를 말한다. 각각의 장소에서 만나는 책이나 영화만 보더라도 그 지역의 분위기를 얼추 짐작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블레드에서 작가는 어쩌면 여행자의 고독과 우울을 심하게 느꼈는지도 모른다.

 

"나는 언제나 고백하는 자들이 어리석고 무책임하다고 생각해왔지만, 이번만큼은 지젝의 말을 인용하여 슬쩍 자기모순에서 빠져나가야겠다. 고백하지 말라. 그것 말고는 여행의 매력을 설명할 길이 도저히 없을 때를 제외하고는." (p.242)

 

새해가 시작된 지 벌써 서른 시간도 더 지난 지금, 세상은 2018년이라는 시간에 조금 더 익숙해져가고, 2017년의 기억이 차츰 빛을 바래고, 새로 태어난 듯한 사람들이 무작정 희망을 얘기하는 동안 나는 어느 어두운 골방에 누워 삶의 고단함을 견디고 있는 누군가의 신음을 떠올렸다. 문학은, 때로는 음악이나 영화는 자신의 부드러운 입술로 까슬까슬한 삶의 감촉을 느껴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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