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악한 책, 모비 딕
너새니얼 필브릭 지음, 홍한별 옮김 / 저녁의책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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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 딕>을 생각할 때면 '내 영혼에 축축하고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11월이 있다.'는 소설 속의 한 문장이 떠오르곤 한다. 자기를 이슈메일이라고 불러달라는 사람 그가 했던 말이다. 소설에서 그는 포경선 '피쿼드'호에 승선하여 흰 고래 '모비 딕'을 쫓는 항해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인물이며 독자들에게 세상이라는 가면 너머의 진실을 보여주기도 한다. 엄혹한 삶의 현실을 밑바닥까지 체험했던 이슈메일은 파멸을 향해 내달린 '피쿼드'호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인물이 되어 동료의 죽음을 대가로 얻은 삶의 비밀을 독자들에게 전하는 역할을 한다. 24만 단어, 전체 134장의 장대한 서사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작가 허먼 멜빌을 대신하는 이슈메일의 철학적 사유가 더해짐으로써 더욱 매력적인 소설로 읽혀진다. 게다가 음울하고 유약한 성격의 이슈메일이 내뱉는 한 마디 한 마디의 말은 얼마나 매혹적인지...

 

"이슈메일은 소설의 정서적 철학적 중심이 될 삶에 대한 태도를 떠올리고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삶이라고 부르는 기묘한 뒤죽박죽 사태 속에서 때로 야릇한 순간이 찾아온다. 우주 전체를 광대한 규모의 농담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때다. 농담의 속뜻을 어렴풋하게밖에는 파악하지 못하고 이 농담이 누구도 아닌 자기를 놀리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말이다." 이슈메일은 이런 삶의 태도를 "자유롭고 느긋한, 순한 무법자 철학"이라고 부른다." (p.25)

 

너새니얼 필브릭의 <사악한 책, 모비딕>은 제목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저자가 끔찍이도 좋아하는 소설 <모비 딕>을 주제로 자신이 쓴 글을 한 권의 책으로 엮은 것이다. 미국의 성서라고도 불리는 <모비 딕>을 저자는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74년에 처음 접한 후 지금까지 최소 여남은 번은 더 읽었다고 고백한다. 너새니얼 필브릭은 <모비 딕>을 얼마나 아꼈던지 저자 허먼 멜빌의 우상이자 문학적 영감을 제공했던 '너새니얼 호손'의 이름을 자신의 이름에 넣었던 것으로도 모자라 '피쿼드'호가 출항했던 낸터킷 섬의 실제 주민이 되었다고도 한다. 이 정도면 <모비 딕>의 애독자라기보다는 시쳇말로 '덕후'에가까운 게 아닌가. 그럼에도 저자는 <모비 딕>에서 지금도 여전히 새로운 것을 발견한다고 말한다.

 

"나는 『모비 딕』을 가장 최근에 읽었을 때에야 페달라라는 인물의 중요성을 깨달았다고 시인해야겠다. 페달라와 마닐라에서 온 노잡이들은 그냥 지옥 같은 장식물로 갖다놓은 것이 아니었다. 이들은 에이해브를 에이해브로 만드는 핵심 요소였다. 어떤 지도자도, 아무리 미치광이라고 해도 내부 조언자나 계속 부추기고 다그치는 사람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p.41)

 

소설 <모비 딕>의 해설서이기도 한 이 책은 저자가 반복하여 읽었던 자신의 애장도서에 대한 헌사이자 그가 소설에서 끊임없이 찾고 발견했던 새로운 사실들을 기록한 보고서이기도 하다. 작가 허먼 멜빌의 경험과 많은 자료, 이를테면 고래잡이와 태평양에 관련된 수많은 학술 논문들과 기록들 그리고 셰익스피어, 밀턴, 베르길리우스의 여러 책들을 통하여 완성된 <모비 딕>은 초기 비평가들의 호의적인 비평에도 불구하고 멜빌이 일흔두 살의 나이로 죽기 전까지 미국에서 고작 3715부가 팔렸다고 한다. 그러나 1차 대전이 끝난 직후, <모비 딕>의 진가를 알게 된 여러 사람들에 의한 찬양이 시작되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지만 『모비 딕』은 앞날을 위해 쓴 책이다. 현재의 불같고 혼란스러운 열정에 저항하는 사람, 높이 나는 캐츠킬 독수리의 영혼을 가진 사람을 그리면서, 멜빌은 불가사의하게도 1851년 미국에 절박하게 필요했으나 거의 10년이 지나 에이브러햄 링컨이 미국 대통령이 되어 전면에 등장하기 전까지는 드러나지 않았던 정치가의 모습을 그려낸 것이다." (p.97)

 

우리는 간혹 원작보다 더 매력적인 어느 서평가의 글에 매혹되어 그제야 비로소 원작을 읽기도 한다. 그때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원작을 탐험하는 독자는 서평가가 마련해 준 해설서를 지도 삼아 원작의 곳곳에 숨겨진 비밀 동굴을 탐험하게 된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모험을 떠났을 때는 결코 발견할 수 없었던 비밀 동굴에서 독자들은 큰 기쁨을 맛보기도 하고 삶의 비의를 깨닫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에 의해 우리가 소위 고전이라 칭하는 대개의 문학 작품이 거친 세월의 풍화에도 불구하고 푸른 생명력을 부여받고, 오랜 시간 새로운 독자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멜빌은 『모비 딕』에서 이슈메일이 지지한 입장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은 것이다. "세속의 모든 것에 대한 회의와 천상의 모든 것에 대한 직관, 이 조합으로 신자가 되지도 불신자가 되지도 않고, 양자를 똑같은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회의와 희망을 뒤섞는 데서 오는 구원, 짧고 터무니없고 부조리한 삶 앞의 온화한 극기심, 이것이 내가 『모비 딕』을 읽는 이유다." (p.130)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부푼 희망을 안고 내가 읽었던 오래전의 <모비 딕>은 누렇게 변색된 세월의 흔적만큼이나 망각의 더께가 이끼처럼 쌓이고 있다. 그러나 고전의 생명력은 나의 대에서 결코 소멸되지 않는다. 너새니얼 필브릭과 같은 탐서가가 존재하는 한 나의 아들 세대로, 또 다시 아들의 아들 세대로 면면히 이어질 것임을 확신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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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나 미세먼지가 심하던지 실내에서도 목이 칼칼하고 가슴이 답답하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도 마치 운무 자욱한 풍경처럼 시야가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꽉 막혔던 남북 관계는 남북 고위급 회담에 이어 오늘도 남북 차관급 실무회담이 열리는 등 조금씩 숨통이 트이고 있지만 말이다. 사실 이전 정부는 대통령의 의무를 방기한 채 직무유기를 한 측면이 없지 않았다. '대통령은 헌법에 따라 국가의 독립과 영토 보전의 의무, 국가의 계속성과 헌법 수호의 책무, 겸직 금지 의무,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한 성실한 노력 의무, 취임 선서문 상의 직책을 성실히 수행할 의무를 진다.'고 되어 있지만 헌법 수호의 책무는 물론 평화적 통일을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손을 놓고 있음으로써 대통령 직을 수행하는 사람은 육체적, 정신적으로 편하기는 했겠지만 말이다.

 

이번 주 들어 아침 운동을 못하고 있다. 몸이 찌뿌듯하고 영 개운치가 않다. 컨디션이 안 좋은 건 비단 나만의 문제가 아닐 터, 오늘은 국민들의 심기를 건드리는 사건들이 여럿 있었다. 모 대학교의 대학원 박사과정에 면접도 보지 않은 연예인이 합격했다는 기사가 있었는가 하면 국정원 특활비 수수 의혹, 다스 실소유주 의혹 등 기정사실화 된 범죄 건만 해도 차고 넘치는 전임 대통령 2mb의 성명서 낭독도 있었다. 그의 말인 즉, '적폐청산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는 검찰 수사에 대해 많은 국민들이 보수궤멸을 겨냥한 정치공작이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정치보복'이라는 주장이었다. 대한민국 대통령을 지냈던 사람으로서 그의 주장은 비겁하기 그지없었다.

 

한 국가의 지도자였던 사람은 재임시절 혹여라도 잘못이 있었다면 과감히 인정하고 당당하게 처벌을 받을 필요가 있다. 변명으로 일관하며 비겁하게 나불댈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것이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한다. 오래전부터 의혹으로만 떠돌던 사건들이 하나둘 그 실체가 밝혀지고 있는 마당에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기는커녕 여전히 변명과 꼼수로 피해가려고 하는 모습은 전직 대통령의 자세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지금으로서는 처벌을 감수하겠다는 짧은 인사만이 국민들에게 하는 최대한의 예의이자 땅에 떨어진 전직 대통령의 체면을 다시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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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만담 - 책에 미친 한 남자의 요절복통 일상 이야기
박균호 지음 / 북바이북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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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서문에는 '왜 행운은 나만 피해 다니는 것일까? 왜 나는 항상 패자가 되는 것일까? 라는 자책에 시달리는 사람이 이 책을 읽었으면 좋겠다.'는 저자의 바람이 실려 있다. 괜히 짠해지는 대목이다. 그 말인 즉, 저자 역시 삶에서 행운이 따르지 않았고 이제껏 항상 패자로 살았다는 뜻일 터, 이 책을 읽는 다른 사람이라도 부디 행운을 거머쥐었으면 하고 바란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마저도 헛된 바람으로 들리는 건 왜일까?

 

"나로 말하자면 책과 정신적 사랑을 나누는 사람에 속한다. 헌책에 적힌 전 주인의 메모를 그리도 귀하게 여기고 재미나게 읽는 편이지만 정작 나는 책에 메모하지 않는다. 물론 굳이 따지자면 나는 온건한 정신적 사랑파에 속한다. 띠지를 소중히 여기지는 않아서 새책을 받으면 띠지는 휴지통에 직행시킨다. 또 책갈피를 사용하지도 않고 볼펜을 끼워두거나 그것마저도 귀찮으면 그냥 읽던 쪽을 접는다." (p.63)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책벌레이자 책 수집가인 저자 박균호는 그의 책 <독서만담>에서 책과 함께 살아온 자신의 지난 삶을 아주 재미있게 기록하고 있다. '츄리닝, 난닝구, 삼선 쓰레빠'로 무장하고 하릴없이 동네를 어슬렁거리는 '아재 패션'만큼이나 그의 수다는 구수하고 넉살이 좋다. 물불 가리지 않고 희귀본을 손에 넣고자 했던 일화나 시골 학교의 기숙사에서 학생들과 함께 거주하던 시절의 이야기, 12년간 어머니의 병간호를 맡았던 이야기, 늦게 배운 담배와 흡연에 얽힌 이야기 등 우리네 보통 사람들의 소소한 일상이 저자의 맛깔스러운 입담으로 재탄생된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에는 언제나 자신이 읽었던 책이 등장한다. 책이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라는 강조라도 하려는 듯 말이다.

 

"도저히 미워할 수도 없고 오히려 마음이 짠해지는 패배자들의 삶은 날조된 이미지나 탐욕으로 점철된 승리자의 삶보다 더 배울 만한 가치가 있다. 더구나 몇 사람을 제외하고 우리는 모두 패배자다. 그리고 우리의 일상생활은 패배와 실패의 연속이다. 나는 아내와의 싸움에서 늘 패배하며, 아내는 아내대로 매주 로또 당첨 번호를 비껴간다." (p.171)

 

저자는 김훈의 소설 <화장>과 파드마삼바바의 <티벳 사자의 서>, 시니의 <죽음에 관하여>를 통해 품위 있는 죽음에 대해 배우고, 이윤기의 소설 <하늘의 문>을 통해 가정의 평화를 지키는 열쇠를 발견하기도 한다. 또한 결혼 전 필독서로 <최성애 박사의 행복수업>, <셀프 & 커플 5분 마사지>,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를 권하기도 한다.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입장에서 쓴 사노 요코의 <자식이 뭐라고>, 최민준의 <아들 때문에 미쳐버릴 것 같은 엄마들에게>를 통해 아이들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었다고도 말한다.

 

저자의 이야기에 한참 빠져들다 보면 인생에 있어 책만큼 소중한 게 없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그가 풀어놓는 어떤 에피소드에도 책이 빠지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마치 책이라는 삶의 안내서도 없이 인생을 마구잡이로 살고 잇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엄습하기도 했다. 삶이 암담해지는 어느 순간에, 갈피를 잡지 못해 허둥대는 어떤 때에도 그 상황에 맞는 책 한두 권쯤 떠올리지 못한다면 나의 삶은 그저 '무대뽀 인생'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에게 글쓰기는 일종의 취미 생활에 가깝다고 말해왔다.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꼭 내가 글쓰기를 즐기는 것 같지는 않다. 글쓰기가 나의 취미 생활이라면 휴대전화 카메라로 셀카를 찍듯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자주 써야 한다. 실상 글을 쓰는 장소는 여름에는 에어컨이 가동되고 겨울에는 온풍기가 작동되는 도서관이어야 하고, 시간을 따지자면 주말이나 하루 종일 다른 스케줄이 없는 날이어야 한다. 더불어 노트북과 인터넷을 사용할 수도 있어야 한다. 나름의 감옥을 구축해야만 글을 쓸 수 있다는 뜻이다." (p.258)

 

'책에 미친 한 남자의 요절복통 일상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은 박균호의 <독서만담>은 우리가 일상 속에서 책과 한 발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물론 저자가 이 책에서 소개하는 책의 제목을 모두 구매 목록에 넣다 보면 지름신이 강림한 어느 날 저녁 나도 모르게 대량 구매의 버튼을 누를 수도 있기 때문에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황홀한 글감옥>을 썼던 조정래 작가처럼 오늘은 하루쯤 글감옥이 아닌 독서 감옥에 갇히는 것도 즐겁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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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도서관에 들를 때마다 드는 생각은 '이 많은 책을 도대체 누가 다 읽는 걸까?' 하는 것이다. 간혹 그 누구의 선택도 받지 못할 듯 보이는 두껍고 따분한 제목의 책을 만날라치면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런 책들을 우연히 볼라치면 서가에서 꺼내어 휘리릭 책장만 넘겨 보고는 다시 그 자리에 꽂아 두곤 한다. 빌리지는 않지만 쌓인 먼지라도 털어낼 요량으로 말이다. 그렇게 눈인사만 주고받던 책들이 어쩌다 대출이라도 되어 책이 놓였던 자리의 빈 공간을 발견하는 날이면 책을 내가 빌린 것도 아닌데 괜히 뿌듯해진다. 책의 진가를 발견한 누군가에 의해 책으로서의 소임을 다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었다는 사실이 마냥 기쁜 것이다.

 

웹서핑을 하다가도 그런 느낌을 받곤 한다. 어느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할 듯한 기사의 아래쪽에 누군가가 남겨 놓은 짧은 댓글을 보노라면 읽고 있는 내가 괜히 고마운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저마다의 쓰임대로 쓰일 수 있을 때 기쁘지 않겠는가. 인터넷에 떠도는 짧은 글이든, 누군가가 몇 년 혹은 평생을 바쳐 완성하였을 한 권의 책이든, 완전한 형태로 세상에 던져지기까지 분명 누군가의 노력과 시간이 투자되었을 테고 그것을 알아주는 다른 누군가가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반갑지 않을까.

 

문재인 대통령의 생일이 1월 24일이라는 사실을 지하철 광고를 통해 알았다. 아이돌 가수도 아닌 정치인의 생일 축하 광고를 지하철의 영상 광고로 보게 될 줄이야!! 신선한 느낌을 받았다. 우리나라 국민의 민주적 역량이 이 정도로 높아졌구나, 생각하니 눈물이 날 만큼 벅차올랐다. 광고 제작에 쓰였을 많은 사람들의 시간과 노력. 돈을 떠나서 그게 고마운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을 시샘하는 누군가는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비난의 말을 쏟아냈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정치인이든 누구든 누군가의 진심을 알아주고 그것에 감사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건 그 사회가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했던 대한민국의 정치가 이제야 비로소 국민들과 함께 하고 있음을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한 컷의 광고를 통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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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에 대하여 오늘의 젊은 작가 17
김혜진 지음 / 민음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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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을 달구었던 삶의 부지깽이가 주말이면 차갑게 식어버리곤 한다. 서늘한 한기가 목덜미를 쓸고 가는 느낌이다. 어쩌면 나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일주일 내내 지었던 어색한 표정들을 지우기 위해, 때로는 더 깊은 고요를 선물받기 위해, 그리고 소매 끝에 남은 가식의 부스러기를 털어내기 위해 주말에도 이렇게 책을 손에서 내려놓지 못하는 게 아닌가 싶다. 김혜진 작가의 소설 <딸에 대하여>를 손에 올려 놓았을 때, 손끝으로 전해지는 양장본 표지의 차갑고 단단한 느낌에 흠칫 놀란다.

 

늙음에 대해 이렇게 적나라한 표현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서는 오직 그 하나의 문장이 맴맴 맴을 돌았다. 혐오와 배제의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여성의 삶을 주제로 한 이 소설에서 작가는 늙어간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오래전 태어날 때처럼 여자, 남자, 그런 성별의 경계를 무너뜨리면서 다만 한 인간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여자'. 정말이지 그렇다. 우리가 태어날 때 그랬던 것처럼 늙는다는 건 성별의 경계도, 네 것 내 것을 가름하는 소유의 경계도 조금씩 무너뜨리는 일인지도 모른다.

 

"언젠가부터 나는 뭔가를 바꿀 수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천천히 시간 밖으로 밀려나고 있다. 뭐든 무리하게 바꾸려면 너무나 큰 수고로움을 각오해야 한다. 그런 걸 각오하더라도 달라지는 건 거의 없다. 좋든 나쁘든. 모든 게 내 것이라고 인정해야 한다. 내가 선택했으므로 내 것이 된 것들. 그것들이 지금의 나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닫는다. 과거나 미래 같은, 지금 있지도 않은 것들에 고개를 빼고 두리번거리는 동안 허비하는 시간이 얼마나 아까운지. 그런 후회는언제나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늙은이들의 몫일지도 모른다." (p.30)

 

<딸에 대하여>라는 제목의 이 소설은 제목과는 달리 딸의 입장에서 스토리가 전개되지는 않는다. 이야기는 시종일관 어머니인 '나'의 시선에 비친 딸의 모습이며, 생각 또한 오롯이 '나'의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살갑고 가꿔야 할 두 사람의 관계는 매번 엇나가고 틀어진다. 그럴 수밖에 없다. 남편을 잃고 사력을 다해 애지중지 키워온 딸이 동성애자인 까닭이다. 아무리 개방적인 사고를 지닌 어머니일지라도 우리 사회 전체가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동성애자를 자신의 딸이 그렇다고 하여 무작정 감싸고 옹호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산 속 깊이 들어가서 살지 않는 한 다른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일 수도 없을 터였다.

 

"다른 부모들은 평생 생각할 이유도, 필요도 없는 그런 문제를 던져 주고 어디 이걸 넘어서 보라는 식으로 날 다그치고 닦달하는 걸까요. 왜 저를 낳아 준 나를 이토록 슬프게 만드는 걸까요. 내 딸은 왜 이토록 가혹한 걸까요. 내 배로 낳은 자식을 나는 왜 부끄러워하는 걸까요. 나는 그 애의 엄마라는 걸 부끄러워하는 내가 싫어요. 그 애는 왜 나로 하여금 그 애를 부정하게 하고 나조차 부정하게 하고 내가 살아온 시간 모두를 부정하게 만드는 걸까요." (p.84)

 

결혼 전 초등학교 교사였던 '나'는 결혼 후 딸애를 낳고 교습소에서 일을 했던 것을 필두로 도배, 유치원 통학버스 운전, 보험 세일즈, 구내식당 조리사를 거쳐 지금은 요양병원의 요양 보호사로 일하고 있다. 대학에서 시간제 강사를 하며 따로 살던 딸애는 살던 집에서 쫓겨날 신세라며 나에게 '돈'을 부탁한다.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나'는 결국 딸애의 부탁을 들어주지 못했고, 딸애는 연인인 그 애와 함께 '나'의 집으로 이사한다.

 

"이 애와 나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니까 언제나 적당한 만큼의 배려와 예의를 보일 수 있는 거겠지.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세탁기가 있는 다용도실을 나왔다. 그러니까 나는 번번이 그 애가 하는 말에 동의를 하고 한마디를 보태고 그러면서 어떤 대화라고 할 만한 것을 하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참아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 애는 때때로 지나치게 사려 깊다. 내게 어떤 말이 필요하고, 무슨 말을 듣기 원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p.61)

 

주인공이 돌보는 일인실의 노인 '젠'은 젊은 시절 해외에서 공부하며 한국계 입양아들을 위해 일하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이주 노동자들을 위해 일하다 이제는 치매에 걸려 요양원 신세를 지고 있다. 평생을 사회와 타인을 위해 헌신했을 뿐만 아니라 충분한 돈을 내고 요양원에 들어왔건만 젠은 이제 가족도 없는 치매 노인이라는 이유로 요양원에서도 쫓겨날 처지가 되고 말았다.

 

"노을이 깔린다. 지치고 서글픈 빛깔이 교문 너머에까지 가닿는다. 이렇게 좋은 시절이 다 가 버렸다는 것을 나는 깨닫는다. 내가 서 있는 자리, 내가 머무는 시간, 그리고 내가 보게 되는 것들, 이런 것들을 통해 이제 다시 올 수 없는, 너무나 좋았던 순간들을 떠올릴 수 있다." (p.96)

 

딸애와 따로 살 때도 결코 인정할 수 없었던 딸애와 그 애와의 관계를 한 집에서 함께 살며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게 되자 '나'와 딸애, '나'와 그 애 사이의 반목과 갈등은 점점 심해져간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던 딸애에 대한 이야기를 '나'는 알아듣지도 못하는 젠에게 자신의 심정을 하소연하며 위로를 받는다. 그러던 어느 날 딸애는 동성애와 관련된 수업을 했다는 이유로 대학에서 해직된 동료 시간 강사를 위해 시민단체와 함께 시위에 나서게 되고 동성애를 반대하는 시민들에게 맞아 병원에 실려가고 만다. 딸애의 부상으로 주인공이 출근하지 않았던 며칠 사이에 요양원 사람들은 '나'도 모르게 젠을 다른 곳으로 보내버린다. '나'는 일련의 이런 일들을 겪으며 딸애와 그 애를 이해하려 노력한다. 비록 마음을 활짝 열고 받아들이지는 못하지만 그들의 상처와 아픈 현실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다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모든 것이 뚜렷해진다. 이 애들은 삶 한가운데에 있다. 환상도 꿈도 아닌 단단한 땅에 발을 딛고 서 있다. 내가 그런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이 애들은 무시무시하고 혹독한 삶 한가운데에 살아 있다." (p.149)

 

소설에서 '나'는 젠의 모습에서 딸애의 미래를 보고 있다.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스스로의 모습을 오직 홀로 지켜보아야 하는 것은 물론 자신을 돌보는 사람들로부터의 수모와 멸시마저 홀로 감당해야 하는 두려움. 그 두려움은 고스란히 딸애를 향한 날선 분노로 표출된다. 그런 분노는 딸애가 지금이라도 다수의 편에 서서 젠과 같은 미래를 맞지 않았으면 하는 '나'의 간절한 바람일지도 모른다. '나'의 바람이 성취될 수만 있다면 '나'는 딸애에게도 딸애의 연인에게도 얼마든지 나쁜 사람으로 남아도 좋은 것이다.

 

무거운 돌덩이를 삼킨 듯 가슴이 답답하다. 그러나 답답함의 끄트머리에는 언제나 사람들의 외면과 눈 감음이 존재한다는 걸 안다. 그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들 모두가 나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비단 그들 속에는 나 자신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삶을 영위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익숙한 쪽, 다수의 사람들이 포진한 쪽에 자리를 잡고 앉아야만 안전하다는 걸 알고 있고 그것은 사사로운 감정이나 도덕적 정의의 결핍이 아닌, 본능에 가까운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도덕의 잣대로도 어찌할 수 없는 실존의 문제인 것이다.

 

'평범한 삶'이라는 게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일인지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잘 알지 못한다. 가족 중 누군가가 몹쓸 병에 걸리거나, 실직이나 부도 등 갑작스럽게 찾아온 경제적 위기만으로도 '평범한 삶'은 아주 쉽게 무너너져버린다. 그러나 사람들은, 젊음도 그렇듯, 다 잃고 난 후에 그 사실을 깨닫는다. 내가 다수의 편에 서 있을 때에는 소수자의 고통이나 아픈 현실을 애써 외면하며 산다. 그것이 나의 가까운 미래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내일 당장 강추위가 몰려올 수도 있다는 것을 오늘을 사는 우리는 잘 믿지 않는다. 그게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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