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차례 봄비가 지나간 숲은 초록으로 무성했습니다. 머리가 시원해질 정도로 새벽 숲의 기온은 적당히 낮았고 황사 마스크를 벗고 깊게 들이마시는 숨은 달았습니다. 미세먼지 가득했던 어제의 공기는 멀리 사라진 듯했습니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표정도 한결 여유롭고 평화로웠습니다. 비 온 뒤에 마시는 무결점의 공기는 아닐지라도 폐부 깊숙이 퍼지는 짜릿한 숨결이 사람들의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듯했습니다. 어쩌면 기분 탓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엊그제 있었던 남북 정상의 만남과 판문점 선언으로 인해 한반도의 공기는 며칠 전의 그것과 크게 달라진 듯 느껴집니다. 그런 느낌은 비단 나만의 감정은 아니겠지요.

 

세계인의 관심이 온통 한반도에 집중된 것도 오랜만인 듯합니다. 지구 상의 마지막 분단국가인 남한과 북한은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분쟁 위험이 가장 높은 지역 중 하나였고, 같은 민족끼리 전쟁을 벌였던, 평화와는 거리가 아주 먼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두 나라의 정상이 손을 잡고 종전을 선언했을 때 뭉클한 감동을 느끼지 않은 사람이 과연 있었을까요. 있더군요. 그것도 뉴스가 닿지 않는 먼 오지 국가의 국민도 아니고 당사국인 대한민국의 국민 중에 말이죠. 정말 미친 놈들이 아니냐고요?

 

그럴지도 모릅니다. 남과 북의 정상이 두 손을 잡는 순간 다른 나라의 기자들도 감동하여 눈물을 글썽이는 걸 보았습니다. 왜 그렇지 않았겠습니까. 정상적인 사람들의 감정은 다들 비슷비슷하기 때문이죠. 그러나 우리나라의 국민 중에도 제정신이 아닌 사람도 있게 마련이지요. 남북 정상회담이 위장 쇼라는 둥 어처구니가 없다는 둥 인류의 보편적인 감정과는 상당히 먼, 소시오패스적인 사고방식의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조금 놀라웠습니다.

 

이팝나무 가로수는 눈이 내린 듯 활짝 꽃을 피웠습니다. 나는 어제 그제 반세기가 넘는 동안 차갑고 냉랭한 바람만 불던 한반도에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오는 낯선 풍경을 TV로, 인터넷으로, 라디오로 보고 또 보았습니다. 입으로는 수없이 말해졌을 '평화'가 가슴으로 이해되는 건 아마도 처음이지 싶습니다. 이 싫지 않은 낯섦이 한반도 전체에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 낯섦, 나는 그것을 지금도 여전히 즐기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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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5-01 2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05-06 16: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지 뉴욕의 맛
제시카 톰 지음, 노지양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평점 :
절판


살짝 금이 간 접시도 금세 눈에 띌 듯한 도시, 최신 유행과 섬세함의 도시, 뉴욕이다. 그러나 패션이든 음식이든 최신이 아니라면 뉴욕에서는 진부한 게 되고 만다. 뉴욕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도 다르지 않다. 아무리 좋은 소재로 무장하더라도 문체와 구성이 작가의 개성을 담아내지 못한다면 차라리 뉴욕은 피하는 게 좋다. 독자는 금세 싫증을 내고 말 테니까 말이다.

 

제시카 톰(Jessica Tom)의 소설 <단지 뉴욕의 맛>은 제목만큼이나 작가의 톡톡 튀는 개성을 잘 담아낸 소설이다. 작가는 미식업계의 이면에 숨겨진 푸드 칼럼니스트의 삶과 사랑,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많은 사람들의 야망과 보편적인 욕망을 잘 풀어냄으로써 '푸드릿(Food Lit)'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소설의 주인공인 티아 먼로는 예일대를 졸업한 뒤 뉴욕대 대학원으로 진학한다. 전설적인 음식 작가 헬렌 란스키 밑에서 인턴 과정을 경험함으로써 최고의 푸드 칼럼니스트로 성장하고자 했던 그녀의 목표는 '뉴욕타임스'의 유명 레스토랑 칼럼니스트 마이클 잘츠와의 우연한 만남으로 인해 처음부터 꼬이기 시작한다.

 

"그런 재능을 나누지 않고 산다는 건 너무나 큰 낭비죠. 안 그래요, 티아? 당신은 대학 때 스타였잖아요. <뉴욕타임스> 푸드 섹션 1면에 실리기도 하고. 하지만 뉴욕에서는 어영부영하다가 뒤처지기 십상이야. 당신처럼 재능 있고 똑똑한 사람이 수천만 명은 되니까. 그중 어떤 사람은 성공하고 어떤 사람은 실패하지. 그리고 어떤 사람은 이렇게…… 세상을 향해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p.132)

 

헬렌 란스키 인턴십 프로그램에 지원했던 티아는 불행하게도 메디슨 파크 타번이라는 뉴욕의 유명 레스토랑에서 고객 휴대품 보관소를 관리하는 일을 맡게 된다. 어느 날 마이클 잘츠가 레스토랑으로 찾아와 자신이 미각을 잃었음을 고백하면서 자신을 대신해 뉴욕 레스토랑의 음식 맛을 보고 리뷰를 쓰는 '푸드 고스트 라이터'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묻는다. 그가 미각을 잃었다는 것과 티아를 고스트 라이터로 이용한다는 사실을 밝히지만 않는다면 무제한 명품 쇼핑과 미남 셰프와의 로맨스, 뉴욕 레스토랑의 생사여탈권 등을 제공하겠다는 달콤한 제안을 덧붙인다. 거절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내게 꽂히는 걸 느꼈다. 머리는 나를 대담하고 건방져 보이게 해주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속옷까지 명품으로 빼입었다. 내 스틸레토는 조약돌과 거친 아스팔트 위에서 경쾌한 소리를 냈다. 힐이 인도 사이에 끼어도 별로 상관하지 않았다. 한 켤레 더 사면되니까. 아니 열 켤레?"    (p.348)

 

화려한 일상에 익숙해질수록 순수한 열정에 불타던 티아 본연의 모습은 점점 빛을 잃었다. 남자 친구 엘리엇과의 데이트도 시큰둥해지고 친구들과 어울려 수다를 떠는 일도, 대학원 생활도 그저 멀게만 느껴진다. 모든 게 티아의 관심 밖으로 사라져 갈 때 유명 레스토랑의 셰프인 파스칼이 그녀를 사로잡는다. 불같은 사랑에 빠진 티아. 그러나 그 사랑도 진짜가 아니었음이 밝혀지고 마이클 잘츠 역시 그녀를 철저히 속여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는 몇 년 동안 헬렌을 흠모했고 그녀가 쓴 모든 책을 읽었기 때문에 그녀의 글의 리듬과 뉘앙스를 알았다. 나는 그녀의 목소리는 귀로 듣고 이야기는 마음으로 들었다. 그녀는 내 삶에 가장 깊은 방식으로 들어와 내가 태어난 나라나 내가 쓰는 언어처럼 내 모든 생각을 지배하게 되었다. 내가 협박을 당해 그리 되었든 아니든 내가 마이클 잘츠의 심부름꾼으로 알려지고 말았을 때 앞으로 다시는 그녀와 일할 수 없을 거라 확신했다. 그쪽으로 건너가는 다리는 이미 불타버린 것이다."    (p.532)

 

나락으로 떨어져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을 때 티아는 비로소 깨닫게 된다. '때로는 나만의 것으로 지켜야 하는 것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우리가 사는 인생이란 아주 잔혹한 면이 있어서 두 손 두 발을 다 들고 항복할 때까지 막다른 골목으로 매섭게 몰아붙이기도 한다. 물론 대부분의 인간이 그렇게 호된 경험을 거치지 않으면 제 스스로 깨닫거나 미리 절제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인간 된 입장에서 너무 비정한 게 아닌가 하는 불만을 갖지 않을 수 없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한번뿐인 인생, 불쌍한 우리 인간에게 조금쯤 관대해도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물론 이런 바람 또한 존재하지도 않는 신을 향한 무의미한 어리광일 수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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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마지막 절기라는 곡우가 지나자 때 이른 더위가 기승이다. 봄을 훌쩍 건너뛰어 마치 한여름으로 직행한 듯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올해는 매년 반복되던 봄 가뭄 걱정에서 말끔히 벗어났다는 것이다. 가뭄이 극심했던 지난해 봄을 생각하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한반도의 주변 정세는 긴 겨울을 끝내고 이제 막 해빙 무드에 돌입한 듯 반가운 소식이 연이어 전해진다. 얼마나 반가운 일인지... 지도자 한 명을 바꿈으로써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정세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에 선거의 중요성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오늘도 더위는 이어졌다. 미세먼지와 오존으로 대기의 질은 더욱 떨어졌고 말이다. 지방선거의 열기가 높아지는 탓인지 야당의 대여공세가 지나치다는 느낌이 든다. 한반도의 운명을 바꿀 남북 정상회담도 곧 개최될 예정이고 북미 정상회담도 이어질 텐데 협조는 못할망정 없는 비리까지 부풀려서 헐뜯으려고 하는 모양새가 국민들 보기에 영 탐탁지 않은 것이다. 물론 이해를 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전국의 여론 판세를 보면 어느 곳 하나 야당이 앞선다는 데가 없으니 말이다. 그들 입장에선 다급하고 초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인간의 이성까지 잃어서야 되겠는가. 국민들도 이제는 정치인의 비이성적인 행동에 질릴 대로 질려 어느 집 개가 짖었느냐는 식으로 거들떠보지도 않지만 말이다.

 

오늘 발표된 기사에서 북한이 핵실험과 대륙간 탄도미사일(ICBM) 시험발사 중지, 풍계리 핵실험장 폐기 등을 공언하면서 비핵화 의지를 확고히 하고 있다. 정상회담에 앞서 분위기를 한껏 띄우고 있다. 이런 분위기라면 선거 때마다 '빨갱이', '종북' 등 말도 안 되는 딱지를 붙여 종북몰이를 했던 자격 없는 정치인들이 말끔히 사라질 듯하다. 대한민국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서라면 당연한 결과이겠지만. 어떤 정치인은 미세먼지보다 더 해롭다는 걸 국민들이 비로소 깨닫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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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서민 2018-04-22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반도 명운이 걸린 역사적 전환기에 사사건건 발목만 잡는 야당들과 기레기들의 행태에 기가 찹니다

꼼쥐 2018-04-22 21:37   좋아요 0 | URL
정말 그렇지요?
그런다고 이승만 자유당 시절처럼 그들의 말에 놀아날 국민도 없지만 말이죠. 총선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베어타운 베어타운 3부작 1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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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막을 내린 평창 동계 올림픽을 떠올릴 때마다 '영미'를 다급하게 외치던 '안경 선배'의 모습이 생각난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컬링이라는 다소 낯설고 생경했던 종목에서, 게다가 의성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성장한 4명의 선수와 한 명의 외지인으로 구성된 '팀 킴'은 올림픽 경기가 중계되던 2월 한 달 동안 온 국민의 시선을 사로잡았었다. 뿐만 아니라 올림픽이 끝나고서도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한동안 세간의 주목을 받았고 쇄도하는 인터뷰 요청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던 걸로 안다. 조용하기만 한 의성이 실시간 검색어 상위권에 오르내린 것도 그들의 영향이 컸을 듯하다. 어쩌면 의성과 같은 작은 지역사회에서 자신의 지역을 알리고 타 지역으로부터의 인구 유입을 유도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특정 종목의 스포츠에 투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공교롭게도 서지현 검사의 TV 인터뷰로 촉발된 대한민국의 미투 운동 역시 비슷한 시기에 전국을 강타했다. 유교주의가 지배하는 한국 사회에서 자신의 얼굴을 드러낸 채 과거 자신에게 가해졌던 성추행 사실을 고백한다는 건 가히 혁명적인 일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것을 계기로 우리 사회 각계각층에서 쉬쉬하며 숨겨져 왔던 고백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왔고 지금까지도 여전히 진행 중에 있다. 단단하기만 했던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폐습에 작은 균열이 가고, 공공연한 비밀이 세상에 알려져 사실로 확인되면서 우리는 그 추악한 실체로부터 조금씩 멀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프레드릭 배크만의 소설 <베어타운>을 읽고 난 지금, 우리 사회를 강타했던 두 사건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떠올랐던 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베라는 남자>로도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작가는 최근에 발표한 이 소설에서 침체되어가는 시골마을 '베어타운'을 중심으로 지역 공동체의 이익과 개인의 인권이 부딪혔을 때 이것이 몰고 오는 파장을 적나라하게 파헤쳤기 때문이다.

 

"어느 쪽이 됐건 이 도시는 점점 가망이 없어지고 있다. 무엇에서건 희망을 느껴본 건 먼 옛날의 이야기다. 해마다 점점 더 많은 일자리가 사라지면서 그와 더불어 인구도 줄고, 매 계절마다 숲이 폐가를 한두 채씩 집어삼킨다. 자랑거리가 있었던 시절에는 시의회에서 이곳으로 진입하는 도로 옆에 당시 유행어가 적힌 표지판을 설치했다. '베어타운 - 아무리 즐겨도 부족한 도시!' 몇 년 동안 누적된 바람과 눈 때문에 '아무리 즐겨도' 부분이 지워졌다. 가끔은 마을 전체가 어떤 철학 실험의 대상인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p.14)

 

작가는 쇠락해가는 베어타운의 모습을 그렇게 묘사하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번성했던 옛 시절의 영광을 되살리기 위해 청소년 아이스하키팀에 마을의 모든 역량을 집중한다. 전국대회 준결승에 진출한 청소년 아이스하키팀이 우승만 하면 그들의 바람이 현실화될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어느 날 마을에서 발생한 성폭행 사건으로 인해 그들의 꿈은 산산조각이 나고 만다. 하키팀의 유망주였던 케빈이 페테르 단장의 딸 마야를 성폭행했고 이 장면을 팀의 일원이었던 아맛이 목격하게 된 것이다.

 

베어타운이 배출한 프로 선수로서 귀향하여 청소년 아이스하키팀 단장을 맡고 있는 페테르와 유능한 변호사이지만 남편을 따라 베어타운에 정착한 미라는 큰아들을 잃은 죄책감을 안고 산다. 그런 까닭에 기타와 친구 아나 를 사랑하는 딸 마야와 아들 레오에게 더 끔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마야에게 일어난 비극은 마야의 가족 모두에게도 크나큰 상처가 되었다.

 

"피해자가 다른 사람들의 심정을 가장 잘 이해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은 참으로 불편하고 끔찍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나중에 누군가가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았느냐고 물으면 마야는 고개를 끄덕일 테고, 모든 감정 중에서 죄책감이 가장 크게 느껴질 것이다. 그녀를 가장 사랑한 사람들에게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잔인한 짓을 저질렀으니 말이다." (p.325)

 

그러나 공동체의 이익에 반하는 개인의 비극은 공감과 위로를 받기는커녕 비난과 적대감을 갖게 하는 게 다반사이다. 베어타운의 주민들도 다르지 않았다. 가뜩이나 마을의 미래로 인정받던 하키팀의 유망주 케빈이었기에 주민들의 반감은 더 컸는지도 모른다. 마야에게 벌어진 끔찍한 일은 하키팀을 와해시키기 위한 음모로 치부되고 피해자인 마야가 처신을 잘못한 탓이라고 비난한다. 그것은 우리 사회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이얼 때 피해자가 의지할 수 있는 건 가족과 이웃의 사랑뿐인데 말이다.

 

"부모가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은 신기하다. 어떤 사람이건 사랑을 시작하게 된 기점이 있는데, 이 사랑만큼은 아니다. 항상 사랑했고 심지어 아이가 존재하기 전부터 그랬다. 아무리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어도 엄마와 아빠들은 감정의 파도가 그들을 치고 지나가서 완전히 나가떨어지는 순간을 맞이한다. 그 사랑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기에 불가사의하다. 평생 암실에서 지낸 사람에게 발가락 사이로 들어온 모래나 혀끝에 내려앉은 눈송이를 설명하려는 것과 같다. 그 사랑은 영혼을 비행하게 만든다." (p.487)

 

때로는 가족 구성원 중 누군가에게 불어닥친 역경으로 인해 그동안 잊고 지내던 가족들의 사랑을 확인하게도 되고 전에 없이 더욱 단단해진 결속력을 선보이게도 된다. 그러면서 가족들 모두는 한 단계 더 성장하기도 한다. 한 사회도 그렇게 되지 않을까. 사회 구성원의 아픔을 공유하면서 더 나은 미래를 향해 전진하는 게 아닐까. 지금 우리는 비록 서로의 아픔을 듣고 공감하는 단계이지만 언젠가는 서로를 용서하고 행복한 미래를 약속할 수 있는 순간이 오고야 말 것이다. 웃음기 쏙 뺀 프레드릭 배크만의 소설이 낯설게 보일지도 모르지만 등장인물의 성격과 성장 배경을 실감 나게 다룸으로써 소설을 읽는 재미가 쏠쏠한 책이다. 봄밤에 번지는 라일락 향기처럼 농염한 원숙미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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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보던 풍경도 기분에 따라 달라 보이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는 풍경은 기억과 상상력이 만들어낸 일종의 창조물인 동시에 우리는 평생 동안 창조자로서 살아갈 운명을 타고난 셈이 된다. 좋든 싫든 말이다. 어제는 하늘도 맑고 기온도 제법 올라 봄을 만끽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씨였지만 4년 전 그날의 기억 때문인지 어둡고 답답하게만 보였다.

 

오늘은 다시 찾아온 미세먼지 때문인지 하늘이 뿌옇다. 한낮에는 덥다 싶다가도 해만 떨어지면 곤두박질 치는 기온 탓에 몸도 제대로 적응을 못 하는지 피곤하기만 하다. 충분히 잠을 잔 듯한데도 몸은 여전히 무겁고 오후만 되면 시도 때도 없이 식곤증이 몰려오곤 한다.

 

조현민 대한항공 전무의 갑질 논란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녹음된 파일을 들어본 사람이라면 아마도 이 여자가 정말 제정신인가 하는 의심이 들었으리라.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대뜸 든 생각은 '또라이구나' 하는 것이었다. 단지 출신성분이 좋다는 이유로 고속승진으로도 모자라 다른 직원들에게 이와 같은 미친 짓거리를 일삼을 수 있었던 건 아마도 우리나라이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기업 프렌들리를 외치는 많은 권력자의 비호 아래 평생을 호의호식하는 것은 물론 직장 내에서는 제왕처럼 군림할 수 있으니 그들에게는 대한민국이 파라다이스가 아닐 수 없으리라.

 

20여 년 전 영어회화 열풍이 불었던 시기에 영어학원 강사로 와 있던 어느 외국인의 말이 생각난다. 영어를 배우기 위해 그와 가까워지기를 원했던 많은 여대생들 덕분에 그는 자신의 월급에서 생활비를 거의 지출하지 않음은 물론 술과 유흥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즐길 수 있다고 뻐기듯 말하면서 한국은 파라다이스라고도 했다. 조현민의 국적도 미국인이라고 하니 불현듯 그때의 일이 오버랩된다. 재벌가 자녀라는 이유로 온갖 천한 짓도 눈감아주는 그런 모습은 더 이상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늘이 여전히 뿌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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