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끝나고 나는 더 좋아졌다
디제이 아오이 지음, 김윤경 옮김 / 놀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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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나 실연은 더없이 아픈 경험이다. 그 상처는 깊고, 치유의 시간은 길고 더디게 흐른다. 아무한테도 털어놓고 싶지 않은 추억들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뭉근하게 발효되는 동안 나의 시간과 외부의 시간은 다른 속도로 흘러간다. 나는 외부와 철저히 단절된 채 스스로의 감옥에 수감된다. 허기진 시간들이 흔적도 없이 스쳐 지나가는 동안 아물 것 같지 않던 상처에도 조금씩 새살이 돋는다. 되살아난 의지가 푸른빛으로 단단해질 때까지 추억은 더러 잊히고 또 더러는 제 위치를 찾아 갈무리된다.

 

디제이 아오이의 <사랑이 끝나고 나는 더 좋아졌다>에는 실연의 터널을 현명하게 통과하는 방법에 대한 알찬 글들이 실려 있다. 일본에서 35만 명의 SNS 구독자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저자의 명성에 걸맞게 헛된 위로나 무의미한 말잔치로 그치지 않고 홀로 남겨진 사람들의 정신이 번쩍 들도록 하는 실용적인 조언들로 가득하다.

 

"이별을 말한 사람이 되도록 상대에게 상처 주지 않으려고 상냥한 거짓말을 하는 마음도 이해는 가지만, 배려랍시고 내뱉은 그 말은 오히려 상대를 상처에 오래 시달리게 만듭니다. 배려 깊은 거짓말보다 현실은 훨씬 혹독합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게 진정 성숙한 이별 통보입니다. 헤어진 후에는 남남으로 돌아서는 게 우선이에요." (p.27)

 

실연의 상처에 오래 시달리는 까닭은 과거의 연인에 대한 기대와 미련을 놓지 못하는 때문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실연에 봉착한 사람들은 대개 직전에 헤어진 연인이야말로 자신에게는 가장 잘 어울리는, 세상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최상의 연인이라고 말하곤 한다. 그런 믿음이 어찌나 확고한지 새로운 연애 같은 건 다시는 하지 못할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과거의 행복했던 순간으로 되돌아 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마저 희미해질 때쯤이면 헤어진 연인의 진짜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나곤 한다. 그것이 현실이다.

 

"실연의 괴로움에 문득 눈을 뜨는 경험은 누구나 할 텐데요. 그건 그의 현재 모습이 비로소 뚜렷이 보이는 때예요. 이 사람은 더 이상 내가 사랑하던 그가 아니라는 현실이요. 오늘을 살지 않으면 현재는 보이지 않아요. 과거에 살기를 멈춰야 드디어 현재에 눈뜰 수 있습니다." (p.111)

 

실연의 괴로움을 떨쳐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어쩌면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자신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지적 오류를 해결하는 인지행동치료에서 취하는 것처럼 거울을 보듯 가만히 지나간 시간들과 감정을 바라보고, 아픔을 소화시킬 수 있을 때까지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라고 저자는 권한다. 자신의 마음을 관찰한다는 건 나의 감정을 타자화하는 일이다. 일정한 거리를 둠으로써 지금 겪고 있는 괴로움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말이다. 다분히 불교적이기도 한 이 방법은 생각보다 효과가 좋다.

 

"연애에 대한 기대와 미련을 버리고 혼자서도 잘 생활해나가겠다는 다짐을 했을 때 비로소 연애로부터 진정한 홀로서기가 가능해집니다. 연애에서 나만의 자리를 찾지 못하면 자립적인 연애를 할 수 없어요. 상대방을 좋아하는 자신의 모습이 싫어졌다면 그 연애는 이미 끝난 겁니다." (p.191)

 

살아가는 한 사랑의 감정은 누구에게나 있다. 그런 마음과 마음이 만나 연인이 되고 진득하지 못한 마음들은 또 그렇게 이별을 한다. 언제 그랬냐는 듯 천연덕스럽게 말이다. 그러나 이별을 통보하는 쪽이나 받아들이는 쪽이나 실연은 결코 유쾌한 경험이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종종 이별을 하고, 한동안 슬픔에 빠져 허우적대다가도 어느 날이면 또 툭툭 털고 일어나 마음을 추스르곤 한다. 그런 일련의 과정이 어디 연애에만 국한된 일이랴. 큰 틀에서 보면 우리네 삶이 그런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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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죽음'과 '죽어감'에 대해 혼동하거나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죽어감'은 엄연히 삶의 이쪽 편에서 보통의 사람들과 똑같이 보고 듣고 생각하면서 지금도 여전히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말이다. 그들이 단지 죽음을 향해 조금씩 끌려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이미 죽음의 정적 속으로 사라져버린 사람으로 간주한다는 건 건강한 사람들에 의해 행해지는 일종의 폭력이 아닐까 싶다. 중환자실이나 요양병원에서 투병생활을 이어가는 환자를 면회할 때마다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곤 한다.

 

종일 비가 내렸던 엊그제, 큰 수술을 앞둔 친척의 병문안을 다녀왔다. 그날 인터넷 기사에서 우연히 읽었던 기사는 '죽음'에 대해 많은 걸 생각하게 했다. 104세의 호주 과학자인 제임스 구달 박사가 자신의 생을 마칠 권리를 찾아서 스위스로 마지막 여행을 떠났다는 기사였다. 신체의 노화로 더이상 생의 즐거움을 느낄 수 없다며 안락사를 택한 그는 베토벤 9번 교향곡 '환희의 송가'를 들으면서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저승은 마치 진공청소기처럼 사람들의 영혼을 순식간에 빨아들인다고 느꼈다.

 

파키스탄의 소설가 모신 하미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죽는다는 점을 알고 있지만, 사랑, 다정함, 경이로움, 기쁨 등을 경험한다. 우리의 목숨이 유한하다는 점은 우리의 연민의 근간을 형성한다. 우리는 모든 인간이 아무리 서로 출신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다들 똑같이 죽음을 겪으리라는 점을 알고 있다. 이 때문에 친근감을 만들어 낸다. 우리는 죽기 때문에 친근감이 더 낮아진 것이 아니다. 죽기 때문에 친근감이 더 높아진 것이다. 하지만 영원히 살고 싶다는 욕망은 강렬했다. 우리는 이 같은 소망을 달성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되는 기계들을 만들어냈다. 우리는 이 기계들과 한 몸이 되고자 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생명의 유한함을 없애기 위한 시도를 하다가 이제 우리 스스로를 없애는 지경에 이르렀다."

 

시위를 하는 가자 지구의 사람들을 향해 이스라엘의 군인들이 무자비한 살육을 저질렀나 보다. 최강대국 미국을 등에 업었다는 이유로 21세기의 이스라엘 정치인들은 인면수심의 악마가 아닐 수 없다.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전제는 종교나 이념, 애국심 등 그 모든 것에 앞서 인간에 대한 연민과 애정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의 정치인들은 이미 인간이기를 거부한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신은 인간을 만들었고 인간은 또 다른 인간을 지배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그들은 이미 인간의 탈을 쓴 악마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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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둔감하게 살기로 했다 - 초조해하지 않고 나답게 사는 법
와타나베 준이치 지음, 정세영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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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리야리하고 마른 체형의 아내는 결혼 전부터 예민한 장 때문에 꽤나 고생을 했다. 그러다 보니 식사를 할 때 남들처럼 밥숟가락으로 밥을 푹푹 퍼먹지 못하고 젓가락으로 깨작거리는 듯 보이기 일쑤였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은 아내의 그런 모습이 어려서 고생을 모르고 자라서 그렇다며 샐쭉한 시선으로 바라보곤 했다. 속이 더부룩하고 가스가 차는 까닭에 하루에도 몇 번씩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는 바람에 일가친척이 모두 모이는 명절이면 떠나기 전부터 한걱정을 하곤 했다. 반면에 나는 일찍부터 부모 곁을 떠나 객지로 떠돌았던 탓인지 무엇이건 주는 대로 먹어도 불편하거나 탈이 나는 법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집에서도 내 집처럼 잘만 잤다.

 

아내는 이런 나를 어쩜 그렇게 무디고 둔하냐며 타박을 하면서도 한편으론 몹시 부러워하는 눈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명절이나 행사가 있을 때마다 끊임없이 마주쳐야 하는 일가친척을 비롯하여 이따금 하는 가족 여행 등 남들에게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일상이 아내에게는 고문이나 진배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모든 면에서 털털하거나 둔감한 건 아니었다. 어려서부터 모든 일을 스스로 결정하고 그 책임도 본인이 져왔던 나로서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듣게 되는 잔소리가 영 달갑지 않았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만큼 무덤덤할 수 없었다. 그게 비록 내게 유익한 조언일지라도 말이다.

 

와타나베 준이치의 <나는 둔감하게 살기로 했다>를 읽으면서 여러 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사사건건 잔소리하는 상사, 나를 험담하는 동료, 퇴근 후 쓸데없는 말로 지치게 하는 친구 등 현대인의 일상은 타인이 주는 스트레스로 가득하다. 둔감해지지 않고서는 도무지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제 아무리 능력이 있는 사람일지라도 한순간의 욱하는 감정을 참지 못한다면 능력은 그야말로 무용지물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건 잘 알지만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환경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열악한 환경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목표를 향해 꿋꿋이 나아갈 수 있는 힘, 그것이 바로 '둔감력'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제가 이 책에서 말하는 둔감력이란 긴긴 인생을 살면서 괴롭고 힘든 일이 생겼을 때, 일이나 관계에 실패해서 상심했을 때, 그대로 주저앉지 않고 다시 일어서서 힘차게 나아가는 그런 강한 힘을 뜻합니다. 그저 몸과 마음이 둔한 사람에게 "둔감력이 있다."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p.5)

 

예민함이란 어쩌면 낯섦에 대한 경계심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사냥을 위주로 하던 원시시대에는 예민함이 곧 자신의 생명과 사냥의 성공을 담보하는 강력한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명화된 현대사회에서 예민함은 낡은 유산으로 전락한 느낌이 없지 않다. 현대사회에서는 예민함보다는 타인과의 소통과 원만한 관계 유지가 개인의 건강과 성공을 담보하는 밑거름이 되기 때문이다.

 

"요즘 같은 국제화 시대에 어떤 나라에서든 어떤 환경에서든, 나아가 현지의 어떤 음식을 먹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능력, 그런 환경 적응력만큼 멋지고 든든한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이런 능력의 밑바탕에는 반드시 둔감력이 있게 마련입니다. 좋은 의미의 둔감함이 있기에 어떤 환경, 어떤 사람과도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이죠." (p.245)

 

한때 외과 의사로 근무했을 만큼 우리 몸에 대한 이해가 깊은 저자는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마음뿐만 아니라 몸도 어느 정도 둔감해질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언제든 잘 자고 잘 일어나는 수면력도, 오감 등의 다양한 감각 기관의 둔감하다는 것도, 똑같이 상한 음식을 먹고도 어떤 사람은 배탈이 나고 어떤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은 사례에서 보는 것처럼 위와 장이 둔감하다는 것도 모두 개인의 건강에 직접적인 영향을 줄 뿐만 아니라 어떤 환경에서든 유연하게 적응함으로써 타인과의 관계도 원만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한다. 행복한 결혼 생활의 원천도, 성공의 전제 조건도 둔감력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결혼초 아내와의 의견 충돌이 잦았던 것도 돌이켜 보면 서로의 예민함이 발단이었던 듯하다. 어린 시절 예의와 격식을 중시하는 환경에서 성장한 아내는 나의 취향이나 습관 하나하나에 사사건건 개입을 했고, 잔소리라고는 모르고 자랐던 나는 그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예컨대 집에 찾아온 손님에게 음료를 대접할 때는 항상 컵과 컵받침을 함께 내야 하고, 외출에서 돌아오면 반드시 손을 씻어야 하는 식이었다. 나는 이따금 손님에게 머그컵에 따른 음료 잔만 줄 때도 있고 외출에서 돌아와서도 피곤하면 손 씻기를 거르거나 종종 잊기도 했다. 아내의 그런 습관이 좋다는 건 알지만 인생에서 자신의 목숨을 지키는 것 외에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나는 정말 철이 없었다.

 

"뒤집어 생각하면 결혼은 기나긴 인내의 여정입니다. "결혼해서 행복하다." 또는 "이 사람과 결혼하길 참 잘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기나긴 인내 끝에 빛나는 열매를 거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인내의 이면에는 멋진 둔감력이 숨어 있습니다. 둔감력은 두 사람의 관계를 지탱해주는 큰 힘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p.146)

 

아내는 지금 아프다. 그렇게 된 원인이 모두 느긋하지 못한 내 성격 탓인 것만 같아 가슴이 너무 아프다. 그래서인지 나는 요즘 아픈 아내의 잔소리가 싫지 않다. 싫기는커녕 오히려 반갑다. 내게 잔소리를 할 만큼 아내는 기운이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아내가 건강을 회복하고 다시 예전과 같은 일상으로 되돌아갈 때쯤이면 나도 어쩌면 아내의 잔소리를 그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둔감한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그 날을 꿈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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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타맨
슈테판 보너.안네 바이스 지음, 함미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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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소설가를 꿈꾸었던 시절이 있었다. 소설가가 되기를 희망했다기보다 '나도 소설이나 써볼까' 하는 헛된 상상을 했던 적이 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런 상상은 단순히 내가 다른 사람의 경험이나 그들이 지나온 삶에 대해 평균적인 호기심 이상으로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적시함으로써 소설가가 되기 위한 지극히 소박한 가능성의 일단을 발견했다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다른 누군가의 경험을 대강의 이야기로만 듣고 이야기를 아주 찰지고 실감 나게 풀어내는 일은 전혀 별개의 것이라는 사실을 단 한 번의 경험만으로 쉽게 깨우칠 수 있었다. 그 후로 나는 소설가가 되겠다거나 소설을 써보겠다는 생각은 숫제 접어버렸다. 가당치도 않은 일이었기에.

 

소설을 써보겠다는 상상이 현실화되지 못했던 데에는 그것 외에도 다른 원인이 있었다. '남녀칠세부동석'을 듣고 배운 후 나도 또한 그 말을 '정언명령'으로 확고하게 가슴에 새겼던지라 성인이 될 때까지 연애 경험도 전무했고, 여성의 심리나 반응에 대해서도 일체 아는 바가 없었다. 소설가에게 그보다 더한 약점이 또 있을까. 나는 그야말로 소설가로서는 구제불능이었다. 물론 소설가가 돼보겠다는 한때의 꿈도, 그 꿈을 실현시키기 위해 소설 형식을 띤 잡문을 시험 삼아 써본 적이 있다는 경험도 이제껏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그저 나만의 개인적인 흑역사로 남아 있지만 말이다.

 

슈테판 보너와 안네 바이스가 쓴 <베타맨>을 읽으며 나의 과거 경험이 떠올랐던 건 다 이유가 있었다. 만약 안네 바이스처럼 걸출한 재능의 여자 친구가 곁에 있었더라면 나는 소설가가 될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 책은 슈테판 보너와 안네 바이스가 자신의 이름을 실명으로 남자와 여자의 시각에서 교차하며 스토리를 전개시키는 독특한 구성의 소설이기에 나도 한번 소설을 써볼까 생각했던 과거에 나의 단점을 보완해 줄 누군가가 옆에 있었더라면 나도 또한 이런 구성의 소설은 충분히 쓸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것 또한 실없는 상상이기는 하지만.

 

그렇다. 이 소설은 두 명의 남녀 작가가 각각의 남녀 주인공을 맡아 각자의 입장에서 쓰고 있다. 한 출판사에서 근무하게 된 안네와 슈테판. 재능과 성격에서 똑 부러지는 알파걸 안네는 책임감도 경제적 능력도 없었던 전 남자 친구 올리버와 막 헤어진 상태였다. 그 후 안네는 자유분방한 성격의 산드라와 셰어하우스를 하며 '진짜 남자'를 찾아 헤매게 된다. 반면에 슈테판은 여자 친구 마야가 임신했다는 말에 충격을 받는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 아빠로서의 역할을 잘 해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가뜩이나 예비 장인어른은 슈테판을 영 못 미더워하고 마야의 전 남자 친구 토르스텐마저 슈테판의 심기를 괴롭힌다.

 

"나는 진하게 커피를 내려서 발코니에 나가 앉는다. 카페인과 신선한 아침 공기를 마시면 좀 더 정신이 맑아지지 않을까 하는 바람을 안고 말이다. 만약 남자아이라면, 내가 온전히 기뻐할 수 있을까? 어젯밤 한 차례 재앙을 겪고 나자 헬무트가 나에게 도움을 줄지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나 어쨌든 아무리 둘러보아도 나를 위해 아버지를 대신해줄 만한 인물은 그밖에 없다."    (p.155)

 

안네와 슈테판의 이야기는 시종일관 유머러스하게 진행된다. '진짜 아빠'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슈테판과 자신의 마음에 쏙 드는 '진짜 남자'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안네의 이야기는 책을 읽는 내내 나도 모르게 '키득키득' 웃음을 짓게 했다. 안네는 산드라로부터 여러 남자들을 소개받는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같이 이상한 사람들일 뿐, 안네의 마음을 단박에 사로잡지도 못할 뿐 아니라 남자에 대한 거부감만 더한다. 한편 슈테판은 '진짜 남자'가 되기 위해 생부를 찾아가게 된다.

 

"지난 몇 개월은 격동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경험한 것들에 감사한다. 내가 뭔가 배운 것이 있다면 이것이다. 즉 세상에 완벽한 남자는 없다는 것. 지금부터 내 일은 내가 헤쳐 나갈 것이다. 내가 옳다고 생각한 대로 행동할 것이다. 말이 나온 김에 하는 말이지만, 그렇게 할 때 일도 놀라우리만치 순조롭게 진행된다."    (p.494)

 

'여자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고 하지 않던가. 달리 말하자면 남자는 여자에 비해 지극히 단순하거나 철이 없다는 얘기가 될 터였다. 내가 살아보니 정말 그렇다. 나이가 들건 그렇지 않건 남자는 어쩔 수 없는 남자일 뿐이다. 똑똑한 여자가 결혼이 늦은 이유도 생각해 보면 그런 남자들 속에서 특별한 남자를 찾느라 헛고생을 하기 때문은 아닐까. 에쿠니 가오리와 츠지 히토나리가 쓴 <냉정과 열정 사이> 서경식 교수와 타와다 요오꼬의 편지를 엮은 <경계에서 춤추다>가 생각나기도 했던 이 책은 위트와 유머가 돋보이는 소설로서 남자와 여자의 성 역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게 했다. 그 구분은 갈수록 더 모호해지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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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나 사이 - 너무 멀어서 외롭지 않고 너무 가까워서 상처 입지 않는 거리를 찾는 법
김혜남 지음 / 메이븐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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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건강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던 건 재작년 말부터였다. 그때만 하더라도 아내는 이따금 울적해 보이기는 했어도 환자로 여겨지지는 않았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그랬다. 그런 까닭에 나는 별일 아니겠거니 생각하며 중학생 아들과 아내를 장모님의 손에 맡겨둔 채 안심했었다. 장모님 혼자 아내의 약과 식사를 챙기고 아들을 돌보는 일이 결코 쉽지는 않았을 테지만 아내의 컨디션이 좋을 때에는 청소며 설거지 등 집안일도 곧잘 돕는지라 큰 죄책감 없이 아내를 맡겼었다. 그러나 아내의 병세도 병세지만 그 기간이 1년을 넘어서자 이건 아니다 싶은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언제까지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할 수는 없었다.

 

아내든 아들이든 둘 중 한 명을 내가 책임지지 않으면 장모님마저 앓아누우실 것만 같았다. 그러나 도우미 아줌마를 쓸 만큼 형편이 넉넉하지도 않고, 아내와 떨어져 주말부부로 지내던 나로서는 손에 쥐어진 선택지가 그리 많지 않았다. 결국 나는 평일에 머무는 지방의 숙소로 아내를 데려오게 되었다. 아내도 나도 결코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아들을 장모님 손에 맡기는 아내나 딸을 떠나보내는 장모님이나 걱정과 고민은 컸다. 아내의 간병을 책임져야 하는 나의 어깨도 무겁기는 마찬가지였다.

 

아내를 돌보기 시작한 지 벌써 두 달이 넘었다. 아내의 식사를 챙기고 간단한 집안일을 하는 것은 그럭저럭 견딜 만했으나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아내의 간병을 혼자서 도맡다 보니 다른 사람들을 만나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물론 긴급한 용무로 만나야 할 사람은 어찌어찌 시간을 내기는 하지만 친목 차원의 가벼운 만남은 웬만하면 불참을 통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까닭에 지인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기도 했다.

 

김혜남 정신과 전문의가 쓴 <당신과 나 사이>는 나와 같은 사람들의 고민을 친절하게 다독인다. 그렇다고 고민을 완전히 해결하고 꽉 막힌 응어리를 툭툭 털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시간에 쫓기는 사람들이 타인과의 관계는 어떻게 유지하는 게 좋은지, 마냥 가깝게만 여기던 가족과의 거리를 어느 정도로 유지하는 게 좋은지 전문가로부터의 조언을 들을 수 있다는 점은 이 책을 읽는 독자가 취하게 되는 이득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가까운 사이에서 거리를 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선택을 존중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지만 그가 무엇을 하든 아무 신경도 쓰지 않고 무관심해지겠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사랑하는 그가 정말 잘못된 길로 간다면 말려야 한다. 그에게 왜 그 길로 가면 안 되는지 충분히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최종 선택은 그의 몫이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하든 곁에는 늘 내가 있다는 확신을 주는 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거리 두기다." (p.67)

 

문화인류학자인 에드워드 홀은 그의 저서 <숨겨진 차원>에서 인간의 공간 사용법에 대해 4가지 유형을 제시했다. 그에 따르면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잘 유지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거리두기가 반드시 필요하고 그 거리는 관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여러 가지 실험을 통해 각각의 관계에 있어 구체적인 거리를 수치로 제시했다. 먼저 밀접한 거리(Intimate Distance Zone)는 0~46cm, 그다음 개인적 거리(Personal Distance Zone)는 46cm~1.2m, 사회적 거리(Social Distance Zone)는 1.2m~3.6m, 공적인 거리(Public Distance Zone)는 3.6m~7.5m라고 한다.

 

"우리가 이 책에서 주로 살펴보고자 하는 것은 위의 4가지 거리 중 밀접한 거리와 개인적 거리다. 왜냐하면 우리가 인생에서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그 안에 있으며, 그 관계를 제대로 풀어 가지 못하면 나머지 관계도 제대로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p.65)

 

아내를 돌보면서 나의 일상은 많은 게 바뀌었다. 사람들과의 관계가 일정 부분 소원해지기도 했지만 아내와 공유하는 시간이 늘고 그동안 몰랐던, 또는 알면서도 모르는 척 외면했던 아내의 바람이나 생각들을 곰곰 되씹어 볼 수도 있었다. 본디 곰살맞은 성격은 아니지만 아내의 잔소리를 묵묵히 들어주고 떨어져 있는 아들과의 통화도 늘었다.

 

"살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 중의 하나는 누구도 내 삶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입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건 자신이라고 떠들지만, 실제로 남들의 시선과 평가에 신경 쓰느라 그런 자신을 방치하기 일쑤다." (p132)

 

우리는 이따금 현재의 고통을 잊기 위해 '미래'라는 허상을 소환하곤 한다. '아들이 대학만 졸업하면...', '과장으로 승진만 하면...', '집만 사면...' 등과 같이 우리가 소환하는 허상은 참으로 다양하다. 그것이 비록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할는지는 모르지만 고통 속에서도 행복을 찾아가는 방법을 완전히 차단한다는 사실을 때로는 잊게 된다. 더더구나 SNS의 과다한 사용은 허상과 현실의 구분을 모호하게 한다.

 

"그러니 SNS를 하되, 그것을 하느라 소중한 사람들과 나누는 시간을 망치지 마라. 음식이 다 식어 가는데도 사진을 올려야 하니까 참으라고 말하는 것은 당신이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멋진 노을을 보면서 그것을 만끽하고 있는 사람에게 빨리 사진을 찍어야 한다고 닦달한다면 그것 또한 예의가 아니다. 당신이 지금 집중해야 할 사람은 바로 당신 앞에 있는 그 사람이다." (p.262)

 

어린이날이었던 어제는 아들과 함께 마트에 갔었다. 카트를 끌며 내 뒤를 따르던 아들은 며칠 전에 본 중간고사 결과에 대해 어렵게 말을 꺼냈다. 아내가 아프기 전에는 결코 없었던 일이다. 나는 아들의 소식을 주로 아내로부터 전해 들었을 뿐 아들로부터 직접 듣지는 못했다. 시험을 본 6과목 중 4과목이 만점인 줄 알았는데 수학과 과학만 백점이었고 나머지 과목은 한두 문제씩 틀려서 지난해 평균보다는 조금 떨어진 96.3이라며 미안해했다. 어쩌면 아들은 아픈 엄마를 실망시킨 게 아닌가 하는 걱정으로 마음이 불편했는지도 모른다. 몰라서 틀린 게 아니라면 괜찮다고 내가 말하자 아들은 밝게 웃었다. 아내가 아프지 않았으면 볼 수 없었던 풍경이었다.

 

"파킨슨병 때문에 생각지도 않게 의사 일을 그만두어야 했지만, 나는 그로 인해 얻은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사람을 얻었다.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의 소중함과 고마움을 비로소 깨닫고 그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더 많이 갖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혼자 있는 시간은 중요하다. 우리는 종종 타인의 소중함을 잊고 살아간다. 그런데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혼자 있으면 신기하게도 사람이 그리워진다." (p.309)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아들은 닐 게이먼의 <북유럽 신화>를 읽고 나는 김혜남의 <당신과 나 사이>를 읽었다. 아내가 아프지 않았더라면 이런 평범한 일상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우리 주변에는 '미래'라는 허상에 갇혀 평생을 허비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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