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심원으로 퍼지는 물동그라미의 잔상처럼 주마다 반복되는 같은 무늬의 흔적들을 세월의 너른 도화지에 거듭거듭 찍어나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마치 숙제 검사를 하는 담임 선생님의 한 손에 들려 있던 '참 잘했어요' 스탬프를 주말마다 의미도 없이 꾹꾹 눌러 찍는 듯한 기분이다. 이렇게 아무런 생각도 없이 세월을 흘려보내다 보면 내게 주어진 한 권의 세월 노트는 그렇게 찍힌 의미도 없는 스탬프로 금세 채워질 것만 같다. 다 써버린 세월 노트는 누군가의 기억 속에 한동안 꽂혀 있다가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지겠지만, 사는 게 다 그런 거라지만 날씨가 더워서인지 오늘따라 왠지 허무한 느낌만 가득 밀려온다.

 

오늘처럼 밑도 끝도 없는 허무가 밀려드는 날이면 아주 오래 묵은 피로마저 되살아난다. 손끝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은 무력감. 한 번 잠에 빠져들면 사나흘 깨지 않고 잠만 잘 것 같은 허물어짐이 어깨를 짓누른다. 연차를 받아 집에서 쉬고 있다는 친구는 저녁이나 같이 먹자며 한가한 전화를 했다. 응, 응 대답만 겨우 하는 내가 이상했던지 어디 아픈 것 아니냐며 뒤늦은 안부를 묻는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그저 하루 이틀 쉬고 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전화 고맙다고, 나의 대답은 겨우 그 선에서 멈춘다. 하루가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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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어떤 게 잘 사는 겁니까
명진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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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궁금한 게 참 많은 사람이다. 사람에 대하여, 자연에 대하여, 온 우주에 대하여 알고 싶은 게 너무 많다. 궁금하다는 건 관심이 있다는 얘기이고 관심이 있다는 건 내가 이 지구 상에 여전히 살아 있다는 간접적인 증거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살아 있음을 문득문득 확인한다. 궁금한 어떤 것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면서.

 

"우리는 모른다. 왜 사는지, 물질의 근본이 무엇인지, 우주의 끝은 어디인지, 시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우리가 아는 것이라고는 단지 몇몇 지식뿐이다. 아는 게 한 개라면 모르는 것은 천 개, 만 개다. 그런데 우리는 어째서 '모름(不知)'이 아니라 '앎(知)'을 모든 사유의 바탕, 삶의 바탕으로 두고 있는 것일까."    (p.177)

 

<스님, 어떤 게 잘 사는 겁니까>를 쓴 명진 스님에 대해 나는 다음과 같이 기억하고 있다. 이런저런 시국 사건이 많았던 이명박, 박근혜 정권을 지나오면서 시국 사건으로 시끄러울 때마다 단골손님처럼 TV에 등장하던 스님의 모습과, 지난해 8월 조계종으로부터 제적 징계를 받은 후 무기한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는 기사와,  여러 날의 단식으로 초췌해진 스님의 모습을 보고 안타까운 마음에 농성장을 찾았던 가수 전인권의 모습 등 세월의 차창 밖으로 언뜻언뜻 스쳐가던 스님과 관련된 여러 장면들이 전부이다. 어쩌면 나는 각박했던 그 시절을 그저 한 사람의 방관자로서 살았는지도 모른다.

 

"우리 삶은 텅 빈 허공과 같다. 우리의 생각은 나뭇잎과 새와 같다. 텅 빈 허공이 있는데, 생각이 묶여 있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우리 머릿속에는 수많은 생각이 있다. 과연 이 많은 생각이 내 생각일까? 가만히 눈을 감고 삼 분만 생각해보자. 하루에 오만 가지 생각이 왔다 간다."    (p.111)

 

제 몸 하나도 건사하기 힘든 시대에 스님은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온몸으로 세상과 부딪쳐오지 않았던가. 아무리 종교인이라지만 결코 쉽부당한 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인지 스님을 보는 시각은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듯하다. '운동권 스님', '좌파', '독설왕', '청개구리 스님' 등 스님을 지칭하는 별명도 많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온갖 고생을 하며 성장했던 것으로도 모자라 하나뿐이던 혈육인 동생마저 이십 대의 젊은 나이에 잃고 무상을 느껴 출가했다는 스님은 출가 후의 삶도 그다지 평탄하지 않았다.

 

"종교가 필요하다면 딱 하나다. 어렵고 힘든 사람과 함께할 때다. 사랑과 자비의 실현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종교를 '고통에 함께함'이라고 정의한다. 아픈 이와 함께하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일을 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노동하지 않는 종교인들이 밥 먹고 살 까닭이 없다."    (p.253)

 

언제부턴가 나는 성직자가 쓴 책이건, 지식이 많은 학자의 책이건, 또는 부자가 쓴 책이건, 가난뱅이가 쓴 책이건 그 생각하는 방법이나 삶을 영위하는 태도는 큰 틀에서 모두 비슷하구나, 생각하게 된다. 그렇다고 내가 그들과 견줄 정도로 학식이 많다거나 수행의 깊이가 남다르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저 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와서 제 그릇대로 살면서 소임을 다하고 마침내 세상과 이별하는 방식은 평생을 수행에만 전념한 큰스님이라고 해도 평범하기 그지없는 나와 크게 다를 게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잘 살고 못 살고의 문제에서 크게 갈리는 부분은 세상의 변화에 대한 개개인의 반응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큰 사건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한다는 건 나와 같은 범부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큰 사건뿐만 아니라 아주 작은 일에도 일희일비하며 애를 끓이곤 한다. 순간순간을 흔들리면서 살아간다는 건 누구에게나 피곤한 일이다. 행복은 결국 흔들리지 않는 마음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대개 우리가 자유롭게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조금만 삶의 속살을 파고 들어가면 우리에게 자유가 별로 없다는 걸 알게 된다. 아침 일찍 일어나 출근하고 저녁이 되어서야 퇴근하는 삶. 아이들도 학교 수업이 끝나면 학원에서 공부하다 저녁 늦게 집에 돌아온다. 모두 비슷비슷하게 산다. 삶의 모양이 문제가 아니다. 내용이다. 자기 의지대로 살고 있는가.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 적 있는가."    (p.230)

 

정말 어떻게 사는 게 잘 사는 건지 도통 모르겠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이것이다, 하고 확신을 갖고 사는 사람은 많지 않은 듯하다. 그렇게 정신없이 살다가 '아, 진작 이렇게 살았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 때면 이미 죽음이 멀지 않은 시점이다. 아쉬움과 회한만 안고 떠나는 게 인생인지도 모른다. 다만 그 회한이 가슴을 칠 정도로 크지 않았으면 좋겠다. 오늘은 현충일, 한여름처럼 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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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선거가 불과 10여 일 남짓하게 남았을 뿐인데 선거 열기는 좀처럼 살아나지 않는 분위기이다. 모름지기 선거라는 게 여러 후보자 중 누가 당선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일 때 선거 열기가 달아오르는 법인데 이번 선거는 선거를 치르기도 전에 여당의 승리가 확실하다는 듯 이따금 여당의 후보로 누가 나왔는지 거리에 내걸린 현수막에서 그들의 이름만 확인할 뿐 야당 후보는 숫제 관심조차 없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주변 사람들도 야당 후보로 누가 나왔는지 도통 관심이 없다. 심지어 줄곧 보수 성향의 후보에게 투표를 하여 왔던 사람조차 투표는 해서 뭐하냐며 6월 13일에 당일치기 여행 계획을 세우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분위기로 몰고 온 최대의 공로자는 제1야당의 대표인 홍준표가 아닐까 싶다.

 

지난 선거만 하더라도 내가 사는 지역에서 지금의 여당인 민주당이 득세를 하지는 못했다. 시장을 포함한 시의원 대부분이 지금 제1야당이 된 자유한국당 소속이었다. 그랬던 게 이렇게 급변할 줄이야. 상전벽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직접 보고 상황을 인식하면서도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는다. 사실 한 사람의 사상이나 이념은 잘 바뀌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갑작스러운 변화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약속이나 한 듯 보수 성향의 사람들이 모두 진보주의 성향으로 바뀌지는 않았을 텐데 말이다. 나는 이것이 상식의 승리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우리 국민은 이념을 떠나서 누군가의 선동과 잘못된 정보를 통하여 눈과 귀가 가려졌던 게 아닐까 싶은 것이다. 인터넷과 SNS라는 통제불능의 매체가 일반화되지 않았던 과거에는 텔레비전과 신문 매체의 영향력이 클 수밖에 없었고 권력의 승계는 언론 통제가 필수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다양한 매체에 의해 전달되는 다양한 정보는 사람들을 변화시키기에 충분했다. 누가 잘하고 잘못하는가는 상식의 문제일 뿐이지 이념의 문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야당의 대표는 지금도 이념을 통한 분열과 결집을 꾀하고 있다.

 

아무튼 나는 말이 통하는 상식의 사회로 변화되어 가는 작금의 상황이 무척이나 반갑다. 6월이 되자마자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불볕더위가 우리를 힘들게 하고는 있지만 꽁꽁 얼어붙었던 한반도의 운명은 지금부터 서서히 풀려나가는 게 아닐까 싶다. 21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상식의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건 전 세계인이 놀라고 경악할 일이지만 우리는 그동안 미개와 비이성의 시대를 살아온 게 사실이지 않은가.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도래했다는 것은 서로의 이념이 다를지라도 얼마든지 대화가 가능한 사회로 진입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래 세대는 지금의 기성세대보다 더 수다스럽고 말이 많아질지도 모르겠다.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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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는 엄마
신현림 지음 / 놀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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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좋아한다. 어려서부터 그랬다. 시에 대한 뚜렷한 정의를 내릴 수는 없지만 시를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시는 마치 비가 오면 생겨나는 물웅덩이처럼 생각의 물꼬를 틔우고 갑자기 떠오르는 여러 생각들을 의식의 물웅덩이로 그러모은다는 것이다. 그런 날이면 수면에 비치는 하늘도, 건듯 스쳐가던 바람도, 멀리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의식의 물웅덩이에 가득 담긴다. 어쩌면 시는 구절구절 우리네 짭조름한 눈물을 닮았는지도 모른다.

 

신현림 시인이 쓴 <시 읽는 엄마>를 읽으면서 '엄마'라는 단어와 '시'라는 단어가 적당히 균형을 이룬 에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세월을 적셔 기적을 일구는 존재이다. 그 흠씬 젖은 세월을 기록하기에는 사실 어떤 산문으로도 부족하다. 그러므로 많은 이야기는 글 뒤에 감출 수밖에 없다. 감추어도 자꾸만 드러나는 글이어야 한다. '시'는 감출수록 드러나는 글이다. 독자가 바뀌어도 가슴속에 전해지는 이야기는 모두 같은 게 '시'의 힘이다. 시의 한 구절, 한 단어마다 누군가의 전 인생이 담긴다. 그 이야기들, 땀과 한숨의 젖은 세월이 마치 '엄마'를 닮은 듯하다는 생각, 그런 생각들로 책은 더디게 읽혔다.

 

"어린 날 딸이 아칫거리며 걷거나 재롱부리던 모습이 이토록 생생한데, 어느새 딸은 혼자서도 무엇이든 다 잘하는 나이가 되었다. 내가 모르는 딸의 시간들이 늘어갈수록 홀가분한 마음만큼 걱정도 커진다.

내가 없는 곳에서 네가 울고 있으면

엄마는 어떻게 해야 할까.

엄마가 닿을 수 없는 곳에서도 딸이 늘 지금처럼 밝게 웃기를, 세상 모든 어둠이 우리의 딸들을 다 피해가기를 바라며 오늘도 딸의 연락을 기다려본다." (p.134)

 

별것도 아니었던 시구가 어느 한순간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위로가 될 때가 있다. 어느 다정했던 친구의 위로보다도 더 달콤하고, 내 사정을 속속들이 다 알고 있다는 듯 가슴을 치는 것이다. 시인이자 사진작가, 최근에는 독립출판사의 대표로서 일인다역의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시인은 젖먹이 어린 딸과 함께 이혼을 한 후 모녀 가장으로서의 힘겨운 삶을 살아오기도 했다.

 

"젊은 날보다 더없이 넓어지는 마음은 딸을 키우며 얻어진 것일지도 모른다. 자식을 안은 사랑의 감촉으로, 나는 더 섬세하고 긍정적이 되었다. 긍정적인 생각 속에서만 보이는 해맑은 미래. 딸을 안고 딸의 미소를 보면 슬픔도 식빵처럼 말랑말랑해지곤 했다." (p.6)

 

책에 실린 시들은 롱펠로나 헤르만 헤세, 칼릴 지브란과 같은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시인의 고전 명시를 비롯하여 현세대의 세계 명시, 안현미, 신동호, 윤석정 등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의 작품뿐만 아니라 아직 세간에 잘 알려지지 않은 아름다운 시들이 있다. 신현림 시인은 자신이 읽고 용기를 얻었던 시의 시구를 일일이 열거하며 딸을 키우며 힘들었던 순간들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시인의 경험이 한 겹 덧씌워진 시의 무게는 기존에 알고 있던 시에 또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

 

"그때의 엄마 목소리가 내 가슴속에서 울려 퍼진다. 엄마가 사준 세계시인선집 덕분에 시의 향기, 그리고 책 냄새와 친해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날의 경험이 오늘날 나를 시인으로 만들어주었다고 느낀다. 이제까지 나는 딸을 위해서는 많은 책을 읽어주었지만, 정작 엄마를 위해서는 책을 읽어드린 적이 없는 것 같다. 몇 편의 내 시를 읽어드린 게 전부다." (p.205)

 

시의 여백에는 언제나 독자의 이야기가 담긴다. 그러므로 시를 좋아하는 독자는 시인과 더불어 새로운 작품을 써내려가는 작가이자 시인인 셈이다. 다만 그것이 오직 자신만의 책이라는 점이 기존의 책과 다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신현림의 <시 읽는 엄마>는 신현림 자신의 책일 뿐 아니라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가 새로이 쓰게 될 기본서인 셈이다. 그것이 비록 독자 개개인의 가슴속에 묻힌 채 세상 사람들과 공유될 수 없을지라도 우리는 별이 뜨고 바람이 불 때마다 또 하나의 시집이, 에세이가 탄생하고 있음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으리라. 세상의 모든 '엄마'는 '시'와 동의어가 아닐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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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 S. From Paris 피에스 프롬 파리
마르크 레비 지음, 이원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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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혼의 청춘남녀 중에는 운명적 사랑에 대한 기대나 믿음이 의외로 강한 듯하다. 학력이나 지적 수준, 연령이나 외모에 상관없이 말이다. 이 세상의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하느님에 의해 선택된 단 두 사람이 운명적으로 만나 사랑을 키워갈 뿐 아니라 한 번 맺어진 그들의 사랑은 영원토록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은 다소 유치하거나 황당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그들은 가슴에 품은 그러한 기대를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운명적인 사랑을 믿는 사람에 대해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은 그들이 낭만적인 감성을 지녔다거나 때 묻지 않고 여전히 순진하다는 둥 다소 호의적인 판단을 내리는 듯하다. 그러나 운명적인 사랑을 믿는 것은 개인의 자유 영역에 속한다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 기저에는 사랑에 대한 개인의 가치 판단이 작용한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듯하다.

 

예컨대 자신이 믿고 있는 운명적 사랑만이 가치가 있는 유일한 사랑이고 우리 주변에서 보는 흔한 만남이나 보편적인 사랑, 나아가서는 조건을 따져 만나고 사랑에 빠져드는 것에 대한 강한 거부나 반감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들 자신은 아니라고 부정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강하게 부정한다는 건 자신이 사랑에 대해 분류를 하고 자신만의 기준에 의해 등급을 매기고 있다는 사실을 미처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니라고 믿고 싶겠지만 말이다.

 

프랑스 작가 마르크 레비의 신작 장편소설 <P. S. From Paris>를 읽으면서 문득 들었던 생각은 '처음 만남이야 어찌 되었건 사랑에 등급이 있을까?'하는 의문이었다. 이런 의문이 들었던 건 전적으로 내 개인적 경험일 뿐 소설의 내용과는 하등 상관이 없다. 그렇다면 주관적 생각을 왜 언급하느냐고? 운명적 사랑을 믿는 것이 개인의 자유인 것처럼 그렇게 믿는 사람들의 생각의 틀을 분석해보는 것 역시 개인의 자유이기 때문에. 그리고 블로그라는 공간은 개인의 사적 공간이기도 하니까.

 

"작가는 쉬운 직업이라고 생각들 하죠. 뭐, 전혀 아니라고는 할 수 없어요. 그런 점도 있으니까.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이거 해라, 하지 마라 하며 지시를 내리는 상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조직의 틀에 갇혀 있는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조직 없이 혼자 일한다는 건 작은 배를 타고 바다 한복판으로 나아가는 것과 다름없어요." (p.153)

 

위에 소개한 짧은 인용문만으로도 소설의 중심 내용이 대충 감이 잡히지 않을까. 그렇다. 주인공 남자의 직업은 프랑스에 거주하는 전업 작가이다. 미국에서 건축회사를 운영하며 취미 삼아 글을 쓰던 폴은 친구 부부의 적극적인 제안으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책을 출간하게 된다. 수줍음이 많았던 그가 갑자기 유명세를 타게 되자 도망치다시피 선택한 곳이 파리였다. 첫 책의 성공 이후로 이렇다 할 작품을 내놓지 못한 채 고독하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폴을 보기 위해 그의 오랜 친구 커플인 아서와 로렌이 방문한다. 장난기가 발동한 아서와 로렌은 인터넷 데이트 사이트에 폴의 프로필을 대신 올린다. 그리고 아서는 한 술 더 떠 여자에게 저녁 식사에 초대한다는 쪽지를 보낸다. 그렇게 초대된 여인이 '미아'였다.

 

"다이지의 말이 맞았다. 상상일 뿐이라고, 또는 무시하고 싶은 막연한 희망일 뿐이라고 생각하려 해도, 폴은 몇 주일 동안 어느 거리 모퉁이에서 미아의 향기를 맡았다. 마치 미아가 앞서 지나갔기 때문에 간발의 차이로 미아를 놓친 것처럼. 다음 사거리에서는 그녀와 마주칠 거라고 확신하면서 걸음을 재촉하기도 했다. 지나가는 여자를 미아라고 부르며 붙잡기도 하고, 밤거리를 무작정 걷기도 하고, 불 켜진 창문들을 바라보면서 그녀가 살고 있을지 모른다는 상상에 젖기도 했다." (p.373)

 

영국에서 '멜리사 바로우'라는 예명으로 활동 중이었던 미아는 남편의 외도로 인해 속을 끓이다가 소꿉친구 다이지가 사는 파리로 훌쩍 떠나온 상황이었다. 몽마르트르에서 작은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다이지는 미아를 이해하는 절친한 친구였다. 독신이었던 다이지는 식당 일로 늘 바빴고, 미아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머리 모양을 바꾼 채 그녀의 식당에서 서빙을 돕는다. 그러던 어느 날 다이지의 노트북으로 자신에게 온 메일을 확인하던 미아는 다이지가 가입했던 인터넷 데이트 사이트를 발견하게 되고 장난 삼아 자신의 프로필을 올려본다. 폴과 미아의 만남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프랑스나 그가 떠나온 미국에서 책의 매출은 미미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늘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그가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한국에서 오는 인세 덕분이었다. 게다가 그의 작품을 번역하는 한국인 번역가 경은 일 년에 두 번 2주 동안 프랑스에서 폴과 함께 머무는 등 연인 사이로 발전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의 책을 출간한 출판사 대표는 한국에서 열리는 서울 국제 도서전에 초청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며 비행기표를 내민다. 비행기로 하는 장거리 여행에 공포가 있는 폴은 한국으로의 여행을 망설이게 된다. 어렵게 발을 디딘 한국에서 폴은 자신이 알고 있던 번역가 경에 대한 비밀을 알게 되고 미아와의 사랑은 깊어지는데...

 

우리는 모두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은 것처럼 자신이 지금 하고 있거나 미래에 하게 될 사랑에 더 큰 의미를 두고 싶은 게 솔직한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연애의 상대방을 선택하는 건 오직 개인의 기호와 취향의 문제일 뿐 운명적이거나 기적에 가까운 우연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돌이켜 보면 우리가 경험한 사랑은 지극히 평범하거나 뻔한 계기로 서로 간의 만남이 이루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자신이 경험한 사랑이 지극히 평범하다고 생각되면 될수록 다른 사람에게는 그것이 조금이라도 더 특별하거나 운명적인 사랑처럼 보이기를 열망하게 된다. 그러나 현실에서의 사랑은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보편적인 사랑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랑을 특별하게 다룬 소설이나 영화를 탐닉하게 되는 까닭도 그런 이유이다. 현실에서 경험할 수 없는 특별한 사랑을 간접적으로 느껴보고 대리 만족하고자 하는 것이다.

 

소설은 아주 쉽게 읽힌다. 대화가 주를 이루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인공 폴의 소설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한국인 번역가 경의 등장도 이채롭다. 그다지 색다를 것 없는 스토리이지만 책을 쉽게 손에서 내려놓지 못하는 까닭은 이야기를 구성하는 작가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빠른 전개와 소설 속 한국 번역가를 통한 한반도의 분단 상황을 스토리에 녹여내는 점도 무시하지 못할 매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현실에서 특별하지 않던 사랑도 소설 속에서는 특별해진다. 매 순간 지지고 볶기만 하는 우리의 인생도 멀리서 보면 희극인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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