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니 (반양장) - 새로운 부의 법칙
롭 무어 지음, 이진원 옮김 / 다산북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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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저녁으로 오가는 길에 자주 마주치는 할아버지 한 분이 있다. 1층에 슈퍼가 있는 3층짜리 상가 건물 앞의 인도와 연결된 공터에서 할아버지는 다리가 불편한지 낡은 휠체어에 몸을 의지한 채 슈퍼와 슈퍼 옆 건물의 의류매장에서 나오는 빈 박스를 공터 한편에 차곡차곡 쌓아 놓곤 하셨다. 할아버지의 몸에 걸쳐진 옷도, 할아버지의 몸을 지탱하는 휠체어도 할아버지가 지나온 세월만큼이나 몹시 낡아 있었다. 겉보기에 할아버지는 궁핍한 촌부로 평생을 살아온 듯 보였다. 그러나 슈퍼의 주인으로부터 우연히 듣게 된 할아버지의 모습은 내가 생각했던 그것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평생을 농부로 살기는 했지만 할아버지가 소유했던 땅이 택지로 수용되면서 상당한 액수의 보상금을 받았고 슈퍼가 있는 건물과 바로 옆의 의류 매장이 있는 건물을 매입하고도 많은 돈이 남아 통장에 넣어두었음은 물론 매달 받는 임대료도 한 푼 쓰지 않고 꼬박꼬박 통장에 입금된다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할아버지는 상당한 알부자임에도 지독한 자린고비라는 전언이었다.

 

영국인 사업가 롭 무어가 쓴 <머니>를 읽으면서 문득 떠오른 얼굴이 '조물주 위의 건물주'인 그 할아버지였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불편한 몸으로 언제나 한결같이 박스를 정리하는 모습은 나와 같은 범부로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 행동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만약 그만한 돈이 있다면 남은 여생을 슬슬 여행이나 하면서, 또는 그림을 그리거나 악기를 배우는 등 젊은 시절에는 바빠서 미처 시간을 내지 못했던 여러 취미생활을 하면서 보낼 텐데 차들이 오가는 도로변에서 하루 종일 그 차들로부터 나오는 매연을 마셔가며 박스를 모은다는 게 그만한 자산가가 할 일은 아닌 듯 여겨졌다.

 

"돈을 지배하는 법칙들이 있다. 부자들은 그들을 이해하고 활용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그들의 희생양이 된다. 돈은 그것을 소중하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로부터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로 이동하기 때문에 부는 언제나 지배 법칙들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로 이동할 것이다." (p.195)

 

'서른 살에 부와 성공을 거머쥔 젊은 백만장자 사업가'로 소개되는 저자는 화려한 현재의 모습과는 달리 대학 시절 여러 번 사업에 실패하고, 파산한 알코올 중독자로 몇 년을 보냈으나, 머니 게임의 룰을 직접 경험하며 불과 3년 만에 완전한 경제적 자유를 획득했다고 한다. 어찌 보면 그는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극과 극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왔던 셈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우리가 갖고 있는 부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을 뒤엎는 새로운 부의 규칙과 법칙을 설명하고 있다. 평생 열심히 일하고도 부자가 되기는커녕 빚에 시달리며 투자자와 시스템을 증오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들의 문제는 아마도 돈을 버는 방법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거나 돈을 잘 모르는 게 아닐까라고 진단한다.

 

돈 많은 부모나 좋은 운을 타고 태어나지 않았더라도 부에 대한 생각을 재설정하고, 더 많이, 더 빨리, 더 똑똑하게 저자가 발견한 부를 만드는 공식을 실행하기만 한다면 누구든 행복하게 돈을 벌 수 있음은 물론 창출한 부를 바탕으로 좋은 부모, 자상한 배우자, 사회적 영향력이 큰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일반인이 갖고 있는 돈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이 그들이 이룰 수도 있는 부를 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우리가 이러한 편견을 없애고 제대로 된 부의 정의와 목적, 역사, 흐름, 시스템, 자연적 경제 법칙을 깨우치고 저자가 제안하는 부를 증식시키는 방법을 차례로 실천하기만 하면 누구든 부자가 될 수 있다며 빠른 실천을 권하기도 했다. 나아가 그렇게 이룩한 부로 부의 법칙을 모르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유용하게 쓰라고 제언하기도 한다.

 

"당신의 유산을 교육과 지원의 형태로 전달하는 게 더 가치가 있을 수도 있다. 돈을 관리하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에게 돈을 주는 건 그가 깨달음과 지식을 얻게 해주는 것만큼 유용하지 않다. 위대한 자선가들이 기부만큼이나 교육에 투자하고, 재단을 세우는 이유가 이것이다. 당신은 유산으로 수십 세대를 교육시키고 그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다." (p.248)

 

우리는 흔히 '돈으로 행복을 살 수는 없다'는 말로 힘들게 사는 자신의 처지를 합리화하곤 한다. 더 이상 내려놓을 것도 없는 사람이 '내려놓기'나 '미니멀 라이프'를 추구하기도 하고, 세속의 욕심에서 한 발 비켜서 있는 듯한 자신의 모습에 으쓱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저자는 지난 10년간 자신이 만난 부자 중에 돈 때문에 불행하다거나 행복하지 않다고 말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반박한다. 가장 선망하는 대상이면서 아닌 척할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부는 이 세상의 모든 선한 행동을 위한 힘이자 보편적 교환 수단이다. 부는 모든 성장과 진화에 연료를 공급하고 자금을 댄다. 돈은 능력의 척도이자 가치의 메커니즘이자 척도이다. 돈은 창조성과 개인적 표현을 생산으로 바꾼다. 돈은 커뮤니티와 사회를 연결하는 관심이자 서비스다. 부는 모든 혁신에 자금을 대고 그것을 가속화하며 세계에서 가장 중대한 문제들을 해결해준다. 돈은 이기적이고 이타적인 관심들 사이의 균형을 맞추고, 인간의 가장 위대한 발명품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p.365)

 

책의 내용과는 다른 얘기지만 나는 정말 가난한 집안에서 성장했던 탓에 용돈은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고 성장에 필요한 모든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만 했다. 그러다 보니 돈에 대해 내가 배웠던 것은 온통 부정적인 인식이 다였다. 게다가 돈을 손에 쥐어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돈을 관리하는 방법은 배울 기회마저 얻지 못했다. 나는 이러한 사실을 결혼 후에야 알게 되었다. 나와는 달리 비교적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했던 아내는 돈을 지키고 효율적으로 쓰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이 책의 저자가 말했던 것처럼 돈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진 사람은 부자가 되기 어렵다. 일단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처한 환경에 강한 불만을 표하면서도 그 원인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린다. 그런 편향된 인식을 버리는 게 부자가 되기 위한 첫걸음이란 걸 잘 알지만 성장 과정에서 아무런 비판의식 없이 습득한 편견이 쉽게 고쳐질 리 없다. 스스럼없이 담배와 가까워졌던 사람이 담배와 결별하기 어려운 것처럼 말이다. 편견을 버리면 돈이 보일 텐데... 아무튼 나는 저자가 말한 내용을 다 동의할 수는 없지만 많은 부분에서 고개가 끄덕여졌다. 간절히 부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참고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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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분하거나 마음이 급하면 나도 모르는 결에 헛말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것이 비단 나에게 해당하는 것만은 아닌 듯 오늘 아침에도 그와 같은 일을 목격하게 되었다. 어제의 선거 결과로 잔뜩 흥분했었던지 한 친구 왈, "축하드립니다!" 해야 할 것을 그만 "진보드립니다!"라고 하는 바람에 듣고 있던 사람들이 다들 무슨 소린가 한동안 어리둥절 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멀뚱멀뚱 서로를 쳐다만 보고 있는데 그제야 자신의 실언을 눈치챈 그 친구 왈, "죄송합니다. '축하드립니다'라고 말한다는 게 그만 선거 생각에 골몰하다가 '진보드립니다'라고 잘못 나왔어요." 하면서 얼굴을 붉혔다.

 

나이가 들수록 그런 실수는 잦아지게 마련이다. 문장의 의미에도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의도치 않게 끼어들기도 하고 말이다. 흔히 쓰던 단어도 말하려는 순간 도통 생각나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고. 그러나 어쩌랴. 젊었던 시절의 총기는 다 옛말, 그런 실수쯤 인정하며 받아들일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언제까지고 흐르는 세월만 한탄하며 자신의 과거를 그리워할 수는 없지 않은가.

 

선거 결과를 보니 참패한 보수세력이 그런 꼴이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꾸준히 이어져왔던 자신들의 호시절에 흠뻑 젖어 있었던 탓인지 변화의 필요성은 전혀 생각도 않고 있던 그들이 아닌가. 그런데 TK지역으로 쪼그라든 참담한 선거 결과를 자신들의 눈으로 확인하게 되자 그런 자신들의 처지가 도무지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더구나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고향인 구미에서도 민주당이 승리하지 않았는가.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이제야 박정희의 망령에서 깨어난 게 아닌가. '축하드립니다' 대신에 '진보드립니다'로 바꿔도 괜찮은 듯하네, 친구여. 뜻만 통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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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의 위로
조안나 지음 / 지금이책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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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대개 책에 관해서만큼은 인심이 후한 편이다. 대부분이 그렇다. 여기서 인심이 후하다는 건 다른 사람들에게 책을 아낌없이 선물한다는 게 아니라 책과 관련된 자신의 경험이나 속내를 두려움 없이 내보인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일지라도 책을 고르는 취향이나 기호만 비슷하다면 아주 오랫동안 관계를 지속해온 지기처럼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눌 수도 있고, 실제로 그렇게 느끼기도 한다. '공감'이라는 말로는 뭔가 미진한, 책을 통하여 상대방의 어린 시절까지 모두 알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은 다른 취미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책만이 갖고 있는 특별한 매력이라고 할 것이다.

 

 

조안나의 독서 에세이 <책장의 위로>는 그런 느낌의 책이었다. 연령이나 성별, 출생지나 경제적 여건 등 모든 조건을 떠나 책을 통하여 작가와 금세 친구가 될 수 있을 듯한 그런... 2011년에 나왔던 <달빛 책방>을 재개정하여 출간했다는 <책장의 위로>는 총 6장에 37권의 책을 소개하고 있다. '01 사랑은 떠나도 책은 남는다', '02 좋아서 하는 일도 힘들 때가 있다', 03 잊고 싶은 기억은 꼭 밤에 떠오른다', '04 읽다 보면 혼자가 아닌 날이 많다', '05 피곤한 날에도 읽다 잠든다', '06 마음속에 나만의 도서관을 만든다'의 각 장에는 여러 이유로 나도 모르게 어깨가 처지는 날 나를 위로하고 다시 기운을 북돋워 줄 책들이 소개되고 있다.

 

"<낙하하는 저녁>에는 미련 없이 전화를 끊고, 그 어떤 기대감 없이도 인사를 나눌 수 있는, 그런 담백한 이별이 내리고 있다. 그런 이별을 꿈꾼다면, 보약을 달이는 심정으로 정성스럽게 이 소설을 읽어보는 건 어떨까. 그리고 지독한 이별을 겪은 후엔 평소 좋아하던 일을 극단적으로 정성을 기울여 해보자. 그 정성에 놀라운 치유의 힘이 숨어 있다. 오늘도 어제처럼 저녁이 낙하하고 있다. 조용히 아무도 특별히 눈치채지 못하게…"    (p.28)

 

작가가 소개하는 첫 책은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이 나를 외롭게 할 때' 읽으면 좋다고 생각하는 한스 에리히 노사크의 <늦어도 11월에는>이다. 나도 몇 년 전 겨울에 이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작가는 그 외에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에 알맞은 엘리자베스 길버트의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책 읽기 싫은 날'에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인간이라는 존재가 싫어질 때'는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 '새벽에 홀로 깨어 있고 싶을 때'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어둠의 저편>, '두꺼운 추억이 필요한 날'에는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을, '도무지 잠이 오지 않는 밤'에는 장 그르니에의 <섬>을 읽으라고 권한다. 이쯤에서 감을 잡았는지 모르지만 작가가 소개하는 시와 에세이, 소설 등 다양한 장르의 책은 모두 대중적이면서도 진한 감동을 주는 책들이다.

 

"<섬>을 읽을 때에는 음악도 필요 없다. 믿을 수 있는 역자 김화영의 유려한 번역으로 비처럼 음악처럼 읽힌다. 짐승들이 가만히 엎드려 대자연과 교감하는 것처럼 새벽 3시에 오직 반듯이 누워 침묵과 휴식에 골똘히 집중해본다."    (p.181)

 

서평집이라기보다는 독서 에세이를 표방하는 이 책은 인용문은 가급적 절제하는 한편 책을 읽은 작가의 소감이 책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작가가 표현하는 느낌은 일시적이거나 순간적이지 않다. 깊이 생각하고 여러 번 되씹어본 문장들이라는 게 곳곳에서 보인다. 그래서인지 작가가 소개하는 37권의 책 중 과거에 읽었던 책이 더러 있다 할지라도 작가가 소개하는 책 전부를 다시 읽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한다.

 

"당신도 이방인. 나도 이방인. 세상은 아닌 것처럼 연기하고 있지만 결국 또 다른 '현재'에게 자리를 내 주어야 하는 이방인이다."    (p.132)

 

북한과 미국의 정상이 만나 역사적인 북·미 정상회담이 개최되었던 오늘, 온 국민의 간절한 염원이 싱가포르에서 만난 두 정상에게 고스란히 전달되고도 남았을 우리의 기원, 정상회담이 열리던 그 시간 내내 텔레비전 화면에서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었던 우리의 시선, 조바심 나는 평화에의 갈망을 안고 나는 조안나의 <책장의 위로>를 읽었다.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멀리 프랑스 파리를 향해 긴 여행을 떠나게 될 그날을 생각하며 나는 오늘 달콤한 잠에 취할 수 있을 것 같다. 꿈꿀 수 있는 자유, 책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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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따금 아무것도 아닌 일로 투닥투닥 다투기도 하고, 입을 닫은 채 며칠씩 소 닭 보듯 데면데면 지내기도 하지만 그러다 정 불편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거나 별 재미도 없는 이야기를 옜다 선심 쓰듯 내뱉기도 한다. 그럴라치면 '인생이란 게 참 별거 없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곤 한다. 아주 작은 일에도 내일 당장 갈라설 것처럼 불같이 화를 내기도 하고, 때로는 큰 실수를 하여 잔뜩 주눅이 든 상대방을 향해 '그럴 수도 있지' 더없이 너그러운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변덕이 팥죽 끓듯 하는 게 우리네 인생이지 싶다.

 

나는 어제 최근에 이혼한 한 친구를 만나 그의 넋두리를 한동안 들었다. 유행처럼 번지는 불륜이나 이혼의 세태가 우리가 갖고 있던 도덕률을 뿌리째 흔들어 선과 악의 개념조차 희미해진 건 맞지만 가까운 사람의 이혼 소식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마음고생이 심했던 탓인지 친구의 얼굴은 사뭇 야위고 초췌해 보였다. "너무 마음 쓰지 마. 이혼은 이제 흉도 아니잖아." 하는 틀에 박힌 말을 건네면서도 결국 모든 고통은 당사자에게 귀착될 거라는 사실에 씁쓸한 마음이었다.

 

흐리고 텁텁했던 어제의 날씨는 온데간데없고 가을 날씨처럼 청명한 오늘. 볼에 와 닿는 부드러운 바람이 더없이 기분 좋게 한다. 산책을 부르는 날씨. 가볍게 거니는 사람들의 표정에서도 나와 같은 느낌이 물씬 풍긴다. 사람은 결국 경험과 기억의 총체가 아닌가. 좋은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모든 기억은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삶의 의미를 깨닫도록 한다. 그런 까닭에 기억과 경험에는 선악호오(善惡好惡)나 미추정사(美醜正邪)의 분별이 존재할 수 없다. 모든 것은 지나가게 마련이고 지나간 모든 것은 그 사람에게 귀속된다. 사회 전체의 유익을 따질 때에는 도덕적 기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어제 만났던 친구의 얼굴이 머릿속을 맴돈다. 심란하다. 그러나 친구도 언젠가는 이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낭송되는 폴 발레리의 시 한 구절이 생각난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세찬 바람은 내 책을 펼치고 또 덮으며/물결은 가루로 흩어져 바위로부터 굳세게 뛰쳐나온다/날아가거라 - 눈부신 페이지들이여/부숴라 파도여 - 뛰어노는 물살로 부숴버려라/돛단배가 먹이를 쪼고 있던 이 조용한 지붕을' ('해변의 묘지'(총 24연 144행 중 마지막 6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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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이름은
조남주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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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소설은 마치 1980년대의 대학가에 나붙은 대자보처럼 읽는 것만으로도 감정이 격해지고 자기도 모르게 울컥 분노가 솟구치기도 한다. 예컨대 2015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였던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글도 그랬다. '있는 그대로의 삶을 묘사하는' 이를테면 개인의 단편적인 일상을 콜라주 형태로 이어 붙여 궁극적으로는 한 시대의 모습을 합창 형식으로 완성하는, '개인 목소리의 합창'은 사실이 주는 울림과 같은 문제를 각기 다른 모습으로 피력하는 개개인의 목소리를 한 곳에 모아 더 큰 목소리로 전달한다는 점에서 독자가 느끼는 감동은 일반적인 소설과는 크게 다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마치 부당한 사회 문제에 대해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일시에 고함을 치는 것과 비슷하다. 어느 시인이 말했던 '소리 없는 아우성'은 이런 경우에 해당할지도 모른다. 문자로 외치는 많은 사람들의 함성, 그 조용한 고함 소리.

 

"아홉 살 어린이부터 예순아홉 할머니까지 육십여 명의 여성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그 목소리에서 이 소설들이 시작되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상기된 얼굴, 자꾸만 끊기던 목소리, 가득 고였지만 끝내 흘러내리지 않던 눈물을 잊지 않겠습니다." (p.6 '작가의 말' 중에서)

 

'82년생 김지영'을 쓴 작가 조남주의 신작 <그녀 이름은>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작가가 인터뷰한 이야기는 신문 지면에 르포 형식의 기사로 연재되었고, 작가는 그 기사를 모아 28편의 짧은 소설들로 재구성했다. 말하자면 이 책은 작가의 첫 소설집인 셈이다. 네 개의 장에 나뉘어 담긴 28편의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이 땅에 사는 다양한 연령층의 여성들을 일일이 불러낸다. 차별과 폭력 앞에서 여전히 무기력할 수밖에 없는 이 땅의 여성들, 때로는 폭력에 저항하는 피해 여성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가해지는 2차 피해와 그 실체를 작가는 아주 담담한 필체로 기록한다. 그러나 책을 읽는 독자는 작가의 담담함이 오히려 분노할 수 없는 더 큰 분노라는 걸 이내 감지하게 된다.

 

"나는 그래도 가벼운 부상에 속했다. 많은 학생들이 탈진했고, 넘어지고 부딪히며 멍들고 부러졌다. 깨진 유리 조각에 찔리기도 했다. 하지만 나를 가장 아프게 했던 것은 표정들이다. 끌려 나가는 제자를 팔짱 끼고 쳐다보던 교수들의 덤덤한 표정, 아무렇지 않게 자기들끼리 웃으며 대화를 나누던 경찰들의 표정, 그리고 그 많은 경찰병력을 보냈을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표정." (p.231 '다시 만난 세계' 중에서)

 

약자의 인내가 오래되면 될수록 약자의 저항은 오히려 사회 구성원으로부터 그 정당성을 인정받기 어려워진다. 그것은 일종의 돌발행동이거나 사회 부적응자의 돌출 행동쯤으로 이해된다. 같은 처지에 있는 약자의 시각도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부당한 처우에 대한 저항은 그 자체만으로도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용기에 대한 보상은 많은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과 비난, 조롱, 그리고 법적 처벌이 전부일 때가 많다. 사회 부조리도 일종의 사회적 관습으로 이해하는 사회 구성원들은 변화를 통한 혼란을 결코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변화를 가로막는 가장 큰 걸림돌은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의 우리들의 인식이 아닐까.

 

"나이를 먹으니 그냥 좋은 게 좋은 거지 싶다. 따박따박 따지기도 귀찮고 손해 좀 보는 게 그렇게 아깝지도 않다. 그런데 핸들만 잡으면 깐깐한 기사가 된다. 이만큼 경력이 쌓였으니 스스로를 위해서도, 후배 여성 기사들을 위해서도 그게 맞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p.169 '운전의 달인' 중에서)

 

오늘 나는 6.13 지방선거 사전투표를 했다. 선거는 어쩌면 약자들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연대가 아닐까 싶다. 헌법으로 익명이 보장되는 유일한 연대, 선거는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미세먼지 가득한 초여름의 더위 속에서도 그 연대의 대열은 길게 이어졌다. 정의와 평화, 소수자의 인권과 공정한 대우를 바라는 약자들의 연대, 나도 오늘 그 대열에 동참했었다. 기꺼운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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