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데이 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카트 멘쉬크 그림, 양윤옥 옮김 / 비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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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상상의 아주 좁은 틈새를 잘 파고드는 작가가 있다. 데뷔 후 지금까지 단 한 작품만 제외하면 줄곧 그 좁은 틈새를 배경으로 글을 써왔고, 그의 작품을 읽는 독자들은 어느 틈엔가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마치 현실인 양, 마치 상상인 양 여기게 되었고, 현실과 상상의 세계는 그렇게 이어졌고 두 세계에 가로놓였던 벽은 자연스레 무너져갔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왜 그의 작품에 열광하는지, 그가 어떤 공간을 배경으로 글을 쓰고 있는지 자세히 알지 못했다. 어쩌면 자세히 알고 싶어 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상상과 현실 사이에 아주 얇은 벽이 존재한다는 걸 아는 순간, 그의 작품이 단순히 그렇고 그런 판타지로 오인받는다거나 그동안 현실이라고 굳게 믿었던 그의 작품 속 공간, 그 동화나 신화와 같은 자신들의 꿈이 산산이 부서지지 않을까 염려하는 까닭이다. 그의 이름은 무라카미 하루키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 소설 <버스데이 걸> 역시 현실과 상상을 잘 조합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말이다. 이쯤에서 하나 짚고 넘어갈 일이 있다. 사람들은 왜 그토록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에 열광하는가? 하는 점이다. 아마도 그것은 현실에 지친 사람들이 무라카미 하루키로 인해 아주 쉽게 상상 속으로 빠져들 수도 있고, 상상으로부터 아주 쉽게 빠져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 아닐까. 작가는 독자들로 하여금 상상의 공간에서 잠시 쉴 수 있는 여유를 제공하기도 하고, 상상의 그 허허로운 공터에서 이쪽 편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깨달음을 주기도 한다.

 

작가는 그의 신작인 <버스데이 걸>에서 누구에게나 1년 중 가장 특별한 하루인 생일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 여자가 특별했던 자신의 스무 살 생일을 회상하는 내용이다. 롯폰기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웨이트리스로 아르바이트를 하던 스무 살 시절의 여인은 자신의 생일이었던 11월 17일, 마땅히 축하해줄 줄 알았던 남자 친구와도 심하게 말다툼을 한 후 헤어지고, 게다가 생일날 근무를 대신해주기로 했던 직장 동료마저 감기가 도져 어쩔 수 없이 근무를 하게 되었다. 설상가상 그날은 비가 세차게 내렸고 직원을 총괄하고 레스토랑 사장의 식사를 챙기는 플로어 매니저마저 복통으로 병원에 실려간다. 그녀는 플로어 매니저의 부탁에 따라 그를 대신해 사장에게 저녁 식사를 배달한다. 사장이지만 레스토랑에는 결코 나타난 적 없었던, 그야말로 베일에 싸인 사장은 키가 작은 멋쟁이 노신사였다. 식사 배달에 나섰던 그녀는 사장에게 오늘이 자신의 스무 번째 생일임을 밝힌다.

 

"생일 축하하네." 노인은 말했다. "아가씨, 자네의 인생이 보람 있는 풍성한 것이 되기를. 어떤 것도 거기에 어두운 그림자를 떨구는 일이 없기를." (p.34)

 

사장은 그녀에게 소원 하나를 말해보라고 한다. 그녀는 스무 살 생일에 누구나 바랐을 듯한 예뻐지고 싶다거나 부자가 되고 싶다거나 하는 소원을 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화자인 나에게조차 그날 생일 소원이 무엇이었는지 끝내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 소원이 이루어진 것처럼 느껴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레스토랑을 그만뒀고 다시는 그곳에 가지 않았다고 했다. 십여 년도 더 지난 지금 그녀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이따금 그 스무 살 생일날 밤에 일어난 일이 모두 다 환상이었던 것처럼 생각되기도 해. 어떤 작용 같은 것이 일어나 실제로는 없었던 일을 그냥 있었다고 믿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p.51)

 

그녀의 소원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했던 나는 그녀에게 두 가지 질문을 한다. 그 소원이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그 소원을 빌었던 것을 후회하지는 않는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귓볼을 긁적였다. 예쁜 모양의 귓볼이다. "인간이란 어떤 것을 원하든, 어디까지 가든, 자신 이외의 존재는 될 수 없는 것이구나, 라는 것. 단지 그것뿐이야." (p.57)

 

스무 살 시절의 그녀는 사장에게 '인생이라는 것이 아직 잘 잡히지 않고 그 구조를 모르겠다'고 말한다. 한참이나 시간이 흐른 후에 그때의 일을 회상하는 구조로 쓰인 이 소설은 하루키 특유의 환상적인 분위기를 더해 마치 동화처럼 읽힌다. 이제 막 성인이 되는 시기에,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던 그 시절에, 하지만 인생이 무엇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던 그 나이에 현실 속으로 우연처럼 상상이 개입하기를 우리는 얼마나 간절히 바라마지 않았던가.

 

"당신은 스무 살 생일에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 기억하는가. 나는 매우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1969년 1월 12일은 날씨가 쌀쌀하고 옅은 구름이 낀 겨울날로, 나는 아르바이트로 커피점 점원 일을 하고 있었다. 쉬고 싶어도 일을 바꿔줄 사람이 찾아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날은 결국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즐거운 일 따위는 하나도 없었고, 그것은 나의 그로부터의 인생을 암시하는 것처럼 (그때는) 느껴졌었다." (p.63 '작가 후기' 중에서)

 

하루키의 글에 더하여 독일 출신 일러스트레이터인 카트 멘시크의 강렬하면서도 독특한 색감의 그림이 금방이라도 동화 속 세상으로 안내할 것 같다. 우리는 이따금 상상의 세계로 훌쩍 떠나고 싶어 하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그곳으로 가는 길이 아득히 멀게만 느껴지곤 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상상의 세계로 가는 길을 완전히 잃어버린 무감각한 어른들을 위한 친절한 안내서이다. 특히 이 책 <버스데이 걸>은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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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돈이 되는 건 아니지만 꼭 해야 하는 일들이 더러 있다. 그런 일들은 대개 돈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돈이 드는 경우가 더 많아서 일의 우선순위는 항상 뒤로 밀리게 마련이다. 당장 돈이 되거나 돈은 되지 않지만 여러모로 자신에게 유리한 일을 우선적으로 먼저 하게 되고 나머지 일은 그저 시큰둥할 뿐 의욕이 나지 않는 것이다. 적이나 할 일이 없거나 다른 사람의 시선이 두렵거나 마음이 무거워 오랫동안 심적인 부담이 되었거나 하지 않으면 결코 하지 않았을 일들.

 

그러나 살다 보면 돈이 되는 일을 하지 않아서 후회하는 것보다 돈도 되지 않는 일을 하지 않아서 후회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는 걸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야 알게 된다. 예컨대 주말 휴일을 집에서 빈둥대면서도 시골에 사는 부모님을 한 번 더 찾아뵙지 못했던 일, 바쁘다는 이유로 가족 여행을 자주 하지 못했던 일, 아이가 어렸을 때 피곤하다는 이유로 책 한 권 더 읽어주지 못했던 일 등은 돈은 되지 않지만 되돌릴 수 없는 시간으로 인해 밀려오는 회한은 돌덩이처럼 딱딱해지기만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 우리는 가까운 미래에 있을 후회를 걱정하며 살지는 않는다. 자신이 하는 일과 마음을 억지로 떼어놓은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돈을 좇느라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다 보면 감정을 표현하는 일이 점점 더 서툴고 어려워진다. 감정이 사라진 마음은 황폐하다. 인생의 어느 순간에 자신의 감정을 되찾지 못하면 삶의 의미마저 잃게 된다. 그리고 황폐하고 메마른 사람 곁에 다른 사람이 찾아올 리 없다. 우리는 어쩌면 자신의 일에 마음을 담는 법을 먼저 배웠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돈이 되는 일인지 아닌지 구분하기에 앞서 어떤 일이든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에 마음을 담지 않는다는 건 언젠가 자신으로부터 마음마저 떠난다는 걸 암시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무척이나 더운 날씨, 어떤 일이든 시작도 하기 전에 짜증부터 나는 무더위에 책 한 권 손에 잡고 앉으면 달아났던 마음도 되돌아오는 듯하다. 나는 지금 김승섭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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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소화 - 삼시 세끼, 무병장수 식사법
류은경 지음 / 다산라이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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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정보가 너무 많아서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건강에 관한 정보가 특히 그렇다. 전문가 입네 떠드는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이 사람 얘기를 들어보면 그도 그럴듯하고, 또 저 사람 얘기를 들어보면 그것 또한 그럴듯하니 도대체 어느 장단에 춤을 추어야 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서로의 견해가 일치하거나 비슷한 경우라면 미세한 차이가 있다 할지라도 그러려니 넘어갈 수 있지만 완전히 상반되는 견해를 내놓는 경우도 더러 있어서 그럴라치면 머릿속은 더더욱 혼란스러워진다. 그 분야의 전문가도 아닌 내가 전문가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무시할 수도 없고 말이다.

 

"우리는 너무 똑똑한 나머지 본능을 잃어버리고, 건강도 잃어버린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건강하고 날씬하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같다. 그리고 건강해지는 방법은 과학이 아닌 자연의 이치에서 찾아야 한다. 지나치게 복잡한 과학과 의학, 영양학은 우리를 병들게 한다. 심지어 영양분이 가득하다고 믿고 먹었던 음식들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p.10 '들어가는 말' 중에서)

 

연(然) 식습관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는 류은경 대표가 쓴 <완전 소화>에는 지금까지 형성된 상식과 사고방식을 완전히 뒤집어엎는 저자의 견해나 새로운 학설이 다수 등장한다. 일천한 건강상식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어느 것이 맞는지 확신할 수가 없지만 다소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운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그러나 저자는 여러 전문가의 주장을 인용함으로써 자신의 견해에 대한 강한 확신을 독자들에게 어필하고 있었다.

 

"가장 심각한 사실은 우유가 대장암, 전립선암과 류마티스 관절염, 천식, 아토피 등 자가 면역 질환의 원인이라는 점이다. 우유의 위해성을 연구한 하버드 의대에서는 하루 우유 섭취량을 두 잔 이하로 제한했다. 그리고 그 이유로 소를 빠르게 성장시키기 위한 성장 호르몬 IGF-1 insulin growth factor(인슐린 성장 인자)을 꼽았다. IGF-1은 세포 증식을 돕는 성분인데, 건강한 세포뿐만 아니라 암세포의 성장도 돕는다는 게 문제였다. 실제로 혈중 IGF-1이 높은 사람은 유방암과 전립선암, 폐암의 위험 빈도 또한 높다는 연구 결과가 세간에 알려져 있다." (p.39~p.40)

 

국립암센터에서 신약을 개발하는 연구원으로도 근무했던 저자는 병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지 않은 채 일시적인 증상 개선에만 급급하는 병원과 제약회사의 행태에 환멸을 느껴 퇴사한 후 건강하게 장수하는 사람들의 사례 연구에 몰두했다고 한다. 그 결과 건강하게 장수하는 사람일수록 위-간-장으로 이어지는 소화기관이 튼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저자 또한 수많은 책과 논문을 분석하여 우리 몸에 살아 있는 효소를 공급하는 자연식 완전소화 식단을 제시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 책에서 제시하는 핵심 솔루션은 오전 공복 과일식과 식전 과일 섭취, 현미 생채식 위주의 한식단이다. 오전 공복에 과일을 섭취하면 체내 독소 배출을 도와서 신진대사를 활발하게 한다. 식전 과일은 효소를 공급해 소화를 도와주고, 현미 등 통곡식과 푸른 야채는 대장 기능을 활발하게 만든다. 혹시 영양 부족에 시달리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단언컨대 따로 고기나 영양제를 먹지 않아도 우리 몸은 과일과 채소만으로도 충분한 에너지를 만들어낼 수 잇다. 그게 바로 자연의 섭리이기 때문이다." (p.275 '나가는 말' 중에서)

 

오늘 아침 등산길에서 처음 만난 중년 남자도 얼마 전에 뇌출혈로 쓰러졌었다고 했다. 간신히 깨어난 후 그는 도시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강을 따라 하루에 2시간 30여 분씩 매일 걸었다고 했다. 그러다가 산이 더 공기가 좋지 않을까 싶어 오늘 처음으로 산에 와봤다고 했다. 땀을 많이 흘리는 무리한 운동은 하지 말라는 의사 선생님의 당부가 있었다면서 그는 30여 분을 걷다가 내려갔다. 딱 보기에도 비만인 듯한 그는 고혈압을 앓고 있다고도 했다. 소위 '대사증후군'을 앓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식습관이 잘못된 경우가 많다. 가지야마 시즈오의 <식사 순서 혁명>이나 류은경의 <완전 소화>는 모두 식사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먹어서 죽는다'고 했던 법정 스님의 말씀이 하나 틀린 게 없다. 100세 시대에 먹는 것으로 인해 병원 침대에 누워 반평생을 보낸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연일 올 최고 기온을 갈아치우는 요즘, 만나는 사람들마다 식욕이 없다고 했다. 더위에 물만 들이켜다 보니 헛배만 부르고 식욕이 없을 수밖에. 환경오염으로 고온 현상은 해가 갈수록 심해지는데 식욕마저 잃고 지쳐간다면 큰일이지 않은가. 폭염도 폭염이지만 새삼 먹거리 걱정을 아니할 수 없는 시점이 온 것이다. 잘 먹고 잘 산다는 게 생각만큼 쉽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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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 씨의 하루 일과는 베란다의 화분에 물을 주는 것으로 시작된다고 했다. 잠에서 깨자마자 쪼르르 베란다로 달려가서는 그녀만의 전용 물뿌리개인 작은 플라스틱 용기에 물을 받아 줄지어 놓인 화분에 능숙한 손길로 물을 준다는 것이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그 일만큼은 거르는 법이 없다고 했다. 화분마다 듬뿍듬뿍 충분히 물을 준 후 용무를 마친 물뿌리개를 처음 있던 장소에 되돌려놓음으로써 하루를 시작하는 그녀의 첫 임무가 완성된다는 것이다.

 

아침을 먹고, 세수를 하고, 머리띠와 원피스 그리고 앙증맞은 샌들로 한껏 멋을 낸 경희 씨는 서둘러 놀이터로 나온다. 햇빛이 강해지기 전에 그네를 한 번이라도 더 타려면 서둘러야 한다. 오전의 놀이터는 높은 아파트 건물에 가려 그늘이 진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요즘과 같은 여름철에는 그네를 몇 번 타지도 못했는데 해는 어느새 머리 꼭대기에서 강한 햇살을 쏟아내곤 한다.

 

나는 매일 아침 그네에 앉아 있는 경희 씨와 인사를 한다. 그녀는 아파트 같은 동, 같은 층에 사는 이웃이다. 경희 씨는 올해 네 살이 되었다. 꼬마 숙녀인 경희 씨의 부친은 초등학교 선생님이다. 그래서인지 예의가 바르다. 이따금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칠 때면 "안녕하세요?" 하면서 배꼽인사를 한다. 그네를 좋아하는 경희 씨는 계절에 상관없이 아침마다 그네를 탄다. 그네를 타는 경희 씨의 표정은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해 보인다. 보고 있는 나도 행복해진다. 말하자면 나는 경희 씨로 인해 행복한 하루를 보장받는 셈이다.

 

낮 동안 경희 씨는 무엇을 하며 보내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저녁을 먹고 산책을 하다 보면 아주 가끔 그네에 앉아 있는 경희 씨를 볼 때가 있다. 그때 경희 씨의 표정은 아침과는 사뭇 다르다. 가로등 밑에서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그네를 탄다. 뭔가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 보일 때도 있다. 누구에게나 경희 씨처럼 세상이 온통 행복해 보이는 철부지 네 살이었던 때가 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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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1 : 태조 - 혁명의 대업을 이루다 조선왕조실록 1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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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키우고 생명이 자라는 곳은 어디나 부산하다. 부산하고 소란스럽다. 여름의 숲이 시끄러운 것도 그런 까닭이다. 생명이 자라고 있기 때문이다. 우렁찬 울음소리로 생명의 탄생을 알리고 온갖 소리와 함께 자신의 삶을 꾸리다가 소리와 함께 정적 속으로 사라지는 것, 우리네 인생이 그런 것이라면 소리는 곧 생명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역사의 기록이 생명의 생성과 소멸을 다루는 것이라면 역사 또한 과거의 소리를 재현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역사학자 이덕일이 쓴 <조선왕조실록>을 읽으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1997년 훈민정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500년 역사의 방대한 기록을 책으로 읽는다는 건 침묵 저편으로 물러났던 과거의 소리를 다시 듣는 일이다.

 

"기전체 역사서는 체제는 깔끔하지만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는 부족하다. 반면 태조 이성계로부터 철종에 이르기까지 25대 472년간의 역사를 날자별로 기록한 편년체 역사서인 <조선왕조실록>은 현장의 생동감이 그대로 살아 있다. 마치 그 현장에 있는 것처럼 당시의 목소리가 생생하게 전해진다."    (p.5 '들어가는 말' 중에서)

 

<조선왕조실록>을 인터넷으로 열람, 검색하는 서비스가 처음 시작되었던 건 2005년 12월이었다. <칼의 노래>를 썼던 김훈 작가는 언젠가 그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대학 2학년 때 '난중일기'를 읽고 굉장한 충격을 받았으며 '난중일기'는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무서운 글이었다고 작가는 회상했다. '절망만이 가득하고, 적으로 가득한 희망 없는 세상에서도 인간은 살 수밖에 없구나'라고 가르치고 있는 듯했다고 말했다. 나 역시 <조선왕조실록>을 인터넷으로 처음 접했을 때 그 방대한 기록도 기록이려니와 기존의 역사서와는 달리 마치 어제 기록한 듯한 생생한 느낌으로 인해 가슴이 마구 뛰었었다. 나는 비록 글재가 없어 <조선왕조실록>을 책으로 쓰지는 못했지만 이덕일 작가 역시 나처럼 가슴이 뛰었던 게다. 김훈 작가가 30여 년 동안 이순신 장군을 가슴에 품고 지내다가 쓴 책이 <칼의 노래>인 것처럼 이덕일의 <조선왕조실록> 역시 10년간의 구상과 5년간의 집필 끝에 이루어낸 노력의 산물임을 밝히고 있다. 조선 왕조 500년 장대한 역사의 서막을 여는 인물은 태조 이성계이다.

 

"이성계는 일곱 살 어린 정도전을 기꺼이 스승으로 삼았다. 정도전은 이성계를 주군으로 삼았다. 정도전은 이성계의 신하이자 스승이었고, 이성계는 정도전의 군주이자 제자였다. 두 사람의 만남은 그 자체로 고려 왕조를 폭풍 속으로 몰고 갈 조짐이었다. 그 조짐이 겉으로 불거진 것이 바로 이성계의 토지 개혁 상소문이었다. 그러나 우왕은 물론 조정의 대신들 중에서도 그 의미를 읽은 사람이 없었다."    (p.145)

 

원나라 사람으로 동북면에서 여진족과 함께 생활하던 '변방 촌뜨기'가 아버지를 따라 고려에 귀순하여 급기야 조선 왕조 500년을 이어가는 기틀을 세우게 되었는지, 우리가 텔레비전과 여러 역사서를 통해 수도 없이 보고 들었던 그 장대한 역사의 시작이 작가의 치열한 사료 연구와 생생한 필체를 통해 다시 태어난다. 고려 왕조의 모순을 파악하고 겸손과 섬김의 자세를 견지함으로써 소통과 실천의 리더십을 보여주었던 이성계는 결국 권좌에 오르지만 자식들끼리 죽고 죽이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가혹한 운명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렇게 태조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혁명적 토지 개혁을 단행해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랑과 고려를 멸망시킴으로써 인간으로서 짊어질 수 있는 극도의 증오를 동시에 받으면서 이 세상을 떠났다. 그가 가는 저승에는 함께 이 왕국을 만들었으나 먼저 왕국을 떠난 많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미래는 언제나 그랬듯 살아남은 사람들의 몫이었다."    (p.356)

 

한낮의 열기가 아스팔트를 녹일 정도로 뜨거웠던 오늘, 그런 열기 속에서도 말매미 소리가 요란했다. 한 뼘 생명이 자라는 소리. 원나라의 제후국이었던 고려가 역사 속으로 스러지고 태조 이성계의 조선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생명 탄생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조선왕조실록>을 읽는다는 건 기나긴 생명의 윤회를 따라 장구한 숨소리를 듣는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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