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어떤 목적을 갖고 흘러가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이를테면 목적을 가진 인간 군상들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자신만의 시간을 걸어가는 게 아니라 도구화된 인간이 목적을 가진 시간에 의해 움직여지는 게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런 생각이 들라치면 정신적 육체적으로 기능을 다한 인간이 죽음과 함께 폐기된다는 게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일처럼 여겨진다. 시간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기에. 물론 인간이 무엇엔가 종속되어 도구로 변한다는 게 서글픈 일이긴 하지만.

 

차를 몰아 도시 근교를 잠시 다녀왔다. 폭염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계절은, 산천은, 나아가 모든 자연이 시간을 따라 조금씩 변해왔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인간은 자신의 능력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극한의 고통 속에서 허덕일 때면 꼼짝달싹할 수 없는 자신처럼 세상 모든 사물이 시간 앞에 납작 엎드린 채 정지될 것이라 믿는다. 나 외에는 신경 쓸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도무지 헤어날 방법이 없는 듯한 참담한 심정이 들면 그런 느낌은 점점 더 가중되게 마련이다. 시간이 흘러 마침내 과거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면 그제야 비로소 자신이 고통 속에서 허덕이던 순간에도 우주의 삼라만상이 시나브로 조금씩 변해갔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한 달여 지속되었던 폭염으로부터 벗어난 사람들의 표정이 어느 때보다 밝아 보였다.

 

이기주의 산문집 <한때 소중했던 것들>을 읽고 있다. 작가가 경험했던 소소한 일상들을 짧은 글로 풀어 쓴 산문집이다. 그러나 <언어의 온도>를 통해 자신의 이름 석자를 세상에 알렸지만 그 후로는 이렇다 할 책을 못 내고 있는 걸 보면 그도 아마 '서퍼모어 증후군'을 앓고 있는 건 아닌지... <언어의 온도> 이후 2017년에 출간한 <말의 품격>이나 최근에 나온 이 책 <한때 소중했던 것들> 역시 <언어의 온도>에 비하면 한참이나 뒤떨어지는 느낌이 든다. 작가라는 직업은 대기만성형일 때 비로소 그 생명이 오래 지속되는 듯하다. 그러므로 '어느 날 아침 눈을 떠보니 갑자기 유명해졌다'는 말은 작가들에게는 그닥 필요치 않을지도 모른다. 작가의 삶이 처절하면 처절할수록 그 속에서 우러나오는 글은 독자의 가슴을 뒤흔들기 때문이다. 시대를 초월하여 오래 기억되는 대부분의 책은 작가의 삶이 기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독자는 작가의 불행을 인기로 대체하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 모든 게 다 시간의 농간일지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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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무라카미 하루키.가와카미 미에코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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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가 말복이었던 점을 감안하더라도 어제와 오늘의 날씨는 어찌나 다르던지요. '도대체 뭔 짓을 한 거야?' 하고 누군가에게 묻고 싶을 정도로 날씨는 천양지차 달라져 있었습니다. 매일 아침 같은 시각에 마주치는 등산객들의 표정도 한결 가벼워진 듯 보였고, 더위에 지쳐 인사말만 겨우 건네던 어제와는 달리 "날씨가 좋지요?"라거나 "금년 더위도 이제 다 끝난 것 같아요."라면서 설레는 마음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어 하는 눈치였습니다.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그렇게 요란하던 매미 소리마저 잠잠해졌고 숲은 그저 평온했습니다. 길을 걸을 때마다 간간이 귀뚜라미 소리가 들렸습니다.

 

한낮의 기온은 크게 올랐으나 청명한 하늘은 가을을 닮아 있었고, 그늘에 서면 불어오는 바람이 마냥 반가웠습니다. 며칠 전에 읽고 미뤄두었던 리뷰를 작심하고 써보려 했지만 날씨 탓인지 집중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시선은 연신 창밖 하늘을 향하고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마음도 싱숭생숭 흔들렸습니다. 생각해보면 장편소설을 쓰는 소설가의 인내와 끈기가 새삼 존경스럽게 느껴집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와 가와카미 미에코의 대담집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를 읽었던 바 그에 대한 간단한 느낌을 적어보려 합니다.

 

소설을 쓴다는 건 작가가 또 하나의 다른 인생을 압축해서 살아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작가가 살아내는 세상은 현실이 아닌 가상의 세계인 까닭에 꿈을 꾸는 것처럼 자유로운 인생이 될 테지요. 그러므로 우리가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작가가 꾸는 꿈을 현실에서 우리가 사용하는 공통의 언어를 통해 다시 듣는 셈이 됩니다. 그러므로 작가가 쓰는 문장은 철저하게 현실적이어야 하며 그 스토리의 전개는 현실에서 상당히 비껴가는 것이어야 함을 의미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현실적인 문장으로 현실적인 세상을 말한다면 소설은 그야말로 다큐멘터리와 크게 다를 바가 없는 밋밋하기 그지없는 이야기로 귀결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도구로서의 문장을 작가의 의식 저편으로 끌고 가는 작업이 소설 쓰기의 전제가 아닐까 싶은 것입니다. 이것은 다만 소설은 자주 읽지만 단 한 번도 직접 써본 적 없는 순수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드는 생각이지만 말이죠.

 

"다시 한번 확인해두자면 제 문장은 기본적으로 리얼리즘입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비非리얼리즘이죠. 그런 분리가 처음부터 떡하니 전제되어 있어요. 리얼리즘 문체를 철저하게 구사하며 비리얼리즘 이야기를 펼치는 게 제 목적이니까요." (p.117)

 

무라카미 하루키와 가와카미 미에코의 대담집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는 인터뷰이로 등장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솔직 담백한 대답이 눈길을 끄는 책입니다. 평소 언론에 잘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그이기에 네 차례나 이어진 인터뷰도 그렇고 한 권의 책으로 완성되어 나왔다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가수 출신의 특별한 이력을 지닌, 게다가 배우와 방송인으로 활발한 활동을 하는 엔터테이너이자 시인으로도 인정받은 작가 가와카미 미에코가 인터뷰어로서의 능력을 십분 발휘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지도...

 

"소설을 쓰는 사람이건 쓰지 않는 사람이건, 자신에게 정말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소설은 평생 대여섯 권 정도 만나지 않을까요. 많아야 열 권 남짓일까. 그리고 결국 그 몇 안 되는 책이 우리 정신의 대들보가 되어줍니다. 소설가의 경우는 그 스트럭처를 몇 번이고 반복하고, 바꿔 말하고 풀어 말하면서,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자기 소설에 편입해갑니다. 우리 소설가들이 하는 일이란 결국 그런 게 아닐까요." (p.197)

 

총 네 차례에 걸쳐 진행된 인터뷰는 하루키 문학의 전반을 아우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루키 소설의 애독자가 아니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도 자주 등장합니다. 그렇다고 이해가 아주 안 되는 건 아닌 까닭에 인기 있는 소설가의 소설 작법이나 작가론을 중심으로 읽는다면 하루키의 팬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인 듯싶습니다. 자신이 마치 고대 원시시대의 영매와 같은 이야기꾼으로 인식되기도 한다는 대목이나 소설가로서 자신은 무엇보다 문장을 중시한다는 대목 등은 소설가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되짚어봐야 할 대목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작가가 살아 있으면 문체도 그에 맞춰 살아 숨쉬죠. 그러니 매일 변화를 수행할 테고요. 세포가 교체되는 것처럼. 그 변화를 끊임없이 업데이트하는 게 중요해요. 그러지 않으면 자기 손에서 떠나갑니다." (p.127)

 

1장 '뛰어난 퍼커션 연주자는 가장 중요한 음을 치지 않는다', 2장 '지하 2층에서 일어나는 일', 3장 '잠 못 이루는 밤은 뚱뚱한 우편배달부만큼 드물다', 4장 '설령 종이가 없어져도 인간은 이야기를 이어갈 것이다'의 총 4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존경과 애정을 담은 인터뷰어의 질문에 소설에 대한 자신의 철학과 일상 속 에피소드를 곁들인 하루키의 신선한 대답이 잘 어우러진 대담집으로서 이야기는 최근에 발간된 하루키의 소설 <기사단장 죽이기>에서부터 하루키의 초창기 작품을 넘나들며 끝없이 이어집니다.

 

"나 자신은 실제로 이 현실세계에 살지만 지하에는 나의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고, 소설을 쓸 때 스멀스멀 위로 올라와서,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리얼리티를 밀어제치고 나가버린다. 나는 그런 작업 속에서 나 자신의 그림자를 보려 하는 것이 아닐까. 다만 나는 소설가이기에 이야기를 쓰는 작업을 통해 그것이 가능하지만 보통 사람은 좀처럼 불가능할 수도 있다. 즉 나는 이야기를 씀으로써 많은 사람을 위해 그 작업을 대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느낌입니다. 왠지 주제넘은 소리 같지만." (p.271)

 

우리가 누군가의 팬이 되고(그 대상이 가수든 , 배우든, 연주자든, 혹은 작가든 상관없이) 팬으로서 더 특별한 관심과 애정을 갖는 까닭은 내게는 없는 뭔가 특별한 것을 그 대상이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말하자면 자신의 허점을 자신이 좋아하는 대상을 통해 확인하고 그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죠. 그리고 나에게는 불가능한 어떤 것이 그 대상을 통해 완벽하게 재현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매료되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를 흥미롭게 읽었던 것도 하루키의 팬으로서, 나에게는 없는 이야기꾼으로서의 자질을 그를 통해 대리 만족하려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삼복지간(三伏之間)에는 입술에 붙은 밥알도 무겁다'고 하더니만 말복이 지나자 없던 기운도 되살아나는 듯합니다. 지난 리뷰를 이렇게 쓰고 있는 걸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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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보면 어떤 작가는 기대도 하지 않았던 첫 작품이 문단 안팎으로 크게 주목을 받는 것은 물론 독자들의 넘치는 사랑을 받는 경우도 있고, 어떤 작가는 십수 년째 작품을 쓰고는 있지만 그 어떤 관심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첫 작품에 과분한 사랑을 받았던 작가는 대개 야심 차게 준비한 두 번째 작품부터 문단의 주목은커녕 독자들에게조차 매몰찬 외면을 받음으로써 이후 영영 잊힌 작가로 남겨지곤 한다. 반면에 문단과 독자들로부터 긴 시간 동안 주목을 받지 못하던 작가가 어느 순간 갑작스럽게 관심을 끄는 한 작품으로 인해 이전 작품까지 덩달아 주목을 받는 경우도 있다. 물론 첫 작품부터 주목을 받아 쓰는 작품마다 꾸준한 인기를 누리는 더없이 행복한 작가도 있지만 말이다.

 

내가 이런 말을 꺼내는 이유는 최근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를 소개하고 싶어서이다. 이 책은 사실 오랜 시간 기분부전장애와 불안장애를 겪어온 저자가 정신과 전문의와 나눈 12주간의 대화를 책으로 엮은 것인데, 처음에는 책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독립출판물로 소개됐다가 입소문이 나면서 단행본으로 세상에 나온 흔치 않은 사례이기 때문이다. 물론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SNS가 크게 한몫을 했으리라는 건 능히 짐작할 수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대규모 행사와 함께 대형 출판사에서 공을 들여 내놓은 작품도 빛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한 출판 시장에서 단지 입소문만으로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일 터이다. 작가에게도 큰 행운이 아닐 수 없고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이다. 전업으로 글을 쓰는 작가에게 있어 한 작품이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고 해도 다음 작품을 준비하지 않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신인가수나 갓 등단한 작가의 1집 혹은 데뷔작이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차기작은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를 두고 '서퍼모어 징크스'라고 한다. 메이저리그의 슈퍼 루키들에게도 흔히 있는 일이지만. 작가에게 있어 '서퍼모어 징크스'는 아마도 부담감보다는 조급함 때문에 발생하는 게 아닐까 싶다. 자신의 재능을 과대평가하는 것도 문제일 수 있다. 첫 작품에 큰 성공을 거둔 작가가 우쭐하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글을 쓴다는 건 어느 정도 숙성의 시간을 거치지 않으면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얻기가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러므로 첫 작품에서 성공을 거둔 작가는 다른 작가보다 더욱더 긴 시간 동안 침묵하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작가 본인을 위해서, 또는 작가의 재능을 사랑하는 독자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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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인 낙관주의자 - 심플하고 유능하게 사는 법에 대하여
옌스 바이드너 지음, 이지윤 옮김 / 다산북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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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서는 잘 몰랐는데 나이가 들수록 '그래, 맞아' 하면서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는 말들이 있다. 그런 말들 중에는 전부터 알던 것들도 있고 최근에 새로 알게 된 것도 있겠지만 기억의 시차와는 상관없이 개인의 경험과 지식의 축적에 따라 저절로 공감하게 되는 말들이 대부분이다. 말하자면 세월이 흐르면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그런 말들은 약간의 개인차는 있다 손 치더라도 불신 가득한 사람들에게조차 그것들이 마치 변하지 않는 진리인 양 믿어지도록 하는 막강한 힘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나이 40이 넘으면 모든 사람은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했던 링컨 대통령의 말도 그중 하나이다. 흔히들 20대까지의 얼굴은 부모가 만들고, 30대 이후의 얼굴은 자신이 만들며, 60대 이후의 얼굴은 자식들이 만든다고 한다. 그러므로 중년 이후의 얼굴은 자기 삶의 투영이며, 그가 겪은 사회적 활동과 역사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어 '얼굴이 곧 그 사람'이라는 등가성을 가능하게 한다. "성격은 얼굴에 나타나고, 생활은 체형에 드러나고, 본심은 태도에 나타나며 감정은 음성으로 알 수 있다."는 말도 있다. 얼굴 표정과 주름살 하나하나에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까닭에 얼굴은 그 사람의 삶의 이력인 동시에 가치관과 같은 한 인간을 형성하는 무형의 요소, 즉 우리 영혼의 집합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세계 최고의 심리학 전문가이자 낙관주의자인 옌스 바이드너 박사는 그의 저서 <지적인 낙관주의자>에서 우리가 갖고 있는 흔한 편견(이를테면 웃음이 많은 사람을 두고 실없다거나 현실감각이 없다거나 신중하지 못하고 가볍다거나 아무 행동을 하고 있지 않아도 경솔하다고 하는 등 낙관주의자에 대한 지독히 부정적인 인식)을 조목조목 따지고 비판한다. 나아가 저자는 세상을 바꾸는 것이 비관이나 무기력이 아닌 낙관주의라고 역설한다. 저자는 낙관주의를 다섯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고 그중 '지적인 낙관주의'를 가장 이상적인 낙관주의 형태라고 설명한다.

 

"최고의 낙관주의자는 회색지대 대신 큰 프로젝트에 집중하는 걸 선호한다. '불가능'이란 단어를 들으면 그의 마음속엔 도전정신이 발동한다. 호기심을 자극해 무언가 대담한 일을 시도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최고의 낙관주의자라고 모든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건 아니다. 하지만 최고의 낙관주의자는 그걸 시도하거나 꿈꾸는 사람들에게 언제라도 긍정적 도움을 줄 준비를 하고 있다." (p.129)

 

저자가 말하는 '지적인 낙관주의자'는 현실적이되 비관에 매몰되지 않고, 인간적이되 지나친 긍정에 도취되지 않으며, 분별력 있고 현실적이면서도 친절을 잃지 않고, 가진 것에 안정감을 느끼고 즐겁게 살며 자신과 주변을 꼼꼼하게 살피는 사람을 가리킨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처한 상황에 순응하면서 성취한 성공 경험이 차곡차곡 쌓임에 따라 그들의 낙관주의는 더욱더 단단해진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저자는 '지적인 낙관주의'가 아닌, '목적 낙관주의자'나 '순진한 낙관주의자'나 '숨은 낙관주의자' 또는 '이타적 낙관주의자'라 할지라도 비관주의자로 사는 것보다 보다 나은 삶이 보장되는 까닭에 무조건 낙관주의자가 되는 게 좋다고 말한다.

 

우리는 흔히 개인의 성향이나 가치관이 마치 선천적으로 타고 태어나는 어떤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낙관주의나 비관주의 또한 개인의 선택이 아닌 선천적인 것으로, 고정불변한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저자는 '낙관주의는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개인적인 태도와 교육, 사회의 영향력과 직장에서의 경험이 어우러진 결과'일 뿐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낙관주의는 고정불변의 개인적 성향이 아니라 학습이 가능한 가변적 습성일 뿐이라고 말한다.

 

"낙관주의자를 만드는 사회화 과정은 올바른 학습, 올바른 태도, 정확한 시점의 올바른 행동에 달렸다. 이는 이론적으로는 물론, 연구결과나 현장사례를 통해서도 구체적으로 설명되었다. 이것을 기초로 현명하게 행동하는 사람은 낙관주의자가 되는 기반을 견고하게 다진 셈이다. 이미 기술한 대로 낙관주의자가 살아가는 놀라운 방식에는 여러 가지 장점이 있다." (p.268)

 

저자는 낙관주의자가 누리는 장점을 '긴 수명, 빠른 회복력, 채용과정에서 선호되는 태도, 유쾌한 기분, 직업적 성공, 좋은 배우자, 긍정적 자기평가'로 요약한다. 낙관주의가 건강에도 유익하다는 사실은 의학적 긴 설명을 차용하지 않아도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면 볼수록 긍정적인 기운이 그의 얼굴에 즉시 드러난다. 그것이 반복되면 표정이 되고, 대인관계가 많은 사람은 상대방의 표정만으로도 성격이나 삶의 이력을 대충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삶이란 자신이 만들어가는 일련의 과정이지만 그 모든 게 자신의 얼굴에 고스란히 담긴다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누군가 정리한 '효도십훈'에 보면 "밝은 얼굴과 공손한 말씨로 부모를 대해라."라는 말이 있다. 얼굴 표정을 밝게 한다는 건 부모를 즐겁게 하기 위함이니, 이것이 자신의 부모에게는 '효'요, 사회로 확대하면 세상 사람들에 대한 '예의'나 '처신'이 될 수도 있다. 예의가 바르고 처신이 올바른 자가 성공하지 못할 리 없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하지 않던가. 불쾌지수가 높은 요즘, 자신의 기분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게 아니라 얼굴을 펴고 세상을 향해 밝은 기운을 보내는 게 어떨지. 그것이 효도이자 예의라 생각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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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추가 지나면서 천방지축 날뛰던 폭염의 기세도 한풀 꺾인 듯 한결 누그러진 느낌입니다. 물론 아직도 한낮에는 30도를 훌쩍 웃도는 지독한 더위가 이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40도에 육박하는 살인적인 더위는 이제 없을 듯하기에 하는 말입니다. 폭염이 이어지던 때만 하더라도 하늘 저편으로 군데군데 뭉게구름이 보이기는 했지만 비를 머금은 먹장구름은 전혀 보이지 않았는데 며칠 전부터 이따금 몰려온 먹구름이 적선하듯 찔끔 비를 뿌리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계절은 그렇게 가을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듯합니다.

 

평소에도 텔레비전을 잘 보지는 않지만 최근에는 그런 경향이 더욱 짙어진 듯합니다. 책을 읽는 것과는 달리 텔레비전을 한동안 넋 놓고 보다 보면 어느 순간 머리가 무거워지는 걸 느낍니다. 몸도 나른하고 머리도 무겁고 컨디션이 영 좋아지지 않는 것이죠. 그럼에도 텔레비전을 완전히 끊을 수 없는 걸 보면 저도 일종의 텔레비전 중독이 아닌가 싶습니다. 최근에 본 것 중에 저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건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에 벌어졌던 사법 농단에 대한 뉴스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완전히 밝혀진 건 아닐지라도(어쩌면 영원히 묻힐 수도 있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재판을 하나의 거래 수단으로 삼았다는 사실은 가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말은 공공연한 비밀로 전해져 왔고, 그 정도야 자본주의 국가에서 암덩어리처럼 존재하는 어떤 것쯤으로 인식되었지만 권력에 유착하여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사법부 전체가 나섰다는 사실은 참으로 믿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손톱만큼도 생각하지 않았던 재판 결과가 누군가에게는 전 생애를 걸 만큼 중요한 일이지 않았을까요? 그런 걸 생각한다면, 적어도 같은 인간이라면 양심에 꺼려 그런 일은 도저히 실행할 수 없었을 듯합니다.

 

기무사의 계엄령 문건도 그렇습니다. 198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이라면 그 문건이 주는 무게를 실감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등골이 서늘하고, 그야말로 모골이 송연해지는 느낌이었을 듯합니다. 계엄령 하에서 개인의 생명이나 인권은 아주 하찮은 것으로 변해버리기 때문입니다.

 

국가의 시스템이 완전히 무너졌던 이전 정권의 적폐가 사회 전반에 영향을 끼치지 않은 곳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 고 노회찬 의원의 빈자리가 새삼 크게 느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닌 듯합니다. 국민을 철저히 우롱했던 보수정권 9년의 폐해가 너무도 크게 느껴지는 요즘입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관련자 전원을 처벌해야 마땅할 터인데 이번에도 구렁이 담 넘어가듯 유야무야 처리되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날씨가 더운 까닭에 괜한 걱정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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