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는 값싼 위로 한마디가 자네에게 독이 될 수도 있다는 말에 혹여라도 마음 섭섭했다면 미안하네. 아무리 가까운 친구라고 한들 대신할 수 없는 일들이 하도 많아서, 누군가 홀로 지고 일어서야 하는 짐을 볼라치면 나도 모르게 두 눈 질끈 감고 돌아서 맥없이 가슴만 치는 경우가 많았다네. 위로라도 한마디 던져주지 그랬어, 그게 뭐 힘든 일이라고, 돈이 드는 일도 아니고... 타박 아닌 타박도 여러 번 들었다네. 그러나 위로도 중독이 된다는 사실이 내가 그리 하지 못하는 까닭이라네. 물 한 모금 삼키는 것도 힘에 부칠 때에는, 그렇게나 힘이 들 때에는 값싼 위로일지언정 아주 쉽게 중독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네. 위로가 주는 안온함이 다시 일어설 힘마저 앗아가 버리곤 하지.

 

해가 많이 짧아졌다네. 오늘도 나는 새벽 어둑한 산길을 오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네. 잔뜩 흐린 하늘과 도통 밝아지지 않는 내 마음이 합쳐져 매일 다니던 길도 낯설기만 했지 뭔가. 급기야 후둑후둑 빗소리가 들렸다네. 나는 옷이 젖는 줄도 모르고 한참을 걷다가 산을 다 내려올 즈음에서야 알았다네. 지금도 밖에는 비가 내리고 마음은 슬픔처럼 어둡기만 하다네. 이화인 시인의 시집 <묵언 한 수저>를 읽다 보니 이런 시가 눈에 띄어 적어보았네.

 

슬픔의 안

             이화인

 

그대 슬플 때에는

견디기 힘든 슬픔에 잠길 때에는

슬픔의 안을 들여다보라

슬픔에도 기쁨이 있나니

기차가 어둔 길 터널을 지나면

눈부신 햇살이 내리듯이

젖은 낙엽 위로

소슬한 갈바람이 스쳐 지나가고

그대 슬픔의 늪에 빠질 때에도

그 슬픔 저편에는

맑은 샘이 흐르나니

희망의 꽃들이 피어 있나니

그대 하회탈의 웃음을 보라

고달픔으로 얼룩진 삶을 이어 온

눈물 젖은 웃음

슬픔이 바랜 뒤에야 우러나오는

하회탈 웃음을 보라

헤어나기 힘든 슬픔 저편에도

희망의 샘물이 흐르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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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팔로 하는 포옹
김중혁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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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을 수용하는 방식은 열이면 열, 백이면 백 다 다르겠지만 비판에 대한 개인의 반응과 수용하는 방식이 그 사람의 삶 전체를 좌우하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된다. 물론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말이다. 이를테면 가벼운 비판에도 펄펄 뛰며 화를 내는 방식에서부터 다른 사람의 말이라면 무조건 따르고 보는 방식 등 비판에 대한 개인의 반응 스펙트럼은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유아기에 자신의 수용 방식을 어떻게 학습하고, 성인이 된 후에 비판을 어떤 식으로 활용하는가 하는 문제는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데 무엇보다도 중요하지 않은가 싶다.

 

김중혁 작가의 소설집 <가짜 팔로 하는 포옹>의 표제작 '가짜 팔로 하는 포옹'에는 알코올중독자인 규호와 한때 그의 연인이었던 정윤이 등장한다. 소설 속 규호 역시 타인의 비판을 수용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세계에서 뱅뱅 맴을 도는, 폐쇄적인 성격의 전형처럼 읽힌다. 정윤을 다시 만난 규호는 자신이 정윤과 연인 관계에 있었을 때, 자신이 알코올중독자 모임에 나갔었던 사실을 아느냐고 정윤에게 묻는다. 그때는 자신에게 관심조차 없는 줄 알았던 정윤이 안다고 대답하자 규호는 알아줘서 고맙네 하며 비꼬는 투로 말한다.  그들은 여전히 술을 마신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간다.

 

"야, 이규호. 너 그때 정말 지긋지긋하게 지긋지긋했던 거 알지? 알지. 내가 다 죄인이지. 전부 내 잘못이지. 그런데 그거 알아? 아무런 애정 없이 그냥 한번 안아주기만 해도, 그냥 체온만 나눠줘도 그게 한 사람을 살릴 수도 있대. 나는 그때 네가 날 안아주길 바랬는데, 네 등만 봤다고. 등에는 가시가 잔뜩 돋아 있었고."    (p.96)

 

지그소 퍼즐 맞추기를 즐기던 규호는 알코올중독자 모임에서 지그소로 불렸다. 오랜만에 정윤을 불러낸 규호는 알코올중독자 모임에서 만난 피존씨 얘길 들려준다. 동대문 근처에서 큰옷 가게를 했다는 그는 이혼 후에는 매일 저녁 편의점에서 산 싸구려 위스키를 한 병씩 마셨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살려달라는 여자의 목소리를 들었고, 그 여자를 구하러 뛰어나가려는데 문득 규호가 선물한 지그소 퍼즐이 눈에 띄었고, 퍼즐을 다 맞추면 술을 끊자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단다.

 

"저 자신이 너무 지긋지긋했습니다. 저는 위스키를 마실 때마다 창문을 꼭 걸어 잠급니다. 술에 취해서 저도 모르게 뛰어내릴까봐서요. 제가 비집고 나갈 수도 없을 만큼 작은 창문인데도 매번 창문을 잠갔습니다. 비겁한 제가 부끄러웠고, 소심한 제가 창피했습니다. 술을 정말 끊고 싶었습니다."    (p.111~p.112)

 

피존씨의 얘기를 하면서도 규호는 점점 더 많은 술을 마신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정윤은 술 좀 그만 마시라고 권하지만 규호는 멈출 줄을 모른다. 생맥주에 소주를 섞어 마시는 규호를 보며 정윤은 화를 내지만 규호는 가겠다는 정윤을 달래어 다시 자리에 앉힌다. 그리고 규호가 피존과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던 도중 옆자리의 손님들과 싸움이 붙어 결국 파출소에까지 가서 조사를 받았던 얘기를 들려준다.

 

"경찰관님, 고통 같은 것은 말입니다. 절대 얼굴에 드러나지 않습니다. 아십니까? 그게 다 어디 붙는지 아십니까? 알코올에 달라붙어서 말입니다, 살에도 붙고, 조각조각 나서 뇌에도 붙고, 또 내보내려고 해도 손톱 발톱 그렇게 안 보이는데 숨어살면서요, 조용히 있다가 중요한 순간이 되면요, 제 뒤통수를 후려치고요, 그러는 겁니다."    (p.117)

 

피존의 얘기를 하염없이 들려주던 규호는 며칠 전에 알코올중독자 모임으로부터 피존이 죽었다는 소식의 전화를 받았다고 말한다. 원룸 탁자에 엎어져서 죽어 있었고, 탁자 위에는 위스키 두 병과 거의 다 맞춘 퍼즐이 있었다고. 피존씨 얘기를 하고 싶었는데 얘기할 사람이 정윤이밖에 없었다고. 규호는 다시 술을 주문했고 정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자리를 뜨는 것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여기에 왜 맺히는지 압니까? 이것은 온도 차이 때문입니다. 나는 차가운데, 바깥은 차갑지 않아서, 나는 아픈데, 바깥은 하나도 아프질 않아서, 그래서 이렇게 맺히는 겁니다."    (p.117)

 

체질상 술을 전혀 마시지 못하는 나는 사회생활을 잘 하려면 술을 마실 줄 알아야 한다는 비판 아닌 비판, 충고 아닌 충고를 무수히 많이 듣고 또 들었던 터라 어떻게 하면 술을 잘 마실 수 있을까 무던히도 애를 썼었다.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해도 막무가내로 술을 마셔대는 사람들과 술을 마실 수 없음에도 억지로 술을 마시려드는 나 같은 사람들 역시 사회의 비판을 수용하는 방식이 처음부터 잘못된 게 아닌가 싶다. 어찌 보면 세상을 이해하는 첫걸음은 비판을 수용하는 방식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지만 꼭 떡이 생겨서가 아니라 타인의 비판이나 충고를 합리적으로 판단하고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자세는 필요한 듯하다. 그래야 자신만의 세계에 매몰되지 않는다. '마마보이'나 '와이프보이'가 될 것까지야 없겠지만 타인의 비판을 수용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에만 매몰되는 것 역시 위험한 게 아닐까. 소설 속 규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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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내리던 비는 아침이 되어서야 잦아들었다. 어제는 저녁 무렵이 다 되어서야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탁하고 후텁지근한 도시의 하늘 위로 둥근 무지개가 떴었다. 비는 그렇게 그쳤다 내리기를 반복하면서 아침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낮에는 반짝하고 해가 나더니 저녁부터 내린 비로 인해 한껏 습도가 높아진 탓인지 방안 공기는 텁텁하고 끈적끈적했다. 그 상태로는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아 동네 산책을 나섰다. 잔뜩 흐린 하늘, 비는 잠시 숨을 고르는 듯 그쳐 있었다.

 

산책에서 돌아와 무심결에 확인한 1층 우편함에는 두툼한 황색 봉투 하나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화인 시인의 시집이었다. 당신의 시를 인용했던 내 블로그의 글을 읽으셨던 시인은 자신의 시집을 보내주시겠노라 연락했었다. 그게 며칠 전의 일이었는데 이렇게 친필 서명이 들어간 시집을 받고 보니 감개가 무량했다. 그리고 왠지 미안해졌다.

 

나는 8년 전쯤에 다음과 같은 글을 블로그에 올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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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우리는 시를 읽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시인들은 뉘라 지목할 것도 없이 잘 팔리지도 않는 시집보다는 여행서나 산문집을 낸다. 그렇다고 우리 주변에서 시집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세간에 잘 알려진 류시화, 안도현, 신경림 등 몇몇 유명 시인들만 근근이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으나, 그마저도 신통치 않은지 앞다퉈 책의 정가를 낮추고 있다. 그 외에 시집이라고 눈에 띄는 목록은 수험생들을 위한, 시험 대비용으로 출판된 명시 모음집이 대부분이다.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나는 시인도 아니고, 문학을 전공한 사람도 아닌, 순수 독자의 입장에서 시가 우리 곁에서 사라지는 것이 못내 아쉽고 서글프다.

 

시인의 속내를 낱낱이 알지는 못하더라도, 시가 전하는 그 울림만으로 설레던 시대가 있었다. 맘에 쏙 드는 시구를 연애편지에 인용하며, 자신이 쓴 것인 양 얼굴을 붉히던 그리움이 있었다. 술 동무를 옆에 두고, 노래 삼아 시를 읊조리던 젊음이 있었다. 우리는 시를 잃고, 사랑을 잃고, 그 속에 숨겨진 설레임, 그리움, 그리고 젊음의 낭만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다.

 

시를 모르고 어찌 문학을 논하랴. 시를 모른 채 어찌 사랑을 노래할 것이며, 순수의 아름다움을 어찌 볼 수 있으랴. 시를 제쳐 두고 주옥같은 언어의 향연을 어찌 즐길 수 있으랴. 시는 문학의 태동이자, 끊이지 않는 북소리이다. 시는 언어가 아닌 몸짓이며, 아픔을 위로하는 따뜻한 손길이다. 시는 논리를 따라 흐르는 나의 의식이 아닌, 무의식에 흐르는 작은 흔들림이다.

 

시를 읽지 않는 사회!

그 각박한 현실을 사는 우리는 무엇에서 위로받을 것이며, 아름다움으로 향하는 그 통로를 무엇에 의지하여 찾을 것인지.... 시를 쓰지 못하는 문학가는 한낱 글쟁이에 불과하며, 그 글을 읽는 우리는 영혼을 잃은 로봇에 불과하다. 사랑은, 설레임은, 그리움은, 낭만은 언어가 아닌 시에 숨겨진 떨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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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에게는 참으로 미안한 일이지만 위와 같은 글을 썼던 8년 전부터 지금까지 내가 읽었던 시집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다. 누구를 탓할 것도 없이 나부터 시를 읽지 않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시인의 체온이 느껴지는 시집을 펼쳐 들고 나는 밤이 늦도록 잠들지 못했다. 밤새 비가 서럽게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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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리 가든 (리커버) - 개정판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8년 5월
평점 :
절판


당연한 말이지만 작가에게도 저마다의 장점과 단점이 있게 마련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 권의 책을 잘 읽어낸다는 건 독자의 의무이자 권리라는 생각이 이따금 들기도 한다. 말하자면 지금 읽고 있는 책에서 작가의 장점과 단점을 잘 구분하여 막연하기 이를 데 없는 평가, 좋은 책이라는 둥 그저 그렇다는 둥 하는 평가는 더 이상 하지 않는 게 성실한 독자로서의 기본적 책무가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에쿠니 가오리는 침묵을 해석하는 능력이 뛰어난 작가이다. 우리가 사는 인생의 교과서에서 행간에 숨은 의미를 잘 짚어주는 작가라고 말할 수도 있다. 나는 에쿠니 가오리를 통해 침묵의 색깔과, 침묵의 형태와, 침묵이 갖는 의미를 배운다. 그리고 수시로 감탄하곤 한다. 침묵을 말하는 것과 어둠을 그려낸다는 건 누군가에게는 허튼소리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그것을 생생한 현실로 받아들이곤 한다.

 

"기억은 장난감 블록과 비슷하다. 언뜻 보면 색깔도 알록달록 서로 다르고 모양도 다르지만, 실제로는 모두가 편리하게 기획되어 있는 것이다. 가호처럼 기억의 블록을 무수히 쌓아 올려 그 안에 틀어박히고 싶지는 않았다. 현실을 사는 세리자와만을 사랑하고 지금의 세리자와하고만 살고 싶다. 시즈에는 강을 따라 난 길을 성큼성큼 걸었다." (p.92)

 

고등학교 미술 교사인 시즈에는 지금 연애를 하고 있다. 그러나 미혼의 청춘남녀가 하는 그런 연애는 아니다. 연인인 세리자와에게는 아내와 19살 먹은 딸이 있다. 신칸센으로 4시간 거리에 떨어져 있는 세리자와를 만나기 위해 가슴 설레며 떠났다가도 현실로 돌아올 때는 한없이 안도한다. 첫 번째, 두 번째 애인과는 정신적인 친구로 지내면서도 유독 세 번째 남자인 세리자와만큼은 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반면에 시즈에의 오래된 친구 가호는 5년 전에 끝난 사랑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사랑으로 인해 심인성 섭식장애까지 앓았던 가호는 지금도 그 사람(쓰쿠이)과의 추억이 서린 비스킷 깡통과 머스캣 상자를 신줏단지 모시듯 한다. 자신의 웃는 얼굴이 찍힌 폴라로이드 사진을 모아둔 비스킷 깡통과 차마 깨뜨리지 못한 파란 장미 무늬 홍차 잔이 들어 있는 머스캣 상자. 가호에게는 과거의 기억이 현실적인 삶이고 현실은 그저 부수적인 삶처럼 여겨진다.

 

"쓰쿠이와 함께일 때, 가호는 늘 웃었다. 모든 것이 빛나 보이고, 너무 많이 웃어서 눈초리가 처지는 게 아닐까 걱정스러웠다. 그 사람은 정말 즐거운 것만 보며 사는 재능이 넘쳤다. 그것을 사방에 흩뿌리며 온갖 것을 아름다운 농담으로 만들어버렸다. 쓰쿠이는 심각한 척하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 (p.40)

 

안경점에서 근무하는 가호는 혼자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해 친구를 불러 음식을 대접하기도 하고, 정기적으로 들르는 안과 의사나 대학생 코우와 잠자리를 같이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외로움을 잊기 위한 수단일 뿐 마음을 주는 사랑은 아니다. 안경점에는 가호를 진심으로 걱정하며 가호 주변을 맴도는 나카노가 있다. 그러나 가호는 그에게 곁을 내어주지 않는다. 순진한 나카노는 가호의 마음을 열기 위해 끝없이 두드린다.

 

"상대가 자신의 불행을 기대하고 있다고, 어쩌다 그런 생각을 했을까. 시즈에는 엽차 한 모금에 닭고기를 꿀꺽 삼킨다. 헛도는 피해의식이 한심했다. 맞지도 틀리지도 않은 말이다. 가호는 시즈에의 밥공기에 두 공기째 밥을 푸면서 생각한다. 자신이 불행할 때 상대도 불행하면 기운이 나는 것은 왜일까. 상대가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자신의 행복보다 더 많이 바라는데." (p.106)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오직 현재를 즐기는 시즈에, 과거의 아름다웠던 기억에 탐닉하는 가호, 자신의 감정을 그때그때 드러내는 시즈에,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기는커녕 생각하지 않는 연습을 하는 가호, 연인과 헤어져 현실로 돌아왔을 때 비로소 안심하는 시즈에, 다른 남자를 만나면서도 과거의 연인을 떠올리는 가호, 키가 크고 행동에 거침이 없는 시즈에, 키가 상대적으로 작고 소심한 가호, 너무나 이질적인 두 사람의 시간은 때로는 각자, 때로는 뒤섞이면서 흘러간다.

 

"시간은 저렇게 무정하게 흘러가면서, 어떤 곳에서는 아주 천천히 흘러가는 척하고 또 어떤 곳에서는 아주 흐름을 멈춘 척한다. 그래서 모두들 혼란스러워하는 것이라고 시즈에는 생각한다. 물론 약한 사람만이 겪는 그런 혼란 때문에 허우적대는 사람들을 보면 답답하고 화가 나지만, 그 사실과 사진에서 눈길을 돌린 자신이 어떤 연관성을 갖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p.155)

 

작가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친구로 지냈던 두 사람, 시즈에와 가호를 아주 조심스럽게 다루고 있다. 고등학교 시절까지 같은 학교를 다녔던 두 사람은 각자 다른 대학에 진학하면서 잠시 헤어지지만 졸업 후에 다시 같이 살기도 했다. 긴 시간의 추억을 공유하는 두 사람은 각자 다른 사랑의 방식으로 인해 충돌을 하고 때로는 마음에 상처를 받기도 한다. 그럼에도 친구라는 끈끈한 인연은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

 

"소외감, 이해할 수 있고, 처음 느껴보는 것도 아니다. 그 시절에도, 하고 시즈에는 생각한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서 가호의 아파트로 굴러들어간 시즈에, 그리운 옛 친구와의 평온한 생활을 기대했던 새내기 교사 시즈에에게, 가호는 무참하게도 소외감만 만끽하게 해주었다. 쓰쿠이와 가호의 끈끈한 사랑의 나날을 시즈에는 꽤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런 식으로 칭칭 뒤얽혀 서로를 구속하는 어리석은 남녀를 처음 보는 시즈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p.267)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을 읽고 난 후에는 주저리주저리 수다스러워지는 느낌이 든다. 스토리 때문이 아니라 문장 하나하나가 독자들을 그렇게 만들기 때문이다. 소설 속 문장마다 자신의 생각을 주석으로 달아야 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점점 가팔라지는 계절의 경사를 가늠하면서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을 읽는다는 건 왠지 모를 쓸쓸함을 더하는 일이라는 걸 모르는 바 아니지만 침묵을 번역하는 그녀의 문장마다, 행간의 의미를 설명하는 그녀의 문장 하나하나에 나는 오래전부터 중독되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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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청스러운 날씨였다. 하늘이 빼꼼하니 개는가 싶다가도 금세 어두워져 비가 쏟아지곤 했다. 기상청 예보로는 주 후반까지 이런 날씨가 길게 이어진다고 했으니 당분간은 날씨로 인한 이런 꿉꿉하고 불쾌한 느낌을 아무 소리 말고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차라리 한꺼번에 확 쏟아지고 반짝 개었으면 하고 바라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물론 폭염보다는 이게 낫다는 생각은 하루에도 열두 번씩 들지만 어디 인간의 생각이란 게 이성적으로만 작동하던가 말이지. 하나가 좋아지면 금세 다른 것을 요구하게 마련이니... 물에 빠진 사람 건져주니 보따리 내놓으라는 속담이 하나 그른 게 없다. 이렇게 궂은날에는 다들 기름 넉넉히 두른 프라이팬에서 갓 부쳐낸 부침개에 막걸리 한 잔이 그립다고들 하는데 술을 먹지 않는 나로서는 비가 오락가락하는 오늘도 기름진 음식이 별로 당기지 않는다. 물론 개인의 취향일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 <홀리가든>을 읽고 있다. 오랜 친구 사이인 가호와 시즈에를 통해 '우정'이라는 특권(아닌 특권)을 통해 우리는 상대방의 삶에 얼마나 깊숙이 끼어들고 있으며, 또 얼마나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방관하고 있는가에 대한 자성과 함께 친구 사이의 거리는 어느 정도가 적당한가에 대해 묻게 된다. 가족은 아니지만 남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특별한 관계, 친구란 과연 무엇인가.

 

묘하게도 강원도 산골에서 초등학교 교장을 맡고 있는 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대학 시절 이후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었던 친구인데 그의 목소리만큼은 전혀 낯설지 않았다. 서로의 소식이 궁금했던 까닭에 우리는 마치 십대 소녀처럼 질문을 이어갔다. 십여 분을 훌쩍 넘기고서야 통화는 끝이 났다. 시간이 되면 자신이 사는 강원도로 놀러 오란다. 얼굴 한 번 보자며. 그러마, 대답하면서도 나는 또 묻고 있다. 친구는 과연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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