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의 풍토
이스마일 카다레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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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시기를 통과한다는 건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다. 물론 시대가 바뀐다는 건 숨 죽이고 살던 사람들에게도 어떤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꼭 나쁘다고 볼 수만은 없겠지만 말이다. 결과야 그렇다 할지라도 그 시대를 몸으로 겪어내는 모든 사람들의 고충은 말해 무엇할까. 그러므로 다 지나고 난 뒤에 우리가 추억하는 것들과 과정에서 실제로 겪는 일들은 엄연히 다르다고 말할 수 있다. 추억은 그야말로 낭만일 뿐 현실과는 상당히 동떨어진 가상의 현실에 불과하다.

 

스마일 카다레의 소설집 <광기의 풍토>에는 새로운 체제에 처한 알바니아의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소설, '거만한 여자'가 실려 있다. 읽기에 따라서는 고집 센 장모와 약삭빠른 사위 간의 흔하디 흔한 장서 갈등쯤으로 비칠 수도 있지만 실상은 알바니아의 구체제와 공산화된 알바니아의 신체제의 대립으로 보는 게 옳을 듯하다. 공산당의 집권으로 하루아침에 권세와 영화를 잃어버리고 시골의 작은 마을에 정착한 '몰락한 가문 사람들'은 이제 자신들의 처지를 인식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에 적응해야만 했다.

 

옛 고위 관리의 미망인인 무하데즈 역시 그들 중 한 사람이다. 국내에 갖고 있던 재산은 모두 수용되었고 그나마 해외의 재산은 국가에 귀속되지 않았던 탓에 언젠가 그 재산을 다시 차지할 날이 올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이 유일한 삶의 원동력이다. 그러던 어느 날 무하데즈는 자신의 못생긴 딸을 추남인 공산당 소위 알레코 발라와 결혼시킴으로써 또 한 번의 '재기'를 꿈꾼다.

 

"딸이 말한 그대로, 남자는 불쾌감을 주는 용모의 소유자였다. 듬성듬성 난 머리털 때문에 얼굴이 더욱 납작해 보이는 데다, 다소 튀어나온 눈을 두리번거리며 끊임없이 무언가에 집중하려고 애쓰는 모습은 차마 보고 잇있기가 괴로웠다. 시간과 습관의 완화작용도 손댈 수 없는 혐오감이란 바로 이런 거라고 무하데즈는 확신했다." (p.122~p.123)

 

그러나 알레코 발라 소위는 당으로부터 축출된 것은 물론 군에서조차 파면당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파면당한 뒤 일주일 후에 무하데즈의 딸과 약속대로 결혼식을 올렸다는 사실이었다. 신부의 집에 눌러앉게 된 알레코는 마을의 난방용 장작 저장소에서 하급 일자리를 얻는다. 상품 취급 전담원이었던 그가 손을 다치는 바람에 임시로 송장 전담 일을 맡게 되었고, 직장 상사와 마을 사람들에게 헌신적이었던 그는 금세 회계 부서의 책임자 자리에 오른다. 거기에는 기획부서 주임을 직원을 탐탁지 않아했던 부장의 생각을 알레코가 읽고 그의 생각에 동조했던 것과 마을 사람들의 우호적인 여론이 합쳐진 덕분이었다. 알레코와 무하데즈의 갈등이 표면화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추악한 괴물, 위선자, 엉큼한 놈! 예전엔 자기한테 무언가 굴러들어 오리라 기대하고 싹싹하게 굴며 굽실댔지. 한데 이제 그런 희망이 사라지고 나니 나한테 욕을 해도 된다고 믿는 거야. 자기 사람들을 팔아먹은 더러운 인간. 넌 날 줄곧 방해물로 여기고 있지. 두 개의 젖통을 동시에 빠는 연습을 했으니, 비굴함과 아첨으로 계속 출세 가도를 달릴 수 있을 거야. 넌 하이에나처럼 공산주의 지도자와 관리자 사이에 충돌이 잇는 곳마다 찾아가 킁킁대며 냄새를 맡고선 승산이 잇는 쪽에 붙어 알랑거리며 어떻게든 더 많은 이득을 챙기려 하지. 그렇게 해서 좀 더 높은 자리에 오르거나 성공할 수도 있겠지." (p.163)

 

그러나 알레코가 승승장구를 할 때는 무하데즈와의 갈등이 고조되었다가도 숙청의 칼바람이 불어 납작 엎드려 있을 때에는 수그러들곤 했다. 우리는 종종 누군가의 성공을 이유도 없이 미워하곤 한다. 일종의 질투일 수도 있고 열등의식의 발현일 수도 있다. 무하데즈도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무하데즈로서는 사위의 성공이 마냥 반가울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자신을 무시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했을 테니 말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해 여름을 나면서 괴롭더라도 잊어서는 안 되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살아 있는 동안 간혹 폭풍우가 물러나기를 기다리며 몸을 낮춰야 할 때도 있다는 것이었다."    (p.139)

 

그러나 알레코의 성공이 마냥 못마땅하고 누구보다도 사위를 미워하는 듯 보였던 무하데즈의 속마음은 그런 게 아니었다.

 

"노파가 친구에게 심중의 생각을 그대로 고백한 바로는, 사위와 자기 두 사람의 관계가 어찌 됐든 사위 역시 이제는 가족의 일원이라는 것, 또 여하한 경우에도 집안의 수치를 밖으로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p.166)

 

우리가 이따금 착각하는 게 있다. 갈등이란 언제나 집단과 집단, 세대와 세대 사이의 대규모 단위로 벌어지는 충돌쯤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만한 여자'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신체제를 대표하는 알레코와 구체제를 대표하는 무하데즈의 충돌처럼 갈등은 지극히 사적이며 개별화된 사건이라는 사실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알레코의 아내가 소설 속에서 거의 드러나지 않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개별적인 사건들이 모여 하나의 사회 현상을 이룰 뿐이지 커다란 사회 현상 속에서 개인의 갈등이 노골화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보수주의자도 수구꼴통만 있는 게 아니고 진보주의자 중에도 이념적 좌파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얘기다. 소위 '일반화의 오류'는 어떤 사회를 이해하는 데 지극히 위험하다. 소설에서 알레코가 장모 무하데즈의 진심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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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해리 세트 - 전2권
공지영 지음 / 해냄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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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코스트의 전범 아돌프 아이히만을 기억하는지요. 살면서 단 한 번도 법을 어긴 적이 없고 언제 어디서나 최선을 다했던 남자, 그는 8개월간 지속된 지루한 재판 내내 칸트의 도덕 철학을 들먹이며 자신은 '명령받은 대로, 의무에 따라 행동했을 뿐, 비열한 동기나 악행이라는 의식이 없었다'며 무죄를 주장했습니다. 그를 감정했던 정신과 의사들조차 그의 정신상태가 정상이라고 말했었지요. 그러나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란 개념을 통해 아돌프 아이히만은 유죄라고 말합니다. 아이히만은 일상생활에서 아주 근면한 인간이고 무능하지도 어리석지도 않았지만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했으며,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순전히 '생각의 무능성(thoughtlessness)' 때문이었다'고 한나 아렌트는 쓰고 있습니다.

 

한나 아렌트의 이러한 주장은 어쩌면 전쟁과 같은 극단적 위험에서만 한시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됩니다. 전쟁도 없고, 테러도 없는 평화의 시대에 그렇다면 그 많던 악은 다 어디로 숨어든 것일까요. 평화는 모든 사람의 인간성마저 순하게 정화한다고는 말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절대 그럴 리가 없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어쩌면 선한 얼굴로 위장한 수많은 아이히만의 망령을 우리 곁에 무작정 방치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단지 바쁘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공지영 작가의 신작 소설 <해리>는 우리 안에 존재하는 아돌프 아이히만의 망령을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소설을 읽는 우리에게 불편한 진실로 다가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요. 소설의 배경이 '무진'인 것도 그런 맥락이 아닐까 싶습니다. 선을 가장한 악인 앞에서 우리는 마치 안갯속을 헤매는 것처럼 그의 진심을 전혀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도가니>의 배경이 '무진'이었던 것처럼 <해리>를 쓰면서도 작가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게 인간의 마음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설은 주인공 '한이나'가 암 수술을 앞둔 엄마의 병간호를 하기 위해 그녀의 고향인 무진을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한 인터넷 사이트 뉴스텐의 기자였던 이나는 자신의 엄마가 입원한 무진 카톨릭대학병원 앞에서 1인 시위를 하는 최별라를 우연히 만나 사연을 듣게 됩니다. 사연인 즉 백진우 신부로 인해 그녀의 딸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었습니다. 한이나가 고등학교 1학년이었을 때 가슴에 손을 넣었던 백진우 신부에 대한 끔찍한 기억을 떠올리며 이나는 이 사건을 끝까지 캐보리라 작정합니다.

 

이야기는 이제 입으로는 온갖 사회정의를 부르짖으면서도 어린 소녀와 젊은 여성들에게 성폭력을 일삼고, 장애인 봉사 단체를 축재의 수단으로 삼는 백진우 신부와 그의 곁을 지키는 '이해리'에게로 옮겨갑니다. 고등학교 시절 유난히 이나를 따르던 해리는 불우한 성장 과정을 내세워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고, 자신의 외모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던 학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인이 된 해리는장애인 센터장이라는 직함에 걸맞지 않게 짧은 미니스커트에 목이 깊게 파인 티셔츠를 입고 무진에서는 방귀 꽤나 뀐다는 사람들을 두루 만나고 다니는 지역 유지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수단이 되었던 것이 다름 아닌 봉침이었습니다. 은밀한 곳에 봉침을 놓아줌으로써 지역의 권력자들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었던 것이지요.

 

한편 백진우와 이해리는 두 사람은 모두 자신의 SNS를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선하고 가련한 이미지를 만들어갑니다. '어금니 아빠' 이영학이 그랬던 것처럼 다수의 많은 사람들이 접속하는 SNS 공간은 자신의 가공된 이미지를 팔아 언제든 돈을 모을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공간이었습니다.

 

"그들은 독약을 먹고 있어요. 그게 독약인 줄도 모르고, 안 죽네, 맛있네, 이러고 있다고요. 그들이 쥐약이 든 빵을 계속 먹고 있는데, 왜 화가 나요? 안타깝지요, 그 사람들이요." (2권, P.169)

 

자유시장경제의 논리에 따르자면 백진우와 이해리는 최고의 장사꾼이자 가장 영리한 사업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성과를 내니까 말이죠. 그러나 소설을 읽으면 읽을수록 분노가 치미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쩌면 선한 얼굴을 한 악인을 주변에서 자주 목격을 하면서도 단지 내 일이 아니라는 이유로, 바쁘다는 이유로 못 본 체 지나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렇게 악인의 활동 영역을 무한정 넓혀주었던 것은 아닌지요.

 

"부탁이 있어."

남우가 돌아서려다 말고 이나를 바라보았다.

"약속해줘. 최소한 명백하게 악을 목격하게 된다면 모른 척하지 말아줘."

이나와 남우의 눈이 아주 길게 마주쳤다. 먼저 시선을 돌린 것은 남우였다.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남우가 알 거라고 생각했다. (1권 p.277~p.278)

 

온종일 비가 내렸습니다. 안개도 없이 희끄무레한 하늘은 하늘과 땅의 경계를 흐릿하게 하고, 공지영 작가의 <해리>를 읽었던 나는 선과 악의 경계마저 희미해지는 듯했습니다. 소설을 읽는 내내 '악의 평범성'을 주장했던 한나 아렌트를 떠올렸습니다. 주인공 '한이나'는 어쩌면 작가가 역사 속에서 작심하고 끄집어낸 한나 아렌트의 분신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단지 바쁘다는 이유로,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는 변명으로 우리는 시나브로 각자의 마음속에 아돌프 아이히만의 망령을 키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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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과 물 배수아 컬렉션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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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림이 있는 글을 좋아한다. 겉으로 크게 소리 내어 읽지 않아도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피지컬한 울림. 원시 시대부터 이어져 온 우리 영혼의 자연스러운 리듬일 수도 있고, 인류의 유전인자 속에 원래부터 내재된 원시 샤먼의 노래일 수도 있다. 그런 울림이 있는 글을 읽고 있노라면 저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독서에서 느끼는 공감이란 울림을 통한 재미와 글 속에 내재된 의미의 결합체가 아닐 수 없다. 울림과 의미 둘 중 어느 하나만으로는 공감을 얻지 못한다고 나는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면면을 살펴볼라치면 울림과 의미의 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렇고, 황정은이 그렇고, 황경신이 그러하며, 박남규가 그렇고, 커트 보니것이 그렇다. 배수아가 그렇고, 또... 이런 식으로 나열하자면 끝이 없을지도 모른다.

 

소설가 배수아의 작품을 처음 읽는 독자의 반응은 대체로 비슷하다. "이게 뭐야?" 하는 식의 얼떨떨한 표정과 자신도 모르게 드는 '이걸 도대체 소설이라 말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 소설이 갖는 이야기의 골격을 무시한 '배수아 식' 서사, 문장의 반복과 몽환적인 분위기를 통한 강한 울림, 미화하거나 돌려 말하지 않는 직설적인 화법 등은 독자들에게 '낯섦'을 넘어 '당혹감'을 제공한다. 생판 처음인 독자라면 '도발적'으로 느낄지도 모르지만.

 

"너울거리는 물결, 보이지 않는 바람, 전깃줄과 전깃줄 사이의 겨울 하늘, 외톨이 해오라기의 울음소리를 연상시키는 가늘고 길며 구슬프게 늘어지는 피리소리였다. 땅거미가 진하게 내린 어스름, 공터 한구석 빨랫줄에는 잊힌 빨래가 무겁게 드리워 있었다. 빨래통을 든 여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피리 소리에 섞여 둔한 북소리도 둥둥 울렸다. 무거운 슬픔과 흥겨움을 동시에 불러일으키는 그 기묘한 음악은 점점 가까워졌다." (p.59 '얼이에 대해서' 중에서)

 

배수아 작가의 아홉 번째 소설집 <뱀과 물> 역시 처음인 독자에게는 '당혹감'을 오래된 독자에게는 마리화나처럼 강한 '중독성'을 안겨준다. 지하 2층의 무의식층에 살짝 담갔다 건진 듯한 작가의 문체는 독자들을 '무의식'의 몫이라 했던 지하 2층 하루키 소설의 공간을 지나쳐 그 아래 원시 샤먼의 공간까지 이끄는 듯하다.

 

"여교사는 디스트라노이린 두 알을 가루내어 초콜릿 음료에 넣어 마시고 잠이 들었다. 매일 밤 잠의 세계에는 뱀과 물이 너울거렸다. 그러다가 문득 눈을 뜨면, 거기 늙은 길라가 백발이었고, 우아한 갈색 모직 정장을 입었으며 등에는 갈색 소가죽 바이올린 케이스를 비스듬히 메고 있었다. 여교사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 애원했다. 날 죽여줘. 소리도 없이. 잠도 없이." (p.213 '뱀과 물' 중에서)

 

글을 읽는 게 아니라 꿈을 꾸고 있는 듯하다. 소설 속에서 작가는 '꿈은 글과 마찬가지로 직관의 일종'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작가가 독자들에게 선보이는 세상은 과거와 현재, 어쩌면 미래까지도 혼재된 몽환적인 공간이 될 수밖에 없다. '어린시절은 망상'에 불과할 뿐이고 '우리는 이미 성인인 채로 언제나 바로 조금 전에 태어나 이 순간을 살 뿐'이다. '모든 기억'도, '모든 미래'도 망상이며 '어린아이들은 모두 우리의 망상 속에서 누런 개처럼 돌아다니는 유령'이라는 것이다.

 

'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 '얼이에 대해서', '1979', '노인 울라Noin Ula에서', '도둑 자매', '뱀과 물',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의 일곱 작품이 실린 이 소설집은 마치 여러 편의 산문시처럼 읽힌다. 과거의 아련한 기억을 되살리는 듯하다가 암울한 현실로 이어지고 불안한 미래를 향해 내달리기도 한다. '한 아이의 반들반들한 껍데기 아래에는 깜짝 놀랄 만큼 많은 삶이 들어있기도 한' 것이다. 한 사람의 삶을 시간 순서로 나열한 것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를 한 곳에 공처럼 둥글게 뭉쳐 놓음으로써 평면적인 우리네 삶이 입체적으로 되살아나는 것이다. 마치 피카소의 그림 '게르니카'처럼.

 

"내가 모르는 언어로 적힌 편지는 파국을 향해 붉게 산란됐지만, 그 소리의 여운은 여전히 내 혀끝에서 맴돌고 있었다. 그것은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소녀에 관한, 길고, 늙고, 팔월처럼 번득이는, 한없이 섬뜩하고 한없이 음란한 편지였다. 나는 아무것도 설명할 수 없는 채로, 홀로 몸서리쳤다." (p.267 '기차가 내 위를 지나갈 때' 중에서)

 

시간이 그려내는 잔무늬는 어차피 한 몸뚱어리 내에서 만들어졌고, 지금도 만들어지며, 앞으로도 만들어지겠지만 살아가는 동안 그것이 허공 속으로 흩어질 리도 없고, 우주로 회귀할 리도 없는 까닭에 작가가 그려내는 시공간처럼 그것은 하나에 속한 채 존재한다. 우리는 다만 그것을 풀리지 않는 미제의 사건처럼 그저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다. 해석할 수 없는 저 가을 햇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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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보면 이따금 별것도 아닌 글에 시선이 머물 때가 있습니다. 헤어짐이 아쉬워 자꾸 뒤돌아보게 하는 연인의 마음처럼 앞으로 나아가던 나의 시선이 알 수 없는 무엇인가에 자꾸 이끌리는 것입니다. 그럴라치면 '글은 보는 게 아니라 겪는 것'이라는 말이 가슴에 남습니다.

 

"솔직한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 어쩌면 그 생각부터 잘못되었는지 모른다. 내 마음과 의도를 오해 없이 전달하고 납득시키는 일에 전전긍긍해왔지만, 따지고 보면 내 진심이라는 거 나 말고 다른 누구한테 뭐가 중요할까 싶다. 설명하고 싶은 일일수록 설명이 안 되는 경우가 있다. 차라리 침묵이 나을 때가 있다. 대답 없음이 가장 적절한 대답일 때도 있다." ('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렇지 않구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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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렇지 않구나
김신회 지음 / 놀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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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안 한다'는 기준이 뭘까. 모른긴몰라도 삶을 유지하기 위해 의무적으로 해야만 하는 어떤 것들을 하지 않는다는 얘기일 게다. 살아간다는 건 어쨌든 뭐든 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니까. 하다 못해 겨우 숨만 쉬는 일일지라도. 크게 따질 일도 아닌데 이렇게 쓰고 보니 내가 참 까칠한 사람처럼 느껴진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괜히 시비나 거는...

 

김신회 작가를 알게 된 건 지난해 4월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를 읽은 후였다. 방송작가 경력이 있는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 작가 역시 읽는 이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감각적인 글들을 선보였던 걸로 기억한다. 물론 내가 작가의 글에 매료된 것은 딱히 그 하나의 원인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아주 솔직하면서도 쉽게 풀어쓰는 작가의 글은 다른 어떤 사람이 읽는다 해도 그 매력으로부터 쉽게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내가 썼던 리뷰의 제목은 '자박자박 슬픔이 차오르는'이라는 다소 닭살스러운 것이었다.(http://blog.aladin.co.kr/760404134/9277430)

 

김신회 작가의 신작 에세이 <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렇지 않구나>는 휴식다운 휴식을 갖지 못해왔던 작가가 갑자기 주어진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얼마간의 시간을 보내면서 깨우치게 된 진정한 휴식의 의미를 총 4부 48 꼭지의 글(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한)로 엮은 책이다. #1 '나를 돌보겠습니다', #2 '게으르게 산다는 건 멋진 일', #3 '무턱대고 최선을 다하진 않겠습니다', #4 '그래도 나에겐 내가 있다'는 제목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자신에게 적용했던 엄격한 잣대를 거두고 스스로에게 관대해지자는 취지의 여러 글들을 만날 수 있다.

 

"물건과 소비를 줄이는 미니멀리즘이 유행하던 시대가 있었다. 그 많던 미니멀리스트들은 지금쯤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해지지만 그들의 단출한 집과 소지품을 떠올려보면 나야말로 미니멀리즘이 필요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바로 금기 미니멀리즘. 이제라도 '무엇무엇을 하면 안 된다' '무엇무엇을 해야만 한다'라는 수칙을 하나둘 버리고 스스로에게 숨 쉴 틈을 마련해주는 연습이 필요할 것 같다." (p.135 '금기 미니멀리즘' 중에서)

 

최근에 나는 서점의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고 적잖이 놀란 적이 있다. 웬만해서는 놀라지 않는 나를 깜짝 놀라게 했던 책은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였다. 낯선 제목의 그 책은 10년 넘게 정신과를 전전했던 저자가 최근에 만난 정신과 전문의와 나눈 12주간의 대화를 책으로 엮은 것이라 했다. 이름도 잘 알려지지 않은 저자의 글이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던 건 순전히 입소문 덕분이겠지만 그 밑바탕에는 우리나라에서 정신과 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했다. 정신 질환은 스스로가 앓아봤거나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가까운 사람을 돌본 경험이 있지 않고서는 결코 공감할 수 없는 질병이기 때문이다. 나도 어찌어찌 구매를 하게는 되었지만 나는 지금도 다 읽지 못한 채 미뤄두고 있다. 그 책을 읽으면서도 나는 답답한 마음에 '후~' 하고 여러 번 한숨을 토해야만 했다. 자신을 극한으로 내몰아 한도 초과의 사회 부적응자로 만드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라는 사실을 김신회 작가는 책에서 여러 번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이제는 가급적 미래 일기를 쓰지 않기로 했다. 오늘 일기도 안 쓰는데 무슨 내일 일기까지 쓰느라 미리 걱정하고 염려하나 싶어서. 자꾸만 고갈되어가는 에너지를 생각해서라도 내일 할 걱정을 미리 당겨쓰지 않기로 했다. 내일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것처럼 내일 걱정도 내일로 미뤄보는 것. 처음이 어렵지 하다보면 익숙해질지도 모른다." (p.209 '안 써요, 미래 일기' 중에서)

 

당장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닌 한 현실에서 부딪치는 모든 문제에 아등바등 집착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더구나 남과 비교하여 굳이 할 필요도 없었던 일에 기를 쓰고 달려드는 모습은 얼마나 비참한가.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라고 노래했던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삶은 소풍이라 생각하며 살면 좋겠지만 이따금 그리 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안달복달 애를 끓일 일은 아니지 싶다. 작가는 이 책이 '자기 돌보는 일에는 꼴등인 사람이 안 그런 사람으로 거듭나기 위한 노력 일기'라고 했다. 이 리뷰 역시 작가를 닮은 평범한 독자가 쓴 한 편의 노력 일기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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