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재자 리아민의 다른 삶 - 제8회 혼불문학상 수상작
전혜정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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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처음 접하는 작가의 작품을 읽고 있노라면 장점보다는 단점에 더 주목하게 된다. 이상한 일이다. 익숙한 작가의 작품이었다면 눈에 보이지도 않았을 문제점들이 이것저것 불거져 나오는 것이다. 마치 일부러 작심하고 꼬투리를 잡으려는 것처럼 말이다. 그럴라치면 일석점호를 맡은 일직사관이 작심한 듯 흰 장갑을 끼고 등장했던 과거의 기억이 떠오른다. 그동안 잘 모르고 지냈던 내 성격이 무척이나 까탈스럽고 부정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전혜정 작가의 작품은 처음이었다. '제8회 혼불문학상 수상작'이라는 문구가 사람들의 시선을 은근히 잡아끌기는 했지만 제목이 던지는 의미의 모호성이 책을 읽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의 강한 호기심을 자극했던 게 사실이다. 제목인 즉 <독재자 리아민의 다른 삶>. 제목만 보아서는 도무지 어떤 내용일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야기는 소설가 박상호가 독재자 리아민으로부터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은 출생의 비밀을 듣는 것으로 시작된다. 첫 작품이었던 <그곳에 당신이 있었다>가 대박을 친 후 첫 작품에 버금갈 만한 뛰어난 작품을 내놓지 못하던 박상호가 어느 날 갑자기 영문도 모른 채 대통령 관저로 불려 갔던 것이다. 박상호에게 던져진 제안은 리아민과의 인터뷰를 통해 제공된 리아민의 지난 삶을 재구성하여 전기를 써달라는 것이었다. 박상호는 권력자 리아민의 전기를 집필함으로써 소설가로서의 명성을 회복하고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겠다는 속셈으로 그 제안을 수락한다.

 

"대통령 리아민은 속물이었고, 부도덕했으며, 독재의 견고한 발판을 만들기 위해 나의 알량한 재능을 활용하려던 지극히 계산적인 인간이었다. 하지만 그런 리아민을 재기의 발판으로 사용하려던 나의 계산된 글쓰기는 어떤 변명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을 터였다. 물론 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여전히 나의 치부를 결코 인정하고 있지 않았지만." (p.266)

 

이후 박상호는 리아민의 호출이 있을 때마다 대통령 관저를 수시로 드나들게 된다. 그 과정에서 박상호는 리아민으로부터 사실인지 거짓인지조차 구별할 수 없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을 듣게 되고 박상호는 자신이 과연 리아민의 전기를 다 쓸 수 있을지 혼란스러워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박상호는 대통령의 기자회견 자리에 있던 정치부 기자 정율리를 만나 불같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시간은 저 홀로 잘도 흘러가고 있었다. 벌써 저녁 아홉 시가 막 지났다. 그동안 정율리 기자와 출판사 사장과 책임편집자 오가진 그리고 이기성 작가와 그 외 수십 명의 기자들이 내 휴대폰에 부재중 전화와 문자메시지를 남겼다. 나는 사장과의 전화를 끝으로 어느 누구와도 연락을 주고받지 않고 있었다." (p.158)

 

리아민이 들려준 그의 이야기는 참으로 황당무계한 것이었다. 행실이 난잡했던 리아민의 어머니가 열다섯의 어린 나이에 그를 낳았다는 것과 무책임한 어머니를 대신해 외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다는 것과 남들보다 영특했던 유년 시절의 에피소드나 중 고등학교 시절 노총각 문학 선생에 의해 문학 소년으로 성장했다거나 대학 시절에 만난 첫사랑 유영과의 로맨스와 군 복무 시절 자신의 정치적 야심을 위해 첫사랑을 배신하고 사단장의 외동딸과 결혼했다는 이야기 등 리아민의 이야기는 어디선가 한 번쯤 들어보았을 듯싶은 뻔한 이야기이거나 황당하기 그지없는 이야기뿐이었다. 게다가 박상호의 눈에 비친 영부인 최세희의 행동 또한 정상이 아니었다. 박상호를 유혹하는 듯한 행동과 어느 날 그녀가 성장했던 시골 마을로 박상호를 꾀어내어 자신의 출생 비밀과 리아민과 결혼에 이르게 된 과정을 자세히 알려주는 등 뜬금없는 일이 벌어진다. 얼굴은 예뻤지만 다섯 살 수준의 지능으로 성장했던 최세희의 어머니가 열여섯 살의 나이에 성폭행을 당한 후 자신을 낳았고, 이후 그녀의 어머니가 아무도 모르게 집을 나가는 바람에 외할머니와 함께 성장했으며 자신도 마을 사람들 여러 명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리아민도 최세희도 출생 단계부터 불행했고 두 사람 모두 외할머니에 의해 키워졌다는 것인데 우연도 이런 우연이 또 있을까.

 

"세상의 모든 중독자는 여간해선 쓰레기 같은 과거에서 헤어나오기는커녕 더욱 진창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런데 영부인은 보란 듯이 재기에 성공했다. 비록 그녀가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긴 했지만, 나는 그 사연에 과연 얼마만큼의 신빙성이 있는지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결국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녀의 이야기가 어느 정도 사실에 기반한다고 하더라도 세월의 흐름에 따라 기억의 왜곡과 조작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p220~p.221)

 

리아민은 헌법을 개정해가면서 자신의 장기 집권 계획을 차례차례 진행시켜가던 중 드론에 의해 피습을 당한다. 다행히 리아민은 목숨은 건졌지만 한동안 병원에 입원했던 까닭에 전기를 완성할 만큼 충분한 정보를 확보하지 못했던 박상호는 인터뷰 대신 글로 써서 자신에게 제공해줄 것을 요구했다. 리아민이 보낸 글은 가관이 아니었다. 결국 박상호는 자신의 생각했던 대로 글을 써 내려간다. 말하자면 리아민의 전기가 아닌 리아민을 소재로 한 소설을 쓰게 된 것이다. 이를 읽어본 정율리는 그에게 다시 쓰는 게 좋겠다고 충고하지만 박상호는 이를 거절하고 두 사람은 끝내 결별하고 만다.

 

"그리고 대중들이 진실만을 원할 것 같아? 절대 아니야. 아무도 그런 건 원치 않아. 우리가 원하는 건 이 나라를 통치하는 지도자의 틀에 걸맞은 하나의 이미지일 뿐이야." (p.250)

 

박상호가 쓴 전기는 결국 리아민에 의해 최종적으로 거절된다. 그리고 한 달 열흘이라는 촉박한 기한 내에 다시 쓸 것을 요구한다. 박상호가 이를 거절하면서 사건의 전말이 서서히 드러나게 된다. 리아민의 전기 작가로 자신이 선택된 배경이 밝혀지고 박상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리아민과 그의 수하들에 의해 마련된 애초 계획에 의해 일이 진행된다.

 

"가당치 않은 뜻을 존중해주었더니 오히려 두려움을 느끼는 미친 세상이 바로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었다. 어찌 보면 수석비서관의 생각이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진한 예술가 박상호로 사는 것이 이 기묘한 세상을 보다 잘 살아갈 수 있는 방편이 될 수도 있었다." (p.319)

 

소설에 등장하는 리아민과 최세희의 삶이 현실에서 있을 것 같지 않은 황당한 이야기들로 구성되었다는 걸 작가 스스로도 모르지는 않았을 터, 그렇다면 작가는 왜 그런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들로 소설의 상당 부분을 채웠을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단순히 읽는 재미를 위해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권력과 부를 쫓는 미치광이들 틈바구니에서 우리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걸 때때로 잊고 있는지도 모른다. 작가의 생각도 거기에 있지 않았을까. 과장되고 허무맹랑해 보이는 인물을 설정함으로써 우리가 사는 세상을 다시 한번 되돌아 볼 것을 주문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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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나는 모든 일에 의욕을 잃고 무기력하기만 했다. 이런 모습이 딱했는지 만나는 사람들마다 "아들을 위해서라도 몸을 돌보셔야죠. 힘드시겠지만..."라고 말했다. 이성적으로는 그 말이 옳다는 걸 나도 잘 안다. 그러나 사람의 몸이라는 게 이성보다는 감정의 지배를 받지 않던가. 하고 싶은 일도, 먹고 싶은 음식도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마땅히 해야 할 일도 '도대체 이건 해서 뭐하나' 하는 생각만 들고 이어지는 행동 역시 적극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이 마냥 수동적으로만 변해 갔다. 그럼에도 머릿속 한편에서는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이 수시로 오갔다. 매일 아침 오르던 산도 그저 시큰둥하기만 했다.

 

오늘 아침 천근만근 무겁기만 한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워 산에 올랐다. 아침 산행에 나섰던 건 근 한 달만이다. 뚝 떨어진 기온에 몸도 마음도 적응이 되지 않았다. 마음이 헛헛해서 더 그렇게 느꼈는지도 모른다. 매일 아침 하루도 빼놓지 않고 다니던 길인데 짙은 어둠이 깔린 산길은 왠지 낯설고 으스스했다. 매일 아침 마주치던 등산객들이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내 사정을 모르는 그들은 "오랜만이네요.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오셨나봐요." 했다. 나는 그저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을 대신했다.

 

일주일이 마냥 느리게만 흘러간다. 카톡으로나마 나를 위로하려드는 속 깊은 아들은 며칠 전 끝난 중간고사 성적이 평균 97점이라고 했다. 뭔가 받고 싶은 선물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더니 아들이 좋아하는 작가 Stuart Gibbs의 신작이 나왔다며 그 책을 사달라고 했다. 제목인 즉 "Spy School Goes South". 아비된 자가 아들을 위로하고 감싸줘야 마땅한데 오히려 그 반대가 된 느낌이다. 사는 게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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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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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언 반스의 작품에 매혹되는 까닭은 어떤 식으로든 독자의 지적 허영심을 만족시킨다는 데 있다. 때로는 작가의 지적 수준이 독자를 한참이나 앞질러 간 까닭에 글을 읽는 독자가 어리둥절 이해를 못 하거나, 지루함을 느끼거나, 읽었던 문장을 여러 번 반복해서 다시 읽어야 하는 불편을 끼칠 때도 있지만 작가는 서사라는 이야기 구조 속에 삶의 이면을 고집스럽게 덮어씀으로써 우리가 미처 몰랐던 인생의 실체, 인간의 심리, 진정한 가치 등을 자세히 파악하도록 한다.

 

<연애의 기억(The only story)>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야기인 즉 일흔 즈음에 접어든 한 남자가 50여 년 전에 있었던 비극적인 자신의 첫사랑으로 인해 그의 인생 전체가 달라지는 과정을 매우 세밀하게 다룬 것으로 주변에 흔한 사랑 이야기로 읽히지만 실상은 한 남자의 인생 이야기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삶이 유지되는 한 사랑을 멈춘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 이야기는 언제든 인생 이야기로 쉽게 치환되거나 전환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어린아이이고, 그녀는 중년의 유부녀다. 나에게는 냉소주의가 있고, 삶에 대한 이해라고 알려진 것이 있다. 하지만 나는 냉소주의자일 뿐만 아니라 이상주의자이기도 해서, 문제를 해결할 의지와 힘을 다 갖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p.139)

 

작가는 사랑이 삶의 전부로 여겨지는 청년 시절과 사랑은 그저 삶의 일부이거나 주변부로 여겨지는 어느 시점과 기억 속 작은 흔적으로만 존재하는 노년기를 다룸으로써 소설 속 주인공의 사랑이 세월에 따라 변질되어가는 과정을 밀도 있게 그리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사랑 안에 갇혀 있거나, 사랑과 어깨를 나란히 하거나, 그 옅은 흔적이나 체취만 간직하는 경험을 세월에 따라 순차적으로 겪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 안에 존재하는 청년 시절에는 사랑을 제대로 파악하기는커녕 그 실체조차 보기 어렵다. 그 시기의 연인은 오직 나와 상대방만 보일 뿐이다. 지구 안에 존재하는 우리가 지구 전체의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세월의 경과에 따라 나와 사랑을 동일시하던 과거의 습관에서 점차 벗어나게 되고 사랑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것이 꼭 사랑이 식었거나 사랑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에 빚어지는 결과는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사랑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서서히 알아가게 되는지도 모른다. 작가는 이러한 과정을 인칭의 변화로 그려내고 있다. 1인칭에서 2인칭으로 그리고 3인칭으로.

 

"나중에 이 대화를 생각해보다가 너는 그녀가 너보다 잃을 게 많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 사실, 처음으로. 훨씬 많다는 사실을. 너는 과거를 버리고 있고, 그 많은 부분은 버리게 되어서 행복하다. 너는 중요한 건 오직 사랑뿐이라고, 그것이 모든 것을 보상해준다고, 너하고 그녀가 그것을 제대로 이해한다면 모든 게 제자리를 찾아갈 거라고 믿었고, 여전히 전과 다름없이 깊게 믿고 있다. 그러다 너는 그녀가 뒤에 두고 온 것이 - 심지어 고든 매클라우드와의 관계도 - 네가 가정했던 것보다 복잡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너는 큰 덩어리들을 고통이나 합병증 없이 삶에서 깨끗하게 절단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네가 처음 만났을 때 그녀가 빌리지에서 고립된 것처럼 보였다면, 네가 그녀를 데리고 떠나옴으로써 그녀를 더 고립시켰다는 것을 깨닫는다." (p.208~p.209)

 

소설의 주인공 폴은 이제 막 성인의 대열에 합류한 19살의 대학생이다. 여름 방학을 보내기 위해 런던 교외의 본가로 돌아왔던 그는 어머니의 권유로 나가게 된 테니스 클럽에서 48살의 여성 수전 매클라우드를 파트너로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된다. 수전에게는 폴과 비슷한 나이의 두 딸과 남편이 있었지만 자신감 넘치고 위트가 가득한 수전의 매력이 폴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수전은 테니스 파트너로도, 이야기가 잘 통하는 대화 상대로도 폴에게는 단 한 명의 특별한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급기야 두 사람은 수전이 모아두었던 돈으로 런던에 방을 얻고 사랑의 도피 행각을 벌이기에 이른다. 일상이 된 유머감각과 음악과 테니스라는 공통분모를 통하여 두 사람의 사랑은 영원히 지속될 줄 알았지만 함께 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서로의 속사정을 더욱 깊이 알게 되고, 이해의 폭이 깊어지면서 단단했던 사랑의 결속은 금이 가기 시작한다. 수전은 알콜중독에 우울증, 알콜성 치매를 앓게 되면서 황홀했던 기억들을 서서히 잃어가고 이를 지켜보는 폴 역시 서서히 지쳐간다. 전도양양한 변호사로서 화려한 삶을 살 수도 있었지만...

 

"그는 수전과 있을 때 그들의 사랑을 토론하고, 분석하고, 그 형태, 색깔, 무게, 경계를 이해하려고 한 적이 없었다. 그 사랑은 그냥 거기 있었다. 불가피한 사실로서, 흔들 수 없는 주어진 것으로서. 하지만 동시에 그들 둘 다 그것을 토론할 말, 경험, 정신적 장비가 없었던 것 또한 사실이었다. 나중에, 삼십대가 되고 사십대가 되면서, 그는 점차 감정적 명료함을 얻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훗날의 관계에서, 그는 그때만큼 깊이 빠졌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고, 토론할 것도 줄었다. 따라서 그의 잠재적 표현 능력이 요구되는 일도 거의 없었다." (p.353)

 

폴이 자신을 못 알아보는 수전을 마지막으로 병문안 하는 장면은 인상적이다. 수전의 옆모습을 보면서 영화에서 보았던 몇몇 마지막 작별 순간을 떠올렸고, 아름다웠던 수전의 옛날 모습을 몇 분 동안 떠올려보았고, 이내 다른 곳을 떠돌기 시작하는 자신의 마음을 알아챘다. 자신의 '마음을 사랑과 상실에, 재미와 통탄에 묶어둘 수 없었'던 것이다. 총 3장으로 구성된 이 소설의 두 번째 장을 나는 다른 어느 것보다 아프게 읽었다. 2인칭으로 그려진 그 장에서 폴의 사랑은 그 빛을 잃고 서서히 쇄락해간다. 그 과정이 어찌나 사실적이고 아프게 묘사되었던지 이따금 눈물을 글썽이기도 했다. 살아가면서, 적어도 생명이 유지되는 한 우리는 단 한 번도 사랑을 유예하거나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랑은 곧 인생이 된다. 우리가 들려줄 수 있는 유일한 이야기는 오직 사랑, 그것 외에는 없다. 단연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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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워지는 것도 사랑입니까
황경신 지음, 김원 사진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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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이 지고 있다. 가벼워지는 시간이다. 그래서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나는 크게 한숨을 토해낸다. 삶의 구획들이 오래된 흙벽돌처럼 숭숭 구멍이 나고 있다. 사랑했던 기억들은 때론 아프고 공유할 수 없는 추억들은 때론 무섭다. 어떤 기억은 세월조차 약이 될 수 없다는 걸 나는 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채 열흘도 지나지 않았을 때 받은 책이다. 황경신 작가의 영혼시 <지워지는 것도 사랑입니까>. 나는 한동안 책을 펼쳐보지 못했다. 예전부터 좋아하던 작가. 나는 황경신 작가의 감각적인 문체를 좋아했었다. 그러나 두려웠다. 어떤 순간에 와락 울음이 터질지 가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살면서 정이 많다거나 지나치게 눈물이 많다는 말보다는 침착하다거나 냉정하다는 말을 더 많이 들었었는데 내 안에 나조차도 몰랐던 눈물이, 주체할 수 없는 슬픔이 그렇게나 많이 존재한다는 걸 나는 최근에야 알았다. 겨우 용기를 내어 펼쳐 든 책, 불면의 밤과 싸우며 나는 몇 날 며칠을 울었는지 모른다.

 

오래전 낙서를 뒤적여보니

내 추억의 기록은 온통 슬픔이네요

낡은 기억을 들추어보니

지금은 이유도 알 수 없는 슬픔뿐이네요

돌 하나 바람 하나 구름 하나

슬픔 아닌 것이 없네요

생각해보니 슬픔이 나를 가두고

나를 버리고 나를 만들었네요 ('하기야 슬픔 아니었다면' 중에서 p.17)

 

미루고 미루던 사망신고를 하러 동 주민 센터에 들렀던 날, 주말부부로 살면서 나와 주소조차 달랐던 아내. 주민 센터 직원은 나에게 구청으로 가라고 했다. 다른 때 같으면 불쑥 화도 났겠지만, '그래, 그렇게 쉽게 처리되면 나조차도 너무나 쉽게 잊을까봐 그랬나 보다' 생각하며 구청을 향했다. 가능한 한 천천히 차를 몰았다. 오늘의 슬픔이 어제의 슬픔을 닮아가는 동안 나는 시간의 흐름을 알지 못한다. 끝나지 않는 긴 하루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듯한 느낌.

 

그리 멀지 않은 과거의 풍경은

미처 마르지 않은 물감으로 얼룩져 있습니다

당신이 그곳에 있을 때

당신의 부재는 치명적인 가혹이었습니다   ('잊은들 잊지 않은들' 중에서 p.187)

 

추억은 위로가 되지 않는다. 가슴을 난도질하는 가장 무서운 흉기는 행복했던 기억이다. 슬픔은 언어가 되지 못하고 추스를 수 없는 생각들이 유령처럼 떠도는 밤. 어젯밤에는 중학생 아들이 카톡으로 노래 한 곡을 보내왔다. 영국 가수 패신저(Passenger)가 부른 'Let her go'. 가사가 좋다면서. ……You see her when you close your eyes/ Maybe one day you'll understand why/ Everything you touch surely dies/ ……(눈을 감으면 넌 그녀가 보여/ 아마도 언젠간 그 이유를 알게 되겠지/ 네가 스쳤던 모든 것들이 사라져가는 이유를)

 

빛나는 눈물은 차곡차곡 쌓이고

꿈같은 갈증은 깊어가고

맹세할 것 많았던 날들이 별처럼 떨어지는데

운명은 변한 것이 없어

이제야 알게 되었나

처음부터 그것은

허공 위에 쓰인 맹세였다는 것을  ('처음부터 그것은' 중에서 p.229)

 

구름 낀 서쪽 하늘에 노을이 진다. 어제와 다름없는 밤이 다시 또 찾아올 테고, 추억이 난도질하는 긴 시간 동안 나는 무방비로 지새울 수밖에 없으리라. 슬픔은 언어가 되지 못하고 추억은 위로가 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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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손가락 현대문학 가가형사 시리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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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책은 많지만 눈 앞에 놓인 어떤 책에도 선뜻 손이 가지 않는 날이 있습니다. 이유는 참으로 다양합니다. 책의 내용이 어려워서, 문장이 딱딱해서, 별 의미도 없는 글들로 채워져서... 한마디로 책을 읽기 싫은 것이죠. 그런 날이면 이따금 찾아 읽게 되는 게 히가시노 게이고의 추리소설입니다. '잊어도 좋기 때문에 읽는 것이 추리소설이다.'라고 했던 장정일 작가의 말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게 되는 순간입니다. '유용성'으로부터 멀어진 독서는 얼마나 홀가분하고 자유로운 것인지요. 게다가 히가시노 게이고는 다작가로 정평이 난 까닭에 언제 찾아도 내가 읽지 않은 작품들이 차고 넘친다는 점이 그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합니다.

 

최근에 내가 읽은 책은 가가 형사 시리즈 제7탄인 <붉은 손가락>이었습니다. 47세의 중년 가장인 아키오는 18년째 결혼 생활을 이어오고 있는 그의 아내 야에코와 중학생 아들 나오미를 둔 평범한 직장인입니다. 직장 상사의 주선으로 1년여의 연애 끝에 결혼한 나오키와 야에코는 아들 나오미가 태어나자 아들의 양육에 대한 견해차로 시댁과 결별합니다. 아들의 양육은 자연스레 전업주부였던 야에코에게 전적으로 위임되고 그럴수록 아키오의 발언권은 점점 약해져만 갑니다. 치매를 앓던 아키오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혼자 남겨진 어머니 마사에를 돌볼 방법이 없었던 아키오는 시댁으로 들어가는 게 어떻냐고 넌즈시 제안합니다. 경기 불황으로 몇 년째 월급이 오르지 않았던 아키오의 월급만으로는 내 집 마련의 꿈이 멀어져만 갔던 까닭에 야에코 역시 무작정 반대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이야기의 축은 두 갈래로 이어집니다. 아버지도 없이 힘들게 성장한 마쓰미야는 어머니인 가츠코와 자신을 살뜰히 보살펴준 외삼촌 다카마사를 아버지처럼 의지하며 살아왔습니다. 경찰에서 은퇴한 다카마사는 현재 말기암 환자로 병원에 입원해 있는 상태입니다. 다카마사를 너무도 존경한 나머지 그를 따라 경찰관이 된 마쓰미야는 시간이 날 때마다 외삼촌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마쓰미야의 외사촌 형이자 다카마사의 아들인 가가 형사는 아버지의 병문안에 인색합니다. 마쓰미야는 그 사실이 못내 서운합니다. 다카마사와 가가 교이치로 사이에 알 수 없는 불화가 존재한다는 걸 어렴풋이 추측할 뿐입니다. 가정을 등한시했던 다카마사로 인해 가가의 어머니가 가출을 했고, 병을 앓던 그녀는 결국 혼자서 외롭게 죽어갈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마쓰미야는 자신의 어머니를 통해 들었습니다.

 

"음, 거기서 혼자 살았어. 그러다 곁에서 간병해주는 사람도 없이 혼자서 죽었어. 아버지는 그 일이 몹시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야. 임종하는 순간에 아들이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그걸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다고 하시더라. 그래서 아버지도 결심하셨대. 자기도 혼자 죽을 거라고. 나한테 당부를 하더라. 자신이 숨을 거둘 때까지 절대로 곁에 오지 말라고." (p.284)

 

한편 아키오와 야에코가 어머니의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한 후 아키오의 어머니마저 치매를 앓기 시작합니다. 근처에 사는 아키오의 여동생 하루미가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매일 저녁 들르곤 했었는데 어느 날 저녁 아키오는 야에코로부터 걸려온 급한 전화를 받게 됩니다. 여동생 하루미의 방문도 미루고 급히 집으로 와달라는 주문이었습니다. 아내의 부탁으로 귀가를 서두른 아키오는 거실에 놓인 어린 소녀의 시신을 보게 됩니다. 응석받이로 자란 나오미가 한 짓이었습니다. 살인자가 된 아들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었던 아키오는 시신을 상자에 담아 아무도 없는 한밤중에 근처의 공원 화장실에 유기합니다.

 

"어떻게 이런 어리석고 경솔한 범죄가 다 있는가. 아무리 제 자식을 지키기 위해서라지만 늙은 어머니를 살인범으로 몰아세우다니, 마쓰미야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발상이었다. 그나마 마에하라 아키오가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 실토를 해준 게 유일한 구원이었다." (p.264)

 

마쓰미야와 가가 형사는 한 팀이 되어 사건을 조사합니다. 가가 형사의 뛰어난 추리력과 상황 판단으로 수사망은 점점 범인을 향해 좁혀집니다. 아들 나오미를 살인자로 내몰 수 없었던 아키오와 야에코는 치매에 걸린 마사에를 살인범으로 꾸며 자백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독자의 허를 찌르는 반전은 그다음에 이어집니다. 아키오와 마사에, 다카마사와 가가 교이치로 형사는 어떤 결말로 끝나게 될지...

 

작가는 부모 세대를 나 몰라라 내팽개친 채 자식에게만 모든 열정을 쏟는 젊은 부부의 그릇된 사고방식과 양육 태도, 그 결과가 보여주는 참혹한 현실을 대비시킴으로써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작가는 결말 부분의 반전을 통해 희망의 불씨를 살리고 있습니다. 혈육의 정마저 시들해지는 인간성 상실의 시대에 우리는 과연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을지 작가는 조심스레 묻고 있는 듯합니다. 태풍이 지나간 휴일 하늘은 가을빛으로 가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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