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둔자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10
막심 고리키 지음, 이강은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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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심 고리끼' 하면 소설보다는 먼저 '밑바닥에서'라는 연극이 떠오르곤 한다. 반공주의에 매몰되었던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막심 고리끼의 문학을 논한다는 건 왠지 께름칙하고 두려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일종의 자기 검열로서 말이다. 그런 까닭에 막심 고리끼의 작품을 처음 읽어본 게 성인이 되고 나서도 한참이나 지난 시점이었던 듯하다. 그에 앞서 우연히 보게 된 연극 '밑바닥에서', 어린 시절에 보았더라면 제대로 이해조차 하기 어려웠을 그늘진 삶의 단면에 홀리듯 이끌렸고, 그 후 원작을 찾아 책으로 읽게도 되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창시자로 잘 알려진 그이지만 불행했던 그의 삶을 대변하듯 그가 쓴 대부분의 작품은 무척이나 어둡고 우울했다. 막심 고리끼의 작품을 다시 읽는다는 건 접혀 있던 우울의 한 끝단을 펼치는 것과 진배없었다.

 

막심 고리끼, 러시아어로 '최대'를 뜻하는 막심과 '맛이 쓰다'는 의미의 고리키를 합쳐 필명으로 쓰게 되었다는 그이지만 그의 작품은 인간 내면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이 곳곳에서 드러나곤 한다. 독자들의 관심을 끄는 것도 바로 그런 부분이 아닐까 싶기는 하지만 말이다. 작가의 산문집에서 '인간은 희망으로 들뜬 불안한 삶을 원치 않습니다. 밤하늘의 별 아래 느릿느릿 흘러가는 조용한 삶이면 족합니다.'라고 썼던 것처럼 그 역시 자신의 삶 전체에서 희망으로 요동치는 불안한 삶을 원치 않았을 듯하다. 오늘 내가 읽었던 그의 단편소설 '첫사랑'의 주인공도 그렇지 않았을까.

 

"삶을 대하는 그녀의 태도는 뭔가 끝없이 펼쳐 보이는 마술사에 대한 어린아이의 믿음 같은 것이었다. 이제까지 보여준 마술도 재미있었지만 더 재미있는 것은 앞으로 나올 테고, 바로 다음 순간, 아니 어쩌면 내일 보게 될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분명히 보게 되리라고 믿고 있는! 죽음의 순간까지도 어떻게 된 건지 전혀 알 수 없는 최후의 놀라운 마술을 그녀는 여전히 기다리고 잇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p.189~p.190)

 

주인공인 '나'가 사랑하는 여자(올가)는 나보다 열 살이나 많고 애가 딸린 유부녀였지만,'귀족 여학교'에서 교육을 받았고, 파리에서 살기도 했으며, 그림 공부도 하고, 산파술도 배운, 한마디로 교양이 있는 우아한 여성이었다. 반면에 나는 촌스럽기 그지없는, 그렇지만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그런 남자였다.

 

"무엇이든 거침이 없는 그녀의 어투에서 나는 혹시 이 사람이 내 주변에 잇는 혁명적 성향의 지인들이 알고 있는 것을 다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걸 넘어 뭔가 더욱 높은 가치가 있는 것을 알고 있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세상 모든 것을 멀리서, 한편으로 비켜서서, 흥미롭지만 위험한 장난을 치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어른처럼, 자신은 이미 다 겪어보았다는 듯이 지그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p.147)

 

우리는 대개 자신과 다른 사람에게 끌리게 마련이다. 소설 소의 나도 다르지 않았다. 두 사람은 결국 우여곡절 끝에 다시 만나 한 집에서 살게 된다. 사제관에 딸린 싸구려 월세방에 가정을 꾸렸지만 썩은 내가 진동하고 벌레가 들끓는 궁핍한 생활이었다. 그러나 여자는 불평 한 마디 없이 견뎌주는 것은 물론 초상화를 그리거나, 지도를 그려주거나, 혹은 최신 유행하는 모자를 만들어 내다 파는 등 생계를 거들었다. 나는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면서 지역 신문에 연재를 하기도 했다. 돈을 조금 벌면 그들은 지인들을 초대하여 만찬을 열었고 여자는 가까운 남자들을 '뒤흔들기' 좋아했고 아주 손쉽게 그렇게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질투하지 않았다. 동거 생활 삼 년째에 나는 문학 창작에 진지하게 매달렸고 여자는 나의 작품에 관심조차 없었다. 달라도 너무나 다른 문학적 취향과 삶의 인식. 나는 모욕감을 느꼈고, 그것 때문에 헤어졌다.

 

"얼마 전 나의 첫사랑인 그 여인이 세상을 떠났다. 나는 그녀에게 찬사를 바치고 싶다. 진정 여자다운 멋진 여자였노라고! 그녀는 있는 것만으로 살아갈 줄 아는 여자였다. 그러나 그녀에겐 매일매일 축제 전야였다. 그녀는 내일이면 지상에 새롭고 특별한 꽃이 피어날 것이라고, 또 어딘가에서 아주 재미있는 사람들이 찾아와 놀랄 만한 일들이 벌어질 것이라고 늘 기대하며 살았다." (p.184)

 

우리는 내게 없는 것을 그녀, 또는 그 남자가 갖고 있다는 이유로 서로에게 끌리기도 하고, 똑같은 이유로 헤어지기도 한다. 그런 실수를 반복하는 게 청춘의 특권이라고는 하지만 지나고 나면 그 시절은 아주 짧은 순간에 사라져 버렸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래서 첫사랑은 누구에게나 아쉽고 애틋한 경험일 수밖에 없다. 온종일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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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헤어지겠지, 하지만 오늘은 아니야
F 지음, 송아람 그림, 이홍이 옮김 / 놀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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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은 느낌은 이러했다. 이름도 모르는 저자가 내 곁으로 기척도 없이 다가와서는 남들이 들을세라 한껏 낮춘 목소리로 미처 몰랐던 이야기들을 조곤조곤 들려주는 듯한 느낌, 또는 친한 친구가 어렵사리 꺼낸 속내를 듣는 듯한 느낌, 아무튼 그런 느낌이었다. "실은 말이야..." 하면서 꺼낸 이야기는 그동안 우리가 의심 없이 믿어왔던 상식에 반하는 비밀스러운 이야기들을 논리적으로, 때로는 도발적으로 풀어놓았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들리지 않았다. '추억이란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으면 만들 수 없다'는 말처럼 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는 무릎을 치며 감탄하게 되는 대목이 곳곳에 등장한다.

 

"아름다움, 특히 외적인 아름다움은 무언가를 향한 복수와도 같다. 물론 얼굴이 예쁜 사람이 좋다. 하지만 그런 잔꾀에 속는 사람은 결국 겉모습만 본다는 것 아니겠는가? 내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의 기준을 나 혼자만 믿으며 살아가고 싶다. 누군가에게 인정받을 필요 없이." (p.184)

 

그러나 저자에 대한 의미 있는 정보는 그 어디에도 없다. 'F'라는 익명에 더하여 책의 내용에 언뜻언뜻 등장하는 몇몇 소소한 정보가 다이다. 도쿄 신주쿠 지역에 살고 있다거나, 11월에 태어났다거나, 유치원생부터 고등학생까지 남들은 일주일에 다섯 번 학교에 갈 때 저자는 겨우 두 번만 나갔다거나, 퇴학 처분이 내려진 것도 여러 번이었으나 어찌어찌 대학까지 졸업했다는 둥 읽으면 읽을수록 고개만 갸웃거리게 된다. 책을 다 읽은 독자나 하나도 읽지 않은 독자나 저자에 대한 정보는 여전히 'F'로만 남는다.

 

"미움 받을 용기 따위 필요 없다. 굳이 온 세상을 적으로 만들 필요도 없다. 누군가 나의 적이 될 때는 그가 자기 마음대로 내 적이 된 것이기 때문이다. 미움 받을 용기, 그런 위험천만한 마음을 갖고 살기에 인생은 너무도 짧다. 그런 무시무시한 마음을 지니고 다니기에는 인간의 수가 너무도 많다." (p.135)

 

저자는 연애나 사랑에 대하여, 친구에 대하여, 외로움이나 질투 또는 향기에 대하여, 인간관계에 대하여, 이별에 대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조언한다. 조언이라기보다는 그가 살아온 경험과 지식, 또는 예리한 관찰에 기반을 둔 현실적 방안이라고 할 수 있다. 늘 들어오던 식상한 조언이 결코 아니다. 문장 하나하나에 저자만의 독특한 개성이 드러난다.

 

"나는 항상 나의 연인이 바람을 피울 경우를 대비하고 있다. 아무리 사귀는 사이여도 함께 있는 시간 이외에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런 걸 아는 것도 이상하다. 하지만 정해놓은 것이 딱 하나 있다. 의심하지 않기다. 무얼 의심하지 않느냐고? 나의 연인은 절대로 바람피우지 않을 거란 얘기도, 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도 아니다. 내가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절대로 의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반대로 여기에 의심이 생기면 그땐 헤어질 수밖에 없다고 본다." (p.280)

 

저자의 시각이나 관점은 책을 읽는 독자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말하자면 많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나 역시 기꺼이 많은 생각을 하면서 이 책을 읽었지만 재미있는 소설이나 시집을 읽을 때처럼 지루하거나 따분하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부분은 청춘기에 했던 잘못된 선택지로 인해 저자 역시 후회하고 있다는 몇 가지에 대해 언급하는 대목이었다.

 

"독서는 확실히 체계적으로 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기억의 용량이 낭비된다. 예를 들어 나쓰메 소세키의『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읽으면 그에 대한 주석과, 해설을 해주는 책 또는 논문을 다섯 권 정도 더 읽는 게 좋다. 책은 아무리 많이 빨리 읽어도 '지식'밖에 안 쌓인다. 이건 의미가 없다. 하나의 사실을 여러 방향에서 바라볼 수 있을 때 '식견'이 생긴다. 어디에 살면서 무엇을 보든, 체계적인 독서는 자신만의 견해로 세상을 해석하는 능력을 길러준다." (p.199~p.200)

 

후회하는 몇 가지에 대한 저자의 당부는 이러했다. '외로울 때는 실컷 외로워하고, 누군가를 만나서 투정을 부리라'는 것이다.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으면 추억은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그때 더 부끄러운 짓을 했었더라면 지금보다 덜 후회하고 살고 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이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우리가 사랑하던 사람과, 공간과, 시간과도 결국 이별을 해야 하는 한시적인 존재일 뿐이다. 영원한 듯 살고는 있지만 영원하지 않다는 얘기다. 아이러니하게도 얼굴이 빨개지도록 부끄러운 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인생은 더 풍요로워진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삶에서 맘껏 부끄러워해도 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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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겪어 본 사람은 안다. 한 사람의 죽음이 어떤 의미인지를. 단지 뉴스로만 듣던 피상적인 의미의 죽음이 아니라 몸과 마음 전체를 짓누르는 부재의 실감과 가슴이 통째로 사라진 듯한 허무와 상실감. 그런 것들로 인해 온 우주가 빛을 잃고 점차 사그라드는 듯한 느낌. 부귀영화도 한낱 꿈에 불과하다는 현실적인 깨달음.

 

미황사/김태정

 

……(생략)……

꽃살문 너머

반야심경이 물결처럼 출렁이면

나는 언제나 이 대목에서 목이 메곤 하였는데

 

그리운 이의 한 생애가

잠시 내 손등에 앉았다가 포르르,

새처럼 날아간 거라고

땅끝 바다 시린 파도가 잠시

가슴을 철썩이다 가버린 거라고.....

스님의 목소리는 어쩐지

발밑에 바스라지는 낙엽처럼 자꾸만

자꾸만 서걱이는 것이었는데

 

차마 다 터뜨리지 못한 울음처럼

늙은 달이 온몸을 밀어올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필생의 호흡이 빛이 되어

대웅전 주춧돌이 환해지는 밤

오리, 다람쥐가 돌 속에서 합장하고

게와 물고기가 땅끝 파도를 부르는

생의 한때가 잠시 슬픈 듯 즐거웠습니다

열반을 기다리는 달이여

그의 필생의 울음이 빛이 되어

미황사는 빛과 어둠의 경계에서 홀로 충만했습니다

 

우리 영화계의 큰 별이었던 배우 신성일이 향년 81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그가 살았던 삶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고서라도 한 사람의 죽음은 하나의 우주가 스러지는 것임을 나는 안다. 그에 대한 기억도 언젠가는 산 사람의 머릿속에서 낙엽처럼 스러지겠지만 적어도 낙엽을 밟고 선 오늘의 체감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현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고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생면부지의 그이지만 오늘의 애도는 오직 그에게 향해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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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차와 장미의 나날
모리 마리 지음, 이지수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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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음식에 대한 기호는 어릴 적 추억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어렸을 적 가정 형편이나 부모님의 성격, 형제의 유무 어쩌면 부모님의 교육관이나 이웃과의 유대 관계 등 그 사람의 몸에 촘촘히 새겨진 삶의 무늬가 음식에 대한 기호를 통해 발현되는지도 모른다. 예컨대 가정 형편이 어렵고 가부장적인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음식은 그저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수단 이상의 의미는 지니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부유하고 자유분방한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음식에 대한 탐닉이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주요한 수단으로 인식하지 않을까.

 

모리 마리의 산문집 <홍차와 장미의 나날>을 읽어본 독자라면 나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을 듯하다. 일본 근대 문학을 대표하는 대문호 모리 오가이의 장녀로 태어난 작가는 부유한 집안의 첫째라는 특권을 마음껏 누리며 자란 듯했다. 좋아하는 음식을 즐기는 것은 물론 주변 사람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던 까닭에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그와 같은 삶은 오래 유지되지 않았고 하루하루의 생계를 걱정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어렸을 적 기억을 간직한 채 자신의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는 사실이다.

 

"좋아하는 소설을 쓰는 것은 고통스럽고 괴로운 작업이긴 해도 그 세계 속에 일단 제대로 들어가기만 하면 어떻게든 쓸 수 있게 된다. 음식으로 말하자면 입술 주위에 과즙을 잔뜩 묻힌 채 달콤한 백도를 무아지경으로 먹는 상태라고 할까. 가끔 아직 이 정도로는 절대로 만족하지 못한다는 자조 섞인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렇다 해도 나는 조증 환자여서 가끔 어울리지 않게 우울하고 내성적인 생각을 하더라도 눈 깜짝할 사이에 그 생각이 구름처럼 흩어져 태연해지는 그야말로 행복한 성격의 인간이다." (p.199~p.200)

 

두 번의 이혼 끝에 친정으로 돌아갔던 그녀였지만 여동생과 남동생의 결혼, 그리고 어머니의 죽음 등으로 텅 빈 집에서 혼자 살 수 없어 따로 방을 얻어 살게 되었다는 그녀. 아이들과 떨어져 홀로 외롭게 지내면서 싱크대도 공용으로 써야 하는 셋방의 열악한 환경을 탓하기는커녕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즐겼던 걸 보면 인생은 그저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누구나 짐작하겠지만 책의 내용은 음식과 관련한 유년 시절의 추억과 친구들과 얽힌 여러 에피소드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모리 마리의 소소한 일상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에게 닥친 여러 근심거리나 이런저런 문제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느껴지기도 하는 걸 보면 음식 이야기에 섞여들어 간 작가의 인생관이 독자들의 머릿속으로 전이되는 듯하다.

 

음식을 단지 생존 수단으로만 여기는 나는 맛집 앞에서 길게 줄을 서거나 아주 먼 거리를 운전하여 맛집을 찾아가는 걸 끔찍이도 싫어했었다. 그러나 큰돈 들이지 않고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는 걸 무엇보다 즐겼던 아내는 시간이 날 때마다 나 대신 아들과 함께 여러 음식점을 돌아다니곤 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게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질색을 했을까 하는 후회가 남는다. 모리 마리 정도는 아닐지라도 가까운 사람과 음식 한 끼 나누는 것이야말로 삶의 큰 기쁨인데 말이다.

 

"마지막으로 슬픈 이야기를 하나 쓰겠다. 아버지는 마지막 병상이 되리라는 것을 알았을 때 여간해서 자리에 들려 하지 않았다. "나는 아직 앉아서 밥을 먹을 수 있어"라고 말하며 다다미방에 앉아서 식사를 하셨지만 손이 떨려서 상아 젓가락이 밥그릇 가장자리에 부딪치며 딱딱 소리를 냈다. 어딘지 모르게 하얀, 죽음의 그림작가 떠도는 듯한 푸른 잎의 나무들 언저리로 눈길을 주며 어머니는 슬픔으로 기력을 잃어버렸다." (p.128)

 

음식을 즐기는 것도, 그렇다고 요리를 잘 만든다거나 남다른 미각을 지닌 것도 아닌 나이지만, 요리와 관련된 책은 시간이 날 때마다 더러 읽었었다. 언뜻 떠오르는 책의 제목만 하더라도 박찬일 셰프의 <추억의 절반은 맛이다>나 독일의 일류 요리사인 되르테 쉬퍼의 <내 생의 마지막 저녁 식사>, 김훈의 <라면을 끓이며> 등 줄줄이 이어진다. 우리는 사실 살기 위해 한 끼를 때운다기보다 가까운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지난 시절의 추억을 떠올리거나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주가 되는 건 음식을 빙자한 삶이 아닐까 싶다. 밥 한 끼 같이 하자는 건 당신과의 추억을 공유하고 싶다는 또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음이다. 그 말의 무게를 새삼 실감하는 주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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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백하게 산다는 것 - 불필요한 감정에 의연해지는 삶의 태도
양창순 지음 / 다산북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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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덕이 심한 날씨가 며칠간 계속되었다. 멀쩡히 개는 듯하다가도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와 천둥이 치고 우박이 쏟아지기도 했다. '가을비 한 번에 내복 한 벌'이라는 말처럼 계절은 이제 가을을 지나 겨울로 향할 터였다. 주말 내내 비가 오락가락하던 날씨는 월요일 출근길에는 말끔히 개었다. 사심이 없는 담백한 하늘이었다. 언제부턴가 그런 하늘을 마주하는 날이면 괜스레 부끄러워지곤 한다. 내가 살아온 삶의 얼룩이 하늘 한편에 속속들이 투영되는 듯해서 말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랐던 윤동주 시인처럼 나이가 들수록 끝내 이룰 수 없는 소망들만 눈에 들어오는 듯하다.

 

"이 역시 내 생각이지만, 계절 중에서는 겨울이 가장 담백함에 가깝지 않을까 한다. 추운 날 오히려 쨍하고 마음이 맑아지는 경험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겨울은 봄날의 들뜸도 없고, 여름날의 화려함이나 열정, 피곤함도 없으며, 가을날의 서글픔도 없다. 조용히 숨을 죽이고 다음 해의 봄이 오기를 기다리는 마음만 있을 뿐이다."    (p.30)

 

'담백하게 살아가기'가 인생의 버킷 리스트가 되었다는 양창순 박사의 에세이 <담백하게 산다는 것>은 지금과 같은 늦가을에 어울리는 책이다. 사람의 습성이야 늘 자신이 갖지 못한 것, 이루지 못한 일들을 욕심내게 마련이지만, 자신이 직접 죽음 직전의 경험을 겪거나 아주 가까웠던 사람의 죽음을 목도하게 되면 그와 같은 욕심도 조금씩 옅어지곤 한다. 죽음에 대한 체감은 삶은 그야말로 허상에 불과하다는 걸 머릿속에 각인시키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까칠하게 살기로 했다>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저자가 뜬금없이 들고 나온 책의 제목이 <담백하게 산다는 것>이라는 데 의아함을 갖는 독자가 있을지도 모른다.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기 위해 미리 방어하고 경계한다는 의미에서 까칠하게 살고자 했던 저자가 주변 환경에 개의치 않고 담백함을 유지하고 싶다는 것만 보아도 세월이 흐른 만큼 저자 역시 성숙해진 게 아닌가 싶다. 어쩌면 저자 역시 자신에 대한 지나친 기대치를 내려놓았는지도 모른다.

 

"상담을 하다 보면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아니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갈등이 결국은 '기대치의 문제'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이 세상에 내 기대치를 온전히 만족시켜줄 사람은 없다. 그것이 냉정한 현실이다."    (p.79)

 

총 5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1장 '담백하게 산다는 것의 의미', 2장 '담백한 삶이 가져다주는 최고의 선물', 3장 '담백한 삶을 방해하는 몇 가지 요소들', 4장 '담백한 삶을 위한 마음 솔루션', 5장 '담백하게, 지금 이 순간을 살아가는 법'으로 담백하게 산다는 게 무엇인지, 담백하게 살면 뭐가 좋은지, 그렇다면 우리가 일상에서 담백하게 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담백하게 살기 위한 방안은 무엇인지, 담백한 일상을 살기 위한 구체적인 처방은 무엇인지에 대해 쉽고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우리가 현재 이 시점을 살지 못하고 늘 과거에, 미래에 마음을 빼앗기고 사는 것은 '무'라는 한자처럼 현재 이 시점에 내게 주어진 것을 못 보고 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담백함은 또 다른 의미에서 '보이지 않는 현재 이 시점에 내가 갖고 있는 것을 보는 능력'이라고 말하고 싶다."   (p.214)

 

저자도 말하고 있지만 얼룩 없는 인생이 어디 있으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도 다른 사람의 기대치를 완벽하게 충족한다는 게 가당키나 한가. 누구나 처음인 인생, 신이 아닌 이상 실수가 일상일 수밖에 없는데 우리는 언제나 완벽함만 추구하며 사는 건 아닐까. 이런 불가능한 목표를 내려놓지 않는 한 우리는 늘 삶의 무게와 스트레스에 짓눌린 채 평생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 나 역시 이와 같은 책을 읽을 때면 그런 생각이 불현듯 들다가도 며칠만 지나면 남과 견주면서 자신을 들볶는 걸 보면 내 눈에도 욕심의 색깔이 담백함의 색깔보다 훨씬 더 강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는 절대로 그러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습니다'라고 그렇게나 외치던 분도 현실에서는 그놈의 욕심 때문에 영어의 몸이 되지 않았던가. 한 치 앞을 보지 못하는 게 삶인가 보다. 저녁이 되자 다시 흐려진 하늘, 갈피를 잡지 못하는 나의 마음처럼 날씨마저 어수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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