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들이야 제 일에 바빠 돈이 될 만한 다른 사업을 찾는다는 게 마냥 어렵게만 느껴지지만 경제적,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라도 돈이 되는 일이라면 뭐라도 군말 없이 팔 걷어붙이고 달려들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듯하다. 언제든 말이다. 내가 아는 지인 한 명도 몇 년 전에 유치원 사업이 큰돈이 된다는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 그날부로 매물로 나온 유치원이 없는지 전국 곳곳을 알아보다가 결국에는 자신이 소유한 땅에 유치원을 짓고 말았다. 천정부지로 치솟은 프리미엄에 질렸던 것이다.

 

유치원 원장 자격을 갖추었을 리 만무한 지인은 자격을 갖춘 다른 사람을 원장에 앉히고 자신은 그저 돈이 들어오고 나가는 것만 관리하며 또 다른 먹잇감을 찾고 있는 듯했다. 돈에 관해서라면 한 욕심 한다는 그도 유치원 사업이 썩 마음에 들었던지 만나는 사람마다 유치원은 해볼 만한 사업이라며 권하곤 했다. 이따금 그의 말에 솔깃해하는 사람이라도 나타날라치면 유치원 운영 백태 중 몇몇 수단을 자세히 설명해주곤 했다. 한마디로 뒷돈을 챙기는 방법 말이다. 나야 물론 돈도 없고, 시간도 없으니 그의 말에 관심을 둘 리 없었지만 이재에 밝은 그를 은근히 부러워하던 사람들은 그의 말이라면 하나라도 놓칠세라 받아 적곤 하였다.

 

그랬던 그가 유치원 사업을 접어야 하겠다며 불만 가득한 얼굴로 나타났던 건 최근의 일이다. 한마디로 돈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정부의 지원금이 그저 눈먼 돈으로만 여겨왔던 전국의 유치원 원장들에게 이제부터는 정당한 대가만 가져가라고 하니 불만이 터져 나오는 것은 당연지사.

 

어제 뉴스에서 본 사립유치원 토론회 현장을 보면서 그곳에 참석한 자유한국당 의원들이나 사립유치원 원장들이나 딱하기는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민학원 이사장 재직 당시 교비 횡령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잇는 홍문종 의원은 "법이 잘못된 것이지 여러분이 잘못한 게 뭐가 있느냐"는 막말도 서슴지 않았다. 현진권 전 자유경제원 원장의 발언은 더 가관이었다. "정부의 유치원 공공성 강화는 헌법에 명시된 재산권 보호를 침해하는 정책"이라며 "정부 돈 받아서 명품백 사면 안 되느냐, 명품백 혹은 성인용품 샀다고 조그만 사안으로 비도덕적 집단으로 몰고 있다"는 취지의 말이었다. 김주일 공인회계사는 한 발 더 나아가 "박용진 의원 자료들은 쓰레기 자료들"이라며 "국가가 왜 무지막지하게 날강도 같은 행동을 하고 있느냐"고 성토했다.

 

웃기지 않은가. 마치 한 편의 블랙코미디를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욕심에 마비된 사람들은 자신의 모습을 돌보지 못하는 법이다.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이 법이 잘못되었다고 시인하는 건 자신이 바보이거나 직무유기를 했다는 고백이 아니가. 동시에 그런 사람을 국회의원으로 뽑아준 의정부 시민들을 바보로 만드는 꼴이기도 하다. 알 만한 사람이 정말 그래서는 안 된다. 국민을 개 돼지로 여기던 시대는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단지 거기 모인 그 사람들만 모르고 있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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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15 15: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1-16 15: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서민 2018-11-15 16: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집단이기주의 쩔더군요. 일말의 양심과 상식도 기대하기 어렵겠다는...기가 차더라구요.

꼼쥐 2018-11-16 15:56   좋아요 0 | URL
정말 그렇죠? 저야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 보낼 아이가 없으니 제3자의 입장이지만 유치원 원장들과 자유당 의원들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당사자들은 얼마나 열불이 날지... ㅜㅜ
 
바보들이 난세를 만든다
강철수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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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표현함에 있어 판에 박은 듯이 등장하는 말이 있다. '가깝고도 먼 나라'. 지리적으로는 가깝지만 국민 정서상으로는 아주 멀기만 하다는 뜻이리라. 그런 감정은 한·일 양국 공히 대를 이어 전승된다. 마치 국민 전체의 유전자 속에 일본에 대한 적대감이 고고히 흐르고 있는 것처럼. 또는 일본에 대한 증오나 적대감을 담은 마이크로칩을 국민 개개인의 몸속에 심어 놓은 것처럼. 그것은 마치 대한민국 국민임을 상징하는 정서적 신분증과 같다.

 

"인간의 DNA에 침략, 살인, 충신, 간신 따위는 없다. 그러나 한일 양국 역사의 두루마리를 펼치면 온통 피와 눈물, 참혹한 주검들의 홍수다. 나는 낡고 빛바랜 기록에 의지하며, 때로는 반신반의하며, 서울에서 도쿄로, 에도(江戶)에서 한양으로, 도쿄에서 경성(京城)으로, 다시 조선에서 오사카로. 오늘은 이것을 알아보고 다음 주는 저 사건을 들춰보고…10년…다시 20년…되돌아보니 장장 30년을 집시처럼, 떠돌이 무사처럼 일본 전역을 훑었다." (p.13)

 

만화가 강철수의 에세이 <바보들이 난세를 만든다>는 손과 머리로 썼다기보다 그의 발과 눈으로 쓴 기록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듯하다. 작가는 직접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을 중심으로 해방 후 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전혀 달라진 게 없는 작금의 현실을 되짚어보며 도대체 어떤 이유로 한일 양국은 서로 반목한 채 지금에 이르게 되었을까 하는 질문을 독자들에게 던진다. 단지 과거의 식민 지배와 역사적 불협으로 인한 반목이라면 두 나라의 국민들이 용서와 화해, 평화와 번영으로 나아갈 길은 없을까 모색해보자는 취지인 것이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바보스러울 정도로 남을 잘 믿고, 잘 속는 한국인. 좋은 게 좋은 거라며 지난 일은 금세 잊는 한국인. 그렇게 사람 좋은 순둥이들이 그렇게 자주 일본을 드나들면서 일본에만은 마음 전부를 열지 않았다." (p.124)

 

사실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정서는 한국인 개개인에게 직접적인 피해나 직접적인 이득에 의한 결과라고는 보기 어렵다. 예컨대 친일을 했던 선조들에 의해 대대로 떵떵거리며 사는 극소수의 친일 자손들도 있고, 항일 투쟁으로 가산을 탕진한 바람에 대대로 어렵게 살아온 독립운동가의 후손들도 있기는 하다. 그들에게 있어 일본에 대한 애착이나 증오는 직접적인 결과에 의한 감정일 수 있으나 대다수의 한국인이 느끼는 일본에 대한 적개심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정의감이나 교육적 효과일 수도 있고 인간의 속성상 사랑보다는 분노에 민감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제발 양국이 하루만이라도 그놈의 스마트폰 내려놓고 육성을 주고받는 순수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을까. 너무도 부끄러운 억지 일란성 쌍생아 그만 끝내고 좋은 나라, 좋은 것만 공유할 수 없을까. 두 나라 손을 꽉 잡고 지구 멸망 촉진제 플라스틱 용기 추방에 나설 수 없을까. 비닐봉지를 10퍼센트대로 낮추고 '시장바구니' 옛날로 돌아갈 수 없을까. 서로 손가락질 그만하고, 축구나 야구로 맞붙으면 서로 박수쳐주고 환호해주는 착한 쌍둥이, 예쁜 쌍둥이가 될 수 없을까." (p.238)

 

작가의 바람은 한낱 공허한 바람으로만 그칠 수도 있다. 일본의 정치지형이 바뀌지 않는다면 말이다. 일본을 움직이는 힘은 일본 국민에 의한 민의라기보다 소수의 정치인들에 의한 가공의 힘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벌어진 일만 보더라도 그러한 사실을 여실히 엿볼 수 있다. 아이돌 가수 BTS의 일본 방송 출연을 갑작스럽게 취소한다거나 순회공연이 열리는 도쿄돔에서 혐한 시위를 펼치는 등 일본 정치인들에 의한 반인륜적 행위가 멈춰지지 않는다면 한일 양국의 화해와 공동 번영의 미래는 기대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오늘은 대입 수능일, 필수 과목인 한국사 시험을 치르면서 일본에 대한 적개심을 은연중에 학습할지도 모르지만 결국 모든 것은 일본 정치인들의 결단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일본 청소년들이 배우는 역사와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이 배우는 역사는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가해국의 논리와 정서를 피해국의 국민들에게 강요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극우든 극좌든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이념이나 사상은 결국 망하고 만다.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이지만 일본 정치인들의 대오각성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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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를 오래 지속하다 보면 나처럼 숫기 없는 사람도 이래저래 이웃도 만들고, 이따금 교류도 하고, 읽었던 책에 대해 이런저런 견해를 피력하기도 한다. 물론 그 모든 게 서로 얼굴을 마주하지 않는 온라인 상의 일이기에 가능한 것이지만 일상의 업무를 처리하면서 과외의 시간을 내어야 하는 까닭에 무작정 쉽게만 생각할 일도 아니다.

 

블로그에 올리는 글만 해도 그렇다. 어떤 글을 쓰든 사회상규나 미풍양속에 저해되지만 않는다면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 생각도 없이 마구 토해내는 것 같지는 않다. 재주는 없지만 곰곰 생각하게도 되고, 여유가 있을라치면 자신이 쓴 글을 읽어보고 미진한 부분은 고쳐보기도 하고, 전에 읽었던 책의 일부를 인용하기도 한다. 그렇게 하자니 때로는 많은 시간을 블로그에 할애하는 날도 있게 마련이다.

 

사람의 일이라는 게 늘 그렇지만 우연찮게 안 좋은 일도 당하고, 때로는 기쁜 일도 있고, 딱히 특별한 일도 없는데 한없이 가라앉는 날도 있어서 블로그를 꾸준히 관리하고 유지한다는 게 쉽지만은 않다. 블로그를 그만두고 싶거나 만사에 의욕이 없을 때에는 일부러라도 일을 만들곤 한다. 리뷰대회에 참가해보는 것도 그중 하나이다. 물론 상을 받으면 좋겠지만 그게 목적은 아니다. 명색이 대회에 참가하는 글이니 조금 더 생각하고, 조금 더 집중하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슬펐던 일도 조금 잊을 수 있고, 화가 나거나 바닥까지 가라앉았던 마음도 다시 고를 수 있다.

 

얼마 전에 참가했던 리뷰대회에서 보기 좋게 탈락했는데 대회를 주최했던 출판사 측으로부터 메일이 왔다. 책을 보내주시겠다고 말이다.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편지와 함께 보내주신 네 권의 책!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좋은 책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도서출판 '한길사',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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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
김형숙 지음 / 뜨인돌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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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대해 말할 수 있다는 건 상대적으로 자신의 죽음만큼은 아직 저만치 멀기만 하다는 강한 믿음이 있기 때문일 터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그러나 막상 자신의 죽음을 염두에 두고 말할라치면 사정은 180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두려운 것이다. 아무리 담담한 척해본들 결코 무덤덤해질 리 없다. 그렇게 된 데에는 삶과 죽음이 철저히 분리된 데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죽음과 삶이 한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던 과거와는 달리 현대인의 죽음은 병원이라는 한정된 공간 내에서 삶과 분리된 채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늘 있는 일이고 자신도 언젠가는 겪을 일이지만 현대인에게 죽음은 익숙하지도, 그렇다고 가깝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또 의식이 없는 환자를 대신하여 가족들이 '사전 동의서'라는 형식으로 내리는 의사결정은 어떤 결론이건 가족이나 의료진에게 후회와 죄의식을 남겼다. 연명치료를 아예 시작하지 않는 것이나 이미 시작된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것이 결과적으로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도, 연명치료를 아예 시작하지 않는 것에 비해 중간에 멈추는 걸 용납하기가 훨씬 어려워지는 등 사전의사결정에 대한 스스로의 판단 기준도 모호했다." (p.6)

 

의학의 발달과 의학에 대한 과도한 믿음으로 인해 현대인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와 의미를 까맣게 잊어버리곤 한다. 그러므로 나이를 먹고 노화가 진행될수록 자신에게 가까워지는 죽음의 실체는 과거 우리의 선조들에 비해 훨씬 큰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차가운 의료장비와 낯선 의료진들만 가득한 중환자실에서 죽음을 맞는다는 건...

 

19년 동안 신경외과 중환자실에서 간호사로 근무했던 경험을 책으로 엮은 <도시에서 죽는다는 것>의 저자 김형숙은 우리에게 죽음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첫 직장인 대학병원 중환자실이 '의외로 나에게 잘 맞는 일'이라고 생각했었다는 저자는 세월이 흐를수록 고통스러웠고, 결국 병원을 뛰쳐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한다. '뇌·척추 질환자들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그들의 팔다리에 통증을 가하는 일'이 괴로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자가 어려서부터 죽음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키워왔던 건 아니다. 1장 자연스러웠던 죽음을 추억하다'에서 저자는 산골 출신인 저자가 무덤가에서 놀며 위로받고, 누군가의 죽음을 애도하며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던 자신의 어릴 적 추억을 회상한다. 2장 '중환자가 된다는 것, 나에 대한 결정에서 배제되는 것'에서 저자는 중환자실에 들어간다는 것을 '고립·소외·침묵·분노·공포·배제'로 요약한다. 그리고 3장 '중환자실에서 죽는다는 것, 이별하기 어렵다는 것'에서 환자가 과도한 연명치료와 사랑하는 가족으로부터 격리된 생활로 인해 스스로의 죽음에서 '배제'되고 아름답게 죽을 권리를 박탈당하는 현실을 자신의 경험을 통해 드러낸다. 어쩌면 우리는 끊을 수 없는 미련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더 큰 고통 속으로 밀어 넣고 있는 건 아닌지...

 

저자는 이 책의 4장 '죽음 이후, 당신이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았을 때 생길 수 있는 일'을 꼼꼼히 되짚으며 5장 '다른 가능성들'을 제시한다. 그것은 결국 '사전 의료 지시서' 제도로 이어진다. 병원에서의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서면으로나마 연명 치료 여부를 미리 결정하고, 심폐소생술 여부, 시신 처리 방법 등에 관한 구체적인 의사를 남겨 우리가 응급상황에 처했을 때 의료진과 가족에게 전달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전 의료 지시서' 제도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국내에서는 아직 이 제도의 법적 효력이 없다. 사전 의료 지시서를 작성했다고 하더라도 현실에서는 보호자의 의사, 의료진의 의사가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얘기다.

 

"연명치료나 소생술을 시행하지 않는 것은 환자를 포기하고 죽음을 기정사실화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환자의 치료를 중단하거나 포기하지 않으면서 가능한 한 환자의 고통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았고, 마지막에는 환자 내부의 힘, 혹은 하늘의 뜻에 맡기며 기다렸다. 그때까지 유지하던 치료를 지속할지 중단할지 결단하지 않고도 남은 날들이 환자나 가족들에게 조금이라도 덜 고통스럽고 의미 있는 시간이 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 결과 환자가 스스로 회복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p.245)

 

리처드 도킨스는 자신의 책 <이기적 유전자>에서 인간은 이기적 유전자의 자기 보존을 위해 맹목적으로 프로그램된 로봇기계이며, 유전적 본성에 따라 먹고, 살고, 사랑하면서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전달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존재라고 썼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하찮은 존재로 이 세상에 왔다 가는 건 결코 아니라고 믿는다. 그와 같은 믿음을 지켜주는 것,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유지하는 것은 순전히 한 인간의 마지막 모습이 아름다운가 그렇지 않은가에 달려 있지 않을까. '당신은 오늘 죽음을 상상해야 한다'는 저자의 말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만이 당신이 마지막까지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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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운 죽음 뒤에는 항상 안타까운 사연이 뒤따른다. 종로의 한 고시원에서 발생한 화재로 인해 7명이 숨지고 11명이 다쳤다고 했다. 몸 하나 겨우 들어갈 1.7평의 작은 방 하나에 월세 27만 원, 입주자 대부분이 40~70대의 일용직 근로자라고 한다. 비가 와서 공치는 날이라 사망자가 늘었다고 하니 운명이란 참으로 알 수 없는 것이란 생각이 들 수밖에... 자본주의가 발달할수록 가난의 굴레는 그 사람의 생명까지도 옥죄게 마련이다. 그렇게 내몰린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하루를 견디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제공한다.

 

몇 년 전 나도 서울 신림동에 있는 고시원을 방문했던 적이 있다. 잠시였지만 안정적인 숙소가 마련될 때까지 임시방편으로 고시원에 머물러야 했던 조카를 위로하기 위함이었다. 방문자가 앉을 공간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좁디좁은 공간에서 나는 금세라도 폐쇄공포를 느낄 것만 같은 아찔한 예감에 저녁을 먹자는 핑계로 그 자리를 서둘러 벗어나야만 했다. 두어 달을 그곳에서 살았던 조카도 그 후 마땅한 방을 얻어 감옥과 다름없었던 고시원 생활을 청산할 수 있었지만 그때의 경험이 혹여라도 트라우마로 남지 않았을까 걱정이 되곤 했었다. 물론 더 이상 한 발짝도 물러날 곳이 없는 고시원 상주자들이 듣는다면 이렇게 말하는 나의 모습은 순전히 엄살로 비칠 수밖에 없겠지만 말이다.

 

지난 9월 만취 운전자가 몰던 BMW에 치여 뇌사상태에 빠졌던 윤창호 씨도 오늘 끝내 숨졌다고 한다. 미국 LA 교외 술집에서 벌어진 총기 난사 사건의 희생자들 역시 안타깝기만 하다. 내 가족이나 가까운 일가 친척이 아닌 한 우리는 또 쉽게 잊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일상을 살아가겠지만 언제쯤이면 이런 안타까운 죽음이 사라지게 될지 그저 답답하기만 하다. 사람이 같은 사람을 죽이는 세상, 그런 까닭에 우리 모두는 공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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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1-09 19: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1-11 1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