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라고 썼던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에 딱 어울리는 계절입니다. 연휴의 마지막 날 잔뜩 흐린 하늘을 등지고 올랐던 아파트 인근 산의 등산로는 지난밤에 내린 비로 꽤나 미끄러웠습니다. 하늘이 끄물끄물한 탓인지 사람들은 많지 않았고,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는 풀숲에선 오래된 낙엽이 쌓인 부엽토의 구수한 흙냄새가 오가는 사람들의 후각을 사로잡았습니다. 짙은 녹음 사이로 간간이 산벚꽃 나무의 여린 잎이 갈색으로 물들고 은빛 억새가 바람을 따라 일렁입니다.


고물가, 고금리, 고환율 등 3고 시대의 어두운 터널에 진입한 대한민국의 국민 대다수는 윤석열 대통령의 해외 순방 이후 대통령을 비롯한 현 정부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은 듯한 모습입니다. 자원도 없이 오롯이 수출로 먹고 사는 대한민국에서 무역적자가 지속되는 한 고환율과 고물가는 피할 수 없을 테고, 미국의 금리인상 기조가 꺾이지 않는 한 고금리 상황은 한동안 계속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하여 주가와 부동산 가격의 폭락은 피하기 어려울 듯한데 정부는 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한 어떤 대책도, 고환율과 IMF 금융위기 재발 가능성에 대한 어떤 자구책도 마련하지 못한 채 전 정부에 대한 비난만 쏟아내고 있습니다. 게다가 여당의 국회의원들조차 대통령의 실언과 계속되는 실수를 방어하기에만 급급할 뿐 이를 시정하고 앞으로 나아갈 대책은 세우지 않고 있습니다. 취임한 지 5개월 된 정부의 실정이 이런 지경이라면 국민들이 겪어야 할 5년의 고통은 그야말로 끔찍할 뿐입니다. 회복 불능의 상태가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어쩌면 저 뿐만 아니라 제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겪는 공통의 느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야당에 대한 불만도 바로 그런 지점과 맞닿아 있는 듯합니다. 예컨대 용산에 사는 멧돼지 한 마리가 온 국토를 헤집고 들쑤셔 놓아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는데 야당의 국회의원들은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팔짱을 낀 채 '얼마나 망가지나 보자.' 하고 여유롭게 바라만 보는 형국이니 국민들로선 속이 터질 수밖에요. 지금은 그렇게 두 손 놓고 지켜만 볼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이 상태가 지속되면 머지않은 미래에 대한민국의 경제는 회복 불능의 파탄 지경에 이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김대중이라는 노련한 정치가와 비교적 우호적인 대외 여건을 등에 업고 IMF 금융위기를 비교적 쉽게 벗어났던 과거의 선례에 비해 지금은 무능한 대통령과 무능에 동조하는 여당 그리고 호락호락하지 않은 대외 여건 등으로 인해 만일 대한민국에 제2의 IMF 금융위기가 닥친다면 파국에서 벗어나는 게 결코 쉽지 않을 거라는 게 많은 사람들의 예상입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이제 다 못 헤는 것은/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라고 썼던 청년 윤동주를 지켜주기 위해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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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편의점 (벚꽃 에디션) 불편한 편의점 1
김호연 지음 / 나무옆의자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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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에도 몇 번씩 자신의 운명과 속절없는 투닥거림을 하게 되는 것도 따지고 보면 하릴없는 넋두리에 불과하겠지만 이러한 투닥거림도 삶의 과정 중 하나라면 심한 마음고생 없이 빠르게 지나갔으면 하는 게 솔직한 바람이다. 이 땅에 사는 대다수 사람들의 생각이 그러하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당신의 생각도 그러하냐고 차마 묻지 못할 때가 많아서 자신의 속내를 서로 내보이지도 못한 채 끙끙 속앓이만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리고 세상의 불행이란 불행은 모두 자신 혼자 떠안은 양 우울해하는 것이다. 바꿀 수 없는 자신의 운명을 원망하면서...


김호연의 소설 <불편한 편의점>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이 마음먹기에 따라서 극락이 될 수도, 지옥이 될 수도 있음을 자연스레 깨닫게 된다. 이따금 만나는 누군가를 붙들고 자신의 속내를 툭 털어놓고 나면, 자신의 고민은 시나브로 깃털처럼 가벼워져서 다시 또 용기를 내어 살아갈 수 있겠다는 희망을 품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마법은 자신의 고민을 가슴속에 꽁꽁 숨겨두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 말하자면 자신의 고민이 입술 안쪽과 바깥쪽의 그 실낱 같은 경계 어느 쪽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라는 극과 극의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다.


"다섯 번째 불운까지 겪고 나니 민식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져 엄마가 사는 청파동 집으로 기어들어가야 했다. 거기서 몇 해 전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긴 유산으로 엄마가 편의점을 차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유산에는 분명 그의 몫도 있었을 것인데, 엄마와 누나는 아무 언질도 없이 민식만 빼놓고 유산을 편의점으로 바꾼 것이었다."  (p.167)


소설은 그렇게 세상 사람들의 여러 고민을 안고서 청파동의 어느 편의점으로 향한다. 민식의 엄마이자 편의점 사장인 염 여사는 자신의 지갑을 찾아주었다는 이유 하나로 서울역 노숙인이었던 '독고' 씨를 편의점 야간 알바생으로 채용한다. 그러나 주변에 편의점이 하나둘 들어서면서 염 여사의 편의점은 경쟁에서 밀리게 되고, 상품의 구색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까닭에 동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을 경우에만 찾게 되는 '불편한 편의점'으로 인식한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사장인 염 여사가 노숙인이었던 '독고' 씨를 채용한 것은 기존에 있었던 다른 직원들의 걱정과 불안을 부채질했다. 그러나 그들의 걱정과는 달리 '독고' 씨는 물건을 훔치려는 불량학생이나 다루기 힘든 취객도 능숙하게 다루고, 진상 손님까지 두 손 들고 떠나게 만든다. 이러한 신선한 바람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작가가 되고 읽은 여러 심리학 서적에서 인경은 감정적 상처에 대해 주목했다. 캐릭터는 결국 과거의 끔찍한 감정적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고, 그런 상황에서 무엇을 지키고자 했는가가 그의 앞날이 된다. 독고 씨는 눈을 감았고 등을 돌렸다. 하지만 현재 그는 회복되고 있으며 사람들과의 소통을 통해 상처를 돌아볼 용기와 힘을 조금씩 채우고 있었다."  (p.156)


편의점은 비싸다며 발길조차 주지 않던 동네 노인들도 '독고' 씨의 싹싹한 태도에 편의점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배회하기 시작하고, 그에 따라 매출도 상승한다. '독고' 씨로 인한 주변 사람들의 변화는 다방면에서 나타난다. 오전 알바를 하던 오 여사는 게임에 빠져 사는 자신의 아들과의 소통 단절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던 또 다른 알바생 시현은 편의점 초보 알바생을 위해 포스기 다루는 법을 유튜브에 올려 더 좋은 조건으로 이직을 하게 되었고, 편의점 야외 테이블에서 늘 혼술을 하던 세일즈맨 경만은 술을 끊고 다시 가장의 자리를 찾아 들어가게 되었으며, '독고' 씨를 쫓ㅇ아내고 편의점을 팔게 하려던 아들 민식은 엄마와의 관계를 회복하였고, 마지막 글쓰기 장소로 청파동을 찾은 희곡작가 인경 역시 '독고' 씨와의 대화를 통해 다시 글을 쓸 수 있는 용기를 내게 된다.


"결국 삶은 관계였고 관계는 소통이었다. 행복은 멀리 잇지 않고 내 옆의 사람들과 마음을 나누는 데 있음을 이제 깨달았다. 지난가을과 겨울을 보낸 ALWAYS편의점에서, 아니 그 전 몇 해를 보내야 했던 서울역의 날들에서, 나는 서서히 배우고 조금씩 익혔다. 가족을 배웅하는 가족들, 연인을 기다리는 연인들, 부모와 동행하던 자녀들, 친구와 어울려 떠나던 친구들......"  (p.252~p.253)


김호연의 소설 <불편한 편의점>이 특별했던 이유는 단 하나, 소설의 주인공인 '독고' 씨를 통해 당신의 삶도 나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 하나의 이유만으로도 한결 느긋해지고 여유로워지며, 어깨를 움츠린 채 세상 사람들의 시선에서 멀어지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결국 자신의 삶이 특별하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주눅 들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그들과 소통할 때 삶은 살아볼 가치가 있음을, 그들의 속내를 알고 나면 비로소 언제나 흐림이었던 하늘이 맑음으로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소설은 말해주고 있다. 가장 낮은 신분의 '독고' 씨를 통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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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그제 새벽 등산로에는 안개가 가득했습니다. 늘 다니던 길인데 사뭇 달라진 분위기. 새벽의 성근 어둠 속으로 푸석푸석한 안개 알갱이들이 균질하게 스며들어 흩어지려는 어둠을 한껏 붙잡아두려는 듯했습니다. 여름내 참매미의 울음소리가 장악했던 숲의 고요는 귀뚜라미의 가늘고 탁한 소리로 대체된 지 오래입니다. 어쩌다 만나는 청설모의 밭은 움직임에 넋 놓고 걷던 발걸음을 급하게 멈출 때가 있었습니다만 요즘은 그마저도 귀한 체험이 되고 말았습니다. 안개 때문인지 밭은 숨을 몰아쉴 때마다 목구멍이 까슬까슬합니다.


윤석열 대통령의 비속어 논란을 보면서 '코미디도 이런 코미디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이 했던 말에 대해 사과 한마디만 하면 해프닝으로 끝날 문제를 진상조사를 해야 한다는 둥 최초 보도를 한 MBC에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둥 그야말로 뻘짓을 일삼고 있는 모습에서 우리는 대한민국의 국격이 있는 대로 추락하는 것을 하릴없이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해외에 있는 지인 몇 분과 통화를 했었는데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연일 톱뉴스로 등장하는 통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다는 전언이 대부분이었습니다.


검사로 근무하다 퇴임을 한 후 변호사 개업을 한 지인의 말을 빌자면 윤석열 대통령의 비속어는 비속어도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대통령으로 당선된 바람에 그의 언어는 많이 순화되었고, 그렇게 순화된 게 그 정도라는 것이지요. 검사 세계에서 '이 XX'는 욕설 축에도 끼이지 않는 일상어라는 것입니다. '쪽 팔리다'는 말할 것도 없고 말이지요. 그러니 대통령 자신은 언어 순화를 위해 나름 노력을 했는데 국민들이 그걸 꼬투리 잡아 힐난하니 억울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잘못이 있다면 대통령 깜도 안 되는 그런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은 대한민국 국민에게 있다는 논리였지요. 어쩌면 그분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번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하여 코로나 시국에 선진국으로 추앙받던 대한민국의 국격이 하루아침에 무너졌으니 말입니다.


오늘의 대기도 대한민국의 정국만큼이나 답답합니다. 비라도 한 차례 내려 이 답답한 대기가 말끔히 걷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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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한 얼굴
제임스 설터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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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보람과 충만함은 '살아 있음'에 대한 인지와 지속성에 달려 있다. 그러나 반복되는 일상의 도돌이표는 '살아 있음'에 대한 인지를 한없이 무디게 한다. 우리의 삶은 그렇게 하나의 의무 혹은 남들과 하나 다를 것 없는 많은 삶 중 하나(one of them)로 전락하고 만다. 죽지 못해 사는 지경까지는 아니더라도 무감각한 삶의 시간들이 뭉텅뭉텅 잘려 나가는 것이다. '죽을 때 후회하는 00가지'라는 제목의 많은 책들은 그런 무감각한 삶을 살았던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신의 임종 직전에 쓰게 되는 유서이자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반성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나의 삶을 그렇게 살지 않겠노라' 이른 나이부터 다짐한 이들이 간혹 보인다. 설령 어떤 커다란 일을 하지 않더라도 그들의 삶은 눈에 띄게 마련이다. 남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타인의 삶이 틀렸다는 게 아니라 적어도 자신만큼은 '살아 있음'에 대한 자각을 잊지 않은 채 그와 같은 감각을 늘 새롭게 할 수단을 찾아 나선다는 건 우리 주변에 흔하디 흔한 보편적 인간의 삶과 다르다는 걸 의미한다. 인간의 육체와 영혼은 자신이 처한 환경에 쉽게 적응하고 너무나 빠른 시간 내에 삶의 자동화 시스템을 구축하는 까닭에 잠깐의 방심으로도 살아 있다는 자각은 한없이 무뎌지게 마련, 그들은 자신의 삶에서 한시도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삶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살아 있음'에 대한 자각을 일깨워 줄 마땅한 수단이 그들 주변에서 점차 사라진다는 게 그들만의 고충이라면 고충. 급기야 삶의 긴장감을 유지하고 '살아 있음'에 대한 자각을 일깨워 줄 최후의 수단으로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하기에 이르는데...


<가벼운 나날들>, <위대한 한 스푼> 등으로 잘 알려진 미국의 소설가 제임스 설터의 시선이 암벽 등반가의 삶에 다다른 것도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제임스 설터의 소설 <고독한 얼굴>은 '실존 인물이었던 한 산악인에 대해 꼼꼼하게 조사하고 편지를 비롯한 관련 자료를 열심히 찾아 읽은 다음, 이 남성적인 등반 세계의 명암을, 명뿐 아니라 암에 대해서도 특유의 남성적인 문체로 핍진하게 그려냈다'(p.284)는 번역자의 평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실존했던 한 산악인의 삶을 그리고 있다. 삶의 긴장과 짜릿한 전율을 느끼는 수단으로써 암벽 등반보다 더 적합한 게 또 있을까.


소설은 주인공인 버넌 랜드가 캘리포니아의 어느 교회 지붕에서 게리와 함께 일을 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대학을 1년 다닌 후 그만두고 군인으로서도 성공하지 못했던 이십 대 중반의 랜드. 지붕에서 미끄러진 게리를 구하는 장면에서 독자는 랜드의 성품과 소설의 향후 전개를 어렴풋이 짐작한다. 멕시코 여자와 동거하고 있던 랜드는 그녀의 열두 살짜리 아들과 암벽등반을 떠나게 되고 정상에서 오랜 친구인 캐벗과 조우한다. 캐벗은 그에게 프랑스 샤모니에 가보라고 권한다. 랜드는 캐벗의 권유를 받아들여 겨울을 나기에 충분할 만큼의 장작을 패서 쌓아 두고는 멕시코 여자를 떠난다. 소설은 이제 프랑스의 알프스 마을 샤모니와 인근의 장엄한 봉우리들을 무대로 본격적인 등반의 세계를 보여준다.


"랜드를 변화시킨 것은 고독뿐만이 아니었다. 또 다른 깨달음도 그를 변화시켰다. 중요한 것은 존재 일부가 되는 것이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깨달음이었다. 그는 여전히 위험한 등반의 고통을 잘 알고 있었는데, 다른 식으로도 그걸 알게 되었다. 그것은 경의였다. 그는 기꺼이 등반에 경의를 표했다. 은밀한 기쁨이 그를 채웠다. 누구도 질투하지 않았다. 거만하지도 수줍어하지도 않았다."  (p.174)


세인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을 몹시도 싫어했던 랜드는 드뤼 서벽을 악조건 속에서 친구와 함께 등반하고, 그 과정에서 얼굴을 다친 친구를 격려하여 정상에 서게 하였으며, 때로는 동행도 없이 혼자 등반을 감행하기도 하였고, 산에서 조난을 당한 이탈리아 산악인을 구하기 위해 구조대를 결성하여 그가 개척했던 드뤼 서벽을 다시 오르기도 한다. 그에게는 등반이 삶의 전부였다. 그를 산으로 이끌었던 건 어떤 산을 올랐다는 명예나 자존심 혹은 다른 어떤 산악인보다 먼저 오르겠다는 지독한 경쟁심이 아니었다. 그는 다만 등반 과정에서 느끼는 삶의 긴장과 희열로 인해 산으로부터 영영 벗어나지 못하는 처지였다.


건조하고 간결한 문체를 통해 산악인의 삶과 대자연의 침묵을 효과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이 소설은 등반이라는 하나의 축과 랜드라는 인물의 개인적 서사(난잡한 성관계)라는 두 축으로 전개된다. 산을 오르지 않을 때에 그를 돌보아준 사람은 그와 사귀었던 여자들이었다. 그가 성관계를 맺었던 여자들은 루이즈, 카트린, 콜레트, 시몬, 수전 등으로 다양했고 그들 중에는 임신을 한 여자도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아버지가 될 생각이 없다며 낙태를 권하기도 하고 결국에는 그녀의 곁을 떠난다.


"랜드는 그녀를 미워하지 않았다. 그녀는 점잖고 다정했다. 넌더리가 난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그녀를 따라다니고, 둘이 쓴 비용을 그녀가 내게 하는 것에 넌더리가 났다. 그녀는 문제 삼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 무엇을 기대하고 있는지 상상할 수 없었다."  (p.216)


이 소설의 주인공인 랜드의 모델이었던 실존 인물은 게리 헤밍으로 알려져 있다. 알프스의 프티 드뤼 서벽에서 두 명의 독일인 등반가가 조난 상태에 빠져 있을 때, 초인적인 등반으로 가사상태에 빠진 조난자들을 구했던 게리 헤밍. 당시의 상황은 실시간으로 생중계되었고, 조난 상황 발생 후 일주일 만에 조난자들을 구조했던 그의 영웅적인 구조 등반은 '샤모니의 전설'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난잡한 성관계와 마약 과다복용, 반전사상과 사회적 부적응, 정신착란과 우울증 등으로 그는 결국 36세의 젊은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물론 이 소설의 결말과는 다르지만 말이다.


'죽음 따위는 두렵지 않다. 다만 삶의 방향을 찾지 못하는 것이 두려울 뿐이다.'라고 썼던 게리 헤밍의 글처럼 우리가 정작 두려워해야 할 것은 자신이 가고 있는 삶의 방향일지도 모른다. 자신의 삶을 시시각각 인식하며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죽지 않은 상태를 겨우 유지하며 잉여의 삶을 붙들고 있는 듯한 현대인들에게 버넌 랜드의 감각적인 삶은 '살아 있다는 것은 과연 그런 것이로구나.' 하는 감탄과 함께 '그렇게 살아도 되나?' 하는 의문을 동시에 던져준다. 우리 모두는 지극히 윤리적인 것을 선망하는 동시에 지극히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는 그 어디쯤에 위치하는 존재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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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이 길이 되려면 - 정의로운 건강을 찾아 질병의 사회적 책임을 묻다
김승섭 지음 / 동아시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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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아버지의 기일이 있었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나는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어제 일처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어렸을 때는 그렇게 밉고 싫었던 사람인데 당신의 모든 것을 간병인에게 맡긴 채 하물며 눈을 뜨는 것조차 힘에 겨워 내내 숨을 몰아 쉬던 나의 아버지. 삶은 그렇게 쉽게 허물어지는 것임을 푸르렀던 당신의 청춘 시절에 알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이어가자면 이랬다. 물려받은 땅과 재산을 이래저래 모두 탕진한 아버지는 가족들을 이끌고 강원도 산골짜기의 탄광지대로 이사를 했고, 그때부터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형들과 누나들은 직장과 학업을 핑계로 도시로 나가 살았고, 할머니는 지인의 농사를 도우며 1년의 반 이상을 떨어져 살았으며, 집에는 나와 어린 여동생 그리고 엄마와 아버지만 남았었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몸을 사리지 않았던 엄마와는 달리 아버지는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 언제나 술에 취해 있었고, 그때마다 몇 명 남지도 않은 가족들에 대한 폭력이 이어지기 일쑤였다. 아버지를 피해 달아났던 나와 여동생은 아버지가 잠들 때까지 마을 아곳저곳을 배회하며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이런 생활에 신물이 났던 나는 아버지로부터 벗어날 수만 있다면 어떤 일이든 할 수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었고, 결국 나는 중2 겨울 방학과 함께 형과 누나들이 있는 도시로 전학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를 누구보다도 증오했던 내가 아버지를 조금이나마 이해하려 노력했던 계기는 아버지가 6.25 참전 용사 국가유공자로 등록하였을 때였다. 부자간의 대화라고는 딱히 없이 살았던 까닭에 아버지가 살아온 삶의 궤적을 전혀 알지 못했던 나로서는 20대 초반의 아버지가 낙동강 전투에 참전했었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기만 했다. 그리고 그 치열했던 전쟁터에서 아버지가 겪었을 충격과 공포가 아버지를 결국 알코올 중독에 이르게 했고, 술을 통해서도 지울 수 없었던 그날의 기억으로 인해 폭력적인 사람으로 변했던 것은 아닐까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국가유공자라는 허울뿐인 명예가 우리 가족의 비극을 얼마나 보상할 수 있을까.


나는 김승섭 교수의 저작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읽는 내내 국가의 역할에 대해 생각했다. 책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었다. 2017년 5월 24일 육군보통군사법원은 사적 공간에서 업무와 관련 없는 합의된 상대와 맺은 A대위의 동성 간 성관계에 대해 유죄를 선고했고, 이를 규탄하는 긴급 집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 참석한 <아픔이 길이 되려면>의 저자 김승섭 교수는 집회 참가자들을 향한 자신의 연설 말미에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혐오의 비가 쏟아지는데, 이 비를 멈추게 할 길이 지금은 보이지 않아요. 기득권의 한 사람으로서 미안합니다. 제가 공부를 하면서 또 신영복 선생님의 책을 읽으면서 작게라도 배운 게 있다면, 쏟아지는 비를 멈추게 할 수 없을 때는 함께 비를 맞아야 한다는 거였어요. 피하지 않고 함께 있을게요. 감사합니다."  (p.219)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의 아버지는 전쟁으로 인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앓았던 게 아닌가 싶다. 그때의 참혹했던 기억은 알코올 중독으로, 그리고 알코올성 치매로 이어지면서 당신을 괴롭혔을 테고, 벗어날 수 없는 불안과 공포는 가족에 대한 가혹한 폭력으로 변질되었던 게 아니었을까. 그러나 이를 책임져야 할 국가는 참으로 멀기만 했고 대상을 특정할 수 없는 아버지의 화와 분노는 오롯이 내 가족들에게 지워진 천형처럼 여겨졌었다.


"한국사회에는 그동안 여러 참사가 있었습니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사고,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1999년 씨랜드 화재 참사, 2003년 대구지하철 화재 참사, 그리고 2014년 세월호 참사까지요. 저는 세월호 생존 학생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기 전, 한국에서 발생했던 여러 참사들에서 살아남은 이들에 대한 기록을 찾아봤습니다. 그런데 놀라울 만큼 기록이라 할 만한 게 없었어요. 간혹 발견되는 신문기사 말고는 참사로부터 살아남은 이들이 감당해야 했던 시간에 대해 알 길이 없었습니다. 아픔이 기록되지 않았으니 대책이 있을 리도 없었겠지요."  (p.166)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6.25 전쟁에 참가했던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은데 왜 당신의 아버지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려야 했으며 그것도 아무런 죄가 없는 가족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질병을 노출시켰느냐고 말이다. 그러나 나로서도 알 길이 없다. 다만,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 전체가 아버지를 증오했으며, 돌아가신 지 10여 년이 흐른 지금도 가족들의 증오는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애써 애증의 그림자로 조금씩 변모하고 있음에 안도하고 있다고.


"질병의 사회적 원인은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분포되어 있지 않습니다. 더 약한 사람들이 더 위험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그래서 더 자주 아픕니다. 고용불안에 시달리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소득이 없는 노인이, 차별에 노출된 결혼이주여성과 성소수자가 더 일찍 죽습니다."  (p.7 '들어가며' 중에서)


추분도 지난 계절은 이제 제법 가을빛을 띠고 있다. 아버지의 기일 즈음에 읽었던 김승섭 교수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 어쩌면 그 책으로 인해 나는 우리 가족이 떠안아야만 했던 비극의 실체를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까이 있어야 할 국가는 너무나 멀리 있었고, 개인의 비극은 개인에게서 그치지 않고 가족 구성원 모두에게 무심한 상처와 그늘을 남기고 말았다. 아픔은 여전히 길이 되지 못한 채 갈팡질팡 혼돈의 세계에서 머무르고 있는 것이다. 기록하고 반성하지 않는 아픔은 그 아픔이 누군가에게 전가되고 확대될 뿐이라는 사실을 나는 이 가을에 책을 통하여 다시금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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