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명한 가을 하늘을 보니 문득(이라고 말하면 너무 가식적일 테고 아무튼) 소설이 쓰고 싶어 졌다. 소설을 써본 경험은커녕 짧디 짧은 리뷰 한 편도 쩔쩔매면서 갑자기 웬 소설? 하고 뜬금없어하는 사람들이 다수이겠지만 우리나라의 현실이 개판을 넘어 돼지판으로 흐르는 실정이다 보니 사람이 아닌 멧돼지를 주인공으로 삼아 우화를 한 편 써보는 것도 꽤나 재미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용산 시민공원을 어슬렁거리는 멧돼지의 눈에 비친 대한민국의 현실을 조금 과장되거나 부풀려서 혹은 약간의 상상력을 발휘하여 다른 멧돼지 무리를 등장시켜 풍자적으로 그려보는 것은 요즘처럼 웃을 일 없는 시기에 개인의 정신건강을 돌보는 차원에서라도 필요한 일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우화의 배경은 주로 용산 시민공원으로 하고 멧돼지 무리를 지휘하는 리더 멧돼지와 그의 아내 멧돼지 그리고 리더 멧돼지의 지시를 따르는 몇몇 멧핵관(일명 멧돼지 핵심 관계자)들을 등장시켜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을 동물의 차원에서 해석해보고자 함이다. 그렇다고 특정 정치인을 비난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말해야 하겠지만).


물론 내가 소설이나 우화를 쓸 깜냥이 되지 못한다는 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공모전에 출품할 것도 아니고, 판매를 위한 상업용 목적도 숫제 없으니 단순한 오락이나 도락의 차원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일인 듯싶은 것이다. 마감일자가 있어 빨리 쓰라고 들볶일 일도 없을 테고 말이다. 쓰고 싶을 때 쓰고 그만두고 싶으면 언제든 그만둘 수 있을 테니 못할 것도 없겠다 싶은 만용이 불끈 솟는 게 아닌가. <멧돼지의 일기>(물론 정해진 건 아니고 가제에 불과하지만)라는 제목으로 아주 천천히... 그에 필요한 소재는 어느 정치인이 무한정으로 제공할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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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루시 바턴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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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예컨대 말이나 글로, 혹은 행동이나 몸짓으로, 또는 악보나 그림으로, 또는 이제껏 아무도 꿈꾸지 못했던 자신만의 발명품으로, 우주의 비밀을 푸는 수식이나 이론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남긴다. 그리고 우리는 미처 다 읽지 못한 세상의 많은 이야기들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그 이야기에 자신의 이야기를 덧붙여간다. 그러고 보니 세상은 온통 이야기의 바다, 이야기의 천국인 셈이다. 나 역시 그동안 내가 읽었던 많은 이야기들을 회상하거나 어떤 의미였을까 해석하면서 특별하지 않은 나의 이야기를 덧붙여간다. 나의 삶이 시간의 수직선상에 나열된 작은 한 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비로소 나는 더없이 마음이 푸근해지고 저으기 안심하게 되는 것이다.


"책이 내 외로움을 덜어주었다. 이것이 내 말의 요점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나도 그런 사람들이 외로움에 사무치는 일이 없도록 글을 쓰겠다고!"  (p.34)

"외로움은 내가 맛본 인생의 첫맛이었고, 늘 그 자리에, 내 입안의 틈 속에 숨어 있다가 자신의 존재를 일깨워주었다."  (p.53)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을 읽고 잔잔한 감동을 느꼈다는 이들의 마음은 다들 나와 비슷한 삶의 방식 혹은 인생관을 가진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소설에서 루시는 소설을 쓴 작가인 동시에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히 들려준다. 1980년대 중반 소설의 화자인 루시는 간단한 맹장수술을 받고 원인도 알 수 없는 고열에 시달린다. 직장과 집안일로 바쁜 남편은 결국 자신의 장모인 루시의 엄마에게 SOS를 보냈고, 입원한 뒤 삼 주쯤 지났을 무렵, "안녕, 위즐." 하는 어릴 적 애칭과 함께 오랫동안 인연을 끊고 지냈던 엄마가 나타났다. 아무도 없는 일인용 병실에서 남편과 어린 아이들을 그리워하며 외로움과 씨름하던 루시. 엄마라는 존재는 파편화된 어린 시절의 기억을 하나하나 끼워 맞추어 주기 위한 소중한 사람이었다.


"아마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도 이렇듯 반쯤은 알게 반쯤은 모르게, 사실일 리 없는 기억의 방문을 받으면서 세상을 이런 식으로 어찌어찌 통과해나갈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공포라는 감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보도를 걸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이 어떤 마음인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삶은 아주 많은 부분이 추측으로 이루어진 듯하다."  (p.21~p.22)


루시에게 있어서 그녀의 어릴 적 기억은 따뜻하거나 아름다운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엄마는 고향 사람들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풀어놓는다. 그렇게 들먹여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매개로 루시 역시 자신의 기억들을 하나 둘 되살린다. 종조부의 차고에서 지내며 추위와 배고픔과 외로움에 떨던 날들, 부모님의 억압과 간헐적인 폭력이 이어지던 날들, 친구들과 이웃들로부터의 차별과 따돌림, 그녀에게 고향인 앰개시는 남들이 상상할 수 없는 고통과 무지의 기원이자 사회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외로운 섬과 같은 곳이었다. 남편과 결혼하여 그토록 동경하던 뉴욕에 정착하여 아이를 낳고 소설가가 된 지금까지의 여정이 결코 쉽지 않은 과정이었음에도 그녀의 엄마는 결혼도 하지 못한 채 늙어가고 있는 오빠와 다섯 아이의 엄마가 되어 생활고에 시달리는 언니에 비하면 루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다 이루었다고 믿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진정, 냉혹함은 나 자신을 붙잡고 놓지 않는 것에서, 그리고 이렇게 말하는 것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이게 나야, 나는 내가 견딜 수 없는 곳-일리노이 주 앰개시-에는 가지 않을 거고, 내가 원하지 않는 결혼생활은 하지 않을 거고, 나 자신을 움켜잡고 인생을 헤치며 앞으로, 눈먼 박쥐처럼 그렇게 계속 나아갈 거야!,라고. 이것이 그 냉혹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p.204~p.205)


루시는 옷가게에서 우연히 만났던 소설가 세라 페인의 워크숍에 참가한다 세라 페인은 '섬약한 연민에 기우는 스스로를 잡아 세우지 못하'는 작가, '무대에 능한 작가'라는 혹평을 듣기도 하지만 루시에게 세라는 '뉴욕이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 것일 뿐'이라며 세라에 대한 지지를 버리지 않는다. '작가의 일이란 인간의 조건에 대해 알려주는 것, 우리는 누구이고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고 우리는 어떤 행동을 하는지를 말해주는 것'이라고 했던 세라 페인에 대한 지지를.


“나는 우리가 아이였을 때 품게 되는 아픔에 대해, 그 아픔이 우리를 평생 따라다니며 너무 커서 울음조차 나오지 않는 그런 갈망을 남겨놓는다는 사실에 대해 내가 아주 잘 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것을 꼭 끌어안는다. 펄떡거리는 심장이 한 번씩 발작을 일으킬 때마다 끌어안는다. 이건 내 거야, 이건 내 거야, 이건 내 거야.”  (p.217)


이 소설에는 루시 곁을 스쳐갔던 많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그러나 그들과의 인연은 그리 길지 않았다. 우리의 삶은 어쩌면 가장무도회처럼 짧았던 수많은 인연들의 총합일지도 모른다. 얼굴을 달리하여 나타났던 수많은 천사들 덕분에 우리의 삶이 유지되는 것은 물론 마지막에 이르러 자신의 삶이 아름다웠노라고, 꽤 행복한 삶이었다고 고백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의 행복은 스스로의 노력이 아니라 스치듯 지나쳤던 수많은 사람들의 친절 덕분이었음을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독자들에게 잔잔히 말하고 있다. 소설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을 통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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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워서 하는 말이겠지만 '왜 거기까지 가서 이 사달이냐?'며 마치 그곳에 간 사람들이 문제라는 식의 말을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그렇게 말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나이가 많거나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울분이 치솟곤 했다. 대한민국의 거리에서 걷다가 황당하게 압사를 당했으면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국가나 지자체의 잘못이지 어떻게 길을 걷던 시민의 잘못일 수 있겠는가. 게다가 일 년 삼백육십오일 매일 있는 것도 아니고, 일 년에 딱 하루 있는 핼러윈데이를 혈기 왕성한 젊은이들이 그곳에 모여 자신의 에너지를 발산하려고 했던 것이 뭐 그리 잘못된 행동이며 모든 것을 잃은 그들을 비난할 빌미가 된단 말인가. 내가 가진 상식으로는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국가가 아닌 영리를 추구하는 회사에 있어서도 직원들이 출퇴근길에 사고를 당해도 법원은 직원의 안전을 책임지지 못한 회사의 책임을 묻는다. 하물며 시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세금을 걷어 대통령을 뽑고 공무원을 임용하는 국가가 자신들의 책임을 방기함으로써 이와 같은 참담한 사고가 발생했다면 마땅히 국가의 잘못을 따져야 할 일이지 어떻게 희생당한 시민의 책임을 묻는단 말인가. 그들의 논리로 따지자면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은 어디든 위험하니 모두 집 밖으로 나갈 생각은 말고 오직 집안에서만 머물러야 하지 않겠나. 그게 말이나 되나. 그렇게 자유를 강조하는 대통령의 의지에도 반하고 말이다. 코로나 발생 즉시 지역 전체를 봉쇄하는 중국의 모습과 뭐가 다른가. 이태원에 간 젊은이들이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모두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빨갱이란 말인가.


더욱 놀라운 것은 이번 사고의 책임을 져야 할 모든 사람들이 진심 어린 사과는커녕 책임을 회피하는 데만 골몰하고 있다는 점이다. 쏟아지는 책임 회피성 발언에 대한 외신과 우리 국민의 비난과 분노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모습이다. 심지어 총리라는 자는 외신과의 질의응답 시간에 수없이 반복되는 면피성 발언으로도 모자라 농담까지 섞어 물의를 빚고 말이다. 도대체 이 정부는 대한민국의 국격을 어디까지 떨어뜨릴 셈인가. 무능하여 국정을 책임질 자신이 없다면 자진하여 물러나는 게 그나마 국민들에게 속죄하는 그들의 마지막 남은 양심이리라. 그러나 이런 엄청난 사고가 터졌음에도 그들은 하위직 공무원 몇몇에게만 책임을 물을 게 뻔한 일, 그들에게 일말의 양심을 기대한다는 건 죽은 나무에서 꽃이 피는 걸 기대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 될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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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22-11-02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사에 분노하는 분이 있어 찾았습니다. 이번의 참사는 국민들이 분노해야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곳에 가지 않는다면 대체 누가갑니까, 라고 되묻고 싶습니다. 그들에게는 잘못이 없습니다. 책임자들에게 향해야할 비난이 어찌 희생자들을 향한단 말입니까. 정말 실망입니다 그런분들.

차트랑 2022-11-02 12: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헌법 34조 6항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국민을 보호하기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이번 참사는 방치의 결과입니다.

꼼쥐 2022-11-06 14:05   좋아요 0 | URL
참사의 책임은 전적으로 국가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국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책임져야 할 국가가 그 의무를 방기한 탓이지요. 국민들은 그것에 대하여 당연히 분노해야 하고 정치권에서는 그 책임을 물어야 하겠지요.
 

새벽 어둠은 깊었습니다. 이렇게 점점 깊어지는 밤의 어둠은 성탄 무렵까지 내처 이어질 것입니다. 푸르스름한 안개가 더해진 오늘 아침의 어둠은 내 허리께로 차오릅니다. 오늘따라 무겁기만 한 내 발길은 산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허방을 짚듯 어둠 속으로 푹푹 빠져듭니다. 그리고 발바닥엔 무거운 어둠이 한 움큼씩 묻어납니다. 냉정한 어둠은 도시의 소음을 내 쪽으로 슬쩍 밀어냅니다. 아침 운행을 준비하는 덤프트럭의 엔진 소음과 멀리서 들리는 비행기 소리. 하늘을 가르는 비행기 소음은 어릴 적 듣던 맷돌 소리를 닮았습니다.


어둠 사이로 깊은 슬픔 한 줄기 뻗어갑니다. 이태원에서 있었던 젊은 영혼들의 비명과 아우성. 대학생 아들을 둔 사람으로서 생때같은 자식을 잃은 부모의 비통함이 고스란히 전해옵니다. 나는 그렇게 아무도 없는 등산로 허공의 어둠 속으로 눈물 한 방울 흘려보냈습니다. 생과 사의 갈림길은 너무나 가깝고 넘나듦의 시간도 한순간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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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한 현상은 현 정부가 집권하면서부터 주변 사람들의 대화 주제가 정치나 경제로 옮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음악, 영화, 체육 등 다양한 분야의 소재가 일상의 대화 주제로 떠오르고, 그런 일상이 과거에서 현재 그리고 앞으로의 미래로 끊이지 않고 연결될 것이라는 믿음이 대한민국의 국민 누구에게나 있었다. 그러나 현 정부의 집권 초기부터 국민들의 대화는 주로 대통령의 무능과 경제 위기, 북한과의 전쟁 가능성 등 무겁고 암울한 주제로 국한되었다.


직장에서나 여가 시간에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대개 나보다 나이가 어린, 꽤나 젊은 나이의 사람들이고, 증명할 수는 없지만 그들 중 상당수는 지난 대선에서 현재의 대통령에게 표를 준 사람들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그들은 현 대통령에 대하여 '역대 가장 무능한 대통령'이라는 평과 함께 '지금 대통령으로 5년을 간다는 것은 자해 행위'라며 공공연히 '탄핵'을 주장하곤 한다. 그러다 보니 만나는 사람들 중 7, 80%는 대통령에 대한 반감이 뚜렷하다. 이따금 70대 이상의 노인을 만나면 그들 중 상당수가 현 대통령을 지지하고 있을 뿐 다른 연령대의 국민 대다수가 정부 여당과 대통령에 대해 강한 반감을 표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꼽자면 다양하겠지만 대표적인 것은 지속되고 있는 무역 적자와 그로 인한 고환율, 고물가에 대한 아무런 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북한과의 강한 적대 정책으로 인하여 대내외적인 불안감을 조성하고 한반도에서의 전쟁 가능성이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국가의 존망을 흔드는 이와 같은 불안 요인을 뒤로한 채 대통령은 그저 전 정권 탓이나 하고, 정적을 제거하는 데만 열을 올리고 있을 뿐 국가의 미래 비전을 제시하고 국민들의 불안 심리를 잠재워 생활 여건을 개선하려는 의지는 눈곱만큼도 찾아보기 어렵다고 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은다. 그러다 보니 내년 초에 IMF 경제 위기가 재발할 것이라는 둥 대통령 임기 내에 북한과의 전쟁 가능성이 50%가 넘는다는 둥 그 어느 때보다 불안 심리가 높은 게 현실이다. 게다가 오르는 대출이자와 물가에 비해 임금은 오르지 않고 있으니...


'역대 최악의 대통령'이라고는 하지만 젊은 사람들이 겪어 본 대통령이 몇 명 되지 않으니 기껏해야 박근혜나 이명박보다도 못하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인 즉, "무식하면 밑에 사람 말이라도 잘 듣던가 고집만 세니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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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29 17: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1-02 07:4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