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에 젖는다는 건 움푹 팬 시간의 분지를 하염없이 걷는 일이다. 그곳에선 가까운 과거와 먼 과거가 뒤섞이고, 내 것도 아닌, 누구의 것었는지도 모르는, 때로는 출처도 주인도 알 수 없는 낯선 경험들이 오가기도 한다. 눈물과 땀의 시내가 졸졸 소리를 내어 흐르고, 왁자한 웃음과 작게 속삭이는 사랑의 밀어들이 꽃처럼 피어나는 곳. 삶이란 끝없이 고도를 높여 시간의 정점을 향해 꾸역꾸역 나아가는 것. 그렇게 조금씩 나를 잃고 종국에는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것. 그리고 시간의 분지를 정처없이 떠도는 것.


오늘처럼 흐리고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날엔 상념의 나락으로 끝없이 추락하게 된다. 미국의 시인 메리 올리버가 쓴 <완벽한 날들>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밤중에 잠이 깨어 빗소리를 들었다. 당분간은 잠을 이루지 못할 것이기에 침대에 누워 온 마음으로 빗소리에 귀 기울였다. 왜냐하면 - 우리에게 비가 내리는 건 중요한 일이 아닐까? 우리의 창조성으로 이루어진 극장 전체에서, 그 다섯 대륙을 통틀어서, 이 야생 세계의 장치만큼 경이로운 게 있을까? 하늘에서 떨어지는 물! 밀과 백합이 자라거나 자라지 못하는 건 비에 달려 있다. 그 해에 비가 넉넉히 내리면 가을에 나무들은 고운 단풍 빛깔로 우리를 눈멀게 한다. 비의 양에 따라 연못도 신선해지거나 물이 말라 늪지로, 심지어 사막으로 변하거나 한다. 나는 마음 깊이, 그러면서도 즐겁게 귀 기울였다. 비는 찾아오는 장소에 따라 다른 목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p.132)


누군가 자신이 듣고 있는 빗소리를 마음에 아로새긴 하나의 문장으로, 혹은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로 내게 들려주면 좋겠다. 자동차 전조등의 점멸하는 불빛이 빗속에서 수채화처럼 번진다. 어두운 하늘, 어두운 땅, 그리고 어두운 마음... 오늘의 비는 자신의 자리를 미처 내주지 못한 태만한 가을의 조급함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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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미와 이저벨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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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작품을 좋아하는 독자들은 아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녀가 쓴 소설 제목은 유난히 사람의 이름이 많다는 것을.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을 비롯하여 <에이미와 이저벨>, <올리브 키터리지>, <버지스 형제>, <다시 올리브>, 최근에 출간된 <오, 윌리엄>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많지 않은(?) 소설 작품 중에서 이름이 안 들어간 작품을 찾는 게 오히려 빠를 듯하다. 여기에는 소설가로서 작가의 집요함과 꾸준한 인내심이 이와 같은 멋진 작품들을 완성하는 데 한몫을 했다고 나는 믿고 있다. 한 인물에 대한 집요한 추적과 분석이야말로 소설가가 갖추어야 할 필수 덕목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어떤 인물이 갖고 있는 개별적인 특성뿐만 아니라 그것을 바탕으로 인류 전체가 지닌 보편적인 특성을 발견하는 것이야말로 위대한 물리학자가 각각의 현상을 통해 우주 전체를 통괄하는 보편적 원리를 발견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을 한 작품이라도 읽어 본 독자라면 작가가 창조한 한 인물에 대한 세밀하고도 친절한 기술이 인간에 대한 작가의 깊은 애정에서 비롯된다는 걸 은연중에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한 인물이 갖고 있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같은 분량으로 끈기 있게 기술한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나와 같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인물의 부정적인 측면을 그렇게 깊이, 객관적으로 바라보지도 않으며 설사 그것을 발견하고 관찰하였다 할지라도 그것에 대한 묘사나 서술을 서둘러 그만두려는 경향이 있다. 자신이 보고 관찰한 것들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데는 많은 노력과 인내심이 필요하다.


"하지만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계속 나아갈 뿐이다. 사람들은 계속 나아간다. 수천 년 동안 그래왔다. 누군가 친절을 보이면 그것을 받아들여 깊숙이 스며들게 하고, 그러고도 남은 어둠의 골짜기는 혼자 간직하고 나아가며, 시간이 흐르면 그것도 언젠가 견딜 만해진다는 것을 안다. 도티, 베브, 이저벨 모두 저마다의 방식으로 이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에이미는 어렸다. 무엇을 참을 수 있는지 혹은 참을 수 없는지 아직 몰랐고, 이 자리에 있는 세 엄마에게 아이처럼 말없이 매달려 있었다."  (p.508)


나는 사실 <내 이름은 루시 바턴>을 통하여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라는 훌륭한 작가를 남들보다 아주 늦게 알게 되었고, 이번에 읽은 <에이미와 이저벨>이 그녀의 여러 작품 중 내가 읽은 두 번째 작품이지만,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통해 인간에 대한 사랑을 적절히 표현하는 방법은 삶의 고비에서 겪는 개개인의 순간순간을 친밀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그것을 가감 없이 기록하는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소설을 번역했던 정연희 번역가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 소설을 번역하면서 나는 인간이 인간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는 아름다운 방법 하나는 그런 순간들의 이면을, 그 순간들을 '건너가는' 사람들의 숨은 마음을 친밀하고 세심히 바라보는 일일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바라봄은 이해를 낳고, 이해는 우리를 성장시킨다. 그리고 성장은 인간을 인간으로서 사랑하게 만든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은 그런 바라봄을 안내하는 데 탁월하다."  (p.543 '옮긴이의 말' 중에서)


우리는 저마다의 방식으로 삶을 설계하고 관계를 맺는다. 그것은 엄마와 딸의 관계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두 사람이 사랑하는 방식도, 서로에게 원하거나 기대하는 바도, 상대방을 위해 어떤 생각을 하며 어떻게 행동할지를 결정하는 것도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사랑과 증오가 공존하는 엄마와 딸 사이의 섬세하게 다루면서, 유난히 더웠던 셜리폴스의 여름 한 계절을 다루는 <에이미와 이저벨>. 수줍고 소심한 성격의 에이미 굿로는 올해 열여섯 살의 소녀이다. 점심시간에 몰래 담배를 같이 피우는 스테이시를 제외하면 친한 친구도 없다.  교사가 되길 원하는 엄마 에이절의 생각과는 다르게 에이미가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시(詩)이다. 지난겨울, 수학교사인 데이블 선생이 사고를 당한 후 학교에는 토머스 로버트슨 선생이 임시교사로 왔다. 시를 좋아하는 로버트슨 선생을 은근히 좋아하게 된 에이미는 방과 후 학교에 남아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그저 행복하다. 그러던 어느 날 로버트슨이 자신의 차로 에이미를 집에 바래다주면서 에이미에게도 새로운 변화가 찾아온다. 여름방학이 되면서 에이미는 이저벨이 일하는 사무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다. 자궁절제 수술을 받은 도티 브라운의 일을 대신하는 것인데 직장 상사인 에이버리 클라크의 제안으로 성사된 것이었다. 어느 날, 에이버리는 차 안에서 부적절한 행동을 하고 있는 중년의 남자와 소녀를 보게 되는데... 에이버리는 자기가 목격한 것을 이저벨에게 전하고, 이저벨은 이에 충격을 받고 분노한다.


"앞으로 살아가면서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과 보낸 마지막 순간을 기억하듯 이날을 기억할 것이다. 이저벨의 은밀하고 깊숙한 기억 속에는 이날이 그녀가 에이미를 '가진' 마지막 날처럼 느껴질 테니까. 그녀의 기억 속에 나뭇잎들은 항상 금빛이고, 고속도로에는 아침 햇살로 샤워하고 가을 날씨로 빳빳해진 금빛 나뭇잎들이 늘어서 있을 것이다."  (p.53)


끝날 것 같지 않았던 그해 셜리폴스의 무더웠던 여름은 마치 에이미와 이저벨의 끝나지 않을 듯한 갈등처럼 길기만 했다. 세상을 등지고 셜리폴스로 숨어들었던 이저벨과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스스로 또래 친구들과 담을 쌓고 지내는 에이미. 세상에 오직 두 사람뿐인 줄 알았던 그들은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면서 외부와의 관계를 넓혀간다. 작가인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에이미와 이저벨의 성장 과정을 애정 어린 눈으로 조용히 지켜보고 있다.


"이저벨에게는 사연이 있었다. 오래전 타운에 옮겨와 22번 도로에서 가까운 크레인 씨의 낡은 주택을 빌린 뒤 많지 않은 살림살이를 풀고 젖먹이 딸아이(옅은 금발의 곱슬머리에 진지한 표정을 한 아기)와 함께 정착했을 때, 그녀는 회중교회 신자들 사이에 그리고 그녀가 일하게 된 공장 사무실에 근무하는 여자들 사이에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젊은 이저벨 굿로는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았다. 남편도 부모도 모두 죽었고, 벌이가 더 나을까 해서 강을 따라 셜리폴스까지 내려왔다고 말할 뿐이었다."  (P.23)


유난히 길고 가물었던 올해 가을도 이제 그 끝을 향해 치닫고 있다. 다음 주면 다사다난했던 2022년도 딱 한 달을 남겨두게 된다. 먼 훗날 언젠가 2022년을 되돌아보면 가장 먼저 우리는 '10.29 참사'를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았던 푸르렀던 젊음이 어느 날 뚝 멈춰 서야만 했던 그날의 참사. 대중을 향해, 무능했던 정부를 향해 오열했던 유가족들. 삶은 그토록 쉽게 멈춰질 수 있음을 기억하며 내가 사랑하는 이들의 하루하루를 지켜보려 한다. 대학생인 아들은 내년이면 군복을 입고 나타날 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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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말, 말, 말...


그해 구설수를 조심하라는 천공(千空) 스승의 말은 결과적으로 옳았다. 얼떨결에 리더 멧돼지로 당선된 나는 한동안 그 기쁨을 주체할 수 없었고, 하루하루가, 어쩌면 매 시간이 온통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온종일 술만 마셔도 취하지 않을 듯했고, 서너 끼를 굶어도 배가 고프거나 허기가 지지 않을 듯했다. 세상이 온통 무지개 빛으로 반짝이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들뜬 기분으로 해외 나들이를 갔던 나는 눈에 뵈는 게 없었다. 지구상에서 가장 강한 멧돼지라는 '날리면'(혹은 바이든) 멧돼지와 만나 인사를 나눈 직후 곁에 있던 똘마니 멧돼지에게 "국회 이 xx들이 승인 안 해주면 바이든이 쪽팔려서 어떡하나?" 하고 농담 삼아 했던 말이 화근이었다. 선천적으로 목소리가 큰 내가 딴에는 소리를 줄여서 한다고 했는데 주변에 있던 다른 멧돼지들의 귀에 선명하게 전달되었을 뿐 아니라 그 말이 온 나라에 토시 하나 바뀌지 않은 채 고스란히 퍼지고 말았다. 창피도 그런 창피가 없었다. 나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며 진상조사 카드를 꺼내 어깃장을 놓았으나 나의 말을 믿어주는 멧돼지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얼마 전에는 '크라우드 매니지먼트'라는 말을 썼다가 아내 멧돼지로부터 눈물이 쏙 빠지도록 혼쭐이 났다. 흉내도 낼 줄 모르는 내가 괜히 겉멋만 들어서 '날리면' 멧돼지의 말을 따라 했다는 것이 아내 멧돼지가 나를 혼낸 이유였다. 리더 멧돼지로서 가오가 서려면 세계 최강이라는 '날리면' 멧돼지를 모델로 삼아 그대로 따라 하는 게 다른 멧돼지들로부터 존경과 우러름을 받을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판단했던 게 오판이었다. 나는 아내 멧돼지 앞에서 인간들처럼 두 발로 선 채, 땀을 비 오듯 흘리며 한 시간 동안 부동자세(부동시는 아니고)로 서 있어야만 했었다. 그 바람에 나는 여왕 멧돼지의 상가에 늦게 도착하였고, 남들은 다 하는 조문도 결국 거르고야 말았다.


이런 나를 두고 북쪽의 여정 멧돼지는 '천치 바보'라며 막말을 쏟아내기도 했다. 들어 보니 맞는 말이긴 한데 기분이 썩 좋은 것은 아니었다. 사실 나는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문학작품을 즐겨 읽지는 않았다. 어렸을 때는 부친 멧돼지의 지시에 따라 교과서와 참고서, 문제집 등을 읽었을 뿐 다른 책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대학에 입학한 후에는 한동안 술과 유흥에 빠져 살았다. 그렇게 십수 년을 허비하는 동안 부친 멧돼지로부터 몇 차례의 엄한 꾸지람이 있었고 나는 어쩔 수 없이 법전을 읽게 되었다. 부친 멧돼지의 도움 덕분에 나는 뒷골목 세계에 입문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교과서와 법전만 읽었던 놈이 정치라는 생판 모르는 분야에 발을 들여놓은 것 자체가 실수였는지도 모른다. 정치는 타인에 대한 공감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공감에 대해 전혀 배운 바가 없는 나로서는 정치판의 모든 게 맘에 들지 않았다. 선거 과정에서 나와 경쟁했던 놈과 그 패거리들이라도 실컷 두들겨주어야만 직성이 풀릴 듯했다. 리더로서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간언도 있었지만 나는 다 무시해버렸다.


평생을 뒷골목 세계에서 보냈던 나로서는 그곳의 언어와 말버릇을 털어내는 게 무척이나 힘들고 어렵기만 하다. 지금은 그곳의 언어도 많이 순화되었다고는 하지만 과거에는 주로 욕설과 음담패설이 대화의 80~90%를 차지했었다. 그와 같은 모습은 거칠 것이 없는 그곳 세계의 힘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내가 이렇게 말하고 싶다는데 누가 제지할 수 있겠는가' 하는 일종의 힘의 과시가 그들로 하여금 지나친 욕설과 음담패설을 부추기는 경향이 있었다. 그렇게 살아왔던 내가 "그랬어요? 안 그랬어요?" 하는 존댓말은 여간 낯간지러운 게 아니다. 지금도 나는 그 시절이 가끔 그립다.


* 경고 : 이 글은 단지 허구에 의한 소설일 뿐 특정 사실이 아님을 엄중히 고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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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6 16: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1-28 16: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게으름 예찬 - 숨 가쁜 세상을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품격 있는 휴식법
로버트 디세이 지음, 오숙은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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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이제 퇴직 이후의 삶을 준비할 시기가 되었다. 몇몇 친구들은 이미 명예퇴직을 했거나 준비 중에 있는 것으로 안다. 이제 다들 그럴 나이가 된 것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며 남은 삶을 살아갈지 구체적으로 세세하게 계획하고 준비한 친구는 많지 않은 듯 보인다. 많지 않은 게 아니라 거의 찾아보기 힘든 게 사실이다. '어떻게 되겠지.' 하는 막연함이 지금 내 나이대에 있는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인 듯하다. 일에 묻혀 살면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내던 과거에는 마음껏 여행을 하고 싶다거나, 골프나 등산 등 누리지 못했던 여가 생활을 원 없이 누려보고 싶다거나, 아무도 없는 산골에 터를 잡고서 유유자적 한가한 삶을 살아보고 싶다거나 하는 등 하고 싶은 일도, 바라는 것도 참 많았지만 막상 내 나이가 되고 보니 원하던 삶을 살아보겠다는 생각보다는 걱정이 앞서는 게 사실이다. 눈앞에 펼쳐질 무한대의 시간을 도대체 뭘 하면서 채워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귀농을 했던 몇몇 친구들은 1년도 되지 않아 도시로 복귀를 했고, 허구한 날 골프를 치던 친구도 이제는 그마저도 지겨웠는지 집 밖 출입이 뜸해졌고, 장사를 시작했던 친구들도 수월찮은 돈만 까먹고 폐업 절차에 접어들었으니 어느 것 하나 마음 놓고 선택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일과 여가의 적절한 균형을 유지한 채 노후를 설계하겠다는 젊어서의 꿈은 한낱 꿈으로 그칠 공산이 커진 셈이다. 무작정 일만 쫓으면서 살았던 우리는 그 세월 동안 점차 노는 법을 까먹으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노는 법을 까맣게 잊은 우리가 정작 노는 시간이 눈앞에 놓이자 허둥지둥 당황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내가 지금 이해하기로 여가란, 결코 물리적 이익을 바라지 않고 (설사 그것이 결국엔 우리는 물론 타인에게 실질적 도움이 된다고 해도) 순전히 그 즐거움을 위해서 자유로이 선택한 것, 빈둥거리고, 깃들이고, 단장하고, 취미 활동을 하는 등 광범위한 영역을 두루 아우를 때 쓰는 단어다. 여가를 누릴 때에는 가치보다는 기교가 훨씬 중요하다. 현명하게 선택한 여가는 아무리 짧은 삶에도 깊이를 준다."  (p.29 '들어가는 말' 중에서)


오스트레일리아의 문학가 로버트 디세이가 쓴 <게으름 예찬>은 게으름에 대한 우리의 부정적인 시각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돌려놓는다. 우리가 자신의 삶 속에서 즐겁게 뛰노는 법을 배움으로써 한가로이 삶을 즐기는 과정에서 자신을 인식하고 삶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바쁘다는 것은 결국 일에 매몰되어 자신의 존재를 잊고 살아가는 것이기에 타인과의 관계와 삶의 의미, 왜 사는가와 같은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깊은 성찰을 유도하지 못한다.


"노는 것은 당신 시간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알고 있었고, 키케로와 세네카는 그것으로 열변을 토했고, 중국부터 유럽의 가장 끄트머리에 이르기까지 철학자들은 그 통찰을 이야기했다. 특정 장소에서 특정 기간 동안 특정의 규칙을 관찰하면서, 당신은 당신의 시간이 주는 즐거움을 위해 어떻게 시간을 쓸지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다. 노는 것에 그 이상의 목표는 없다. 몇백 년 동안 지배계급이 성직자들과 군대와 함께, 노동은 신성하다고 주장해왔던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p.274)


저자는 '일해야 할 의무가 대체 무엇이 "성스럽다"는 말이냐'며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러한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저자는 고전문학 작품인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게으른 자를 위한 변명』, 요시다 겐코의 『쓰레즈레구사』, 시트콤 <핍 쇼>와 다큐멘터리 <스시 장인: 지로의 꿈> 그리고 영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등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불러온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진정한 휴식'이 무엇인지 희미하게 인식할 수 있다.


"이런 세계를 상상할 수는 없을까? 거의 모든 사람이 일주일에 사나흘 정도 신체에 무리 없이 창의적으로 일하고, 휴가는 길어서 매년 수백, 심지어 수천 시간을 빈둥거리고 깃들이고 마음껏 놀며, 근사하게 비옥한 여가를 마음껏 즐기는 세계 말이다."  (p.282)


멀리 중동의 사막에서는 월드컵 열기가 뜨겁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월드컵 참가국의 국민들은 자국 선수들의 선전을 기대하며 밤잠을 잊은 채 텔레비전 중계를 시청한다. 또는 그 각본 없는 드라마에 울고 웃고 탄식하며 정신없이 빠져드는 것이다. 놀이는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언제 이만큼 시간이 흘렀는지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 것, 그렇게 지인들과 웃고 떠들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뒤에 찾아오는 나른한 피로감에 까무룩 잠이 드는 것, 내일 아침 만나는 사람들과 어제 있었던 일을 주고받으며 하루의 일과를 무리 없이 해치우는 것. 우리의 삶이 죽음 직전까지 그렇게 활기찬 하루하루로 채워질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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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의 충복들


리더 멧돼지가 되고 보니 다 좋은데 하나 아쉬운 건 마음 편하게 술을 마실 수 없다는 점이었다. 똘마니들을 데리고 뒷골목 생활을 하던 시절에는 어느 누구의 시선도 의식하지 않고 무시로 술을 마실 수 있었는데 리더 멧돼지가 되자 나의 신변을 보호하는 경호 멧돼지며 비서 멧돼지 등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동행하는 멧돼지가 어찌나 많은지 매번 떼를 지어 이동하는 통에 그들의 눈을 피해 예전의 똘마니들과 호젓하게 술을 마신다는 건 꿈같은 일이 되고 말았다. 게다가 나는 한 번 마시기 시작하면 끝을 보는 성격인데 꽐라가 된 내 모습이 소문을 타고 일반 멧돼지들에게 알려지는 바람에 아내 멧돼지로부터 호되게 꾸지람을 받았고, 나는 그 일이 있은 후 극도로 조심하게 되었다. 사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바로 아내 멧돼지였기 때문이다. 결혼 전, 그러니까 내가 술과 여자에 빠져 살면서 내일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처럼 행동하던 시절, 종종 나의 술시중을 들었던 아내 멧돼지는 자신의 집안에 가득 쟁여 둔 곡식과 고기 등 다른 멧돼지들이 탐낼 만한 풍족한 재산을 보여주며 자신과의 결혼을 생각해보라며 넌지시 유혹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아내 멧돼지의 생각은 변함이 없는 듯했다. 자신과 친인척들에게는 없는 권력, 그것이 나를 유혹했던 유일한 이유였고 지금도 아내 멧돼지는 내가 소유한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를 수만 있다면 내가 어떤 짓을 하든 일절 관여하지 않겠다는 입장이었다. 심지어 내가 다른 여자 멧돼지와 관계를 맺든, 싸움질을 하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다만 관계를 맺기 전 그에 합당한 돈을 지불하여 소문만 나지 않게 해 달라는 게 유일한 조건이었다. 그런 쿨한 태도가 맘에 들었던 나는 아내 멧돼지의 천박한 품행에 대한 여러 소문을 무시한 채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다.


이렇게 나의 첫 번째 충복이 된 아내 멧돼지보다 더 오랫동안 알고 지낸 멧돼지가 두 마리나 더 있다. 멧돼지계에서는 같은 배에서 출산하는 멧돼지 숫자가 워낙 많고 흔하다 보니 쌍둥이라는 개념은 없다. 대신에 하는 짓이나 생각 등이 비슷한 두 멧돼지를 일러 '동운(同韻)'이라고 하는데, 뒷골목 생활을 하던 시절 나의 똘마니 중 한 마리였던, 그러나 다른 멧돼지들보다 영민하고 나의 말을 잘 들었던, 그럼에도 이름조차 없었던 멧돼지에게 나는 '동운(同韻)'이라는 이름을 하사했고, 그는 나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결혼 후 아내 멧돼지 역시 작은 분란만 있어도 '동운' 멧돼지에게 그 사실을 알려 해결을 부탁하곤 했으며, 그럴 때마다 '동운' 멧돼지는 만사를 제쳐둔 채 전력을 다해 아내 멧돼지를 도와주곤 하였다.


'상민(常民)' 멧돼지는 '동운' 멧돼지에 비하면 성격도 하는 짓도 판이하게 달랐다. 그도 역시 나의 똘마니 멧돼지들 중 일원이었으며 이름이 없었던 건 '동운' 멧돼지와 같았다. 어느 날 여러 멧돼지들과 거나하게 취해 있을 때 '상민' 멧돼지가 헐레벌떡 술판으로 뛰어들었고, 그의 계급이 상민(常民)이었던 까닭에 "어이, 상민(常民) 왔는가?" 하고 반갑게 물었던 것이 인연이 돼서 '상민' 멧돼지로 불리게 되었다. 그는 행동은 좀 굼뜨지만 나에 대한 충성심은 대단해서 나는 사실 그가 웬만한 실수를 저질러도 모르는 척 눈감아주는 편이었다. 얼마 전에도 젊은 멧돼지들이 좁은 골목에서 서로 먼저 가겠다고 우격다짐으로 서로 밀치는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와 부상자가 나왔고, 이에 분개한 전국의 멧돼지들이 치안과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상민 멧돼지의 책임을 물어 경질해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어깨를 두드려주며 그의 노고를 격려했었다. 멧돼지들이란 그저 잠시 동안 눈물을 보이는 척하고 아랫것들을 적당히 벌을 주는 시늉만 해도 그들의 분노는 쉽게 사그라들 수 있다는 걸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에게도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충성을 다하는 '동운' 멧돼지와 '상민' 멧돼지가 있고, 몇몇 멧핵관들이 존재하지만 나의 퇴진을 주장하는 멧돼지들의 행진이 주말마다 이어지고 있고, 소위 학자 멧돼지들도 나의 리더십에 반기를 드는 추세가 뚜렷하다.  이런 추세가 이어진다면 조만간 전투 멧돼지를 동원하여 무섭게 겁을 주어야만 사그라들 듯하다. 리더 멧돼지가 되면 마음껏 술이나 퍼먹고 원하는 여자 멧돼지를 언제든 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골치 아픈 일들이 끝없이 이어질 줄이야...


* 경고 : 이 글은 단지 허구에 의한 소설일 뿐 특정 사실이 아님을 엄중히 고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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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20 19: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1-23 17:2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