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이바람을 막을수 있을까
아름다운세상 편집부 엮음 / 아름다운세상 / 1992년 12월
평점 :
절판


추적추적 봄비가 내린다. 

괜스레 상념에 젖게되는 그런 오후. 

오래 전부터 미뤄왔던 서재를 정리했다. 

나의 시선을 머물게 했던 빛바랜 시집 한 권.





 

 

 

 

 

 

 

 

 

 

대학 시절 대학로의 어느 곳에서 내게 전해 주었던 그녀의 시집. 

지금은 오래되어 누렇게 변색된 책장이 내 기억 만큼이나 희미하다. 

그녀의 시를 옮겨 적으며 나는 시간이 멈춘 추억의 저편을 더듬었다. 

 

사랑이야 

네 눈빛은 그냥 그렇게 나에게로 오고 

내 눈빛은 그냥 그렇게 너에게로 가서 

우리 둘이 가운데서 그저 만나는 거다 

 

오다가 돌부리에 채이고 바람에 흔들릴 수 있겠지만 

상처 닦아 줄 넉넉한 마음 뒷짐지고 따라오다 

눈물 흘린 그 자리 닦아 널 앉히고 

기다리는 너에게로 마침내 도착하여 

우리 둘이 가운데서 그저 만나는 거다 

 

가다가 어두운 밤 강 건너며 서러울 때 있겠지만 

가슴속 눈물 꺼내 말갛게 씻은 빨래로 널어 놓고 

젖은 옷 말리며 기다리고 있는 너와 

조용한 웃음으로 만나는 것 

우리 둘이 가운데서 그저 만나는 것 

 

아, 다만 그렇게 만나는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 다시 태어난다면 

사랑을 담아내는 편지처럼 살리라 

 

폭포수 같은 서린 그리움에 

쉬이 얼룩져 버리는 백색의 편지지가 아니라 

오염될수록 싱그런 연두빛이었으면 좋겠다 

 

나 다시 태어난다면 

사랑을 담아내는 편지처럼 살리라 

 

가슴에 커져버린 암울한 상처에 

마침표를 찍어버리는 이별의 편지가 아니라 

상흔속에서도 뿜어내는 

시작의 편지였으면 좋겠다 

 

미움은 온유함으로 지워버리고 

집착은 넉넉함으로 포용하면서, 

한장에는 사랑이란  순결한 이름을 새기고 

 

또 한장에는 

삶이란 소중한 이름을 써 넣으면서 

풀향보다 은은한 내음으로 

내 삶을 채웠으면 좋겠다. 

 

-----좋은생각 중에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넝마주이 수녀, 엠마뉘엘
엠마뉘엘 수녀 지음, 이정순 옮김 / 두레 / 200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사람의 인생은 어떤 기준으로 평해야 할까?

이 책을 읽은 지 만 하루가 지나도록 리뷰를 쓰지 못하고 있다. 

지금까지 내가 꿈꾸던 삶과 비교할 때, 수녀님의 인생은 그 반대편에 있는 것이다.

자글자글 주름잡힌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짓고있는 수녀님의 사진은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수녀님은 1971년 예순두 살의 나이로 교사직을 그만두고, 이듬해에 이집트 카이로의 빈민가에 들어가 넝마주이들과 함께 23년간을 살았다.

넝마주이들이 모여사는 극빈촌. 여성에 대한 차별과 범죄가 들끓는 그곳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차라리 '모험'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곳에서 마주한 가난은 그녀를 바닷물의 소용돌이처럼 빨아들였다.

염소 우리도 마다 않고, 장날이면 시장에 가기 위해 수레 한 차에 무려 30여명이 빽빽하게 실려가는 것도 기쁨으로 여겼다.  벼룩이나 구더기도 친구로 맞이했고, 도무지 찾을 수 없는 유치원과 교육시설을 짓기 위해 전세계를 돌며 기부금을 호소했다.

수녀님이 그곳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아이들의 교육이었다.  아이들은 글자를 배울 수도, 자연을 접할 수도, 자신들의 충동을 억제하여 자살을 막을 수 있는 방법도 알지 못했다.  그녀는 이런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동물원과 나일강에 데리고 가고, 자연에 나가 그때까지 '꽃 한 송이 꺾어 본 적이 없는' 아이들에게 꽃을 구경시켜 주었다.  캠프를 열어 아이들에게 깨끗하게 바뀐 자신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이 아이들에게는 새로운 세상을 만나는 기회였고, 새로운 세상을 꿈꿀 수 있는 자극제였다.  수녀님은 그들에게 희망의 씨앗을 심어주었던 것이다.

비록 가난하고 헐벗었지만 자신보다 못한 사람들에게 나눔을 베풀 줄 알고, 가족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고자 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수녀님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마음은 수수께끼다.  풍족한 사람들은 더 많은 것을 갖고자 잠을 잊을 지경이지만, 반면 아무 것도 없는 빈털터리, 즉 구두수선공들과 넝마주이들은 자기 사는 곳에 만족해 하고 노래까지 부른다."

성별과, 나이와, 학력과, 심지어 종교에 있어서도 차별을 두지 않았던 수녀님은 황폐한 빈민촌에 함께 살면서 학교를 세우고,협동조합과 무료진료소를 만들어 그곳의 삶을 바꿔 놓았다.

그녀는 '왜 카이로의 넝마주이가 부유한 자보다 만족도가 높은지'를 되묻는다.

행복은 가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난한 정신'에서 오는 것이라는 수녀님의 말씀은 23년간의 그녀의 삶을 담담히 기록한 이 책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한 사람의 삶은 그의 전 인생에 있어 1/3만 남을 위해 살아도 그는 행복한 삶을 산 것이다.  어쩌면 그보다 훨씬 적을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글은 나의 이야기일 수도, 또는 글을 읽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나의 탓으로, 또는 남의 탓으로, 또는 원인을 찾기 어려운 불가항력으로 어려움에 직면하곤 한다.  그 어려움이 경중에 차이는 있을지언정, 어려움을 겪는 당사자에게는 하나의 어려움일 뿐이지 그 무게의 차이가 중요하지 않을 때가 많다.

일단 우리가 어려움에 처하면, 시간의 경과에 따라 반응하는 행동양상도 변한다.

그것은 어쩌면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과 비슷할지 모르겠다.

퀴블러 로스가 말한 죽음의 5단계에 의하면 부정(Denial), 분노(Anger), 타협(Bargaining), 우울(Depression), 수용(Acceptamce)의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어려움에 직면하였을 때, 나의 경험으로는 이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음을 느끼곤 한다.

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럴 리가 없어!'라고 부정하며, 조금 지나면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라는 생각으로 분노하게 되고, 이 상황에서 주변 환경과 타협함으로써 다른 돌파구가 있을 것이라는 미련을 두기도 한다.  결국 이도 저도 가능성이 없으면 극심한 슬픔에 빠지게 되고, 그런 일련의 과정을 통하여 종국에는 현실을 수용하기에 이른다.  물론 순서가 뒤바뀌거나, 단계를 뛰어 넘을 수도 있겠고, 미처 수용 단계에 이르기도 전에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끝까지 영위하려는 사람에게 있어 이러한 과정이 중요한 것은 결코 아니라고 본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어려움을 빨리 극복하고, 새로운 삶에 적응하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 아니겠는가.

나의 경험을 되짚어 보면, 극도의 어려움에 처했을 때, 그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감정에는 오직 자만심(또는 허세)과 오기만 남는다는 것이다.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이 허세를 부리고, 다른 사람의 충고를 절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오기로 똘똘 뭉쳐져 있는 그 사람을 주변의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비난과 멸시로 그 사람을 대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상황을 역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기 때문에 부풀리는 것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고, 아무 것도 없는 약자의 입장에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서는 오기를 부릴 수밖에 없음을 인식해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자만심이나 오기는 주변에 있는 가까운 사람에게도 마음의 상처만 줄뿐, 어려움에 처한 당사자에게 정말 필요한 위로와 협조를 이끌어내지는 못한다.  그리고 자만심과 오기만 남았으니 그에게는 위로와 기도가 필요하겠다고 생각할 수 있는 성인군자는 주변에 존재하지 않는다.  비난과 멸시가 심해지지 않는 것만으로도 주변 사람들은 대단한 인내심을 발휘하는 것이다.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어려움에 대처하는 본인과 주변 사람들의 인식이 올바르지 않다는 것이다.

본인은 힘들더라도 빨리 수용하고 자신을 최대한 낮추려는 노력이 필요하며, 주변 사람들도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비이성적인 행동으로 일관하더라도 그를 가여운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따뜻한 시선이 필요하다.

그러나 현실에서 이런 조건을 갖추기란 쉽지 않다.  그러므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은 주변의 협조에 의지하는 것보다 본인의 마음을 통제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  내가 마음을 돌려 나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없더라도 그들을 미워하지 않는 태도가 절실하다.  왜냐하면 나를 도와줄 의무가 그들에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마음이 변하는 순간 새로운 희망이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피어나고 있음을 믿어야 한다.  그것이 살아가는 방식이고,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오래 전의 일이다.

결혼 10년 만에 첫 아이를 얻고 그 아이를 위해 100일 기도를 온 어떤 부부가 있었다.

그때 스님이 하신 말씀은 이랬다.

  "자기 자식이라고 어떻게 저리 편애할 수 있을까?"

나는 순간 당황했다.

당시 나는 결혼도 하지 않은 학생의 신분이었지만 오히려 스님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나는 속으로 '당연한 거 아냐? 스님도 참 웃기는 사람이네'하고 생각했었다.

 

곧 있으면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 중 하나인 설이 다가온다.

즐겁고 행복해야 할 명절 모임에서 싸움과 분란이 일어나는 경우를 종종 경험하게 된다.  대부분은 자주 만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이해의 부족이 원인이지만 가깝다고 느껴서 무심코 내뱉은 말이 빌미가 되는 경우도 있다. 부부간에도 사소한 말다툼이 심각한 불화로 진행되기도 한다.

이러한 모습들의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개인의 영역을 보장해 주지 않는 우리의 문화에도 그 원인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우리가 유지하는 모든 관계가 원만하게 유지되기를 바란다면 필수적으로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  그것은 바로 각각의 개인에게 반드시 보장되어야 하는 불가침의 영역을 존중하고 부당하게 침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공동체 문화에서 성장한 우리가 개인의 사적 영역을 인정하고 보장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단순히 가깝다는 이유로, 연장자라는 이유로, 또는 가족이라는 명목으로 개인을 옭죄는 일은 삼가야 한다.

개인의 생각과 행동을 적당한 거리에서 바라보는 일.

무관심으로 일관하여 데면데면한 관계가 되어서도 곤란하지만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가 상대방에게 간섭이나 모욕으로 비춰진다면 그 또한 곤란하지 않을까?

부모와 자녀, 아내와 남편, 가까운 친지 간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행위가 바로 상대방에 대한 '배려'이고 진정한 '사랑'이다.

 

스님의 말씀은 '편애'가 집착이나 간섭으로 발전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었음을 어슴푸레 짐작하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