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저녁 아들과의 전화 통화.

"XX야! 오늘 뭐했어? 날씨가 따뜻했는데 밖에 나가 놀았어?"

"....음..나가 놀지는 않았고 나가서 머리 깎았어."

"그랬어?"

아들 녀석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어 한 마디 한다.

"그런데 아빠, 머리가 약간 바가지야."

그때 전화 수화기를 통하여 들려오는 아내의 목소리.

엄마가 옆에 있어서 내게 큰소리로 자신의 불만을 말하지 못했나 보다.

"아빠, 내일 설악산 간다고 일찍 자래.  대명콘도 알지?  할아버지, 할머니랑 아침 일찍 출발한대.  엄마가 전화 짧게하고 자라는데....."

"응, 그래.  알았어.  양치는 했어?"

"응.  자기만 하면 돼."

"그래.  그러면 잘 자고 재미있게 놀다 와."

전화를 끊고, 머리를 깎은 아들 녀석의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이 절로 나온다.

내가 어렸을 때는 이발의자의 등받이가 높아 의자의 양쪽 팔걸이에 판자를 올리고 그 위에 앉아 머리를 깎았었다.  녹슨 바리깡에 머리가 찝혀 화들짝 놀라고, 아픔에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이를 악물고 참아냈었다.  오죽하면 머리를 다 깎고나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겠는가. 

이발의자를 내려와 타일이 다 떨어져나간 세발대에 머리를 숙이면 빨래비누로 짧은 머리를 박박 비누칠하던 이발소 주인의 손놀림도 잠시 플라스틱 머리감개의 고문이 다시 시작되었다.  아프다는 내색도 못하고 빨리 끝나기만 빌어야 했던 어린 시절 모습은 지금 생각하면 그저 안쓰럽기만 하다.감은 눈으로 흐르던 비누거품을 닦을 새도 없이 파란 플라스틱 조루의 물세례를 받고나면 드디어 길게만 느껴지던 이발 의식(?)이 끝난 것이다.

짧아진 머리 탓에 선선한 바깥 바람에도 추위를 느꼈었다.

그  시절만 해도 자신이 원하는 머리 모양을 선택한다는 것은 언감생심 꿈도 못 꿀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아이들 머리는 하나같이 빡빡 밀었거나 상고머리가 대부분이었다. 

아들 녀석은 자신의 머리 스타일이 제 마음에 들지 않았던지 내게 자신의 심정을 전하려 했나 본데 그 나이에는 엄마의 의견에 따라 머리 모양이 결정되니 낸들 무슨 수가 있겠는가.

머리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요즘 젊은 엄마들의 행태에 눈살을 찌푸리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직은 어리고 연약한 아이의 머리에 독한 염색약을 사용하여 염색을 해주는가 하면, 파마를 하는 경우도 보게 된다.

중금속이 뒤섞인 염색약과 파마약의 성분도 성분이려니와 도대체 누구 좋으라고 그렇게 하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가끔 염색이나 파마를 한 꼬마의 모습을 볼 때는 그 부모가 혹시 계모, 계부가 아닌지 의심부터 하게 된다면 나의 생각이 너무 보수적이라고 비난 아닌 비난을 퍼부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연약한 아이의 피부에 독한 확학약품을 퍼붓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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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강물처럼
파울로 코엘료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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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지극히 평범하고, 특별할 것 하나 없는 내용의 이 책이 또는 그의 다른 글이 어떻게 전세계 160여개 국 66개의 언어로 번역되어 1억 부가 넘는 판매를 기록하게 되었을까?

상상하기 어려운 결과를 이끌어낸 저력은 무엇이었을까?

십대 시절에는 세 차례나 정신병원에 입원했고, 청년 시절에는 브라질 군사독재에 반대하는 반정부 활동을 하다 두 차례 수감되어 고문을 당했으며, 히피문화에 심취해 록밴드를 결성했던 그가 저널리스트로, 록스타로, 배우로, 희곡작가로, 연극 연출가로 그리고 TV 프로듀서로 살았던 그의 다양한 이력이 독자들에게 궁금증과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을까?

아니면 지구상의 어떤 사람도 쓰지 못했던 독특한 글을 쓰고 있기 때문일까?

나의 생각으로는 파울로 코엘료의 진정한 힘은 이도저도 아닌 진실과 솔직함에 있었다.

혹자는 그가 산티아고 순례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런 작품을 쓸 수 있었다고 평할지 모르겠으나, 단순한 그의 경험이 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꿀  정도로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단정하는 것은 나의 상식으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순례의 경험이 자신에게 이전보다 더 솔직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말하는  쪽이 옳을 것이다. 
밑바탕에 진솔함이 깔려있는 글이나 예술 작품은 보고 듣는 모든 사람에게 감동의 울림이 전해지게 마련이다.   하여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것만을 기록해야 한다.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것을 글로 옮기는 것은 아무리 기교가 뛰어난 작가의 능력으로도 독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는 법이다.   SF소설도 작가의 상상 속에서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글로 옮긴다면 그것은 곧 진실이고,  그 작품은 필연적으로 독자의 마음에 강한 울림으로 전달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글을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그대로 옮겨 적는다 하더라도 진심으로 감동하여  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는 차이가 있다.   나의 마음이 버무려진 필사본은 원작자의 글에서 느끼지 못했던 또 다른 글로 재탄생하는 것이다.   
이 책은 저자가 주변에서 듣고 경험하거나 읽었던 것을 작가가 먼저 감동하고,  차후에 그것을 글로 옮겼기에 평범해 보이는 신화나 전설마저  새로운 느낌으로 독자에게 전달될 수 있었다고 믿는다.  평범한 일상과 에피소드를 특별한 감동으로 전할 수 있는 작가의 힘은 진실과 솔직함에 있었다.  조금 긴 그의 기도문을 나의 감정을 섞어 옮겨본다.

주여, 우리의 의심을 지켜주소서.  의심 또한 기도하는 한 방법입니다.  의심은 우리를 성장하게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의 문제에 대한 많은 답들과 두려움 없이 마주하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주여, 우리의 결정을 지켜주소서.  결정 또한 기도하는 한 방법입니다.  우리의 의심을 이기고, 이 길과 저 길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용기와 능력을 주소서.  우리의 긍정이 늘 긍정이도록, 우리의 부정이 늘 부정이도록 하소서.  한번 결정한 길은 뒤돌아보지 않도록, 후회가 우리의 영혼을 잠식하지 않도록 하소서.  그러기 위하여......

주여, 우리의 행동을 지켜주소서.  행동 또한 기도하는 한 방법입니다.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 우리가 맺는 가장 좋은 열매가 되게 하소서.  노동과 행동을 통해 우리가 받을 사랑을 나누게 하소서.  그러기 위하여......

주여, 우리의 꿈을 지켜주소서.  꿈 또한 기도하는 한 방법입니다.  나이와 외적 조건에 상관없이 가슴속에 성스러운 희망과 인내의 불씨를 품게 하소서.  그러기 위하여......

주여, 우리에게 열정을 주소서.  열정 또한 기도하는 한 방법입니다.  우리를 하늘과 땅, 어른이나 어린아이들과 결합케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니, 열정은 우리의 욕구가 중요함을 일깨워주고 최선을 다하도록 북돋워줍니다.  우리가 하는 일과 혼연일체가 되어 있는 한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열정은 재삼 확인해줍니다.  그러기 위하여......

주여, 우리를 지켜주소서.  생명은 우리가 당신의 기적을 다시 펼쳐 보일 유일한 길입니다.  이제까지 그랬듯 땅이 씨앗을 낟알로 여물게 하시고, 밀알을 빵으로 만들게 하소서.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사랑이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그러니, 우리를 외롭게 하지 마소서.   언제나 우리 곁에 머물러 계시며, 의심하고 행동하고 꿈과 열정을 품은 사람들, 매일매일 당신께 영광 돌리는 삶을 이들과 더불어 함께하게 하소서.(P.159 -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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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어제는 네가 유치원을 졸업한 날이었지.

졸업식에 가지 못하는 나는 하루 종일 너의 모습을 떠올리며 ’조금 섭섭하지 않았을까?’ 걱정했단다. 

꽤 많은 아빠들이 졸업식에 참석했었다는 말을 너의 엄마로부터 전해 들었을 때 얼마나 미안했던지.....

반에서 가장 큰 꽃다발을 받아 기분이 좋았다는 너의 말은 내게 커다란 위로가 되었단다.

지난 설 연휴에 너와의 짧은 산책에서도 피곤하지 않겠냐며 나를 먼저 걱정했었지.

어느새 너는 마음마저 훌쩍 자라있더구나.

너와의 지난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데 시간에 비해 턱없이 짧은 기억은 아쉬움만 더하였단다.

 

아들아

 

어떤 일의 말미에 서면 지난 것에 대한 아쉬움과 시원섭섭함 그리고 미래에 대한 기대감과 설레임이 교차하곤 하지.  어쩌면 약간의 두려움이나 불안감이 슬쩍 동행할지도 모르겠구나.

네 나이에  그런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님을 알고 있단다.

너는 아무개의 엄마가 특송을 했는데 어떻게 그런 목소리를 낼 수 있는지 신기했다는 것과 송사와 답사를 누가 했었다는 것과 저녁에 할아버지, 할머니, 엄마와 같이 탕수육을 먹으러 나갔었다는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았겠니?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너를 생각하면 대견함과 함께 그 빡빡한 생활에 내가 먼저 답답함을 느끼게 되는구나.

너는 그저 새로 산 가방과 옷과 신발에 마냥 즐겁기만 한데.....

 

아들아

 

자란다는 것은 새로운 규칙을 하나씩 덧붙이는 것이란다.

늘어난 규칙이 때로는 힘들고 지치게 하더라도 불평없이 견디렴.

그럴수록 더욱 잘 지키려 노력하면 네 몸은 자연스레 따라가는 법이란다.

갈등과 고민은 네 머리 속에 있는 규칙과 네 몸이 분리되어 나타나는 현상이란다.

네 몸이 익숙해지면 규칙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지.  오히려 규칙을 잊고 자유로워짐을 느낄 수 있단다.

기억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너의 첫번째 졸업식이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은 아비된 자의 지나친 욕심이겠지?

 

아들아

 

너의 졸업과 곧 있을 입학을 생각하며 프랑스의 시인 레미 드 구르몽의 말을 적어보고 싶구나.

"우리는 행복해야 한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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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오후들어 바람이 점차 강해지는 날이었지.

오전 내 집안에 있던 네게 밖에 나가 자전거를 타는 것이 어떻겠느냐 물었을 때 너는 집에서 종이접기를 하거나 책을 읽고싶다 말했지.

아빠는 그때도 알고 있었단다.

일단 밖에 나가면 다시 들어오기 싫어할 거라는 걸.

네가 크면 다 알게 되겠지만 공부는 머리에 지식만 넣는 것이 아니란다.

공부는 끝없는 인생의 사막을 건널 때 나침반을 준비하는 것과 같은 거란다.

그러자면 하나의 나침반으로는 너무 위험하단다.

가장 튼튼하고 멋진 나침반을 너의 머리에 간직하더라도 만일을 대비하여 네 손에도, 발에도, 가슴에도 하나씩 준비하면 좋지 않겠니?

네가 종이접기를 잘 하는 것도 네 손에 또 다른 나침반을 준비하는 일이란다.

네가 "파랭이"라는 애칭을 붙여준 파란 자전거를 열심히 타면 네 발에는 또 하나의 나침반이 생겨나겠지.

"아빠, 이런 날 이불 속에 가만히 누워있으면 편안해지는 기분 아빠도 알아?"

했을 때 아빠는 알았단다.  마음이 향하는 곳을 잘 알고있는 너는 가슴에도 하나의 나침반이 마련되었다는 것을.

하나의 나침반이 고장나 못쓰게 되더라도 네가 준비한 또 다른 나침반이 너를 안전한 오아시스로 데려다 줄 것이라 믿는단다.

 

아들아

사막의 밤은 몹시 춥단다.

따뜻한 밤을 지새려면 모닥불이 필요하겠지.

너에게 따뜻한 모닥불이 되어주는 것은 주변의 사람들이란다.

사막을 걷다가 길 잃은 사람을 만나거든 가만히 너의 나침반을 건네주렴.

그러면 차가운 사막의 밤에도 서로의 체온을 나누며 따뜻하게 아침을 맞을 수 있는 거란다.

 

아들아 꼭 기억하렴.

사막을 건널 땐 둘 이상의 나침반과 믿음직한 친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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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답장을 기다리며 - 자폐아 아들과 좌충우돌 살아가기
채영숙 지음 / 좋은책(단행본)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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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자폐아 배형진군을 모델로 한 영화 <말아톤>이 세간의 주목을 받았었다.

자폐증을 앓고 있는 한 청년이 마라톤을 통해 사회와 소통해 나가는 과정을 그린 영화로 조승우와 김미숙이 열연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감동의 박수갈채를 받았던 작품이다.  그러나 그 감동이 자폐아와 그 부모의 삶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계기로 작용했다는 것에는 여전히 의문스럽다.

이 땅에서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 장애인을 가족으로 품고 살아간다는 것은 천형에 가깝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비장애인을 아들로 두고 있는 나는 이책을 읽는 내내 '아,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이구나!'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외쳤었던가.

남의 불행에 견주어 나의 행복을 확인하는 알량한 이기심이 '공감'이라는 말로 포장되려는 순간, 나는 어찌할 수 없는 좌절을 맛보았다.

 

이 책은 자폐아 호민이를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학교에 보내고 겪어야 했던 여러 경험들을 호민이 엄마 채영숙님이 글로 옮긴 것이다.

첫째를 사산하고 둘째로 태어난 호민이는 30개월이 되었을 때 자폐아 판정을 받았다.

세째가 8개월만에 태어났지만 20여 일만에 세상을 떠나 외둥이로 자라게 된 호민이.

 '지금 아이를 데려가세요, 하나님!  저렇게 답답한 가슴으로 평생을 살아야 한다면, 정말로 그래야 한다면, 세상에서 덜 상처받았을 때, 해맑은 웃음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을 때, 지금 데려가 주세요!'(P.13) 이렇게 기도했던 아이는 남들보다 조금 늦은 아홉 살에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학교에 입학했고, 초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기까지 호민이와 엄마가 겪어야 했던 많은 일들을 작가는 담담한 필체로 기록하고 있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의 여인이 자폐아를 아들로 두면서 '천사'가 아닌 '전사'가 되어야 했다는 그녀의 고백과 사회적 편견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호민이에게 따뜻한 시선과 배려로 힘을 더해준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는 코끝을 시큰하게 했다.

 

약자에 대한 배려와 보살핌이 없는 사회는 결코 건강한 사회라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국민이 말하지 않아도 정부가 앞장서 약자를 위한 예산을 편성하는 나라가 있는가 하면 국민이 원해도 그 예산을 삭감하는 나라도 있다.

우리 나라는 곧 초고령 사회가 된다.  강자보다는 약자가 많아지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사회적 편견을 버리고 약자를 배려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따뜻한 사회를 만들지 못한다면 내게도 예외란 있을 수 없다.

나는 리뷰를 쓰기 전 작가의 블로그를 방문했었다.

이 책이 다음 칼럼에 실렸던 것을 책으로 엮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녀와 호민이의 현재 모습이 몹시 궁금했었던 이유가 더 컸다.

'더디 자라지만 아들과 쉬엄쉬엄 순리대로 살아가기'라는 글귀가 나의 시선을 한참이나 머물게 했다.

나는 오늘도 '사회적 편견이 없는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자'는 헛된 구호를 외치며 대답없는 메아리를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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