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한 학생의 어머니께서 나를 위해 보약을 지어 오셨다.
형편이 빠듯한 것을 잘 알고있는 나로서는 마음만은 알겠으나 절대 받을 수 없노라고 극구 사양했지만, 억지로 떠 안기다시피 하시고는 잠시 상담을 청하였다.
그 학생이 어렸을 때 남편과 이혼한 후로 자신에게 남겨진 아들을 위해 온갖 궂은 일을 마다 않고 최선을 다해 생계를 꾸려 왔단다. 그럼에도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고 이제껏 아들을 학원 문턱에도 데려가지 못했다고 울먹이셨다.
그런데 나와 함께 공부를 시작하면서 아들은 몰라보게 달라졌다며 고마워 했다.
그리고 그 공을 다 나의 것으로 돌렸다.
아침에 출근할 때 그렇게 깨워도 일어나지 않던 아들이 요즘은 자신보다 먼저 일어나 아침운동을 하고, 퇴근하여 보면 아들이 청소를 하였는지 돼지우리 같던 집안이 환해졌단다.
나는 괜히 머쓱해져 잠시 할 말을 잃었었다.
어머니께서는 그렇게 변한 아들이 대견하고, 무엇보다 아들이 달라지도록 도와준 내게 고마움의 답례를 꼭 하고싶었노라고 하셨다.
그 말을 끝으로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서시던 어머니는 아들이 자신의 말은 듣지 않아도 내 말이라면 다 따르려 한다며 아들에게 문제가 생기면 나에게 전화를 해도 괜찮겠냐 물으셨다.
나는 언제든지 상관없노라 답하면서도 마음 한켠에는 내가 분명 무언가 잘못 가르치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마음 속에 존경하는 누군가가 자리 잡는다 해도 부모는 언제나 자신에게 최고여야 한다는 것이 내 평소의 생각이었다.
그 누군가를 흠모하고 존경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지만, 그로 인해 부모를 무시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사라진다면 결코 바람직한 모습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 학생을 조용히 불러 어머니에 대한 학생의 생각을 물어보았다.
한동안 입을 다물고 아무런 말도 내뱉지 않던 학생은 무작정 엄마가 싫다고 했다.
논리적으로 왜 싫은지는 말할 수 없지만 그냥 싫단다.
나는 학생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나도 어렸을 때 그랬으니까.
"혹시 엄마가 싫은 게 아니라 그런 환경이 싫은 게 아닐까?  좋은 환경의 친구들을 부러워할수록 그런 환경에 자신을 낳은 엄마가 더 밉고... "
나는 그 학생에게 현실을 제대로 인식시키고 싶었다.
사실 어머니는 자신이 처한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이며, 학생은 그 환경을 자신의 힘으로 개선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는 것이며, 그것은 곧 자신의 능력을 믿지 못하는 패배의식에 불과하다고.  그리고 내가 아닌 누군가가 모든 것을 바꾸어 주길 기대하며 의존하는 것은 어리광이자 치기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었다.  이제 그런 어리광을 부릴 나이는 아니라고.

아침에 산을 오를 때 쨍한 추위가 코끝에 맴돌았다.
지친 몸으로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것이 결코 녹록지 않으리라 짐작하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요즘은 유난히 피곤함에 시달린다.
어제 받은 보약을 먹고 출근한 덕분인지 오늘은 머리가 그나마 맑다.
세상은 살만한 곳이고, 나 아닌 누군가가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 모두가 알았으면 좋겠다.
겨울로 가는 저 햇살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힘이 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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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학교 아이들
무사 앗사리드.이브라힘 앗사리드 지음, 임미경 옮김, 전화식 사진 / 고즈윈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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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사회나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육은 그 사회의 고유문화를 유지, 발전시키고, 아이들이 그 사회의 일원으로 잘 적응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하겠다.
배워야 할 것이 그리 많지 않았던 원시사회에서는 교육이 비교적 공평했을지는 모르지만,  현대의 교육은 그 전문성과 더불어 사회적 불평등을 조장하는 사치품으로 전락한 느낌이다.

이 책의 저자인 '무사 앗사리드'의 또 다른 작품 <사막별 여행자>를 감동적으로 읽었던 나는 부푼 기대감으로 들떠 있었고, 떨리는 손으로 책을 읽었다.  처음엔 그랬다.
그러나 기대가 너무 큰 탓이었을까?
나는 이내 실망하였고, 책을 다 읽었을 때는 리뷰를 남길 의욕마저 잃었다.
저자인 무사 앗사리드와 그의 동생 이브라힘이 어려운 여건에도 굴하지 않고 배움을 이어갔던 이야기는 이미 <사막별 여행자>에서 읽은 터였고, 책의 후반부에 기록된 "생텍쥐페리 사막학교"의 설립과 학생들의 이야기는 이미 전의를 상실한 나의 독서열을 되살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책의 내용이나 편집에 흠이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나의 가슴에 남아있는 <사막별 여행자>의 감동이 그만큼 강했던 까닭이다.
영화도 그렇지 않던가.  원작이 좋을수록 이어지는 2탄, 3탄의 후속작이 원작의 감동을 이어가지 못하듯이...  나는 이책을 먼저 읽고 나중에 <사막별 여행자>를 읽었으면 좋았을텐데 하는 생각도 들었다.
정보처리 기술자인 이브라힘이 자신의 부족인 투아레그족의 아이들을 위하여 보장된 고소득을 포기하고 사막에 학교를 세우고, 아이들과 어울려 꿈을 키워가는 장면은 그나마 잔잔한 감동으로 남았다.

"밤에 아내와 아들, 딸과 나란히 앉아 하늘의 별을 바라볼 때마다 삶이란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삶에는 모든 것이 있다.  정말로 그렇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이 학교를 위해 싸웠고, 이제 단단히 뿌리를 내렸다.  아직 허약한 부분이 있기는 해도 사랑받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또한 꿈의 결실이라고 하기에 충분할 만큼 학교는 활기 있고 힘차게 돌아가고 있다." (P.93)

사막의 유목민으로 태어나 지구별의 당당한 일원으로 성장한 무사 앗사리드와 이브라힘 앗사리드.  자신들이 받은 도움을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되돌려 주는 그들의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넬슨 만델라와 간디를 존경하는 내가 늘 꿈꾸어 온 것은 세상을 보다 나은 것으로 만드는 일이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내가 보다 나은 것으로 만들어야 할 그 세상이 내게 뚜렷한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것은 바로 내가 태어난 투아레그족 공동체, 나의 작은 사막학교이다.  내가 투아레그족의 삶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경이로운 일이다.  손에 든 벽돌 한 장을 어딘가에 쌓기 위해 지구를 돌아다닐 필요는 없다." (P.220)

퇴근 후 나의 숙소에서 공부를 하는 아이들은 저마다의 가슴에 하나씩의 상처를 갖고 있다.
때로는 상처의 칼날이 자신을 찌르고, 다른 사람들에게마저 매몰찬 흉기로 다가가지만 마음 한 구석에는 휑한 바람이 불고 있음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나는 그래서 그 아이들을 바라볼 때마다 가슴이 아리다.  저미도록 아프다.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은 지금 얼마 남지 않은 기말고사를 대비하여 각자가 부족한 과목을 자습중이다.  공부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찬 나의 숙소는 사막의 태양처럼 뜨겁다.
투아레그족 아이들도 그럴 것이다.  그들이 사막에 그리는 꿈은 어떤 모습일까?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도, 사막의 작은 학교의 아이들도 심한 모래바람에 그들의 꿈이 흩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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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클로스의 시계 - 인연은 시간의 선물이다
장준호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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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부부로 사는 내게 있어, 퇴근 후의 시간을 어떻게 유용하게 보내느냐 하는 문제는 오래 전부터 고민거리였다.  사실 직장 동료를 늦은 시각까지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눈치가 보이는 것도 그렇고 해서, 뭔가 보람있는 일을 하고자 찾던 중 결심하게 된 것이 주변의 아이들을 모아 영어, 수학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그렇게 아무 준비도 없이 시작한 일이 벌써 두 달이 넘었다.
시행착오도 있었고,  힘든 일도 많았지만 나는 이제 아이들로부터 ’선생님’소리를 듣는 교사의 신분이다.  처음에는 수강료 ’무료’라는 말에 반신반의 하던 부모님과 학생들로부터 ’혹시 뭔가 다른 것을 요구하지 않을까?’하는 의심의 눈초리도 없지 않았으나 지금은 조금씩 자신들의 속내를 보여주는 사이가 되었다.
주변의 반응은 냉랭했다.  ’왜 사서 고생을 하느냐?’는 말과 함께 ’얼마나 하는지 두고 보자’는 사람들까지 온통 부정적 시선만 가득했다.  나를 더욱 힘들게 했던 것은 업무시간 중 잠시의 짬을 이용하여 수학 정석을 붙들고 있거나, 피곤에 지친 내가 잠시 눈을 붙일 때면 곱지 않은 동료들의 시선에 화가 나기도 했었다.

아이들과의 생활은 내게 또 다른 배움의 장이었다.
내가 그들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부터 내가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는 생각이 든 것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아이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전보다 독서량도 늘었고, 오래 전에 손을 놓았던 수학 공부도 새로 시작했으니 말이다.  신간 도서에서 아이들에게 도움이 될만한 책이 보이면 나는 주저 없이 구입해 읽고 아이들에게 일독을 권하였다.

코스닥 상장기업 ’인포뱅크’의 창업자인 장준호님의 저서 < 산타클로스의 시계>가 내 눈에 뜨인 것도 이 책의 부제인 "인연은 시간의 선물이다"라는 구절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부제의 의미와는 상반된 책의 내용과 질에 실망을 금치 못했다.
어떻게 이런 책이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판매 목적으로 출간되었는지 출판사의 의도도 의심스러웠다.  책의 내용은 부모 잘 둔 덕에 어려서부터 고생 한 번 하지 않고 승승장구 하였던 자신과, 미국의 보딩 스쿨(사립 기숙학교)에 보낸 자식들 둘이 스탠포드 대학과 와튼 제롬 피셔에 다니게 되었다는 것과, 회사 설립 초창기에 약간의 어려움이 있었지만 주변의 도움으로 승승장구하게 되었다는 자랑과 함께 인포뱅크의 홍보성 멘트까지 잊지 않았다.
그리고 경기고와 서울대 공대를 졸업하고, 스탠포드에서 공학박사를 취득하여 삼성 회장비서실에 근무하였던 저자의 화려한 이력에 걸맞게 자신 주변의 인맥을 이니셜이 아닌 실명으로 거론하며 자랑에 열을 올렸다.

"가난에 찌든 아버지는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열여덟에 일본 수병으로 항공모함을 타게 됐다고 합니다.(P.247)....해방이 되던 1945년에 경찰이 되셨습니다.(P.248)...아버지는 1968년 지금은 태백시가 된 삼척군 장성읍 경찰서장으로 부임했습니다.(P.248)"

"기석이는 중학교 2학년 때 미국으로 조기유학을 보냈습니다.  지금은 미국 동부에 있는 태프트 스쿨 12학년에 재학 중인데 2010년 가을에는 미국 대학에 진학할 예정입니다.(P.110)...미국의 사립 기숙학교는 1년 학비와 기숙사비가 4만 달러에 이르고, 이것저것 합하면 아이 하나 1년 교육하는데 6만 달러는 들어갑니다.(P.111)"

"2012년 2월 새로운 실내테마공간의 문이 열립니다.  우리가 짓는 아이쿠어리움의 스토리는 이렇습니다.(P.218)...2012년 많이들 구경 오시기 바랍니다.(P.221)"

"개개인으로 만나본 일본사람은 선하다는 느낌이 들고, 미국인들은 스스로 인생은 아름답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대체로 아름답다는 느낌이 많이 듭니다.(P.64)...지난 20여 년간 일본을 방문하면서 느끼는 것인데, 우리나라 근대화 과정에서 가장 많은 가르침을 준 사람들은 일본인이라는 것입니다.(P.215)"

누구나 글을 쓰고, 그 글을 책으로 출간할 자유가 있다.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 중에 하나이니까.  그러나 그 글을 읽는 독자들의 입장에서 한번쯤 생각하는 역지사지의 정신은 글을 쓰는 작가에게 반드시 요구되는 의무이기도 하다.  그 의무를 다하지 않으려면 가까운 친인척과 주변의 동료들에게 무료로 배포하는 비매품으로 출간하는 것이 옳다.  나는 이 책을 혹시 아이들이 읽을까 두렵다.  돈이 없어 남들 다 다니는 학원도 다니지 못하여 그다지 좋지 않은 환경인 나의 숙소에 모여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이 이책을 읽게 된다면 얼마나 좌절하고, 낙담할 것인가.  나는 그 상상만으로도 서럽다.
열심히 공부하면 자신의 꿈을 반드시 이룰 수 있다고 말했던 나의 행동이 경솔하고 허황되다고 따진다면 나는 무어라 답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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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가는 길>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산티아고 가는 길
세스 노터봄 지음, 이희재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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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학창 시절 그야말로 나는 닥치는대로 책을 읽었고, 내가 읽은 모든 문자가 머릿속에서 떡처럼 엉겨붙었었다.  하나하나의 낱글자가 자모를 갖추고 제자리에 설 때까지, 그리고 그 각각의 글자들이 모여 문장을 이루고 하나의 의미로 되살아나기까지 많은 시간의 사색과 휴식이 필요했음에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장편의 소설이나 글자 배열이 촘촘한 철학서는 마치 글자를 정복하려는듯 달려드는 내게 호승심을 부추기는 형국이어서 나는 오직 줄기차게 읽는(그저 단순히 읽는 행위로써의) 일에만 몰두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딛었을 때, 나는 언제 그랬냐는듯 독서와 결별했다.
그 기나긴 휴지, 책을 놓고 문자와 결별한 채 사색과 명상, 때로는 공상의 시간만 지속되었다. 차츰 내 머릿속에서 각각의 글자가 자리를 잡고, 뒤섞인 의미가 순서를 정하게 되었다.  독서도 과하면 체한다는 것을 혹독한 경험으로 체득하게 된 셈이다.   나는 최근에 이르러서야 글자 하나하나를 천천히 음미하며 읽게 되었다.  나이가 들어 소화력이 떨어진 노인처럼 나는 몇 번이고 곱씹어 그 의미를 완전히 파악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는 것을 비로소 알아가는 것이리라.

세스 노터봄이 지은 <산티아고 가는 길>은 젊은 시절의 내게는 호승심을 불러일으켰을 듯한 그런 책이다.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과 빽빽한 글자들.
책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절로 한숨을 쉬게 할만하다.  책을 싫어하면서 더하여 인내심도 없는 독자라면 쉽게 포기하고 말았을 그런 책이다.
책의 제목에서 풍기는 종교적인 색채의 책은 아니다.  기독교인들이 자주 찾는 순례 코스, 야고보 길을 도보로 여행하며 기록한 순례기가 결코 아니라는 말이다.  독일의 인기스타인 하페 케르켈링의 도보 여행기 <그길에서 나를 만나다>와 비슷한 류의 책을 원했다면 번지수를 잘못 짚었다.  유럽에 매달려 있지만 유럽이 아닌 나라, 그 황량하고 넓은 들판을, 험난한 산악지대를, 메세타 고원을, 그리고 외부의 방문객을 두려워 하는 작은 오솔길을 작가는 느릿느릿 더듬고 있다.

"이것은 순례의 길이기도 하지만 명상의 길이기도 하다.  중간중간 들르는 곳이 많은 데다 이런저런 상념에 젖다 보면 여정은 더디기만 하다.  나는 이중으로 여행을 한다.  하나는 렌트카를 몰고 다니는 여행이고, 하나는 요새와 성과 수도원이, 또 그곳에서 미주친 문서와 전설이 불러일으키는 과거를 누비고 다니는 여행이다." (P. 69)

그에게 여행은 질러가는 길이 아니라 에둘러 가는 길이다.
별 필요도 없어 보이는 상상과, 어느 책에서 읽었던 역사적 사실과, 시간이 멈춘 듯한 어느 농가 마을과, 심지어 시어(詩語)를 떠올리게 하는 지명에 이르기까지 그의 시선은 여정을 벗아나 끝없이 샛길로 흐른다.  작가의 상념의 기저, 그 밑바닥까지 읽어내려가노라면 여정은 마냥 늘어지고, 지치고 허기진 독자가 잠이라도 청할 즈음에 그의 이야기는 다시 시작된다.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느린 여정의 이면에는 부지런한 기록자가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독자는 까맣게 잊는다.

"날이 어둑해지자 나는 광장으로 산보를 나가지만 광장을 제대로 본 것은 그 다음 날이었다.  나른한 오후, 남자들은 공원 벤치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시청 위에 걸린 깃발도 축 늘어졌다.  나는 칠레 왕국의 총사령관이었으며 고향 땅을 두 번 다시 밟지 못하고 쿠스코에서 죽은 디에고 데 알마그로의 기념상에 적힌 시를 읽는다." (P.169)

이십일 세기의 현대 문명에서 스페인은 마치 저 멀리 떨어진, 현대인의 손길이 닿지 않는,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해야 닿을 듯한 역사적 무인도로 느껴진다.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소설가이며 시인이자 여행작가인 그가 그려내는 스페인은 특별하다.

"마드리드의 2월은 춥다.  춥고 맑다.  내 밑으로 저 아래 누운 도시가 비행기에서 보인다.  돌의 포로가 된 저 풍경은 스페인의 혼을 어느 곳보다도 잘 드러낸다.  그 나라에 도착할 때 유난히 내가슴이 아려 오는 나라가 둘 있다.  스페인하고, 내 나라 네덜라드다." (P.475)

휘적휘적 걷다보니 내 상념의 보따리는 저만치 멀리 떨어져 지나온 어느 발자국에 미아처럼 내려 앉았다.  작가도 그랬을 터.  현대를 사는 내 몸뚱아리가 잰걸음으로 앞서 갈 때, 급할 것 없는 내 사색의 그림자가 멀리서 방향을 잃고 한참을 헤매이다 어느 산길, 외딴 오두막에서 둥지를 틀고 무심한 주인을 온종일 기다리리라.

"나그네는 바닥돌을 딛는 자기 발소리를 듣는다.  탑들과 경이로운 궁전들로 쏟아지는 달빛을 본다.  저 역사의 방벽 너머에는 또 다른 스페인이 있음을 나그네는 안다.  나그네를 알아보지도 못하고 어쩌면 알아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업을지도 모르는 스페인, 나그네의 에움길은 끝났다.  그의 스페인 여행은 막을 내렸다." (P.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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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과 환희의 순간들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최정수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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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우리의 삶은 그야말로 눈깜짝할 `순간’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 `순간’이라는 단어는 내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 찰나지간의 짧은 시간이 내게는 왜 그다지도 중요하게 다가오는 것일까? 
순간을 영원처럼 사는 것, 그것은 나와 같은 범인에게는 닿을 수 없는 꿈이요, 지울 수 없는 로망이기 때문이다.  순간을 영원처럼 살다 간 사람들을 우리는 `천재’라 부른다.
평생 단 하나의 꿈을 안은 채 시간을 허비하는 인생과 순간순간을 인생 최대의 행복을 맞이한 것처럼 사는 것, 더구나 이룰 수 있을지 없을지 불확실한 하나의 꿈을 향해 절제하며 평생을 사는 우리네 삶을 천재의 눈으로 바라볼 때, 얼마나 한심하고 우매한 짓이겠는가?

소위 천재적 재능을 지닌 사람들은 대개 삶을 서서히 이루어 가는 하나의 완성품으로 보지 않는다.  그들에게 삶은 수없이 많은 순간적 행복의 집합체로 인식되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삶은 신이 부여한 선물이며, 축복인 것이다.  그들은 매 순간의 행복과 황홀한 유희를 결코 놓치고 싶지 않을뿐더러 그 소중한 시간을 최대한 길게 늘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시간을 늘인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이겠는가마는 그들은 시간의 경과를 잊고 싶어 한다.
그 황홀한 순간을 시간의 흐름이라는 훼방꾼에게 결코 방해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 훼방꾼으로부터의 도피 또는 망각하는 방법 -이를테면 도박, 마약, 스피드, 섹스 등- 을 끝없이 추구하고 집착하게 되는 까닭도 그것이다.  우리와 같은 범인의 시각에서 비도덕적, 또는 광란이라 치부되는 그러한 것들이 그들에게는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최상의 선물(삶)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한 방편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열아홉 살의 나이에 <슬픔이여 안녕>이라는 작품을 세상에 내어놓고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던 프랑수아즈 사강.  50대에 마약혐의로 재판을 받았던 법정에서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고 말했던 그녀는 자신의 행복했던 순간들을 이책에서 말하고 있다.  이책은 그녀의 문학과 삶에 대한 자전적 에세이로 도박과 자동차 경주에 대한 사랑, 문학적 영감을 얻은 문학작품들, 연극, 영화 및 당대의 문화예술계 거장들과의 교류 및 그들에 대한 사랑과 존경, 아쉬움 등 자신의 솔직한 내면을 털어놓는다.

"자동차를 타고 빠르게 달리다 보면, 쇠로 된 그 카누 안에서 모든 것이 솟구쳐 오르기 시작하는 순간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칼의 뾰족한 부분에, 파도의 꼭대기에 도달한다.  다음 순간 우리는 솜씨 덕분이라기보다는 흐름을 타고 좋은 측면으로 다시 내려가기를 소망한다.  스피드에 대한 애호는 스포츠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그것은 도박이나 운명과 통한다.  그것은 사는 것의 행복과 통한다.  그 결과 행복 속에 늘 감도는 죽음에 대한 어렴풋한 소망에 이끌린다."(P.98)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비도덕적이라거나 광란으로 비하하는 그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행복의 도약’ 또는 `행복의 연장’에 필요한 절대적 도구였던 듯하다.  열정과 흥분에 쌓여 매 순간을 살아가는 삶과 죽음처럼 희미한 미래의 `목표’를 향해 힘들게 절제하는 삶은 우리의 삶이 다양함을 말해주는 것이지 그것을 선과 악으로 규정할 문제는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들을 악으 범주에 넣는다.  단지 소수라는 이유 때문에...

"그러나 천재의 운명은 얼마나 멋진가.  그날그날 내키는 대로 살면서 미테랑에게 훈장을 받기 위해 파리에 들르고, 관절염을 치료하기 위해 미국의 농장으로 다시 돌아가고, 터무니없이 적은 금액에 광고영화를 찍는 운명 말이다." (P.113)

실존주의의 엄격함과 이성에 억눌려 허우적대던 시기에 감수성 풍부한 한 여인이 혜성처럼 나타나, 가벼운 터치로 사람들을 즐겁게하고, 자신의 삶을 열정으로 불사르고 떠난 여인.  프랑수아즈 사강을 그리워하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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