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의 날씨는 더할 수 없이 좋았다.
그래서인지 아침에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었다.
날씨가 풀리자 서둘러 운동을 결심했던 사람들은 벌써 그 기세가 꺾였는지 아침 등산로에서 보이지 않고, 며칠 사이에 큰 결심을 하고 운동을 새로 시작한 사람들이 눈에 띈다.
자연도, 사람도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계절.

운동을 시작하기에 가장 적합한 계절은 동짓달 한나절만큼이나 짧은 초가을 무렵과 지금 이맘때쯤이 아닐까?  사람들은 겨우내 불린 체중을 겨우겨우 감당하며 너도나도 봄산을 오른다.
그러나 사시사철 운동을 하는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겐 이 계절이 전혀 마뜩지 않다.
아침에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과 나날이 짙어가는 녹음은 그저 반갑지만, 새로이 등장한 신참(?) 등산객의 왁자한 소음에 오롯이 즐기고픈 계절의 낭만을 송두리째 빼앗긴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럴 때, 이 짧은 계절의 금쪽같은 시간이 마냥 아쉬울 수밖에 없다.

며칠 전의 일이었다.
언제나처럼 아침에 산을 오르는데 산의 초입에서 다른 날과는 달리 까치 소리가 요란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근처를 둘러보니 이제 막 비상을 연습하는 어린 까치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나는 안쓰러운 마음에 그 새끼 까치를 집어 들어 나뭇가지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높은 데서 지켜보던 어미 까치는 내가 마치 제 자식을 금방이라도 해칠까 두려웠는지 악을 쓰며 울어댔다. 나는 괜한 걱정을 끼쳤다 싶어 서둘러 그 자리를 떠났지만, 내가 어미 까치의 시야로부터 멀리 사라질 때까지 까치의 울음소리는 멎지 않았다.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건만 오늘 아침에도 까치는 나를 보자 큰 소리로 울어댔다.
나는 괜히 머쓱해져서 바닥만 보고 걸었다.  내가 산의 중턱을 오를 때까지 따라오던 까치는 그제야 원래의 위치로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한번의 괜한 참견이 까치와 나 사이에 깊은 앙금으로 남은 듯하여 미안한 느낌마저 들었다.

우리는 자연을 대할 때 항상 인간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아무런 도움도 필요치 않은데 괜한 참견을 하여 긁어 부스럼을 만들었던 나처럼, 자연을 자연 그대로 놔둔 채 그저 멀리서만 바라보면 좋을 것을 인간의 손길이 한번이라도 더 닿아야만 나아질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런 인간의 오만함이 내 유전자 속에도 깊이 뿌리박혀 있음을 새삼 느낀다.  자연은 인간의 손길이 미치지 않을수록 더욱 빛난다.

오늘도 산을 오르는 초보 등산객들의 왁자한 소음에 나는 그들을 대신하여 고개를 숙인다.
우리는 진실로 자연 앞에 고개를 들 자격이 없다.
언제쯤이면 우리는 대자연의 품에서 겸손한 자세로 예의를 갖출 수 있을까?
그날이 정녕 오기나 할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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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워낙 독서를 멀리하여 책을 읽히기 쉽지 않다.
하여, 비록 글재주는 없지만 내가 짬을 내어 짤막짤막한 글을 몇 편 쓴다면 아이들도 책읽기에 관심을 갖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자신들이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사람의 글은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읽지 않으니 매일 만나는 나의 글은 조금 다르지 않을까?   

옛날 어느 마을에 자칭 ’유능한 포졸’  한 명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형은 상당한 부를 축적하여 인근 동네에서는 다들 부러워 하였습니다.  그러나 형에게도 한가지 고민이 있었습니다.  자신의 집에서 기르는 소와 돼지는 그 수가 워낙 많아 자신의 가솔들과 하인들이 1년 내내 연한 살코기만 골라 풍족히 먹고도 남는 양이었습니다.  그냥 버리기는 아깝고, 그렇다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거저 주는 것은 더욱 내키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포졸 동생이 형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형은 동생으로부터 귀가 솔깃한 말을 듣게되었습니다.  포졸 동생이 근무하는 마을에서는 자신의 집에서는 먹지 않는 내장과 뼈도 모두 먹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형은 그동안 동물의 사료로 쓰거나 들판에 버렸던 자신의 행동이 몹시 후회가 되고 배가 아팠지만 지금이나마 돈을 받고 팔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형은 기쁜 마음에 자신이 그토록 아끼던 수레에 동생을 태웠습니다.   동생도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았습니다.

포졸이 사는 마을의 북쪽에는 왈짜패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그들을 구슬러 보기도 하고, 겁도 주었지만 요지부동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동생은 늘 그 왈짜패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습니다.  사실 형을 찾아간 이유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형의 사병은 인근 마을에서 적수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강했습니다.  그래서 형의 말이라면 주변 마을의 촌장들도 두말 않고 들어주는 편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다들 진심으로 형을 믿고 따르는 것은 아니었죠.  북쪽 왈짜패들도 겉으로는 큰소리 탕탕 치지만 내심 형의 사병을 저어하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동생은 자신이 필요로 할 때 형이 도와주기만 한다면 더 이상 왈짜패 때문에 고민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생각했고, 형에게 약간의 경제적 도움을 주면 형도 언제든 자신을 나몰라라 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형으로부터 다짐도 받았고, 싼 고기도 가져오게 되었으니 마을 사람들로부터 대대적인 환영을 받게 되리라는 상상을 하며 포졸은 의기양양한 모습으로 마을에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이게 웬일입니까?   환영은커녕 마을 입구 서낭당 마당에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횃불을 밝힌 채 그의 해명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유인 즉, 형이 팔았던 소고기를 먹은 사람들이 괴질에 걸려 원인도 모른 채 죽어간다는 소문이 마을 전체에 파다하게 퍼졌기 때문이었습니다. 

포졸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습니다.
졸개 포졸들을 모두 불러모았습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잡아들일 것을 지시했습니다.  포졸들은 사람들을 향해 고춧가루도 뿌리고 물도 뿌리면서 마구잡이로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 항의하는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잡아들였습니다.  옥사에는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잡아들인 사람들로 넘쳐났습니다.  그들 모두에게는 왈짜패와 내통했다는 죄목이 씌워졌습니다.  그러자 포졸에 대한 원성과 항의는 점점 거세어져만 갔습니다.

마을 사람들을 향해 분풀이를 하고 나니 포졸의 화도 어지간히 풀렸습니다.
더 이상의 분풀이는 필요치 않다고 판단한 포졸은 마을 사람들에게 사과를 했습니다.  물론 진심은 아니었습니다.  쇠고기도 팔아야 했고, 무엇보다 부하 포졸들이 지쳐있었기 때문입니다.  포졸의 형은 동생의 노력을 가상하게 생각했습니다. 
계절은 벌써 봄을 지나 여름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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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봉지 속의 지혜 - 행복을 찾아서 떠난 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앤서니 드 멜로 지음, 진우기 옮김 / 양문 / 2000년 1월
평점 :
절판


어느 날 내가 가르치는 한 학생에게 이런 말을 들려주었다.
"어떤 집에 자신이 맡은 일을 똑 부러지게 잘하는 여자 아이와 자신의 일은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오빠가 살고 있었어.  그 오빠가 능력이 부족했다면 부모도 꾸지람을 하지는 않았을텐데 능력은 있으면서도 언제나 게으름을 피우는 아들이 좋게 보이지 않았던 거야.  그런데도 철이 없는 오빠는 자신만 나무라는 부모에게 늘 불만이었지.  만약 네가 그 부모의 입장이라면 오빠에게 그것을 말해야 할까 아니면 어떤 꾸중도 하지 않고 아들의 모습을 지켜보기만 해야 할까?"

내 말이 끝나자 그 학생은 "당연히 나무라야겠죠."하고 대답했다.
그 대답에 이어 "너도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그 오빠가 바로 너야."라고 말하자 그 학생은 움찔하며 얼굴이 붉어졌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죄는 무명(無明), 즉 무지(無知)라고 해.  알지 못하는 것이 어떻게 죄가 될 수 있겠나 싶지만 그 무지로 인해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끝없이 괴롭히기 때문에 커다란 죄가 되는 거야.  그리고 이 세상에서 두 번째로 큰 죄는 아마 게으름이 아닐까 싶어.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하겠니? "

그 학생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내가 아이들을 가르쳐 보니 첫째 아이보다는 둘째 아이가 공부도 잘하고 제 할 일을 스스로 찾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부모로부터의 지나친 관심 속에서 자라난 아이는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행동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첫 아이의 탄생과 함께 초보 엄마, 초보 아빠가 되는 까닭이다.  아이도 그렇지만 부모도 아이에게 모르고 한 행동이기 때문에 다 용서가 되는 것은 아닌 듯하다.

1913년 인도 고아에서 태어나 1987년 갑자기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저술과 강의를 통해 영적 가르침에 대한 값진 유산을 남겼던 앤서니 드 멜로 신부님.  내가 신부님의 책을 처음 접한 것은 <깨어나십시오>였다.  어떤 강요나 현학적인 지식으로 독자를 주눅들게 하지도 않았고, 재치와 위트가 넘치는 문장들이 그동안 알지 못했던 나 자신의 모습을 조금씩 알게 했다.  그 후 나는 신부님의 팬이 되었다.  예수회 사제였지만 카톨릭이라는 종교에만 머무르지 않았던 신부님은 이 책에서 지구촌 구석구석의 오래 된 민담과 잠언, 격언과 일화들을 모아 자신의 생각을 곁들였다.

결국, 우리는 누구나 초보 엄마, 초보 아빠일 수밖에 없고 아이들에게 죄를 짓지 않으려면 꾸준히 배우는 길 외에는 달리 도리가 없는 듯하다.
나도 크게 다르지 않아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실수연발이고 언젠가 내가 마지막 제자를 받을 즈음이면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싶다.

"고대 인도 우화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 쥐가 한 마리 살았는데 고양이를 무서워해서 늘 벌벌 떨곤 했다.  보다 못한 마술사가 그를 불쌍히 여겨 고양이로 만들어주었다.  그랬더니 이번엔 개가 무서워 쩔쩔 맸다.  마술사는 다시 한번 마술을 부려 그를 개로 만들어주었다.  그러자 이젠 표범을 무서워했다.  마술사는 또다시 그를 표범으로 만들어주었다.  그런데 이번엔 사냥꾼을 무서워하는 게 아닌가?  이젠 마술사도 두 손 두 발을 모두 들 수밖에 없었다.  표범을 원래의 쥐 모습으로 되돌려놓고 마술사는 말했다.
"내가 아무리 애를 쓴들 네놈에겐 아무런 소용이 없어.  겉을 아무리 바꾸어도 네 마음속에서 너 자신의 모습은 늘 쥐일 뿐이야."

겉모습을 바꿀 수 있다고 해서 내면의 모습까지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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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사는 게 참 아프다. 
어제 소식을 들은 즉시 달려갔어야 했는데...
나는 전화를 받고 한참이나 갈등했었다.  그 시각 나는 아내와 아들을 대동하고 분당의 한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다.  빗줄기가 점차 거세지는 밖을 바라보며 내가 가르치는 아이의 슬픈 얼굴을 애써 외면했다.  그리고 내가 달려갈 수 없는 여러 이유를 마음속으로 구차하게 떠올리고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나 자신을 합리화하고 있었다.

오늘 사무실에 사정을 말하고 조문을 갔었다.
폐암으로 투병을 하던 아이의 어머니는 아마 눈을 감지 못했을 것이다.
늘 술에 취해 있는 아이의 아버지와 굽은 허리로도 손주들을 위해 노동일을 하시는 할머니,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장녀에게 지워질 책임을 어머니는 죽는 순간까지 안타까워 했을 것이다.  눈이 퉁퉁 부은 채 조문객을 맞는 아이를 보자 눈물이 왈칵 솟았다.

여전히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아이는 내 손을 잡고 한참이나 울었다.
손사래를 치며 거부하는 아이의 여린 손에 약간의 돈을 쥐어 주었다.  그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상황.  나는 아이의 미래가 아득하기만 했다. 
여전히 나는 그녀의 선생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타인'임을 절감한다.

그 아이를 처음 만났을 때 아이는 나이답지 않게 당돌했었다.
자신이 다니는 학교와 자신의 성적만 밝히며 자신의 부모에 대해서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열심히 공부해서 대학을 가고싶다며 입을 앙다물던 아이.  나는 엄마든 아버지든 부모 중 한 사람을 모셔오지 않으면 받아줄 수 없다고 버텼다.  그러자 그 아이는 어차피 자신은 고아나 다름없으니 부모는 모셔올 수 없다며 그냥 공부만 하게 해달라고 당당하게 말했었다.  나는 속으로 참 맹랑한 아이라고 생각하며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아이의 가정형편은 같이 공부하는 친구로부터 들었다. 
그 후 나는 아이 어머니가 입원한 병원으로 한차례 병문안을 갔었다.
아이만 맡기고 찾아 뵙지도 못해 미안하다는 어머니의 말에 아이가 참 야무지다고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다며 빨리 쾌차하시기만 하면 다 잘될 것이라고 말했다.
아이는 그동안 단 한 번도 내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았었다.
다들 형편이 고만고만한 아이들만 모아 가르치고 있지만 그 중에는 유난히 일찍 철이 든 아이들이 있다.  그 아이는 말없이 공부만 할 뿐 게으름이라고는 몰랐다.

그랬던 그 아이의 엄마가 어제 죽었다.
세상에서 마음으로 의지할 수 있는 단 한 명의 사람을 잃고 그 아이는 오열했다.
나는 막차를 타고서라도 어제 이곳으로 내려왔어야 했다.  가장 외로웠을 때 나는 그곳에 없었고, 의례적인 조문객으로 그 아이를 찾았다.  그 아이가 희망을 잃지 않고 나의 숙소를 다시 찾아올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나는 오늘 중학생 수업을 간신히 마치고 고등학생들은 수업을 하지 못하겠다고 알렸다.
어린 동생을 데리고 이 험난한 삶을 헤쳐가야 하는 아이의 미래가 미어지도록 가슴 아프다.
오늘은 정말 너무너무 사는 게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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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1-05-12 0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학생, 앞으로도 그렇게 앙다문 마음으로 열심히 살아가길, 먼저 세상을 뜨신 엄마의 염원이 기운을 떨어뜨리지 않고 오히려 기운을 실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옆에서 그런 학생들의 경우를 종종 보실텐데 그럴 때마다 선생님의 입장에서도 참 마음이 무거우시겠어요. 하지만 그래서 더 의미있는 일을 하고 계신거겠지요. 꼼쥐님도 힘 내시고요.
사는거, 아프지요. 감히 저도 동의합니다.

꼼쥐 2011-05-13 15:15   좋아요 0 | URL
어제는 회사일도 손에 잡히지 않고 밥맛도 없어서 하루 종일 우울했어요.
오늘 화장을 할텐데 이틀씩이나 회사에서 나올 수는 없어서 마음만 무겁습니다. 아이가 받은 마음의 상처가 깊어지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답니다.
 
밀레나에게 보내는 편지 범우비평판세계문학선 19
프란츠 카프카 지음, 박환덕 옮김 / 범우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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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의 원천은 무엇일까?
그 대답은 사람에 따라 각각 다를 수  수 있겠으나, 내 생각에 마르지 않는 창조의 샘은 그리움이 아닐까 싶다.  그 대상이 사람이 아닌 자연이나 우주로 확장할 수 있음은 물론이다.
무엇인가 가슴에 품고 늘 그리워할 수 있는 마음은 그 대상을 조금 더 많이, 더 잘, 그리고 더 가까이 있고 싶게 만들고,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들을 그리움의 대상과 결부지어 생각하도록 한다.  종국에는 나 자신을 초월하여 그리운 대상과의 일치를 꿈꾸게 한다.

그리운 대상과의 일치를 간절히 원할 때, 그 욕망의 극점에 이르는 현상을 ’몰입’, ’사랑’, ’그리움’, ’넋이 나감’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하지만 그 마음의 기저에는 언제나 그리움이 있었다.
그러므로 예술가에게 그리움의 상실은 창조의 샘이 마르고 예술가로서의 삶도 끝났음을 의미하는 것과 같다.  가족, 연인, 자연 등 그리움의 대상은 비록 서로 다를지라도 가까이 다가가고 싶은 간절함의 정도가 더할수록 그가 이룰 수 있는 성취는 커질 것이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 그리움의 대상은 무엇일까?
당연하게도 이성에게 느끼는 자연스러운 끌림이 그 중 으뜸이리라.  일정한 거리를 두고 평생 사랑할 수 있는 연인이 있다면 당사자는 비록 그 넘을 수 없는 한계에 아득함을 느끼겠지만 그럼으로써 더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다는 점에서 축복이라 말해도 좋을 것이다.  설령 그 대상이 닿을 수 없는 신이나, 되찾을 수 없는 조국, 먼저 떠난 가족일지라도 이룰 수 없는 사랑임에는 연인과 무엇이 다르랴.

1919년에 시작하여 1924년까지 계속된 카프카의 편지는 한 여인을 향한 뜨거운 열정이 그의 작품에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세 번의 약혼과 세 번의 파혼, 폐결핵을 앓는 병든 몸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선택했던 카프카.  카프카의 표현을 빌자면 ‘살아있는 불덩이’같은 밀레나는 진보계층을 형성한 ‘미네르바’출신의 그룹 중에서도 단연 두각을 나타내는 존재였다. 대학에서 음악과 의학을 전공한 그녀는 지적이고 뜨거웠으며 물불을 가리지 않는 소비벽을 지녔는가 하면 온몸을 다바쳐 남을 도와주는 헌신적인 성향을 보여주기도 했다.

밀레나는 또한 동료들과 괴팍한 행동으로 화제를 뿌리고 다니기도 했다. 한밤중에 공동묘지로 소풍을 가는가 하면 옷을 입은 채로 몰다우강에 뛰어들어 수영을 하기도 했다. 이들은 화가나 문인,가수와 첫사랑을 나누기도 했고 이사도라 던컨식의 물결치는 의상을 입고 다니며 앞서가는 생존방식을 유감없이 발휘하였다.

카프카의 친구 오스카 폴락의 부인이기도 했던 밀레나와 카프카가 만난 것은 그의 작품을 체코어로 번역하는 일이 계기가 되었다. 밀레나가 번역한 단편 <화부>는 카프카의 작품이 외국어로 번역된 최초의 사례가 되었다.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난 그녀를 만난 카프카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녀와의 만남에서 깊은 인상을 받아 이후 밀레나와의 교류를 지속하였다. 이때부터 카프카에게는 일종의 정신적 피난처가 생긴 셈이었다.

동시에 카프카가 지닌 ‘불안’에 대해서 밀레나가 얼마나 깊은 이해를 하였는가 하는 것도 카프카의 동료 막스 브로트와 그녀가 나눈 대화를 통해 확인이 된다. 카프카의 말년에 빈으로 이주한 밀레나는 프라하로 카프카를 자주 찾게 되는데 이 무렵 그때까지 쓴 일기를 그가 그녀에게 넘겨주었다는 사실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밀레나는 카프카로서 보면 삶과 예술이라는 상호 모순된 양방향의 길을 공유할 수 있는 유형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카프카와 밀레나의 사랑은 예술가의 비극적인 사랑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는 미완의 것이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시대라는 어두운 그림자를 배경으로 해서 두 사람 다 서글픈 최후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삶과 예술로 분열된 세계에서 문학을 통해 그 두 세계를 화해시키려고 노력하다가 불치병으로 생을 마치는 방식과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철저히 잊혀진 존재로 소멸되는 방식의 결합은 미완의 사랑을 매듭짓는 형식 중에서도 가장 비극적인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두 사람은 나이 차이가 컸고(13년) 밀레나는 기혼자였으며 자신의 기질과 상관없이 엄격한 가풍의 딸이었던 그녀에게 카프카의 유대인 신분은 간단치 않은 벽이기도 했다. 보다 큰 문제는 카프카에게 있었다. 그는 현실의 사랑을 완성할 정신적인 에너지가 당시로서는 고갈된 상태였다. 당시로서는 불치병이었던 자신의 결핵을 확인한 카프카는 그 사랑을 추진할 심리상태가 되지 못했고 밀레나의 정열을 받아들이기에는 그의 세계에 대한 불안이 너무도 컸다.


"인간은 이제껏 나를 기만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편지는 항상 나를 기만했습니다.  그것도 타인의 편지가 아닌 내 자신의 편지가 말입니다.  그것은 나의 경우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특수한 불행이지만, 동시에 이 세상의 일반적인 불행이기도 합니다.  손쉽게 편지를 쓸 수 있는 가능성은 틀림없이 - 다만 이론적으로 볼 때- 영혼의 섬뜩한 혼란을 세상에 가져온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유령과의 교신인데, 그것도 편지 수신자로서의 유령과의 교신일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의 유령과의 교신이기도 합니다.  후자의 유령은 편지를 쓰는 사람의 손에 의해 편지 속에서 성장하고 혹은 다시 어떤 편지가 다른 편지의 증거가 되어 이 편지를 증인으로 내세울 때에는 일련의 편지 속에서도 성장합니다.  인간들은 어떻게 서로 편지로 교신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 것일까요!  멀리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 있고 가까이 있는 사람에 대해서는 붙잡을 수 있지만, 그 밖의 다른 모든 것은 인간의 힘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러나 편지를 쓴다는 것은 탐욕스럽게 편지를 기다리고 있는 유령 앞에서 발가벗는 것을 의미합니다.  편지에 쓰여진 키스는 보내질 장소에 도착하지 못하고 유령이 도중에 홀딱 마셔 버립니다.  (P354 , 1922년 프라하에서 쓴 카프카의 편지 중에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완성된 사랑은 그래서 완료형이 되어버린 사랑은 예술의 속성과는 거리가 멀다.   탈출구가 없는 사랑의 열기는 예술가의 영혼을 사르고 급기야 까만 밤에 별로 남는다.  우리는 오늘도 밤하늘의 별을 보며 까맣게 타들어가는 어느 예술가의 영혼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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