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대학 시절 나와 친하게 지내던 선배 한 분이 전화를 했다.
무심한 성격인 나는 알고 지내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도 언제나 마음 뿐이지 금세 잊어버리곤 한다.  그러다 보면 가까운 사람들과도 한달에 한번 이상 통화하기가 어렵다.  그래서일까 나이나 성별을 무시하고 내 전화를 기다리기 보다는 상대방이 먼저 전화를 하는 경우가 더 많다.  잘못된 습관인 줄 뻔히 알면서도 쉽게 고쳐지지 않는다.

선배는 참 재주가 많은 사람이었다.
당시 여의도의 작은 사무실에서 무역업을 하던 선배는 바쁜 와중에도 짬을 내어 자신의 취미 생활에 열심이었다.  그런 날이면 언제나 내게 전화를 했다.  시골에서 문화생활이라곤 누려 본 적이 없는 나를 가엾게 여긴 탓인지, 아니면 연애에는 통 관심이 없었던 사람인지라 마땅히 같이 갈 사람을 찾기 어려웠던 까닭인지, 그도 저도 아니면 공짜 티켓을 그냥 버리기가 아까워서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반 강제적으로 나를 공연장으로 끌고 다녔다.

언젠가 서초동 예술의 전당에서 아시안 유스 오케스트라의 내한 공연이 있었다.
그날도 선배는 내게 전화를 걸어 강의 이후 시간을 비워두라는 명령(?)을 하고는 다짜고짜 내가 다니는 대학으로 데리러 오겠다며 기다리라고 했다.  작은 일에도 잘 삐치는 성격의 선배인지라 나는 감히 선배의 청을 거절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게다가 선배의 사무실에서 우리 학교까지는 자가용으로도 족히 한 시간 이상이 걸리는 먼 거리였고, 학교에서 예술의 전당까지는 더 멀었다.  정체가 심한 퇴근 시간에 그런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데리러 오겠다는 선배의 성의(?)가 가상하기도 했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는 공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었다.
당시 클래식에 문외한이었던 나는 격식을 갖춘 그런 자리가 영 마뜩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갖춰 입을 옷도 없었고, 길고 지루한 공연 시간 내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걱정이었으니 결코 편안한 자리는 아니었다.  그런 나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선배는 마냥 들뜬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 구스타프 말러의 열렬한 팬이었던 선배는 말러의 곡이 연주되는 곳이라면 어디든 가리지 않고 찾아가곤 했었다.

그날의 공연은 미국의 유명한 작곡가겸 지휘자인 루카스 포스가 지휘봉을 잡고 소프라노 엘리 아멜링이 협연했으며 연주 프로그램은 다케미스의 `오각정원으로 흘러내리는 한줌의 선율', 말러의 `교향곡 제 4번'이었다.  선배는 잔잔한 클래식 선율에 한껏 도취되어 내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렇게 한여름 밤의 낭만에 흠뻑 취한 선배와는 달리 나는 공연이 빨리 끝나기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선배는 악기를 잘 다루지는 못했지만 음악 공연을 갈 때는 그날 연주될 곡목의 악보를 구해 거의 외다시피 한 후에 공연장을 찾는 사람이었다.  청중의 입장에서 선배는 애호가의 수준을 넘어 준 프로급의 음악인이었다.  그러니 그 당시 선배의 눈에 나는 얼마나 한심해 보였겠는가.  예술의 전당 건너편의 감자탕집에서 늦은 저녁을 먹으면서도 선배의 공연 이야기는 그치지 않았다.  학창시절 공부와는 담을 쌓고 살았다는 선배의 고백이 믿기 어려웠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는 열정을 잃지 않았던 선배를 통하여 나는 많은 것을 배웠다.

나는 요즘도 가끔 시집(詩集)을 펼칠 때면 선배 생각을 하며 마음에 드는 시 몇 편쯤은 외우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가끔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할 때가 있다.  그것이 대중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마다하지 않는 예술가의 노력에 대한 작은 보답이이라고 믿는다.  우리는 그들의 노력을 너무 쉽게 잊고, 너무 쉽게 흘려버리며 사는지도 모른다.

열정적인 음악 애호가로, 사업가로, 아마추어 골퍼로 살면서도 여전히 연애에는 무관심한 선배는 이 여름의 더위에도 시원한 미소를 짓게 하는 사람이다.
"형, 그거 아시우?  올해 형 나이가 도대체 몇이우?  제발 장가 좀 드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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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를 통 털어 우리나라만큼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나라가 있을까?
다른 나라에서 뉴스를 보면 우리나라에서는 기사 거리도 될 성 싶지 않은 뉴스가 버젓이 메인 뉴스에 등장하곤 한다.  그럴 때 슬며시 드는 생각은 나같은 외국인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서 혹시 안 좋은 이야기라도 퍼뜨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 일부러 걸러내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 때도 있다.  물론 그렇지야 않겠지만 단 하루도 조용히 지나가는 날이 없는 우리나라와 비교해서 너무나 조용하고 평온해 보이는 것이다.  물론 어느 나라건 자국의 이미지에 먹칠을 할만한 기사는 은근슬쩍 감추고 싶은 것도 있을테고, 실제로 그런 경우가 없다고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개인의 범죄나 사건 사고는 낱낱이 공개되는 반면 유독 기업의 비리나 범죄 행위는 거의 기사화되지 않는다.  이것도 국격을 높이는데 도움이 될까 싶은데 언론이나 정부의 생각은 다른가 보다.
주지하다시피 기업의 범죄가 기사화되지 않는 데는 언론과 기업의 유착관계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지만 국민들의 인식도 한몫 하고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지난 월요일 MBC의 PD수첩에서는 <무늬만 ’동반성장?’ 위기의 중소기업>이라는 제목하에 대기업의 협력업체의 납품단가 인하요구 실태, 영세 상인들의 시장으로 인식되던 순대 시장 및 MRO 시장( MRO기
업이란  각종 사무용품에서부터 공구, 문구류, 건설자재 같은 소모성 자재들을 구매 대행하는 업체)에 진출한 대기업 및 특허권 분쟁을 통해 중소기업의 기술을 약탈하는 대기업의 실태를 보도했다.  갈수록 커져가는 대기업의 문어발식 사업 확장, 말로만 외치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상생은 이미 그 도를 넘어 국민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이미 재벌권력은 언론권력을 장악하고 정치권력마저 무력화시킨 모습이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대기업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해 인터뷰에 응한 직원의 표정에서였다.  무엇이 잘못인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투의 침착한 어조로  담담하게 말을 이어가는 그 직원의 표정은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대기업이 돈을 벌어 재투자를 하든, 그렇지 않고 유보금으로 남겨 놓든 그것은 그들의 자유라고 볼 수 있다.  비록 재투자가 이루어지지 않아 청년 실업 문제 해결에 어려움이 많지만 대기업도 봉사단체가 아닌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임을 감안할 때 재투자를 강제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소규모 영세 상인의 생존권마저 침해하는 것은 일종의 약탈적 살인행위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중대한 범죄를 자행한 기업에 몸을 담고 있는 자신을 부끄러워 하거나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표하기는커녕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식의 인터뷰는 양심이 실종된 우리 사회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여준 것이다.  혹자는 ’직원이 뭔 잘못이냐? 책임이 있다면 경영자의 잘못이지 직원은 위에서 시키니까 어쩔 수 없이 한 것이 아니냐?’하고 항변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살인을 교사한 사람만 처벌받고 범행을 실행한 사람은 면죄되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주제에서 빗나간 이야기지만 교수형 시에는 발판 제거 버튼을 여러 명이 동시에 누른다고 한다.
알다시피 총살형 시에도 여러 명이 총을 쏜다.  뿐만 아니라 테러진압 등의 특수상황에서 테러범을 사살 할 때도 반드시 2명 이상이 조준사격하도록 되어있다. 단순히 "정의감"으로 인해 사람을 죽이기에는 죄책감이 너무 크게 작용하므로 여러 명이 그것을 나누어 가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론적으로 사람은 죄책감을 0에 무한히 가깝게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엄청나게 많은 사람이 그 죄책감을 나눠 가진다면.  범죄에 참여하는 모든 행위자는 "내가 한 건 아니니까"라고 생각하지만, 마음 속 한구석엔 모두가
"나도 범죄에 참가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와 같이 범죄에 가담한 모두가 죄책감을 나누어 가진 상황에서는 그 느끼는 강도가 지극히 약화되므로 이런 여건만 조성된다면 살인도 가능한 것이다.

게다가 어려서부터 1박 2일을 보며 자란 우리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이렇게 외치곤 한다.  "나만 아니면 돼!"  이런 교육이 세상에 또 있을까?  승자 독식의 단계를 넘어 다른 사람의 생존을 위협하면서도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사회.  나도 비록 기업체의 직원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가끔 나 자신을 뒤돌아보곤 한다.  내 업무로 인해 다른 누군가가 피해를 입고 있지는 않은지.

여전히 비는 멈추지 않고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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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세뇌 - 당신이 의존하는 모든 나쁜 것들로부터 벗어나는 법
이소무라 다케시 지음, 이인애 옮김 / 더숲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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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다수의 흡연자라면 식사 후의 나른한 포만감과 함께 찾아 오는 담배 한 개피의 유혹을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요즘은 대부분의 식당이 금연으로 지정되어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만 불과 몇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회식 자리에서의 흡연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변하였고, 흡연자들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기만 한다.  식당이나 커피숍은 말할 것도 없고 오픈된 공간인 공원에서도 담배를 입에 물었다가는 가볍지 않은 벌금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비흡연자라면 쌍수를 들고 반길 일이지만 흡연자들에게는 낙원과 같았던 지난 시절을 돌이켜 볼 때 그야말로 ’아~ 옛날이여!’를 외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이런 불편이나 지탄의 눈총에도 흡연을 고집하는 데느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내가 흡연자이니 흡연자를 비호하거나 변명을 하기 위해 쓰는 글은 아니다.  오히려 당장이라도 끊고 싶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흡연자의 고충도 비흡연자가 알았으면 한다.
나라고 금연을 결심하거나 실천하려고 단 한번도 노력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아내가 약국에서 근무할 때 가져다 준 금연 패치도 붙여 보았고, 한방병원에서 금연침도 맞아보았으나 백방이 무효했다.  결국 나는 담배의 끈질긴 유혹에 굴복하고 말았다.

처음부터 담배의 향이나 연기를 좋아했던 사람은 아마 없지 싶다.
이 책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그것이 담배의 트릭이란다.  담배를 처음 피우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구토나 어지럼증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지지만 그것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의 의지로 언제든 담배를 끊을 수 있다고 믿게 된다는 것이다.  자신이 그닥 좋아하지도 않는 것이니 맘만 먹으면 언제든 끊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고 나도 그랬다.  그것이 속임수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돌이켜 보면 어렸을 때 나는 담배를 좋아하기는커녕 지극히 혐오했었다.
그때만 해도 어른들은 열차 안에서건, 버스 안에서건 구애받지 않고 담배를 피웠다.  유난히 멀미가 심했던 나는 열차나 버스를 탈 때는 으레 옆좌석에 앉은 사람의 인상을 살피곤 했다.  담배에 찌든 중년의 남성이 옆에 앉으면 슬그머니 일어나 다른 곳으로 옮겨 앉았고, 담배 연기로부터 안전한 다른 자리가 없으면 내내 서서 가기도 했었다. 

이 책은 담배를 비롯한 알코올, 다이어트, 인터넷게임, 섹스, 일 중독, 사이비종교 등으로 세뇌된 마음을 분석하고 이러한 의존증을 치료하기 위해 씌여진 것이지만 본인의 의지와 실천을 강조하는 기존의 책들과는 구별된다.  언젠가 나는 블로그에서 "생각의 오류"라는 제목으로 중독에 대해 짧게 썼었다.  그 때의 글을 옮겨보면 이렇다.  "  중독은 자신이 싫어하는 대상과 마주할 용기가 없을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우리는 중독이 좋아하는 대상으로 끌리는 현상이라 이해한다.  중독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좋아하는 것을 끊는 것이 아니라 싫어하는 것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가능하다."

그때 나는 어떤 과학적 근거를 갖고 쓴 것은 아니었지만 이 책의 내용과 일견 상통하는 면이 있어 옮겨본 것이다.  저자는 의존증에 대한 실체와 원인을 정확히 깨닫는 것만이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한다.

"직접적인 공포와 얼마간의 쾌락이 이어지는 보상의 이중구조, 그리고 변성의식 상태에 따른 정신적 영향이야말로 세뇌나 의존증에 지배당하는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이중세뇌’구조다."  (P.93)

"담배를 피우지 않는 사람은 담배를 피우고 싶어질까? 답은 ’아니요’다.  요컨대 ’본래 인간에게는 담배에 대한 욕구가 없다’라는 얘기다.  욕구 때문에 담배를 피우는 것이 아니라 담배 때문에 욕구가 생겨난 것이다.  즉 담배에 대한 욕구란 담배 자체가 만들어낸 것이다."  (P.87)

담배를 피움으로써 얻는 도파민이나   알파(α)파는 이것들을 생성하는 신체의 신경을 마비시켜 신체적 의존과 심리적 의존을 가중시킨다고 한다.  하지만 담배를 끊으면 신경이 서서히 회복되어  α파가 증가하고 도파민도 늘어난다.  그러면 행복을 느끼기 쉬워지며 스트레스에 대처하는 힘이 회복되며, 결과적으로는 스트레스를 적게 받는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담배를 끊는 획기적인 방법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의존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진단하에 의존증에 이르는 과정과 그 결과를 정확히 인지함으로써 의존증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결심과 노력이 이어질 것이라고 저자는 판단한다.  이른바 ’깨달음의 치료’인 것이다.  나를 비롯한 모든 흡연자, 더 나아가서 모든 의존증 환자라면 꼭 읽어야할 좋은 책이다.
이제는 정말 금연을 실천할 때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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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개의 전통
랠프 네이더 지음, 정영목 옮김 / 재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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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부모가 되는 것도 어렵지만, 아이의 입장에서 바라볼 때 좋은 부모를 만나는 것은 행운이고 더할 수 없는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부모도 아이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에 빠지기도 한다.  그만큼 아이에게 있어 부모는 그의(또는 그녀의) 삶을 관통하여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그 영향력도 지대하기 때문이다.  나도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입장이고 내가 사는 동네의 아이들에게 약간의 지식을 전달하는 보조자의 입장이다 보니 부모의 역할과 그 영향력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역설적이게도 부모가 아이를 또는 아이가 부모를 선택할 수 없기 때문에 좋은 부모, 또는 좋은 자녀가 되려고 더 노력하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내가 동네의 가난한 집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면서 그들의 가정환경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에게 차라리 부모가 존재하지 않거나 그들의 부모가 친권을 포기한다면 이 아이들이 지금보다 더 잘 성장할 수 있을텐데 하는 극단적인 안타까움을 느낀 적도 많았다.  아이들이 그런 부모 밑에서 태어난 것이 그들의 잘못도 아닌데 부모로부터 도움을 받기는커녕 부모로 인해 사회의 차가운 시선과 멸시를 받는다면 너무나 부당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내가 좋은 부모의 표본이라거나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을 모두 돌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이 책의 저자 랠프 네이더는 미국에서 태어난 레바논 이민 2세대로서 지난 40년간 미국의 소비자-시민운동을 이끌어온 저명한 사회운동가이기도 하다.  저자가 40여 년간 미국 소비자―시민의 대변인으로서 정부와 대기업의 부정, 부패를 폭로하고 각종 세제 개혁과 핵 규제, 소비자를 위한 법률 제정에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100여 개가 넘는 시민 단체를 조직, 설립하는 등 시민운동의 상징적 존재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윈스테드의 아름다운 자연과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소중한 전통이 있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둘 다 거의 백년을 살았다.  우리는 아주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의 풍부한 경험에 바탕을 둔 통찰과 지혜의 도움을 받았다.  그들은 언제나 젊었다.  늘 "흥미를 느끼고 또 흥미를 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는 어머니의 확고한 믿음을 실제로 생활 속에서 체현했기 때문이다.  ...... 우리의 부모가 가족의 기초를 굳건하게 닦아 놓은 덕분에 우리는 그것을 발판으로 더 넓은 세계로 힘차게 나아가 높은 기대감을 갖고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었다."  (P.14)

랠프 네이더는 이 책 <열일곱 개의 전통>을 통해 코네티컷 주 윈스테드의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자라났던 유년 시절을 회고하면서, 다양한 일화를 통해 부모가 자신에게 물려주려 노력했던 각종 전통의 핵심적인 내용을 열일곱 개로 요약한다.  우리는 가끔 ’엄친아’로 길러 낸 어느 부모의 교육 비결을 언론 매체를 통하여 접하게 된다.  그 중 빠지지 않고 읽게 되는 것은 부모의 모범과 확고한 원칙이다.  어쩌면 좋은 부모는 부모로서의 책무를 다하겠다는 강한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날에는 점점 많은 가족이 자신의 책임 - 아이들을 먹이고 즐겁게 해 주고, 교육하고 자문해 주고, 매일 돌보고 충고해 주는 일 - 을 상업적인 서비스 제공자에게 맡겨 버린다.  ’가족 산업’은 미국 경제에서 급속하게 현실적인 요소가 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대가가 따른다.  부모는 점점 ’전문가’의 도움 없이 결정을 내리는 자신의 능력에 자신감을 잃는다.  기업이 의도적으로 우리 자녀에 대한 부모의 역할을 잠식하면서, 아이들은 부모와 개인적으로 만나는 시간이 줄어든다.  가장 중요한 전통들은 중단되고 만다."   (P.198)   

저자는 자신의 유년의 정신적 풍경을 '강한 모범과 분명한 경계, 목격과 존경, 그리고 무엇보다도 부모의 사랑과 희생의 힘이 지배하는 분위기'라고 묘사한다.  이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부모를 진심으로 존경하고 부모를 떠올릴 때마다 따뜻한 미소와 함께 살아갈 용기를 얻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책의 저자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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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스완 - 0.1%의 가능성이 모든 것을 바꾼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 지음, 차익종 옮김 / 동녘사이언스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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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생각이나 느낌과 딱 들어맞는 책을 만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1년에 발행되는 책의 권수로만 따져도 1억권이 넘으니 그 많은 책 중에서 자신의 생각과 일치하는 책을 고른다는 것은 노력만으로는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닐 것이다.  우연히 만난 책 한 권이 그동안 꾸준히 생각하고는 있었으나 정리가 되지 않았던, 안개에 묻혀 희미한 의식으로만 살아있던 자신의 생각을 논리적으로 잘 정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까지 확장하여 설명하고 있다면 그보다 더한 행운이 있을까.  갑자기 시야가 환해지는 느낌에 더하여 막혔던 가슴이 뻥 뚫리는 듯한 시원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내게 <블랙 스완>은 그런 책이었다.
2001년 9.11 테러가 발발하기 전까지 나는 한동안 전업 투자자로 살았었다.  운이 좋았는지 나는 많지 않은 투자 원금에서 발생하는 수익만으로도 생활비와 저축을 모두 해결할 수 있었다.  그렇게 평온한 날들이 흘렀고, 2001년 9월 11일 화요일.
평소와 다름없이 거래를 마치고 다음날 거래할 종목의 챠트 분석까지 끝낸 후 동료들과 홀가분한 마음으로 저녁을 먹었다.  밤이 늦어서야 집에 돌아왔고, 습관처럼 TV를 켰다.

그때 화면에서 속보로 전해지던 쌍둥이 빌딩의 폭파 장면은 마치 영화 속의 한 장면처럼 지금도 생생하다.  그날 내가 샀던 종목의 주가가 다음날 얼마나 떨어질까 하는 고민보다는 폭파 장면의 비현실성으로 인해 꿈을 꾸고 있는 듯한 느낌만 들었다.  3시간이나 늦게 열린 주식시장은 그야말로 하한가 일색이었다.  나 또한 내가 보유했던 모든 주식을 하한가에 던졌다.  그중 일부만 매도가 체결되었고 대부분의 주식을 울며 겨자먹기로 다음날까지 보유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도 상황은 그닥 나아지지 않은 모습이었다.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주식을 팔고자 애를 쓰는 모습이었고, 호가창에는 매도 물량이 넘쳐났다.  그 상황에서 가격은 중요하지 않았다.  오직 내 주식을 누군가가 사주기만을 간절히 바라면서 지루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나는 불과 이틀만에 그동안 겪어보지 못했던 많은 손실을 보고 주식을 모두 정리했다.  다행이었던 것은 그동안 나는 매월 주식 거래를 통하여 얻은 이익은 생활비와 저축으로 돌려왔었고, 그때 투자 원금으로 남아있었던 돈은 수익금의 일부였다.

나는 증권계좌를 모두 정리하고 주식시장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큰 사건을 예측하지 못한다면 결국 그와 같은 상황이 재발했을 때 똑 같은 실수를 반복할테고 수익을 낸다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렇게 무능한 시세 추종자로 남기는 싫었다.  그리고 한동안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 증권사에 근무하던 대학 동기가 선물,옵션을 공부해보라며 자신의 책을 택배로 보냈다.  나는 그저 배워두면 손해날 것도 없겠다 싶어 틈틈이 책을 읽었고, 친구의 권유로 선물,옵션 거래를 했었지만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짧은 기간의 거래가 일반 주식의 거래에서 얻은 수익보다 몇 배나 높았다는 사실을 보며 많이 놀랐었다.

상,하한가라는 안전장치가 마련된 일반 주식시장과 달리 그런 안전망이 존재하지 않는 고위험군 선물,옵션 시장에서 수익을 낼 수 있었던 것은 정보의 취합이나 성실한 챠트의 분석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그런 불합리성은 어디에서 오는가?  그때 내가 품었던 의문은 지금까지 이어졌었고, 이 책을 읽으면서 그 궁금증이 어느 정도 풀렸다.  이 책에서 여러 번 언급되는 9.11 테러와 같은 예측 불가능한 사건을 저자는 '블랙 스완'이라고 지칭하며 왜 인간은 그런 불확실하고 돌발적인 사건의 예측에 취약할 수밖에(어쩌면 예측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인간에게 극심한 충격을 주는 이러한 극단적 사건은 과거의 경험으로도 결코 추론할 수 없음을 저자는 조목조목 짚고 있다.  저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려하는 것은 근심할 필요가 없음을 지적한다.  즉, 우리는 눈에 보이는 위험만을 인지하고 오직 그것을 걱정하지만 우리의 의식과 일상적 화제 바깥에 도사린 문제, 즉 검은 백조의 출현은 의심하거나 걱정하지 않는다.

경험적 회의론자인 저자의 견해는 우연성이 개입할 수 없는 대다수 사람들에게 낯설고 생뚱맞은 이론으로 비쳐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는 피할 수 없는 '블랙 스완'에 의해 진행되고 있으니 어찌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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