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바지 무더위가 며칠째 기승을 부린다.
높아진 하늘에 어울리지 않는 풍경이다.  지평선을 경계로 가을과 여름이 함께 머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이다.   오늘도 한낮에는 양산을 받쳐 들고 허위허위 힘겹게 걷는 한 할머니의 뒤를 무더위에 지친 나른한 권태가 졸졸 뒤쫓는 듯했다.  이따금 건듯건듯 불어오는 바람에 그나마 가을이 멀지 않음을 느낄 뿐이다.

금년 여름에는 산행을 거의 하지 못했다.
까닭인즉 모기 때문인데, 날씨가 본격적으로 더워지기 전에는 긴소매, 긴바지를 입고 모기떼에 대항했으나 모기보다 무서운 것은 더위였다.  산행을 하고 땀을 한 바가지쯤 흘리고 나면 제풀에 제가 쓰러지는 격으로 아침부터 피곤이 몰려오곤 했다.  그래서 산 대신에 다른 운동 장소로 선택한 곳이 근처의 체육공원이었다.  가운데 축구장만한 잔디밭이 있고, 바깥에는 650m의 트랙과 여러 운동기구가 설치되어 있어 딴에는 흡족하였다.  더군다나 반바지,반소매 차림에도 모기에 물리지 않으니 그보다 좋은 것이 없었다.

내가 그 공원으로 아침운동을 나가면서부터 내가 가르치는 아이 중 한 학생이 자신의 아버지를 대동하고 아침운동을 나왔다.  그 아이의 아버지는 나와 동갑으로 평소에 친구처럼 허물없이 지내던 사이라 그 또한 좋았다.  방학 기간에는 새벽 6시에 나가 1시간 남짓 운동을 하고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한 후 조촐한 아침 식사를 하여도 그리 서두르지 않고 출근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개학을 하자 학교에 늦는다며 30분 앞당기는 바람에 덩달아 나의 기상 시간도 빨라졌다.

내가 운동 장소를 바꾼 지 며칠 지나지 않아 직장 동료 중 한 명이 혹시 아침마다 밀회를 즐기는 게 아니냐며 농을 걸었다.  직장 때문에 주말부부로 사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동료들이기에 가끔 소개팅을 주선하겠다는 둥, 남 모르게 몰래 데이트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둥 잊을만 하면 내가 혼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농을 걸어 일깨우던 그들이었다.  내가 숙소 주변의 중고생들을 모아 영어, 수학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도 그런 농지거리의 대상에서 벗어나고자 함이었다. 

내가 운동을 하는 시각에는 남자들이 대부분이고, 여자라고는 나이 지긋한 할머니들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40대쯤으로 보이는 여자 한 분이 홀연히 등장하여 뭇 남성들의 시선을 붙잡았다.  호리낭창한 체격에 등을 꼿꼿이 세우고 걷는 본새가 운동을 여간 오래 하지 않았겠구나 하고 느끼게 하였다.  게다가 그 여인의 옷 매무시도 돋보였다.  매일 바뀌는 골프웨어에 장갑까지 끼고는 보란듯이 걷는데 웬만한 남자들의 잰걸음으로도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나도 여러 번 시도해 봤지만 허사였다.  그나마 나는 가볍게 조깅을 하는 탓에 뒤쳐지지 않지만 무작정 걷는 학생의 아버지는 은근히 부아가 치미는지 운동을 마치면 늘 그 여인에 대해 말하곤 했다.  그 여자도 남자들의 그런 시선을 왜 느끼지 못하겠는가.  아실랑아실랑 걸으며 가끔 표나지 않게 하는 곁눈질을 나도 여러 번 목격했다.  아무튼 그 여인으로 인해 이야깃거리가 늘어난 것만은 분명하다.  아침마다 운동을 하러 나서는 길이 은근히 기다려지니 말이다.

다음주 월요일엔 나도 기운을 내어 그 여인의 걸음을 앞질러 보아야겠다.  잘 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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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03 13: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17 14: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습관이란 참으로 질긴 것이어서 아내로부터의 잦은 잔소리에도 불구하고 고쳐지지 않는 것이 있다.
그 중 하나가 오래된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것인데 따지고 보면 못된 습관도 아닌 듯하다.  아내에게는 밝히지 않았지만 내가 지닌 물건을 버리기 아까워서 그런 태도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구매시기를 차일피일 미루다 보면 적당한 때를 번번이 놓치는 까닭에 그리 된 것일뿐, 나의 성품이 지극히 인색하다거나 돈이라면 벌벌 떠는 쫌생이 기질을 타고 났다고는 볼 수 없다.  어쩌면 쇼핑을 즐기지 않는 데 그 이유가 있다고도 말할 수 있겠다.  말하자면 내가 꺼리는 일에는 유독 게으름을 피우는 유아기적 태도가 아직도 내 몸에 남아있다고 고백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지난 달에 나는 17년 동안 타던 승용차를 폐차하고 장인어른으로부터 11년 된 차를 그 대신으로 물려받았다.  그도 따지고 보면 내 자발적 의사는 아니었고, 손윗 동서가 안식년을 맞아 영국으로 떠나는 바람에 타던 차를 장인어른께, 그리고 장인어른의 차는 얼결에 내 차지가 되고 만 것인데, 워낙 꼼꼼하신 성격의 장인어른은 거금 100여만 원을 투자하여 잔 부속품 하나까지 교체한 후 내게 주셨다.  기실 그 차는 햇수는 오래되었지만 주행거리는 고작 6만km에 불과하니 내 차에 비하면 새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연유로 나는 군데군데 녹이 슬고 엔진도 골골 노인네  소리를 내던 내 차를 버렸다.

걷는 것을 좋아하는 나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그닥 차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차를 가져가라는 장인어른의 권유에도 마뜩찮은 태도를 취하는 나를 보며 아내는 한심하다는 듯 혀를 끌끌 찼다.  아내의 강압에 못 이겨 그동안 정들었던 차를 떠나 보내던 날 괜스레 울적하여진 나는 냉장고에서 몇 년째 뚜껑도 열지 않은 빼갈을 한 잔 마시고 나서야 잠이 들었다.

어제는 퇴근 후 평소처럼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화장을 한 여학생이 눈에 띄어 계획에도 없는 일장 연설을 늘어 놓았다.  요즘은 중학생만 되어도 다들 화장한다는 아이들의 항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내 할 말을 하는데 생각해 보니 조금 멋적은 생각도 들어 '오늘은 숙제를 주지 않겠다'며 서둘러 돌려 보냈었다.

체면이나 외모에는 별 관심이 없는 나는 아무래도 장소를 잘못 골라 태어난 듯하다.
뒷축이 헤어진 구두는 벌써 5년이 넘었고, 결혼 전에 산 옷가지들도 이제는 군데군데 구멍이 보이곤 한다.  그러니 산책 삼아 마트를 다녀오곤 하는 아내의 태도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그나마 군소리 없이 살아주는 아내를 내가 고맙게 생각하는 까닭에 아내의 잔소리는 언제나 도를 넘지 않는다.  이것도 천성이라면 천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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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01 14: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03 08: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1-09-01 17: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꼼쥐님! 글이 참 재밌네요 ㅎㅎ
제가 버리지 못하는 습관은 뭔지 곰곰 생각해보게 되는데 음... 생각하다가 관뒀어요. 나쁜 습관만 죄다 생각이 나는 바람에... ( '')~ 이 참에 좋은 습관 하나 만들어야겠어요.

꼼쥐 2011-09-03 08:59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
생각해 보면 저도 나쁜 습관만 있는 듯해서 조금 찔리지만 즐겁게 살려고 노력한답니다. 어차피 똑 같은 사람은 없잖아요? ㅎㅎ
 
모르는 여인으로부터의 편지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의정 옮김 / 맑은소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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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떤 일을 새로 시작할 때 인터넷에서 로그인을 하지 않으면 창이 열리지 않는 것처럼 처음부터 잘못 들어선 길이라면 그 일이 더이상 진행되지 못하도록 하는 프로그램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아이디, 비밀번호가 일치하지 않습니다.'하는 말과 함께 숫제 화면도 열리지 않는다면 비극적 운명 앞에서 좌절하거나 지난 일을 후회하는 일은 더이상 없을 테니 말이다.

아침 저녁으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에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그래서 읽게 된 책이 츠바이크의 중편소설 <모르는 여인으로부터의 편지>이다.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아 인간의 내면을 깊이 탐색했던 그의 소설은 언제나 탁월한 심리묘사가 일품이다.   한때 3대 전기 작가 중 한 사람으로 명성을 떨쳤던 츠바이크는 체게바라 역시 그의 작품을 자신의 도서목록에 포함시킬 정도로 광범위한 독자층을 형성하였지만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그가 망명했던 브라질의 리우에서 그의 아내 로테와 함께 동반자살한다.  작가의 비극적 운명을 예견이라도 하듯 이 소설은 한 남자를 열렬히 사랑했던 한 여인의 기구한 운명을 다루고 있다.

"저를 전혀 알지 못하는 당신에게,
이따금 눈앞이 캄캄해지곤 합니다. 어쩌면 이 편지를 끝내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게 남은 힘을 다해서 일생에 단 한번 당신에게 보내는 이 편지를 써내려 가고자 합니다.  저를 전혀 알지 못하시는 당신에게"
라는 문장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어린 시절, 옆집에 살았던 한 작가에게 한눈에 반해버린 여인과 여인의 편지를 유서로 읽는 중년의 작가.  그들의 엇갈린 운명은 편지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삶과 죽음을 초월한 영원한 사랑으로 승화된다. 

자식의 주검 옆에서 쓴 여인의 편지는 편지의 수신인, 즉 여인이 그토록 사랑했던 작가 R이 발신인이 없는 편지를 읽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일종의 액자소설이라 말할 수 있는 이 소설은 편지를 읽는 순간과 다 읽은 후의 묘사 부분을 제외하면 모두 한 여인의 편지가 그 주를 이룬다.
 
일찌기 명성을 얻었던 작가 R은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그를 따르는 많은 여인과 교제하며 여행을 즐긴다.  그런 그를 지켜보며 첫눈에 반한 여인은 엄마의 재혼으로 2년여의 시간 동안 잠시 떨어져 있던 시기에도 그를 잊지 못한다.  결국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남자의 곁으로 돌아온다.  직장을 다니며 남자의 곁을 맴돌던 여인은 한 순간의 유희를 좇는 남자의 성격을 잘 알면서도 그의 청을 수락한다.  여전히 남자는 그녀가 어린 시절 옆집에 살던 소녀였음을 알지 못한 채 자신의 성적 욕구만을 채운다.  그 후 남자는 여행을 떠나고 여인은 잊혀진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여인은 남자의 눈을 피해 아이를 낳게 되고, 언제든 자신의 품에 안을 수 있는 그 아이를 통하여 상실의 고통을 잊는다.  여인에게 있어 아이는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이의 분신이요, 삶의 목적이었다.  여인은 그런 아이를 먹이고 가르치기 위해 사창가의 여인처럼 몸을 팔아 그 비용을 감당한다.  여인의 주변에는 많은 남자들이 기웃거렸고 청혼도 하였지만 여인은 모두 거절한다.

"그러나 당신께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무엇에든 구속되기를 원치 않았으며, 언제고 당신이 부르시면 기꺼이 달려갈 수 있는 자유로운 상태로 남아 있고자 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로부터 한 여자로서 눈을 뜨게 된 이후까지 저의 전 생애는 오로지 기다리는 것, 당신이 불러주시기를 기다리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였습니다." 

여인은 우연한 기회에 그 남자를 만나 그의 집에서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남자는 여전히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  여인은 다음날 아침 자신의 모자에 놓인 지폐 몇 장을 보고 좌절한다.  아이를 키우며 오직 한 남자의 사랑을 갈구했던 여인.  비록 그 남자의 의식 속에 없는 애닯은 사랑이었지만 그의 생일이면 매년 꽃을 보냄으로써 언젠가 있을 사랑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아이가 죽고만 지금, 그녀 역시 자신의 분신이자 핵심이었던 운명적인 애정을 어디에서도 다시 찾을 수 없기에 그녀는 모든 희망을 잃는다.  그러나 자신이 스러짐으로써 가치를 잃게 될 그녀의 사랑이 그 남자를 통하여 끝없이 이어지길 바라며 편지를 쓴다.  어쩌면 작가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느 무명인의 소중한 사랑, 누군가 기록하지 않으면 쉽게 잊혀질 수많은 사랑의 본질적 가치를 아쉬워 했는지도 모른다.

"이제 저는 하나님을 믿지 않으며, 미사 또한 믿지 않습니다. 저는 오로지 당신만을 믿고, 당신만을 사랑하며, 당신 속에서만 살아가려 합니다. 아, 1년에 단 하루만이라도 그 때처럼 조용히 당신 곁에 머물 수 있도록, 사랑하는 이여, 부디 그렇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당신께 드리는 제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입니다...... 다시 한번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만을 영원히 사랑합니다...... 내 사랑, 부디 안녕히......" (P.132)

자신에게는 없는 밝고 명쾌함 그리고 자유로움,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으로 시작된 첫사랑의 기억을 삶이 다하는 순간까지 놓지 못했던 한 여인의 편지를 읽는 남자.  그가 느끼는 것은, 희미하게 떠오르는 이웃집 소녀에 대한 기억과, 어느 낯모르는 처녀에 대한 기억과, 술집에서 만났던 어느 여인에 대한 기억들이 한데 뒤엉킨 것이었다. 그것들은 불명료했고,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마치 흘러가는 강물의 밑바닥에서 형체 없이 반짝이며 떨고 있는 돌멩이와도 같이.

"그는 한 여인의 죽음과, 자신을 향한 그녀의 불멸의 사랑을 느꼈다. 그의 영혼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허물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한 여인의 모습을 애틋한 마음으로 그리기 시작했다."(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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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 - 정혜윤이 만난 매혹적인 독서가들
정혜윤 지음 / 푸른숲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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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저리에서 뱅뱅 맴을 돌았다.
공감할 수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때로는 답답한 일이겠지만.
누군가의 생각장에 한발 들여놓는 것만큼 두려운 일이 또 있을까?  그 에너지장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내 생각이 일순 사라질 것만 같은 공포.  시답잖은 '나'일지언정 마지막까지 무언가 잡고 있어야만 그래도 안심할 것 같은 어이없음.  마치 프로이트와 푸르스트를 혼동하는 것처럼.  그것을 에고(ego)라고 불러야 할까?  아집이라고 불러도 좋을 단단한 껍질.  나는 '껍데기는 가라!' 외쳤던 어느 시인이 부럽다.  

 언젠가 대학 동기 A는 진리에도 유행이 있다는 것을 아느냐고 물었다.  누군가 풀어 놓은 사색의 편린을 그 생각의 원천, 한 점의 순간으로 되짚어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도 했다.  깨진 달걀에 그만큼의 에너지를 주입하여도 원상태로 되돌릴 수 없다는 비가역성의 원리처럼 우리는 매번 생각의 빅뱅을 경험하지만 그 파편을 모두 모아 이전의 상태로 되돌릴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했다.  우리는 오직 펼쳐진 생각의 현재만 볼 뿐이라고 했다.  이를테면 우리가 광활한 우주를 보며 겨자씨만한 원시 우주를 동경하듯이.

 그는 내게 말했다.  진리는 그저 갤러리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취향의 그림을 선택하는 것과 같다고.  정혜윤의 글은 수면에 반짝이며 부서지는 햇살을 떠올리게 했다.  햇살은 아름답지만 결코 태양은 보지 못한다.  나는 그 시절의 친구를 경멸했다.  개똥철학이나 읊는 몽상가라고.  그러나 이제는 알 것같다.  자신의 발가벗은 자아를 방어할 수 없는 어떤 지점에 이르면 츠바이크처럼 자살을 선택할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  그래서 우리는 늘 언저리에서 맴돈다.

 작은 기온 변화에도 접착력을 잃고 틈이 벌어진, 켜켜이 먼지 쌓인 실리콘의 비애를 세월이라 했다.  그 작은 틈새로 잊혀진 세월이 스며들어 내 생각과 어색한 악수를 나누는 사이 나는 '공감'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어렴풋이 이해했다.
이런 종류의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제목이 <지식인의 서재>였던가.  그 책에 언급된 사람이 누구였는지 지금은 기억도 없지만 그들이 추천한 책에는 역사 서적이 많다는 사실에 저으기 놀랐었다.  그들도 나처럼 잊혀진 세월과 조우하며 '공감'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까?

 저자가 만난 사람들의 이름을 나열해 보았다.  진중권,정이현,공지영,김탁환,임순례,은희경,이진경,변영주,신경숙,문소리,박노자.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하고 머리를 또렷또렷 굴려보지만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결론.  그들은 가끔 내가 한번쯤 읽어보았던 책의 제목을 언급하며 동의를 구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요지부동.  그것을 에고라고,아집이라고 불러도 좋았다.

 "나는 덫에 걸린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덫이 책인 줄로만 알았는데 사실은 복잡하고 신비로운 인간의 속성이었다.  그러므로 사람과 책이 만나는 지점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한한 힌트를 준다.  왜냐하면 책이란 다름아닌 사랑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고 결국 어떤 책을 사랑하느냐는 그 사람의 속성, 그 사람의 자존감, 그 사람의 희망, 그 사람의 꿈꾸는 미래, 그 사람이 살아온 삶, 그 사람의 포용력, 그 사람의 사랑에 대해 더할 나위 없이 정확히 짚어주기 때문이다."  (P.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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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네게 편지를 쓰는 것도 참 오랜만이구나.
블로그에는 딱 6개월이 지난, 소인도 찍히지 않은 편지가 미래의 편지 주인을 기다리며 손을 내밀고 있다.  어느새 가을이란다.  망각의 속도가 미래의 두려움보다 늘 한발 앞서는 네게, 언제나 현재는 달콤한 배추 속고갱이 같은 네게 이렇게 한 통의 편지를 쓰는 일이 내게는 명상처럼 고요한 평화요, 나무 울창한 숲그늘이었단다.
 

아들아
 

어제는 네가 태어나 처음으로 안경을 맞춘 날이었지.  네 시력이 더 나빠지지나 않을까 걱정하는 나와 네 엄마의 마음과는 달리 너는 잘 보여서 너무 좋다고 하더구나.  그래도 땀이 나면 불편하겠지 하는 네 말은 들뜬 목소리 탓이었는지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의 염려라고는 믿기지 않았단다.  한결 마음이 놓이더구나.  초등학교 2학년인 네가 벌써부터 안경을 끼고 생활한다는 것은 마음 아픈 일이지만 어쩌겠니 네가 그토록 좋아하는 레고와 독서를 부모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그마저 금할 수 있는 절대권력이 주어진 것은 아니지 않겠니?
 

아들아
 

오늘은 너와 '삶'에 대해 말하고 싶구나.  무거운 주제라고?  그렇구나.  하지만 가을이잖니.  이 편지를 이해할 수 있으려면 아직도 많은 시간이 지나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성급한 나는 이렇게 미래의 너에게 한 통의 편지를 쓰게 된단다.  어쩌면 삶은 한 편의 추리소설을 읽는 것과 같단다.  네가 요즘 푹 빠져 있는 <스파이 가이드북>을 읽는 것이라면 이해가 빠를까?  삶의 곳곳에 숨어있는 힌트를 찾아, 삶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렀을 때 너만을 위해 준비한 하느님의 질문에 답하면 된단다.
 

아들아
 

네가 잘 알지 못하는 미래를 염려할 필요는 없단다.  지금처럼 너는 현실의 기쁨을 소중히 껴안고 문득 떠오르는 지난 일에서 질문의 힌트를 발견하면 된단다.  그 질문을 아직 받아본 적이 없는 나도 궁금하기는 마찬가지란다.  정답에 대해 네게 살짝 귀띔을 하자면(이것은 어쩌면 천기누설로 벌을 받을지도 모르지만) 이렇단다.  너는 모든 문제에 "행복"이라는 단어를 꾹꾹 눌러 쓰면 정답이 될 듯 싶구나.
 

아들아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여름이, 유난히 비가 많았던 이 여름이 지난 며칠 사이에 저만치 물러가고 있구나.  파란 가을 하늘에 깔깔대는 네 웃음이 양털구름처럼 걸려있단다.  이 소중한 시간에 너를 그리며 편지를 쓰는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 아니 할 수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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