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에는 사내의 인사이동이 있었다.

직장생활이란 게 다 그렇지만 매년 연례행사처럼 치뤄지는 인사이동 시기가 다가오면 미리부터 '카더라'식의 루머와 설이 나돌고 그에 따라 일희일비하는 모습도 눈에 띄곤 한다.  나도 물론 평범한 직장인인지라 예외일 리 없다.  삼삼오오 모인 자리에 누군가의 '카더라 통신'이 중계되기라도 할라치면 진행자의 말을 한마디라도 놓칠새라 다들 귀를 쫑긋 세우고 듣게 마련인데 다 듣고 돌아서는 모습에서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긴장과 기대 속에 사내 게시판이 구멍이 날 지경에 이르면 공고문이 나붙는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환호와 한숨소리.  웬만한 야구장의 응원 열기가 이보다 더할까.

흥분과 실망이 교차하는 왁자한 분위기가 가라앉고 저녁 어둠이 내리는 퇴근 시각이 다가오면 여지없이 회식자리가 펼쳐진다.  기분 좋다고 내는 승진턱이야 내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즐거운 기분으로 참석할 수 있다지만, 승진에서 탈락한 우리의 '떨거지' 그룹은 어깨를 웅크리고 한겨울의 칼바람을 맞아야 한다.  가끔 부서에서는 승진에서 탈락한 그들을 위해 '위로주'를 사기도 하지만 그것이 어찌 술로 달래질 성질의 것이던가.

 

나는 승진 축하 자리보다는 진급 탈락자들을 위한 위로 회식 자리에 참석하는 것을 더 선호한다.

나보다 못한 사람을 각별히 챙기는 인류애의 발로에서 그러는 것도 아니요, 그들 앞에서 우쭐하거나 거드름을 피우려고 그러는 것은 더욱 아니다.  그들과 섞여 술자리를 갖다 보면 '세상 사는 것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술이 몇 순배 돌고 다들 거나하게 취하면 내일 당장 사표를 쓰고 사업을 시작하겠다는 사람과, 내가 여기 아니면 갈 데가 없느냐며 큰소리 치는 사람과, 갑자기 흐느껴 우는 사람 등등 그 모습도 제각각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초라하다고 느낄 때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므로 승승장구하는 시기에는 그 사람의 본성을 알기 어렵다.  자신의 약한 모습을 가리기 위해, 또는 속상한 마음을 감추기 위해 술기운을 빌어 어렵사리 푸는 그들의 큰소리는 애잔하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모습이라고 웅변하는 듯한 그들의 모습에서 소박한 소시민의 따뜻한 정감을 느낀다.

 

자리이동이 있었던지라 업무 인수인계로 한 달이 어찌 흘렀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연말이면 왜 그리 회식자리가 많던지...  술을 못하는 내가 가장 싫어하는 12월과 1월이 빨리 지나가기만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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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12-08 1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른 12월과 1월이 지나 따뜻한 봄이 왔으면 좋겠어요. 꼼쥐님 회사에서는 한 바탕 칼바람이 불었군요. 인생은 고스톱과 같다더니, 누가 또 피박을 쓰고 광박을 쓰는지 그건 피해갈 수 없나봐요. 저도 술을 잘 못하는데 미래에 회식자리 없는 일을 알아봐야겠다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답니다. (그런 일이 있을까요? 작가라면 또 모르지만 ㅎㅎ) 오늘 날이 많이 추워요. 감기 조심하시길 :)

꼼쥐 2011-12-09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도 밤새 회식자리에 끌려다녔더니 하루 종일 피곤하네요. 음주가무가 최대의 약점인 저는 연말연시에는 중노동에 시달립니다. 음주가무 중 한두 개라도 잘하는 게 있어야 조금 덜 힘들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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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라고 정확히 선을 그을 수는 없지만 일 년의 마지막 달에 지병처럼 앓았던 휑한 느낌이 이제는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유난 떨지 않고 담담하기.  내 청춘의 끝무렵에 나는 그렇게 다짐했다.  그러나 내 마음이라고 어찌 내맘대로만 할 수 있던가?  나는 여전히 시린 가슴을 안고 연초의 계획을 하나 둘 끄집어 내어 자학과 같은 자책과 함께 효용을 다한 그것들을 폐기처분했다.  그리고 새 세상이라도 열리는 양 새해의 첫 날을 기다렸다.  나는 중죄를 저지른 사람처럼 12월 내내 가슴 한켠에 커다란 돌덩이를 달고 살았다.  12월 마지막 날, 석방을 기다리는 수인처럼 나는 그 밀리는 고속도로를 뚫고 일출을 보러 떠났다.  일 년을 헛 산 죄인의 반성문이자 죄사함을 향한 골고다 언덕과 같은 그 길에서 나는 습관처럼 안도하곤 했다. 

나의 게으름이 연례행사로 굳어진 일출여행에 일대 반기를 들면서 나는 더는 새해 계획도, 12월의 가슴앓이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청춘의 시절이 빠르게 흘렀고, 평범한 일상처럼 담담한 눈길로 12월을 바라볼 수 있는 그런 나이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12월에 꼭 읽어야지 하는 책도, 1월에 반드시 읽어야만 하는 책도 내게는 없다.  그저 마음이 이끄는 대로 책을 고른다. 

1995년에 출간된 신경숙의 첫 산문집이 재출간되었다.  그녀의 글에서는 푸른색 잉크가 스펀지에 스미듯 짙푸른 슬픔이 뚝뚝 흐를 것만 같은 원형질의 설움이 묻어난다.  중독성 짙은 슬픔과 깊은 허무의 칼끝이 독자의 마음을 몇 번 헤집고 만신창이가 된 가슴을 진정시킬 즈음이면 글은 끝난다.  잔인하다.  그렇게 여기면서도 어김없이 그녀의 작품에 손이 가는 '이해불가'의 습성.  서른세 살의 나이에 작가는 어떤 아픔을 품었던 것일까?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현실과 마주할 때가 있다.  결코 짧지 않은 인생길에 그보다 더한 일인들 왜 없으랴마는 우리들 모두는 막막한 현실과 정면으로 마주칠 때면 슬쩍 그 자리를 다른 누군가에게 내어주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리라.  그러나 오래된 장일수록 깊은 맛이 우러나듯 하나의 업을 천직으로 알고 꿋꿋이 견뎌온 삶이 그 향기가 더하지 않을까?   작가도 나와 생각이 비슷했나보다.  세월의 잔물결보다 더 위대한 화가가 어디 있으랴. 

 

 

 

칭찬 일색인 작품은 잘 읽지 않는다.  오래된 나만의 독서 편향은 쉬이 바뀌지 않있다.  그 이면에는 독서 후의 실망스러움에 대한 공포가 첫째요, 출판사의 알량한 광고에 결코 속지 않겠다는 나의 오만과 자존심이 그 둘째라 하겠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잘 훈련된 나의 독서 고집에도 불구하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은 언제나 예외로 자리하고 있다.  문학을 전공하지도, 그렇다고 독서 경험이 풍부하지도 않은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일종의 지적 허영이나 과장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아무튼 하루키의 작품은 언제나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걸림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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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 장정일의 독서일기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1
장정일 지음 / 마티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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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의 독서일기>를 읽기 시작한 것은 꽤나 오래 전의 일이다.
내 돈 주고 사서 읽었던 것은 아니고 지인에게 빌려 읽었는데 그 이유인즉슨 이런 종류의 책-독서가 목적이 아닌 독서 목록을 수집하고자 하는 수단으로서의 책-을 구입하는 데 내 돈을 주고 산다는 것이 은근히 아깝다는 얄팍한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한 권으로 끝나겠거니 했던 책이 점차 권수를 더하는 바람에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에 처하고 말았다.  지인은 더 이상 책을 사지 않았고 누군가의 독서일기를 몰래 엿보던 묘한 즐거움(또는 관음증)은 끊기 힘든 유혹이 되었다.  그렇게 사 모은 책이 이 책을 더하여 도합 여덟 권에 이른다.  책 수집가도 아닌데 말이다.

나는 이런 종류의 책을 단 한번에 끝까지 읽지 못한다.
생각날 때마다 그저 야금야금 읽는다.  형제가 많은 집에서 자란 사람들은 다 이해하겠지만 누군가로부터 받은 사탕 몇 알을 자신만 아는 장소에 숨겨두고는 달콤한 것이 간절할 때만 몰래 가서 몇 모금 핥던 생각이 난다.  그러나 내가 책을 아껴 읽는 것은 이것과 사뭇 다르다.  독서일기 한 권에는 줄잡아 수십 권의 책이 소개되는 까닭에 책 욕심이 많은 나는 그 중 적어도 이삼십 권의 책을 사들일테고 그것은 고스란히 내 손길도 닿지 않은 채 묵은 책이 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돈도 돈이려니와 책 한 권을 읽음으로써 예상치도 못한 전집 한 질 분량의 책이 늘어나면 나는 한동안 독서에 대한 부담감으로 책을 읽지 못하는 처지에 처하곤 하는 것이 더욱 큰 문제다.  웬만한 사람이면 그런 경험을 서너 번 겪고 나면 그런 못된 버릇이 고쳐질만도 하련만 나의 경우에는 너무도 쉽게 잊혀지니 고칠 기회를 찾지 못한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야금야금 읽기'다.
책의 구매를 일정한 기간으로 나누어 소비의 분산을 꾀하자는 나의 얄팍한 속셈은 그럭저럭 성공한 듯 보인다.  충동구매로 인한 책의 대량반입은 사라졌다.  그러나 고쳐지지 않은 나의 습관이 언제든 고개를 들고 나를 노려보게 되리라는 막연한 불안감은 지울 수 없다.

 이 책은 지금까지 써왔던 장정일의 스타일과 많이 다른 책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예전에 발간 된 그의 책들을 살펴보면 자신의 일상 이야기와 전형적인 일기형식이었다. 독특하고 재미있는 방법으로 풀어내어 무척 재미있게 보았다. 하지만, 이 책은 조금 달랐다. 자신의 이야기는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책읽기의 방법과 주제를 주로 소개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듯 장정일의 독서를 통한 세상읽기는 배배 꼬인 그의 심사를 번번이 드러낸다.  

 책은 총 4부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2부 우리는 과거로부터 얼마나 멀어졌을까"를 제외하면 부의 구별이 무의미해 보인다.  단지 작가의 자의적 분류였거나, 출판사의 편의적 구분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뿐이다.  하기야 어떤 순서로 놓여지든 한 작가가 쓴 서평이 달라질 리도 없을 것이다.  장정일의 독서일기를 읽으며 매번 드는 생각은 그의 독서 탐닉은 참 대단하다는 것이다.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사람이니 그 정도는 읽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당위성에 빗댄 질문을 한다면 뭐라 변명할 말도 없지만, 그런 당위성마저 지키지 않는 얼치기 작가가 세상에는 쌔고 쌨다. 

 300쪽이 조금 넘는 책 한 권을 장장 두 달에 걸쳐 다 읽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들이 들으면 '책도 어지간히 싫어하는 사람이군' 하는 말이 절로 나올 법하다.
오늘은 빼곡히 적은 독서목록을 들고 아들녀석과 도서관에 가기로 약속을 했다.  비는 개었지만 하늘은 여전히 어둡다.  점심을 먹고 나도 이제 슬슬 나갈 채비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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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는 방법]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소설 읽는 방법 - 히라노 게이치로의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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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할 일도 숱하게 많고, 보지 못한 것도 너무나 많은데 우리는 왜 책을 읽는가? 하는 질문을 받는다면 뭐라 답할까?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작가처럼 멋진 말로 그 이유를 조목조목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나도 그렇다.  딱히 생각해 본 적도 없지만 그저 재밌으니까 읽을 뿐, 특별한 목적이 있는 공부가 아니고서야 일상의 독서에 어떤 이유를 대고 하는 경우가 몇 번이나 되랴.  '읽는다는 것은 개인적 행위일뿐 아니라, 인간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소속감을 유지하는 작은 연대감의 체험이 된다'고 한 앤 패쳇의 독서론에 선뜻 수긍하기 어려운 이유도 나의 무작정의 독서, 무계획의 독서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여러 문학 장르 중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소설로 그 범위를 축소시켜 보아도 대답은 여전히 마땅찮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문학평론가 김현은 "소설은 모든 예술 중에 내가 사는 세계가 살 만한 세계인가 아닌가를 가장 재미있게 반성케 하는 예술이다.  일상 속에 매몰된 의식에 그 반성이 채찍질을 가한다.  이 세계는 과연 살 만한 세계인가, 우리는 그런 질문을 던지기 위해 소설을 읽는다."고 했다.  멋진 말이다.  그런가 하면 체호프를 몹시 흠모했던 쇼스타코비치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체호프를 게걸스럽게 읽는다. 그의 글을 읽으면 삶의 시작과 종말에 대해 무언가 중요한 생각을 곧 만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삶의 시작과 종말에 대한 무언가 중요한 생각'이라는 문구는 한참을 생각하게 만든다.    

시와 소설 두 부문에서 모두 퓰리처상을 받은 유일한 저자이기도 한 로버트 펜 워런은 <우리는 왜 소설을 읽는가?>라는 글에서  “소설은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 것만을 주지는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소설이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지조차 몰랐던 것들을 줄 수도 있을 거라는 사실이다.” 라고 썼다.  그렇다면 내게 있어 소설읽기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재미'라는 자성체가 이끄는 궁극의 세계로의 여정>과 같은 것이었다.  즉, 맹인과 같은 나를 '재미'라는 매개체가 알 수 없는 궁극의 세계로 이끌고 있다는 막연한 믿음으로 소설을 읽는다.  내 삶의 시간 내에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세계는 반쪽짜리 깨달음이 될지, 허무의 빈 공간이 될지 나는 알지 못한다. 

소설에 대한 정의로 시작하는 이 책은 무엇보다 `천천히 읽기`를 제시하며 소설 독법을 이야기한다.  법학을 전공한 저자의 시각에서 소설의 깊이는 분석과 해석의 대상이었는지도 모른다.  재미라는 더듬이로 책을 선택하고, 책 속에서 살내음에 취하고, 감동이라는 최상의 재미를 만끽하는 나와는 사뭇 다르다.  작가는 후기에서 이 책을 쓴 소회를 이렇게 밝혔다. 

"이 책에서는 기본적으로 '소설 읽는 방법'에 대해 생각해보고, 많은 사람들이 책을 읽은 뒤에 블로그에 자신의 느낌을 올리고 서로 의견을 교환할 때 도움이 될 '원초적인' 시점을 소개하고자 했다.  따라서 이 책의 목적은 비평이 아니다.  다양한 유형의 소설을 예로 들어 세세하게 살펴보는 작업은 내게도 무척 즐거운 일이었다.  해설을 시도하는 동안 머리도 상당히 정리되어 좋은 공부의 기회가 되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귀중한 텍스트를 해부하는 듯한 야만적인 짓까지 하게 되어 저자 여러분께 죄송한 마음이다."  (P.232)

그가 소설 감상법에 집중하게 된 이유는 `소설을 더 사랑하는 방법`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그가 제시한 소설 읽기 방법은 네 단계다. 작가 편에서 구조를 파악하는 `메커니즘`, 작가 인생에서 작품 발표 시기와 테마의 발전을 추적하는 `발달`, 작품이 독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는 `기능`, 사회·역사·문학사적 맥락에서 소설의 위치에 접근하는 `진화`가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나의 취향과 동떨어진, 다가가기 싫은 방식이었다.  나는 '감성의 끌림에 의지하여 내 맘 대로 읽기'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저자와 나는 서로 다른 쪽을 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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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일 내가 가르치던 아이들 중 올해 수능을 치르는 세 명의 아이들과 숙소 근처의 식당에서 조촐한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여학생 두 명과 한 명의 남학생.  내가 아는 그 아이들은 식성도 좋고, 성격도 밝은 아이들이었는데 긴장한 탓인지 밥을 앞에 놓고 깨작거리기만 할 뿐 예전처럼 복스럽게 먹는 모습은 보지 못했다.  이 세상을 산다는 것이 즐겁고 행복하기만 하여도 그 지난한 세월을 견디기 어려울텐데 아이들에게 세상은 언제나 불안과 두려움의 대상인 모양이다.  시간이 얼마나 흐르면 이 아이들로부터 '그때가 좋았다' 는 말을 들을 수 있을까?

금세 어두워진 하늘을 보며 서둘러 아이들을 돌려 보냈다.  바람이 거셌다.
나는 아이들에게 "요 모퉁이만 돌면..."이라는 희망 섞인 말은 하지 못했다.  아이들은 어쩌면 '이번에는... , 이번에는...'하면서 많이도 속아왔는지도 모른다.  오늘은 푹 자고 내일 수능시험 잘 치르라고 이르며 등을 토닥여주었다.

나는 지난 1년 동안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제발 부자는 되지 말아라'하는 말을 여러번 했었다.
힘들게 어린 시절을 보냈으니 어른이 되면 부자로 살라는 말을 하는 것이 당연할텐데 그렇게 하지 않은 까닭은 그들에게서 어떤 가능성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도 아니요, 악담을 하려는 것도 물론 아니었다.  어줍잖게도 나는 그 근거를 물리학에서 찾았다.  우주 탄생의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빅뱅 이론에서 보면 밀도와 에너지가 높았던 빅뱅 초기의 고에너지 원시입자는 서로 결합하여 물질을 이루지 못하는 '쿼크-글루온-플라즈마'상태를 유지했었다.  수소 원자와 헬륨 원자가 만들어지기까지는 그보다 낮은 온도와 에너지에서나 가능했었다.

이런 생뚱맞은 소리를 하는 까닭은 인간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돈이 있으면 '든든하다'고 한다.  즉 돈은 현대인에게 가장 원초적인 에너지원이요, 삶의 기반이 된 지 오래다.  그러나 자연계의 입자들도 에너지가 너무 높으면 서로 결합하지 못하듯이, 사람에게도 돈이 너무 많으면 이웃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할지 모른다.  사람도 자연계의 일부이니 이러한 자연법칙이 작용하지 않는다고 그 누가 주장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입자는 서로 결합하기 이전에는 물질이라 말하기 어렵다.  하물며 이웃과 어울리지 못하는 인간을 인간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는 어쩌면 실존하는 인간으로서의 아이덴터티를 상실한 채 평생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  내가 부자가 아니라서 일종의 열등의식으로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으로서의 참살이는 이웃과 어울려 그 속에서 삶의 소중한 의미를 깨닫는 것이라고 규정할 때, 부자는 그 기회를 상실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니르바나'나 성경에서 말하는 '천국'은 이러한 깨달음의 상태가 아닐까?
그래서 성경에도 "나는 분명히 말한다.  부자가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  거듭 말하지만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라고 씌어졌나 보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작은 깨달음이라도 얻지 못한다면 어찌 '극락'이나 '천국'을 욕심낼 수 있으랴.  그래도 부자가 되고 싶다면 <티벳 사자의 서>를 읽어볼 일이다.

"얘들아, 너희들은 커서 제발 부자는 되지 말아라."

수능이 끝난 지 며칠이 지났건만 나는 그 아이들에게 전화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시험은 잘 보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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