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평가단 10기 활동을 마무리합니다.

신간평가단 활동을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시간이 참 빠르게 흘러갔구나, 하는 점이다.  월초가 되면 예전부터 잘 알고 지내던 누군가가 보내준 선물인 양 두 권의 신간을 받아들고 설레는 마음으로 어느 것을 먼저 읽을까 정하고, 리뷰 기한을 확인하고, 느긋한 마음으로 책을 읽다가도 막상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았을 때 미처 읽지 못한 부분을 의미를 곰삭이지도 못한 채 빠르게 읽고, 아~~ 막상 컴퓨터 앞에만 앉으면 쓰고 싶었던 말들이 왜 그리도 약속이나 한 듯 한꺼번에 사라지던지...  똑 같은 일들을 6개월 반복하다 보면 마치 지난 달의 일인 듯 시간의 흐름이 까맣게 잊혀진다.

 

약속이나 물건 정리에 있어 약간의 결벽증이 있는 나는 마감일이 다가오면 조바심을 내며 발을 동동 구르기 일쑤였고, 어떤 내용이든 블로그에 올려지는 글은 내 자신의 얼굴이라 생각하던 나는 대충대충이 용납되지 않아 속을 박박 긁곤 했다.  그렇게 속을 끓이면서도 11기 신간평가단 모집에 응모를 했던 걸 보면 약간의 고통스러움과 책을 읽는 즐거움을 양팔저울에 올려놓고 달아 본다면 즐거움 쪽으로 살짝 기울었던듯.

 

과거는 언제나 즐거움의 등가물이라는 나의 확신은 10기 신간평가단으로 활동했던 지난 시간에 다시 한번 확인된 셈이다.  기억도 가물가물한 책들을 다시 떠올리며 내 맘대로 베스트5를 적어본다.

 

1.

 

16인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들의 삶과 그들의 가치관을 읽으며 내 삶을 되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2.

 

모름지기 책읽기는 즐거워야 한다.  성석제의 유쾌,발랄함은 읽는 이의 마음을 한껏 부풀게 한다.

 

 

 

 

 

 

 

 

 

 

3.

 

오랜 역사 속에서도 모든 사람이 만족하는 사회 구조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지금을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역사는 진보하는 쪽으로 나아간다는 믿음을 심어주었던 책. 가슴이 절로 따뜻해진다.

 

 

 

 

 

 

 

 

4.

 

 

호주에서 어학연수로 1년을 보냈던 그때 그 시절의 추억을 새록새록 일깨워주었던 책.  작가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보다 호주에 대하여 더 많은 지식을 내게 주었다.

 

 

 

 

 

 

 

5.

 

 

자연을 닮은 작가의 맑고 투명한 문체가 무척이나 인상깊었던 책.  학자로서의 시턴과 그의 글은 절묘하게 어울리는 듯했다.  화려한 수식이나 비유보다 솔직함이야말로 글이 갖는 힘임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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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신간평가단 2012-05-21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다섯권 모두!! 정말 좋은 책들이죠.
고생 많으셨어요. 꼼쥐님~ :)

꼼쥐 2012-06-05 22:38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
 
정체성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199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자석의 N극과 S극이 서로에게 끌리듯이 극단적으로 다른 서로에게 끌린다는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게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에게 있어서도 다르지 않다.  나는 그것을 일종의 지적 호기심, 또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본능적인 궁금증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남자와 여자가 너무나 다른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가령 남자의 사고방식과 행동양태가 여자와 하나도 다를 게 없다면 여자는 결코 남자에게 추파를 보내거나 그들의 세계를 궁금해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여자들에게 남자는 자신들과는 외모적으로 조금 다른, 같은 성(性)으로 보이는 돌연변이쯤으로 인식하지 않았을까?  자신의 사고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때로는 비이성적으로 보여지기까지 하는 상대방에게 마음이 끌린다는 것은 신이 남녀를 다르게 빚어놓음으로써 영원히 서로의 관심권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만든 오묘한 섭리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다름'도 세상이라는 용광로에서 용해되고 나면 선천적이고도 개별적인 '다름'이 집단적 '다름'으로 전이되고 만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것은 통일성을 갖춤으로써 잃게되는 집단적 망각, 또는 구분짓기에 실패한 개인들의 혼돈이 아닐 수 없다.

 

"세상에서 외따로 떨어져 사랑하는 두 존재, 그건 아주 아름답지.  하지만 두 사람이 마주 앉아 무슨 얘기를 할 수 있을까?  이 세상이 아무리 경멸할 만한 것일지라도 그들에겐 이 세계가 필요해.  서로 대화를 하기 위해서라도 말이야."

"침묵할 수도 있을 텐데요."

"옆자리에 앉은 저 두 사람처럼?"  하고 장-마르크가 웃었다.

"아니야, 어떤 사랑도 침묵에 배겨날 순 없어."   (P.88)

 

밀란 쿤데라의 소설이 인기 있는 이유는 작가의 예리한 눈으로 세상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 사고를 통하여 사물을 묘사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우리가 어떤 대상을 본다는 것은 그 사물에 대한 철학적 인식일 수 있고, 더구나 독서를 통한 세상 읽기는 결국 작가의 사상적 흐름을 읽는 것과 다르지 않다.  괜히 번거롭게 사물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고 작가의 의식을 그 뒤에 숨기는 것은 오히려 독자에게 혼란만 야기할 뿐이다.  이런 점에서 밀란 쿤데라는 독자에게 친절하다.

 

이 책에서 작가는 인간이 자신이 속한 세상을 경멸함으로써, 또는 그곳으로부터 배제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는가? 하고 묻는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다섯 살 나던 해 죽고 말자 샹탈은 시댁 식구들의 임신 종용과 이에 동조하는 남편에게 화가 나 이혼을 했다. 그리고 경제적 자립을 위해 광고회사에 취직했고 애인을 찾았으며 지금 그녀보다 네 살이나 어린 애인 장-마르크와 살고 있다. 어느날 샹탈은 문득 더이상 어떤 남자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다고 느끼고 이를 장-마르크에게 이야기한다. 이것이 샹탈의 육체가 점진적으로 소멸될 것임을 알리는 경고라는 것을 알아챈 장-마르크는 의기소침해진 샹탈을 즐겁게 해주고 싶어 익명으로 편지를 보낸다. 그녀의 잃어버린 정체성을 불어넣어 주고 싶었던 것이다. 익명의 남자가 보내오는 편지를 읽으며 샹탈은 열예닐곱살 무렵 가슴에 품고 살았던 장미향이 되살아남을 느끼지만 얼마되지 않아 편지의 발신인이 장-마르크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의도를 생각하다가 샹탈은 장-마르크가 자신을 떠날 구실을 찾고 있었던 것이라고 결론짓고 혼자 런던으로 떠난다. 처음에 화가 났던 장-마르크는 샹탈의 입장을 이해하게 되고 역시 런던행 기차를 탄다. 이제 런던에 온 샹탈도 자신에게 장-마르크가 어떤 존재인가를 깨닫는다. 잃어버린 자신의 이름을 크게 외쳐줄 사람은 장-마르크 뿐임을 안 것이다.

등장인물들 간에 극적인 갈등도 없고 흥미진진한 스토리 전개 따위도 찾아 볼 수없다.  한 사건이 두 주인공의 시점에 따라 다른 모습과 의미를 띠면서 일으키는 긴장감이 독자를 소설 속으로 빠져들게 할 뿐, 독자를 유혹하기 위한 어떤 작위적 구조나 인물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등장인물도 작품구조도 단출하기 그지없다.  군더더기를 제거한 것이 이작품의 묘미라고나 할까. 49장까지 그(장-마르크)와 그녀(샹탈)가 화자로 나오다가 50장에 이르면 느닷없이 `나' 즉 작가가 화자로 등장한다.  밀란 쿤데라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색깔로 자신을 드러낸다.  마성과 같은 그의 매력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어 쉽사리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한다.  아들의 무덤 앞에서 샹탈의 독백은 인상적이다.

 

"아기를 갖고 동시에 이 세계를 경멸하는 것은 불가능하단다.  왜냐하면 우리가 너를 내보낸 곳이 바로 이 세계이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계에 집착하는 것은 아기 때문이며, 아기 때문에 세계의 미래를 생각하고 그 소란스러움, 그 소요에 기꺼이 참여하며 이 세계의 불치의 바보짓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것이란다.  너의 죽음을 통해 너는 나로부터 너와 함께 있는 즐거움을 앗아갔지만 동시에 너는 나를 자유롭게 해주었지.  내가 사랑하지 않는 이 세계를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도록 나는 자유로워졌단다."   (P.64) 

 

인간존재의 이면에 존재하는 속물성과 위선을 예리한 시선으로 파고드는 밀란 쿤데라는 이 소설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우리 시대 남녀간의 사랑이 존재할 수 있는 양태의 극한을 추구했다고 말하는 작가.  그가 의도하는 철학적 주제는 언제나 독자의 몫이겠지만, 그의 시선이 이끄는 대로 천천히 끌려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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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무실 주변에는 철쭉이 한창이다.

언젠가 아들녀석이 그 꽃을 가리키며 이름이 뭐냐고 물은 적이 있다.  내가 철쭉이라고 답하자 진달래와 어떻게 다르냐고 재차 물었다.  일순 말문이 막혔던 나는 진달래는 색깔이 연하고 철쭉은 그보다 진하다고 얼버무렸었다.  전혀 이치에 맞지도 않고 당치도 않은 대답이었다.  생각해 보면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 그만큼 친숙한 것에는 그 구분을 말로써 설명하기 어렵다.

 

어렸을 적 내가 살았던 마을의 산들에는 진달래가 지천이었다.  수줍은 분홍빛이 온 산에 번질 즈음이면 배고픈 아이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산에 올랐다.  막 피어나는 꽃잎을 한줌 따서 입에 넣으면 달착지근한 향기가 허기를 달래주곤 했다.  먹을 수 없는 꽃인 ‘철쭉’에 대하여, 먹을 수 있는 꽃이라는 뜻으로, ‘진달래꽃’을 우리는 '참꽃'이라 불렀다.  배고픔을 달래주는 것은 '참'이었고 그렇지 못한 것은 '거짓'이 되는 시절이었다.  '참머루'는 먹을 수 있는 것, '개머루'는 먹지 못하는 것, 그런 식이었다.

 

공부도, 놀이도 그랬던 듯하다.

즐겁고 재밌는 것은 '참'이요, 그렇지 못한 것은 모두 '거짓'이었다.  이렇듯 가장 밀접하고 현실적인 기준으로 우리는 참과 거짓을 구분했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나도 따라 성장하면서 참과 거짓의 가장 가깝고도 명확했던 기준은 멀고 모호한 것으로 변했다.  지금은 현실로부터 이만큼 멀어진 그 무엇이 되었다.

 

손끝만 스쳐도 속이 확확 달아오르던 사랑도,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마냥 행복했던 그때의 사랑도, 잠시의 이별도 이별로서 인식할 수 있었던 사랑과 이별의 명확한 기준도 이제는 그 경계마저 희미한 그 무엇이 되었다.  어쩌면 사람들은 스쳐가는 시간에 따라 현실로부터 저만치 멀어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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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알래스카에서 죽었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나는 알래스카에서 죽었다 - 호시노 미치오의 마지막 여정
호시노 미치오 글.사진, 임정은 옮김 / 다반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지독한 독서광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다치바나 다카시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때 문득, 내가 여태까지 역사라는 것을 어딘가 근본적인 데서부터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식으로서의 역사는 윤색된 것이다.  학교 강단에서 배운 역사, 교과서 속의 역사, 역사가가 말하는 역사, 기록이나 자료로 남는 역사, 그런 것들은 전부 윤색된 것이다.  가장 정통적인 역사는 기록되지 않은 역사, 언급되지 않은 역사, 후세인이 전혀 모르는 역사가 아닐까.  기록된 역사를 기록되지 못한 현실의 총체에 비한다면, 우주 속의 바늘끝만큼이나 미소한 것이리라.  우주의 대부분이 허무 속으로 삼켜지는 것처럼, 역사의 대부분도 허무 속으로 삼켜지고 있다.  " 

  

타인과 구별되는 특별한 역사관을 갖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다치바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경험이 있다.  호주의 노던 테리토리의 울루루를 보았을 때 그랬고, 일본의 야쿠섬을 방문했을 때 그랬다.  9억 년 전에 생겼다는 울루루와 천 년 이상의 고목이 자라는 야쿠섬의 원시림이 주는 느낌은 서로 달랐지만, 나는 두 곳 모두에서 시간의 영속성과 숨이 멈출 것만 같은 서늘한 경외감을 느꼈다.  4차원의 세계에서 시간의 좌표축을 제거한 온전한 역사를 마주하고 있는 듯한 느낌. 역사의 저편에 흐르는 도도한 숨결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일본 열도 최남단 가고시마현에서 뱃길로 130㎞, 오래된 삼나무가 있는 야쿠시마(屋久島)를 방문했던 날은 하루종일 비가 내렸다.  일본에서의 업무가 일찍 끝나는 바람에 우연처럼 찾아간 그곳엔 해발 2000m에 가까운 미야노우라산이 있다.  그 산을 오르기 위해 사람들은 새벽 어둠이 걷히기도 전에 길을 나선다.  여행이 주목적이 아니었던 우리 일행은 결국 7200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조몬스기(繩文衫)’는 보지 못했지만 이끼에 뒤덮힌 수천 년의 세월을 온몸으로 느낄 수는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역사는 읽는 것이 아니라 공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신화로 전해지는 고시대의 현실이 내 몸 곳곳으로 스며드는 듯했다. 

 

1952년 지바현 이치카와시에서 태어난 저자는 19세 때 헌책방에서 우연히 알래스카 풍경을 담은 ‘조지 모블리’의 사진집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거기에 실린 에스키모 마을의 모습에 푹 빠져 촌장에게 방문을 허락해 달라는 편지를 쓴 그는 촌장으로부터 방문 환영 답신을 받고 그곳에서 에스키모 일가와 함께 여름 한철을 보낸 이후 알래스카 풍광을 담는 사진가의 길을 걷게 된다.  곰을 좋아하던 그는 알래스카를 누비며 사진을 찍었고,1996년 8월 취재차 방문한 캄차카반도 쿠릴 호수에서 그토록 좋아했던 곰에게 물려 세상을 떠났다. 이 책은 그의 마지막 여정이다.

 

"갖가지 동물, 한 그루 나무, 숲, 심지어 바람마저도 영혼을 가지고 존재하며 인간이 그들을 바라보듯 그들도 인간을 응시한다......  인디언의 신화는 신화의 자리를 넘어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나직이 말을 건다.  밤의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생명이 품은 헤아릴 길 없는 신비를 전하는 것처럼.  나는 곰이 다니는 길이 사라져 간 숲속 세상의 오묘함을 생각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심오함은 '인간이 궁극적으로 알고자 하는 것'과 어떤 지점에서 분명히 얽혀 있을 것이다."  (P.162)

 

저자는 큰까마귀 전설을 따라 남동알래스카에서 시베리아로 이동한다.  그 길이 마지막 여정임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는 자신의 짐을 챙겨 돌아섰을까?  기원전 1만 8천 년 전쯤 물밖으로 드러난 베링 평원을 건너 몽골로이드는 아시아에서 알래스카로 이주했다.  알래스카의 역사를 되짚는 저자의 시간 여행은 하얀 베일에 가려 영원 속으로 회귀하고 있다.  역사로 기록되지 않은 전설의 세계.  작가의 사진에는 곰의 발자국을 따라 영원 속으로 사라지는 고독한 사진가의 시선이 있다.  유화와 같은 그의 사진에서는 원시의 울림이 끝없이 전해진다. 

 

"촬영이 끝난 뒤, 머리뼈를 나무상자에 고이 넣어 품에 안은 채 어둑어둑한 고생물학 연구소의 복도를 걸었다.  죽은 이가 든 유골함처럼 다루기가 조심스러웠다.  나무상자가 흔들릴 때마다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났다.  그 투명한 소리마저 나는 아름답다고 느꼈다.  동굴에서 나온 뒤에도 뼈에는 천천히 시간이 새겨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뼈의 소리에서 나는 3만5천 년 전 남동알래스카 숲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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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 세찬 비바람이 몰아친다는 핑계로 마냥 게으름을 피우는 내가 못마땅했는지 점심을 먹자마자 외출을 하잔다.  마트에 들러 장도 보고, 돌아오는 길에 화원에 들러 화분도 몇 개 사자고 했다.  게으름에 익숙한 사람들은 바깥 날씨가 을씨년스럽고 험할수록 집안의 포근함에 끝없이 녹아들게 마련이다.  마치 킹 목사의 연설문에 나오는 cocoonish feeling을 날씨를 핑계삼아 느껴보려는 것처럼 말이다.  아내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싶으면 위험신호다.  나와 아들녀석은 빨간불이 켜지는 순간을 직감적으로 알아챈다.  그럴 때 조금이라도 밍기적거리면 아내의 잔소리가 우박처럼 쏟아진다.  한마디로 몸을 사려야 하는 순간이다.

 

시험을 코앞에 둔 아들녀석은 지겨운 시험공부에서 해방된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던지 들뜬 기분이었지만 모처럼의 달콤한 휴식을 빼앗긴 나는 영 마뜩지 않은 기분으로 집을 나섰다.  봄비가 오락가락 하고 바람도 거센데 갈 곳 없는 사람들이 모두 마트로 몰렸는지 마트 안은 인파로 왁자하다.  카트를 끌고 아내의 느린 발걸음에 보조를 맞추자니 내 신세가 참으로 처량하다 느껴진다.  아내와 함께 살 때는 그렇지 않았다.  휴일이면 으레 마트에 가야 하는 줄 알았고, 아내가 서두르기 전에 벌써 채비를 마치고 대기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주말부부로 사는 기간이 꽤 오래 지속되다 보니 장보기를 무엇보다 싫어하는 나는 더이상 먹을 것이 없을 때까지 버티다가 어쩔 수 없이 마트에 들를 때면 필요한 물건만 후다닥 집어들고는 서둘러 마트를 벗어나는 것이 습관처럼 굳어졌다.

 

갖가지 화초와 관엽식물들이 즐비한 화원에는 의외로 한가했다.

하기야 이런 날씨에 하릴없이 화원 나들이를 하는 사람도 드물겠다.  내가 주중에 머무는 숙소에 있던 군자란 화분을 지난 겨울에 부주의로 얼려 죽인 일이 떠올라 괜히 뜨끔했다.  살아있는 생명을 보살피는 일이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님을 그때 알았다.  학창시절부터 농사라곤 손도 대지 않았던 나는 이제 다른 생명을 돌보는 일에는 반거들충이가 되었다.

 

대학생이었던 어느 봄날, 화원에 들른 적이 있었다.  무엇 때문인지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집에서 기르는 화초의 이름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자괴감을 만회하고자 필기도구를 갖추어 들고 제법 큰 화원에 갔었다.  아마도 그때 나는 거리에서, 또는 어떤 사무실에서 마주치는 화초의 이름을 척척 알아맞추는 것만으로도 교양인의 범주에 속한다고 느꼈던 듯하다.  어쩌면 그때 풋사랑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서먹한 여인 앞에서 낯선 꽃이름을 들먹이는 것이 멋있어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화원에서 나는 생경한 화초 이름을 수첩 가득 빼곡히 적어놓고는 각각의 이름과 모양새를 머릿속에 기억하느라 진땀을 흘렸었다.  시험공부를 하듯 이름을 외우는 내가 신기했던지 주인 아주머니로부터 차를 한 잔 얻어 먹었던 기억도 난다.

 

지금은 그때 외웠던 꽃이름도 모두 잊었을 뿐 아니라 그때는 보지 못했던 꽃들이 너무 많았다.  나리꽃을 닮은 자마이카, 잎이 탐스러운 자바, 무느가 독특한 무늬 고무나무, 잎이 시원한 콩고, 키가 웃자란 듯한 대엽홍콩, 큰 붓으로 선을 그은 듯한 맛상, 신생아의 머리털처럼 하늘로 쭉쭉 뻗은 드라코 등등.  머리가 어지러웠다.  내 눈에 들었던 것은 이름도 친숙한 떡갈나무였지만 아내는 그것을 고르지 않았다.  산세베리아와 서황금을 하나씩 사서 화원을 나섰다.  비는 여전히 오락가락 그치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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