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한 더위가 목젖 근처에서 깔딱거렸다.

열에너지가 더해지면

분자 알갱이들은 더 분주하고

빠르게 움직인다는데

내 발걸음은 마냥 안단테 칸타빌레.

 

측근 비리로 대국민 사과를 하는 대통령

이번에는 청와대 뒷산을 오르지는 않은 듯.

하기야

한 푼의 병원비라도 아껴야 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이 삼복의 더위애 일삼아 산을 오를까.

나는 오늘도 아침에 산을 올랐다, 병원비라도 아껴보려고.

 

퇴근길에 집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려

도서관으로 향했다.

염천을 피해 서늘한 고요 한점 그리워서.

 

오늘처럼 더위가 등줄기를 타고

뻗쳐 오를 때는

어느 한 맺힌 사랑이 이다지도

뜨거운 것이냐? 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사랑밖에 몰랐던 순진한 백성들이

꾸역꾸역 또 하루를 견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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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나섰을 때는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렸다.

태풍 카눈이 지나간 자리.

사람들은 기다리기라도 한 듯 저마다의 우울을

낮은 빨랫줄에 널었다.

잗주름이 잡힌 우울은 바람에 펄럭이기만 할 뿐

시야에서 멀리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짙은 구름은 사물의 그림자를 선명히 구획하지 못하고

한낮으로 갈수록 오히려 혼란만 가중된다. 

 

 

오전에는 무슨 심각한 일이라도 벌어진 듯 머리를 맞대고

오글오글 모여 있던 내 의식들이 오후가 되자

너나 할 것 없이 '잠'을 처음 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다들 그쪽으로 우루루 몰려갔을을 때,

나는 그 중 몇이라도 붙잡으려고 헛힘만 쓰고 있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수한 의식들이 자신들의 힘만으로 떠받치던

눈꺼풀은 그들이 사라지자 힘없이 닫혔다.

그럴 때 나는 마치 수확이 끝난 논에 군더더기처럼 세워진

허수아비의 느낌이었다.

 

그렇게 잠깐 졸았나보다.

지금은 구름 사이로 오후의 햇살이 부서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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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뱅이 언덕 - 권정생 산문집
권정생 지음 / 창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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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을 때마다 리뷰를 남기는 것은 아니지만 리뷰를 써야한다는 막연한 의무감이 드는 책이 있다.  그것도 책에서 느꼈던 감동이 일상에 희석되지 않도록 서둘러 써야겠다고 말이다. 그런 느낌은 책을 공짜로 제공받았으므로 정해진 기한내에 써야 하는 의무감과는 다른 것이다.  채 쓰기도 전에 책에서 느꼈던 진한 감동이 사그라들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이 스스로를 재촉하는지도 모른다.

 

내게 <빌뱅이 언덕>은 그런 책이었다.

권정생 선생의 산문집이다.  <강아지똥>과 <몽실언니>의 작가라고 하면 '아, 그 분!'하고 무릎을 칠 사람들이 대다수일 듯싶다.  그만큼 선생이 우리에게 남기고 간 것이 많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따지고 보면 아이가 있는 집에서 선생의 책 한두 권쯤 갖고 있지 않은 집도 드물 것이다.  우리집에도 아들녀석이 어릴 적에 읽었던 선생의 작품이 족히 서너 권은 넘을 듯싶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을 읽기 전까지 선생을 잘 알지 못했다.  그저 잘 나가는 동화작가려니 생각했었다.  그게 다였다.

 

빈약한 정보이지만 나는 이 책을 읽고 난 후에야 선생의 삶을 조금 알게 되었다.

선생의 삶을 몇 마디 단어로 집약할 수는 없겠지만, 내가 느꼈던 선생의 삶은 가난과 질병, 지구 환경에 대한 염려와 조국 통일의 염원, 그리고 유년기에 만난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점철된 삶이었다.  물론 선생으로부터 동화를 떼어놓을 수는 없는 일이지만.

 

죽음도 그렇지만 가난이나 질병도 매한가지로 보편적 가난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닝 커피를 마시면서 가벼운 대홧거리로 나눌 수 있는 보편적 가난은 실존에서는 그렇게 낭만적이지도, 가볍게 치부할 수 있는 대화의 소재도 아니다.  오히려 개별적 가난은 질긴 목숨을 원망해야 하는 천형이자 오직 생명으로만 집중되는 삶의 종착지이기도 하다.  유년 시절을 가난하게 보냈던 나는 일본에서 가난한 청소부의 아들로 태어나 경북 안동 조탑리 빌뱅이 언덕 토담집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지독한 가난과 질병을 안고 살았던 선생의 실존에 목이 메었다.

 

자신의 병이 동생의 혼인에 방해될까봐 행려병자로 떠돌던 한 때, 교회 문간방에서 종지기로 살던 시절, 얼굴도 보지 못한 채 소문과 추측으로만 헤아릴 수 있었던 둘째 형님에 대한 그리움 등 이 책의 1부에 실린 자전적 산문을 읽노라면 차라리 눈을 감고 싶을 정도로 가슴이 아려왔다.2차 세계대전과 6.25 전쟁, 선생이 겪었던 두 번의 전쟁을 전후세대인 나는 알 길이 없다.  절대적 궁핍을 벗어나던 시기에 태어났으니 나의 가난은 선생에 비할 바가 되지 못하겠지만 책을 읽는 내내 저리도록 아팠다.

 

어릴 적 신었던 짝짝이 장화 때문에 동네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은 일로 장화만 보면 사고 싶었다던, 이름값만으로도 춥고 배고프지 않아도 될 때도 스스로 자발적 가난을 선택했던 선생에게 당신의 하느님은 언제나 깨끗하고 넓은 예배당에서 대접받는 하느님이 아닌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 머무는 하느님이었다.  당산나무와 조화롭게 사는 그런 하느님이었다.

 

선생에게 통일은 이념과 이데올로기의 통합이 아니다.  비록 나라는 작고 가난해도 평화롭게 한마음이 되어 사이좋게 사는 그런 나라가 되기를 소망했다.  한마음으로 뭉쳐 살면서 보고 싶은 사람을 언제든 볼 수 있는 나라, 나라가 갈라졌기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는 수많은 겨레가 고통없이 살 수 있는 그런 조국을 꿈꾸었다.  자연이 아닌 인간에 의해 우리 겨레가 남북으로 갈라졌듯 문화생활이라는 도시적 삶은 자연을 병들게 하고 결국 인간의 생명마저 파괴한다고 선생은 말한다.

 

어린이의 시선으로 보면 지극히 단순하고 부드러워지는 삶이 등나무 덩굴처럼 억세고 복잡하게 변한 까닭은 분명 우리의 욕심이 사납게 자란 탓일 게다.  내가 바라는 삶은, 내가 희망하는 삶의 모습은 과연 정당한 것인가?  나는 누군가의 생명을 취하여 내 삶을 윤택하게 하려 하지는 않았는지 곰곰이 되짚어 본다.  선생이 가신 지 이제 5년, 내가 죽어 사라진 후에도 여전히 꽃은 피고 새가 지저귈 것이라고 어찌 믿을 수 있을까?

 

"우리의 무기는 괭이와 호미와 낫이지 장갑차나 미사일, 핵폭탄이 절대 아닙니다.  가난하고 어질고, 큰 것보다 작은 것을 소중히 여겼던 우리였습니다.  너무 순해서 어리석어 보일 때도 있지만 분명 자기 주인만은 알아볼 수 있는 우리였습니다.  김 목사님, 제가 거듭 부탁하고 싶은 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어리석고 순하기만 하면서도 제 주인의 모습을 똑똑히 구분해서 따라갈 줄 아는 똥개는 될지라도 들쥐 같은 백성은 절대 되지 말라고 가르치자는 것입니다."    (P.306)

 

세상의 가난을 모두 모아 인구수 대로 나눈다 한들 그것을 보편적 가난이라 말할 수 있을까?  세상에 그런 가난이나 아픔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개별적 아픔과 실존을 살아갈 뿐이다.  우리가 살아 있는 모든 생명을 사랑해야 하는 까닭은 바로 이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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랄랄라 하우스 - 묘하고 유쾌한 생각의 집, 개정판
김영하 지음 / 마음산책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일지라도 그 사람이 쓴 글만으로 그 사람의 성격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  나의 성격과 똑 닮았거나 내가 알고 있는 지인의 성격과 흡사해서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경우도 있지만 직업상 많은 사람을 만나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이의 성격을 직관적으로 떠올리게 된다.  그리고 나처럼 이도 저도 아닌데 천성적으로 타고 나는 경우도 있는 듯하다.

 

아이들을 가르치기 전에는 내게 이런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아이들을 가르친 기간이 긴 것도 아닌데 이렇게 말한다면 건방지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교육자가 되려면 적어도 얼치기 심리학자의 수준에는 이르러야 가능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나는 처음 만나는 아이라 할지라도 그 아이로부터 몇 마디 말만 들어보면 그 학생의 성격이며, 공부 성향이며, 가정환경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되는데 사회 경험이 없는 아이들은 내가 마냥 신기한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내가 이이들로부터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말은 "자리 펴시죠?"이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요즘은 책을 읽으면서도 작가의 자라온 배경이나 성격, 대인관계나 취미 등을 추측하거나 상상하는 일이 잦아졌다.  약간의 직업병(?)처럼 말이다.  이 책 <랄랄라 하우스>를 읽을 때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불편했었다.  작가의 성격이 글에 잘 녹아 있을 때, 독자는 내용에 상관없이 편안함을 느끼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독자의 몰입도를 높이려면 작가는 자신의 성격을 최대한 활용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자신의 성격이나 취향과 유사한 면이라도 보여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랄랄라 하우스는> 나꼼수의 김어준 스타일로 "실패!"라고 외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랄랄라 하우스>의 내용이 재미없다거나 읽을 만한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독자로서 내가 느꼈던 것은 작품이 작가의 성격과 어울리지 않았다는 점을 말하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모르긴 몰라도 작가는 유년 시절과 학창 시절에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범생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다.  규칙도 잘 지키고, 책임감도 있고, 농담도 잘 하지 않고, 단상에 올라가 노래를 부르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고, 늘 겸손하거나 수줍어 하고, 옷차림이나 정리정돈이 항상 흐트러짐이 없고, 윗사람으로부터의 지적이나 나무람을 극도로 싫어하는...

 

그렇다고 성적도 우수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대개 이런 부류의 학생들이 성적으로 최상위권에 드는 경우는 드물다.  공부를 못하지는 않지만 뛰어나지도 않은, 변동이 거의 없는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지 않았을까?  내가 추측한 작가의 성격이 맞는다면 이 책은 태생적으로 글과 독자의 불협화음을 안고 있는 것이다.  내가 알고 있는 목사님 한 분이 있다.  성격도 강직하고 고지식하며, 약간은 근엄하기까지 한 표정이 일상적인데 가끔 농담을 던질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소름이 돋을 정도로 썰렁하다.  평소에 잘 웃고 농담도 잘 하는 사람이 했더라면 무척 재미있을 내용인데도 목사님을 통해 전달되기만 하면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표정관리를 어렵게 만드는 썰렁한 농담이 되고 만다.

 

유쾌한 철학자로 알려진 전시륜이나 빌 브라이슨의 책을 읽을 때면 엄숙한 자리에서도 웃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다.  자신도 모르게 킥킥대는 웃음이 터져나와 입을 막게 된다.  그들에게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개그코드가 온 몸 구석구석에 녹아 있는 듯하다.  얼굴을 보며 대화를 나누는 것도 아닌데 책을 읽는 독자는 별 내용도 아닌 대목에서도 키득대곤 한다.  낙천적인 성격의 작가만 그런 것은 아니다.  선천적으로 우울하고 시니컬한 성격의 작가도 그에 딱 맞는 작품을 쓰는 경우가 있다.

 

김영하 작가의 성격과 잘 맞아떨어진 작품을 꼽으로면 나는 주저없이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나 <네가 잃어버린 것을 기억하라>를 떠올릴 것이다.  과거를 말하면서도 과거와의 단절을 꿈꾸는, 다소 냉소적이고 시니컬한 느낌은 모범생으로 자란 작가가 성장기에 느꼈던 반항의식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행동은 언제나 일직선의 규칙을 따라가지만 그 규칙에서 벗어나고자 발버둥치는 이율배반적 느낌은 성인에 이르러 반항적인 모습으로,과거와의 단절을 시도한다.  모범생이 일탈을 꿈꾸는 것과 끝없이 과거를 말하면서도 과거와의 단절을 꿈꾸는 것은 적당히 닮아 있다.

 

작가가 운영하는 인터넷 미니홈피에 올렷던 글들을 중심으로 엮은 이 책에는 언론매체의 기고문이나 여행지의 사진, 작가가 기르는 고양이에 관한 이야기, 자신과 아내의 소소한 일상, 자신의 작품이 탄생하게 된 일화 등 다양한 내용의 유쾌한 글들이 실려 있다.  사실 이러한 산문집이 아니라면 작가의 일상을 들여다보기가 쉽지 않다.  작품이 좋고 나쁨을 떠나서 김영하 작가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한번쯤 읽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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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가까운 공원을 잠시 거닐었습니다.

말매미 울음소리가 들립니다.

올 들어 처음 듣는 매미 소리.

가슴이 설렙니다.  언제나 처럼 '처음'이라는 말은

콩닥콩닥 가슴을 뛰게 합니다.

바야흐로 성하(盛夏).

 

오는 길에 소나기를 만났습니다.

황순원의 '소나기'에 등장하는 소녀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소녀가 양산을 받듯 해 보인

마타리꽃도 없는 거리에서

다리엔 한 근의 힘이 붙습니다.

 

나는 이 힘으로 나른한 오후의 권태를 이기고

또 하루를 살아낼 겁니다.

 

유리창엔 오후의 나른함이

알갱이로 부숴지고 있습니다.

노스탤지어의 소녀도 없는 빈 하늘엔

매미 소리 가득하고

어제 못 다 읽은 책을 다시 펼쳐도

번번이 헛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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