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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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름지기 추억이란 기억이라는 질료에 개개인의 감정을 적당히 섞는 일이라고 할 것이다. 말하자면 개인의 기억에 그때그때의 감정 - 기쁘다거나 슬프다거나 행복하다거나 짜증난다거나 하는 - 을 적당히 섞어 무료한 시간을 달래는 행위가 추억인 것이다. 요즘처럼 코로나19와 길어진 장마로 인해 실내 생활이 한정없이 늘어난 시기에 우리는 자신의 오래전 기억에 기쁨 두 방울 놀람 한 방울을 더해 새로운 추억을 빚어본다거나 모든 기억에 그리움 한 컵을 마구잡이로 들이부어 흔하디흔한 추억들을 전리품처럼 늘어놓으며 답답한 시간을 달래게 되는 것이다.

 

정세랑의 소설 <시선으로부터> 역시 주인공인 심시선 여사에 대한 추억과 심시선 여사로부터 비롯된 한 가정의 역사가 담담히 그려지고 있다. 20세기의 폭력적인 시대를 살았던 그녀가 시대에 맞서 약한 이들에게 공감하며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데 있어서는 과격할 정도로 진보적인 발언도 서슴지 않았던 여장부의 기질을 보여주었던 심시선 여사의 10주기를 맞아 가족들은 그녀가 젊은 시절을 보냈던 하와이에서 단 한 번뿐인 제사를 지내기로 한다.

 

“기일 저녁 여덟시에 제사를 지낼 겁니다. 십 주기니까 딱 한 번만 지낼 건데, 고리타분하게 제사상을 차리거나 하진 않을 거고요. 각자 그때까지 하와이를 여행하며 기뻤던 순간, 이걸 보기 위해 살아 있었구나 싶게 인상 깊었던 순간을 수집해 오기로 하는 거예요. 그 순간을 상징하는 물건도 좋고, 물건이 아니라 경험 그 자체를 공유해도 좋고.” (p.83)

 

소설은 줄곧 심시선 여사의 글과 강연, TV 토론 등을 한 꼭지로 하여 심시선 여사와 관련된 가족들의 추억과 개별적인 삶의 편린들이 잔잔하게 펼쳐진다. 한국전쟁의 비극을 겪고 새로운 삶을 찾아 대한민국을 떠났던 심시선은 자신이 체류하던 하와이에서 미술계의 거장이었던 마티아스 마우어를 우연히 만났고, 교육과 기회를 제공하겠다는 그의 말에 혹해서 하와이를 등지고 독일로 향했다. 자신의 명성과 재능을 통해 심시선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이용하려 했던 마우어로부터 탈출하여 요제프 리와 결혼하여 귀국했던 심시선 여사는 큰딸 명혜, 둘째 딸 명은, 셋째인 아들 명준을 낳았지만 하는 일마다 실패를 거듭하던 요제프 리는 결국 독일로 돌아가고 만다. 요제프 리와 이혼한 심시선은 광고계의 대부였던 홍낙환과 재혼한다. 그리고 홍낙환의 전처 소생이었던 홍경아를 가족으로 맞이한다.

 

파란만장했던 심시선의 세대를 기점으로 명혜, 명은, 명준, 경아의 2세대를 거쳐 심시선의 손녀인 화수, 지수, 우윤, 그리고 홍경아의 아들 정규림과 딸인 정해림으로 소설은 확장된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뜸했던 시대에 여류화가이자 작가로 살았던 심시선 여사를 통해 가족의 모든 구성원들은 특별했던 그녀의 10주기 제사를 계기로 알게 모르게 물려받은 정신적 물질적 유산을 떠올리며 각자의 삶에 드리워진 장애와 고통을 심시선 여사의 시선으로 재조명하게 된다.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세상을 뜬 지 십 년이 지나서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 (p.331)

 

오랜만에 드러났던 맑은 하늘과 뜨거웠던 햇살, 투명한 시간의 속살 너머 말매미의 울음소리만 가득했던 하루가 뒤뚱뒤뚱 저물고 있다. 먼지처럼 쌓여만 가는 기억들. 정세랑의 소설 <시선으로부터>는 주인공인 심시선 여사로부터 라는 의미와 함께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들은 어쩌면 세상에 대한 저마다의 시선, 저마다의 관점, 저마다의 세계관에 의해 비롯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작가의 철학적 견해가 반영되었던 게 아닐까.

 

몇 대에 걸친 한 집안의 이야기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이런 종류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나는 습관처럼 박경리 여사를 떠올리곤 한다. 소설 <토지>에서, <김약국의 딸들>에서 면면히 이어지던 끈끈한 생명력이 정세랑 작가의 <시선으로부터>를 지나 후세의 다른 어느 작가에게로 끝없이 넘실댈 것만 같은 느낌. 일상을 다룬 여러 편의 에세이를 모아 한 편의 소설로 완성한 듯한 느낌의 <시선으로부터>는 밀란 쿤데라의 소설 <정체성>을 떠오르게도 하고, 소설을 읽는 틈틈이 바삭바삭한 기억들이 더위를 잊게 했던 오늘, 바야흐로 지금은 성하(盛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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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보수 야당을 추종하는 일부 언론과 정치권에서 벗어난 떨거지들이 현 정권을 향해 '독재' 운운하며 비난을 이어가고 있다. 사실 대한민국에서 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한 것은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 정권부터라고 해야 하겠지만 그마저도 군부독재의 온상이었던 민주정의당과 김종필이 이끌었던 신민주공화당 그리고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의 야합을 통해 일궈낸 정권이었기에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현이라고는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김대중 전 대통령에 의한 '국민의 정부'를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뿌리로 보아야 할까? 이 역시 김종필이 이끌었던 자유민주연합과의 연합에 의해 이룬 결과물이었으니 부족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어쩌면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뿌리는 고인이 되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참여정부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 까닭에 '독재'의 혜택을 톡톡히 누려왔던 보수 야당의 떨거지들과 그 밑에서 기생했던 언론과 정재계 인사들 그리고 권력자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노력했던 일부 연예인들은 그 시절의 향수와 미련을 떨쳐버리지 못한 채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공격을 이어가고 있는 듯 보인다. 자신들의 기반을 무너트린 것이 오직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탓인 양 과장하면서 말이다.

 

최근 검찰의 유력 인사와 보수 야당의 정치인들이 현 정부를 향해 '독재'를 외치는 것도 따지고 보면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가장 가까웠던 친구인 문재인 대통령이 현 정부를 이끌고 있고, 화려했던 보수 정권의 기반이 일개 지방의 군소정당으로 전락한 것으로도 모자라 보수의 졸개 역할을 하던 검찰의 막강한 권력조차 반으로 쪼개질 위기에 처했으니 그들로서는 이와 같은 현실 앞에서 그저 막연히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을 터, 못 먹는 감 찔러나 보자는 속셈으로 현 정부를 흠집 내는 데 열을 올리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사실 진정한 '독재'를 경험해보지 않은 작금의 젊은 세대에게 있어 '독재'는 현실을 옥죄는 가혹한 정치 현실이 아니라 막연한 추상명사로서의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의 영구한 발전을 위해서는 '독재 박물관'을 세우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을까 싶다. 이승만 정권부터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 이르기까지 독재 권력에 의해 자행되었던 생생한 증언과 서류, 사진과 유물들을 모아 우리 후손들이 그 끔찍했던 현실들을 생생하게 체험함으로써 이 땅에서 다시는 독재 권력이 발 붙이지 못하도록 경계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하는 데 국민 모두가 동참할 수 있도록 하자는 취지로 말이다.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는 결코 쉽게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후손들이 똑똑히 기억하고 가슴에 새길 수만 있다면 기성세대의 역할은 그것으로 족한 것인지도 모른다. 독재 정권 하에서 그들의 수족 노릇을 담당했던 검찰이 지금 이 시점에 '독재' 운운하는 것도 참 우습다. 비는 왜 이다지도 길게 내리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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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경의 리부트 - 코로나로 멈춘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법
김미경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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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7월 말부터 8월 중순까지 무더위가 절정에 이르는 등 역대급 폭염이 예상된다고 했던 기상청의 예보와는 달리 예상외로 길게 이어지는 장마로 인해 덥지 않은 날씨가 계속되고 있다. 열대야가 7월 서울에서 발생하지 않은 것은 2003년 이후 17년 만의 일이라고 하니 기상청의 예보는 한참이나 빗나간 셈이었다. 비록 눅눅하고 습한 날씨로 인해 불쾌지수는 하늘 높은 줄 모른 채 마냥 높아지고는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호환 마마보다 더 무서운 게 실업의 공포이고 보면 올해의 무덥지 않은 여름 날씨를 마냥 반기고 좋아할 수만은 없다는 게 우리 앞에 놓인 현실이다. 반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코로나19 정국으로 인해 전 세계의 경제가 줄줄이 뒷걸음질을 치고 그 여파는 고스란히 개인의 몫으로 전가되고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 하루 신규 확진자 수가 30만 명, 전 세계 누적 확진자 수는 1천800만 명을 눈앞에 둔 암울한 현실 앞에서 우리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이며, 우리는 코로나 이후의 미래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까?

 

대한민국 최고의 자기계발 강사 김미경이라고 해서 코로나의 여파가 비껴가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녀가 운영하는 콘텐츠 회사에는 20여 명의 직원이 근무하고 있고, 유튜브 채널 <김미경 TV>와 온라인 대학 <MKYU대학>은 시작한 지 3년도 안 된 신규 사업들인지라 수익을 내기에는 역부족이었고, 회사의 가장 탄탄한 수익처는 저자의 강의일 수밖에 없었는데 그녀의 모든 강의가 멈춰 선 지금 회사 경영이 위태로워지는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다. 회사를 책임지는 경영자로서 마냥 손을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저자는 '코로나 이후 세상에서 살아남는 법'을 알아내기 위한 그녀만의 처절한 몸부림을 시작했다. 종이 신문과 주간지를 각각 두 종을 구독하고, 국내외 비즈니스 컨설팅 회사들의 리포트를 받아보기 위해 메일 정기 구독 서비스를 신청했으며, 관련 서적들을 쉼 없이 읽고, 일주일에 최소한 서너 명의 전문가를 직접 만나 인터뷰를 했다고 한다. 그렇게 찾아낸 단서와 아이디어를 노트에 옮겨 적고 모든 단서들을 분해하고 재조합하는 과정에서 저자는 마침내 '나 김미경이 살아남는 법'을 찾아냈다고 한다.

 

"코로나 이후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야. 살아가는 공식, 돈 버는 공식이 완전히 달라. 그중에서도 내가 발견한 네 가지 공식으로 우리 회사는 다시 살아날 거야. 그러려면 먼저 해야 할 것이 있어. 코로나 이전에 했던 사업 방식을 완전히 '리셋reset'해야 해. 아까워하지 말고 필요 없는 것은 다 초기화하자. 이제부터 우리가 할 일은 '리부트reboot'야!" (p.8 '프롤로그' 중에서)

 

지금 이 순간에도 대한민국의 여러 곳에서 제2, 제3의 '김미경'이 자신의 사업장을 지키기 위해, 이 위기로부터 자신의 가정을 지키기 위해 밤잠을 줄여가며 몸부림을 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혼돈과 위기 속에서 해법을 찾아낸다는 것은 폭우로 급속히 불어난 물에 휩쓸린 사람이 작은 지푸라기를 잡고 자신의 생명을 구해내는 일 만큼이나 어렵고 힘든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김미경의 리부트>는 저자가 발견한 '코로나 시대의 생존 비법'인 동시에 제2, 제3의 김미경을 위한 작은 희망의 불씨가 될지도 모른다.

 

책은 다섯 개의 Part로 구성되었다. 코로나 위기 속에서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미래의 질서와 어떻게 하면 우리가 그 기회를 포착하고 잡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Part 1. '대전환을 두려워하지 말라', 코로나로 재편된 네 가지 생존 공식을 다루고 있는 Part 2. '내 인생을 바꾸는 4가지 리부트 공식', 20세기를 이끌어왔던 지금까지의 인생 설계법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생 시나리오를 함께 쓰는 방법'에 대해 쓰고 있는 Part 3. '나를 살리는 리부트 시나리오를 써라', 4차 산업과 디지털 기술로부터 자신의 일자리를 지키고, 빠른 변화와 불확실한 시대에 대처하는 공부법을 다룬 Part 4. ''뉴 러너'가 되어야 일자리를 구한다', 마지막으로 코로나의 근본 원인이 무엇이었으며, 이후 우리는 어떻게 마음을 다잡고 용기와 희망을 가질 것인가를 생각하며 인간의 존엄성을 대하는 성숙한 어른의 자세에 대해 이야기하는 Part 5. '공존의 철학자 '뉴 휴먼'이 미래를 구한다'가 그것이다.

 

"코로나는 언젠가 끝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살아남을 것이다. 그때 우리 아이들이 불신이 아닌 배려와 신뢰를 먼저 떠올렸으면 좋겠다. 혐오 대신 용기를 냈으면 좋겠다. 그러려면 우리 어른들도 '네가 더 힘들지 않느냐'는 따뜻한 말 한마디를 해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물리적 생존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바로 '관계의 생존', '신뢰의 생존'이다" (p.268)

 

언젠가 내게 들려주었던 누군가의 감언이설처럼 한 순간 쉽게 현혹되었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물거품처럼 쉽게 잊히는 이야기로 남고 싶지는 않았는지 책의 내용은 시종일관 진지하다 못해 비장한 느낌마저 들었다. 저자가 여러 방송 매체에서 보여주었던 수더분하고 화려한 입담은 책의 어느 구석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생존을 위해 우리가 지금도 실천하고 있는 '사회적 거리두기'가 관계의 실종, 신뢰의 실종으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라는, 그러면서도 우리 모두가 고단한 삶의 터널을 무사히 벗어나기를 바라는 저자의 염원과 바람이 고스란히 담긴 책, <김미경의 리부트>는 내게 그렇게 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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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나면 당신과 결혼하지 않겠어 - 남인숙의 여자마음
남인숙 지음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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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해외여행에 매료되는 이유는 여행지의 이국적인 풍경이나 문화보다는 많은 사람들 속에서 느끼는 익명성으로부터 오는 자유가 아닐까 싶다. '군중 속에서의 고독'이랄까? 우리는 수많은 현지인과 관광객들 사이에서 오히려 외로움을 느끼곤 한다. 그래서인지 유창하지 못한 영어와 바디랭귀지를 섞어 모르는 사람과의 대화를 시도하기도 하고, 그들의 표정과 이따금 들리는 몇몇 단어들을 조합하여 그들의 속내를 파악하고자 애쓰기도 한다. 그리고 모국에서는 결코 표현하지 않던 공감 그 이상의 연민을 그들에게 보여주곤 한다. 그들 역시 외롭다고 느끼면서 말이다.

 

이와 같은 공감이나 연민은 40대 이후의 사람들에게서 두드러진다. 저들도 나처럼 나이를 먹는구나, 실감하는 것이다. 그것은 곧 우리 사회로부터 주인공의 자리를 더는 차지할 수 없다는 열패감인 동시에 삶의 정점에서 서서히 내려가고 있음을 자각하는 데서 오는 쓸쓸함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나면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고 삶의 또 다른 행복을 맛보게도 된다. 그런 면에서 40대 이후의 행복은 환경의 변화에서 온다기보다 자기 스스로의 마음의 변화에서부터 비롯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행은 그저 삶이라는 방의 창을 여는 일이다. 창을 열어도 방 안에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새 공기로 숨 쉬는 내 호흡이 나도 모르게 달라진다. 나이 들수록 여행에서 얻는 게 많아진다. 아마 스무 살 때 보았다면 보지 못했을 것들을 느끼고 배운다. 하지만 낯선 곳에서의 모든 것들을 포용할 수 있는 정신에 비해 육체가 점점 여행에서 부적합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참 소름끼치게 인생은 공평하다." (p.37)

 

남인숙 작가의 수필집 <다시 태어나면 당신과 결혼하지 않겠어>는 도발적인 제목에 비해 그 내용은 솔직하고 담백하여 오히려 맥이 빠지는 느낌이 든다. 철없는 남편에 대한 비난의 글들이 줄줄이 등장할 것 같은데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젊음을 잃어가는 대가로 얻고 있는 좋은 것들을 숨은 그림찾기 하듯 하나하나 찾기 시작했고, 그럴 때마다 조증 환자처럼 신이 났다고 말하는 작가는 '누구나 '좋은 시절'이라고 말하는 청년 시절에만 삶의 절정이 있는 게 아니다. 나는 무지와 어리석음과 혼돈으로 후회할 짓만 하고 돌아다니던 내 젊은 시절을 돌이키기도 지긋지긋하다. 나이 들어가는 지금이 더 좋고, 내 인생에서 가장 좋은 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한다. 어쩌면 이 책은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삐딱한 시선에 대한 강한 반론인 동시에 '지금 불행한 사람들이 불행한 핑계로 나이듦을 선택한 것뿐'이라는 작가 자신의 확신에 찬 결론이기도 하다.

 

"아이나 남편과의 사이에서 뭔가가 삐걱거릴 때 멀리 떨어져 살펴보면, 거기에는 항상 내 자신이 아닌 그들을 통해 행복감이나 대리만족 따위를 느껴보려고 하는 내가 있었다. 행복의 중심축이 내가 아닐 때 서로가 불행해지더란 말이다. 자꾸만 희생을 하는 사람들이 자기중심적이 되기 쉽다는 건 씁쓸한 역설이다. 어머니들의 전매특허인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로 시작되는 각종 슬픔의 대서사시가 그 증거다." (p.246)

 

'살면서 후회되는 일이 무엇이었느냐고 묻는다면 후회되는 일이 없다고 대답할 것이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작가는 후회없이 인생을 사는 비기가 '후회하지 않고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잘못된 결정일지라도 후회하지 않고 '이왕 이렇게 된 거 열심히 잘해보지 뭐.' 하는 맘으로 대략 그런 식으로 살다 보니 일은 돌고 돌아 결과적으로 작가 자신이 좋은 선택을 한 모양새가 되어가더라는 이야기였다.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는 건 불가능하다. 백 살이 되어도 안 될 것이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는 건 가능하다. 후회하지 않고 내가 저질러놓은 일들에 대해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만 생각하는 게 후회없는 삶을 사는 비법일 것이다." (p.98)

 

이 책은 어쩌면 자존감이라곤 떨어질 대로 떨어진 중년의 '아줌마'들을 위한 자존감 살리기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쓰인 책처럼 읽힌다. 물론 작가 자신도 그 중 한 사람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어떻게 하면 당당하고 행복하게, 삶에 대한 후회나 미련을 두지 않고 남은 생을 잘 살 수 있을까 끝없이 탐구하고 틈만 나면 궁리하는 어느 소설가의 최종 결론이자 중년 여성의 행복한 삶을 위한 남인숙 작가의 처방전인 셈이다. 누구보다 당당하게 살아가고 있는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놓은 까닭에 책은 생각보다 술술 읽힌다. 비틀즈의 노래 '오블라디 오블라다(Obladi Oblada)'가 문득 떠오른다. 인생은 그렇게 흘러가는 것(Life goes on)이라는 뜻을 담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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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있었던 검찰 수사심의위원회의 결정이 있은 후 한 모 검사장의 열사 코스프레가 극에 달하고 있다. 이 정도면 연말에 있을 청룡영화상의 남우주연상은 물론 내년에 있을 백상예술대상의 남자 최우수연기상마저 떼 놓은 당상이 아닐까 싶다. 자신이 마치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는 정의의 사도인 양, 목숨을 걸고 독재 권력에 저항하는 투사인 양 행세하고 있는 모양새다.

 

그가 수사심의위원회에서 말하기를 "지금 말도 안 되는 이 상황은 권력이 반대하는 수사를 하면 어떻게 되는지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며 "수사심의위가 불기소를 권고해도 법무부 장관과 서울중앙지검 수사팀은 저를 구속하거나 기소하려고 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하니 정말 대단한 연기력 아닌가. 수사심의위에서 그가 했을 명연기의 장면을 보지 못한 게 못내 아쉽지만 그 장면은 쉽게 떠올릴 수 있을 듯하다. 눈썹과 눈썹 사이에 미간 주름이 깊게 자리 잡아 화가 난 인상을 풍기는 그가 자못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수사심의위원들에게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연기했을 장면은 지난해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받은 숀 펜이 연기했던 영화 <밀크>를 떠올리게 한다. 폭압적인 시대에 감히 '희망'을 꿈꿨던 한 정치가의 삶을 다룬 영화 <밀크>를...

 

그는 나아가 '검언 유착 의혹'을 '광풍'으로 규정하고, "광풍의 2020년 7월을 돌아보면 적어도 대한민국 사법시스템 중 한 곳만은 상식과 정의의 편에 서 있었다는 기록을 역사에 남겨달라."며 수사중단·불기소 권고를 호소했다고 하니 아무리 강심장의 수사심의위원들인들 그의 연기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을 듯하다. 게다가 "그래 주시기만 한다면 저는 억울하게 감옥에 가거나 공직에서 쫓겨나도 끝까지 담담하게 이겨내겠다."고 덧붙였다니 실로 대단하지 않은가.

 

백 번 양보해서 공작 수준의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이동재 전 기자의 범행 내용을 들으면서도 그 자리에서 현행범으로 체포는 하지 않고 "그러다 한 건 걸리면 되지."하면서 덕담을 건넸다니 이게 검사가 할 짓인가 말이다. 적어도 국민의 법상식으로는 공모는 아닐지라도 직무유기가 명백한데 말이다. 그럼에도 자신은 부당한 권력에 항거하는 투사인 양 연기를 계속하고 있으니 그는 아마도 법을 전공한 게 아니라 연극영화과를 전공한 게 아닌가 싶다. 이 정도 연기력이면 국내 백상예술대상 남우주연상을 넘어 내년도 오스카 남우주연상도 기대해 볼 만하지 않은가. 부디 대한민국 남자 배우들도 한 모 검사장의 연기력을 보며 분발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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