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섭함'이란 감정은 타인에 대해 다분히 폭력적이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내가 원하는 순간에 상대방이 나의 '감정회로'에 접속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이것은 곧 타인의 '감정회로'를 나와 대등한 어떤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 나의 '종속회로'로 만들겠다는 뜻이다. 상대방은 나의 '감정회로'에 종속된 하위 회로인 까닭에 나의 감정은 있는 그대로 언제든 상대방에게 전달될 수 있고 나는 무시로 변하는 내 기분을 상대방이 알아챘는지 그렇지 않은지 신경 쓸 필요도 없고, 내 기분을 몰라주는 상대방으로 인해 섭섭함을 느낄 이유도 없는 것이다. 말하자면 '섭섭함'이란 상대방의 '감정회로'를 내 '감정회로'에 종속시키지 못한 것에 대한 불편한 감정일 뿐이다. 그러므로 '기대에 어그러져 불만스럽거나 못마땅하다'는 뜻의 '섭섭하다'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다분히 폭력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으며, 나의 입장에서 무척이나 이기적인 단어일 수 있다.

 

그러나 가족이나 연인 등 친밀한 관계라고 믿어 의심하지 않는 상대방에 대해 우리는 그가 자신의 '감정회로'에 24시간 연결되어 있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성적으로는 그들 역시 독립된 개체라는 걸 인정하면서도 감정적으로는 그렇게 믿으려 들지 않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게 대부분 이성보다는 감정의 지배를 받을 때가 많은 까닭에 자신의 감정을 그들 중 누군가에게 단 한 번도 설명한 적 없지만 자신의 기분을 몰라주는 상대방을 향해 "그걸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하고 되묻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다.

 

날씨가 끄물끄물하고 눈이라도 한바탕 휘몰아칠 듯한 이런 날, 나는 캐럴라인 냅의 에세이 <명랑한 은둔자>를 읽고 있다. 쭈욱 계속하여 읽는 건 아니고, 읽다 말다 그렇게 소일하고 있는 것이다.

 

"일요일 아침. 창문으로 햇빛이 새어들고, 새가 노래하고, 계획도 할 일도 없는 하루가 펼쳐져 있다. 많은 사람에게는 이것이 주중 일하는 날들의 터널 끝에서 맞는 여유의 빛이자 기쁨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날이 두렵다. 이런 날 나는 뒤숭숭한 마음으로 깬다. 막연한 갈망, 내 마음의 문을 긁어대는 이름 모를 불안, 아릿한 아픔이 느껴진다. 나는 침대에 누운 채로 천장을 응시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외로워." ('외로움에 관하여' 중에서)

 

'섭섭함'에 대해 말하다가 왜 갑자기 뜬금없이 '외로움에 관하여'를 인용하느냐고? 글쎄, 이렇다 할 맥락은 없다. 사람들은 나처럼 이따금 변덕스럽고, "그걸 어떻게 모를 수가 있어?" 하고 되물으면서 따지듯 싸움을 걸 때도 있고, 나의 '감정회로'에 접속한 그대의 노고에 감동할 때도 있는 것이다. 일요일은 몸보다 감정이 부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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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는 이렇게 쓴다
나카무라 구니오 지음, 이현욱 옮김 / 밀리언서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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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비단 책을 읽는 데서 그치지는 않는다. 꾸준히 읽다 보면 읽는 즐거움을 넘어 쓰는 즐거움에 이르게 되고, 꾸준히 쓰다 보면 쓰는 것이 곧 깨달음에 이르는 지름길임을 스스로 자각하게도 된다. 이와 같은 연쇄는 다른 누군가의 지침이나 권유에 의해 일어나지는 않는 듯하다.  스스로에 의한 내면적 자각이나 외부로부터의 어떤 자극이나 그로 인한 결심에서 비롯된다고 하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좋은 습관이라는 게 대개 자신의 굳은 결심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나카무라 구니오의 <하루키는 이렇게 쓴다>를 읽은 독자라면 혹 책상 위에 놓인 빈 종이나 컴퓨터의 여백에 뭔가 끄적이고픈 충동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설사 별 내용도 없는 낙서 수준의 글일지라도 쓰고 싶다는 충동은 아무 때나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는 일은 아니기에 어쩌면 그것을 허투루 보아서는 안 될지도 모른다. 쓰고 싶다는 느낌이 내 인생에서 단 한 번뿐인 소중한 체험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쓰는 것을 즐기는 사람은 아마 없을 테니까.

 

"나는 문장 쓰는 법의 많은 부분을 하루키에게 배웠다. 심플하고 음악처럼 리드미컬하다. 번역체 같기도 한 특이한 문체로 장황하게 묘사하는 소설이나 에세이도 '문장의 교과서'라고 생각하면서 읽어보면 훨씬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p.4 '프롤로그' 중에서)

 

나카무라 구니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을 분석하고, 작품에서 보이는 하루키만의 문체의 특징이나 규칙을 자신의 문장에 적용해서 작가가 되었다고 한다. 저자가 발견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법은 무려 33가지에 이른다. 수수께끼 같은 긴 제목을 붙이는 것부터 구체적인 '연도'를 쓰는 것이라거나 갑자기 소중한 무언가가 사라지는 것, 갑자기 전화가 걸려오거나 술의 종류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묘사하기 등 작품의 일부만 읽어도 '아, 이것은 하루키의 작품이구나' 하고 단박에 눈치챌 수 있는 여러 특징들을 저자는 적절한 인용과 설득력 있는 근거를 바탕으로 설명하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에서는 항상 갑자기 무언가가 사라진다. 고양이가 사라지고, 아내가 사라지고, 색이 사라진다. 그렇게 마법처럼 여러 가지가 차례차례 사라지는 것이 하루키식 '양식'의 아름다움이다." (p.80)

 

사실 하루키 문장의 특징은 뭐니 뭐니 해도 일상의 디테일에 있다. 세탁, 다림질, 요리, 청소 등 단조롭기 짝이 없는 집안일도 그의 손을 거치면 다채롭고 특별한 이야기로 되살아난다. 이와 같은 디테일은 '장소'의 묘사에 있어서도, 음식이나 와인, 재즈와 같은 고전 음악의 묘사에 있어서도 하루키 특유의 꼼꼼함이 빛난다. 그밖에 수수께끼처럼 긴 제목을 통해 뭔가 일어날 것 같은 암시를 주는 방법, 구체적인 연도를 제시함으로써 독자들의 기억력을 상기시키는 방법, 'BMW' '창유리' 등 강력한 키워드를 통해 독자의 상상력을 소환하는 방법, 명작을 인용해 격조를 높이는 방법 등 소설가로서의 하루키는 독자의 의식을 사로잡고 자신의 작품을 끝까지 완독할 수 있는 장치를 작품 곳곳에 숨겨두고 있는 것이다.

 

보통 우리가 누군가에게 '누구누구의 키드'라는 말을 쓸 때는 그가 어떤 인물로부터 정신적 기술적으로 큰 영향을 받아 그 사람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했다고 판단될 때 쓰곤 한다. 말하자면 경외와 존경의 대상이었던 누군가를 추종하여 그와 닮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 결과 어떤 성취를 이룬 자에게 우리는 '누구누구의 키드'라는 말을 사용하는 셈이다. 박세리 키즈, 박찬호 키즈들은 그들의 우상으로부터 단지 어떤 수혜를 입은 것만이 아니라 그들의 정신적인 부분까지를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의 저자인 나카무라 구니오는 진정한 의미의 '하루키 키드'인 셈이다.

 

작가들의 글쓰기 특강에서 종종 듣게 되는 말은 좋아하는 작가의 문장을 필사(베껴쓰기)하는 일은 글쓰기 실력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사실 필사는 '매우 느리고 정확한 독서'로 어휘의 양 자체를 늘려줄 뿐만 아니라 문장 안에서 어휘를 어떻게 배치할 것인가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 이러한 과정은 물론 사고력 확장에도 크게 도움이 된다. 그러나 독서도 익숙하지 않은 현대인에게 필사를 권한다는 건 지나친 욕심일지도 모른다. 기지도 못하는 아기에게 걷기를 요구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모든 독자가 '누구누구의 키즈'가 될 필요는 없을 터, 바깥 기온이 낮아지고 코로나19의 확진자가 늘어날수록 책과 가까워질 시간은 조금이나마 늘어나지 않을까? 날씨가 춥다. 이 겨울 모두 무탈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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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문 예이기는 하지만 자신이 마치 시대의 아이콘인 양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대개 단순한 생각으로만 그치지 않고 자신이 정말 시대의 아이콘이라는 확실한 믿음 하에 행동거지며, 남을 대하는 태도며, 사소한 말투까지도 바꾸어 버린다. 어린 시절을 그와 함께 보냈던 한 친구가 길거리에서 우연히 그와 마주쳤을 때 아마도 그 친구는 돌변한 그의 태도에 말을 잃은 채 멀뚱멀뚱 넋을 놓았을는지도 모른다. 친구인 자신을 그는 아마도 자신의 부하나 똘마니쯤으로 여겼을 테니까 말이다.

 

법무부 장관과 검찰총장의 갈등이 심화되는 양상이다.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진검승부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대검찰청은 법무부의 외청이고 개개의 사건에 대한 수사나 기소에 관여할 수는 없지만 예산이나 인사 등 법무부 장관의 지시를 받아야 하는 게 맞다. 검찰청법에도 법무부 장관이 검찰의 최고 지휘 감독자라고 명시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윤석열 검찰총장은 국정감사 자리에서 "일단 법리적으로 보면 검찰총장은 법무부 장관의 부하가 아니다. 만약 부하라면 검찰총장이라는 직제를 만들 필요도 없다"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마치 법무부 장관의 위에 군림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오만방자하게도 말이다.

 

엊그제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윤석열 검찰총장의 판사 불법사찰 지시 등 여섯 가지 위법 행위를 들어 검찰총장에 대한 직무배제 조치를 취했다. 이에 반발한 검찰총장은 서울행정법원에 직무배제 처분을 취소해달라는 취소소송을 제기했다. 두 사람 다 각자의 위치에서 취할 수 있는 행동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고 자신의 주장이나 의견은 언제든 개진할 수가 있으니까 말이다. 그것이 법적으로 정당하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문제는 법정에서 가려지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언론 대부분은 윤석열 검찰총장이 마치 권력의 피해자인 양, 불법행위의 희생양인 양 민심을 호도하고 그를 감싸기 위해 진력하고 있다. 사실 윤석열 검찰총장은 대한민국 공무원을 권력 순으로 나열할 때 실세 중의 실세라고 말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어느 조직이나 조직의 구성원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규칙이 있게 마련이고 이를 어기면 좋든 싫든 처벌을 감수해야만 하는 게 현실이다. 조직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서는 당연한 일이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사기업보다는 공기업이, 공기업보다는 공무원 조직이 규칙의 적용에 있어서도 훨씬 느슨할 뿐만 아니라 구성원의 업무 강도 역시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더구나 권력의 정점에 있는 검찰 조직은 그동안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해 오지 않았던가. 그것을 막겠다고 나서니 저항이 클 수밖에... 그러나 하나 명심해야 할 것은 공무원 조직의 구성원은 시대의 아이콘이 아니라 시대의 추종자라는 사실이다. 국민들로부터 시대의 변화에 대해 많이 듣고 그 변화에 묵묵히 적응해 가면 된다. 자신이 시대의 아이콘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는 국민 위에 군림하게 된다. 만약 자신이 시대의 아이콘이 되려 한다면 사업가가 되거나, 작가가 되거나, 종교인이 되어야만 한다. 그도 아니라면 연예인이 되거나. 공무원은 시대의 아이콘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먼 직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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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 고양이를 부탁해 걷는사람 에세이 7
김봄 지음 / 걷는사람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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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우울은 언제나 낮게 드리워진 잿빛 하늘과 희박해진 산소 농도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도시가 빚어내는 성긴 우울의 그물망은 언뜻언뜻 기쁨을 가장한 가공의 웃음들이 섞이게 마련, 철없는 도시내기들은 그런 인위적인 웃음에도 마냥 들떠하곤 하는 것이다. 초겨울 햇살이 비쩍 마른 들고양이의 가벼운 발걸음처럼 사무실 한 귀퉁이를 살금살금 잠식하더니 급기야 책상 위로 올라와 제집인 양 훑고 지나갔다. 김봄 작가의 에세이 <좌파 고양이를 부탁해>는 어쩌면 이런 나른한 오후에 딱이다 싶은 그런 책인지도 모른다. 읽다 보면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가고 슬그머니 코 평수가 넓어지면서 행복이 멀지 않은 곳에 있음을 애써 자위하게 된다.

 

"손 여사는 다혈질이고 매 순간 자기감정에 충실한 사람이다. 고집이 세지만 또, 남의 말을 잘 믿는다. 남의 말만 믿고 고집을 부릴 때는 대책이 없긴 하다. 손 여사는 자식이 많은 탓에 많은 것을 포기하고 살았을 테지만, 그래도 자기가 하고 싶은 걸 꼭 해야 직성이 풀리는 타입이다." (p.45~p.46)

 

작가가 펼쳐 놓은 이야기보따리는 무척이나 다양하다. 이야기의 출발은 대개 40대 중반의 미혼 여성이자 진보 성향인, 그것도 보수적인 집안의 오 남매 중 셋째인 작가가 엄마인 '손 여사'와의 이념 분쟁에서 비롯되지만 사사건건 부딪히고, 다투면서도 끝내 화해하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오히려 서로를 걱정하는 모습을 그려냄으로써 '모녀 싸움은 칼로 물 베기'의 진수를 보여준다. 손 여사는 작가의 수학 담당이자 남동생의 담임이었던 선생님에게 당연하다는 듯 촌지를 주기도 하고, 출신 지역에 따라 정치적 편향이 정해진다고 확고하게 믿기도 하며, ‘땅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걸 신념으로 삼는 중산층으로서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이나 성 소수자를 향한 삐딱한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그들 역시 대한민국의 국민이자 우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 중 한 명이 아니었을까.

 

"지금도 여전히 손 여사는 내 입으로 들어가는 것을 걱정하고, 내가 어떻게 자리를 잡을 것인지를 걱정한다. 짜증을 내기도 하지만 꽤 오랫동안 나의 고양이들도 봐줬다. 어디 나가서 허풍선이가 될까 봐 언제나 확실한 것만 말하라고 뼈 아픈 조언도 해준다. 그러면서도 내가 잘한 것은 잘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p.171)

 

우리는 대개 '다름'을 향해 다짜고짜 자신의 무딘 칼을 휘두르곤 한다. 습관처럼 말이다. 자기 주변에 다른 색깔의 풀이 자라는 걸 도무지 두고 보지 못하는 것이다. 뿌리부터 싹둑 잘라버렸으면 좋겠지만 어디 그게 맘대로 돼야 말이지. 이쪽 편의 풀을 자르다 보면 저쪽 편의 풀이 무성해지고 나는 어느새 다른 색깔의 풀에 둘러 싸인 고립무원의 처지에 놓이기도 한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는 것, 이념과 가치가 다르다는 건 어쩌면 숲을 풍요롭게 하는 숲 속의 다양한 생명체처럼 우리들 생각의 숲을 풍요롭게 하기 위한 필수적 전제였는지도 모른다. 무딘 칼로 제거하려 애쓸 게 아니라 시간이 날 때마다 살뜰히 보살펴야 하는 다정한 이웃인 셈이다.

 

"언젠가 손 여사는 그런 내가 무섭기도 했다고 말했었다. 얌체, 똑똑이, 잘난척쟁이, 손 여사가 나를 호칭하는 말들이다. 내가 언젠가는 눈꼬리 값을 꼭 할 거라고. 그 말은 '너를 믿는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었다." (p.56)

 

작가는 자신의 엄마인 손 여사를 소개함에 있어 지독히 편향적이고 고지식한 보수주의자임을 숨기려 하지 않는다. 책에서는 오히려 그 부분으로 인해 손 여사의 모든 행위가 용서(?)되는 일말의 애교쯤으로 읽히기도 한다. 작가는 자신이 간직한 오래전 기억 속의 이야기와 사소한 일상의 대화들을 기록함으로써 대한민국의 특별하지 않은 한 가정의 '정치 풍속도'를 생생하게 그려낸다. 작가의 글솜씨도 어쩌면 이와 같은 다양성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내 속의 우는 아이를 찾기 시작했고, 다독이기 시작했다. 눈물이 잦아들 때 즈음, 다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글이라는 건, 나를 완전히 치유할 수 있는 도구는 아니었지만, 생각을 정리하는 멋진 도구였다. 나는 점점 내 문제를 정리할 수 있었고, 그 문제 안에 있던 보수적인 손 여사와 나의 관계도 직시하게 되었다. 쉽게 풀릴 수 없는 문제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p.85)

 

“나는 보수 부모의 돈으로 자랐다. 그 돈으로 학원에 다녔고, 책을 사 읽었다.”는 작가의 고백이 없었다고 할지라도 대한민국의 모든 아들 딸들은 자신과 다른 이념의 부모를 결코 미워하지 못한다. 작가가 그 덕에 “진보의 가치를 접했고, 진보적으로 사고하게 되었”으며 “다르지만 다른 모습 그대로 함께할 수 있다는 것도 잘 알게 되었다.”고 말했던 것처럼 우리들 자신의 현재는 부모님의 희생에 의한 결과물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좌파 고양이든 우파 고양이든 대한민국의 부모님은 누구나 자식을 돌보듯 그 여린 생명체를 살뜰히 돌볼 수밖에 없다는 게 우리들 부모의 성정이었음을 우리는 역시 잘 기억하고 있다. 초겨울 햇살이 아스라이 멀어져 가고 있다. 이제는 담을 수 없는 어린 마음 하나가 햇살을 따라 스러져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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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그런 건 아니지만 토론이나 대화가 길어지다 보면 바야흐로 이야기는 본점에서 벗어나 전혀 가본 적도 없는 샛길로 흐르게 마련이다. 그럴 때 나는 이야기에도 생명이 깃들어 있구나, 생각하게 된다. 생명이 있다는 건 곧 생각이 있다는 것, 스스로의 길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도 그렇다. 생각이 있고 저마다의 길이 있지 않은가. 누구도 다른 사람과 완전히 똑같은 길을 걸을 수는 없기 때문에 그의 길은 언제나 독자적이다. 생각 역시 언제나 개별적이고 독자적이다.

 

그러므로 소설은 생명이 사라진, 말하자면 죽은 이야기에 불과하다. 시간에 따라 끝없이 변화하는 이야기와는 달리 책으로 출간된 소설은 더 이상의 변화를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죽은 이야기, 생명이 사라진 이야기, 그것은 어쩌면 역사의 기록처럼 미래의 많은 독자들에 의해  수많은 해석과 토론을 이끌면서 새로운 이야기의 소재로 쓰일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것은 들을 수도, 볼 수도 없다. 우리는 다만 과거를 보고 듣고 느낄 뿐이다. 생명은 그렇다. 한시도 변화를 멈춘 적이 없고 시간에 따라 다만 흘러갈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군가의 생각, 누군가의 이야기를 읽을 수가 없다. 사람의 생각이나 이야기는 멈춤이 없기 때문이다.

 

더불어 '슬픔'은 말로 발화하지 않는 것이 좋다. 슬픔, 기쁨, 두려움 등 실체도 없는 온갖 감정들은 말로써 발화되는 순간 비로소 내 안에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변모하여 굳어지기 때문이다. 한 번 굳어진 것은 스스로 풀어져 흩어지기 어렵다. 서서히 번져오는 슬픔의 그림자를 묵묵히 지켜보거나 내가 보았던 것을 누군가에게 자세히 설명함으로써 '슬픔'은 그렇게 흩어질 수 있으나 내게 다가오는 슬픔을 향해 '슬프다' 하고 말하는 순간 나는 그 '슬픔'을 버선발로 맞는 격이고 '슬픔'은 그대로 내 가슴에 남는다. '꺽꺽' 울음을 토할지언정 '슬프다' 소리 내어 말하지 않는 것, 그것이 어쩌면 슬픔을 이기는 또 하나의 방법일지도 모른다. 때로는 이야기가 슬픔을 낳기도 하고, 이슬을 거둬가는 햇살처럼 당신의 이야기가 나의 슬픔을 앗아가기도 한다. 말끔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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