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공수처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로써 공수처법이 국회를 통과하고도 정작 공수처 구성에 있어서는 국민의힘의 결사적인 반대에 부딪혀 지지부진하기만 했던 공수처의 출범이 비로소 가시권에 들어온 셈이다. 물론 아직도 공수처장의 선출과 국회 청문회 등 남은 일정은 첩첩산중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공수처의 설립이 기정사실로 굳어졌다는 것만으로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검찰을 견제할 수 있겠다는 안도감이 드는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검찰의 제 식구 감싸기의 행태를, 김봉현 전 스타모빌리티 회장이 폭로한 '검사 술 접대 의혹'에 연루된 현직 검사 3명 중 1명만 재판에 넘겨지고 나머지 2명은 각각 100만 원에서 4만 원이 모자라는 96만 원의 향응을 받았다는 이유로 불기소 처분을 받는 코미디와 같은 행태를 더는 보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이와 같은 배경에는 물론 180석에 가까운 거대 여당을 만들어준 국민들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당의 의석수가 야당과 엇비슷하거나 몇 석 많은 수준에서 머물렀다면 몇십 년째 대다수 국민의 염원이었던 공수처는 앞으로도 영원히 꿈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선거 때마다 여, 야를 가리지 않고 공수처의 필요성을 언급하면서도 정작 실천 단계에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외면하기에 급급했던 야당 국회의원들의 뻔뻔한 행태를, 필요에 따라 기소, 불기소를 제멋대로 결정하던 검찰의 막가파식 행태를 우리는 이제 더는 보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그와 같은 복장 터지는 모습을 보면서도 '법이 그러니까' 하면서 참을 수밖에 없었던, 그래서 국민 대다수가 '화병' 전조 증상을 안고 살았던 지난 세월을 웃으며 회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검찰을 앞세워 독재정권에 기생하면서 온갖 특권을 향유하던 수구 보수 세력의 종말은 아닐지라도, 더는 그들에게 불법적인 특권의식과 법을 이용한 교묘한 부정축재의 기회는 제공하지 않을 것으로 본다.

 

공수처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와 더불어 검찰개혁에 반대하고, 비위로 점철된 검찰 조직의 우두머리 윤석열에 대한 징계위원회가 열리고 있다. 자신들에게 우호적인 언론을 이용하여 국민 여론을 호도하고 검찰개혁이 마치 국가 대세를 그르치는 반헌법적 행위인 양 연일 떠벌렸던 검찰과 보수 언론의 행태도 오늘을 기점으로 더는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것은 물론 나의 바람에 그치겠지만 말이다. 독재권력에 기생하던 모든 세력들, 언론들, 기업인들, 그리고 소수의 종교인들은 악을 쓰고 덤벼들 것은 명약관화한 일, 그러나 역사는 그 모든 저항을 뒤로한 채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오늘은 올해 수능을 치룬 수험생이 있는 이웃에게 떡이라도 돌려야겠다. 겸사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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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자에게
김금희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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굳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우리는 어쩌면 이미 다 완성된 각자의 인생을 시간의 받침대 위의 양쪽 자리에 앉아 자신의 다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하곤 한다. 이를테면 탄생 쪽에 가까운 나는 동경의 시선으로 죽음으로 향하는 나를 바라보며, 죽음 쪽에 가까운 나는 그리움을 가득 담아 탄생 쪽의 나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그렇게 우리는 한 편의 영화를 보듯 자신의 인생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으로 자신의 삶을 완성하는 게 아닌가 하는...

 

김금희 작가의 소설 <복자에게>를 읽었던 게 벌써 열흘쯤 지났다. 누가 지시하거나 다그치는 건 아니지만 한 편의 소설을 읽고 가슴에 남는 몇 문장의 글이라도 있다면 짧게라도 리뷰를 남기겠다는 게 독서인으로서의 나의 다짐이고 보면, 나는 단지 '귀찮다'는 이유로 이마저도 무시한 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소설의 화자인 이영초롱과 그녀의 친구인 복자와의 만남과 이별 그리고 성인이 된 이후의 새로운 만남을 통해 책을 읽는 독자들 가슴에 뭉클한 감동(까지는 아닐지도 모르지만)을 안겨주는 소설이니까 말이다.

 

1999년 초봄, 이영초롱의 가족은 기울어진 가세로 인해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영초롱의 동생인 영웅은 서울에 있는 큰아버지 댁에 보내졌고, 열세 살의 세상 누구보다 야무진 영초롱은 남동생 대신 제주 본섬에서도 한 번 더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고고리 섬'의 고모에게 맡겨진다. 전학 수속을 밟지 않고 며칠을 무료하게 보내던 영초롱이 어느 날 섬에 하나뿐인 가게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기 위해 나왔다가 또래인 '복자'를 만나게 된다. 당찬 성격의 복자는 누구나 섬에 왔으면 할망신에게 인사를 해야 한다며 이영초롱을 다짜고짜 할망당으로 이끌었다. 엉겁결에 할망신을 마주한 영초롱은 자신의 집이 망했음을 고백한다. 복자 역시 부모가 이혼한 후 할머니에게 맡겨진 신세였다. 그렇게 서로의 아픔을 위로하며 두 사람은 단짝이 된다.

 

"영웅은 대답하지 않고 있다가 "웃으면 정말 멍청한 사자 같은 게 될까 봐"라고 했다. 어쩌면 그 말을 들었던 그 순간에 나는 슬픔에 대해 온전히 알게 되지 않았을까. 마음이 차가워지면서, 묵직한 추가 달린 듯 몸이 어딘가로 기우는 느낌이었다. 어느 쪽으로? 여태껏 가늠하지 못한, 그럴 필요가 없던 세상 편으로." (p.15)

 

그러나 영초롱과 복자와의 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섬의 유일한 매점을 운영하던 이선 고모(복자는 그녀가 자신의 엄마 친구라는 이유로 이선 이모라고 불렀다)의 집에 임공이 자주 드나든다는 사실을 말하지 말아 달라는 복자의 부탁을 어기고 영초롱은 어른들에게 사실대로 말했고, 그에 대한 보복으로 복자는 영초롱의 고모가 교도소에 있는 이규정에게 보내는 편지를 자주 훔쳐봤다는 사실을 말해버림으로써 둘 사이는 데면데면한 사이로 변하고 만다. 중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섬에서 나왔던 영초롱은 곧 서울로 떠난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좋아하는 과정에는 상대에 대한 은근한 우월뿐 아니라 일종의 선망이 진득하게 감겨야 한다는 것. 그것이 어린 내가 체득한 인간관계의 조건이었다는 점을 곱씹다 보면 어쩔 수 없이 유감이 생겨나곤 한다. 내가 주머니에 넣어 만지작거리고 있었던, 상대에게 주려 했던 감정적 보상이 그뿐이었다는 점에 말이다." (p.83)

 

대학을 졸업한 영초롱은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판사가 된다. 그러나 성격이 직설적인 영초롱은 재판 과정에서 욕을 했다는 이유로 제주도로 좌천된다. 제주에 부임한 영초롱은 '고고리 섬' 출신이라는 이유로 여기저기 불려 다니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같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친구 '고오세'를 우연히 만나게 된다. 영초롱을 좋아하여 주소 하나만 달랑 들고 서울까지 왔었던 '고오세'는 끝내 그녀를 만나지 못함으로써 가까워질 기회를 갖지 못했던 불운한(?) 과거를 지니고 있었지만 '영광의료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하다 아이를 유산한 후 남편과 이혼하고 '고고리 섬'에 정착한 복자의 근황을 전해줌으로써 영초롱과 한 발 가까워진다.

 

"어떤 그리움이 생겨나는 순간에 불려 들어오던 풍경은 언제나 복자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리고 어떤 부끄러움이 생겨날 때 불려 들어오던 풍경도 역시 복자와 관련된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 지금 이 방, 싸워야 할 사람들이 있고 이겨내야 하는 슬픔이 있고, 그러기 위해 모으는 자료들로 가득 찬 이 방과 복자의 새우잠을 기억하게 되리라고 생각했다." (p.139)

 

열악한 근무환경을 견디며 근무하다 유산으로 아이를 잃은 복자는 같은 피해를 입은 간호사들과 힘을 합쳐 산업재해 인정을 받아내고자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힘겨운 소송을 이어간다. 피해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를 내놓지 않는 의료원을 비롯하여 복자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은 소송 과정을 아픈 마음으로 바라보는 영초롱. 소설은 그렇게 결말을 향해 나아가는데...

 

작가는 그렇게 우리가 점점 잃어가고 있는 마음의 풍경을 우리들 앞에 우격다짐으로 펼쳐놓는다. 당신들이 그 풍경을 마음속에서 다시 회복하지 않아도 좋으니 단 한 번만이라도 그 흐뭇한 풍경을 그저 바라만 보라고 종용한다. 우리는 시간이 완성한 아스라한 풍경을 그리운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다. 가뭇없는 시간들이 조용히 스러져간다. 우리는 종종 잊을 수 없는 이름 뒤에 그리움의 순번을 매겨두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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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엔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사람들과 만나는 것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지만 몇몇 제한된 사람들과의 만남에서도 속 터지는 경험인 아주 없는 건 아니어서 때로는 '이 사람들이 지금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동시대의 인물이 맞나?' 하는 의심이 들 때가 더러 있다. 그것은 대개 정치인에 대한 개인적 혹은 일부 지지층의 평가를 대신 전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데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독재와 무수히 많은 반헌법적 행위에 대해 비난할라치면 그들의 주장인 즉, "누구나 자신의 인생에서 공과가 있게 마련이고 한 사람을 평가함에 있어서는 그의 공과를 함께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일견 일리가 있는 주장인 듯 보이지만 이 말보다 더 허무맹랑한 말도 다시없을 것이다. 예컨대 나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과를 지적했을 뿐이고, 그가 정권에 있을 때 독재정치를 펼침으로써 자신은 처벌조차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국민들도 그의 죄를 따져 물을 수 없었던 역사적 현실을 안타까워하는 것인데, 말하자면 공을 말하는 자리가 아니었음에도 이런 논리를 들고 나오는 것이다.

 

세상을 살면서 모든 것을 잘못한 이도, 무결점의 삶을 산 사람도 있을 수 없다. 인생은 우리의 생각보다 길기 때문이다. 공과를 함께 논한다면 수많은 사람을 학살한 히틀러나 일본의 A급 전범들, 심지어 곧 출소하는 조두순에게서도 과만 발견할 수 있는 게 아니라 공도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들 역시 그 공에 의해서 영웅 취급을 해야 하는가 말이다. 죄는 죄대로, 공은 공대로 그때그때마다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아야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권력자라는 이유로, 경제적으로 부유하다는 이유로 죄에 대해 처벌을 받지 않았다면 후손들은 그에 합당한 욕을 하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일 아니가. 당대에 그는 자신의 공에 대한 대가를 누릴 만큼 누렸으니까 말이다.

 

‘하나의 악으로 그 선을 잊지 말고, 작은 흠으로 그 공을 덮지 마라(不以一惡忘其善. 勿以小瑕掩其功)’고 했던 당 태종 이세민의 조언은 일반인에 대한 평가나 지금 현재 살아 있는 자에 대한 평가에는 유효할지 모르나 권력자로 살았던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평가에서는 적절치 않다. 이미 그는 살아생전에 공에 대한 대가를 누릴 만큼 충분히 누렸기 때문이다. 사후에는 이제 그에 대한 과가 들추어질 뿐이다. 그것이 공정한 역사가 아닌가.

 

다행스럽게도 전두환 씨나 이명박 씨에 대한 공과 과는 당사자가 살아 있을 때 진행되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평가도 지금 현재 진행 중에 있지만 그들 모두가 죽고 난 뒤에는 후세인들이 그들의 공과를 함께 평하게 될 것이다. 처벌받지 않은 자의 과를 사후에 논할 때 '한 사람을 평가함에 있어서는 그의 공과를 함께 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참으로 한심하기 그지없는 논리가 아닐 수 없다. 21세기를 사는 현대인이, 그것도 대학까지 나온 사람이 그런 무식한 말을 입에 담는다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인생은 길고, 살다 보면 누구나 선과 악을 오갈 수밖에 없는 게 인생이다. 그러니 그런 어처구니없는 논리로 사람들을 현혹시키지 말자. 날씨가 차다. 오늘은 대입 수능일이자 세계 장애인의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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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2020-12-03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꼼쥐님은 좋아요를 안 누를 수가 없네요

꼼쥐 2020-12-09 18:28   좋아요 0 | URL
테레사 님이 저의 글을 너무 좋게 봐주신 게 아닐까요?
기분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
 
역사의 쓸모 - 자유롭고 떳떳한 삶을 위한 22가지 통찰
최태성 지음 / 다산초당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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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국내 최고령 여의사의 타계 소식을 신문에서 읽었다. 한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남양주의 한 병원에서 국내 최고령 현역 의사로 활동하던 고인은 94세의 결코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직접 회진도 돌며 환자를 하루 20여 명씩 진료하였다고 한다. 노환이 악화되어 다른 병원에 입원했던 고인은 결국 자신이 헌신한 병원으로 돌아와 생의 마지막 일주일을 지내다가 영면에 들었다고 하는데 그가 남긴 인사말이 나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의 가슴에 깊은 울림으로 남았던 듯하다. 고인이 남긴 세 마디의 짧은 인사말은 "힘 내. 가을이다. 사랑해."였다. 이 세 마디에 담긴 함의는 사람들마다 그 해석이 제각각이겠지만, 내 생각에는 '세상을 살아가는 건 힘든 일이지만 그래도 굴하지 않고 힘을 내서 살아갈 일이며, 그러다 보면 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오는 것처럼 선물처럼 기쁜 날들이 주어지는 법이니, 힘들더라도 주변 사람들을 사랑하고 사랑 받는 삶을 살길 바란다'는 뜻이 아닐까 싶었다. 살아 있는 사람은 각자가 처한 위치에서 저마다의 다른 생각을 하겠지만 말이다. 그렇게 각자의 해석은 서로 다를지라도 고인의 뜻을 이어받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역사는 면면히 이어지겠지, 하는 생각과 함께. 그런 의미에서 '역사는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한 편의 아름다운 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네 삶은 그 시를 이루는 하나의 시어(詩語), 또는 시구(詩句)쯤 될 테고 말이다.  책꽂이에서 몇 달째 먼지만 쌓이던 <역사의 쓸모>가 내 눈에 띄었던 것도 그와 같은 맥락이었다. 역사 강사 최태성의 역작이기도 한 이 책을 나는 왜 진작 읽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걸까.

 

"인생은 단 한 번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더욱 해답에 목말라 있는지 모릅니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기 위해 책을 읽고 조언을 듣고 때로는 직접 부딪쳐가면서 답을 구합니다. 저는 김육이 '한 번의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자신의 일생으로 답했다고 생각합니다. 삶을 던진다는 것의 의미를 보여주는 분이죠." (p.190~p.191)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역사 강사 중 1인인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를 배우는 우리의 목적에 대해 설파합니다. 역사는 그저 대학입시나 취업에 필요한 하나의 관문으로서 무작정 암기하고 시험이 끝나면 열심히 암기했던 사실들을 까맣게 잊고 마는 불용의 학문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녹아들어 매순간의 선택을 돕고 의미 있는 삶으로 인도하는 실용의 학문이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역사는 우리와 상관없는 연도나 인물의 나열이 아니라 과거 인물의 삶을 통해 불안한 자신의 삶을 계획하도록 하는 참고서라는 설명이다.

 

"인생을 사는 동안 우리는 늘 선택의 기로에 놓입니다.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알 수 없기에 그때마다 막막하고 불안하지요. 하지만 우리보다 앞서 살아간 역사 속 인물들은 이미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그 수많은 사람의 선택을 들여다보면 어떤 길이 나의 삶을 더욱 의미 있게 할 것인지 예측할 수 있습니다." (p.11 '들어가는 글' 중에서)

 

1장 '쓸데없어 보이는 것의 쓸모', 2장 '역사가 내게 가르쳐준 것들', 3장 '한 번의 인생, 어떻게 살 것인가', 4장 '인생의 답을 찾으려는 사람들에게'의 300페이지에 가까운 결코 얇지 않은 책이었지만 저자는 여전히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는 듯했다. 자신의 삶이 그러했듯 이 책을 읽을지도 모르는 수많은 독자들 역시 역사를 통해 자신의 삶을 성찰하고 미래를 향해 꿋꿋이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까닭이다. 역사는 그렇게 수많은 이의 삶을 강물처럼 이끌면서 도도히 흘러게 마련이라는 걸 책을 읽는 모든 독자들이 공감하고, 우리들 각자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중요한 인물임을 자각할 때 비로소 자신의 삶을 책임감 있게 가꾸어 나아갈 수 있다고 저자는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고 보면 제 인생은 과거 역사를 통해 만나는 사람들과, 현재 그러나 곧 역사가 될 시간에서 만나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 같습니다. 역사는 사람을 만나는 인문학이라고 말했는데 제 인생 역시 사람을 만나는 과정인가 봅니다. 저를 여기까지 성장시켜주신 모든 '사람'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새롭게 관계를 맺을 여러분과 함께 또 한 번 건강한 성장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p.294~p.295 '나오는 글' 중에서)

 

역사에는 개인의 사사로운 욕심이나 편견이 있을 수 없다. 추하고 더럽다고 하여  누군가의 삶을 제쳐 두거나 축소하지 않으며, 아름답고 숭고한 삶이라 하여 덧붙이거나 과장하지 않는다. 역사는 세상을 살다 간 모든 이의 삶을 아우르면서 면면히 이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최고령 여의사의 아름다웠던 삶과 죽음에서 비롯된 나의 독서는 '그래, 가을도 지났으니 힘을 내야지.' 하는 다짐으로 끝을 맺는다. 과거의 기록으로만 남은 어느 여의사의 죽음을 추모하며 '역사는 한 편의 아름다운 시'임을 마음에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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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버리다 -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가오 옌 그림, 김난주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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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가족을 설명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어렵고 마뜩잖은 일일지도 모른다. 가족이란 마치 신기루 같아서 잡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 멀리 달아나 버리는, 실체는 있지만 끝내 그 실체를 붙잡을 수 없는(붙잡을 수 없다기보다 너무 크고 방대하여 제대로 된 설명을 할 수 없는) 그런 존재가 아닐까 싶다. 가족을 설명한다는 건 자신의 삶을 설명하는 것과 진배없기 때문이다. 누군가 나를 향해 '너 자신을 개관적으로 설명해 봐.'라고 했을 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막연한 것처럼.

 

"나는 한 평범한 인간의, 한 평범한 아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차분하게 그 사실을 파헤쳐가면 갈수록 실은 그것이 우연한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점차 명확해진다. 우리는 결국, 어쩌다 우연으로 생겨난 하나의 사실을 유일무이한 사실로 간주하며 살아있을 뿐이 아닐까." (p.93)

 

대작가인 무라카미 하루키에게도 자신의 아버지를 설명하는 일은 무척이나 껄끄럽고 부담되는 일이었던 듯하다. 최근에 출간된 그의 책 <고양이를 버리다>는 순전히 자신의 아버지를 정리하는 차원에서 쓰인 일종의 일기나 메모에 가까운 책이지만 문장 한 구절 한 구절을 찬찬히 되짚어보면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작가의 애틋한 심정과 아버지와 함께 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에 대한 그리움이 곳곳에 녹아들어 있음을 짐작케 한다.

 

"오래전부터,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해 언젠가는 문장으로 정리해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좀처럼 시작하지 못한 채 세월이 흘러갔다. 가족에 대해 쓴다는 것은 (적어도 내게는) 상당히 부담되는 일이고, 어디서부터 어떤 식으로 쓰면 좋을지 그 포인트가 잘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목에 걸린 가시처럼 그 짐이 내 마음에 오래도록 자리하고 있었다." (p.96 '작가 후기' 중에서)

 

누군가에 대해 소개하려 들 때 겉으로 드러나는 객관적인 사실들을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보다 그와 얽힌 몇몇 에피소드를 들려주는 것이 훨씬 더 많은 것을 전달하고 그 사람에 대한 구체적인 진실에 더 가까워질 수 있다는 걸 우리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작가 역시 아버지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주로 다루지 않고, 어느 여름날 작가와 그의 아버지가 집에서 키우던 암고양이를 버리러 해변에 갔었던 기억을 책의 첫머리에 먼저 쓰고 있다. 물론 객관적 사실을 무시한 채 에피소드 위주로 쓰고 있지는 않지만 말이다. 1917년 교토 어느 절집의 6형제 중 둘째로 태어나, 세이잔 전문학교를 다니던 중 징집되어 중국 대륙의 전선에 치중병으로 보내졌던 사실, 포로로 잡힌 중국 병사를 군도로 척살했던 그 당시의 기억을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에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것 등을 건조한 문체로 쓰고 있다. 작가의 아버지 교토 국제대학을 졸업한 후 중고등학교 국어 교사 생활을 하다 2008년 고인이 되었다. 아버지의 기대와는 다르게 공부에 별 의욕이 없었던 작가는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섰고, 그 이후 절연에 가까운 부자 관계로 지냈다고 한다.

 

":역사는 과거의 것이 아니다. 역사는 의식의 안쪽에서 또는 무의식의 안쪽에서, 온기를 지니고 살아있는 피가 되어 흐르다 다음 세대로 옮겨가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여기에 쓰인 것은 개인적인 이야기인 동시에 우리가 사는 세계 전체를 구성하는 이야기의 일부이기도 하다. 아주 미소한 일부지만 그래도 한 조각이라는 사실은 틀림없다." (p.97~p.98 '작가 후기' 중에서)

 

누군가를 부자 관계로 만난다는 건 자유로운 선택이 아닌 강제적인 할당에 가까운 일이지만, 그와의 관계를 통해 세계관이나 가치관을 형성하고, 나아가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하나의 역사를 일궈나가는 과정은 돌이켜보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작가 역시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자신에게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역사적 소명 의식을 느꼈음에 틀림없다. 그런 까닭에 이것을 글로 쓰는 일이 끝내 미루고 싶은 부담스러운 일이라 할지라도 결국 참고 해낼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마음 한 구석의 응어리를 풀어내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글로 써서 남기는 것보다 더 좋은 게 어디 있으랴. 하루키답지 않은 지극히 건조한 문체가 왠지 낯설게 느껴졌던, 그래서 더욱 쓸쓸했던 11월의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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