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아파트 근처에는 비교적 규모가 큰 교회(편의상 A교회라고 하자)가 하나 있다. 물론 아파트 인근에 A교회 말고도 올망졸망한 교회들이 커피숍의 숫자보다 더 많기는 하지만, 교회 부지나 건물의 규모면에서 A교회는 여타의 다른 교회를 압도하는지라 내가 아는 몇몇 분들도 모두 그 교회에 다니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바람에 나도 수차례 교회에 나올 것을 권유받았지만 말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는 걸 거절의 이유로 내세우곤 했다. 물론 바쁘다는 이유로 주말 미사엔 번번이 빠져 고해성사를 하지 않는 한 신자라고 할 수도 없는 '날라리 신자'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나는 그런 핑계를 얼렁뚱땅 둘러대는 바람에 교회에 나오라는 권유를 더 이상 듣지 않게 되었지만 매주 수요일과 일요일(어떤 때는 매일 새벽) 열심히도 교회에 출근 도장을 찍는 그들의 모습을 볼라치면 참으로 신기하다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신앙생활을 제외하면 어느 모로 보나 그닥 성실한 사람들이 아닌데 교회 일이라면 어떻게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만사 제쳐두고 앞장설 수 있는지 내 얕은 신앙심으로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엊그제는 강풍이 불고 눈이 내린다는 기상청 예보도 있어서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차를 두고 출근했었다. 퇴근길에도 바람은 그치지 않았고 이따금 눈보라가 몰아치는 바람에 날씨는 그야말로 을씨년스러웠다. 뜨끈한 아랫목이 간절했던지라 걸음은 자연스레 빨라졌고 주변의 풍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집 근처의 A교회 정문에 이르렀을 때 내가 아는 지인(A교회 신도)과 어떤 초로의 남성이 심하게 말다툼을 하고 있는 게 눈에 띄었다. 평소 다른 사람과 다투는 모습은 전혀 본 적이 없었던지라 걸음을 멈추고 지켜볼 수밖에 없었는데 지인과 다투던 남자의 주장인 즉 지금과 같은 비상시국에 이 많은 사람들이 꼭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게 맞느냐는 것이었다. 자신도 교회 근처에서 장사를 하고 있다면서 자신이 이렇게 따지고 들면 A교회에 다니는 고객 중 몇몇이 떨어져 나갈지도 모르지만 그런 손해를 차치하고서라도 도무지 불안해서 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게 그가 주장하려는 요지였다. 지인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교회는 정부의 방역 지침을 따르고 있고, 발열체크라든가 인원 제한 등 불법을 저지르지 않는 선에서 예배를 보고 있는데 왜 종교의 자유마저 침해하느냐는 주장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분노가 극에 달해서인지 눈보라의 기세가 점점 드세지는 것도 미처 알아채지 못하는 듯했다. 나는 지인과 눈인사도 나누지 못한 채 발걸음을 돌리고 말았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 교회는 이제 공공의 적이 되어가고 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가 충만한 곳이 아니라 바이러스가 득실거리는 바이러스의 천국으로 변해가는 느낌이다. 이런 인식을 국민 전체에 심어준 것도 따지고 보면 미련한 목회자와 우둔한 신자들의 합작품이 아니었을까. 언젠가 코로나 팬데믹이 종식된다 할지라도 한 번 각인된 인식은 쉽게 변하지 않을 터, 교회 신자가 아닌 일반 시민들을 향해 진심으로 뉘우치고 머리를 숙이는 게 참된 신앙인의 자세일 듯하다. 그러나 그들은 거꾸로 가는 경향이 있다. 교회 신도와 일반인의 편을 가르고 불안에 떠는 일반 시민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해대는 것이다. 똥 묻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고 했던가. 옛말 그른 게 없는 듯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모독
박완서 지음, 민병일 사진 / 열림원 / 201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꼭 10년 전인 2011년 1월 22일 세상을 뜬 작가 박완서에 대한 기억은 사람마다 각자 다르지 않을까 싶다.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 이름만 겨우 한두 번쯤 들어본 작가일 수도 있고, 감수성 예민하던 시절에 열광하던 작가일 수도 있고,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정이 가는 작가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질곡의 시대를 살았던 작가가 자신과 주변의 삶을 고스란히 글로 옮겨놓았던 노고를 생각할 때, 후손 된 입장에서 저절로 눈시울이 붉어지는 건 어찌할 수가 없다.

 

"티베트의 하늘은 그때의 우리 하늘빛보다 더 가깝고 더 깊게 푸르다. 인간의 입김이 서리기 전, 태초의 하늘빛이 저랬을까? 그러나 태초에도 티베트 땅이 이고 있는 하늘빛은 다른 곳의 하늘과 전혀 달랐을 것 같다. 햇빛을 보면 그걸 더욱 확연하게 느낄 수가 있다. 바늘쌈을 풀어놓은 것처럼 대뜸 눈을 쏘는 날카로움엔 적의마저 느껴진다. 아마도 그건 산소가 희박한 공기층을 통과한 햇빛 특유의 마모되지 않은, 야성 그대로의 공격성일 것이다."  (p.20)

 

박완서 작가의 여행기 <모독(冒瀆)>을 읽었던 건 소설이 아닌 작가의 산문집을 읽어보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지만 10주기를 추모하는 나 나름의 경건한 의식 같은 것이기도 했다. 1997년 도서출판 학고재에서 처음 출간되었던 이 책은 '2005년 한국의 아름다운 책 100'에 선정(예술 부문)되기도 했는데 지금은 절판되어 책 애호가들 중에는 희귀본으로 남아 있다. 그러다 2014년에 열림원에서 재출간한 책이 독자들에게 읽히고 있다. 나는 1997년 판본의 낡은 책을 읽고 있으나 그 시절의 작가도, 외환위기를 겪었던 그 시절의 기억도 그저 머릿속의 희미한 흔적으로만 남았을 뿐 손에 잡히지 않는 그리움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만큼이나 무상하다.

 

"우리가 초모랑마(에베레스트)에 대해 외경심을 갖는 것은 세계의 최고봉이기 때문이지만 인도나 티베트, 네팔 등 힌두 불교 문화권에서는 카일라스 산을 창조의 근원이라고 생각하고 일생에 한 번이라도 순례하기를 열렬하게 소망한다. 순례의 길이 고통스러울수록 죄가 정화된다고 믿어 고통보다는 법열을 느낀다고 한다. 그들처럼 최소한의 소유로 단순 소박하게 사는 민족도 없다 싶은데 이런 엄청난 죄의 대가를 지불하려들다니, 그들이 느끼고 있는 죄의식이 어떤 것인지 우리 같은 죄 많고 욕심 많은 인간에겐 상상이 미치지 않는 영역일 듯싶다."  (p.199)

 

'민병일 시인이 카메라를 들고 따라나서 주었고, 소설 쓰는 이경자, 김영현도 동행이 돼주었다.'고 밝힌 이 책에서 작가는 60대의 결코 적지 않은 나이에 히말라야 오지를 여행하는 것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하면서도 동행했던 이들의 살뜰한 보살핌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았다. 박완서 작가의 글은 소설에서도 그렇지만 군더더기 없이 맑고 단아하다. 읽는 이로 하여금 리듬감을 느끼게도 하고, 작가의 투명한 속내가 글에 내비치는 것 같기도 하다. 현대 여행작가들에게서 보이는 지나친 감상이나 과장, 여행자만의 애상 등 여행기라기보다 '여행 감상문' 혹은 '여행 애상기'에 가까운 그런 문장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작가가 보았던 티베트와 네팔의 빛과 어둠이 있는 그대로 펼쳐진다.

 

"오늘 살 줄만 알았지 내일 죽을 줄 모른다는 말이 있다. 힌두 문화권에서는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그들의 사는 모습을 구질구질한 면까지 천연덕스럽게 보여주듯이 죽어 빈 껍데기가 된 시신이 아주 한 자락의 바람으로 무화되는 과정도 천연덕스럽게 보여준다. 윤회를 믿기 때문일까."  (p.301)

 

소박한 사람들이 욕심 없이 사는 성스러운 땅에 화석 연료의 마지막 쓰레기인 비닐 조각, 스티로폴 파편, 찌그러진 페트병 따위의 생전 썩지 않는 것들을 두고 온 것이 완전 순환의 땅인 그곳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하는 노작가의 진솔한 자아성찰기가 작가가 세상을 떠난 10년 후의 어느 독자에게 부끄러움을 안겨주었던 책. 며칠 따뜻했던 날씨가 다시 또 추워지고 있다. 삶도 자연도 끝없는 순환만 이어질 뿐 영원한 것은 그 어디에도 없다. 작가가 세상을 떠난 지 꼭 10년 만에 나는 먼지 쌓인 서가에서 이 책을 다시 꺼내 읽었다. 삶도 이처럼 허허로운 것인지도 모른다. 이따금 책을 읽고 또 이따금 생각을 하는 것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추종하는 정치인의 무리를 비하하는 말로 '무슨 빠'라고 지칭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예컨대 박정희를 추종하는 세력들을 일컬어 '박빠'라고 한다거나, 나경원을 지지하는 무리들을 '나빠'(이건 좀 이상한데?)라고 하거나, 오세훈을 지지하는 세력은 '오빠'(이것도 좀 이상하네), 안철수를 지지하는 세력은 '안빠'라고 하는 식이다.

 

이렇게 어원이나 출처도 불분명한 말을 사용함으로써 얻는 효과는 그들을 싸잡아 비하하는 데서 오는 단순한 기분풀이, 혹은 그들의 수준을 정상 이하로 깔아뭉개는 데서 오는 한풀이라고 보인다. 말하자면 도무지 주체할 수 없는 화가 동할 때 자신의 생각이나 이념과는 정반대의 진영에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비하함으로써 약간의 속 시원함(일종의 감정적 배설 효과)을 얻을 뿐만 아니라 일시적으로 화를 누그러뜨리는 효과를 얻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이게 어느 정도 중독성이 있어서 자신의 자녀가 취직을 못했을 때도, 은퇴 후 아내로부터 삼식이라며 놀림을 당했을 때도, 잘 나가는 친구들로부터 괜한 천대를 받았을 때도 자신도 모르게 '무슨무슨 빠'를 연거푸 외치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자신의 분노조절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기를 쓰고 있는 것이다.

 

내 주변에도 분노조절장애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더러 있어서 그런 천박한 용어를 쓰면서 자신의 화를 조절하는 경우를 가끔 보게 되는데 때로는 그들이 안쓰러워 한마디 할 때가 있다. "이보게, 소위 배웠다는 사람이 교양도 없이 그런 천한 말을 쓰면 되겠는가. 위신을 생각해야지." 할라치면, "남들은 그보다 더한 말도 잘도 쓰더구먼. 왜 나만 갖고 그러나." 하면서 바락바락 대드는 통에 이제는 그들의 병이 중증에 이르렀음을 인지하고 숫제 외면하고 마는 것이다. 딱하기는 하지만 정신과 전문의도 아닌 나로서는 능력 밖의 일인 것이다.

 

기생충을 연구한다는 모 씨도 과거에는 꽤나 고상한 말을 사용하더니 최근에는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말을 사용하는 걸 보면 그 역시 중증의 분노조절장애를 앓고 있는 듯하다. 사람은 그가 사용하는 말에 따라 그 사람의 성품이 드러나고 인격이 다듬어지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말은 신중하게 가려서 해야 한다. 2021년에는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이 분노조절장애에서 벗어나기를 소망해 본다. 그러자면 아름다운 말의 사용이 먼저라는 걸 그들에게 알리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 지나온 집들에 관한 기록
하재영 지음 / 라이프앤페이지 / 2020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살면서 끊임없이 남과 구별되려 애쓰거나 그렇게 대우받기를 원한다. 그러한 노력은 평생 동안 이어진다. 조금 더 부풀리자면 인간은 남과 구별되기 위한 목적으로 전 인생을 소모하는지도 모른다. 타인과 구별되기 위한 그와 같은 끊임없는 노력 중 가장 호사스럽거나 가장 사치스러운 것은 아마도 '집'이 아닐까 싶다. 어디에 살며, 주거 면적이 몇 평이냐에서부터 자가인지 전세인지, 혹은 월세인지를 따지는 문제의 이면에는 '나는 너와 다르다.'는 뿌리 깊은 차별성이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에서 번듯한 자기 집 한 채를 갖는다는 건 목숨과 견주어도 하나 아깝지 않은 가치를 지니는 듯 여겨진다. 말하자면 집은 자신의 정채성이 담긴 또 다른 물성을 지녔음이다.

 

"내가 자기만의 방을 소망할 때 나는 무엇을 소망하는가? 그것은 단순히 물리적 공간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나 자신으로 인정받고 싶은 욕망, 나의 고유함으로 자신과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욕망일 것이다."  (p.135)

 

 

하재영 작가가 쓴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작가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살아온 여러 집들에 대한 회상인 동시에 그 집에 담긴 삶의 이력이다. 하재영 작가에 대해 딱히 아는 게 없었던 내가 고민하지 않고 책을 구매하여 읽게 된 배경에는 입소문이 한몫했다는 말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그만큼 나는 책의 내용에 대해 근거 없는 확신이 있었고, 그것은 어느 정도 기대에 부합하는 측면이 있었다. 운이 좋게도 말이다. 작가는 자신이 경험한 시절의 집과 함께 한국 현대사를 덧입힌다. 유년시절을 보냈던 대구의 적산가옥촌, '대구의 강남'으로 불렸던 수성구의 고급 빌라와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점점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가야만 했던 기억들. 20대 서울 상경 후 살았던 강북의 아홉 개 방과 신림동의 원룸, 재개발에 비껴간 금호다가구주택, 30대 진정한 독립을 이룬 행신동 투룸, 정발산의 신혼집, 북한산 자락 아래 구기에서 오래된 빌라를 수리하고 안착하는 내용을 담담하게 풀어놓는다. 그리고 작가와 함께 했던 반려견 피피의 죽음에 대해 생각한다.

 

 

"눈을 뜰 때마다 상실을 깨닫는 것으로 하루가 시작되었다. 창밖을 보다가, 밥을 먹다가, 설거지를 하다가, 심지어 잠에서 깨자마자 난데없이 눈물이 흘렀다. 내가 잃은 것이 무엇일까 생각했다. 떠나보낸 것은 개 한 마리가 아니라 다정한 존재와 함께한 내 삶의 한 시절이었다. 가끔 피피의 이름을 불렀다. 세상에 없는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돌아오지 않을 한 시절을 부르는 일이었다."  (p.175)

 

 

그럴지도 모른다. 결코 되돌아갈 수 없는 과거의 어떤 집을 떠올리는 것은 자신의 지나간 한 시절을 간절히 불러보는 일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이사를 반복하는 동안 나이가 들었고, 그렇게 나이가 드는 과정에서 작가는 아빠와 벌어졌던 틈도, 엄마에 대한 연민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그것은 세월이라는 둥근 집에 기거하는 모든 인류의 깨달음이자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발걸음.

 

 

"이 책은 집이 한 여성에게 미친 영향에 대한 이야기, 또는 집을 통해 본 한 여성의 성장기라는 점에서 자전적이지만, 집이라는 '물리적 장소' 안에서 여성의 '상징적 자리'를 가늠해보려는 어설픈 시도이기도 했다. 이 시도를 통해 나의 이야기가 타자의 이야기가 되고, 타자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되는 연결성을 소망했다. 사적 경험만이 아닌, 한 시대를 공유하며 성장한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일반성과 보편성을 담고 싶었다."  (p.218 '작가의 말' 중에서)

 

 

1월의 날씨라고는 믿기 힘든, 봄날처럼 따뜻한 하루였다. 사람들은 옷에 묻은 코로나 시대의 낡은 집 냄새를 털어내려는 듯 가족들의 손을 잡고 가까운 공원으로 쏟아져 나왔다. 햇살은 부드러웠고, 가벼운 햇살 속으로 아이들의 부푼 웃음소리가 하늘 높이 퍼져나갔다. 그리고 집. 이벤트와 같았던 산책을 마치면 그래, 집으로 가야지. 언제나 그랬듯 거실에는 텔레비전 소리와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뒤섞일 테고 저녁 밥상엔 하루의 일과가 푸짐한 반찬처럼 올려지겠지. 누구에게나 집은 그들만의 역사가 차곡차곡 쌓이는 공간이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얼마 전 뉴스에서 윤 모라는 만화가가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메시지가 논란이 되고 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기사에 따르면 그는 두 장의 사진(하나는 차고가 딸린 저택, 다른 하나는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낡은 집을 찍은 사진)을 대비시켜 놓고 "한쪽은 친일파 후손의 집, 다른 한쪽은 독립운동가 후손의 집인데 이것에 대해서 친일파 후손들이 저렇게 열심히 사는 동안 독립운동가 후손들은 도대체 뭐한 걸까. 사실 알고 보면 100년 전에도 소위 친일파들은 열심히 살았던 사람들이고 독립운동가들은 대충 살았던 사람들 아니었을까."라는 메시지를 남겼다고 한다.

 

나는 사실 그가 그린 만화를 본 적도 없고 직업이 만화가라는 사실도 아는 바 없었지만 이 사람이 꽤나 철없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은 떨쳐낼 수 없었다. 예컨대 독일에서 자신의 선조가 나치에 부역한 사람인데 나치에 저항했던 사람과 그의 후손들을 비하하는 글을 썼더라면 법에 의해 독일 구치소에 수감되는 것은 물론 그렇게 되기 이전에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의 암살 타깃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는 친제국주의자들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파라다이스가 아닐 수 없다. 자신의 전과가 노출될까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물론 마음 놓고 거리를 활보할 수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친제국주의 대가로 받은 재산을 대대손손 물려가며 떵떵거릴 수 있으니 좀 좋은가 말이다.

 

몇 년 전 단재 신채호 선생의 사당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일본 제국주의에 저항하여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그이지만 1936년 뤼순 감옥에서 순국한 후 그는 무국적자로 남았었다. 그가 대한민국의 국적을 회복한 것은 2009년의 일이었다. 대한민국의 국민 전체가 독립운동가의 희생으로 지금과 같은 위치에 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분들의 희생을 가벼이 여기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친제국주의자들의 후손은 철저하게 독립운동가를 매도해왔다. 그런 반지성적, 반역사적 행위조차 표현의 자유 운운하며 방치한다는 건 대한민국의 법이 너무 관대하거나 허술하기 짝이 없다는 반증이다. 글을 쓰면 쓸수록 열불이 나는 까닭에 이쯤에서 그쳐야겠다. 건강을 위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