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롭게 투자한다는 것 - 절대 잃지 않고 가장 오래 쌓는 투자의 대원칙
버턴 말킬.찰스 D. 엘리스 지음, 한정훈 옮김 / 부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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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에는 욕심이 신중함을 앞서 실패의 가능성을 높이고 나이가 들면 신중함이 오히려 욕심을 과도하게 눌러 결단력이나 과감함을 떨어뜨린다. 그것은 비단 나에게만 해당하는 일은 아닌 듯하다. 그런 까닭에 젊은 사람들은 그 시절에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이점인 시간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부자가 되기 위한 첫 관문인 시간을 투자하려는 생각보다는 남들보다 하루라도 먼저 부자가 되겠다는 욕심이 앞서다 보니 꼼꼼히 살펴야 할 여러 요인들을 간과하거나 대충 훑어보는 경향이 빈번하게 발생한다. 결과적으로 실패는 어쩌다 발생하는 불운이 아니라 정기적으로 자신을 괴롭히는 습관처럼 굳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단지 운이 없었을 뿐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한다.


"저축과 다이어트의 공통점은 앞으로 누릴 혜택에 마음을 집중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이다. 체중을 감량하는 사람들이 날씬해지는 데 최선을 다하고, 결과에 대한 칭찬을 받고, 건강을 유지하고, 장수하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것처럼 저축하는 사람들은 절약과 저축하는 것에 즐거움을 느낀다. 또한 저축하는 사람들은 자산을 키워 나가면서 재정적 독립과 미래의 행복을 성취하는 것에 커다란 만족감을 느낀다."  (p.52~p.53)


도합 112년의 경력의 투자 구루 ‘버턴 말킬(Burton G. Malkiel)’과 ‘찰스 엘리스(Charles D. Ellis)’가 쓴 책 <지혜롭게 투자한다는 것>은 어쩌면 '포모(FOMO) 증후군'에 빠진 현대인에 대한 처방전이 될지도 모르겠다. 대공황 시대에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과 대안정기, 1990년대의 닷컴버블, 2008년의 금융위기와 코로나19 창궐로 인한 대봉쇄(Great Lockdown) 등 현대 경제사의 주요 변곡점을 두루 경험했던 두 저자는 시대의 상황에 휩쓸리지 않는 투자의 원칙을 찾게 되었고 이 책에서 '언제나 통하는 투자의 원칙'을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1. 일찍 저축을 시작하고 꾸준히 저축하라.

2. 회사와 정부가 지원하는 은퇴 자금 계획을 활용하여 저축을 최대한 늘리고 세금을 최소화하라.

3. 저비용 '전체 시장' 인덱스 펀드와 다른 자산 유형에 걸쳐 광범위하게 분산 투자하라.

4. 매년 당신에게 적합한 비율로 자산을 재분배하라.

5. 항로를 유지하고 시장 변동을 무시하라. 그러지 않으면 비용이 많이 드는 심각한 투자 실수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장기적인 목표에 집중하라.  (p.218~p.219)


당연한 말이지만 두 명의 저자가 천착했던 주제는 '시장을 어떻게 이길 수 있는가?'와 '시장을 예측하는 것이 가능한가?'였다. 주식이든 부동산이든 일단 투자의 경험을 가져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궁금한 주제일 수 있다. 시장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만 있다면 부자가 된다는 건 그야말로 땅 짚고 헤엄치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아무리 고액의 수수료를 받는 투자 전문가 집단이라고 할지라도 시장을 이기는 건 어려운 일이며, 시장을 예측하는 것 또한 불가능하다는 게 그들이 내린 결론이었다.


이 책을 쓴 두 명의 저자가 주장하는 바는 우리를 불안에 빠트리고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모든 외부 요인을 무시한 채 꿋꿋이 자신의 길을 가라는 것이다. 아침에 눈을 뜨면 듣게 되는 증권 방송의 시황 예측이라거나 금리 변동 가능성, 앞으로의 경기 전망 등 모든 시나리오를 무시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소위 전문가라는 사람들의 예측이 원숭이보다 못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결국 시장이란 예측 불가능한 것이며, 전문가를 포함한 모든 투자자들은 시장 추종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다.


"투자에서 성공의 핵심 요소는 인내심과 끈기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무장하고 합리적인 장기 투자 프로그램을 실천하는 장기 투자자는 최고의 성공을 거두리라 우리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p.217)


삶이란 오래된 후회에 새로운 후회를 끝없이 덧붙여나가는 과정이다. 완벽한 만족이란 있을 수 없다. 인간이 자신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면 결코 발생하지 않을 일이다. 누군가는 기억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고 말했다지만 우리가 정작 겸손해야 할 대상은 오래된 기억이 아니라 자신이 부딪혀야 할 미래일지도 모른다. 인간관계에서도 그렇듯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듯 행동하는 오만함이 삶을 나락으로 이끄는 것처럼 시장을 예측할 수 있다고 믿는 무지가 투자의 결과를 최악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게 우리네 인생인데 먼 미래를 어찌 알 수 있으랴. 미래 앞에 겸손해야 후회도 덜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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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처럼 비가 내리는 날, 도시에 사는 도시내기들에게 외출은 그닥 현명한 선택이 아닐지도 모른다. 도시에서 비나 눈은 보도를 따라 걷는 데 심한 장애 요인일 뿐 베란다에서 보는 것만큼 낭만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산길을 따라 걸을 때 비가 내리면 산책자에게 더없이 큰 기쁨을 제공한다. 진하게 퍼지는 솔향기며, 이제 막 돋아나는 연녹색 풀잎의 옅은 풋내며, 마른 낙엽이 촉촉이 젖어들며 내뿜는 구수한 흙냄새 등 평소에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던 온갖 생명들이 나와 함께 거대한 자연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나 역시 자연의 일부라는 각성은 비 오는 날의 숲에서만 맛볼 수 있는 푸근한 몰입이다.

 

지자체장을 뽑는 재보궐 선거의 사전투표가 이틀째 이어지고 있다. 물론 오늘이 사전투표의 마지막 날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어느 선거나 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후보자의 공약이나 인물됨을 보지는 않는다. 오세훈 후보가 백바지를 입고 내곡동을 갔는지 안 갔는지는 하등 중요하지가 않다는 얘기다. 용산참사의 원인이 철거민들의 폭력적 행위에서 기인했다는 오세훈 후보의 끔찍한 발언도 전혀 문제 될 게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후보자의 인성이 비인간적이든 아니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시장으로서의 권한을 행사했든 아니든 투표권을 행사하는 시민은 오직 자신의 이념 성향에 따라, 혹은 자신이 소유한 부동산의 가격을 올려줄 후보냐 아니냐에 따라 자신에게 주어진 한 표를 행사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중에 자신이 뽑은 후보가 엄청난 일을 저질러도 "에이, 그놈이 그놈이지 뭐." 하는 말로 정당화한다. 그것이 선거의 일반적인 양상이다. 집단 지성이란 책에서나 접할 수 있는 이상적인 단어일 뿐이다. 그런 현상은 내 주변에서도 흔하게 일어난다. 그렇다고 그들이 모두 뉴스와는 담쌓은 산속 무지렁이는 아니다. 그들도 나름 엘리트로 추앙받기도 한다.

 

이렇게 온종일 비가 오락가락하며 어둡고 우중충한 분위기가 이어지는 날에는 평소에는 없던 낮잠이 쏟아지게 마련이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신작 소설 <클라라와 태양>을 읽고 있는데, 졸음이 쏟아져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체질상 술이라곤 한 잔도 입에 대지 못하지만 막걸리에 파전 생각이 문득 들었다. 오늘 같은 날에는 막걸리 한 잔쯤 걸쭉하게 들이켤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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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만이 남는다
나태주 지음 / 마음서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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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지 않아도 후둑후둑 나른한 빗소리가 실제인 양 들리는 건 내가 지금 시집을 읽고 있기 때문이다. 일 년에 두어 번 마치 연중행사처럼 시집을 읽다 보니 나의 기억은 이빨 빠진 톱니처럼 기우뚱기우뚱 중심을 잃고 흔들릴 때가 많다. 시인의 이름과 그가 쓴 대표 작품을 연결 짓는 것도 어렵고, 어떤 시인은 남자였는지 여자였는지 시인의 성 정체성마저 가물가물할 때가 더러 있다. 그럴라치면 나는 애먼 세월 탓을 하며 감겨오는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리는 것이다. 한 구절의 시가 쿵 하고 가슴을 칠 때면 화들짝 놀란 선잠이 멀찌기 달아난다.

 

나태주 시인의 시집 <사랑만이 남는다>에는 우리가 미처 몰랐던 온갖 사랑의 언어들이 가득하다. '의심하지 말아라/부끄러워 숨기지 말아라/사랑은 바로 그렇게 오는 것이다'라고 시작하는 사랑의 향연은 '너로 하여/세상이 초록빛으로 변했다면/아마 너는 나를/거짓말쟁이라 할 것이다'로 부풀려지고, 마침내 '세상에 와서/내가 할 수 있는 표정 가운데/가장 좋은 표정을/너에게 보이고 싶다//이것이 내가 너를/사랑하는 진정한 이유/나 스스로 네 앞에서 가장/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소망이다'라고 고백하기에 이른다. 우리는 시인이 쌓아 올린 단 하나의 사랑탑 주변을 서성이며 내가 소망하는 나만의 사랑을 각색한다.

 

"누군가, 나보다 나이 젊은 사람이 인생에 대해서 묻는다면 첫째도 사랑이고 둘째도 사랑이고 셋째도 사랑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사랑하지 못해서 우울하고, 사랑하지 못해서 슬프고, 사랑하지 못해서 불안하고, 끝내 사랑하지 못해서 불행했던 거라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p.4 '시인의 말' 중에서)

 

'숭고한 사랑'이라는 꽃말을 지닌 백목련은 오직 북쪽을 향해 핀다고 해서 북향화로 불린다고 한다. 나는 목련이 만개한 이 계절에 한 송이 숭고한 사랑을 눈 속에 간직한다. 어느 날 그 사랑은 지면을 향해 '툭' 하고 무겁게 떨어지겠지만 삶도, 사랑도 수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다. 저 목련이 봄이 오는 이 짧은 계절에 최선을 다해 피어났던 것처럼 말이다. 1부 '남몰래 혼자 부르고 싶은 이름', 2부 '당신 있음이 그냥 행복이다', 3부 '너를 생각하면 가슴속에 새싹이 돋아나'로 구성된 이 시집은 책에 실린 130여 편의 시로 인해 시를 읽는 독자들의 가슴이 꽃처럼 벙근다.

 

봄비

 

 

사랑이 찾아올 때는

엎드려 울고

 

 

사랑이 떠나갈 때는

선 채로 울자

 

 

그리하여 너도 씨앗이 되고

나도 씨앗이 되자

 

 

끝내는 우리가 울울창창

서로의 그늘이 되자.

 

라일락 꽃잎이 바람에 흩날린다. 봄비가 예보된 주말을 지나면 기억 속의 향기로 남게 될지도 모른다. 우리 역시 언젠가 기억 속의 한 사람으로 남게 되겠지만 시인이 노래했듯 '서로의 그늘이 되'기 위해 지금은 나의 최선을 다해야 할 때. 공원에 산책을 나온 어느 모녀의 달착지근한 밀어가 바람결에 라일락 꽃잎처럼 실려 와 향기를 더하는 오후,  나태주 시인의 시집 <사랑만이 남는다>를 끝내 손에서 놓지 못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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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위선을 한 꺼풀 벗겨내면 돈을 향한 탐욕의 모양새는 대개 다 비슷비슷한가 보다.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 몇몇과 대화를 나눠 본 결과 재산 등록의 범위를 대폭 확대하는 것에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과민한 반응을 보였다. 말인 즉 부동산 투기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것에는 찬성하지만 지난 몇십 년 동안 부동산을 통해 재산을 형성해 왔던 우리 세대에게, 혹은 재산의 9할 이상이 부동산에 묶여 있는 작금의 상황에서 어떤 대비도 없이 투기를 원천적으로 차단해버리면 부동산 가격의 폭락은 피할 수 없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다른 사람은 둘째 치더라도 자신만큼은 재산상 손해를 조금도 볼 수 없다는 게 그들의 논리였다. 집값이 너무 올랐다고 아우성치는 젊은 사람들의 사정이야 나 알 바 아니고 내가 사는 집의 집값이 떨어지는 건 원치 않는다는 이기적인 논리. 지난 정권에서도 이런 사정으로 인해 투기는 방조하여 왔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제는 친구들의 자녀들도 대부분 장성하여 취직을 하고 독립을 할 나이가 되었건만 집값 하락은 절대적으로 막아야 한다는 그들의 논리가 참으로 허황되게 느껴졌다.

 

탐욕의 지도로 보면 세대 간의 갈등은 피할 수 없는 듯 보인다. 이제 막 사회에 진출하는 젊은 사람들에게는 저렴하고 질 좋은 집이 제공되어 결혼도 하고, 알뜰살뜰 재산도 모을 기회를 가질 수 있다면 더없이 좋을 테고, 양육의 부담에서 조금쯤 벗어난 장년 세대에게는 노후 자금을 위해 아파트 가격이 조금 더 올랐으면 싶은 게 솔직한 바람일 터였다. 어떻게 하면 세금은 줄이고 아파트의 매매가는 높일 수 있을까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던 세대에게 이제부터는 아파트를 비롯한 부동산을 통해 돈을 벌 생각은 애시당초 그만두라고 못을 박는다면 그 원망이 모두 정부 쪽으로 갈 게 당연하다. 이런 까닭에 지난 정부들은 모두 부동산 투기 근절의 시늉만 하다가 그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지금처럼 대대적으로 칼을 빼 든 경우는 없었다.

 

오늘 낮에 들렀던 한 식당의 아주머니 왈, "왜 이렇게 바람이 불지?" 하면서 짜증을 냈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분다고 짜증, 날씨가 좋으면 날씨가 좋다고 짜증, 비가 오면 비가 온다고 짜증... 하느님도 이런 상황에서는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도통 감을 잡기 어려울 것이다. 젊은 층엔 집값 상승이 부담, 중장년 층엔 집값 하락이 부담,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춰야 하나. 인간의 탐욕이 이럴진대 전 국민을 상대로 주야장천 미니멀 라이프 교육만 계속할 수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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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뺀 세상의 전부 - 김소연 산문집
김소연 지음 / 마음의숲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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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산문집은 왠지 모르게 믿음이 간다. 그래서인지 나는 짐짓 시를 읽는 체하며 시인의 산문집을 읽곤 한다. 1990년대 이후 나로부터 차츰 멀어진 시는 좀체 거리를 좁히지 못한 채 데면데면한 관계를 이어오고 있다. 이제는 숫제 내쪽에서 먼저 꽁지를 빼기도 한다. 말간 시구(詩句)들이 강물 위에 뜬 낙엽처럼 한동안 흔들리다가 끝내 초점을 잃고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한 편의 시는 내게 아무런 감동도 주지 못한 채 허망한 발길을 되돌리는 것이다. 그렇게 시는 해독이 어려운 외계어인 양 나로부터 한참이나 멀어져 갔다. 휴대폰이나 인터넷이 없던 시기에 내게 있어 시집은 누군가를 기다리며 가장 손쉽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가장 편한 도구이자 마음을 맡길 수 있는 유일한 친구였는데 말이다. 이제는 시인의 산문집을 읽으며 짐짓 시를 읽는 체하는 지경에 처하고 보니 왠지 모를 아쉬움과 아련한 그리움이 함께 드는 것이다.


김소연 시인 역시 시집보다는 산문집을 통해 먼저 알게 되었다. 2008년에 출간된 양장본의 산문집을 나는 마치 리듬을 벗어난 시를 읽듯 떠듬떠듬 읽어나갔던 것이다. 시인의 정성과 아름다운 마음이 별처럼 쏟아지던 책이었다. 아, 제목마저 어쩜 그렇게 딱 들어맞는지... 시인이 쓴 <마음사전>을 읽으며 나는 비로소 예전에 잊었던 시적 감흥을 조금씩 되살려낼 수 있었다. '햇살에도 파도가 있다/소리는 없지만 철썩대고 있다/삭아갈 것들이 조용하게 삭아가고 있었다'고 노래했던 시인의 짧은 시구가 마음을 헤집고 온통 어수선한 난장을 치던 밤, 나는 차마 잠들지 못한 채 검푸른 새벽을 맞았다.


"고개를 끄덕이며 누군가의 주장을 듣고 있을 때보다 누군가의 하루를 지켜보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게 될 때에 더 크게 설득되고 더 큰 경이감이 찾아온다. 그럴 때마다 나도, 되도록 생각한 바와 주장하는 바를 글로 쓰지 않고, 다만 내가 직접 만났거나 직접 겪었던 일들만을 글로 써보고 싶어졌다. 나를 뺀 세상의 전부, 내가 만난 모든 모든 접촉면이 내가 받은 영향이며, 나의 업장이자 나의 사유라는 걸 믿어보기로 했다."  (p.10 '책머리에' 중에서)


'겨울 이야기'에서 시작된 책의 순서는 차례로 봄, 여름, 가을을 지나 '다시 겨울 이야기'로 끝을 맺고 있지만 가만한 계절의 응시가 시인에게는 무척이나 낯설고 힘겨운 시간들이었겠다, 하는 생각을 문득 하면서 한 곳에 머물지 않는 하루하루가 어느 누구에게도 참으로 소중한 것이었음을 진심으로 믿게 되었다. 오롯이 경험으로만 채워진 삶의 조각들이 기억의 바구니에 수북수북 쌓이던 밤, 글로 채색되지 않는 수많은 반복과 재생의 일상들이 본데없는 직선과 사선의 불필요한 교차만 그려내고, 구겨진 파지 위로 드리워진 아침 햇살이 드문드문 옅은 그림자를 펼쳐놓던 어느 아침. 나는 비로소 시인의 하루를 이해한다.


"시를 쓸 때에도 자주 이런 종류의 괴로움과 만난다. 가장 오래 탐구해왔고 가장 오래 지속해왔던 일에 대해 오히려 모르겠다는 입장이 될 때마다 두려움과 고단함을 동시에 느끼곤 한다. 나의 무지에 대하여 고단함을 느끼지 않고 달갑게 여길 때에야 간신히 새로운 모름에게로 한 걸음 걸어 들어갈 힘이 생긴다. 모른다고 느껴질 때보다 안다고 느껴질 때가 더 많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기 이전에, 모른다는 것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p.83)


별것도 아닌 나의 일상을 하나하나 기록하여 자세히 들여다보면 누군가 내가 지나쳐온 일상 속에 마법의 가루를 흩뿌려놓은 듯 반짝반짝 빛이 나는 걸 보게 된다. 별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별의별 일들로 변화하는 놀라운 마법. 나태주 시인의 시구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가 마법의 주문처럼 외워지던 순간. 시인이 기록한 계절의 순간들은 그저 별것도 아닌 것에서 이렇게 다채로운 옷을 갈아입고 마치 신데렐라가 유리구두를 신고 호박마차에 올라타는 것처럼 우리의 의식 속으로 스며드는 것이다.


"죽는 날까지 경험할 필요 없는 일들만을 경험하며 살다가 인생 자체를 낭비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을지라도, 커다란 후회는 안 해야겠다 생각한다. 수많은 인생 중에 시행착오뿐인 인생도 있을 테고, 하필 그게 내 인생일 뿐이었다고 여길 수 있었으면 한다. 대신, 같은 실수가 아닌 다른 실수, 같은 시행착오가 아닌 새로운 시행착오, 겪어본 적 없는 낭패감과 지루함을 경험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빛나는 경험이라는 게 따로 있다는 걸 이제는 안 믿는다. 경험이란 것은 이미 비루함과 지루함, 비범함과 지극함을 골고루 함유하기 때문이다."  (p.252)


노을이 지는 하늘을 보며 내가 보낸 하루와 시인이 경험했을 이 하루에 대해 생각해본다. 누군가와의 만남을 약속하고, 가보지 않은 식당의 문턱을 넘고, 약속했던 시간을 확인하며 스마트폰 속의 낯선 기사를 읽고, 낯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초조한 시간을 보내기도 하는 하루. 때로는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익숙하지 않은 공원의 보도 위를 거닐던 시간들. 그런 무감한 일상들이 시인의 손길을 거쳐 익숙함의 탈을 벗는 모습은 그저 신비롭다. 창밖에는 농익은 봄햇살이 노을 뒤편으로 숨어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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