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 살고 싶은 시간
신민경 지음 / 책구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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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숙명이라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지만 나이도 젊고, 여전히 건강한 사람들에게 '죽음'은 단지 호기심의 대상은 될지언정 곧 닥칠 미래에 대한 대비로 여겨지지는 않는 듯하다. 물론 자신의 언저리에 언제나 '죽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유념하면서 사는 사람도 없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죽음'은 까마득히 먼 미래의 이야기일 뿐 현재의 자신과는 하등 관련도 없는, 그렇지만 미래의 언젠가는 자신에게도 직접적인 현실로서의 '죽음'을 인지하게 될 날이 결국 오고야 말 거라는 사실을 꿈결처럼 어렴풋이 떠올리는 게 전부이다. 그러나 아주 멀게만 느껴지던 '죽음'은 숨죽이며 먹이를 쫓던 호랑이의 도약처럼 갑작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하루하루 시간은 흐르고 몸은 더 망가져 가는데,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들 언저리만 계속해서 서성였다. 죽고 나면 어차피 누군가가 다 알아서 해줄 일들. 그렇게 시간을 방치해 두다가 불현듯 '지금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 찾기에 돌입했다. '지금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지금 할 수 있는 의미 있는 일'이었던 이유는, 하고 싶은 일을 찾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방법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p.27)

 

누구나 다 시한부 인생을 사는 거지만 임박했거나 미리 예고된 시한부 인생을 사는 사람들이 쓴 책을 나는 꽤나 여러 권 읽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그들의 삶이 궁금하고, 호기심에 이끌리고, 불안한 마음으로 책을 펼치기에 이른다. 나는 삶의 이편에서 여전히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말이다. 그럴라치면 나는 삶과 죽음의 가느다란 줄 위에 올라 선 듯 아슬아슬한 느낌에 사로잡히곤 한다. 때로는 '죽음' 쪽으로 한 발 더 기운 듯하고, 때로는 삶 쪽으로 한 발 더 다가선 듯하다. 이런 기분은 뭐랄까. 끝을 모르는 절벽 위에서 아스라한 공포에 사로잡혔다고나 할까, 더없는 공포와 비견할 수 없는 평화가 공존하는 그런 기분이다.

 

신민경의 산문집 <새벽 4시, 살고 싶은 시간> 역시 시한부 인생을 사는 젊은 여성이 쓴 책이다. 젊다는 건 때로는 짙은 우울을 동반하기도 한다. 이처럼 이른 나이의 '죽음'이 예정되었을 때는 더욱더. 관광경영학을 전공했다는 저자는 다양한 세상을 깊이 있게 경험하기 위해 호주 자원봉사를 시작으로 40여 개 국가에서 살아보았다고 한다. 2015년 유방암 발병으로 수술했고, 2017년 재발해 두 번째 수술을 했으며, 2020년 영국으로의 유학을 앞두고 다발성 전이를 확인,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다는 내용의 책날개에 적힌 저자 소개를 읽으며 나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았을 저자의 삶을 가만가만 상상해 보았다.

 

"시간이 흘러 나는 가족과 지인들 몰래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왜 저예요? 저 그럭저럭 괜찮은 사람인 거 아시잖아요? 저한테 어쩜 이러실 수 있어요! 왜? 왜! 왜!" 부정하고 분노하고 따지며 목 놓아 울었다. 물론 나는 이런 걸 바깥으로 티 내는 사람은 아니다."  (p.159)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냈을 때 내게 처음으로 드는 생각은 이제 더는 그에게 궁금한 것을 물을 수 없다는 거였다. 왜 나는 진작 사소하지만 궁금했던 것들을 모두 물어보지 못했을까, 후회가 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떠난 이에게 궁금했던 모든 질문들은 이제 그만 내려놓아야 한다는 냉엄한 현실이었다. 산다는 건 그에게 궁금한 것들을 질문할 수 있는 시간들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지만 그것 역시 영원하지 않기에 잘 산다는 건 그에게 궁금한 것을 그때그때 물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쓰는 내내 너무 살고 싶었다. 살아서 뭐라도 하고 싶다 생각했다. 하지만 괜찮다. 원래 이상과 현실은 차이가 있는 법이고, 그게 삶인 걸 알았으니. 내 걱정은 하실 것 없다. 이승이든 저승이든, 조용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타고난 능력 부족을 노력으로 메우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을 것이다. 사람은 잘 안 바뀌니까."  (p.197 '에필로그' 중에서)

 

장마철처럼 내리는 비. 나는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거실에서 그리 두껍지 않은 책을 마치 영겁의 시간을 빠져나온 듯 길게 읽었다. 한 사람의 삶이 책 속에 오롯이 담긴, 더 이상 숨길 것도, 그렇다고 더 이상 내세울 것도 없는 저자의 순박하고 투명한 시간들이 책 속에서 말갛게 빛나고 있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가볍게 죽을 수 있을까?' 나는 짙어가는 어둠 속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빗소리도 잊은 채. 칙칙한 어둠과 함께 굵어지는 빗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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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는 요즘 시원하고 달착지근한 향기의 아카시아 꽃이 한창이다. 지난 주말에는 짙은 황사와 미세먼지로, 이번 주초에는 때 아닌 비로 변덕스럽고 요상한 기분의 며칠을 보냈지만 흐렸던 날씨도 개고 푸른 하늘이 드러나자마자 다시 또 때 이른 무더위가 찾아온 듯했다. 생각해 보면 우리도 어찌할 수 없는 게 날씨인데 날씨에 따라 일희일비하는 꼴이라니... 만물의 영장이라는 이름도 허울뿐 인간은 한낱 연약한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오늘 한낮의 햇살은 뜨거웠다. 반소매 옷을 입고도 더위를 느꼈을 정도로 한낮 더위는 매서웠다. 이러다 어쩌면 불쑥 장마가 찾아오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때 이른 더위에 다들 불안해하는 눈치였다. 이러다 말겠지, 하는 기대 심리도 없지는 않았지만 지구 온난화와 이에 따른 기상이변이 한반도만 비껴갈 리도 없는 까닭에 내심 불안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침저녁으로는 여전히 선선한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는 점일 게다.

 

인터넷 뉴스를 보니 가자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무자비한 폭격이 다시 또 시작된 모양이다. 현대 인류에게 있어 가장 잔인하고 무자비한 인간을 꼽으라면 아마도 이스라엘의 정치인이 아닐까 싶다. 달아날 곳도 없고 방어 수단도 없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향해 대대적인 무력 진압을 시행하는 것도 모자라 민간인을 향한 폭격과 살상 행위를 눈도 깜짝하지 않은 채 해치우는 걸 보면 저들도 과연 인간의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는 것이다. 스티븐 핑커 교수가 쓴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독서의 폭발적 성장은 독자로 하여금 자신만의 편협한 관점에서 벗어나는 습관을 갖게 만듦으로써 인도주의 혁명에 기여했을 것이다. 정보와 사람의 유입이 지니는 힘은 일찍이 정치적, 종교적 폭군에게 효과가 없었던 적이 없다. 폭군들이 말과 글과 조직을 억압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민주 국가들이 권리 장전에서 그 통로를 보호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도시와 문해력이 성장하기 전에는 해방적인 사상이 생겨나고 통합되기가 어려웠다. 그러므로 17~18세기에 성장한 세계주의는 인도주의 혁명에 부분적으로 기여했다고 할 만하다."

 

스티븐 핑커 교수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스라엘의 정치인들은 독서를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이스라엘 국민들은 독서를 일절 하지 않는 야만의 종족을 지도자로 뽑았다는 것인데 이 또한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독서도 하지 않는 천박한 인간들이 이스라엘의 정치인임을 21세기의 우리가 똑똑히 목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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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의 문장들 쓰는 존재 4
림태주 지음 / 행성B(행성비)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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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기계가 아닌 이상 매 시간 균질한 밀도의 삶을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다. 때로는 빡빡하게, 때로는 느슨하게 살다 보면 성긴 시간을 메우기 위해 우리는 후회와 그리움을 소환하고 때로는 희망과 걱정을 저글링 하며 나른한 시간을 채운다. 몸은 움직이지 않을지라도 성긴 시간을 메워주던 그리움과 후회. 그리움과 후회는 어쩌면 희망과 걱정의 대척점에 있는 단어들일지도 모른다. 이미 살아본 시간과 앞으로 살게 될 미래의 시간을 자맥질하며 우리는 고단한 현실을 잊곤 한다. 그럴 때면 누군가 말했던 '카르페 디엠(Carpe Diem)'은 그저 공허한 메아리로 남는다.

 

"그리워할 수 있다는 건 살아 있다는 것이다. 살아 있다는 건 살아남았다는 것이고, 덤벼드는 적들로부터 용케 도망쳤거나 잘 이겨냈다는 의미일 것이다. 아직 지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그리워할 수 있다. 그리움은 생존 무기다. 무기는 꼭 사용해서가 아니라 가지고 있는 자체만으로도 힘을 가진다. 방호복이나 비상식량처럼 그리움도 나를 지키고 보살피는 데에 긴요하다."  (p.12)

 

림태주가 쓴 <그리움의 문장들>은 그리움에 대한 온갖 것들이 총망라되어 하나의 철학적 관념을 형성하고, 막연하기만 했던 감정들을 하나로 끌어모은다. 그것은 마치 누에고치에서 명주실을 뽑아내는 것처럼 신기하기만 하다.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그리움에 종사하다 그리움에서 퇴직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작가의 주장답게 '보고픔과 기다림과 외로움의 합체어가 그리움이라 그리움의 뿌리는 외로움'이라는 결론에 이르기도 한다. 그러므로 '그리움의 문장들'은 '외로움의 문장들'이기도 하다.

 

"나도 이제 노인의 언어를 이해해야만 하는 나이에 접어들었다. 나는 아마도 침묵의 언어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당신처럼 함부로 외로움을 발설하지 않을 것이다. 알 수 없다. 아버지도 나처럼 다짐했을지도 모른다. 다짐한다 해도 불어나는 외로움의 채무를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감정의 수도꼭지가 점점 헐거워지고, 잠가도 흘러나오는 비탄이 하수구를 막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아무리 기다려도 배관공은 오지 않는다."  (p.149)

 

성긴 시간에 찾아드는 그리움, 혹은 변질된 외로움을 우리로서는 막을 도리가 없다. 물길을 막는 저 단단한 수력댐처럼 우리의 삶에서 그리움을 완전히 차단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움은 물길처럼 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기 때문이다. 사방에서 몰려드는 그리움의 습격에 인간은 그저 무기력하게 무너질 수밖에 없다. 산다는 건 누군가의 가슴에 돋을새김의 그리움을 한 자락 새겨 넣는 일이라지만 그리움과 허무함이 넘치도록 나를 잠식하는 밤이면 마음을 굳게 닫고 저 멀리 달아나고 싶을 때가 더러 있다. 밤을 꼴딱 새우고 부스스한 아침을 맞았을 때의 더러운 기분을 무엇보다 싫어하기 때문이다.

 

산에는 요즘 이소(異所)를 준비하는 어린 까치의 날갯짓이 분주하다. 아카시아 꽃의 시원하고 달착지근한 향기가 온 산을 가득 채우는 동안 어린 까치는 스스로 살아갈 준비를 하고, 한 자락의 그리움을 가슴에 품은 채 서둘러 작별을 고할 것이다. 마침 오늘은 어버이날. 부모의 곁을 떠났던 이맘때의 나는 자라고, 나이 들어 그 시절의 부모님 나이가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한 자락의 그리움을 끈질긴 혈연의 끈인 양 가슴에 품은 채 살아가고 있다.

 

"외로움의 귀퉁이, 그리움의 모서리였을 꽃밭 앞에 하염없이 앉아 있는 엄마가 있다. 내가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면 엄마의 어룽대는 등을 가만히 껴안아 주고 싶다."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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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아흔아홉 석의 쌀을 가진 부자가 백 석을 채우기 위해 한 석 가진 가난한 자의 재물을 탐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인간의 탐욕이란 끝이 없기 때문이다. 한 발 더 나아가서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그것마저 능력으로 간주하여 어떻게든 백 석을 채운 이의 능력을 추앙하는 경우가 더러 있는 것이다. 피도 눈물도 없는 게 자본주의 체제라지만 그런 비정함마저 개인의 능력으로 인정하고 부러워한다는 건 때론 소름이 돋을 정도로 혐오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대한 보수 언론과 야당의 집요한 공격이 계속되는 걸 보면서 옛말 그른 게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우리나라 언론 지형은 대개 보수가 7, 진보가 3의 비율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해지곤 한다. 그러나 이것도 좋게 봐주어서 그렇다는 얘기다. 진보 언론이라는 한겨레나 경향 등도 진보라고 말할 수 있는 칼럼이나 기사는 극히 드물고 이따금 선보이는 진보 기사로 인해 진보 언론이라는 타이틀이 매겨지고 있기 때문에 실상은 보수 언론이 8 또는 9에 이르고 진보 언론은 1이나 2쯤 되는 게 현실이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는 또 달라서 이보다 훨씬 심각하다. 말하자면 한국의 언론 지형은 보수 일색이라고 봐도 된다. 불행하게도 말이다.


그와 같은 상황에서 김어준이라는 방송인은 어쩌면 눈엣가시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가 진행하는 뉴스공장이 2018년부터 3년 넘게 라디오 청취율 1위를 이어오고 있으니 만석꾼의 시각에서 배가 아파도 여간 배가 아픈 게 아닐 것이다. 그 마음은 나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고 하듯이 우리 미래 세대를 위해서라도 좌와 우가 균형점을 찾아야 하지 않겠는가. 적어도 오른쪽 날개가 기형적으로 커서 바닥에서 조금도 뜨지 못하는 상황은 만들지 말았어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나는 사실 라디오를 듣지도 않고, 김어준의 뉴스공장이 방송되는 아침 7시부터 9시까지는 나에게 가장 바쁜 시간인지라 한가하게 방송을 들을 엄두조차 나지 않지만 김어준 씨는 적어도 TV조선이나 채널A처럼 노회찬 전 의원의 죽음을 생중계하거나 검찰과 한통속이 되어 애먼 사람을 협박하는 등의 천인공노할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TV조선이나 채널A의 종편 승인 취소를 의결하지 않는 것처럼 누군가가 보기에 눈엣가시처럼 보기 싫더라도 그냥 아무 말 말고 지켜보는 게 도리가 아닐까 싶다. 미얀마의 군부 독재를 옹호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우리는 적어도 성숙한 시민의식을 가진 대한민국의 일원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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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 젖은 땅 - 스탈린과 히틀러 사이의 유럽 걸작 논픽션 22
티머시 스나이더 지음, 함규진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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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때, 적들은 다들 각자 죽었을 것이다. 적선이 깨어지고 불타서 기울 때 물로 뛰어든 적병들이 모두 적의 깃발 아래에서 익명의 죽음을 죽었다 하더라도, 죽어서 물 위에 뜬 그들의 죽음은 저마다의 죽음처럼 보였다.'는 구절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보지도 못한 전쟁의 끔찍함에 오싹한 한기를 느끼곤 한다. 그것은 비록 소설가 김훈의 필력에서 나온 임진왜란의 한 장면에 불과하지만 익명의 죽음에 더해지는 산 자의 무덤덤함과 저마다의 죽음 앞에 오열했을 그들 각자의 슬픔을 생각할 때 나는 가슴 밑바닥으로부터의 저릿저릿한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념이나 가치관, 혹은 집단을 대표하는 상징물을 위한 희생은 대개 한데 뭉뚱그려 합산되는 까닭에 개별적인 죽음은 다만 하나의 숫자로만 표기될 뿐 저마다의 죽음으로 애도되거나 기억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예외는 있었다. 티머시 스나이더가 쓴 <피에 젖은 땅(Blood Lands)>을 읽고 나는 적어도 그 당시에 희생된 많은 이들의 개별적인 죽음을 그 자체의 슬픔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1933년부터 1945년에 이르기까지의 우크라이나와 폴란드, 벨라루스와 발트해 연안국에서 희생된 1400만 명의 대규모 학살은 독일 내 유대인 집단수용과 살해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처참하고도 끔찍한 역사였다. 그럼에도 우리는 나치에 의해 자행된 유대인 학살만 기억할 뿐 독일의 동쪽, 소련의 서쪽에 위치한 ‘블러드 랜드’에서 발생한 학살은 세계사의 작은 부분으로도 다루지 않는다. 소련과 독일이라는 양대 제국주의가 번갈아가며 자행한 참극이었지만 전쟁의 승자(주로 영국이나 프랑스)에 의해 기록된 역사만 배운 우리로서는 참으로 당혹스러운 기록이었다.

 

"스나이더의 책은 페이지마다 잔악 행위와 대량 살육을 저지르는 과정을 담고 있지만, 그 주체들이 비인도적인 행위를 주저하거나 그에 반항하는 모습은 별로 눈에 띄지 않는다. 오히려 '살인 할당량을 더 늘려달라'고 상부에 재촉하는 모습, '단지 없애라'는 명령을 상상 이상의 잔혹한 수법으로 실행하며, 거기에 강간·절도·패륜까지 추가하는 장면이 점철된다."  (p.721 '옮긴이의 말' 중에서)

 

최고 결정권자였던 히틀러와 스탈린의 명령에 의해 자행된 대량학살이었던 것은 분명하지만  '가족들 눈앞에서 생사람을 도끼로 난자하고, 굶주림에 미쳐버린 부모가 자기 자식들을 잡아먹도록 하고, 어린 소녀들에게 발가벗고 춤을 추게 하고, 집단 강간한 뒤 그 음부를 찔러 죽이는' 등의 세세한 살인 주문마저 그들의 명령이었다고는 보기 어렵다. 게다가 극우 파시즘과 극좌 공산주의라는 이념적 대척점에 있었던 두 체제가 번갈아가며 통치했던 블러드 랜드에서 제국을 꿈꿨던 두 명의 이상가(스탈린과 히틀러)가 벌인 대량 학살은 묘하게도 닮아 있었다.

 

"소련과 나치 독일 모두에서, 유토피아는 비전으로 제시되고, 현실과 타협되고, 대량학살로 실행되었다. 1932년에는 스탈린이, 1941년에는 히틀러가 그렇게 했다. 스탈린의 유토피아는 9주에서 12주 동안 소련을 집단화하는 것이었다. 히틀러의 것은 그와 같은 시간에 소련을 정복하는 것이었다. 두 가지 모두 돌이켜보면 말도 안 되는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두 가지 다 큰 거짓말의 힘을 빌려 실행에 옮겨졌다. 심지어 실패가 명확해졌을 때조차 멈춰지지 않았다. 사람들의 시체는 정책의 견실함에 대한 증거물로 제시되었다. 따라서 히틀러와 스탈린은 둘 다 특정 형태의 폭군 정치를 했다."  (p.683)

 

본문만 총 11장에 이르는 이 책을 읽는 데 꼬박 한 달이 걸렸다. 참고문헌과 같은 부록을 빼더라도 700쪽이 넘는 책의 두께도 두께려니와 인간성을 상실한 듯한 야만의 장면 장면들이 나로 하여금 넘기던 책장에서 손을 떼게 했다. 나는 쉬지 않고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고, 나도 모르게 기억의 저편으로 되돌아가려는 본능과 맞서 싸워야 했다. 그것은 인간성 상실에 대한 일종의 방어기제였다.  그러나 나의 기억은 번번이 앞쪽 페이지로 되돌아 가 기껏 읽었던 수많은 페이지를 되새김질하며 끔찍한 장면에서 한동안 멈춰 서곤 했다.

 

"독일 국방군이 소련군 포로들을 기차에 실어 어딘가로 이동시킬 때에는 지붕이 없는 화물열차를 이용했고, 따라서 포로들은 눈비를 비롯한 기상변화에 그대로 노출되었다. 기차가 목적지에 도착하자 수백 명의, 심지어 때로는 수천 명의 얼어 죽은 시체들이 열차 밖으로 쏟아져 내렸다."  (p.315)

 

역사 서적을 읽는 목적은 사람마다 다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인간에 대한 기대를 줄일 목적으로 역사서를 선택하곤 한다. 역사서라는 게 본디 찬란하거나 위대한 인간성의 전형을 전시하기보다 끔찍하거나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잔인한 사건들을 더 자주 기록하기 때문이다. 사마천이 궁형(宮刑·남녀의 생식기에 가하는 형벌로 사형에 버금가는 극형)을 당하면서까지 심혈을 기울인 책 <사기>를 보더라도 그는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우며 잔인한 인간의 본질을 매우 깊이 있게 성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비열하고 잔인해질 수 있는 존재이다. 티머시 스나이더의 <피에 젖은 땅>을 읽고 반성하는 우리 모두가 책을 통해 자신의 내부에 있는 모든 야만성을 제거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우리는 그런 야만성에 물든 존재라는 걸 겸허히 수용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좀 더 겸손해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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