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결혼생활
임경선 지음 / 토스트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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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버거운 일이다. 누구에게나. 아니라고 우겨도 나는 그렇게 믿기로 했다. 자식을 낳기 위한 생물학적 결합일 뿐이라는 가장 단순하고 원초적인 논리를 들어 결혼에 이르는 사람은 내 주변에서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혼은 그렇게 복잡다단한 이유들을 충족해야만 비로소 성사되는 고난도 방탈출 게임과 같은 것이기에 성공한 자에게 주어지는 성취감은 높지만 결혼과 동시에 시작되는 상대방의 내면을 캐는 초고난도 방탈출 게임이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은 미처 알지 못한다.

 

"나에게 결혼생활이란 무엇보다 '나와 안 맞는 사람과 사는 일'이다. 생활 패턴, 식성, 취향, 습관과 버릇, 더위와 추위에 대한 민감한 정도, 여행 방식, 하물며 성적 기호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이렇게 나와 다를 수 있지?'를 발견하는 나날이었다. 나중에 이 질문은 점차 '이토록 나와 맞지 않는 사람과 어째서 이렇게 오래 같이 살 수가 있지?'로 변해갔지만."  (p.8)

 

임경선 작가의 산문집 <평범한 결혼생활>은 기혼자라면 누구나(라면 좀 어폐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공감할 수 있는 문구로 시작하여 서로의 '다름'과 '맞지 않음'에 대한 결론도 나지 않을 난상토론으로 이어지다가 결국에는 체념이나 포기를 가장한 '자세 낮춤' 혹은 오지 않은 미래의 '죽음'과 결부 지어 어정쩡한 결말에 이르게 된다. 이와 같은 구성은 기혼자들 대부분이 겪는 일반적인 삶의 형태라고 보아도 무방할 테지만 작가는 자신만이 겪는 특수한 형태의 결혼생활임을 번번이 강조하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다른 부부가 자신처럼 살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원일 수도 있고, 나도 그렇게 살고 있으니 당신들도 실망하거나 위축될 것 없다는 식의 색다른 위로일지도 모른다.

 

"그와 내가 한날한시에 죽을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적을 터이니 남편과 나, 둘 중 누군가는 먼저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남겨진 사람은 남은 삶을 사는 동안 떠나간 사람과 함께 보아온 숱한 풍경들을 플래시백처럼 떠올리게 될 것이다. 이미지는 모호하고 순서는 뒤죽박죽, 심지어 세부사항은 왜곡된 채로. 그렇다 하더라도 '나와 같은 풍경을 참 많이 보았다'라는 실감만은 그저 기분 탓이 아닌, 분명한 사실로 남을 것이다."  (p.129)

 

여담이지만 내가 임경선 작가를 눈여겨보게 된 시초는 작가 역시 무라카미 하루키의 열렬한 팬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였다. 하루키 작품이라면 시도 때도 없이 읽는 나의 '하루키 덕질'에 비해 하루키에 대한 작가의 애착은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와 같은 열정 때문이었을까 작가는 2001년 지금의 남편을 만나 만난 지 3주 만에 결혼을 결심하고 세 달 만에 부부가 돼서 20년간 함께 살아오고 있다고 했다. 그에 부합하는 사연은 책의 중간에 삽입된 청첩장을 보면 알 수 있다. 네 페이지에 걸친 이들의 교환일기 같은 청첩장은, 처음 만난 날부터 사랑에 빠진 순간까지 빼곡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연애 시절의 불같던 사랑도 영원할 수는 없다. 결혼생활은 가끔씩 있는 이벤트가 아닌 피할 수 없는 일상이기 때문이다. 일 년에 서너 번 스치듯 만나는 게 결혼생활이라면 우리는 서로에게 항상 애틋하고 그리운 존재로 남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은 채. 그러나 같은 공간에서 같은 고민을 하면서 지내는 시간이 누적될수록 우리는 연애시절에는 미처 몰랐던 상대방의 습관을 하나하나 발견해 가기도 하고, 그런 습관들 중 어떤 것에는 익숙해지고, 또 다른 어떤 것에는 죽을 때까지 치를 떨기도 하는 법이다.

 

"결혼 초기엔 남편과 밤새워 싸우며 맞담배를 꽤 많이 피웠다. 둘 다 대학과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어설프게 전공한 탓인지 우리의 싸움은 물건을 던지거나 소리를 버럭 지르거나 몸싸움을 하기보단 부엌 테이블에 마주앉아 꼬장꼬장 질겅질겅 서로의 말꼬리를 붙잡는 양상을 띠었다. 답이 없는(부부 싸움은 대개가 답이 없다) 300분 토론이 끝이 나면 옆의 재떨이는 신경질적으로 비벼 끈 담배꽁초들로 수북했다."  (p.103)

 

이와 같은 글을 책으로 낼 수 있었던 건 아마도 그녀가 작가라는 직업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결혼생활이란 누구에게나 그렇듯, 그렇고 그런 일상이 반복적으로 벌어지는 까닭에 무한반복의 일상을 통해 서로의 '다름' 속에서 편안히 안주할 수 있는 방법을 찾도록 한다. 산 정상을 향해 의미도 없이 돌덩어리를 굴리는 시시포스의 신화처럼 결혼생활이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결코 정복되지 않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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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 준비는 되어 있다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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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은 마치 잘 찍은 한 장의 스냅사진과 같다. 순간을 포착함에 있어 영상이 아닌 글로 표현하고 있다는 게 다른 점일 뿐, 무심히 흘려보낼 수 있는 삶의 한 순간을 마치 사진을 찍듯 그려낸다는 게 작가만의 특별한 능력이라고 나는 말하고 싶다. 그러므로 작가의 글은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고, 아무리 단편소설이라지만 소설이 이렇게 짧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가볍다. 그럼에도 소설을 읽는 독자는 더없이 많은 생각에 잠기게 되고, 삶에서 우리가 무심히 흘려보냈던 많은 순간들을 그리워하게 된다. 수없이 많은 '보통의 순간'들이 우리 삶에서 얼마나 소중했던가 다시 한번 깨닫게 되는 순간, 우리는 잔잔한 슬픔과 그리움 속에 휩싸인다. 에쿠니 가오리의 소설이 애잔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무엇 하나 유쾌한 일이 없었다. 아무것도. 아름답지도 푸근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늘 생각나는 것은, 그 여름날의 일이다. 유난히 날씨가 좋았고, 내가 침울한 여자아이였다는 것. 정육점에서 일했던 기와무라 히로토. 보라색 립스틱. 엉뚱한 것만 믿는 열일곱 살짜리 여자애였다는 것."  (p.39 '뒤죽박죽 비스킷' 중에서)

 

책에는 표제작인 '울 준비는 되어 있다'를 포함하여 12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작가가 쓴 '작가 후기'에서도 밝힌 것처럼 이 소설집은 '단편집이기는 하지만 온갖 과자를 섞어놓은 과자 상자가 아니라, 사탕 한 주머니'이고, '색깔이나 맛은 달라도, 성분은 같고 크기도 모양도 비슷비슷'한 소설들로 꾸려져 있다. 독자들에 따라 각자가 체감하는 느낌은 전혀 다를 수 있겠지만 말이다. 결국 촘촘한 시간의 낚싯바늘에 꿰인 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각자가 처한 환경이나 모양새가 조금씩 달라진다 해도 본질적으로 과거의 어느 한순간을 그리워하게 되고, 그런 그리움으로 인해 현재의 삶이 애잔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나는 나츠키를 데리고 언젠가 파리에 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오늘처럼 추운 겨울밤, 파리에서 걸쭉하고 뜨거운 생선 수프를 먹여 주고 싶다. 바닷속 생물들의 생명 같은 맛이 나고 온갖 향신료의 맛이 섞인, 뼈까지 영양이 녹아드는 생선 수프다. 나는 그 풍요롭고 행복한 음식을 다카시가 아닌 남자에게 배웠다."  (p.187 '울 준비는 되어 있다' 중에서)

 

아침나절 요란하게 내리던 비는 모두 그쳐 조용하다. 사랑도 그와 같으리라. 열병처럼 타오르던 사랑도 결혼을 하고, 특별하지 않은 가정을 꾸려 한 해 두 해 지내다 보면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취약한 부분부터 좀이 슬어 어느 순간, 그렇게 튼튼하다고만 여겼던 인연의 끈도 툭 하고 끊어지는 날이 결국 오고야 마는 법이다. 우리는 그렇게 시간을 관통하면서 특별하지 않았던 과거의 어느 순간을 몹시도 그리워한다. 마치 우리에게 주어진 숙명처럼 말이다.

 

"자유란,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고독한 상태를 뜻하는 말이다." (p.163 '손' 중에서)

 

작가가 말한 '자유'의 진정한 의미가 사실이라면 나는 자유를 통과할 기나긴 고독의 시간을 위해 짧게 우는 연습을 반복해야겠다. 요란하게 내리던 비도 그치고 사람들은 어쩌면 저 농밀한 고요 속에서 조용히 울 준비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별을 준비하는 우리의 자세도 그렇게 슬픈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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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유난히 비가 많은 듯하다. 일주일에 두세 차례 비가 내리는 통에 기분도 우울하고 몸도 찌뿌듯한 게 영 개운치가 않다. 코로나 정국으로 가뜩이나 심란한 터에 날씨마저 우중충하니 절로 부아가 치미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여간 조심스러운 게 아니다. 작은 일에 감정을 폭발했다가는 '꼰대'라는 낙인을 면키 어렵거니와 어린 친구들에게 선배로서 영 면이 서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나는 스스로의 감정을 조절하고 무뎌지는 감성을 되살리기 위해 평소보다 아침 산책 시간을 조금 늘렸고, 잠자리에 드는 시각을 조금 앞당겼다.

 

엊그제 뉴스를 보니 인천의 모 병원에서 대리수술로 의심되는 정황이 여럿 발견되었다는 내용의 보도가 있었다. 사실 이런 의심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고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외과 수술실에 들어가 본 사람은 알겠지만 수술실은 마치 어느 자동차 정비 공장의 공구를 모두 옮겨다 놓은 듯 망치 등의 익숙한 공구들도 보이고, 듣도 보도 못한 최신 장비들도 비치되어 있다. 그러나 최신 장비들은 의사들도 손에 익지 않은 까닭에 판매 사원들로부터 사용법을 배우고 익혀 손에 익숙해질 때까지 반복적인 테스트를 거쳐야 하지만, 외과의사가 턱없이 부족한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수술을 미루고 돈도 되지 않는 모의 시술을 반복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장비를 다루는 데 익숙한 판매 사원을 수술에 참여시키고 의사는 그저 수술실 참관자로 참여하는 게 백 번 수월한 일인 것이다. 그러한 일은 비단 외과의사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신약이 쏟아져 나오는 작금의 현실에서 의사들 역시 신약에 대해 공부하고 자신이 진료하는 환자에게 맞는 최선의 처방을 고심해야 하지만 하루에 많게는 수백 명의 환자를 보는 의사들이 잠을 줄여가며 신약을 검색하고 열정적으로 공부에 매진하는 의사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그러니 학창 시절 자신이 배웠던 약만 주야장천 처방하는 게으른 의사가 속출하는 게 아닌가. 이런 사정을 개선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아마도 의사의 수를 늘리는 것일 테지만 그들 역시 자신들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악을 쓰는 까닭에 상황이 개선되길 기대한다는 건 요원해 보인다.

 

대리수술을 색출하고 이에 관련된 의사와 대리 수술자들을 재판에 넘겨 본들 별반 실효성도 없다는 걸 뻔히 아는데, 게다가 대리수술로 환자가 죽어나가도 의사는 그저 가벼운 벌금형에 처해지거나 실형을 받더라도 3년이 경과하면 다시 의사 면허를 갱신할 수 있으니 피해를 본 환자만 억울할 수밖에. 이런 억울함을 당하지 않으려면 자신의 건강을 자신이 돌보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그러므로 부디 건강하시라. 아프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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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1-05-27 16: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제를 잘 지적하신 글입니다.

꼼쥐 2021-05-28 16:13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붕붕툐툐 2021-05-27 17: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우리 모두 아프지 말아요. 내 몸의 주인은 의사가 아니라 나 자신이니까 내 몸을 더 아껴줍시다!

꼼쥐 2021-05-28 16:16   좋아요 1 | URL
코로나 정국을 길게 겪으면서 건강의 중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자신의 건강은 결국 의사가 지켜주는 게 아님을 깊이 깨닫곤 하지요.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가벼운 책임
김신회 지음 / 오티움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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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지속한다는 건 어떻게든 책임을 지겠다는 뜻이다.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무작정 세월만 보내는 무작위의 삶도 종국에는 책임을 지게 마련이다. 어떤 식으로든 결과는 나오게 마련이니까. 자신이 원했던 바가 아닐지라도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게 우리의 삶이라면, 그리고 시시각각 결과가 도출되는 게 우리의 삶이라면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은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내 몸에 아무 짓도 하지 않았지만 세월에 따라 늙고 병이 드는 것도 자신의 책임이요, 자식을 낳고 성심을 다해 돌보았지만 자신의 기대에 턱없이 못 미치는 것도 결국에는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마흔이 가까운 나이에 처음으로 나에게 질문했다. 나를 책임지며 산다는 건 뭘까. 나는 어디서부터 잘못되었고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아는 건 하나도 없는데 물어볼 데도, 알려줄 사람도 없었다. 각자 자기 삶 건사하는 일에 빠듯했기 때문에. 다들 애초부터 그렇게 살고 있었기 때문에. 나만 빼고."  (p.19)

 

김신회의 에세이 <가벼운 책임>은 세상 그 누구보다 낙천적일 것 같던 김신회 작가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된 책이다.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를 통해 처음 알게 된 김신회 작가는 꽤나 낙천적이고 대범해 보였다. 그의 글을 읽어 보면 세상 무서운 것도, 걱정스러운 것도 없었다. 겉보기에는. 보이는 게 전부는 아니라지만 독자의 관점에서 작가는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 책의 앞머리에서 자신이 이 년간의 심리 상담을 받았던 사실을 고백하면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동안 읽었던 작가의 저서 두어 권에서 받았던 나의 느낌은 얼음조각처럼 힘없이 부서졌다.

 

"앞으로도 나는 무수히 많은 선택 앞에서 망설일 것이다. 그러다 관성적으로, 선택하지 않기를 선택하고 안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그럴 때, 이 년 반 만에 블라인드를 달겠다고 결심한 그날의 마음을 떠올려야지. 그러면 사소한 일도, 제법 큰 일도 심호흡 한번 하고 실행할 수 있을지 모른다. 두려움을 잊고, 안 해본 걸 해본 그날의 기억이 가끔 내게 기운을 줄 것 같다."  (p.163)

 

<가벼운 책임>은 작가가 반려견 입양을 결정하고 그 생명을 온전히 책임지는 과정에서 겪었던 생각과 행동의 변화를 솔직하고 담담하게 담아낸 책이다. 늘 책임으로부터 도망치거나 달아나기에 바빴던 지난날의 삶을 돌이켜보면서 작가는 이제부터라도 스스로에게 책임을 지움으로써 40대 중반의 나이에 걸맞은 어른의 삶을 살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자신에게 맡겨진 유기견 풋콩이를 돌보면서 작가는 비로소 '책임감'이라는 말의 무게보다는 책임지는 삶의 행복을 깨닫는다. 말하자면 책임감 있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기껍고 행복한 일상을 자신의 삶 속으로 받아들인 셈이다. 그것은 결코 버겁거나 무거운 일이 아니라 마음만 있다면 누구나 기꺼이 수용할 수 있는 가볍고 마땅한 일이었다.

 

"마음의 기저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러내면 버림받을 것 같은 두려움, 결국 혼자가 될 것 같다는 두려움, 미덥지 못한 내 감정과 행동을 책임지지 못할 거라는 두려움. 정해진 대로 움직이고 아무것도 느끼지 않으면 책임질 일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에 책임감이라는 말의 존재감은 나날이 거대해졌다. 열심히 도망치지 않으면 그 아래에 깔려 죽을 것 같았다."  (p.193 'epilogue' 중에서)

 

책임감을 상실하면 나에게 남는 것은 권태와 무기력뿐이다. 책임감 상실의 기저에는 감당할 수 없는 슬픔과 외로움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책임감 있는 삶을 선택한다는 건 생명체에 대한 사랑과 관계에 대한 복원을 향해 나아간다는 의미이다. 그렇게 일상을 회복한다는 뜻이다. 코로나19의 팬데믹 속에서 우리가 깨닫는 건 아마도 일상의 소중함이 아닐까. 헐거워진 관계만큼이나 모래알처럼 빠져나가는 우정의 속살이 아깝고, 무료하게 보냈던 맹탕의 시간들이 마냥 덧없게 느껴지는 것이다. 일상의 회복이란 단순한 반복을 기꺼운 마음으로 견디겠다는 즐거운 서약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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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생각하는 '겸손'이 과연 미덕이기만 할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더러 있습니다. 그렇다고 겸손하지 말라고 말한다거나 겸손의 미덕을 마구 흠집 내려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요즘 젊은이들이 좀 더 겸손해졌으면 하고 바라기도 하고 자신을 표현함에 있어 과장된 몸짓이나 부풀려진 말로 떠벌리는 걸 몹시도 싫어하는, 이른바 '꼰대' 기질이 다분한 그런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작금의 '겸손'은 과거 우리의 선조들이 귀히 여기던 그런 느낌의 '겸손'과는 상당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럴 만도 하겠지요. 많은 세월이 흘렀으니까요. 우리가 생각하는 겸손의 개념도 달라져 있고 그 방법이나 뜻조차 많이 왜곡되고 변질되었다는 것을 현실에서 번번이 느끼곤 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민족과 서구 사회 구성원을 가름하는 가장 큰 차이점은 지나친 '겸손'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물론 육체적, 정신문화적 차이 등 다양한 구분이 가능하겠습니다만 오늘 말하려고 한 주제는 '겸손'에 국한된 까닭에 다른 것들은 가급적 들먹이지 않을 생각입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공동체적 단합은 겸손을 바탕으로 한 타인에 대한 배려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잘 알고 있는 까닭에 겸손의 미덕을 깎아내릴 의도 또한 전혀 없다는 걸 말하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겸손의 문제점을 한 번쯤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했던 건 어느 날 갑자기 들었던 생각은 아닙니다. 말하자면 나는 오래전부터 이것에 대해 생각해 왔고, 우리 사회의 몇몇 구성원들이 겸손이라는 명목으로 자신을 숨기고, 자신에게 가장 유리한 방면으로 여론을 형성해 왔다는 사실에 분개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공동체를 생각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존재하던 '겸손'이 작금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숨겨진 무기로 사용된다는 점입니다. '겸손'을 가장한 사기인 셈이지요.

 

그 대표적인 사례가 종부세의 문제입니다. 종부세는 주택 및 토지의 공시 가격을 인별로 합산한 결과, 합계액이 과세기준금액을 초과하는 경우 그 초과분에 대하여 과세되는 세금인 까닭에 토지 및 주택의 공시 가격이 크게 오를 경우 납세 대상과 금액이 상승하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각자가 납부해야 할 세액은 상황에 따라 다르고 납부자에게 실제로 고지되는 납부 세액은 그렇게 높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언론에서는 '세금 폭탄'이라는 둥 강남에서 1주택을 소유한 은퇴자는 집을 팔아 세금을 내야 하느냐는 둥 엄살을 떨곤 합니다. 이건 숫제 '겸손'이나 엄살이 아니라 세금을 내지 않겠다는 엄포 또는 사기에 가까운 행태인 것입니다. 9억을 초과하는 1가구 1주택을 소유자들의 평균 자산 총액이 3억 5천만 원정도에 이르니 말입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언제부턴가 자신의 재산을 혹은 부의 정도를 최대한 낮추어 말하는 경향이 있어 왔습니다. 예컨대 '친구 00에게 비하면 나는 거지나 다름없다'는 둥 '나는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라는 둥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우리 주변에는 '생활보호대상자'만 득실거리는 듯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실상은 상상 이상의 재산을 소유하고 있고, 그들의 자산은 대대로 대물림되는 실정입니다. 국민들 전체가 그들의 죽는소리를 액면 그대로 믿게 된 데는 그들의 홍보 수단으로 전락한 언론의 역할이 한몫한 까닭입니다. 언론 종사자 역시 그들과 같은 자산가의 후손이거나 억대 자산가 중 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많은 사기를 쳐 왔는지 우리나라의 최고 자산가 중 1인인 이재용 부회장이 그에게 부과된 상속세를 납부하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 지경에 이르렀을까요. 1년 연봉 7천만 원도 못 받는 사람들이 배당금만 7천억 원 이상을 받는 이재용 부회장을 걱정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지요.

 

서구 사회는 개인주의 사회로 대표되는 사회입니다. 말하자면 약육강식의 동물 세계나 다름없지요. 그러므로 자신의 부나 권력을 최대한 부풀려 내보여야 하고 자신의 약점은 드러내지 않는 게 관습처럼 이어져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타인의 입장을 고려해서 자신의 부나 권력을 가급적 낮춰왔던 게 사실입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겸손의 미덕이 공동체의 결속을 다지는 데 큰 역할을 해 왔던 셈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미덕이 변질되어 자신의 이익을 지키는 데 이용된다면 사회 구성원들 간의 단합은 기대하기 힘듭니다. 언론에서도 이제 '당신은 얼마나 가난하냐?'고 물을 게 아니라 '당신은 대한민국의 몇 번째 부자냐?'고 물어야 할 듯합니다. 그리고 그 물음에 당당하게 답할 때가 되었습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공정과 정의는 과세의 형평에서 비롯되는 것이지 법과 도덕의 준수와 같은 절차적 정의에 기대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발달할수록, 기술이 발달할수록 투명해지고 자연스레 지켜지는 것입니다. 누군가 데모를 한다고, 검찰이 대대적으로 조사를 한다고 나아지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과세의 형평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앞장서서 나아가 문제를 지적하고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게 내 생각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숫자에 약하고 세법 또한 복잡하기에 깊게 들여다보지 않으려 합니다. 그런 약점을 이용하여 언론을 이용한 우민 정치가 쉬워지는 것이겠지요. 쓰다 보니 두서없이 말만 길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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