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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네번째로 사랑하는 계절 - 한정원의 8월 ㅣ 시의적절 8
한정원 지음 / 난다 / 2024년 8월
평점 :
계절은 이제 겨울을 향해 잰걸음으로 달려가고 있는 듯합니다. 제법 낮아진 아침 기온이 오슬오슬 추위를 느끼게 하지만 아직은 여리고 부드러운 추위입니다. 귀가 떨어져 나갈 듯한 날카롭고 매서운 추위가 닥치려면 조금 더 시간이 걸리겠지요. 어제는 시골에 사는 지인의 집을 방문했었습니다. 십여 가구가 사는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마을을 가로질러 작은 하천이 흐르고 하천을 따라 올라가면 산 어귀의 제일 끝집이 지인의 집이었습니다. 방 안에는 화목난로가 구석 한 켠을 차지하고 있었고, 방 한가운데 놓인 좌탁 위에는 지인의 것인 듯한 약이 한 보따리 놓여 있었습니다. 병명은 알 수 없었지만 신경외과에서 처방을 받은 색색깔의 알약들이 1회분으로 나뉜 투명한 봉지 안에 한 움큼씩 들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건강하던 지인도 이제는 약에 의존하여 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짠해졌습니다.
자신의 삶에서 이러이러한 불행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은 불필요할지도 모릅니다. 어렵게 구축한 삶의 보호막은 예리한 시간의 칼끝에 의해 너무도 쉽게 뚫려버리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이러이러한 행복은 나에게 절대 일어날 리가 없다는 가정도 무용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는 동안 우리는 자신이 그토록 갈망하던 행복한 장면들을 깜짝선물처럼 받으며 삶의 시름을 잊어왔기 때문입니다. 언제 있었던 일인지 기억은 희미하지만 지인과 있었던 작은 에피소드가 떠오릅니다. 평소 담배를 피우지 않던 지인이 한 잔의 술을 앞에 놓은 채 심각한 얼굴로 내게 담배를 요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떨결에 나는 담배 한 개비를 꺼내어 지인에게 건넸고, 지인은 어색하지 않은 모습으로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토해냈습니다. 놀란 얼굴을 하며 내가 "참, 의외네요." 하자, "의외라니? 우리의 삶은 모든 게 의외야. 의외가 아니라거나 자신이 예측한 대로 진행되고 있다고 믿는 인간이 오만한 거지."라고 말하던 지인의 얼굴이 엊그제 일처럼 지금도 생생합니다.
"여름에는 정말 미심쩍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게 아닐까. 중지되고 정체되는 감각. 여름을 제일로 사랑했다면 다르게 느꼈을지도, 하지만 여름은 내가 네번째로 사랑하는 계절이다. 세 번을 거쳐온 마음은 미약하다. 그래도 싫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은 마음. 한껏 사랑할 수 없다면 조금 사랑하면 되지." (p.42)
손에 들고 갔던 한정원의 에세이집 <내가 네번째로 사랑하는 계절>을 지인이 타 준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다 읽었습니다. 밖으로부터 느지막한 오후 햇살이 창을 통해 스며들었고, 귀를 쫑긋 세우고 들어야 겨우 들릴 듯한 거칠지 않은 바람소리가 자장가처럼 퍼졌습니다. 순식간에 불붙은 계절의 변화처럼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온통 '의외'로 가득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인의 얼굴이 문득 떠오른 것도, 아무런 준비도 없이 훌쩍 떠나온 것도 미처 예견하지 못한 '의외'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일은 대개 저지대에서 속절없이 일어난다. 슬픔은 단연코 저지대로 모여드는 것이다. 내가 거기 있지 않다고 해서 다행일 수 없다. 거기와 여기는 하나의 세계이다. 거기가 슬픔에 잠겨 있는데 어떻게 여기가 울지 않을 수 있을까. 이 계절에는 빗물과 눈물의 총량이 앞을 다툰다." (p.79)
책에서 나는 작가가 선별한 사진과 시와 산문을 두서없이 읽거나 그 형상과 함께 떠오르는 생각을 골똘히 부여잡으면서 지인도 의식하지 못한 채 한나절을 보낸 듯합니다. 밖으로 나와 잠시 서성였습니다. 햇살이 모여드는 산자락엔 까치 한 마리가 날아와 까닥까닥 머리를 흔들고 있었습니다. 해거름녘의 시골은 덥혀졌던 지면이 금세 식었고, 부드럽던 바람결마저 거칠어졌습니다. 저녁을 먹고 가라는 지인의 권유를 정중히 뿌리치며 귀가를 서둘렀지만, 어둠은 이미 좁디좁은 시골 도로를 가득 뒤덮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사랑한다. 곧 멀리 떠나야 할 사람. 둘은 마주앉아 바라보고 바라본다. 마지막 밤이 서로의 윤곽을 서서히 뭉갤 때까지, 다시 돌아오지 못할지도, 영영 만나지 못할지도. 순식간에 그늘이 심장을 거쳐 발바닥까지 떨어진다. 발밑에 흥건한 어둠. 빛이 필요해, 한 사람이 초를 밝힌다. 어둠이 흔들린다. 밤이 흔들린다. 둘의 그림자가 흰 벽 위에서 흔들린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의 그림자를 어루만진다. 붙잡았으면, 붙잡혔으면, 그림자라도. 한 사람이 붓을 들어 그림자의 윤곽을 따라 긋는다. 선이 흔들린다. 흔들리는 한 사람이 완성된다. 언젠가 한 사람이 떠나고 또 한 사람이 떠나도, 뜨지 못하는 영혼처럼 테두리는 남는다." (P.8 '작가의 말' 중에서)
어둠을 몰아내는 전조등 불빛을 따라 지인의 얼굴이 그려집니다. 세월에 닳고 닳은 탁한 음성도 함께입니다. "우리의 삶은 모든 게 의외야." 나는 반박할 수 없는 어떤 명제 앞에서 처참히 무너집니다. 핸들을 잡은 팔에 나도 모르게 기운이 빠지고, 켜켜이 쌓인 어둠이 못내 부담스러운 밤이었습니다. 어쩌면 한정원 작가의 8월도 그와 같은 '의외'로 가득했는지도 모릅니다. 예정에도 없었던 지인의 시골집을 무작정 방문했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