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나무가 있는 국경
김인자 지음 / 푸른영토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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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에세이를 읽는 게 여행을 대신할 수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오히려 여행에 대한 욕구나 갈망을 한 바구니 키울 뿐이다. 그렇다고 여행 에세이가 여행을 부추기는 광고 서적은 아니라는 걸 누구나 알고 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따금 여행 에세이를 읽고, 풍선처럼 부푼 여행 욕구를 안은 채 훌쩍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그리고 여행지로부터 지금 막 돌아왔을 때의 노곤한 피로와 예상을 뛰어넘은 여행 경비에 골머리를 앓곤 한다. 어느 여성 잡지의 연말 부록처럼 '이제 내가 여행을 또 떠나면 성을 갈겠다'는 여행 결별 선언이 짐을 정리하는 내내 이어졌을지도 모르겠다.


"긴장감을 날려버리기엔 파파야나 망고향기가 있는 국경도 멋지지 않을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아직 나는 그런 국경을 본 적이 없다. 하여 마음 속 국경에 사과나무를 심기로 했으니 훗날 나무가 자라 붉은 사과가 주렁주렁 열리면 누구든 와서 따 드시라. 그리고 전해주시라. 지상 어딘가 사과나무가 있는 매우 멋진 국경이 있노라고. 그곳에 가면 당신은 그리운 이에게 사과나무가 있어 등지고 싶은 세상을 다시 사랑하게 되었노라는 편지를 쓰게 될 거라고."  (p.141)


김인자 시인의 여행 에세이 <사과나무가 있는 국경>은 어쩌면 작가의 여행 결산서와도 같은 책이다. 작가가 여행했던 여행지에 대한 정보도, 그곳에서의 특별한 에피소드를 주제로 쓴 것도 아닌, 여행자로 살았던 20년의 여행기록을 묶은 책이기 때문이다. 풍경보다 만났던 사람들의 인물사진을 우선순위에 두고 순수한 인간애를 책에 담으려 했다는 작가의 서문은 꽤나 인상적이어서 책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우리가 어느 곳에 있든 우리는 모두 '삶'이라는 과정을 여행하는 초보 여행자일 뿐이라는 생각을 갖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은 나와 직업군이 다른 어느 개인이 아닌, 삶을 여행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만난 '여행 메이트'쯤으로 여겨질지도...


"죽음과 슬픔으로 가득한 도시를 떠나 당도한 서쪽 바다, 밀항을 꿈꾼 건 아니었다 네비게이션을 무시한 채 달렸고 걸었다. 딴엔 죽음이 나를 앞지르거나 따라오지 못하도록 없는 지도를 만들고 숨은 길을 찾느라 몇 번인가 바퀴가 빠질 뻔했다. 죽음이 멀미처럼 아련해질 무렵 바람이 일러준 대로 작은 포구에 도착했고 울기 좋은 방 하나를 얻어 짐을 풀었다."  (p.330)


1부 '사하라 사막에서 히말라야까지', 2부 '트럭여행과 크루즈와 캠퍼밴', 3부 '삶과 죽음, 나로부터의 결별', 4부 '섬, 천년의 기다림'으로 구성된 이 책은 차라리 한 줄 아름다운 '구도(求道)의 서(書)'라고 해도 좋을 만큼 작가의 유려한 문체와 웅숭깊은 사색의 결과물이 결합되어 책을 읽는 독자로 하여금 독서의 재미를 만끽하게 한다. 나는 한 권의 소설을 읽을 때처럼 책을 펼치는 순간부터 내처 읽다가 마지막 장을 덮음으로써 독서를 갈무리하는 일반적인 독서가 아니라 마음에 드는 어떤 문장 앞에서 그 뜻과 의미를 오래 음미하다가 다시 책을 읽는 식으로 독서, 음미, 쉼, 독서, 음미 등 불규칙적인 독서를 이어갔다.


"욕망을 긍정한다고 타락이나 방종을 허락하는 건 아니지만 살면서 행복대신 일등이나 부자가 되려는 욕심에 눈이 멀어 알게 모르게 상처를 준 일이 얼마나 많았을까. 여행은 그런 나를 반성하게 했다. 고통과 시련은 집 밖을 그리워 한 죄의 대가로 달게 받겠다. 그리고 깊고 따스하고 흔들림 없는 영혼을 만날 때마다 심장이 터질 듯 좋았다는 것에 감사하며 '아니오'라고 말해준 모든 이들에게도 같은 인사를 대신하고 싶다."  (p.364)


어제오늘 날씨가 초가을처럼 따사로웠다.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도 날씨처럼 밝았다. 그러나 우리가 소소한 행복을 누리는 지금 이 시각에도 지구 곳곳에서는 모르는 이의 불행이 우후죽순처럼 발발할 터, 우리가 그들의 눈물마저 닦아줄 수는 없겠지만 너무 티 나게 웃고 있지는 말자. 다만 언제, 어느 곳에서도 행복과 불행은 늘 함께하고 있음을 잊지 말자. 나의 행복보다 너의 불행을 우선순위로 생각한다는 원칙을 지켜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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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이 좋았던 하루였다. 금방이라도 단풍이 들 것만 같은 투명한 바람이 햇살과 어울려 어울렁더울렁 춤을 추는, 혹은 넘치지도 않고 부족하지도 않은 햇살이 시간 가득 풀린... 지칠 줄 모르는 아이들이 학교 운동장에서 공을 차고 있었다. 미끄러질 듯 맑은 하늘에 이따금 구름이 떠가고 어디선가 들리는 아이의 웃음소리가 구름을 쫓아 사라졌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휴일을 반납한 채 대통령 탄핵 집회에 나갔던 하루이기도 했다. 화려한 가을볕이 이울고 마침내 저녁 어스름이 안개처럼 깔리는 시간. 사람들이 세상을 뜨는 까닭은 남겨진 사람들의 가슴에 침묵을 남겨주기 위해서임을 나는 최근에 말 대신 차라리 한줄기 눈물을 택한 10.29 참사 유족들을 통해서 배웠다. 가까웠던 사람들은 그렇게 쉼 없이 내 곁을 떠나가는데 가슴 한켠 침묵의 공간은 왜 이다지도 넓어지지 않고 속절없이 지워지는가. 침묵은 인간 슬픔의 정점. 언어를 잃고, 울음을 잃은 사람들이 마침내 다다르는 슬픔의 설원. 그리하여 침묵은 어떤 울음보다 더 힘이 세다.


어둠을 향해 건네는 침묵의 시선은 무심하다. 무심하다 못해 때론 허허롭다. 현명함이란 그렇게 모든 것을 내려놓았을 때의 길지 않은 순간에 찾아온다. 삶의 영역에서 한 계단 더 내디뎠을 때나 발견할 수 있는, 찰나의 기쁨이 아닌가. 사이토 다카시의 저서 <내가 공부하는 이유>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현대인은 유난히 고독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휴대 전화나 인터넷을 통해 다른 사람과 쉴 새 없이 대화를 주고받으며 고독을 느끼지 않으려 몸부림친다. 반면 공부는 책을 펼치는 순간부터 마치는 순간까지 혼자서 몰입하는 고독한 작업이다. 사람 때문에 느끼는 것이 아닌, '충실한 고독'이라고 할까. 함께 공부를 할 동료를 만날 수도 있지만 결국은 혼자의 힘으로 가는 것이 공부다. 공부에 몰입하는 동안은 외로움을 느낄 새도 없이 배움이 주는 즐거움에 빠지게 된다. 공부하는 삶을 살게 되면 나만의 공부에 빠져들 수 있는 조용한 시간이 반갑게 느껴진다."


대다수의 국민들이 대통령을 불신임하고 있다.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만 모르고 있는 듯하다. 이 가을, 하야하기에 얼마나 좋은 시기인가. 본인을 위해서, 그리고 국민 모두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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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번째 천산갑
천쓰홍 지음, 김태성 옮김 / 민음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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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한 일간지의 기사를 읽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기사의 제목부터 혐오와 차별, 증오와 냉대의 마음이 가득했다. ''성오염 물결' 맞서 광화문·국회에 '거룩한 방파제' 세운 한국 교회'였다. 사실 이 기사를 미국에서 썼다면 당장 소송에 걸리는 것은 물론 거액의 배상금으로 인해 신문사가 파산할 수도 있는 기사였다. 그리고 이 기사를 4명의 기자가 썼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조악한 기사였다. 논리도 없고, 설득력도 없는 , 한마디로 읽을 만한 가치도 없는 쓰레기 기사였다. 그럼에도 어떻게 한국 개신교의 주창자들과 그들을 따르는 어리석은 신도들은 이들의 말에 열광하고 지지하는 것일까.


한국 교회의 성장 배경에는 독재 권력과 족벌 자본이 있다. 한국 교회가 이들 세력을 비호함으로써 그들로부터 권력과 부를 누리게 된 것은 당연했다. 목사들은 소득은 있지만 일반인들처럼 투명하게 세금을 납부하지도 않는, 치외법권적 권리를 누리고 있는 셈이다. 그런 까닭에 소수자의 권리를 옹호하지 않는 정부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앞장서서 반대하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포괄적 차별금지법 도입을 반대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으로 들어가면 외국인과 성 소수자에 대한 동등한 권리를 반대하는 것이다. 성 소수자를 성오염으로 표현하는 것은 지극히 편파적인 주장일 뿐이다. 오염이라는 것은 '공기나 물, 환경 따위가 더러워지거나 해로운 물질에 물듦'을 뜻한다. 그렇다면 성 소수자들도 자신의 몸에 붙은 어떤 더러운 물질을 툭툭 털어내기만 하면 다수인 이성애자로 바뀔까? 절대 그럴 리가 없다. 성 소수자는 후천적인 학습이나 타인의 권유에 의해서 형성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지독히 부끄럽고 괴로운 일이지만 자신의 성 정체성을 죽을 때까지 안고 가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선천적으로 획득되어 잘 변하지 않는 것은 또 있다. 정치적인 성향이다. 만약 작금의 상황에서 같은 논리로 소수자를 비하하고 차별하는 기사를 쓴다면 '정치오염 물결' 맞서 광화문·국회에 '거룩한 방파제' 세운 더불어민주당'이라고 써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국민의힘 지지자들은 절대적 소수이기 때문에 '정치오염'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 국가에서 그렇게 표현하고 차별한다는 것은 잘못된 처사임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


서론이 무척이나 길었다. 대만 작가 천쓰홍의 소설 <67번째 천산갑>을 읽는 독자 중 작가와 성 정체성이 맞지 않는 사람이거나 이들을 혐오하는 독자라면 다소 언짢고 불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곱 명의 누나가 있는 대가족의 막내아들이자 성소수자인 작가 자신의 삶을 기반으로 쓴 이 소설은 어떤 장면에서는 성 소수자의 삶을 이해하는 독자라 할지라도 때론 낯설고 이상한 기분이 들 것이다. 이성애자인 일반인이 읽기에는 말이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엉덩이 냄새가 고약하다고 말하는 걸 알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엉덩이를 두려워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엉덩이에는 치욕감이 뒤따랐다. 어떻게 공개적으로 엉덩이를 얘기할 수 있겠는가. 변태들이나 그럴 수 있었다. 어떻게 엉덩이를 먹을 수 있단 말인가. 쳐 죽일 변태 놈들만 가능했다. 어떻게 엉덩이를 좋아할 수 있단 말인가? 냄새가 고약하지 않은가? 인체의 숨결에는 수백 가지의 모습이 있었다. 고약한 냄새가 나는 건 그렇게 끔찍한 일이 아니었다. 고약한 냄새는 수치스러운 게 아니었다. 진심으로 좋아한다면. 심지어 사랑한다면, 고약한 냄새는 향기로 변했다. 아주 좋은 냄새가 된다."  (p.389)


<67번째 천산갑>은 제목만큼이나 특이한 소설이다. 우선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인물이 그와 그녀로 존재할 뿐 특정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동성애자인 그와 이성애자인 그녀는 어린 시절 동반 출연한 영화가 4K로 복원돼 낭트 영화제에 초대되면서 다시 만나게 된다는 설정이 이채롭다. 파리에서 생활하고 있는 그는 동성 연인 J를 잃고 공허한 상태에 빠져 있었고, 대만에 사는 그녀는 유명 정치인의 아내로 편안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실은 '트로피 와이프'로서 불면증에 시달리기도 한다. 그렇게 두 사람을 중심으로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이야기가 펼쳐지는 이 소설은 이름도 없는 두 주인공이 동성애자와 이성애자의 흔한 모습, 이를테면 원 오브 뎀으로 끝나는 듯하지만 결국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름이 밝혀지게 된다.


어린 시절 '그'의 아버지는 희귀 동물인 천산갑을 키워 그 비늘을 약재로 팔겠다는 생각으로 수십 마리의 천산갑을 산 위의 집에 들여놓았는데 이상하게도 천산갑들은 어린 '그'에게만 친밀감을 보였고, 이를 우연히 목격한 매트리스 광고 감독의 눈에 띄어 '그'는 '그녀'와 함께 천산갑이 등장하는 영화에 동반 출연하게 된다. 낭트 영화제 초청작으로 선정되어 '그'와 '그녀'도 낭트에 갈 예정이었지만 '그'의 엄마와 동물을 잡으러 갔다가 그만 시간을 놓치고 만다. 수십 년 동안 헤어져서 지내던 두 사람. 동성 연인 J의 죽음으로 실의에 빠져 있던 '그'에게 영화제를 핑계로 '그녀'가 찾아온 것이다.


"그의 눈에서 물이 나왔다. 그녀는 자기 말 때문인지 아니면 꿈속에서 누군가를 보았기 때문인지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상관없었다. 그녀는 말을 뱉었다. 아주 오래전 그녀는 그의 몸을 가까이하면서 신호를 보냈었다. 그가 자신을 짜릿하게 해 주기를 바랐다. 그 시절 그녀는 정말 멍청이였다. 아무것도 몰랐다. 지금도 그때보다 많은 걸 알고 있다고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게이미가 틀림없이 자기 아들을 짜릿하게 해 주었으리라는 걸. 게이미에게 감사해야지."  (p.470)


가부장제 사회에서 억압받는 아시아계 여성과 자신의 성 정체성을 떳떳하게 밝히지 못하는 성 소수자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는 이 소설은 같은 처지에 놓인 두 남녀의 우정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꽤나 신선하지만 나를 비롯하여 다수의 이성애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알 수 없다. 더구나 권력과 자본에 결탁한 한국 개신교가 동성애자에 대한 지속적인 차별과 혐오를 부추김으로써 자신들의 권위를 유지하려는 시도는 무척이나 집요하기에 한국 사회는 여전히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듯하다. 옆 나라 일본만 하더라도 동성결혼 접수 거부는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리고 있는 마당에 우리나라만 세계 질서에 맞서고 있는 형국이 아닌가. 소설에서 두 사람이 낭트로 향하는 여정은 그나마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 희망을 안겨주려는 듯 밝은 모습이다.


"두 사람은 침대에 앉아 있었다. 창밖에는 큰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들의 인생은 정말 한 편의 곰팡이 핀 옛날 영화다. 필름에 스크래치가 너무 많아서 화면 전체에 비가 내린다. 내리려면 내리라지. 상관없었다. 그 어떤 기술도 없지만, 두 사람의 이 낡은 영화를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p.474)


혐오는 혐오로만 남을 뿐 결코 사랑으로 치환되지 않는다. 그것은 확실하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는 소수자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거두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지금은 큰소리를 칠지언정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떵떵거리던 보수 세력이 지역 정당으로 전락한 것처럼 말이다. 있는 그대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에 대한 예의임을 그들도 알아야 한다. 그들은 예의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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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만 부산할 뿐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은 뭘 해도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안 하던 실수를 연발하게 된다. 몸이 피곤해서 그럴 수도 있고 또 다른 걱정거리로 내내 정신이 딴 데 가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심리 상태를 이해하고 보살펴줄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정이 없거나 마음이 고약해서 그런 건 아니다. 타인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행동거지를 찬찬히 살펴 여느 날과 다른 점을 단숨에 캐치하는 것은 물론 그 원인도 얼추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처럼 눈치가 없는 사람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넘사벽의 경지인 것이다. 그런 사람이 곁에 있다는 건 일견 좋을 수도 있고, 때론 불편할 수도 있다. 나를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얼굴에 약간의 그림자만 드리워도 '너 요즘 무슨 걱정 있니?' 하고 물어올 게 뻔하기 때문이다. 도저히 속일 재간이 없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신경을 써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건 고마운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아침부터 생텍쥐페리의 <인간의 대지>를 붙잡고 있는데 도통 글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읽었던 문장을 또 읽고, 그래도 기억이 나지 않아 페이지를 넘겨 처음부터 다시 읽는 일을 서너 번 반복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하늘도 나의 마음을 알겠다는 듯 뿌옇게 흐려 있다. 활동하기에 적당한 기온과 울긋불긋 단풍이 드는 풍경. 더없이 좋은 계절에 이토록 마음이 심란한 것은 복에 겨운 탓인지도 모른다.


"어느새 별 하나가 반짝이고 있었다. 나는 그 별을 골똘히 바라보았다. 이 새하얀 지면은 수십만 년 전부터 별들에게만 바쳐져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맑은 하늘 아래 펼쳐진 순결한 식탁보. 그리고 그 식탁보 위, 내게서 15 내지 20미터 정도 되는 곳에서 까만 조약돌을 하나 발견했을 때, 나는 위대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가슴이 쿵 내려앉는 충격을 받았다. 나는 300미터 두께로 쌓인 조개껍데기 위에 서 있었다. 그 거대한 지층 전체가 절대적인 증거라도 되는 양, 돌멩이 하나라도 거기 있는 것을 거부하고 있었다. 지구의 원만한 소화작용에서 생겨난 규석들이 어쩌면 지하 깊은 곳에서 잠들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무슨 기적으로 그것들 중 하나가 이토록 새로운 지표 위까지 올라오게 된 것일까? 그리하여 나는 방망이질하는 가슴을 안고 내가 발견한 물건을 주워 들었다. 단단하고 까맣고 주먹만 하며, 금속처럼 무겁고 눈물 모양으로 생긴 조약돌 하나를."  ('인간의 대지' 중에서)


군대에 간 아들은 다음 주에 첫 휴가를 나온다고 한다. 내가 군생활을 했던 때와 비교해서 지금은 모든 게 달라졌다고는 하지만 첫 휴가에 대한 설렘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변하지 않았을 듯하다. 그나저나 얼마 전에 보낸 알베르 카뮈의 에세이 <결혼·여름>은 다 읽었을까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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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
이미리내 지음, 정해영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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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그 시대에 속했던 인간 군상을 초라하게 하거나 무시한다. 그러나 역사에 묻힌 한 인물을 조망하는 예술은 인간을 위대하게 만든다. 영화가 그렇고, 소설이 그렇다. 그러므로 영화를 보거나 소설을 읽는다는 건 인간의 위대함을 탐구하고자 함이지 역사가 놓친 인간의 비열함이나 속수무책의 허약함을 재확인하려는 게 아니다. 그러나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겪었던 어느 주인공의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시대를 불문하고 존재하는 인간성 제로의 인간에 눈길이 가곤 한다. 그리고 분노하게 된다. '어떻게 사람이...'


요즘 들어 우리나라 근현대사를 다룬 소설을 자주 읽게 된다. 자주라고 해봐야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지만 다독가도 아닌 내가 하나의 주제로 묶을 수 있는 소설을 한 달에 서너 권씩이나 읽는다는 건 꽤나 이례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의 남북 분단 및 한국전쟁, 군부 독재와 민주화 과정으로 이어지는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는 그야말로 수난과 질곡의 세월이었지만 그 과정을 견뎌 온 사람들의 이야기는 언제 읽어도 가슴이 아프다. 같은 인간으로서 연민과 동정을 안 느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녀가 나를 보고 윙크했다. 윙크라기보다 눈꺼풀 근육이 씰룩인 것에 더 가까워 보였다. "그럼 어르신의 여덟 단어는 뭘까요?" 내가 물었고, 그녀의 얼굴에 한쪽 입꼬리만 올라간 장난스러운 미소가 다시금 떠오른 것을 알아차렸다. "노예, 탈출 전문가, 살인자, 테러리스트, 스파이, 연인, 그리고 어머니." 나는 말없이 앉아 있었다. 그녀의 눈이 크리스마스트리처럼 반짝였다. 그녀는 나를 당황하게 만든 것에 신이 나고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듣고 싶어 죽을 지경인 얼굴이었다."  (p.31)


이미리내의 소설<이름 없는 여자의 여덟 가지 인생>은 요양원에서 일하는 '나'의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노인들을 대상으로 '부고 쓰기 프로그램'을 기획한 '나'는 부고를 쓰기 위한 전 단계로 노인들로부터 그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듣고자 한다. 그러던 중 생각지도 못한 독특한 캐릭터의 묵 할머니를 만나게 된다. '일본 사람으로 태어나서 북한 사람으로 살았고 이제 남한 사람으로 죽어가고 있'다는 묵 할머니. 소설은 시간의 순서를 따르지 않고 마치 여러 사람의 삶을 단편적으로 옮겨놓은 듯 뒤죽박죽이지만 그래서 더 독자들의 시선을 붙잡는지도 모른다. 한 사람의 장구한 세월을 시간의 순서에 따라 읽어 내려간다는 건 얼마나 지루하고 견디기 힘든 시간인가. 그러나 시간적 순서에 상관없이 누군가가 들려주는 짧은 에피소드를 여러 편 읽는다는 건 오히려 관심이 동하지 않던가. 마치 옛날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말이다.


"내가 초래해야 했던 물리적인 죽음 자체는 혐오스러웠지만, 배경 이야기를 지어내는 것은 내게 쉬운 일이었다. 나중에 살면서 나는 혹시 나의 그런 뻔뻔함이 아버지의 죽음 이후 엄마를 그렇게 멍하게 만든 건 아닌지, 자신의 사랑스러운 어린 딸이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그런 교묘한 속임수를 쓸 수 있었다는 충격 때문에 엄마가 그렇게 된 건 아닌지 생각하게 되었다."  (p.133)


소설은 주인공인 묵 할머니의 출생에서부터 그와 같은 삶이 비롯된 기원에 대한 적확한 논리를 제공한다. 서울에서 유명한 한의사였던 외할아버지가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았던 것을 계기로 자신의 딸마저 잃을까 염려한 나머지 북쪽 지방에 사는 시골 농부에게 시집을 보낸 것이 묵 할머니가 탄생하게 된 시발점이었다. 말하자면 부잣집에서 자란 엘리트 여성과 시골 촌부의 부조리한 결합으로 태어난 게 묵 할머니였다는 이야기이다. 묵 할머니는 어머니의 배려로 캐나다 선교사 밑에서 영어 회화를 배우는 등 적극적인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가정 폭력을 견디지 못한 묵 할머니는 결국 자신의 아버지를 살해하고 시신을 자작나무 숲에 묻는다. 그리고 가정 폭력에 의해 시력을 잃은 엄마를 치료할 수 있다는 감언이설에 속아 묵 할머니는 어린 나이에 종군 위안부로 끌려가게 된다. 인도네시아 스마랑으로 끌려갔던 비슷한 또래의 위안부 여성들이 겪었던 그곳에서의 삶과 죽음은 책을 덮고 싶을 정도로 참혹하지만 그들 사이의 끈끈한 우정과 이따금 나누었던 고향 이야기 등은 못내 가슴 아프다.


미군의 개입으로 위안소를 가까스로 탈출한 묵 할머니는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을 다시 겪게 된다. 부산으로 피난을 갔던 묵 할머니는 영어를 할 수 있다는 이유로 미군 부대 근처의 '낙검자' 수용소(성병 관리소)인 멍키하우스에서 일하게 되지만 결국 하우스를 불태우고 만다. 전쟁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간 주인공은 아내이자 어머니가 되어 잠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10년 동안 실종되었다가 어느 날 갑자기 돌아와 일본어는 물론 영어까지 유창하게 하는 묵 할머니의 모습을 본 누군가가 국가에 신고하고 만다. 묵 할머니의 국가였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묵 할머니를 남한 공작원으로 파견한다. 그리고...


"그녀가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나는 우리가 앉아 있는 손기정 공원의 벤치 주변을 둘러본다. 키 큰 플라타너스나무들이 어디에나 그늘을 드리워서 땅에는 살며시 흔들리는 빛의 조각들이 여기저기 조금씩 보일 뿐이다. 나는 고개를 들어 위를 올려다본다. 오렌지색 황혼이 하늘 전체에 번지고 있다. 한때 여름 매미의 시끄러운 울음소리로 가득했던 대기가 이제 귀뚜라미의 쓸쓸한 찌르륵찌르륵 소리에 점령당했다. 가을이 왔다."  (p.337)


끝내 오지 않을 것만 같던 가을이 왔다. 그리고 우리는 대한민국의 역사를 부정하는 현 정권의 고위 공직자들의 망언을 마치 우리 선조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소리인 양 반복적으로 듣고 있다. '한일관계'가 언제나 '일한관계'라고 말하는 주일대사, 광복절은 미국에 감사하는 날이라고 하는 뉴욕 총영사, 일제 점령기의 우리나라 국민의 국적이 일본이라고 주장하는 어느 장관, 위안부는 근거 없는 주장이라며 역사적 사실을 정면으로 부인했던 UN 일본 대표의 말에 단 한마디도 반박하지 못했던 우리나라의 관료 등을 보면서 우리는 대한민국 역사가 갈가리 흩어지고 있구나, 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끝내 오지 않을 것만 같던 가을이 도래하는 것처럼 마음대로 역사를 왜곡하고 짓밟으며 기고만장했던 그들도 권력의 상실과 함께 스러지지 않겠나.


갑작스러운 기온 저하로 가을 햇살이 마냥 그리워지게 하더니 오늘은 한낮 기온이 제법 올라 따사롭기만 하다. 자연은 이렇듯 한없이 순환하는 계절을 따라 천변만화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시간의 산물인 역사도 순환하는 계절의 아름다움처럼 그렇게 다음 세대에게 아름다운 것만 남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역사는 비록 그 시대에 속했던 인간 군상을 초라하게 하지만 소설 속에 드러난 한 여인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역사보다 더 위대한 한 인간의 분투를 엿보게 된다. 휘몰아치는 역사의 흐름도 어찌하지 못했던 불굴의 인간정신을. 우리가 소설을 읽는 단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바로 그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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