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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이유 (개정증보판) - 초판한정 각양장 + 면지 친필 사인(인쇄) 일러스트 + 책갈피 (작가 낭독 음성 QR코드)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4년 4월
평점 :
더위가 적당할 때의 여름은 관능적이다. 그러나 기온이 우리의 임계치를 넘어 조금만 치솟아도 여름의 관능미는 탄탄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후줄근하거나 포기하고 싶은 추레함으로 변한다. 관능미와 추레함을 가르는 기온의 범위는 생각보다 넓지 않다. 잘 살고 못 사는 기준의 차이가 그리 멀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매년 여름이면 더위를 피해 여행을 떠나는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끈적끈적한 더위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품위를 지키기 위해 내가 살고 있는 이곳보다 조금 더 기온이 낮은 곳으로 슬쩍 피난을 가는 것, 그게 여행일지도 모른다.
자주는 아니지만 이따금 어느 작가의 '여행기'를 읽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작가가 방문했던 여행지에는 그닥 관심이 없다. 책을 읽고 난 후에 쉽게 잊어버리는 까닭이다. 이름조차 생소한 이국의 지명은 그만큼 나에게 어떠한 감동도 주지 못한다는 걸 의미한다. 그렇다고 작가가 타지에서 경험했던 실수담이나 특별한 경험에 매료되는 것도 아니다. 그 경험이 비단 작가의 여행지에서만 발생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그럴 것 같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행기를 도대체 왜 읽는가? 하는 문제만 남는다. 심심풀이 땅콩도 아니고 말이다. 짧은 인생에서, 더구나 읽어야 할 책이 산적해 있는 마당에 그런 허섭스레기(는 아니지만)에 시간과 열정을 소비할 필요는 없는 게 아닌가. 내가 여행기를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나는 지금 작가의 환상을 읽고 있거나 작가가 여행지에서 가져온 여행지의 잔상을 읽고 있구나',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환상이나 잔상이 남아 있지 않은, 이를테면 자신이 방문했던 여행지와 거기서 찍은 사진만 즐비한 여행기를 읽는다는 건 어쩌면 시간 낭비가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일상사가 번다하고 골치 아플수록 여행지의 호텔은 더 큰 만족을 준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 문제들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고 나에게 그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할 것만 같다. 삶이 부과하는 문제가 까다로울수록 나는 여행을 더 갈망했다. 그것은 리셋에 대한 희망이었을 것이다." (p.66)
김영하의 에세이 <여행의 이유>는 우리가 여행을 갈망하는 이유와 우리가 여행지에서 얻게 되는 것들에 대해 압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소설가라는 특수한 직업인으로서 말이다. 집필을 목적으로 떠났던 중국 여행에서 입국 자체가 거부된 채 추방당했던 경험에서 시작되는 이 책은 사람들이 여행을 하는 목적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애초에 품었던 목적이 여행 도중에 발생하는 사건들로 인해 번번이 틀어짐으로써 얻게 되는 또 다른 경험에 대해 들려준다. 여행기가 지닌 이와 같은 기본 구조는 인생의 여정과 흡사하다. 작가는 이런 식으로 여행에 대한 사유를 넓혀간다.
"자아가 지워지고 현재가 그 어느 때보다 커다란 의미로 육박해오는 이러한 초월의 경험은 시간이 충분히 흐른 뒤에야 언어로 기술할 수 있다. 언어로 옮겨진 후에야 비로소 그것은 '생각'이 되어 유통된다. 유통되지 않고 재고로 남은 기억은 창고 깊숙한 곳에 묻혀 잊혀진다. 고대 그리스와 달리 이제는 생각을 들고 몸소 돌아다닐 필요가 없다. 그것은 책으로 묶여 도매상과 서점을 통해 스스로 돌아다닌다." (p.81)
대학을 졸업할 무렵부터 매년, 때로는 한 해에도 여러 번 여행을 떠나는 생활을 20년간 해왔다는 작가는 학창시절에도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말과 풍습이 다른 지역을 마치 방랑하듯, 혹은 여행하듯 지내왔다고 한다. 이처럼 작가의 삶은 긴 여행의 연속선상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여행의 이유는 작가 자신에게는 존재의 이유인 동시에 삶의 이유가 되는 것이다.
"내가 여행을 정말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 우리의 현재를 위협하는 이 어두운 두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하는 동안 우리는 일종의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된다. 낯선 곳에서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먹을 곳과 잘 곳을 확보하고 안전을 도모해야 한다. 오직 현재만이 중요하고 의미를 가지게 된다.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이 거듭하여 말한 것처럼 미래에 대한 근심과 과거에 대한 후회를 줄이고 현재에 집중할 때, 인간은 흔들림 없는 평온의 상태에 근접한다. 여행은 우리를 오직 현재에만 머물게 하고, 일상의 근심과 후회, 미련으로부터 해방시킨다." (p.109~p.110)
우리가 듣게 되는 흔하디흔한 이야기들은 삶의 변두리로 밀려나게 마련이다. 그러다 특정한 누군가의 생각에 의해 직접적인 삶의 현장으로 다시 불려 오기도 한다. 여행은 이와 같은 우리 생각의 흐름이나 왕래를 막힘 없이 가능케 한다. 생각의 통로를 열어준다는 건 내 삶을 아무런 제약 없이 설계하겠다는 의미가 된다. 작가가 여행에서 '삶이 리셋되는 기분이다'라고 썼던 것과 일맥상통한다.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야 그 시기에 내가 겪은 것이 단순히 게임 과몰입이 아니라 가벼운 우울증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이 뜻대로 풀리지 않던 시절이면 나는 무엇에든 쉽게 중독되어 자신을 잊기를 바랐다. 뉴욕에서도 그랬을 것이다. 도착하자마자 허리케인을 만났고, (그것 때문은 아니지만)『 검은 꽃』영어판은 출판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별 반응 없이 묻혀버렸다." (p.178)
작가는 알쓸신잡을 촬영하면서 했던 기묘한 여행을 통해 '비(非)여행'과 '탈(脫)여행'을 설명하기도 하고, 소설가로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겪었던 작가 자신의 경험을 통해 '노바디의 여행'을 말하면서 현명한 여행자의 바람직한 태도에 대해 적기도 했다. 작가는 자신이 읽었던 책 속의 한 구절을 인용하거나 어느 여행지에서 겪었던 경험 한 토막을 들려주면서 여행에 대한 독자들의 사유를 돕는다.
"인간은 왜 여행을 꿈꾸는가. 그것은 독자가 왜 매번 새로운 소설을 찾아 읽는가와 비슷한 것이다. 여행은 고되고, 위험하며, 비용도 든다. 가만히 자기 집 소파에 드러누워 감자칩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는 게 돈도 안 들고 안전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안전하고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떠나고 싶어한다. 거기서 우리 몸은 세상을 다시 느끼기 시작하고, 경험들은 연결되고 통합되며, 우리의 정신은 한껏 고양된다. 그렇게 고양된 정신으로 다시 어지러운 일상으로 복귀한다. 아니, 일상을 여행할 힘을 얻게 된다,라고도 말할 수 있다." (p.206)
작가로서 '글쓰기에 대해서는 쓸 기회가 많았지만 여행은 그렇지를 못했'던 까닭에 작가는 꽤 오래전부터 자신이 생각하는 여행에 대해 쓰고 싶었다고 했다. 저마다가 생각하는 여행은 각자 다 다를 수 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여행은 특별한 풍경의 감상이 주가 되는 경우가 많다.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고 말하는 까닭도 그런 이유이다. 그들에게 여행은 단순한 장소의 이동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것은 쉽게 잊히게 마련이고, 다녀온 여행지가 늘어날수록 기억은 혼재되거나 왜곡되기 쉽다. 이와는 다르게 이 보 전진을 위한 도움닫기가 필요한 순간 우리는 종종 여행을 계획하기도 한다. 생각의 통로가 열리는 여행지에서 우리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기도 하고, 선물처럼 영감을 얻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