펭귄 하이웨이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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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설정하는 주인공의 인물 됨됨이에 대하여 깊이 생각할 때가 있다. 주인공의 나이며, 성격이며. 외모며 가족 관계, 심지어 주인공이 살고 있는 지역의 기후나 환경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머릿속을 거치지 않고 스스로 창조되었거나 유도된 것은 하나도 없는 까닭에 작가의 의도는 소설 속 각각의 인물에 영향을 미치는 제반 설정에 고스란히 감추어져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소설을 읽는 독자는 소설 속 인물의 작은 변화를 파악하기 위해 혹은 구성원 상호 간의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작가가 구성한 주변 환경에 있어서의 미세한 변화마저 소홀히 다루어서는 안 된다. 물론 평론을 업으로 하지 않는 일반 독자가 이 모든 것을 세밀히 다룬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말이다.


모리미 도미히코의 SF 판타지 소설 <펭귄 하이웨이>는 책의 볼륨에 비해 스토리 전개가 빠르고 구성 자체가 복잡하지 않아 비교적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그러나 인물의 성격이나 배경, 주인공이 관찰하고자 하는 연구 대상(이 책에서는 '바다', '펭귄', '재버워크' 등) 및 주인공과 갈등 관계에 있는 인물들의 변화를 감지하고 기억하면서 책을 읽지 않으면 SF 판타지 소설로서의 이 책에 대한 가치나 재미는 조금쯤 경감되거나 잃게 될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이야기 자체의 재미에 빠져 술술 읽다 보면 각각의 인물이 왜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하였는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순간이 종종 발생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대부분의 독자가 나보다 이해력이 뛰어난 까닭에 그럴 염려는 나만의 기우가 될 수도 있겠지만.


"다른 사람에게 지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만 어제의 나 자신에게 지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하루하루 세계에 대해 배워나가면 나는 어제보다 조금씩 훌륭해진다. 내가 어른이 될 때까지는 아직 긴 시간이 남아 있다. 오늘 계산해보니 내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3000하고도 888일이 남아 있다. 그러면 나는 3000하고도 888일을 나날이 훌륭해지는 거다. 그날이 왔을 때 내가 얼마나 훌륭해져 있을지는 짐작도 못 하겠다. 너무 훌륭해져서 큰일이 나는 건 아닐까. 모두들 깜짝 놀랄 거다."  (p.10)


인공 이름은 아오야마, 초등학교 4학년의 10살 소년이다. 위에서 인용한 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아오야마는 애라기보다 애늙은이에 가깝다. 그렇다고 모든 면에서 다 완벽한 것은 아니다. 자신이 낮에 머리를 너무 많이 쓴 탓이라고 항변하지만 9시만 되면 졸음을 참지 못한다. 그리고 치료차 들르는 치과병원의 간호사 누나를 남 몰래 짝사랑하기도 한다. 아오야마의 학구열과 애늙은이 같은 태도를 치과 누나는 귀엽게 봐준다. 아오야마는 모든 것을 관찰하고 휴대하는 노트에 기록한다. 이렇게 기록된 매 순간의 결과는 집에서 다른 노트에다 주제별로 정리한다. 많은 학자들이 그러하듯이. 연구 주제는 '좋아하는 치과 누나'에서부터 '상대성 이론'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그리고 마을에 갑자기 나타난 '펭귄'과 하늘에 돔과 같이 생긴 '바다' 그리고 숲에서 보이는 '재버워크' 등 최근에 아오야마의 관심을 끄는 대상이 갑자기 늘었다. 그리고 어느 날 치과 누나가 콜라 캔을 펭귄으로 변하게 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렇지만 누나가 사람들의 연구 대상이 되는 걸 염려한 아오야마는 이것을 철저히 숨긴다. 학교에서 그와 함게 연구를 하는 단짝 친구 우치다와 체스 소녀 하마모토에게도. 그러나 숲에 돔 모양으로 하늘에 떠 있는 '바다'가 수축과 팽창을 함에 따라 치과 누나의 건강이 달라지는 것을 알게 되는 아오야마. '바다'는 결국 주민들을 위협할 정도로 팽창하게 되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제멋대로이고 어리광쟁이였던 시절, 나도 여동생과 똑같이 소중한 사람들이 모두 언젠가는 죽어 만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정말 깜짝 놀랐던 적이 있다. 물론 나는 모든 생물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이 나와 관계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밤, 내가 아무리 운이 좋아도, 내가 아무리 싫어도, 절대로 죽음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p.300)


단순한 재미를 떠나 이 소설은 얼핏 한 소년의 성장기를 담은 성장 소설이 아닐까 생각하게도 한다. 그러나 아오야마를 해변의 카페에서 수시로 만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치과 누나를 비롯하여 좋은 친구처럼 대하는 아오야마의 아빠에 이르기까지 책은 아이들이 바르고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기성세대가 어떤 태도로 어떤 환경을 조성해 주어야만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한다. 아오야마의 아빠는 엄마라면 금지했을 커피를 아들과 마시고 어른들이나 좋아할 민트가 들어간 초콜릿을 권하는가 하면 연구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조언을 잊지 않는다. '문제를 작은 문제들로 쪼개고, 다른 각도에서 문제들을 바라보고, 닮은 문제를 찾'으라고 권한다. 아오야마는 대상을 '누나'와 '펭귄'으로 나누어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고 말고. 세계의 끝은 밖에만 있는 게 아니라고 아버지는 생각한단다. 웜홀도 그렇지 않을까? 너랑 아빠 사이에 있는 이 테이블 위에 실은 웜홀이 이미 출연했을지도 몰라. 그건 정말로 한순간의 일이라서 우리한테 안 보이는 것뿐일 수도 있어."  (P.252~P.253)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어른다움이란 무엇일까?' 생각했다. 진정한 어른다움은 아마도 앞에 있는 대화 상대와 같은 눈높이에서 대화하고, 공감하며, 진심을 담아 경청하는 자세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어른이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 주변에 많으면 많을수록 아이는 건강하고 바르게 자랄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 나와는 친구처럼 지내는 아버지뻘의 지인이 나를 만나기 위해 먼 곳에서 찾아왔었다. 그분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삶을 낭비하지 말고 원하는 것을 하면서 살아. 이제는 자네도 그럴 나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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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매로 보이는 꼬마 둘이 손을 꼭 잡은 채 걷고 있다. 그들 앞에는 엄마인 듯한 여인이 한발 앞서 느린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여름 햇살이 무섭게 쏟아지는 거리. 까무잡잡 살이 탄 두 명의 꼬마는 무표정했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못하지만 온몸으로 불만을 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잰걸음으로 뒤를 쫓는 아이들을 앞서 걷는 한 여인이 무심한 듯 이따금 뒤를 쳐다본다. 그들이 향하고 있는 곳은 주택가 근처의 도서관. 황금 같은 휴일 오전에 엄마의 설득이나 강요가 없었더라면 초등학생도 되지 않은 아이들이 도서관에 간다는 엄마와 결코 동행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집에서 느긋하게 텔레비전을 보거나, 컴퓨터 게임을 하거나, 여동생을 실컷 놀려먹으면서 휴일 오전의 여유를 만끽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더위는 엄마로 하여금 가장 경제적인 피서 장소를 물색하게 했을 테고, 도서관이야말로 교육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최적의 장소라는 결론에 이르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현실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갈등은 지극히 사소한 일에서 비롯된다는 걸 잘 알면서도 우리는 도처에 널린 지뢰를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밟아대곤 한다. 사소하다는 것은 언제나 무해하거나 큰 위험이 없는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사소함이 보내는 옅은 미소에 우리는 너무도 쉽게 현혹되거나 그 위험성이나 독성을 너무나 쉽게 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소하다는 것은 단 한 번의 실수로 치명적인 위험에 도달하지 않는다는 것일 뿐 시나브로 누적되는 위험으로 인해 더욱 치명적일 수 있다는 사실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비폭력 대화>를 쓴 마셜 로젠버그 박사의 다른 책 <상처 주지 않는 대화>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지적 호기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배움을 위해 학교를 찾고, 학교는 규칙과 합의를 통해 배움의 범위에서 전할 수 있는 일정한 틀을 만들어야 합니다. 규칙과 합의 사항을 정할 때는 벌을 주기 위한 권력이 아니라 보호하기 위한 권력을 사용한다는 사상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규칙은 모든 당사자들의 이해관계와 욕구 충족을 지원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의 욕구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행동을 할 때가 있기 마련인데,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의 욕구를 반영할 수 있을지 함께 논의하고 결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상처 주지 않는 대화' 중에서)


펄펄 끓는 가마솥더위가 연일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민을 더욱 짜증 나게 하는 것은 오늘과 같은 더위가 아니다. 여당과 야당, 현 정부와 대한민국 국민 간의 극한 대치야말로 작금의 불볕더위에 참을 수 없는 열기를 더하고 있다. '규칙은 모든 당사자들의 이해관계와 욕구 충족을 지원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데 현 정부와 여당은 자신들을 지지하는 일부 국민의 욕구 충족을 지원하기 위한 규칙만 내세울 뿐 다수 국민의 욕구는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역대 최장 열대야'를 겪고 있는 우리는 '역대 최장 정부 혐오증'을 함께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모든 더위는 후자에서 비롯되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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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이유 (개정증보판) - 초판한정 각양장 + 면지 친필 사인(인쇄) 일러스트 + 책갈피 (작가 낭독 음성 QR코드)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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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가 적당할 때의 여름은 관능적이다. 그러나 기온이 우리의 임계치를 넘어 조금만 치솟아도 여름의 관능미는 탄탄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후줄근하거나 포기하고 싶은 추레함으로 변한다. 관능미와 추레함을 가르는 기온의 범위는 생각보다 넓지 않다. 잘 살고 못 사는 기준의 차이가 그리 멀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매년 여름이면 더위를 피해 여행을 떠나는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끈적끈적한 더위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품위를 지키기 위해 내가 살고 있는 이곳보다 조금 더 기온이 낮은 곳으로 슬쩍 피난을 가는 것, 그게 여행일지도 모른다.


자주는 아니지만 이따금 어느 작가의 '여행기'를 읽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작가가 방문했던 여행지에는 그닥 관심이 없다. 책을 읽고 난 후에 쉽게 잊어버리는 까닭이다. 이름조차 생소한 이국의 지명은 그만큼 나에게 어떠한 감동도 주지 못한다는 걸 의미한다. 그렇다고 작가가 타지에서 경험했던 실수담이나 특별한 경험에 매료되는 것도 아니다. 그 경험이 비단 작가의 여행지에서만 발생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그럴 것 같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행기를 도대체 왜 읽는가? 하는 문제만 남는다. 심심풀이 땅콩도 아니고 말이다. 짧은 인생에서, 더구나 읽어야 할 책이 산적해 있는 마당에 그런 허섭스레기(는 아니지만)에 시간과 열정을 소비할 필요는 없는 게 아닌가. 내가 여행기를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나는 지금 작가의 환상을 읽고 있거나 작가가 여행지에서 가져온 여행지의 잔상을 읽고 있구나',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환상이나 잔상이 남아 있지 않은, 이를테면 자신이 방문했던 여행지와 거기서 찍은 사진만 즐비한 여행기를 읽는다는 건 어쩌면 시간 낭비가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일상사가 번다하고 골치 아플수록 여행지의 호텔은 더 큰 만족을 준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 문제들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고 나에게 그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할 것만 같다. 삶이 부과하는 문제가 까다로울수록 나는 여행을 더 갈망했다. 그것은 리셋에 대한 희망이었을 것이다." (p.66)


김영하의 에세이 <여행의 이유>는 우리가 여행을 갈망하는 이유와 우리가 여행지에서 얻게 되는 것들에 대해 압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소설가라는 특수한 직업인으로서 말이다. 집필을 목적으로 떠났던 중국 여행에서 입국 자체가 거부된 채 추방당했던 경험에서 시작되는 이 책은 사람들이 여행을 하는 목적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애초에 품었던 목적이 여행 도중에 발생하는 사건들로 인해 번번이 틀어짐으로써 얻게 되는 또 다른 경험에 대해 들려준다. 여행기가 지닌 이와 같은 기본 구조는 인생의 여정과 흡사하다. 작가는 이런 식으로 여행에 대한 사유를 넓혀간다.


"자아가 지워지고 현재가 그 어느 때보다 커다란 의미로 육박해오는 이러한 초월의 경험은 시간이 충분히 흐른 뒤에야 언어로 기술할 수 있다. 언어로 옮겨진 후에야 비로소 그것은 '생각'이 되어 유통된다. 유통되지 않고 재고로 남은 기억은 창고 깊숙한 곳에 묻혀 잊혀진다. 고대 그리스와 달리 이제는 생각을 들고 몸소 돌아다닐 필요가 없다. 그것은 책으로 묶여 도매상과 서점을 통해 스스로 돌아다닌다." (p.81)


대학을 졸업할 무렵부터 매년, 때로는 한 해에도 여러 번 여행을 떠나는 생활을 20년간 해왔다는 작가는 학창시절에도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말과 풍습이 다른 지역을 마치 방랑하듯, 혹은 여행하듯 지내왔다고 한다. 이처럼 작가의 삶은 긴 여행의 연속선상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여행의 이유는 작가 자신에게는 존재의 이유인 동시에 삶의 이유가 되는 것이다.


"내가 여행을 정말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 우리의 현재를 위협하는 이 어두운 두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하는 동안 우리는 일종의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된다. 낯선 곳에서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먹을 곳과 잘 곳을 확보하고 안전을 도모해야 한다. 오직 현재만이 중요하고 의미를 가지게 된다.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이 거듭하여 말한 것처럼 미래에 대한 근심과 과거에 대한 후회를 줄이고 현재에 집중할 때, 인간은 흔들림 없는 평온의 상태에 근접한다. 여행은 우리를 오직 현재에만 머물게 하고, 일상의 근심과 후회, 미련으로부터 해방시킨다." (p.109~p.110)


우리가 듣게 되는 흔하디흔한 이야기들은 삶의 변두리로 밀려나게 마련이다. 그러다 특정한 누군가의 생각에 의해 직접적인 삶의 현장으로 다시 불려 오기도 한다. 여행은 이와 같은 우리 생각의 흐름이나 왕래를 막힘 없이 가능케 한다. 생각의 통로를 열어준다는 건 내 삶을 아무런 제약 없이 설계하겠다는 의미가 된다. 작가가 여행에서 '삶이 리셋되는 기분이다'라고 썼던 것과 일맥상통한다.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야 그 시기에 내가 겪은 것이 단순히 게임 과몰입이 아니라 가벼운 우울증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이 뜻대로 풀리지 않던 시절이면 나는 무엇에든 쉽게 중독되어 자신을 잊기를 바랐다. 뉴욕에서도 그랬을 것이다. 도착하자마자 허리케인을 만났고, (그것 때문은 아니지만)『 검은 꽃』영어판은 출판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별 반응 없이 묻혀버렸다." (p.178)


작가는 알쓸신잡을 촬영하면서 했던 기묘한 여행을 통해 '비(非)여행'과 '탈(脫)여행'을 설명하기도 하고, 소설가로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겪었던 작가 자신의 경험을 통해 '노바디의 여행'을 말하면서 현명한 여행자의 바람직한 태도에 대해 적기도 했다. 작가는 자신이 읽었던 책 속의 한 구절을 인용하거나 어느 여행지에서 겪었던 경험 한 토막을 들려주면서 여행에 대한 독자들의 사유를 돕는다.


"인간은 왜 여행을 꿈꾸는가. 그것은 독자가 왜 매번 새로운 소설을 찾아 읽는가와 비슷한 것이다. 여행은 고되고, 위험하며, 비용도 든다. 가만히 자기 집 소파에 드러누워 감자칩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는 게 돈도 안 들고 안전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안전하고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떠나고 싶어한다. 거기서 우리 몸은 세상을 다시 느끼기 시작하고, 경험들은 연결되고 통합되며, 우리의 정신은 한껏 고양된다. 그렇게 고양된 정신으로 다시 어지러운 일상으로 복귀한다. 아니, 일상을 여행할 힘을 얻게 된다,라고도 말할 수 있다." (p.206)


작가로서 '글쓰기에 대해서는 쓸 기회가 많았지만 여행은 그렇지를 못했'던 까닭에 작가는 꽤 오래전부터 자신이 생각하는 여행에 대해 쓰고 싶었다고 했다. 저마다가 생각하는 여행은 각자 다 다를 수 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여행은 특별한 풍경의 감상이 주가 되는 경우가 많다.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고 말하는 까닭도 그런 이유이다. 그들에게 여행은 단순한 장소의 이동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것은 쉽게 잊히게 마련이고, 다녀온 여행지가 늘어날수록 기억은 혼재되거나 왜곡되기 쉽다. 이와는 다르게 이 보 전진을 위한 도움닫기가 필요한 순간 우리는 종종 여행을 계획하기도 한다. 생각의 통로가 열리는 여행지에서 우리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기도 하고, 선물처럼 영감을 얻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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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자주 쓰이지는 않으나 '준동'이라는 단어는 현 시국을 표현하는 데 있어 꽤나 적당한 말인 듯 여겨진다. 준동(蠢動). 한자로는 꿈틀거릴 준(蠢)에 움직일 동(動)을 쓰는데 직역하면 벌레 따위가 꿈틀거린다는 뜻이 되지만 흔히 쓰는 의미로는 '불순한 세력이나 보잘것없는 무리가 소동을 일으킴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쓰인다. 예컨대 '네오나치들의 준동으로 내슈빌 시민들이 불안에 떨고 있다'는 식으로 쓸 수 있다. 말하자면 어떤 사회에 속하는 소수의 구성원(주로 혐오의 대상이나 대중으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는)이 숨을 죽인 채 조용히 숨어 지내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행동을 개시함으로써 다수의 사회 구성원들로부터 지탄을 받게 될 때 쓰곤 한다.


오늘은 제79주년 광복절. 뉴라이트 세력이 준동하자 굥 정부에 대한 국민 대다수의 분노와 항의가 이어지고 있다. 사실 대한민국의 우익은 우익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대부분의 다른 나라의 우익은 자국의 역사나 민족을 우선시하는데 대한민국의 우익은 자국보다는 일본이나 미국, 심지어 이스라엘을 우선시하기도 하니 말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그들은 우익이 아니라 친일파 혹은 매국노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우익이라거나 보수주의라는 말은 그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일제강점기의 종군 위안부를 기리기 위한 소녀상에 테러를 가하고 그들을 가리켜 위안부가 아닌 매춘부라고 비하하는가 하면 챌린지라는 명목으로 기림의 날을 맞아 소녀상에 별 이상한 짓거리를 하는 모습을 동영상으로 올리는 등 정상적인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는 미친 짓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뿐이 아니다. 국가인권위원장이 될 자는 가장 비인권적인 자가, 노동부 장관이 될 자는 노동계를 가장 비하하는 자가 지명되었다. 국가의 모든 기관을 엉망으로 만들기 위해 각 기관의 취지나 목적과는 가장 거리가 먼 인물로 채워 넣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벌레와 같은 자들이 꿈틀거리며 이 세상에 드러나고 있음이다. 우리는 이것을 일컬어 '준동(蠢動)'이라고 한다.


말복이 지났지만 날씨는 여전히 무덥기만 하다. 벌레들이 꿈틀대는 대한민국의 실상이 혐오스럽다는 듯 날씨마저 그렇게 변해가는 듯하다. 오늘은 제79주년 광복절.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던 이들이 테러리스트가 되고, 일제를 위해 그들을 토벌한 이의 명예를 되찾아줘야 한다는, 벌레만도 못한 이들이 대한민국에서 준동하고 있다. '준동'은 그런 의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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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란공 2024-08-15 15: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가 말한 ‘검은 세력’에 저도 포함될 것 같아요. 기왕이면 좀 귀엽게 ‘블랙 팬더’ 혹은 ‘검은 푸바오’같은 모습으로 준동할까봐요.

안국역과 잠실에 있는 독도 모형마져 치워버리고(시민의 안전을 위해 라고요. 광복절에 이 기특한 생각을 해낸 거였어요), 동대구역엔 빅정희 광장이 들어섰다고 하더군요.이정도로 시민의 안전을 위했더라면 이태원 사고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겠지요.

꼼쥐 2024-08-17 12:46   좋아요 2 | URL
광복절 경축사를 읽어보니 가관도 아니더군요. 초란공 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저 역시 그 범주에 포함되지 않을까 싶어요. KBS에서 송출한 기미가요와 반대 모형의 태극기로 인해 하도 말이 많아서인지 지하철역에서 치워졌던 독도 모형은 독도의 날에 맞춰 재설치를 한다고 하더군요. 정말 나라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산을 달리는 러너
박태외(막시) 지음 / 뜰book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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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산을 오르는 데는 많은 제약이 따른다. 우선 무더위로 인한 걷잡을 수 없는 땀이 그렇고, 땀냄새를 맡고 달려드는 모기떼의 공격도 무시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장마철의 호우도 복병이 아닐 수 없다. 이런저런 이유로 산을 오르는 일을 며칠 거르고 나면 아무리 오랫동안 들여온 습관도 무용지물로 전락하고 만다. 슬슬 꾀가 나기 때문이다. 산에 오르지 않을 핑곗거리를 어떻게든 만들어 내고야 만다. 몇십 년 묵은 습관도 하루아침에 무너지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계절이 바로 여름이다. 내일부터, 내일부터 하면서 마냥 미루다 보면 한 달이 훌쩍 지나고,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의 초입이 되어서야 겨우 운동을 재개하게 된다. 그와 같은 전철을 나 역시 무한반복하면서 계절을 나고 있다. 올여름이라고 해서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다만 길었던 장마 이후 사우나를 방불케 하는 산길을 걷는 일이 고되고 힘들었을 뿐이다.


새벽의 등산로에서 마주치는 얼굴은 대개 낯이 익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언제나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만나게 된다. 그들 중 상당수는 나이가 지긋한, 나보다 연배가 높은 분들이다. 그러다 이따금 산길을 달리는 젊은 사람을 보게 될 때가 있다. 산길의 오르막과 내리막을 거침없이 달리는 모습은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 '나도 한때는 저렇게 달렸던 적이 있었는데...' 하는 감상에 젖어드는 것도 잠시 내 곁을 스쳐 달려 나간 사람은 금세 시야에서 사라지고 만다.


"아직 산을 달리는 걸 이상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에게는 '산에서 달리는 게 그리 대단하지 않다'는 것과 '등산만큼 산을 즐기는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다. 이런 의욕이 조금씩 모여 산 달리기 책을 쓰기 시작했다."  (p.11 'prologue' 중에서)


박태외(막시)의 에세이 <산을 달리는 러너>는 달리기를 좋아하는 한 사람의 이야기인 동시에 이름조차 생소한 트레일 러닝에 대한 자세한 소개글이기도 하다. 물론 나로서는 트레일 러닝을 준비하는 사람도 아니고, 트레일 러닝을 꿈꾸지도 않지만 산을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저자의 산과 달리기에 대한 열정을 몸이 아닌 글을 통해서라도 한 번쯤 읽어보고 싶었다는 게 나의 솔직한 소회이다. 비록 속도의 차이는 존재할지언정 산이 좋아서 산길을 걷는 사람과 산길을 달리는 사람 모두 산과 자연에 대한 애정은 결코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샤모니에서 돌아온 후 나는 산이 진심으로 좋아졌다. 달리기가 좋아 산으로 올라간 내가 이젠 산이 좋아 산을 오르는 사람이 된 것이다. 남쪽 제주도부터 북쪽 경기도와 강원도까지 아름다운 산과 길을 걷고 달릴 생각에 설렘이 한껏 차오른다. 예전에는 트랜스 제주나 울주 트레일 나인피크 같은 트레일 러닝 대회를 앞두면 호텔을 찾는 게 당연했지만, 이제는 텐트를 칠 만한 적당한 곳을 찾을 것 같다. 실제로 그렇게 하기는 쉽지 않겠지만 산과 자연의 아름다움이 자석처럼 나를 끌어당긴다."  (p.330)


사실 이 책의 출간 목적은 저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산 달리기에 관심을 갖게 된 모든 이들을 위한 산 달리기 지침서 혹은 안내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책에서는 트레일 러닝에서 쓰는 용어며, 트레일 러닝화, 트레일 폴, 스마트 시계, 러닝 베스트 고르기 등 트레일 러닝에 대한 A to Z가 망라되어 있다. 그런 까닭에 제품의 브랜드와 제품명을 그대로 썼음은 물론 이쪽 분야에서 이름이 난 사람은 실명이나 닉네임을 그대로 쓰기도 했다. 목차만 보더라도 그 의도를 알 수 있다. 1장 '어쩌다 보니 산 달리기', 2장 '여전히 초보입니다만', 3장 'UTMB의 정체', 4장 '도전! UTMB', 5장 '대회는 최고의 훈련', 6장 '드디어 몽블랑'이 그것이다. 저자의 경험을 책에 그대로 옮겨 놓음으로써 산 달리기 입문자의 혼란과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한 목적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산과 달리기가 삶을 더 건강하고 즐겁게 하는 도구가 되길 바란다. 지금은 책으로 만나지만 다음에는 꼭 함께 호흡하며 달릴 수 있기를 바란다. 대회나 산에서 만나 함께 달리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이다."  (p.333 'epilogue' 중에서)


기분 탓일지도 모르지만 입추를 기점으로 대기에 담긴 습도가 많이 약해진 느낌이다. 몸에 척척 감기는 듯한 끈적끈적한 바람이 아니라 그늘에서 맞으면 약간의 시원함이 곁들인 보송보송한 느낌의 바람이 부는 것 같다. 그렇게 계절이 바뀌면 산을 찾는 사람들이 무척이나 많아질 것이다. 그러나 초보 등산객들의 소란과 쓰레기 무단 투기 등은 보는 이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산을 찾는 목적이 언제나 자연을 사랑하고, 자연과 함께 하는 동안 자신의 내면을 살필 수 있는 유익한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산에서는 숲의 나무와 바람과 돌과 나누는 대화가 필요할 뿐 사람과의 대화는 그닥 필요치 않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 자연과 공존하는 방법이며 숲에서 갖추어야 할 예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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