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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코난 도일, 선상 미스터리 단편 컬렉션 - 모든 파도는 비밀을 품고 있다 ㅣ Short Story Collection 1
남궁진 엮음, 아서 코난 도일 원작 / 센텐스 / 2024년 8월
평점 :
몇 해 만인지 모르겠다. 아서 코난 도일의 작품을 다시 읽은 게. 줄잡아 수십 년은 흐르지 않았을까 싶다. 인터넷도 없고 텔레비전 수상기도 지금처럼 흔하지 않았던 시절, 학교가 파한 오후에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놀이는 삼삼오오 모여 딱지치기, 비석치기, 구슬치기, 자치기 등에서 누군가 선택한 그날의 놀이가 전부였고, 그마저도 시큰둥한 날이면 친구네 집 사랑방에 모여 셜록 홈즈 시리즈를 읽거나 괴도 뤼팽을 읽었다. 책이 귀한 시절이었다. 아이들의 손때가 묻은 책은 군데군데 찢겨나갔고, 낡은 옷을 깁듯 흰 종이로 정성스레 이어붙인 페이지도 여러 장이었다. 무료한 시간을 달래려는 듯 아이들은 읽었던 책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누구든 기꺼이 셜로키언(Sherlockian)이나 홈지언(Holmesian)이 되고자 했던 시절. 아이들은 자신의 취향에 따라 셜록 홈즈가 되기도 하고 괴도 뤼팽이 되기도 했다.
"책의 초반부, 선상에서 일어나는 6가지의 미스터리한 이야기들은 홈즈를 떠올리게 하는 듯합니다. 선상에서 벌어지는 기묘한 일들은 계속해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아서 코난 도일은 이에 대한 단서를 조금씩 던져 주며 독자들로 하여금 결과를 추리하게 합니다. 셜록 홈즈가 육지에서의 미스터리였다면 이 책은 해상에서의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각각의 단편마다 새로운 등장인물들이 등장하여 특색 있고 흥미로운 주인공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p.5 '작품 소개' 중에서)
1922년 영국에서 <해적과 푸른 물 이야기>로 출간되었다가 1925년 <샤키 선장의 거래 & 해적 신화>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었다는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번역되었다고 한다. '조셉 하바쿡 제프슨의 성명서'를 비롯하여 '작은 정사각형 상자', '육지의 해적-혼잡한 시간', '폴스타호의 선장', '협력의 끝', '줄무늬 상자', '샤키 선장:셰인트키츠의 총독이 집으로 돌아온 방법', '샤키 선장과 스티븐 크래독의 거래', '샤키 선장의 몰락', 코플리 뱅크스와 샤키 선장의 종말' 등 10편의 단편 추리소설이 담겨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전반부에는 해상에서 벌어지는 6가지의 미스터리한 이야기들이, 후반부에는 전설의 악명 높은 샤키 선장 모험기가 펼쳐진다.
"나는 일지를 계속 쓰지 않을 것이다. 이제 집으로 향하는 길은 명확하고 분명하며, 거대한 얼음 구덩이는 곧 과거의 기억이 될 것이다. 최근 사건으로 인해 겪은 충격을 극복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항해 일지를 시작할 때는 이렇게 끝낼 줄 몰랐다. 나는 이 외로운 선실에서 이 마지막 말들을 쓰고 있다. 나는 죽은 사람의 빠르고 신경질적인 발소리가 내 위에 있는 갑판에서 들리는 듯한 상상을 하고 있다." (p.134 '폴스타호의 선장' 중에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위트레흐트 조약에 의해 마무리되자 대부분의 해적들은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해피 딜리버리'호의 샤키 선장은 달랐다. 총으로 무장한 그는 잔인한 범죄와 무자비한 살인 행각으로 유명했고, 그의 해적 활동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모닝 스타'호의 존 스카로우 선장은 자신의 배에 보물을 싣고 출항 준비를 한다. 그리고 샤키 선장을 피하기 위해 먼 항로를 선택한다. 그는 자신의 배에 생각지도 못한 불청객을 태우게 되는데 그는 다름 아닌 세인트키츠 총독이었다. 그렇게 항해는 시작되었고, 배가 영국 해안에 이르렀을 때 세인트키츠 총독이 바로 변장한 샤키 선장이었음을 알게 되는데...
"내가 그를 마지막으로 봤을 때, 그는 침대에 목이 베인 채로 누워 있었지. 마침 내가 탈옥했을 때, 그가 처음 보는 선장과 함께 유럽을 건너갈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어. (샤키 선장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느 항구에나 있으니까!) 나는 베란다를 통해 그의 방으로 들어가 그에게 진 약간의 빚을 갚았지. 그리고 필요한 물건들을 잔뜩 챙겼어. 물론 너희들의 눈을 속이기 위한 안경과 신발 한 켤레도 말이지. 그리고 배에 타서 총독인 척 행세를 한 거지. 자 네드, 이제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p.189 '샤키 선장:세인트키츠의 총독이 집으로 돌아온 방법' 중에서)
처서를 지나면서 햇살이 겨냥하는 더위의 칼날이 조금 무뎌진 느낌이다. 물론 늦더위의 예봉이 완전히 꺾인 건 아니지만 말이다. 그리고 나는 2024년의 무더위 속에서 셜록 홈즈를 읽던 그때처럼 한 문장 한 문장에 집중하며 읽을 수는 없었지만 다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읽어 내려갔던 건 사실이다. 코난 도일의 문장이 쉽고 평이한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겠으나 추리소설의 특성상 문장과 문장 사이의 호응이 깊고 끈끈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추리소설에 특화된 코난 도일의 감각이 때로는 21세기의 독자인 나에게도 허를 찌르는 구석이 없지 않아서 독서의 재미를 한껏 느끼게 했다. 아서 코난 도일의 작품을 다시 읽은 게 도대체 얼마 만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