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루시 게이하트 ㅣ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32
윌라 캐더 지음, 임슬애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4월
평점 :
비둘기 몇 마리가 낮게 날고 있다. 먹이를 찾아 공원의 이곳저곳을 날아다니는 비둘기. 그 사이로 이제 막 걸음마를 습득한 듯한 아이가 비둘기를 쫓아 뒤뚱뒤뚱 걸음을 옮기고 있다. 잔디밭에 사뿐히 내려앉는 비둘기. 비둘기를 붙잡으려는 듯 한 손을 길게 뻗고 잔디밭으로 향하는 아이의 손을 젊은 엄마가 낚아채고 있다. 아이는 제 뜻에 반하는 엄마의 손길을 뿌리치려 하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다. 아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떼를 쓰는 일이다. 아이는 보도블록이 깔린 인도에 털썩 주저앉는다. 젊은 엄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아이를 들쳐 안는다. 흐린 하늘은 손에 잡힐 듯 낮게 드리웠고, 아이의 관심이 부담스러운 비둘기 떼는 인적이 드문 곳을 향해 가벼운 날갯짓을 한다. 비둘기의 날갯짓 때문인지 시간이 부드럽게 흐른다.
윌라 캐더의 소설 <루시 게이하트>를 읽었던 건 어젯밤, 나는 그때의 감동이 사라지기 전에 곰곰 되새기고 있는 것이다. 사실 한 사람의 이름이 소설의 제목으로 올랐을 때, 소설은 결국 비극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나는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 이후 그 비극의 강도는 점차 약해지고 소멸하여 현대인에게 비극의 서사는 그닥 인기 있는 장르가 아니게 되었거나 비인기 장르로 전락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까닭에 '어디 한번 이 책을 읽어볼까' 하고 가볍게 마음먹는 단계까지도 꽤나 오랜 시일이 걸렸다는 걸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책은 나의 선입견이 별것 아니라는 듯 처음에 들었던 생각을 가볍게 밀어 제친 후 책의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단 한 번도 개입하지 못하게 했다. 책의 두께가 얇았기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깊은 사유가 깃든 문장들이 소설 곳곳을 장식하여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게 했던 것이다.
"루시는 생의 진실을 알게 되었고, 사랑은 그저 말랑말랑한 감정이 아니라 비극의 동력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새카만 물처럼 인간을 집어삼키는 열정을 발견했다. 이 남자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려니 바깥세상이 어둡고 끔찍한 곳인 것만 같았다. 세상이 공포와 위험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이제야 제대로 깨닫게 된 것 같았다." (p.36)
사람은 본디 선천적으로 갖고 태어나는 것, 이를테면 외모, 건강, 부모의 재산 등은 단지 자신의 운에 의해 취득된 것일 뿐 개인의 노력에 의한 정당한 대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다양한 혜택으로 인해 오만해지거나 타인의 노력을 무시하는 등 주변 사람들의 삶을 이해하거나 공감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우리나라 모 재벌의 2세가 소위 '멸콩' 놀이를 하며 재산을 탕진하고 기업 경영을 어렵게 만들었음에도 반성은커녕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이들을 향해 '너나 잘하세요. 별 미친놈 다 보겠네' 하는 말로 대응을 하지 않던가. 이 책의 주인공인 루시 역시 다르지 않다.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명랑하고 예쁜 외모의 루시는 여섯 살 때 엄마를 잃고 12살이나 많은 언니 폴린의 손에서 컸다. 그런 루시를 아빠는 마냥 예뻐만 했던 터라 루시는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그 버릇이 남아 있었다. 생업으로 시계 수리를 하면서 동네 음악대를 지휘하고 클라리넷 교습도 하는 루시의 아버지. 고향을 떠나 시카고에서 피아노를 공부하던 루시는 성악가 서배스천의 보조 피아니스트가 된다. 그것은 어쩌면 아내가 있는 서배스천을 사랑하게 된 루시의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같은 고장에서 성장한 해리 고든의 사랑을 뿌리친 것도, 사랑을 잃고 고향으로 돌아와 젊은 나이에 비참한 최후를 맞는 것도 결국 피할 수 없는 하나의 삶이자 운명이었다.
"열정과 맹렬함, 앞뒤 살피지 않고 하나의 충동에 자신의 온 존재를 오롯이 불태우는 성정, 바로 그것이 그가 루시에게서 발견한 경이였다. 루시는 감정의 불씨가 붙으면 불화살이 되어 끝까지 날아가는 사람이었다. 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든. 세월이 흐르자 그는 마음속 어둠에 익숙해졌다. 다리를 잃은 사람이 의족을 달고 살아가는 삶에 익숙해지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p.227)
정의롭거나 우직한 것은 아니지만 불행으로부터 요리조리 잘도 피해 다니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의 삶을 되짚어 보면 그런 순탄한 삶의 이면에는 위험을 회피하고자 하는 본인의 성향과 자신의 삶에서 누릴 수 있는 적당한 행운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소설 속 주인공 해리 고든의 운명이 그러했다. 루시를 사랑했지만 그 사랑의 결실을 맺기 위해 불행을 향해 돌진하지는 않았다. 루시가 죽고, 그녀의 언니 폴린이 죽고, 시계 수리공이자 해리의 유일한 체스 상대자였던 루시의 아버지마저 죽은 후에야 비로소 해리 자신의 삶이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동경하기를 그만두고 기억하기를 시작하자 삶이 시작되었다."라는 캐더의 유명한 문장처럼 말이다. 해리는 이제 동경을 멈추고 기억하는 삶으로 접어든 것이다. 현실에서 그것은 무력한 듯 보이지만 결코 위험하지 않은, 해리와 같은 사람에게는 꽤나 어울리는 삶의 방편일지도 모른다.
"'고향'이 무엇이겠나, 결국 실망을 겪고 참아내는 법을 배우는 곳 아니겠나? 게이하트 가족이 살던 집을 떠나는 길, 그는 의식하지도 못한 채로 잠시 보도에 멈춰 서서 지금껏 수천 번은 족히 그랬던 것처럼 세 개의 작은 발자국을 바라보았다. 달아나려는 발자국을." (p.236)
비둘기를 쫓던 아이는 보이지 않는다. 아이를 제지하던 젊은 엄마도 보이지 않는다. 비둘기의 날갯짓 때문인지 시간은 부드럽게 흐르고, 흐린 하늘은 여전히 정자세를 고수하고 있다. 공원에는 여전히 산책을 나온 사람들로 붐비고, 주인이 던진 공을 쫓아 강아지 한 마리가 사력을 다해 내달리고 있다. 삶에서 의미를 찾는 일은 공을 쫓아 무작정 잔디밭을 내달리는 저 강아지의 삶보다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비둘기를 잡으려던 아이는 어디로 간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