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서 코난 도일, 선상 미스터리 단편 컬렉션 - 모든 파도는 비밀을 품고 있다 Short Story Collection 1
남궁진 엮음, 아서 코난 도일 원작 / 센텐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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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만인지 모르겠다. 아서 코난 도일의 작품을 다시 읽은 게. 줄잡아 수십 년은 흐르지 않았을까 싶다. 인터넷도 없고 텔레비전 수상기도 지금처럼 흔하지 않았던 시절, 학교가 파한 오후에 아이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놀이는 삼삼오오 모여 딱지치기, 비석치기, 구슬치기, 자치기 등에서 누군가 선택한 그날의 놀이가 전부였고, 그마저도 시큰둥한 날이면 친구네 집 사랑방에 모여 셜록 홈즈 시리즈를 읽거나 괴도 뤼팽을 읽었다. 책이 귀한 시절이었다. 아이들의 손때가 묻은 책은 군데군데 찢겨나갔고, 낡은 옷을 깁듯 흰 종이로 정성스레 이어붙인 페이지도 여러 장이었다. 무료한 시간을 달래려는 듯 아이들은 읽었던 책을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누구든 기꺼이 셜로키언(Sherlockian)이나 홈지언(Holmesian)이 되고자 했던 시절. 아이들은 자신의 취향에 따라 셜록 홈즈가 되기도 하고 괴도 뤼팽이 되기도 했다.


"책의 초반부, 선상에서 일어나는 6가지의 미스터리한 이야기들은 홈즈를 떠올리게 하는 듯합니다. 선상에서 벌어지는 기묘한 일들은 계속해서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고, 아서 코난 도일은 이에 대한 단서를 조금씩 던져 주며 독자들로 하여금 결과를 추리하게 합니다. 셜록 홈즈가 육지에서의 미스터리였다면 이 책은 해상에서의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각각의 단편마다 새로운 등장인물들이 등장하여 특색 있고 흥미로운 주인공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p.5 '작품 소개' 중에서)


1922년 영국에서 <해적과 푸른 물 이야기>로 출간되었다가 1925년 <샤키 선장의 거래 & 해적 신화>라는 제목으로 재출간되었다는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번역되었다고 한다. '조셉 하바쿡 제프슨의 성명서'를 비롯하여 '작은 정사각형 상자', '육지의 해적-혼잡한 시간', '폴스타호의 선장', '협력의 끝', '줄무늬 상자', '샤키 선장:셰인트키츠의 총독이 집으로 돌아온 방법', '샤키 선장과 스티븐 크래독의 거래', '샤키 선장의 몰락', 코플리 뱅크스와 샤키 선장의 종말' 등 10편의 단편 추리소설이 담겨 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전반부에는 해상에서 벌어지는 6가지의 미스터리한 이야기들이, 후반부에는 전설의 악명 높은 샤키 선장 모험기가 펼쳐진다.


"나는 일지를 계속 쓰지 않을 것이다. 이제 집으로 향하는 길은 명확하고 분명하며, 거대한 얼음 구덩이는 곧 과거의 기억이 될 것이다. 최근 사건으로 인해 겪은 충격을 극복하는 데 시간이 걸릴 것이다. 항해 일지를 시작할 때는 이렇게 끝낼 줄 몰랐다. 나는 이 외로운 선실에서 이 마지막 말들을 쓰고 있다. 나는 죽은 사람의 빠르고 신경질적인 발소리가 내 위에 있는 갑판에서 들리는 듯한 상상을 하고 있다."  (p.134 '폴스타호의 선장' 중에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위트레흐트 조약에 의해 마무리되자 대부분의 해적들은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해피 딜리버리'호의 샤키 선장은 달랐다. 총으로 무장한 그는 잔인한 범죄와 무자비한 살인 행각으로 유명했고, 그의 해적 활동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다. '모닝 스타'호의 존 스카로우 선장은 자신의 배에 보물을 싣고 출항 준비를 한다. 그리고 샤키 선장을 피하기 위해 먼 항로를 선택한다. 그는 자신의 배에 생각지도 못한 불청객을 태우게 되는데 그는 다름 아닌 세인트키츠 총독이었다. 그렇게 항해는 시작되었고, 배가 영국 해안에 이르렀을 때 세인트키츠 총독이 바로 변장한 샤키 선장이었음을 알게 되는데...


"내가 그를 마지막으로 봤을 때, 그는 침대에 목이 베인 채로 누워 있었지. 마침 내가 탈옥했을 때, 그가 처음 보는 선장과 함께 유럽을 건너갈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어. (샤키 선장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느 항구에나 있으니까!) 나는 베란다를 통해 그의 방으로 들어가 그에게 진 약간의 빚을 갚았지. 그리고 필요한 물건들을 잔뜩 챙겼어. 물론 너희들의 눈을 속이기 위한 안경과 신발 한 켤레도 말이지. 그리고 배에 타서 총독인 척 행세를 한 거지. 자 네드, 이제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p.189 '샤키 선장:세인트키츠의 총독이 집으로 돌아온 방법' 중에서)


처서를 지나면서 햇살이 겨냥하는 더위의 칼날이 조금 무뎌진 느낌이다. 물론 늦더위의 예봉이 완전히 꺾인 건 아니지만 말이다. 그리고 나는 2024년의 무더위 속에서 셜록 홈즈를 읽던 그때처럼 한 문장 한 문장에 집중하며 읽을 수는 없었지만 다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읽어 내려갔던 건 사실이다. 코난 도일의 문장이 쉽고 평이한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겠으나 추리소설의 특성상 문장과 문장 사이의 호응이 깊고 끈끈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추리소설에 특화된 코난 도일의 감각이 때로는 21세기의 독자인 나에게도 허를 찌르는 구석이 없지 않아서 독서의 재미를 한껏 느끼게 했다. 아서 코난 도일의 작품을 다시 읽은 게 도대체 얼마 만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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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긴 여름을 보내고 있다. '지구 온난화'니 '기후 위기'니 하는 말들은 이제 하도 많이 들어서 오히려 그 느낌이 퇴색한 듯하다. 그런 말들이 마치 구석기 시대 이전부터 전해져 내려온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인간 스스로가 자초한 위기이니 그 고통을 오롯이 견뎌야 하는 것 또한 인간이 되는 게 당연하지만 지구상에 사는 수많은 동식물들이 그 고통을 함께 견디고 있음을 상기할 때, 때로는 다른 누군가에게 큰 죄를 지은 듯한 부끄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에어컨 냉매를 거쳐 나오는 인공의 바람을 한 달 이상 쏘이고 나니 들판 너머로 불어오는 자연의 바람이 문득 그리워진다. 이제는 그 느낌마저 생경하다. 저 숲을 거쳐온 바람이 자연스레 내 몸을 더듬고, 나를 통과한 그 바람이 저 멀리 외로운 누군가의 이마를 짚고 어깨를 토닥인다는 사실이 그저 새삼스럽고 놀랍게 느껴지는 것이다. 날씨와 관련하여 '이열치열(以熱治熱)'이나 '이한치한(以寒治寒)'이라는 말을 달고 살았던 한 달, 그러나 한반도를 달구었던 것은 비단 날씨뿐만이 아니었으니 뉴스가 뉴스를 덮고 이슈가 이슈를 덮는 일이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고 있다.


어쩌면 현 정부의 국정기조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언행불일치(言行不一致)' 또는 '지행불일치(知行不一致)'가 될지도 모르겠다. 말하자면 말 따로 실천 따로인 셈이다. 그럴 수도 있나 싶겠지만 현 정부가 초창기부터 일관되게 유지하는 기조임은 분명하다. 끝없이 '자유'를 주장하면서 압수수색과 고소.고발, 휴대폰 검열을 일상화하고, 끝없이 '공정과 상식'을 주장하면서 임명직 고위 공직자는 모두 혈연, 지연, 학연 등 권력자와 인연의 끈을 유지하는 이들로 채우는 것은 물론 최고 권력자와 인연이 닿은 자는 아무리 큰 범죄를 저질러도 죄를 묻지 않고, '애국'이나 '헌신'을 주장하면서도 일제 강점기의 독립운동가는 모두 테러리스트나 공산주의자로 모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같은 행동을 끝없이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제일 중요한 것이 이념'이라고 한 자가 같은 입으로 '왜 불필요한 이념 논쟁이 벌어지는지, 어떤 국민에게 도움이 되는지 납득하기 어렵다.'라고 말하고 있으니 이를 듣고 있는 국민은 얼마나 황당할 것인가.


친일 반민족 행위자들을 고위 공직에 임명하는 것으로도 모자랐는지 곳곳에 설치되었던 독도 조형물들을 약속이나 한 듯 일거에 제거하고 있다. '헌법을 준수하고 국가를 보위하'여야 할 대통령이 자국의 영토에 대한 수호 의지가 없다면 이를 어찌할 것인가. 소녀상에 대한 테러를 감행하는 자들이 좀비처럼 등장하더니 이제는 국민들의 의식 속에서 독도에 대한 이미지마저 지우려 하고 있다. 일본 천황의 신민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일제강점기로의 회귀를 바라는 미친 자들이 21세기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다. 긴 여름의 끝에는 또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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펭귄 하이웨이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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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가 설정하는 주인공의 인물 됨됨이에 대하여 깊이 생각할 때가 있다. 주인공의 나이며, 성격이며. 외모며 가족 관계, 심지어 주인공이 살고 있는 지역의 기후나 환경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머릿속을 거치지 않고 스스로 창조되었거나 유도된 것은 하나도 없는 까닭에 작가의 의도는 소설 속 각각의 인물에 영향을 미치는 제반 설정에 고스란히 감추어져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소설을 읽는 독자는 소설 속 인물의 작은 변화를 파악하기 위해 혹은 구성원 상호 간의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작가가 구성한 주변 환경에 있어서의 미세한 변화마저 소홀히 다루어서는 안 된다. 물론 평론을 업으로 하지 않는 일반 독자가 이 모든 것을 세밀히 다룬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지만 말이다.


모리미 도미히코의 SF 판타지 소설 <펭귄 하이웨이>는 책의 볼륨에 비해 스토리 전개가 빠르고 구성 자체가 복잡하지 않아 비교적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그러나 인물의 성격이나 배경, 주인공이 관찰하고자 하는 연구 대상(이 책에서는 '바다', '펭귄', '재버워크' 등) 및 주인공과 갈등 관계에 있는 인물들의 변화를 감지하고 기억하면서 책을 읽지 않으면 SF 판타지 소설로서의 이 책에 대한 가치나 재미는 조금쯤 경감되거나 잃게 될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이야기 자체의 재미에 빠져 술술 읽다 보면 각각의 인물이 왜 그와 같은 상황에 처하였는지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순간이 종종 발생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대부분의 독자가 나보다 이해력이 뛰어난 까닭에 그럴 염려는 나만의 기우가 될 수도 있겠지만.


"다른 사람에게 지는 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지만 어제의 나 자신에게 지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하루하루 세계에 대해 배워나가면 나는 어제보다 조금씩 훌륭해진다. 내가 어른이 될 때까지는 아직 긴 시간이 남아 있다. 오늘 계산해보니 내가 스무 살이 될 때까지 3000하고도 888일이 남아 있다. 그러면 나는 3000하고도 888일을 나날이 훌륭해지는 거다. 그날이 왔을 때 내가 얼마나 훌륭해져 있을지는 짐작도 못 하겠다. 너무 훌륭해져서 큰일이 나는 건 아닐까. 모두들 깜짝 놀랄 거다."  (p.10)


인공 이름은 아오야마, 초등학교 4학년의 10살 소년이다. 위에서 인용한 글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아오야마는 애라기보다 애늙은이에 가깝다. 그렇다고 모든 면에서 다 완벽한 것은 아니다. 자신이 낮에 머리를 너무 많이 쓴 탓이라고 항변하지만 9시만 되면 졸음을 참지 못한다. 그리고 치료차 들르는 치과병원의 간호사 누나를 남 몰래 짝사랑하기도 한다. 아오야마의 학구열과 애늙은이 같은 태도를 치과 누나는 귀엽게 봐준다. 아오야마는 모든 것을 관찰하고 휴대하는 노트에 기록한다. 이렇게 기록된 매 순간의 결과는 집에서 다른 노트에다 주제별로 정리한다. 많은 학자들이 그러하듯이. 연구 주제는 '좋아하는 치과 누나'에서부터 '상대성 이론'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그리고 마을에 갑자기 나타난 '펭귄'과 하늘에 돔과 같이 생긴 '바다' 그리고 숲에서 보이는 '재버워크' 등 최근에 아오야마의 관심을 끄는 대상이 갑자기 늘었다. 그리고 어느 날 치과 누나가 콜라 캔을 펭귄으로 변하게 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렇지만 누나가 사람들의 연구 대상이 되는 걸 염려한 아오야마는 이것을 철저히 숨긴다. 학교에서 그와 함게 연구를 하는 단짝 친구 우치다와 체스 소녀 하마모토에게도. 그러나 숲에 돔 모양으로 하늘에 떠 있는 '바다'가 수축과 팽창을 함에 따라 치과 누나의 건강이 달라지는 것을 알게 되는 아오야마. '바다'는 결국 주민들을 위협할 정도로 팽창하게 되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제멋대로이고 어리광쟁이였던 시절, 나도 여동생과 똑같이 소중한 사람들이 모두 언젠가는 죽어 만날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정말 깜짝 놀랐던 적이 있다. 물론 나는 모든 생물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이 나와 관계가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밤, 내가 아무리 운이 좋아도, 내가 아무리 싫어도, 절대로 죽음으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p.300)


단순한 재미를 떠나 이 소설은 얼핏 한 소년의 성장기를 담은 성장 소설이 아닐까 생각하게도 한다. 그러나 아오야마를 해변의 카페에서 수시로 만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치과 누나를 비롯하여 좋은 친구처럼 대하는 아오야마의 아빠에 이르기까지 책은 아이들이 바르고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기성세대가 어떤 태도로 어떤 환경을 조성해 주어야만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한다. 아오야마의 아빠는 엄마라면 금지했을 커피를 아들과 마시고 어른들이나 좋아할 민트가 들어간 초콜릿을 권하는가 하면 연구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조언을 잊지 않는다. '문제를 작은 문제들로 쪼개고, 다른 각도에서 문제들을 바라보고, 닮은 문제를 찾'으라고 권한다. 아오야마는 대상을 '누나'와 '펭귄'으로 나누어 생각하기도 한다.


"그렇고 말고. 세계의 끝은 밖에만 있는 게 아니라고 아버지는 생각한단다. 웜홀도 그렇지 않을까? 너랑 아빠 사이에 있는 이 테이블 위에 실은 웜홀이 이미 출연했을지도 몰라. 그건 정말로 한순간의 일이라서 우리한테 안 보이는 것뿐일 수도 있어."  (P.252~P.253)


책을 읽는 내내 나는 '어른다움이란 무엇일까?' 생각했다. 진정한 어른다움은 아마도 앞에 있는 대화 상대와 같은 눈높이에서 대화하고, 공감하며, 진심을 담아 경청하는 자세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어른이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 주변에 많으면 많을수록 아이는 건강하고 바르게 자랄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 나와는 친구처럼 지내는 아버지뻘의 지인이 나를 만나기 위해 먼 곳에서 찾아왔었다. 그분 말씀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삶을 낭비하지 말고 원하는 것을 하면서 살아. 이제는 자네도 그럴 나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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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매로 보이는 꼬마 둘이 손을 꼭 잡은 채 걷고 있다. 그들 앞에는 엄마인 듯한 여인이 한발 앞서 느린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여름 햇살이 무섭게 쏟아지는 거리. 까무잡잡 살이 탄 두 명의 꼬마는 무표정했다. 겉으로 드러내지는 못하지만 온몸으로 불만을 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잰걸음으로 뒤를 쫓는 아이들을 앞서 걷는 한 여인이 무심한 듯 이따금 뒤를 쳐다본다. 그들이 향하고 있는 곳은 주택가 근처의 도서관. 황금 같은 휴일 오전에 엄마의 설득이나 강요가 없었더라면 초등학생도 되지 않은 아이들이 도서관에 간다는 엄마와 결코 동행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집에서 느긋하게 텔레비전을 보거나, 컴퓨터 게임을 하거나, 여동생을 실컷 놀려먹으면서 휴일 오전의 여유를 만끽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더위는 엄마로 하여금 가장 경제적인 피서 장소를 물색하게 했을 테고, 도서관이야말로 교육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최적의 장소라는 결론에 이르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현실에서 발생하는 대부분의 갈등은 지극히 사소한 일에서 비롯된다는 걸 잘 알면서도 우리는 도처에 널린 지뢰를 아무런 두려움도 없이 밟아대곤 한다. 사소하다는 것은 언제나 무해하거나 큰 위험이 없는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사소함이 보내는 옅은 미소에 우리는 너무도 쉽게 현혹되거나 그 위험성이나 독성을 너무나 쉽게 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소하다는 것은 단 한 번의 실수로 치명적인 위험에 도달하지 않는다는 것일 뿐 시나브로 누적되는 위험으로 인해 더욱 치명적일 수 있다는 사실에서 벗어나지는 않는다. <비폭력 대화>를 쓴 마셜 로젠버그 박사의 다른 책 <상처 주지 않는 대화>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지적 호기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배움을 위해 학교를 찾고, 학교는 규칙과 합의를 통해 배움의 범위에서 전할 수 있는 일정한 틀을 만들어야 합니다. 규칙과 합의 사항을 정할 때는 벌을 주기 위한 권력이 아니라 보호하기 위한 권력을 사용한다는 사상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규칙은 모든 당사자들의 이해관계와 욕구 충족을 지원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다른 사람의 욕구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행동을 할 때가 있기 마련인데,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하면 다른 사람의 욕구를 반영할 수 있을지 함께 논의하고 결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상처 주지 않는 대화' 중에서)


펄펄 끓는 가마솥더위가 연일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 국민을 더욱 짜증 나게 하는 것은 오늘과 같은 더위가 아니다. 여당과 야당, 현 정부와 대한민국 국민 간의 극한 대치야말로 작금의 불볕더위에 참을 수 없는 열기를 더하고 있다. '규칙은 모든 당사자들의 이해관계와 욕구 충족을 지원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는데 현 정부와 여당은 자신들을 지지하는 일부 국민의 욕구 충족을 지원하기 위한 규칙만 내세울 뿐 다수 국민의 욕구는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역대 최장 열대야'를 겪고 있는 우리는 '역대 최장 정부 혐오증'을 함께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모든 더위는 후자에서 비롯되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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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이유 (개정증보판)
김영하 지음 / 복복서가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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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가 적당할 때의 여름은 관능적이다. 그러나 기온이 우리의 임계치를 넘어 조금만 치솟아도 여름의 관능미는 탄탄한 아름다움이 아니라 후줄근하거나 포기하고 싶은 추레함으로 변한다. 관능미와 추레함을 가르는 기온의 범위는 생각보다 넓지 않다. 잘 살고 못 사는 기준의 차이가 그리 멀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매년 여름이면 더위를 피해 여행을 떠나는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끈적끈적한 더위에도 불구하고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품위를 지키기 위해 내가 살고 있는 이곳보다 조금 더 기온이 낮은 곳으로 슬쩍 피난을 가는 것, 그게 여행일지도 모른다.


자주는 아니지만 이따금 어느 작가의 '여행기'를 읽을 때가 있다. 그럴 때 나는 작가가 방문했던 여행지에는 그닥 관심이 없다. 책을 읽고 난 후에 쉽게 잊어버리는 까닭이다. 이름조차 생소한 이국의 지명은 그만큼 나에게 어떠한 감동도 주지 못한다는 걸 의미한다. 그렇다고 작가가 타지에서 경험했던 실수담이나 특별한 경험에 매료되는 것도 아니다. 그 경험이 비단 작가의 여행지에서만 발생해야 할 특별한 이유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그럴 것 같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행기를 도대체 왜 읽는가? 하는 문제만 남는다. 심심풀이 땅콩도 아니고 말이다. 짧은 인생에서, 더구나 읽어야 할 책이 산적해 있는 마당에 그런 허섭스레기(는 아니지만)에 시간과 열정을 소비할 필요는 없는 게 아닌가. 내가 여행기를 읽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나는 지금 작가의 환상을 읽고 있거나 작가가 여행지에서 가져온 여행지의 잔상을 읽고 있구나',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환상이나 잔상이 남아 있지 않은, 이를테면 자신이 방문했던 여행지와 거기서 찍은 사진만 즐비한 여행기를 읽는다는 건 어쩌면 시간 낭비가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일상사가 번다하고 골치 아플수록 여행지의 호텔은 더 큰 만족을 준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그 문제들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 같고 나에게 그 어떤 영향도 주지 못할 것만 같다. 삶이 부과하는 문제가 까다로울수록 나는 여행을 더 갈망했다. 그것은 리셋에 대한 희망이었을 것이다." (p.66)


김영하의 에세이 <여행의 이유>는 우리가 여행을 갈망하는 이유와 우리가 여행지에서 얻게 되는 것들에 대해 압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소설가라는 특수한 직업인으로서 말이다. 집필을 목적으로 떠났던 중국 여행에서 입국 자체가 거부된 채 추방당했던 경험에서 시작되는 이 책은 사람들이 여행을 하는 목적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애초에 품었던 목적이 여행 도중에 발생하는 사건들로 인해 번번이 틀어짐으로써 얻게 되는 또 다른 경험에 대해 들려준다. 여행기가 지닌 이와 같은 기본 구조는 인생의 여정과 흡사하다. 작가는 이런 식으로 여행에 대한 사유를 넓혀간다.


"자아가 지워지고 현재가 그 어느 때보다 커다란 의미로 육박해오는 이러한 초월의 경험은 시간이 충분히 흐른 뒤에야 언어로 기술할 수 있다. 언어로 옮겨진 후에야 비로소 그것은 '생각'이 되어 유통된다. 유통되지 않고 재고로 남은 기억은 창고 깊숙한 곳에 묻혀 잊혀진다. 고대 그리스와 달리 이제는 생각을 들고 몸소 돌아다닐 필요가 없다. 그것은 책으로 묶여 도매상과 서점을 통해 스스로 돌아다닌다." (p.81)


대학을 졸업할 무렵부터 매년, 때로는 한 해에도 여러 번 여행을 떠나는 생활을 20년간 해왔다는 작가는 학창시절에도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말과 풍습이 다른 지역을 마치 방랑하듯, 혹은 여행하듯 지내왔다고 한다. 이처럼 작가의 삶은 긴 여행의 연속선상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여행의 이유는 작가 자신에게는 존재의 이유인 동시에 삶의 이유가 되는 것이다.


"내가 여행을 정말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는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 우리의 현재를 위협하는 이 어두운 두 그림자로부터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하는 동안 우리는 일종의 위기 상황에 처하게 된다. 낯선 곳에서 잘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먹을 곳과 잘 곳을 확보하고 안전을 도모해야 한다. 오직 현재만이 중요하고 의미를 가지게 된다. 스토아학파의 철학자들이 거듭하여 말한 것처럼 미래에 대한 근심과 과거에 대한 후회를 줄이고 현재에 집중할 때, 인간은 흔들림 없는 평온의 상태에 근접한다. 여행은 우리를 오직 현재에만 머물게 하고, 일상의 근심과 후회, 미련으로부터 해방시킨다." (p.109~p.110)


우리가 듣게 되는 흔하디흔한 이야기들은 삶의 변두리로 밀려나게 마련이다. 그러다 특정한 누군가의 생각에 의해 직접적인 삶의 현장으로 다시 불려 오기도 한다. 여행은 이와 같은 우리 생각의 흐름이나 왕래를 막힘 없이 가능케 한다. 생각의 통로를 열어준다는 건 내 삶을 아무런 제약 없이 설계하겠다는 의미가 된다. 작가가 여행에서 '삶이 리셋되는 기분이다'라고 썼던 것과 일맥상통한다.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야 그 시기에 내가 겪은 것이 단순히 게임 과몰입이 아니라 가벼운 우울증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생이 뜻대로 풀리지 않던 시절이면 나는 무엇에든 쉽게 중독되어 자신을 잊기를 바랐다. 뉴욕에서도 그랬을 것이다. 도착하자마자 허리케인을 만났고, (그것 때문은 아니지만)『 검은 꽃』영어판은 출판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별 반응 없이 묻혀버렸다." (p.178)


작가는 알쓸신잡을 촬영하면서 했던 기묘한 여행을 통해 '비(非)여행'과 '탈(脫)여행'을 설명하기도 하고, 소설가로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겪었던 작가 자신의 경험을 통해 '노바디의 여행'을 말하면서 현명한 여행자의 바람직한 태도에 대해 적기도 했다. 작가는 자신이 읽었던 책 속의 한 구절을 인용하거나 어느 여행지에서 겪었던 경험 한 토막을 들려주면서 여행에 대한 독자들의 사유를 돕는다.


"인간은 왜 여행을 꿈꾸는가. 그것은 독자가 왜 매번 새로운 소설을 찾아 읽는가와 비슷한 것이다. 여행은 고되고, 위험하며, 비용도 든다. 가만히 자기 집 소파에 드러누워 감자칩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는 게 돈도 안 들고 안전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안전하고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떠나고 싶어한다. 거기서 우리 몸은 세상을 다시 느끼기 시작하고, 경험들은 연결되고 통합되며, 우리의 정신은 한껏 고양된다. 그렇게 고양된 정신으로 다시 어지러운 일상으로 복귀한다. 아니, 일상을 여행할 힘을 얻게 된다,라고도 말할 수 있다." (p.206)


작가로서 '글쓰기에 대해서는 쓸 기회가 많았지만 여행은 그렇지를 못했'던 까닭에 작가는 꽤 오래전부터 자신이 생각하는 여행에 대해 쓰고 싶었다고 했다. 저마다가 생각하는 여행은 각자 다 다를 수 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생각하는 여행은 특별한 풍경의 감상이 주가 되는 경우가 많다. 남는 건 사진밖에 없다고 말하는 까닭도 그런 이유이다. 그들에게 여행은 단순한 장소의 이동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것은 쉽게 잊히게 마련이고, 다녀온 여행지가 늘어날수록 기억은 혼재되거나 왜곡되기 쉽다. 이와는 다르게 이 보 전진을 위한 도움닫기가 필요한 순간 우리는 종종 여행을 계획하기도 한다. 생각의 통로가 열리는 여행지에서 우리는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기도 하고, 선물처럼 영감을 얻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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