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을 제외한 평일 새벽 5시 30분이면 나는 언제나 산에 오르기 위해 집을 나선다. 오래된 나만의 규칙이다. 시나브로 해가 길어지고는 있지만 그 시각의 바깥은 여전히 어둡다. 어둠이 한창인 그때에도 나는 등산용 랜턴도 없이 산을 오른다. 이따금 등산로에서 마주치는 사람들로부터 '그렇게 랜턴도 없이 걷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느냐?'는 걱정 어린 관심을 받기도 하지만 나는 그럴 때마다 늘 괜찮다며 손사래를 치곤 한다. 사실 내가 오르는 산의 주변에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이후 캄캄한 어둠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이와 같은 이유로 나는 숲에 사는 동식물들에게 내심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다. 그런 마당에 나조차 그들을 놀라게 하거나 잠을 방해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들지 않는 것이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나 역시 헤드 랜턴이나 가벼운 랜턴을 손에 들고 산에 오르곤 했었다. 그러나 아파트 조성 공사가 시작되고, 숲의 절반이 깎여나가는 것으로도 모자라 24시간 내내 빛의 공해에 시달리는 숲 속 생물들을 생각할 때 나는 그들에게 진심을 담아 사과의 말이라도 한마디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내가 등산로에서 이따금 보던 너구리도, 나의 발자국 소리에 놀라 펄쩍 뛰어 달아나던 고라니도, 아침이면 등산객의 발길에 아랑곳하지 않고 먹이를 찾아 나무를 오르내리던 청설모 가족들도, 몇 년에 한 번쯤 볼 수 있었던 서늘한 뱀의 자취도 이제 더는 찾아볼 수 없다. 나는 지금도 그들이 그립다.


내가 초등학생이었던 어린 시절만 하더라도 해만 떨어지면 마을은 온통 암흑천지였다. 그때의 어둠은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호기심과 상상력의 세상이기도 했다. 그리고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겐 모험과 도전의 장이기도 했다. 그러나 어둠이 사라지면서 호기심과 상상력은 급격히 쇠퇴했다. 우리 주변에서 시가 사라진 것도 아마 그 무렵이었을지 모른다. 시는 오롯이 상상력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어둠은 신화 속의 어떤 존재를 떠올리는 모험과 도전의 세계였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우리는 상상과 모험의 세계에서 만난 시어들을 이리 굴리고 저리 굴리면서 한나절 놀 수 있었다. 그러나 어둠이 사라진 요즘, 현실과 리얼리즘만 겨우 살아남았다. 모험과 상상력은 어둠과 함께 사라졌다. 종교에 대한 믿음이 급격히 사라진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라고 나는 어렴풋이 짐작한다.


소설보다 시가 먼저 탄생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우리 주변에 어둠이 존재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상존하는 어둠의 존재는 우리로 하여금 상상력과 모험심을 자극하고, 감성과 낭만을 제공한다. 그러나 어둠의 실종은 곧 편리와 생생한 현실의 세계로 이어졌지만 시의 세계를 잃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빛의 세계를 찬양하는 이들은 더 이상 시를 읽지 않는다. 암흑천지의 어둠은 이제 우리 주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우리가 시를 잃었던 어느 순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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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4-03-12 16: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마지막 문단 완전 감동입니다!

꼼쥐 2024-03-15 16:38   좋아요 0 | URL
이렇게 멋진 칭찬을...
감사합니다.^^
 
당신이 사랑한 예술가
조성준 지음 / 작가정신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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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야든 천재로 기억되는 인물은 늘 있게 마련이다. 과학은 물론 문학이든, 건축이든, 영화든, 음악이든, 심지어 행정이나 관리에 있어서도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능력을 발휘하는 사람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늘 있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지구의 미래를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위기의 순간이면 언제나 우리 앞에 짠 하고 나타나는 슈퍼맨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던 천재들이 당면한 문제를 말끔히 해결해 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절망 속에 있는 우리를 위로하고 용기를 주었던 천재 예술가들의 찬란한 명성 이면에는 언제나 어두운 그림자가 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이 땅에 사는 모든 이의 삶에는 언제나 빛과 어둠이 상존하는 것처럼.


조성준 작가의 저서 <당신이 사랑한 예술가>는 화가, 건축가, 만화가, 가수, 배우, 작곡가, 지휘자, 영화감독 등 대중이 사랑하고 시대를 풍미했던 천재 예술가 25인의 작품 세계와 삶의 이면을 조망한다. 권력에 맞섰던 건축가 김중업에서부터 전면점화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김환기 화백,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 백남준, 우수의 아이콘이었던 재즈 보컬리스트 빌리 홀리데이, 희극 배우의 대명사 로빈 윌리엄스, 패션계의 판도를 바꾼 코코 샤넬, 영화음악의 거장 엔니오 모리코네 등 우리의 귀에도 익숙한 이름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1부 '차별과 편견을 넘다', 2부 '케이지와 굴다처럼', 3부 '누가 스타를 죽였는가', 4부 '캡틴, 마이 캡틴', 5부 '시네마 천국으로 떠난 거장' 등 총 5부로 구성된 이 책은 천재 예술가들의 삶의 이면과 예술을 다룬다.


"추상화 앞에서 관객이 주로 느끼는 감정은 혼란이다. 구체적인 피사체가 없는 추상화는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그런데 많은 관객은 김환기 추상화 앞에서만큼은 어떤 설명을 듣지 않고도 스르르 무장해제된다. 서글픈 푸른색 점들은 관객을 저마다의 추억열차에 태운다. 누군가는 이 푸른 점을 통해 지금 내 나이보다 어렸던 부모의 얼굴을 보고,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버린 사람을 생각한다. 점을 찍었던 화가가 그랬던 것처럼."  (p.132)


<노인과 바다>를 통해 우리에게 잘 알려진 미국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좋은 작가의 조건으로 불우한 유년 시절, 재능, 그리고 훈련이 필요하다."고 했다. 나는 그의 의견에 100% 공감한다. 한 예술가에게 있어 그의 불우한 삶은 예술을 향유하는 일반 대중에게 있어 축복과 같은 것이다. 영혼의 가장 낮은 곳에서부터 가장 높은 곳에 이르기까지 그가 갖는 영혼의 진폭은 모든 이의 그것을 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예술을 사랑하는 그 누구라도 그의 영혼에 젖어들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신이 실제로 겪어본 것을 예술로 표현하는 것과 단지 학습과 상상력만으로 표현하는 것은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비참한 삶을 견디다가 떠난 예술가의 이야기는 흔하다. 피아프 역시 그런 예술가 중 한 명이다. 그의 삶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다. 이 드라마의 장르는 비극이다. 하지만 피아프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세상을 떠나기 3년 전, 1960년. 몸과 마음은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였다. 이때 피아프가 부른 곡이 <아니요, 나는 후회하지 않아요>다. 마지막 남은 영혼 한 방울까지 다 끌어모아 노래를 불렀다. 눈물이 가득한 삶이었지만, 자신은 후회하지 않는다고"  (p.196)


무언가 작정하고 덤벼들었을 때 우리가 이룰 수 있는 성취는 누구나 예측 가능한 뻔한 결과로 마감되곤 한다. 그러나 삶의 밑바닥을 경험한 이의 성과는 이따금 세상을 놀라게 한다. 우리는 그들을 일러 '천재'라고 부르곤 한다. 물론 삶의 밑바닥을 경험했던 이들은 모두 천재가 되는 건 아니다. 천재라고 불릴 만한 성취를 이루는 이는 손으로 꼽을 정도로 그 수가 적다. 그 반대의 경우도 우리는 흔히 목격한다. 자신도 예측하지 못했던 과한 결과로 인해 자신의 나머지 삶을 자신의 성취에 대한 대가로 지불하는 경우 말이다. 혜성처럼 등장하여 대중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사람이 서둘러 생을 마감했던 그와 같은 사례는 책에서도 다루고 있다. 히스 레저와 에이미 와인하우스 그리고 친숙했던 배우 로빈 윌리엄스...


"윌리엄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진지한 영화를 찍으면 안 어울린다며 손가락질을 받았고, 코미디 영화를 찍으면 식상하다며 조롱받았다. 점차 그는 쇠약해졌고, 서서히 잊혔다. 윌리엄스는 2000년대 들어 크고 작은 불행을 연달아 맞았다. 이혼을 겪으며 위자료만으로 어마어마한 돈을 사용했다. 영화도 잘 안 풀렸다. 술에 의존하는 날이 많아졌다. 그는 외톨이처럼 바깥에 나오지 않고 집에 틀어박혀 게임에 몰두했다. 우울증이라는 파도가 덮쳤다. 예순을 겨우 넘긴 나이에 치매라는 비극까지 닥쳤다. 2014년 세상은 그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p.253)


얼마 전에 읽었던 쇼펜하우어 아포리즘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자의식이 결여되었다는 것은 나와 나의 관계가 온전히 성립되지 못했다는 뜻이다. 나와 나의 관계도 온전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온전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이며, 허영이며, 교만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나로 평생을 살 수는 없다. 사람들의 눈높이에 나를 맞추려는 데서 모든 불행이 시작된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나다. 내가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사람들도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라고. 우리가 사랑했던 예술가들의 삶도 크게 다르지 않다. 조성준 작가의 <당신이 사랑한 예술가>를 곁에 두고 이따금 들춰 본다면 나의 삶도 크게 나쁘지 않다는 걸 깨닫지 않을까. 다시 시작되는 한 주, 텅텅 비었던 일상이 차곡차곡 메워지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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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의 무능한 탐정들 두 번째 원고
김혜빈 외 지음 / 사계절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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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공기는 여전히 쌀쌀하지만 연일 꽃소식이 들려오는 걸 보면 봄은 봄이다. 아침에 집을 나서면서 보니 아파트 화단에도 산수유꽃이 새초롬하니 피었다. 계절의 변화에 조금만 주의를 게을리하면 산수유꽃의 개화는 늘 놓치고 만다. 언제였는지도 모르게 슬쩍 피었다가 아무도 모르게 지워지기 때문이다. 대지가 꿈틀대는 이맘때면 나는 '아, 소설을 읽어야지!' 하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설레곤 한다. 봄이 우리에게 급격히 변하는 자연의 풍경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소설은 우리 사회의 변화를 가장 먼저 드러내는 '문학계의 봄'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사계절 출판사에서 발간한 <하지의 무능한 탐정들>은 이 봄에 맞춤처럼 찾아온 소설집이다. 신춘문예 등단작가 5인의 단편소설과 에세이가 각각 한 편씩 실린 이 책은 신예작가의 시선이라는 점도, 소설과 에세이가 동시에 실렸다는 점도 무척이나 신선하다. 마치 이제 막 피어나는 봄처럼 말이다. 먼저 책에 실린 단편소설을 살펴보면 평범한 인간들 속에 소수자로 살고 있는 늑대인간을 그린 '솔리터리 크리처', 사라진 가족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린 '정원사', 한 사람의 죽음과 상실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권능', 추리소설 작가 지망생인 기우와 이혼 소송 중인 탁구 강사 호정을 통해 우리가 맺고 있는 허망한 관계를 바라보게 되는 '하지의 무능한 탐정들', 가까운 사이로 존재하지만 두 사람의 속마음은 두려울 정도로 서로 다른 '이주'가 김혜빈, 김사사, 공형진, 하가람, 신보라 작가가 쓴 단편소설이고 뒤에는 이들 각자의 에세이가 한 편씩 실려 있다.


"호정은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담장 아래 떨어진 살구를 줍는 탐정의 얼굴을. 트렌치코트를 입은 채 열매를 조심스럽게 살피는 모습을. 전날 짓무른 과육에서 느껴지던 미끄덩한 식감과 신맛을 기억하고 있다. 그것을 먹으면 배탈이 날 것이라는 걸 안다. 그러니 그것을 놓아야 한다는 것, 바닥에 떨어뜨리고 짓밟아야 한다는 것까지도. 그러면서도 혀 아래로는 침이 고인다."  (p.129 '하지의 무능한 탐정들' 중에서)


"우리의 약속이 세 가지로 늘었다. 나는 하늘을 보며 이주와 함께 온 세상을 내려다보는 모습을 상상했다. 이주는 매일 하늘을 올려다보니까 우울한 거야, 내려다볼 줄도 알아야지, 하며 중얼거렸다."  (p.158 '이주' 중에서)


각각의 소설은 우리가 알던 틀에서 조금씩 어긋나 삐걱거린다. 새로운 근육을 썼을 때의 어색함처럼 혀에 착착 감기는 익숙함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소설의 소재도, 글을 완성해 가는 방식도 기분 좋은 신선함으로 다가온다.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에게는 파릇파릇 새순이 돋는, 계절의 변화를 실감하는 이 순간처럼 책을 읽는 것이 즐겁고 설렌다. 이들도 언젠가 자신의 문체와 구성 방식에 익숙해져 한 발짝도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순간이 찾아올지도 모르지만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들의 글이 원숙해질지언정 늘 신인의 자세로 새로움을 추구했으면 좋겠다고 바라게 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과 싸우는 일인데. 나는 자주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다가 어쩌면, 아무것이든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다가 내가 쓰고 있는 글 또한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과 아무것이든 상관없다의 반복. 그렇기에 아무것도 없음과 싸우는 일은 아무것이든 상관없음과 싸우는 일과 다를 바가 없지만, 확언할 수 있는 것은 글을 쓰는 일이란 어쨌든 싸우는 일. 승패는 나의 몫이 아니다. 결국에는 '도'와 '든'의 반복."  (p.188~p.189 '신보라의 ''도'와 '든'으로 살기' 중에서)


책에서 선보인 다섯 편의 소설에서 우리는 인간관계의 허상과 파편화된 현대 사회에서 관계 맺기의 어려움을 실감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끝없이 시도하고, 상처를 입고, 회복기를 거쳐 다시 또 도전하기에 이른다. 삶이란 관계와 관계 맺기를 빼면 아무것도 아닌 까닭에. 끊임없이 언덕 위로 바위를 밀어 올리는 '시시포스의 형벌'처럼 우리는 끝없이 관계를 맺고, 상처를 입고 헤어지며, 다시 또 새로운 관계를 맺는다. 우리는 모두 '가야 할 때를 알고 떠나는 이의 뒷모습'을 부러워하는 평범한 소시민인 까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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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이 잘 드는 양지쪽 산비탈에는 어린 묘목의 가녀린 가지 위로 파릇한 새순이 돋고 있었다. 산의 능선을 따라 길게 늘어선 참나무 군락과 각각의 나무를 감싸고 있는 껍질은 굵은 힘줄이 툭툭 불거진 듯 강인한 생명력을 뽐내고 있었고,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풀섶에서 먹이를 찾던 참새떼가 포릉포릉 날았다. 부지런한 딱따구리 한 마리가 죽은 소나무 기둥에 앉아 열심히 나무를 쪼고 있었다. 더없이 푸른 하늘에 덩그러니 걸린 구름 한 조각이 갈 길을 몰라 이리저리 떠돌고 있었다. 바람은 잦아들었지만 영하로 떨어진 아침 기온 탓인지, 아니면 휴일 아침마저 부지런을 떨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는 반발심 때문인지 산을 오르는 등산객은 많지 않았다. 여러 동식물이 공존하는 숲속 풍경은 다채로웠다. 다양성이 공존한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민주주의도 자연을 닮아가야 한다고 나는 오늘 아침 산길을 오르며 생각했다. 다채로운 숲속 풍경을 짙푸른 하늘이 감싸고 있었다.


나는 현 정부의 행태를 생각할 때마다 '서슴없다'라는 단어가 떠오르곤 한다. '서슴거리다'의 사전적 의미는 '말이나 행동을 선뜻 결정하지 못하고 자꾸 머뭇거리며 망설이다.'이다. 그러므로 '서슴없다'는 '말이나 행동에 망설임이나 거침이 없다.'는 의미가 된다. <마음 사전>을 썼던 김소연 시인은 자신의 다른 저서 <시옷의 세계>에서 '서슴거림의 기록'이라는 소제목에 '침묵 단상'이라는 제하를 달았던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침묵이라는 것은 내가 행할 때는 가장 신중한 방패지만 타자가 행할 때는 가장 뾰족한 창일 수 있다. 나의 침묵은 방패처럼 나를 방어해주지만, 너의 침묵은 뾰족한 창처럼 나를 찌를 수 있다."  (p.70 '시옷의 세계' 중에서)

"침묵 자체가 아니라, 침묵하는 인간의 태도에 대해 내 입장이 바뀌게 된 이야기를 쓴 것이기 때문에 서슴거림이란 말이 필요했던 거 같아요. 나는 '서슴거리다'는 말을 참 좋아해요. 망설임이나 흔들림 하고도 다른, 어떤 이상한 신중함 같은 게 느껴져요. 전 말도 되게 서슴거리면서 하고, 성격도 서슴거려요. 그런 모든 것들 때문에 종국엔 입을 다물고, 글을 쓰는 거겠지요."


어느 조직에서나 최종 결정권자는 말과 행동 모두에 있어 신중해야 한다. 말하자면 매사에 서슴거려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현 정부는 매사에 서슴이 없다. 최종 결정권자의 결정은 돌이킬 수 없는 까닭에 서슴이 없다는 것은 곧 파국을 의미한다. 그것은 개개인이 행하는 경솔함이나 사사로움과는 다르다. 하루가 다르게 물가가 치솟고 합계출산율 0.7이라는 극단의 시대로 가는 요즘, 다양성을 말살하기 위해 모든 언론에 재갈을 물리고 주요 피의자를 호주로 빼돌리는 이런 서슴없는 결정은 모두 대통령실에서 재가된 것이 아닌가. 과거 호주는 범죄자들의 유배지로 선택된 나라였고 그렇게 만들어진 국가이지만, 지금 대한민국의 범죄자들을 호주로 보낸다는 건 호주 국민들이 그리 달갑게 생각하지는 않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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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3-13 07: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슴거리다... 침묵...!
좋아요~♡
배워갑니다.

꼼쥐 2024-03-15 16:40   좋아요 1 | URL
김소연 시인의 저작 ‘마음 사전‘을 읽어보면 서슴거리는 시인의 성격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 같아요. 어쩌면 그렇게 단어의 적확한 의미와 쓰임을 세밀하게 표현할 수 있는지...
 
가기 전에 쓰는 글들 - 허수경 유고집
허수경 지음 / 난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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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앞둔 사람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 나는 이따금 답도 알 수 없는 이 질문을 붙잡고 하염없는 상념에 빠져들곤 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의 글을 줄기차게 읽어왔다. <오늘 내가 살아갈 이유>를 썼던 위지안 교수, <숨결이 바람 될 때>를 썼던 신경외과 의사 폴 칼라니티,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의 주인공이었던 모리 교수 등 여러 책을 전전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답은 찾지 못했다. 아니, 찾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어쩌면 이승과 저승의 법도가 서로 다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승의 이 편에 있는 내가 저승으로 향하는 저 사람들의 메아리를 내가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그 진의를 어찌 해석할 수 있을까.


"불안은 자꾸 잠을 잘라둔다.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어느날 긴 밧줄 같은 잠에 묶여 불안이 나오지 못할 만큼 자야겠다."  (p.275)


무위의 질문에 사로잡힌 나는 또 허수경 시인의 유고 산문집 <가기 전에 쓰는 글들>을 읽었다. 바람을 움키듯 나는 결국 헛힘만 쓰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내가 마주하는 질문은 언제나 진한 향기로 유혹한다. 죽음이 멀지 않았다는 엄연한 사실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을 들을 수 있는, 생명 연장에 대한 유혹을 내려놓은 자만이 들을 수 있는 간절함의 시간일 테니까. 나는 삶의 이쪽 편에 서서 웅웅 바람결에 메아리로 들리는 그 소리를 듣기 위해 허사로 귀결되는 무용의 독서를 이어간다.


"나는 귤을 쪼갰다.

귤 향!

세계의 모든 향기를 이 작은 몸 안에 담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살아오면서 맡았던 모든 향기가 밀려왔다.

아름다운, 따뜻한, 비린, 차가운, 쓴, 찬, 그리고,

그리고, 그 모든 향기.

아,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가기 전에 나는

써야 하는 시들이 몇 편 있었던 것이다."  (p.307~p.308)


생의 마지막 항암치료를 앞두고 김민정 시인에게 썼다는 허 시인의 편지. 쓰고 있는 작은 시집이 있는데 내달라는 내용과 함께 원고는 메일로 보낼 테니 오지 말라는 당부. "너를 보면 겨우 참았던 미련들이 다시 무장무장 일어날 것 같아. 시인이니 시로 이 세계를 가름하는 걸 내 업으로 여기며 살아왔으니 마지막에도 그러려고 한다."는 허 시인의 편지. 책을 읽는 우리는 그저 먹먹한 슬픔만 한 줌 손에 쥘 뿐 정작 찾고자 하는 질문의 답은 그 어느 곳에서도 발견하지 못한다. 삶과 죽음 사이의 넓은 행간은 내가 레테의 강을 건널 쪽배를 타는 순간에나 읽을 수 있으려나.


"글을 참 맛깔나게 쓰는 사람들이 있다. 대부분 옆에서 조곤조곤 말하듯 쓰는 사람들이다. 옆에서 누군가가 이야기를 들려준다. 부담스럽지 않고 누구나 알 수 있는 말로. 부럽다는 생각. 허세가 전혀 들어 있지 않은, 자신이 다치지도 타인을 다치게 하지도 않는 글. 그런데...... 글은 그것뿐인가?"  (p.230~p.231)


'글을 참 맛깔나게 쓰던' 허수경 시인. 다정함은 인간의 체온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더이상 우리는 시인이 보내는 다정한 인사를 기대할 수 없다. 나는 다만 내가 기억하는 시인을 향해 내 다정한 인사를 건넨다. 최선을 다한 다정함의 끝에는 울컥울컥 무른 슬픔이 묻어나겠지만 봄바람이 부는 소슬한 오후를 내 다정함의 온기로 덥혀 보려 한다. 주말이고, 만나는 사람마다 조금 더 다정해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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