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임 소설, 향
조경란 지음 / 작가정신 / 202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중편소설 <움직임>에서 작가 조경란이 그리고자 했던 가족은 소설 속 주인공인 '나'(신이경)가 가꾸던 작은 화단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런 힘이 없는 까닭에 주변의 어떤 이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 가족. '담배꽁초와 빵봉지들'이 쌓인 척박한 환경이지만 거름을 주고 잘만 돌보면 언젠가 분꽃, 채송화처럼 아름답게 피어날 것이라는 기대만 가득했던 가족. 그러나 시름시름 앓던 엄마를 잃고 외할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억지로 새로 꾸린 가족은 '가족'이라기보다는 혈연관계라는 외피를 두른 '이상한 동물원'에 가까웠다.


"이 목욕탕집에 처음 왔을 때 내게 유일하게 위안이 됐던 건 이 화단뿐이었다. 사과 궤짝만 한 작은 화단에는 담배꽁초와 빵봉지들이 널려 있다. 나는 매일매일 화단에 물을 주고 쓰레기들을 골라낸다. 지금은 분꽃, 채송화가 한창이다. 곧 봉숭아도 몽우리를 터뜨릴 것 같다."  (p.19)


완전한 성년도 미성년도 아닌 스무 살의 '나'는 목욕탕집 일 층의 단칸 셋방의 가족 구성원으로 편입한다. 일 층에는 여섯 가구가 세 들어 살고 있고, 이 층은 목욕탕, 삼 층은 안마시술소가 운영되고 있다. 다락방이 있는 외갓집에는 결혼도 하지 않은 외삼촌과 이모, 외할아버지가 함께 산다. 늑막염을 앓고 있는 외삼촌은 매일 한 움큼의 알약을 털어 넣고, 밤마다 흉몽에 시달리는 이모는 깊이 잠들지 못한다. '나'는 허허벌판의 벽돌공장에서 블록벽돌을 만드는 외삼촌과 외할아버지를 위해 도시락을 싸고,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한다. 농협에서 하루 종일 돈을 세고 퇴근하는 이모는 책상도 없는 단칸방에 엎드려 새벽까지 외국어 공부를 하고, 지긋지긋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내가 산책을 다녔던 샛강과 할아버지의 벽돌공장, 문득문득 마주치곤 했던 장님들과 삼촌의 여자, 그리고 다락방이 있던 어두운 집과 남자의 방이 떠오른다. 그 밖에 더 이상 기억할 게 없다. 기억할 게 많은 사람들은 떠나지 못하는 법이다. 나는 그 모든 것들을 툭툭 털어내버린다."  (p.85)


딱히 할 일을 찾지 못했던 '나'는 무료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화단을 가꾸고, 기차역을 서성이기도 하고, 앞방 남자를 기웃거리기도 한다. 나처럼 우편물이 오지 않는 앞방 남자는 가느다란 안전줄에 매달려 유리창을 닦는다. 남자 방의 열쇠 하나를 훔친 '나'는 남자가 없는 방에서 이불에 밴 남자의 체취를 맡기도 하고, 3개월이나 밀린 방세 중 한 달치를 남자 몰래 대신 내주기도 한다. 책상을 사기 위해 이모의 지갑에서 몰래 빼돌려 오랫동안 모았던 돈이었다.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나를 위해 검정고시 교재를 사다 주었던 이모는 어느 날 회사 근처로 나를 불러 점심으로 냉면을 사주었다. 그리고 아무런 말도 없이 집을 나갔다. 농협에 맡긴 고객의 돈을 들고 앞방 남자와 함께.


"서랍에서 검정고시 학습지를 꺼내 읽다 보면 또 시간이 갔다. 꽃들은 다 어디로 날아가버렸는지 한 포기도 보이지 않는다. 작고 까만 씨앗들도 떨어져 있지 않다. 아전부터 쓰레기통이었던 것처럼 담배꽁초며 과일 껍질들만 쌓여 있다. 모종삽으로 화단 흙을 쑤석거린다. 잔돌멩이가 많고 시멘트 조각들이 박혀 있다. 이 거친 흙을 뚫고 한때 꽃들이 피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지경이다. 묵묵히 흙을 파헤친다. 삼촌의 오줌이라도 몰래 뿌리고 싶다. 거름이 필요할 것이다. 내년 봄에도 나는 이 작은 화단에 꽃씨를 뿌리고 있을까."  (p.98)


<움직임>에서 작가 조경란의 문체는 사뭇 건조하다. 건조하고 짧은 문장들이 흩어지는 모래알처럼, 같은 혈연이지만 함께 섞일 줄 몰랐던 외갓집 식구들처럼 내내 서걱거린다. 그럼에도 작가는 소설 속 주인공인 '나'를 통하여, 내가 가꾸는 작은 화단을 통하여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가족이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척박한 환경에서 자란 까닭에 서로를 사랑하는 방법도, 상대방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방법도 배우지 못했지만, 때가 되면 그들 모두가 저마다의 꽃을 피울 것이라고 강하게 믿고 응원하는 관계. 아카시아 꽃잎이 하얗게 쏟아지는 5월. 꽃잎을 떨군 아까시나무는 제 소임을 다한 듯 제법 원숙하기만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속담은 어느 정도 사실인 듯싶다. 결혼과 동시에 외국에서 타향살이를 시작한 여동생은 뉴욕에 정착하여 지금은 가족 전체가 미국인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인지 얼굴을 맞대고 만나는 것은 고사하고 시간을 맞춰 전화 통화를 하는 일조차 행사 아닌 행사가 된 지 오래다. 우리나라와 13시간의 시차가 나는 까닭에 내일 하지, 내일 하지 하면서 차일피일 미루다 보면 서로의 목소리도 듣지 못한 채 한두 달이 훌쩍 지날 때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날짜를 세다 보면 왠지 미안한 마음이 절로 들기도 하고, 타지에서 종종걸음을 칠 여동생이 눈에 밟히는 것이다. 그럴라치면 나는 서둘러 전화를 하곤 한다. 그리고 그곳 사정도 모른 채 대화는 시간을 넘겨 길게 이어지곤 한다.


어제의 전화 통화도 다르지 않았다. 한 번 시작된 통화는 여동생과 가족 전체를 돌아 다시 여동생에게로 되돌아갔을 때 비로소 끝이 나게 마련인데, 어제는 재작년에 대학생이 된 여동생의 큰딸(나에게는 조카)과의 통화가 길게 이어지는 바람에 결국 인사를 대신 전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조카 선에서 끝을 맺고 말았다. 한국어가 서툰 조카는 빠른 영어로 쉼 없이 떠들었고, 나는 잘 들리지도 않는 발음을 알아듣느라 진땀을 흘려야만 했다. 그 발단은 사실 미국 내 대학가에서 주목을 받고 있는 팔레스타인 지지 시위에 관한 것이었다. 조카 역시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학살하는 이스라엘 시오니스트의 만행을 강력히 규탄하며 팔레스타인 주민의 생존권을 위해 연대하겠다고 밝혔다. 학살을 주도하는 이스라엘 정치인과 이를 지원하는 미국 정치인의 행보에 분개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그녀의 외삼촌으로서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사법적 처벌이나 불이익이 염려되는 게 사실이었지만 기성인으로서 차마 그런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제노사이드에 가까운 만행을 보면서도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우리나라 대학생의 현실이 부끄러움을 넘어 수치스럽게 느껴졌다.


사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연대하려는 움직임, 즉 동정심은 인간만이 갖는 감정이다. 이것은 혹시 나에게도 있을지 모르는 미래의 불행에 대한 일종의 보험이다. 나에게 비슷한 불행이 찾아왔을 때 그들 역시 나를 위해 싸워줄 것이라는 강력한 믿음, 그것이 없다면 인간의 동정심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어찌 보면 지극히 이타적인 행동인 듯한 동정심과 연대가 그 저변을 살펴보면 지극히 사소하면서도 이기적인 충동이 깔려 있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결코 나쁘지 않다고 본다. 집단생활을 이어가야 하는 인간이 죽을 때까지 지켜야 하는 올바른 태도이기도 하고. 그렇다면 이와 같은 연대에서 멀어진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은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 어느 나라에 도움을 요청해야 할까. 어쩌면 우리의 젊은이들은 각자도생에 너무나 익숙해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개인의 불행에 누구 한 사람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런 가능성조차 내가 기대할 수 없다면 불안으로 점철된 미래를 어찌 견딜 수 있을까. 내가 조카와의 통화를 마친 후 먼 나라의 대학생이 부러웠던 건 그런 까닭이었다.


오늘은 어린이날. 밖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가까운 곳의 중학교 빈 운동장에는 우산을 쓴 몇몇의 사람들이 운동장을 하릴없이 돌고 있다. 가장자리를 따라 길게 늘어선 벚나무는 가지치기를 했는지 깡똥한 우듬지가 마치 상고머리를 한 중학교 신입생처럼 어색하기만 하다. 잘려 나간 가지들이 운동장 한 켠에서 우두커니 비를 맞고 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나와같다면 2024-05-05 22: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언젠가 청소노동자에 학습권이 침해되고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소송을 낸 대학생 모습을 보며 암담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게 그들이 생각하는 공정 일까요?

요즘 대학생들 보면 하다못해 ‘반값 등록금‘ 시행 하라는 요구라도 하던가,

본인도 군대에 갈텐데 또래 채상병의 죽음에 대해서도 침묵하는지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왜 사회 문제에 대해서 의견을 내놓지 않는걸까요?

나에게 비슷한 불행이 찾아왔을 때 그들 역시 나를 위해 싸워즐 것이라는 강력한 믿음

제가 아픔에 눈을 감지 않는 이유입니다

꼼쥐 2024-05-08 18:51   좋아요 2 | URL
먹고사는 문제가 무엇보다 절실한 그들에게 그외의 다른 문제는 아마도 개똥철학쯤으로 여겨질지도 모르죠. 언론과 보수 여당은 젊은이들을 그런 쪽으로 끝없이 몰고가고... 말하자면 공부만 많이 한 개,돼지로 만드는 게 보수여당의 목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삶을 잘 가꾸어가고자 하는 욕심이 있는 사람에게 인간보다 더 좋은 텍스트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소설은 인간 군상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 결과물이자 완벽한 논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만 독자의 관심을 최대치로 끌어모으기 위해 그 얼개를 교묘하게 편집했을 뿐이다. 말하자면 문학적 수사를 제거하고 기승전결의 구성에 맞춰 재편집한다면 소설은 그저 한 편의 논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게 된다. 물론 소설에 따라 등장하는 인물이나 주제가 제각각 다르겠지만 말이다.


정해연 작가의 소설 <용의자들>을 읽으며 문득 들었던 생각이다. 웬만한 독자라면 다 아는 것처럼 2013년 소설 <더블>로 데뷔한 정해연 작가는 대한민국에서 몇 안 되는 추리소설 작가 중 한 사람이다. 인간 내면의 아름다운 측면을 탐구하기보다는 악하거나 추한 측면을 파헤치는 추리소설에 대한 선호도나 인기가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현저히 떨어지는 게 사실이다. 일부 마니아층을 제외하면 일반 독자의 수요를 찾아보기 힘든 게 사실이니까. 그러나 우리가 어렸을 때 열광했던 '명탐정 셜록 홈스'나 '괴도 뤼팽', 그리고 '애거서 크리스티 시리즈' 등을 돌이켜 생각해볼 때 우리의 내면에는 인간에 대한 강한 호기심이 시대에 상관없이 계속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반증하듯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정유정 작가, 박하익 작가, 송시우 작가, 강지영 작가 등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정해연 작가의 신작 <용의자들> 역시 살해된 여고생 현유정의 주변 인물들을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된다. 소설의 단락을 나누는 소제목이 각각의 인물로 정해졌다는 게 이색적이다. 한수연, 민혜옥, 현강수, 김근미... 각각의 인물이 잔인하게 살해된 유정 학생과의 연관성이나 살해 시점을 전후하여 그들이 취했던 행동이나 생각들이 어쩌면 이렇게 다를 수 있는지...


일요일인 어린이날을 대체하는 월요일의 대체 공휴일을 포함한 3일간의 연휴가 시작되는 첫날. 올해 한여름의 더위를 미리 경고라도 하려는 듯 벌써부터 한낮 기온이 여름을 방불케 한다. 그럼에도 인도를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제각각 다르다. 저들은 과연 어떤 고민을 품고,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일까. 추리소설을 읽을 때면 소설 속 인물들의 작은 몸짓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기억하는 것처럼 소설의 잔상이 현실에서도 한동안 이어지곤 한다. 매년 여름이면 사람들이 추리소설에 열광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현실과 소설을 오가며 각각의 인물들을 탐구하다 보면 참을 수 없던 더위도 쉽게 잊혀지기 때문이다. 정해연의 소설 <용의자들>이 출간 전부터 기대되는 까닭도 예년보다 일찍 찾아온 더위 때문이라고 나는 핑계 아닌 핑계를 대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새벽 등산로는 적당히 부드러웠다. 간밤에 내렸던 비로 길가에 쌓인 낙엽더미에선 구수한 숭늉 냄새가 피어올랐고, 뽀얗게 송홧가루를 뒤집어쓴 떡갈나무 이파리는 비에 씻겨 마치 노란 립스틱을 바른 듯 가장자리에 노란 테를 두르고 있었다. 까치를 비롯한 새들의 울음소리가 더욱 선명하게 들렸다. 가슴 깊숙이 스미는 아카시아 꽃 향기. 청량한 아카시아 향기가 잠에 취해 느른하던 몸을 단단히 붙잡았다. 아카시아 꽃은 날씨에 따라 이따금 가슴을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향기를 내뿜기도 하고, 때로는 누이의 손길처럼 부드러운 향기로 주변의 사람들을 다독이기도 한다.


영영 열릴 것 같지 않던 영수회담이 어제 있었다. 비공개 회담에서는 어떤 말이 오고갔는지 알 수 없지만, 모두발언만 놓고 본다면 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발언이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의 발언을 비교할 때 두 사람의 역할이 완전히 뒤바뀐 듯하여 씁쓸하기만 했다. 이 나라와 국민을 걱정하는 차원에서 누가 대통령이고 누가 야당의 대표인지 종잡을 수 없었던 상황. 전날 먹었던 술이 덜 깼는지 대통령은 눈만 껌벅껌벅 졸린 듯했고, 옆에 배석한 사람들만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듯했다. 앞으로 3년이나 남았는데 걱정도 이만저만한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인생에서 너무 일찍 인정을 받은 사람들은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려보면 자기 자신을 크게 놓쳐버린 느낌을 받는 그런 삶을 살게 되지요. 이것과 조금 다른 방향의 욕구도 위험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바로 마땅히 있어야 할 타인으로부터의 인정이 없어 마음이 상하는 경우지요. 이것이 인정의 부재를 넘어 무시와 모멸이 되면, 마음에 상처를 입히는 것에 그치지 않고 파괴적인 힘을 발휘합니다." (p.35)


페터 비에리가 쓴 <자기 결정>은 무척이나 얇은 책이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페터 비에리라고 하면 모르는 이들도 많을 테지만 그가 소설을 쓸 때 사용하는 필명 '파스칼 메르시어'는 다들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유명한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작가이니 말이다. 하이델베르크 대학 철학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작가는 사실 그의 저서 <자기 결정>이나 <삶의 격>과 같은 철학서에서 더 빛을 발한다.


"문학적 글쓰기는 말에게 그것이 가진 원래의 의미와 시적 힘을 되돌려주려는 노력입니다."

"자신의 목소리와 자신의 울림을 발견하는 것은 우리를 변화시키는 사건이지요. 즉 우리 안에서 잘못된 울림을 내는 것을 추방하고 새로운 말과 새로운 리듬을 시도해보는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하나의 소설을 끝내고 난 작가는 전과는 다른 사람입니다." (p.30)


우리는 이따금 자신이 지금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상대방의 말을 듣고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이를 만나기도 한다. 어제 대통령의 얼빠진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하는 말은 아니다. <자기 결정>에서 페터 비에리는 자기 인식의 중요성을 끝없이 강조한다. 본인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미처 인식하지 못하는데 자기 자신을 인식한다는 건 어쩌면 영원히 닿을 수 없는 먼 세상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 총총 시리즈
황선우.김혼비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언제나 가까운 미래를 염두에 둔 채 살아간다. 시간에 대한 거리감이 없는 우리로서는 가까운 미래를 곧 닥칠 현재로, 비교적 먼 미래는 영원히 오지 않을 가상의 세계쯤으로 인식하는 게 다반사이다. 그런 까닭에 오롯이 현재에 머물지 못하는 것은 물론 가까운 미래가 현재인 양 인식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모든 이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딱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다. 비교적 먼 미래로 인식되는 젊은이들도, 아주 가까운 미래로 생각해야 마땅한 노인들에게도 '죽음'은 언제나 가까운 미래이면서 또한 영원히 도래하지 않을 듯한 까마득히 먼 미래인 것이다. 그래서 죽음은 늘 우리 곁에 있으면서 실재하지 않는 어떤 것이 되고 만다. 죽을 만큼 힘들 때도, 죽지 못해 살아갈 때도, 이별 후 죽고 싶었던 어느 젊은 날에도, 죽을 만큼 심심했던 어느 휴일 오후에도 '죽음'은 가깝고도 먼 미래였다. 그야말로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어서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 바로 '죽음'인 것이다.


"『빅토리 노트』에서 이옥선 작가님은 노자의 사상을 인용해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고 경고했습니다. 다 같이 잘 사는 사회를 위해서는 지나친 열심과 부지런을 금지하고 대신 한 템포씩 느리게 가자고 이야기합니다. 저보다 한참 오래 산 선배가 조금 느긋해도 된다고 얘기해주는 게 참 마음이 놓여요."  (p.35)


김혼비 작가와 황선우 작가 사이에 오고 간 편지를 모아 묶은 서간에세이 <최선을 다하면 죽는다>는 우리에게 잊혀진 아날로그 감성을 일깨우는 책이다. 지금은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편지. SNS의 즉각적인 문자 메시지가 일반화된 작금의 현실에서 누군가를 떠올리며 한 자 한 자 편지를 쓰고, 답장을 기다린다는 건 꽤나 답답하고 지루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사라진 라디오 드라마가 그렇듯 소리만으로 극 중 인물과 상황을 떠올리며 상상의 세계에 빠져드는 것처럼 편지지를 수놓은 빼곡한 글씨를 통해 상대방의 얼굴과 감정을 상상하고 느낌을 공유할 수 있다는 건 무척이나 가슴 설레는 일이다. 물론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그 느낌을 알 수 없겠지만 말이다. 그러므로 편지를 쓴다는 건 현재에 안주하지 못하고 오직 미래를 향해 달리려고 하는 현대인의 불치병, 조급증을 치료하는 데 꽤 효과적인 방법으로 쓰일지도 모른다.


"몇 달을, 특히 여름을 번아웃 상태로 통과하면서 번아웃은 그 자체로도 문제지만, 번아웃이 일 효율을 깡그리 앗아가는 통에 한 번 붙든 일이 끝나질 않아 마음놓고 놀거나 쉴 시간까지 사라지는 게 가장 문제라는 걸 알게 되었어요. 휴식과 저 사이에 연결되어 있는 다리마저 불태워 없애버리는 게 번아웃이더군요."  (P.63)


책의 제목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두 사람 사이에 오가던 편지에는 남에게 내보이지 못했던 자신의 고민이 조심스레 내비치기 시작했고, 세상 사람들이 김혼비 작가에게 늘 작가와 직장인으로서의 삶을 어쩌면 그렇게 현명하게 잘 적응하느냐 묻지만, 실은 그렇지 못하다고, 오래전부터 번아웃에 시달려왔음을 편지에 쓰게 된다. 선우씨, 혼비씨 하는 상대방을 부르는 호칭조차 어색하기 짝이 없었던 두 사람이 자신에게 있는 내밀한 이야기를 서로에게 스스럼없이 내보일 수 있는 단계까지 나아갈 수 있었던 건 아마도 편지가 갖는 기본적인 속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상대방을 생각하며 단어 하나에도 온 신경을 집중하기도 하지만, 답장을 기다리며 어떤 내용의 편지를 받게 될지 머릿속에서 수없이 많은 이야기들이 쓰고 지워지는 경험을 겪게 되는 동안 속절없는 기다림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우리들 각자는 스스로 깨우치게 된다. 더불어 편지란 서로 주고받는 것이지 자신의 편지를 통해 상대방을 이겨먹거나 으스대기 위한 도구로 쓰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게 된다.


"혼비씨,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이 아니라 꺾이지 않는 몸이었어요. 제가 계속 내일을 기대하며 낙관적으로 살아온 건 대단히 의지가 강한 인간이어서가 아니라 꺾이지 않는 식욕 덕분이었던 거죠. 제 태도나 생각이 개방적이었다면, 많은 부분은 활짝 열린 혀와 위장으로 세상과 만나겠다는 자세에서 왔을 거예요."  (p.175)


단순한 에세이를 통하여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는 것과 편지라는 특별한 양식을 통해 다정한 이에게 상담하듯 조금씩 조금씩 털어놓는 것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존재한다. 아무것도 아닌 듯하지만 편지라는 특별한 형식은 읽는 이로 하여금 과거의 특별한 기억마저 함께 소환하는 까닭에 텍스트에 담긴 의미에 더하여 독자의 경험과 그때의 감정까지 함께 느끼도록 하는 효과를 준다. 특히 인터넷이 없던 아날로그 시대를 살았던 세대에게는 그 시절의 향수를 강하게 느끼게 한다. 더구나 글을 쓰는 일이 본업인 작가에게 있어 편지란 얼마나 유용한 도구이며 얼마나 되찾고 싶은 감성일지...


"더 놀라운 것은 초반에는 (목탁이 필요할 정도로) 조금 헤맸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점 편지 쓰는 일이 정말 즐거워졌다는 것이다. 이래서 편지를 쓰는구나. 다들 이런 마음으로 썼겠구나. 편지를 쓴다는 것은, 쓰는 동안만이 아니라 쓰기로 마음먹은 그 순간부터 편지를 받을 상대방을 계속 생각하게 되는 일이라는 걸 이번에(이제서야!) 알았고, 떠올릴 때마다 웃음과 기운이 나는 사람을 자주 생각하는 게 얼마나 삶을 즐거운 방향으로 이끄는지를 새삼 온 마음으로 느낀 1년 남짓의 여정이었다."  (p.216)


4월도 다 가고 만 지금은 이팝나무의 계절. 순쌀밥(이밥)처럼 흰 꽃들이 풍성하게 피고, 우리는 이 계절에 배달된 배불렀던 기억들을 꽃잎에 적힌 사연인 양 읽고 또 읽는 것이다. 봄마다 피는 꽃은 지난 기억들을 담은 한 통의 편지. 우리는 그 편지를 사진에 담고 다음에 올 봄을 기다리며 또 한 해를 견딘다. 꽃잎에 담긴 기억의 편지 한 통을 우리는 내년 봄의 자신에게 아쉬운 마음을 담아 부친다. 4월이 가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