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원의 글쓰기 비법 108가지
한승원 지음 / 푸르메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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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견임을 전제로 할 때 "글쓰기는 자신만의 세상을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는 일"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이 세상에 태어난 각각의 사람들은 저마다 지구별의 작은 귀퉁이에 터를 잡고 오직 자신의 세상을 다듬고 가꾸다 세상을 떠난다.  그 한 사람의 존재가 있음으로써 또 하나의 세상이 더해지는 것이다.  이 숭고한 일에 동참했던 수많은 인류가 자신의 시행착오와 공과를 글로 옮겨 적음으로써 우리는 서로 각자이면서 동시에 시공간을 떠나 하나임을 자각하게 된다.  하여, 글을 쓰는 모든 사람들은 위대하며 그 숙련도를 잣대로 하여 좋은 글, 나쁜 글로 구분짓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본다.

그럼에도 이런 종류의 글쓰기 비법을 담은 서적이 꾸준히 출간되는 것을 보면 자신의 세상을 어떻게 하면 남들에게 더 멋지게 보일 수 있을까? 하는 각자의 욕심이 이를 부추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파워포인트나 트위터에 익숙한 요즘의 청소년들은 요약문이나 비교적 짧은 글을 더 선호하는 추세가 뚜렷하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글쓰기의 본래 목적인 공감을 이끌어내기 위해 한 자한 자에 공을 들이고, 밤을 새워 장문의 글을 완성하기도 했었다.  군에서 썼던 연애편지가 그랬고, 교정에 날리는 벚꽃을 보며 자신도 모르게 써내려가던 마음의 편지가 그랬다.

나라고 예외일 리가 없지만 자신이 쓴 글을 다시 읽었을 때, 미숙한 글솜씨가 부끄러워 얼굴을 붉힌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처음에 의도했던 생각과는 다르게 주제에서 한참이나 빗나갔다거나, 했던 말을 거듭 반복하여 중언부언하거나, 앞뒤 문맥이 맞지 않아 도통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경우가 바로 그렇다.  애면글면 썼던 글들도 한순간 헛수고로 변하고 만다.  나도 나이가 들어서야 겨우 알게 된 것인데 글쓰기에 진척이 없이 예나 지금이나 같은 경험을 되풀이하는 까닭은 글에서 나의 생각이나, 내가 구축한 나만의 세상을 쓰려고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따라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순서로 따지자면 글을 쓰기 이전에 나의 세상을 세우고, 그때그때마다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저자도 나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글쓰기는 자신의 삶에 깃든 올곧은 정신과 사유를 글로 옮기는 것이기에 글쓰는 사람의 정신을 강조하고 있었다.  저자는 이 책에서 글쓰기란 무엇인가란 질문에서부터 글 쓰는 이의 정신, 글을 쓰는 방법, 글쓰기 실전, 글을 꾸미는 법, 논술 쓰기의 비법 등 총 6장으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다.  

어떤 일이든 비법이 따로 존재할 리 없다.  그리고 먼저 배운 사람이 딴에는 세세히 일러준다고 하여도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그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어쩌면 우리는 학창시절 국어책에서 배우고 익힌 방법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글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결국, 자신이 바라보는 세상이 어떠한지 깊이 관찰하고 틈나는 대로 써보는 수밖에는 달리 도리가 없을 듯하다.  글쓰기 비법을 찾아 헤맬 것이 아니라 사유와 글쓰기에 태만한 나의 게으름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누가 써도 마찬가지인 글, 그것은 생명이 없는 글, 죽은 글이다.  오직 나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써야 한다.  내 체험 속에서 찾아낸 이야기를 써야 한다."  (P.1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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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박경리 시집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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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무덥다.
아침부터 말매미 목이 쉬도록 울고, 등산로 초입에는 한삼덩굴이 지천이다.  찌는 듯한 더위였다.
바야흐로 성하(盛夏)!  박경리 선생의 유고시집을 읽었다.
쌀알 같은 시어를 고르 듯, 문장 속 쭉정이를 한평생 고르셨을 지난한 삶이었다.  어두운 세상에 시인이 살아있다는 것은 얼마나 마음 든든한 일이냐.  쭉정이 없는 알곡으로 하얀 쌀밥을 짓는 일은 또 얼마나 숭고한 것이냐.  박경리 선생은 그렇게 사셨다.  시인의 삶과 시가 겉도는 것쯤이야 요즘 세상에 책잡힐 짓도 아니라지만 시인의 글줄이 아귀에 맞지 않아 자신의 삶마저 휘청거리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선생의 시는 땀에 젖은 모시 적삼처럼 꾸미지 않은 소박함이요, 삶과 시를 구분할 수 없는 자연스러움에 그 가치가 있다.

         *옛날의 그 집

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 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휭덩그레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국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히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거운 밤에는
이 세상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나를 지켜 주는 것은
오로지 적막뿐이었다.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대학시절, 문학 지망생이었던 한 친구는 학사주점의 흐릿한 조명 아래서 술기운을 빌어 이렇게 말했었다.
"우리나라에 제대로 된 문학은 없어. 체면을 중시하는 이 문화가 지속되는 한 그 누구도 가면을 벗기 어려워.  그래서 노벨 문학상을 받지 못하는 거야.  나도 수차례 이 가면을 벗어보려 했지만 끝내 되지 않더군.  한국인에게 가장 무거운 것은 체면이야.  도저히 자신의 힘만으로는 던져버릴 수가 없어.  그만큼 집요하다는 얘기지."  친구는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악다구니를 썼다.  그날 친구를 부축하여 자취방으로 향할 때 그의 어깨에 매달린 체면의 무게를 절감했다.  어쩌면 그 무게에 절망했는지도 모른다. 

박경리 선생의 유고시집을 읽으며 '아! 죽음을 목전에 둔 노작가도 한평생 체면의 굴레에, 그 무게에 힘겨워했구나'하고 느꼈다.  선생이 살았던 80여년의 세월 동안 체면에 짓눌린 삶은 누런 진물이 되어 옹이처럼 굳어졌겠구나.  마지막 가시는 길에 비로소 그 굴레에서 벗어났으니 얼마나 홀가분하랴. 그 질긴 체면의 무게에 욕심을 한겹 더하여 더욱 힘겨웠을 젊은 시절의 삶. 그럼에도 선생은 이렇게 말한다.  '잔잔해진 눈으로 뒤돌아보는 청춘은 너무나 짧고 아름다웠다 젊은 날에는 왜 그것이 보이지 않았을까'

가식이 없는 선생의 시는 바람처럼 맑고 투명하다.  속살이 다 비칠듯한 그 싯구 구절구절이 내게는 왜 이다지도 아리게 다가오는지...  그 가벼움이 내 가식의 살갗을 얼마나 야무지게 도려내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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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를 향해 걷다
야마오 산세이 지음, 최성현 옮김 / 조화로운삶(위즈덤하우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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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기간에 조용히 앉아 책을 읽은 것도 참으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아내와 아들은 처제 가족과 함께 봉평으로 여행을 떠났다.  같이 가자고 권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선약이 있었던 탓에 나 혼자 집에 남기로 한 것인데, 마음 한켠에는 홀로 있을 때의 "자유"가 그리웠는지도 모른다.  새벽부터 부산을 떨던 아내와 아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자 집안에는 괴괴한 적막감이 감돌았다.

 거실에 덩그러니 놓인 소파, 정돈되지 않은 게으름이 유혹하듯 나의 시선을 붙잡는다.
흐트러진 옷가지며 먹고 난 그릇들을 거듬거듬 치우고 나니 그것도 일이라고 등줄기에 땀이 밴다.  야마오 산세이의 산문집 <어제를 향해 걷다>를 읽었다.  법정스님의 추천도서였던 <여기에 사는 즐거움>이란 책을 통하여 작가를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화려하지 않은 그의 글에 홀딱 반했던 나는  그간 몇 번이나 작가의 다른 작품을 읽어야겠다 마음 먹었었다.  그러나 그때 뿐, 기회는 쉽게 오지 않았다.

 야마오 산세이의 글은 싱그런 바닷바람을 가득 머금은 듯 청량한 기운이 머리를 맑게 한다.  좋은 책은 다 읽은 후의 느낌이 맑다.  독서를 마쳤을 때, 몸도 마음도 한결 가뿐해진 느낌이라면 그 책은 분명 좋은 책이다.  야마오 산세이는 그래서 좋다.  "물기를 머금은 따뜻한 흙, 맑고 찬 물, 숲을 건너가는 풍요로운 바람, 깊은 숲, 황금색 궁전인 불. 그것 없이는 우리가 살아갈 수 없는, 이 세상 최고의 것"이라 믿고 따른 시인, 농부 겸 철학자였던 야마오 산세이.  땅에서 태어나고, 땅 위에 아무 것도 세우지 않고, 다만 땅과 함께 살고, 땅으로 돌아가는 세상을 전 생애 동안 추구했던 작가는 서른아홉의 나이에 도쿄에서 아주 먼 남쪽 작은 섬 야쿠시마의 폐촌으로 이주하여 2001년 8월 예순셋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명상과 수행으로 일관하며 구도자와 같은 삶을 살았다.

 오후가 되자 아내로부터 문자가 왔다.
지금 봉평은 초가을 날씨처럼 덥지도 않고 환상적이란다.  아들녀석도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단다.  아내의 들뜬 표정이 눈에 선하다.  여기 걱정하지 말고 맘껏 놀다 오라고 답장을 보냈다.  봉평은 내가 태어난 횡성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어렸을 때 읽었던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장돌뱅이 허생원과 동이가 오가던 봉평장 과 대화장 진부장 등은 부모님으로부터 늘 듣고 자랐던 탓에 고향처럼 느껴진다.
 

"본래 고향이란 산이 있고, 강이 있고, 평지가 있고, 바다가 있고, 거기에 사람이 끝없이 이어서 사는 것을 이르는 말에 다름없다. 어느 곳에서든 깊게 산다는 것은 힘든 일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고통스러운 일 또한 물처럼 흘러간다. 흘러가며 그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밑바닥에 또 하나의 물의 진실이 있다. 그것은 물은 흐르고 있다는 진실이다. 그 진실은 영원히 멈추지 않고 있다.”

 야마오 산세이의 글에선 주인 없는 미래를 향해 성마르게 초인종을 눌러대는 현대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인간 존재의 본질인 자연, 그것을 하루라도 제대로 배우도록 하는 것이 아이들에 대한 나의 책임이라고 여기고 있다는 작가의 확고한 신념이 나를 주눅들게 한다.  부드러운 땅을 딛고 섰을 때 아내도, 아들도 그렇게 좋아하는 것을...  나는 일 년에 두어 번 선심쓰듯 산과 강, 자연의 얼굴을 선을 뵈어주는 것이다.  그야말로 직무유기랄 수밖에.  아들은 지금 아비의 고향 어드메쯤에서 영혼의 숨소리를 들으며 걷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내일을 향해 걸을 수 있는 것처럼 어제를 향해서 걸을 수 있다. 시간이 한 방향으로만 흐른다는 것은 이 시대의 큰 착각이자 선전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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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불편 - 소비사회를 넘어서기 위한 한 인간의 자발적 실천기록
후쿠오카 켄세이 지음, 김경인 옮김 / 달팽이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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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의 삶 자체가 한 폭의 풍경화요 서정시였다.
지난 과거는 언제나 아름답게 채색되어 기억 속에 등장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돌이켜 보면 우리 주위에는 하시라도 풍경화보다 더 눈부신 자연의 풍광이 있었고, 유명 가수의 노래보다 더 고운 자연의 울림이 있었다.  그러나 그 속에 사는 인간도 생산자로서의 마땅히 해야 할 의무, 즉 불편함이 자리하고 있었다.  농사를 짓고, 구멍난 양은 냄비를 메우고, 부족한 찬거리를 보충할 요량으로 온 산을 헤매기도 하고......

그 고단한 삶 속에서도 행복의 척도라 말할 수 있는 안락과 쾌락은 늘 존재했었다.  그러나 물질문명의 획기적인 발달과 대량생산, 대량소비의 풍요 속에서도 우리는 이제 쾌락을 느끼지 못한다.  비록 과거에 비해 소비가 늘어남으로써 안락함은 더해졌다고 할지라도 고단한 노동 뒤에 누릴 수 있는 달콤한 휴식과 어느 여름날 집 앞의 시냇물에 제 몸을 담금으로써 맛보던 짜릿한 쾌락은 더 이상 느끼기 어려워졌다.  어쩌면 쾌락은 욕망의 절제, 그 최고조의 한계점 이후에나 맛볼 수 있는, 욕망의 간절함에서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책은 일본 마이니치(每日) 신문의 사회부 기자인 후쿠오카 켄세이가 자신의 체험을 기록한 르포형식의 글이다.   「소비 사회를 넘어서기 위한 한 인간의 자발적 실천 기록」이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타인의 강요나 압박이 아닌, 전적으로 저자 자신의 자발적 시도와 1년간의 실천 경험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엄청난 주제를 안고 있는 꽤나 심각한 르포일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일단 책장을 넘기면 술술 잘 읽혀지는 꽤나 재미있는 책이다.

저자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수많은 사람들이 남긴 유서를 읽어본 적이 있다고 했다.  대부분의 유서는 자신은 세상에 있어 짐 같은 존재며, 살아있을 가치가 없다는 자책의 말들로 가득했다고 한다.  자신의 존재가 "세상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곧 병이나 노화, 실직이나 도산 등의 경제적 좌절은 "악(惡)"이며, 배제해야 할 존재라는 심리가 사회 전반에 감돌고 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진단한다.  저자는 이 책의 서문에서 말하기를 이 책을 읽음으로써 소비문명으로 잃어버렸던 것들 중에 더 없이 소중한 뭔가가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생각하고 실천할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은 36세의 저자가 초등학교 4학년의 딸과 5살인 둘째딸, 그리고 두 살 연상의 부인과 함께 각종 불편을 감수하면서 1년을 살아온 기록이며, 그가 1년간 실천한 불편은 다음과 같다.

① 자전거로 통근하기
② 자동 판매기에서 음료수 사 먹지 않기
③ 외식하지 않기
④ 제철 채소나 과일이 아닌 것은 먹지 않기
⑤ 목욕하고 남은 물은 전동펌프가 아닌 대야로 세탁기에 퍼 담기
⑥ 설거지할 때 뜨거운 물 안 쓰기(고무장갑 끼기)
⑦ 전기 청소기 쓰지 않기 (아이들 방 카펫 청소는 예외)
⑧ 티슈 사용하지 않기 (콧물도 손수건으로 해결)
⑨ 다리미 쓰지 않기
⑩ 음식 찌꺼기는 퇴비로 사용하기
⑪ 도시락 갖고 다니기
⑫ 밭을 빌려 채소와 야채를 직접 키우기
⑬ 엘리베이터, 샴푸, 린스, 세제 사용하지 않기
⑭ 커피, 홍차 마시지 않기
⑮ 된장, 짱아찌 등을 집에서 만들어 먹기

이 외에도 여러 가지 것들이 더 있지만, 이 불편 중에 백미는 바로 무논에서 오리 농법을 이용하여 직접 쌀을 재배하는 것이었다. 저자는 이 과정을 통해 이웃과 거래 관계가 아닌 마음으로 교제하는 과거 선조의 생활 방식을 직접 몸으로 체득했노라고 적었다.
결국 우리 앞에 쏟아 놓아진 이 많은 물건은 사실 없어도 그만인 것이며, 미디어에서 나오는 소비의 유혹을 이겨낼 의지만 있다면 누구에게나 이 불편은 즐거운 것이 될 터이며, 그럼으로써 우리 아이들에게 좀 더 밝은 미래와 환경을 물려 줄 수 있다는 것이 이 책의 요지이다.

이 책의 후반부에는 현대 물질문명을 걱정하는 사람들과의 대담이 실려 있다.  그 중에는 내가 예전에 읽었던 책<여기에 사는 즐거움>의 저자 야마오 산세이와의 대담도 있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일정 나이가 되면 성장을 멈추고 노화의 과정을 겪게 된다.  누구나 인정하는 이 자연스러운 현상을 늘 목격하면서도 현대의 과학기술이나 물질문명의 성장은 멈추지 않을 것으로 착각한다.  우리 사회가 부동산 가격은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온 것처럼 말이다.

인간은 육체적으로 성숙하는 과정이 끝나면, 비록 육체는 늙어가지만 정신적으로 성숙하는 출발점이 되기도 한다.  물질문명의 성장은 이제 최종 목적지에 근접한 것으로 보여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문화적, 정신적 성장을 통하여 성숙한 사회로 향하는 계기로 삼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성장의 끝자락에서도 1년에 7%의 고성장을 자신했던 어느 정치가의 허무맹랑한 소리를 진실인 양 믿을 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가 성숙한 사회로 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진실은 광고나 선동을 통하여 가려지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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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로부터 80킬로미터 - 알래스카와 참사람들에 대한 기억
이레이그루크 지음, 김훈 옮김 / 문학의숲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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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운명이란 알 수 없는 것이어서 자신의 의지에 반하는 일들이 종종 벌어지곤 한다.
그러나 한참 지나고 나면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원인과 결과 사이의 인과관계를 확연히 깨닫게 되고, '아,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구나!'하는 말을 나도 모르게 내뱉곤 한다.  그럴 때, 내가 비록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나의 인생 전반을 이끌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서늘한 경외감에 휩싸이곤 한다. 

북부 알래스카, 날짜 변경선에서 동쪽으로 80킬로미터 떨어진 코체부에 해안선에서 태어난 저자 이레이그루크는 어머니를 따라 신흥 도시인 놈에서 빈곤하게 살다가 외가 쪽 친척 집에 양자로 들어가 전통적인 이누피아트 족의 방식에 따라 살기 시작한다.  아사(餓死) 직전에 놓였던 아이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나 알래스카주의 하원의원이 되었고, 알 수 없는 운명에 이끌려 정신없이 살았던 저자는 자신의 선조들이 1만 년 동안 이룩한 전통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이 책은 저자의 삶 속에 녹아 있는 에스키모의 삶과 전통, 그리고 사라져 가는 그들의 얼과 혼에 대해 말하고 있다. 

영하 40도까지 내려가는 알래스카의 겨울 속에서 혹독한 어린 시절을 보낸 이레이그루크는 수탈하는 미국의 도움으로 공부를 계속하고 본토 인디언들의 몰락 과정을 자각하게 된다.  저자는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들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하원의원이 되었다.  저자와 그를 돕는 많은 사람의 부단한 노력으로 알래스카 원주민 토지청구권 타결 법안에 닉슨 대통령이 서명하였다. 한낱 보잘 것 없이 버려졌던 아이가 알래스카 전체 인디언의 삶에 커다란 족적을 남기는 위대한 성과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그들의 피를 타고 흐르는 가족간의 사랑과 자연에 대한 경외가 아니었을까?

"우리가 만여 년 동안 우리 자신을 다스려왔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우리를 위임 통치한 이들은 우리를 고유한 민족으로 만들어준 것들의 정수, 곧 우리의 언어와 이름, 종교, 관습, 가치관을 공격함으로써 우리를 변화시키려 했으며 그런 목적으로 규칙과 법을 만들었다."  (P.201) 

이 땅의 원래 주인이었던 그들에게는 땅을 소유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그냥 땅은 그곳에 사는 인간과 동식물들이 함께 사용하는 신의 선물 같은 거였다. 그런데 러시아인들과 미국인들이 들어와서 그 땅을 헐값에 사고 팔았고 그 땅이 미국령이 된 이후에는 저자를 비롯한 의식 있는 원주민 공동체가 무려 10여년 동안이나 힘겹게 토지반환청구소송까지 하며 그 땅의 일부를 겨우 찾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사이 거세게 들이닥친 미국의 화폐 경제와 물질문명 속에서 너무도 많은 원주민들이 자기 정체성에 대한 자부심을 잃고 알코올 중독자가 되거나 가정이 해체되거나 홈리스가 되거나 혹은 자살해 버렸다.  서구 열강의 지배 방식은 단순하기 이를 데 없다.  물질문명의 달콤함으로 유혹하여 원주민의 욕심을 자극하고 그런 욕심은 그들로 하여금 뿔뿔이 흩어져 태초부터 지녀왔던 공동체 의식을 상실하게 하는가 하면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실시된 사상 개조는 자신들의 문화와 언어마저 저급한 것, 또는 가치없는 것으로 치부하게 만든다.  원주민들을 이렇게 허수아비와 같은 인간으로 만들면 그들을 영원히 자신들의 지배하에 두는 것은 지극히 쉬운 일이 된다.  이런 지배 방식이 어찌 아메리카 원주민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  아프리카에서도, 아시아에서도, 어쩌면 그들의 힘이 미치는 지구 어느 곳에서도 자행되었고,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 아닌가.  독립국가라고 자부하는 우리나라에서도 그들의 방식이 여전히 통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해 겨울, 놈의 해변에서 나는 강렬한 통찰의 순간을 경험했다.  생전 처음으로 나는 세상에서 존재가 가장 희미한 지역들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우리의 정신과 영혼 속에서 일어나고 있던 인간 고통의 전모를 한순간에 통찰했다.  생전 처음으로 나는 정체성과 문화와 인간관계의 본질에 관한, 세계 전역의 국가들이 자국내 소수민족들의 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써먹었던 조직적인 방법들(특히 종교와 교육 과정을 통해서 자기네 것을 주입하는 방법)에 관한 깊은 진실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P.278)

인간에게 안락함이란 마약과 같은 것이다.  물질문명이 주는 안락함에 안주한 사람들은 무가력하고 모래알처럼 흩어지고 만다.  그리고 전통으로 내려오는 그 모든 가치들에 대한 집단적 가치부정은 한순간에 일어나는 일이지, 우리가 의식할 정도로 서서히 진행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무수한 외침을 받았던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도 그것은 잘 드러나고 있다.

"나는 어떻게 해서 새로운 지식과 새로운 사고방식이 원주민들이 과거 수천 년 동안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서 얻어낸 지식을 몰아냈는가 알았다.  옛 지식이 공동체 의식이나 공동의 복지에 대한 헌신 같은 요소들과 더불어 사라지자 혼란이 일어나기 시작하고 있다.  사람들은 점차 자기네 언어나 문화와 단절되어가고 가족관계도 날로 약화되어가서 결국은 낱낱이 동떨어진 섬들처럼 살아가고 있다.  일부 사람들은 그것을 자유라고 부른다."  (P.321) 

한글보다는 영어로 된 간판이 난무하는 거리.  오렌지보다는 '어린지'를 강요하는 사회.  우리는 그것을 진보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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