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
시몬 비젠탈 지음, 박중서 옮김 / 뜨인돌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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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누군가를 용서하고 누군가로부터 용서받는다는 것은 쉬운 듯하면서도 어렵기 짝이 없는 일이다.
어려서부터 나는 이 문제에 집착했었고 진정한 용서가 가능할까? 하는 의문에 휩싸였었다.  성경을 종교가 아닌 독서 혹은 상식의 차원으로 읽었던 내게 그들이 말하는 참회나 회개는 더더욱 이해하기 힘든 문제였다.  나의 상식으로는 어떠한 죄를 짓더라도 진심으로 뉘우치면 용서가 된다는 것이 궤변으로 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한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신으로부터의 용서를 기대할 수 있는 죄의 범위는 분명 존재한다고 믿었다.  가령 거짓말과 같은 작은 죄는 용서가 되지만 살인과 같은 돌이킬 수 없는 범죄는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주에 속한다고 믿었다.

성경에 대한 이런 주관적 해석은 칸트가 말했던 정언명령에 더하여 감성적 일깨움으로 굳어지게 마련인데 나 또한 다르지 않았다.  순결 혹은 성적인 면에서도 자신이 책임질 수 없거나 사랑하지 않는 이성과의 육체적 결합은 신의 용서를 기대할 수 없는 범죄라고 굳게 믿었다.  그런 탓에 아내와 만나 결혼을 약속하기 전까지 나는 일체의 스킨쉽도 하지 않았다.  아내의 말을 빌자면 그때의 나는 숨이 콱콱 막힐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나의 태도는 어쩌면 열등의식을 숨기기 위한 방어기제, 또는 타인과 나를 구별하는 선민의식과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인식의 바탕에서 "용서"는 일종의 나약한 인간의 방어기제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진정한 용서는 대다수 일반인에게 불가능한 일임에도 자신만은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세상의 모든 이에게 보여주려는 유치한 발상에서 기인한 행동으로 보았던 것이다.  시쳇말로 쿨해 보이기 위한 치기어린 행동,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믿었다.  겉으로는 용서하는 체하면서도 마음 속에 존재하는 감정의 찌꺼기는 어찌할 수 없이 자신의 인내에 의존해야 한다고 믿었다.  즉 상대방에 대한 증오나 분노는 분명 이성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위선적 용서보다는 오히려, 지금은 나의 감정을 존중하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분노의 감정이 희석되기를 바라는 편이 옳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결론짓고 한동안 덮어 두었던 "용서"의 문제는 이 책으로 인해 불거졌다.
저자인 시몬 비젠탈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포로 수용소에 갇혀 강제노역을 하였다.  하루하루의 삶이 늘 죽음과 함께 했으며 전쟁이 끝난 후 저자는 나치의 학살자들에 의해 무려 89명의 일가친척을 잃고 아내와 단 둘이서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수용소의 강제노역 도중에 만난 한 SS대원의 참회와 그에 대한 자신의 행동이 과연 정당했는지 묻고 있다. 

저자는 어느 날 임시병동으로 쓰이던 기술전문학교 건물의 쓰레기 하치 작업에 동원되었다.  그 학교는 자신의 모교였고, 작업 도중 한 간호사에 의해 임종을 앞둔 젊은 SS대원의 병상으로 인도된다.  온몸에 붕대를 두른 채 누워있는 병사는 자신이 저지른 유대인 학살을 고백한다.  그리고 불이 붙은 채 건물 밖으로 떨어지던 유대인 부부와 아이의 얼굴을 잊지 못하겠다며 용서를 빈다.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병사의 참회를 듣게된 저자, 자신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태에 놓여있던 저자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 자리를 떠난다.  다음 날 병사는 죽었고 간호사는 그 병사가 자신에게 남긴 유품을 전하지만 거절한다.  전쟁이 끝나고 저자는 그 병사의 어머니를 만난다.  남편도 잃고 아들마저 잃은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착한 아이였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저자는 그 아들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꺼내지 않은 채 그곳을 떠난다.
저자는 글의 말미에 독자에게 묻는다.  "과연 나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

이 책의 2부에는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는 28명의 주장이 실려 있다.
비젠탈의 행동은 옳았다고 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다는 사람들.  홍세화, 달라이 라마 등 각계의 유명인사들의 견해는 서로 달랐다.  성직자의 견해와 일반인의 견해는 분명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용서의 행위를 시간적 연속성(또는 관계의 지속성)을 전제로 한 행동이라고 간주할 때 이 책에서 제기한 용서의 문제는 조금 다르다.  그 병사는 임종을 앞두고 있었고,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선 그 병사는 무엇보다 영혼의 안식이 필요했을 것이다.  관계의 지속성과는 거리가 먼 상황이라는 말이다.  또한 저자의 입장에서 임종을 앞둔 한 인간의 모습은 일말의 동정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어찌 보면 자신의 영혼을 구제하고 싶었던 지극히 이기적인 병사의 참회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용서의 주체가 될 수 없었던(병사의 행위는 자신에게 행해진 것이 아니기에) 저자의 갈등은 인간이기에 어찌할 수 없는 감정의 문제일 뿐이라고 본다.  그 상황을 재연할 수 없는 독자의 입장에서 비젠탈의 질문은 참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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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19 14:3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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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23 15: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모던 수필 - 새로 가려 뽑은 현대 한국의 명산문
방민호 엮음 / 향연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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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침부터 바람이 불었다.
뜨겁게 내리 쬐는 햇살, 그러나 가을 바람은 무더위에 지친 사람들을 감질나게 하던 한여름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초가을의 향수가 마음 가득 안겨오는 주말의 아침.  여름이 다 가기도 전에 나는 벌써 한 해가 다 간 듯한 쓸쓸함을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버석거리며 밟힐 듯한 낙엽과 과거로 향하는  가을 한낮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학창시절 국어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여 꽤나 낯이 익은 문인들의 수필을 읽었다.    문학 평론가로 활동하는 방민호 교수가 가려 뽑은 것인데, 일제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우리 문인들의 산문 중 지금 읽어도 그 생생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을 선별하였다고 한다.  가을은 할 말이 많은 계절이다.  가끔 떠오르는 옛친구의 얼굴에서, 지금은 잊혀진 아련한 첫사랑의 미소에서, 끊이지 않는 이야기가 샘솟을 듯한 계절.  그 계절의 초입에서 나는 숱한 이야기의 향연에 초대를 받았다.

 "이 산문 선집을 펴내며 글을 고른 기준을 들라면 바로 이 영원한 현재성을 꼽고자 한다.  오늘의 우리가 읽을 때 그 글이 우리 선배들의 글이라는 점 말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막막한 심정을 위로해 주고 스스로 자기의 삶을 구성해 가는 여유와 지혜를 주는 글이야말로 훌륭한 글이 아니겠는지?  나는 이러한 글을 찾아내기 위해 고심하였다."  (P.286)

1920년대부터 해방직후의 근대문학 공간에 발표된 명산문 91편(51명)을 가려 뽑은 「모던수필」은 발표 당시의 판본을 토대로 당대의 명문장가를 비롯 카프계열, 친일계열, 소수파 여성계열 등을 망라했다. 총 4장으로 구성됐는데 첫장에서는 계절과 자연물, 음식 등을 둘째장에서는 문사들이 느끼는 생활자로서의 번민을, 셋째장에서는 문화의 변화를 바라보는 문학인의 시각을, 넷째장에서는 요절한 문인을 추모한 조사와 예술관을 소재로 담았다. 작가연보와 주석이 실려 있다.

나는 이따금 아이들에게 이런 말을 한다.  "아무리 재미있고 유익한 글도 일단 국어 교과서에 실리면 가장 재미없는 글로 전락하는 신세를 면치 못할거야.  왜 그런고 하니 그 글은 시험에 출제되는 지문으로서의 자격 말고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기 때문이지.  심지어 너희들이 즐겨 보는 만화도 교과서에 실리면 재미없다고 느낄걸."하고 말이다.

이 책에 실린 문인들의 글을 읽으면 생각나는 대로, 붓 가는 대로 쓴 글이라는 수필의 취지에 걸맞게 정형화된 글쓰기 방식으로는 쉽게 담을 수 없는 크고 작은 생각들을 자유롭고 솔직한 태도로 표명하고 있지만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완벽한 글을 탄생시키는 놀라운 재주에 그저 감탄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 내용에 있어서도 암울한 시대에 씌어진 글들이니 그 분위기 또한 그렇겠거니 짐작한다면 큰 오산이다.  일상에서 벌어졌던 재미있는 일화를 소개하는 등 글은 비교적 경쾌하고 밝다.  특히 노자영의 <오천 원의 꿈>과 엄흥섭의 <탈모주의자>는 시종 웃음을 머금게 했다.

내가 재미있게 읽었던 대목은 예컨대 이런 것이다.
"만일 기아가 닥쳐든다 하더라도 쥐의 기사(饑死)는 멀리 인간 기사 후에 속한다.  그런 까닭으로인지 식(食)에 복(福)하고 한쪽에서 굶어도 먹을 것이 풍요한 사람은 대개는 쥐 상(狀)으로 보인다."  (김광섭의 <꽃을 먹는 쥐>중에서)  나는 이 대목에서 현실 정치인 중 한 사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작금의 세태와 그렇게도 잘 들어맞는지.

그런가 하면 문학과 현실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엿볼 수 있는 대목도 있다.
"어쨌든 오늘의 세대에서 살아가기가 어려운 이상으로 창작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역시 작가에게 있어서 최대의 교훈자요 최후까지의 동반자는 현실이 있을 뿐이다.  이 현실을 응시하고 이것과 결리고 여기서 배우고 그 밑에서 얻어내는 바가 없이는 진정한 창작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한설야의 <고난의 교훈>중에서)

"이광수의 산문은 종교적 깊이가 있고 김기림 은 예지적이며 정지용은 단소(短小)한 가운데 독한 기운이 있고 이태준은 부드럽고 엷은 거죽 속에 강잉(强仍)한 신조가 담겨 있다. 채만식은 포즈로 가장한 속에 진실 을 숨겨두고 딴청을 부리는 묘미가 있다"고 저자는 평한다.  그러나 나의 소회로는 그 시대에 씌어진 글들을 읽을 때마다 범접할 수 없는 엄숙함을 느끼곤 한다는 것이다.  풀 먹인 한복을 곱게 차려 입은 듯, 글의 풍모는 고고한 난초를 보는 듯하다.  어쩌면 그것은 지금의 작가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깊은 사색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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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여인으로부터의 편지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의정 옮김 / 맑은소리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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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떤 일을 새로 시작할 때 인터넷에서 로그인을 하지 않으면 창이 열리지 않는 것처럼 처음부터 잘못 들어선 길이라면 그 일이 더이상 진행되지 못하도록 하는 프로그램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아이디, 비밀번호가 일치하지 않습니다.'하는 말과 함께 숫제 화면도 열리지 않는다면 비극적 운명 앞에서 좌절하거나 지난 일을 후회하는 일은 더이상 없을 테니 말이다.

아침 저녁으로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에 마음이 싱숭생숭하다.
그래서 읽게 된 책이 츠바이크의 중편소설 <모르는 여인으로부터의 편지>이다.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아 인간의 내면을 깊이 탐색했던 그의 소설은 언제나 탁월한 심리묘사가 일품이다.   한때 3대 전기 작가 중 한 사람으로 명성을 떨쳤던 츠바이크는 체게바라 역시 그의 작품을 자신의 도서목록에 포함시킬 정도로 광범위한 독자층을 형성하였지만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 그가 망명했던 브라질의 리우에서 그의 아내 로테와 함께 동반자살한다.  작가의 비극적 운명을 예견이라도 하듯 이 소설은 한 남자를 열렬히 사랑했던 한 여인의 기구한 운명을 다루고 있다.

"저를 전혀 알지 못하는 당신에게,
이따금 눈앞이 캄캄해지곤 합니다. 어쩌면 이 편지를 끝내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제게 남은 힘을 다해서 일생에 단 한번 당신에게 보내는 이 편지를 써내려 가고자 합니다.  저를 전혀 알지 못하시는 당신에게"
라는 문장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어린 시절, 옆집에 살았던 한 작가에게 한눈에 반해버린 여인과 여인의 편지를 유서로 읽는 중년의 작가.  그들의 엇갈린 운명은 편지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삶과 죽음을 초월한 영원한 사랑으로 승화된다. 

자식의 주검 옆에서 쓴 여인의 편지는 편지의 수신인, 즉 여인이 그토록 사랑했던 작가 R이 발신인이 없는 편지를 읽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일종의 액자소설이라 말할 수 있는 이 소설은 편지를 읽는 순간과 다 읽은 후의 묘사 부분을 제외하면 모두 한 여인의 편지가 그 주를 이룬다.
 
일찌기 명성을 얻었던 작가 R은 자유분방한 성격으로 그를 따르는 많은 여인과 교제하며 여행을 즐긴다.  그런 그를 지켜보며 첫눈에 반한 여인은 엄마의 재혼으로 2년여의 시간 동안 잠시 떨어져 있던 시기에도 그를 잊지 못한다.  결국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여인은 남자의 곁으로 돌아온다.  직장을 다니며 남자의 곁을 맴돌던 여인은 한 순간의 유희를 좇는 남자의 성격을 잘 알면서도 그의 청을 수락한다.  여전히 남자는 그녀가 어린 시절 옆집에 살던 소녀였음을 알지 못한 채 자신의 성적 욕구만을 채운다.  그 후 남자는 여행을 떠나고 여인은 잊혀진다.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여인은 남자의 눈을 피해 아이를 낳게 되고, 언제든 자신의 품에 안을 수 있는 그 아이를 통하여 상실의 고통을 잊는다.  여인에게 있어 아이는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이의 분신이요, 삶의 목적이었다.  여인은 그런 아이를 먹이고 가르치기 위해 사창가의 여인처럼 몸을 팔아 그 비용을 감당한다.  여인의 주변에는 많은 남자들이 기웃거렸고 청혼도 하였지만 여인은 모두 거절한다.

"그러나 당신께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무엇에든 구속되기를 원치 않았으며, 언제고 당신이 부르시면 기꺼이 달려갈 수 있는 자유로운 상태로 남아 있고자 했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로부터 한 여자로서 눈을 뜨게 된 이후까지 저의 전 생애는 오로지 기다리는 것, 당신이 불러주시기를 기다리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였습니다." 

여인은 우연한 기회에 그 남자를 만나 그의 집에서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남자는 여전히 자신을 기억하지 못한다.  여인은 다음날 아침 자신의 모자에 놓인 지폐 몇 장을 보고 좌절한다.  아이를 키우며 오직 한 남자의 사랑을 갈구했던 여인.  비록 그 남자의 의식 속에 없는 애닯은 사랑이었지만 그의 생일이면 매년 꽃을 보냄으로써 언젠가 있을 사랑에 대한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아이가 죽고만 지금, 그녀 역시 자신의 분신이자 핵심이었던 운명적인 애정을 어디에서도 다시 찾을 수 없기에 그녀는 모든 희망을 잃는다.  그러나 자신이 스러짐으로써 가치를 잃게 될 그녀의 사랑이 그 남자를 통하여 끝없이 이어지길 바라며 편지를 쓴다.  어쩌면 작가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느 무명인의 소중한 사랑, 누군가 기록하지 않으면 쉽게 잊혀질 수많은 사랑의 본질적 가치를 아쉬워 했는지도 모른다.

"이제 저는 하나님을 믿지 않으며, 미사 또한 믿지 않습니다. 저는 오로지 당신만을 믿고, 당신만을 사랑하며, 당신 속에서만 살아가려 합니다. 아, 1년에 단 하루만이라도 그 때처럼 조용히 당신 곁에 머물 수 있도록, 사랑하는 이여, 부디 그렇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당신께 드리는 제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입니다...... 다시 한번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만을 영원히 사랑합니다...... 내 사랑, 부디 안녕히......" (P.132)

자신에게는 없는 밝고 명쾌함 그리고 자유로움, 아름다움에 대한 동경으로 시작된 첫사랑의 기억을 삶이 다하는 순간까지 놓지 못했던 한 여인의 편지를 읽는 남자.  그가 느끼는 것은, 희미하게 떠오르는 이웃집 소녀에 대한 기억과, 어느 낯모르는 처녀에 대한 기억과, 술집에서 만났던 어느 여인에 대한 기억들이 한데 뒤엉킨 것이었다. 그것들은 불명료했고,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마치 흘러가는 강물의 밑바닥에서 형체 없이 반짝이며 떨고 있는 돌멩이와도 같이.

"그는 한 여인의 죽음과, 자신을 향한 그녀의 불멸의 사랑을 느꼈다. 그의 영혼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허물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멀리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한 여인의 모습을 애틋한 마음으로 그리기 시작했다."(P.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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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 - 정혜윤이 만난 매혹적인 독서가들
정혜윤 지음 / 푸른숲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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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저리에서 뱅뱅 맴을 돌았다.
공감할 수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때로는 답답한 일이겠지만.
누군가의 생각장에 한발 들여놓는 것만큼 두려운 일이 또 있을까?  그 에너지장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내 생각이 일순 사라질 것만 같은 공포.  시답잖은 '나'일지언정 마지막까지 무언가 잡고 있어야만 그래도 안심할 것 같은 어이없음.  마치 프로이트와 푸르스트를 혼동하는 것처럼.  그것을 에고(ego)라고 불러야 할까?  아집이라고 불러도 좋을 단단한 껍질.  나는 '껍데기는 가라!' 외쳤던 어느 시인이 부럽다.  

 언젠가 대학 동기 A는 진리에도 유행이 있다는 것을 아느냐고 물었다.  누군가 풀어 놓은 사색의 편린을 그 생각의 원천, 한 점의 순간으로 되짚어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도 했다.  깨진 달걀에 그만큼의 에너지를 주입하여도 원상태로 되돌릴 수 없다는 비가역성의 원리처럼 우리는 매번 생각의 빅뱅을 경험하지만 그 파편을 모두 모아 이전의 상태로 되돌릴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했다.  우리는 오직 펼쳐진 생각의 현재만 볼 뿐이라고 했다.  이를테면 우리가 광활한 우주를 보며 겨자씨만한 원시 우주를 동경하듯이.

 그는 내게 말했다.  진리는 그저 갤러리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취향의 그림을 선택하는 것과 같다고.  정혜윤의 글은 수면에 반짝이며 부서지는 햇살을 떠올리게 했다.  햇살은 아름답지만 결코 태양은 보지 못한다.  나는 그 시절의 친구를 경멸했다.  개똥철학이나 읊는 몽상가라고.  그러나 이제는 알 것같다.  자신의 발가벗은 자아를 방어할 수 없는 어떤 지점에 이르면 츠바이크처럼 자살을 선택할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  그래서 우리는 늘 언저리에서 맴돈다.

 작은 기온 변화에도 접착력을 잃고 틈이 벌어진, 켜켜이 먼지 쌓인 실리콘의 비애를 세월이라 했다.  그 작은 틈새로 잊혀진 세월이 스며들어 내 생각과 어색한 악수를 나누는 사이 나는 '공감'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어렴풋이 이해했다.
이런 종류의 책을 읽은 적이 있었다.
제목이 <지식인의 서재>였던가.  그 책에 언급된 사람이 누구였는지 지금은 기억도 없지만 그들이 추천한 책에는 역사 서적이 많다는 사실에 저으기 놀랐었다.  그들도 나처럼 잊혀진 세월과 조우하며 '공감'이라는 단어를 떠올렸을까?

 저자가 만난 사람들의 이름을 나열해 보았다.  진중권,정이현,공지영,김탁환,임순례,은희경,이진경,변영주,신경숙,문소리,박노자.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하고 머리를 또렷또렷 굴려보지만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결론.  그들은 가끔 내가 한번쯤 읽어보았던 책의 제목을 언급하며 동의를 구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요지부동.  그것을 에고라고,아집이라고 불러도 좋았다.

 "나는 덫에 걸린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덫이 책인 줄로만 알았는데 사실은 복잡하고 신비로운 인간의 속성이었다.  그러므로 사람과 책이 만나는 지점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한한 힌트를 준다.  왜냐하면 책이란 다름아닌 사랑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고 결국 어떤 책을 사랑하느냐는 그 사람의 속성, 그 사람의 자존감, 그 사람의 희망, 그 사람의 꿈꾸는 미래, 그 사람이 살아온 삶, 그 사람의 포용력, 그 사람의 사랑에 대해 더할 나위 없이 정확히 짚어주기 때문이다."  (P.2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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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무명 철학자의 유쾌한 행복론
전시륜 지음 / 행복한마음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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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첫날밤에도 마치 점호 나팔을 들은 듯 밤 아홉 시에 취침하여 아침 일곱 시에 기상한 사람을 아는가?  또는 음식을 선택하는 데 잇어 머리의 말을 듣기보다는 혀와 밥통의 말을 듣는 것이 옳다고 믿는 사람을 아는가?  둘 다 모른다면 혹시 면접시험에서 회사 방침이 종업원에게 넥타이를 꼭 매야 한다고 강요하면 자신은 그 회사에서 일하고 싶지 않다고 밝힌 사람을 아는가? 

물론 내 얘기가 아니다.
나는 그만한 용기도 없고, 내 아들은 방학 동안 놀러 다니며 삼겹살만 구워먹었으니 2학기 중간고사에는 '어떻게 하면 삼겹살을 맛있게 구울 수 있을까?'와 같은 문제만 출제해 달라고 부탁하는 이기적인 아빠도 아니다.  나는 이 책을 회사에서 짬짬이 읽으며 얼마나 키득거렸는지 본의 아니게 옆 동료들의 눈총을 사야만 했다.  서두의 글은 이 책의 저자인 전시륜의 행복론이다.  자명종을 틀어놓지 않기,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대로 먹기, 넥타이를 매지 않기.  단 세 가지의 원칙이 충청도 시골에서 태어난 한 소년을 평생토록 행복하게 살게 해주었다면 믿을 수 있을까?

이 책은 오직 자신의 의지대로 살았던 무명의 철학자 전시륜의 행복한 삶을 담고 있다.
소박하지만 행복했던 삶.  그의 삶의 흔적에는 곳곳에서 유머와 재치, 기발한 상상력과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줄 아는 용기가 넘쳐난다. 1932년 충청북도 주덕에서 태어나 1998년에 작고하기까지 66년의 길지 않은 그의 삶이 유독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것은 특별한 이력도 없는 무명인인 그가 일면식도 없는 내게 배꼽을 잡고 웃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것과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살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깊은 깨달음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삶은 기본적으로 따분하고 괴로운 일의 연속이라고 굳게 믿었던 나의 생각을 자신의 삶을 어떻게 이끄느냐에 따라 삶은 행복한 파티의 연속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믿게 해준 것이다.

평생의 소원이 모국어로 된 자신의 책 한 권을 세상에 펴내는 일이었다는 작가는 췌장염으로 책이 나오기도 전에 세상을 뜨고 말았지만 젊은 날 한국을 떠나 임종 때까지 외국에서 생활했던 작가의 유쾌한 행복론을 한번이라도 접한 독자라면 지옥에 가서라도 그를 다시 삶의 현장으로 끌고 오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지 못할 것이다.  그의 작품을 2탄, 3탄 연속해서 읽을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전시륜의 유머는 그야말로 발군이다.
『나를 부르는 숲』이나 『발칙한 유럽 산책』의, ‘웃기는 작가’, 빌 브라이슨이 울고 갈 정도다. 1957년 그는 『마산일보』에 구혼광고를 낸 바 있다. 25살의 전시륜이 마산 육군군의학교 하사관으로 있을 때였다. 장교도 아닌 사병이 신문에 구혼광고를 낼 정도로 전시륜은 배짱이 두둑한 사내였다. 시골에 칠순이 넘는 아버지가 계시는데, 자신은 미국 유학을 준비 중이라며, 미국 유학 동안 아버지를 모실 용의가 있는 여자를 구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런 사연을 광고에 적은 뒤 응모자격을 ‘만 19세 이상, 만 30세 미만의 대한민국 처녀 및 미망인’이라고 썼다. 왜 그랬을까?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무슨 꿍꿍이 속셈이냐고 따져 묻기 전에 그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그 당시 6.25 전쟁으로 인해서 하루아침에 많은 여자들이 미망인이 되었다. 그 중에는 착하고 똑똑한 여자들이 많이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그들 앞길은 막막했다. 그들이 내 광고를 읽었을 때 인습의 틀과 굴레를 차버리고 용기를 얻어서 나를 찾아올 수 있지 않을까? 그들은  헌신짝처럼 버려진 여자라는 낙인이 찍혀 스스로 인간 가치를 50퍼센트로 할인하고, 나의 변변치 못한 사람됨을 용서해주고, 진지한 논의를 하자고 응해올 것이 아닌가. 나는 구둣방 머슴애처럼 건전한 본능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가치 없는 새 고무신보다는 튼튼한 헌 가죽 구두를 택할 용의가 언제든지 있었다.’  (P.159)

삶이 오롯이 내 것이었던 어느 행복한 철학자의 유서로 남은 이 한 권의 책이 가슴 벅차도록 나를 달뜨게 한다. 
"저는 보수적인 성격을 가진 탓에, 결혼이 거액의 배당금을 가져오리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결혼생활이란 항상 즐거움이요, 언제나 로맨스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사실상 결혼했다고 해서 행복이 정장을 입고 우리집을 찾아와 큰절을 올릴 것이라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행복은 문자 그대로 요행이며 복입니다.  행복은 삶이 의당히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우연히 얻게 되는 선물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삶은 공정합니다.  만족스러운 생활이 요구하는 것은 겸손입니다.  따뜻한 화로 옆에서 마음에 드는 아가씨와 커피를 마시고, 좋아라고 떠들어대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이 바로 행복의 그림이 아니겠습니까."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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