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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알래스카에서 죽었다 - 호시노 미치오의 마지막 여정
호시노 미치오 글.사진, 임정은 옮김 / 다반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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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독한 독서광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다치바나 다카시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때 문득, 내가 여태까지 역사라는 것을 어딘가 근본적인 데서부터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식으로서의 역사는 윤색된 것이다.  학교 강단에서 배운 역사, 교과서 속의 역사, 역사가가 말하는 역사, 기록이나 자료로 남는 역사, 그런 것들은 전부 윤색된 것이다.  가장 정통적인 역사는 기록되지 않은 역사, 언급되지 않은 역사, 후세인이 전혀 모르는 역사가 아닐까.  기록된 역사를 기록되지 못한 현실의 총체에 비한다면, 우주 속의 바늘끝만큼이나 미소한 것이리라.  우주의 대부분이 허무 속으로 삼켜지는 것처럼, 역사의 대부분도 허무 속으로 삼켜지고 있다.  " 

  

타인과 구별되는 특별한 역사관을 갖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으나 다치바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경험이 있다.  호주의 노던 테리토리의 울루루를 보았을 때 그랬고, 일본의 야쿠섬을 방문했을 때 그랬다.  9억 년 전에 생겼다는 울루루와 천 년 이상의 고목이 자라는 야쿠섬의 원시림이 주는 느낌은 서로 달랐지만, 나는 두 곳 모두에서 시간의 영속성과 숨이 멈출 것만 같은 서늘한 경외감을 느꼈다.  4차원의 세계에서 시간의 좌표축을 제거한 온전한 역사를 마주하고 있는 듯한 느낌. 역사의 저편에 흐르는 도도한 숨결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일본 열도 최남단 가고시마현에서 뱃길로 130㎞, 오래된 삼나무가 있는 야쿠시마(屋久島)를 방문했던 날은 하루종일 비가 내렸다.  일본에서의 업무가 일찍 끝나는 바람에 우연처럼 찾아간 그곳엔 해발 2000m에 가까운 미야노우라산이 있다.  그 산을 오르기 위해 사람들은 새벽 어둠이 걷히기도 전에 길을 나선다.  여행이 주목적이 아니었던 우리 일행은 결국 7200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조몬스기(繩文衫)’는 보지 못했지만 이끼에 뒤덮힌 수천 년의 세월을 온몸으로 느낄 수는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역사는 읽는 것이 아니라 공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신화로 전해지는 고시대의 현실이 내 몸 곳곳으로 스며드는 듯했다. 

 

1952년 지바현 이치카와시에서 태어난 저자는 19세 때 헌책방에서 우연히 알래스카 풍경을 담은 ‘조지 모블리’의 사진집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거기에 실린 에스키모 마을의 모습에 푹 빠져 촌장에게 방문을 허락해 달라는 편지를 쓴 그는 촌장으로부터 방문 환영 답신을 받고 그곳에서 에스키모 일가와 함께 여름 한철을 보낸 이후 알래스카 풍광을 담는 사진가의 길을 걷게 된다.  곰을 좋아하던 그는 알래스카를 누비며 사진을 찍었고,1996년 8월 취재차 방문한 캄차카반도 쿠릴 호수에서 그토록 좋아했던 곰에게 물려 세상을 떠났다. 이 책은 그의 마지막 여정이다.

 

"갖가지 동물, 한 그루 나무, 숲, 심지어 바람마저도 영혼을 가지고 존재하며 인간이 그들을 바라보듯 그들도 인간을 응시한다......  인디언의 신화는 신화의 자리를 넘어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나직이 말을 건다.  밤의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생명이 품은 헤아릴 길 없는 신비를 전하는 것처럼.  나는 곰이 다니는 길이 사라져 간 숲속 세상의 오묘함을 생각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심오함은 '인간이 궁극적으로 알고자 하는 것'과 어떤 지점에서 분명히 얽혀 있을 것이다."  (P.162)

 

저자는 큰까마귀 전설을 따라 남동알래스카에서 시베리아로 이동한다.  그 길이 마지막 여정임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는 자신의 짐을 챙겨 돌아섰을까?  기원전 1만 8천 년 전쯤 물밖으로 드러난 베링 평원을 건너 몽골로이드는 아시아에서 알래스카로 이주했다.  알래스카의 역사를 되짚는 저자의 시간 여행은 하얀 베일에 가려 영원 속으로 회귀하고 있다.  역사로 기록되지 않은 전설의 세계.  작가의 사진에는 곰의 발자국을 따라 영원 속으로 사라지는 고독한 사진가의 시선이 있다.  유화와 같은 그의 사진에서는 원시의 울림이 끝없이 전해진다. 

 

"촬영이 끝난 뒤, 머리뼈를 나무상자에 고이 넣어 품에 안은 채 어둑어둑한 고생물학 연구소의 복도를 걸었다.  죽은 이가 든 유골함처럼 다루기가 조심스러웠다.  나무상자가 흔들릴 때마다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났다.  그 투명한 소리마저 나는 아름답다고 느꼈다.  동굴에서 나온 뒤에도 뼈에는 천천히 시간이 새겨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뼈의 소리에서 나는 3만5천 년 전 남동알래스카 숲의 흔적을 찾고 있었다."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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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분 인생]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1인분 인생 - 진짜 나답게 살기 위한 우석훈의 액션大로망
우석훈 지음 / 상상너머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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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떨어져 주말부부로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내 한 몸 건사하는 게 무척이나 힘들다는 걸 새삼 느낀다.  딴에는 학창시절의 자취 경험도 있고 하니 무에 그리 힘들겠는가 싶었는데 막상 닥치고 보니 그게 생각처럼 만만히 볼 일이 아니었다.   군것질이나 분식으로 주린 배를 채웠던 그때와는 식성도 많이 달라졌고, 교복과 츄리닝만 있으면 못 갈 데가 없었던 학생 신분과 누군가의 시선을 항상 의식하며 살아야 하는 회사원의 신분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무엇보다 그때의 나에 비해(인정하기는 싫지만) 체력적으로 많이 약해졌음을 시인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결국 나이가 들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나 아닌 다른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제 목숨 하나 부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요, 그 누군가의 도움에 감사할 줄 아는 자세이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어줍잖게 사업이랍시고 시작했을 때, 직원들과 영업을 나갈 기회가 많았었다.  블라인드 제조업을 했던지라 소비자는 가정주부가 태반이었고, 내가 사업을 시작하던 당시에는 블라인드가 뭔지도 모르는 주부들도 많았다.  어렵게 설명을 하여 간신히 이해를 시키는 나와는 달리 고등학교만 졸업한 직원들은 너무도 쉽게 설명할 뿐만 아니라 일단 얘기를 트고 나면 대뜸 너나들이를 하는 사이로까지 발전하는 것이 아닌가.  곁에서 지켜보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마치 우연히 만난 십년지기인 줄 착각할 정도로 말이다.

 

경험도 없이 시작한 사업에서 쓴 맛을 본 후 나는 뒤늦은 나이에 평범한 회사원으로 복귀했지만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때의 나는 일종의 특권의식, 또는 시쳇말로 먹물근성에 물들어 있었지 않았나 하는 반성을 하게 된다.  지방 발령을 받고 혼자 떨어져 생활하면서 숙소 주변의 가난한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게 된 것도 사업을 하던 당시와 지금껏 살아오면서 부지불식간에 저질렀던 수많은 잘못에 대한 죄의식의 발로가 아닐까 한다.

 

숫기가 없는 나는 처음부터 너나들이를 하며 친한 척하는 사람들에겐 왠지 거리감을 느낀다.  아니, 그렇게 느꼈었다.  그만큼 친한 사이가 못 되는데도 불구하고 너무 쉽게 자기 자신을 발가벗겨 보여주는 사람들에게서 오히려 그것이 진정 그 사람의 속마음인지 아닌지 믿기지 않는 경우가 많았었다.  어느 자리, 어떤 경우에서건 깍듯이 예의를 차리고, 상대방으로 하여금 허물없이 함부로 대하는 행동을 못 하도록 의도적으로 차단했었다. 

 

그러나 내가 가르치는 아이들의 부모님들과 허물없이 지내면서부터 그들의 넋두리도 싫은 표정 하나없이 들어줄 수 있고, 늦은 시각에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도 웃으며 문을 열어줄 수 있게 되었다.  플라스틱 바가지에 볼품없이 담아온 방울 토마토도 그 자리에서 거리낌없이 입에 넣을 수 있는 내공을 쌓았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저자와 나는 생면부지의 남남이지만 의외로 공통점이 많다고 느꼈다.  경제학을 전공한 것도 그렇고, 전공과 다르게 비경제적으로 사는 것도 그렇고, 평범함 속에서 안빈낙도하는 것도 그렇고, 당장 시급하지도 않은 공부로 세월을 대충 뭉개는 것도 그랬다.

 

 총 6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화려했던 이력을 뒤로 하고 99% 비주류의 길을 자발적으로 선택한 저자의 일상을 담고 있다.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인 사람들에게는 그의 말이 어쩌면 배부른 소리로 들릴 수도 있겠다.  먹고 살만 하니까 그러는 거라고.  맞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먹고 사는 문제를 빼고는 다른 어떤 것에도 눈길조차 줄 수 없게 만든 현 상황의 원인을 찾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한순간 부딪쳐야 하는 산이 있다.  그의 이야기는 이 아름다운 봄날의 아지랑이처럼 실체가 없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 산을 넘을 방법만이라도 찾아보자는 간절한 호소일 수도 있다.

 

"우리가 살면서 사랑할 것도 많고, 보살필 것도 많다.  마흔을 넘어선 나의 친구들에게, 이제 우리는 슬슬 내려놓을 준비를 하면서 비우는 것을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얘기를 해주고 싶다.  그래야 진짜로 사랑할 것들이 보이게 될 것 같다."  (P.357)

 

내가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일일이 물어볼 수만 있다면 꼭 한 번 물어보고 싶은 질문이 있다.  냉전체제가 무너진 지가 언젠데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시퍼렇게 살아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수구꼴통이니 좌빨이니 하는 말들은 이제 듣기도 싫고 보면 볼수록 신물이 난다.  정치를 직업으로 선택한 정치꾼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국민들은 그렇게 편을 갈라 무슨 득이 있다고 그렇게 하는 것인지...  나와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삶은 얼마나 다채롭고 다이내믹하게 흘러가는 것인가.  그런 점에서 나와 견해가 다른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백 번이라도 감사의 인사를 해야 옳지 않은가, 하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오직 나만의 문제가 아닐 것이라고 본다.

 

"누군가 내게 정색을 하며 "무언가를 간절하게 원한다면", 이런 얘기를 또 한다면 난 소주병으로 머리를 한 대 때려주겠다.  큰 걸 보다가 우리는 너무 쉽게 작은 것의 함정에 빠진다.  마케팅사회, 자기계발서의 덫에 걸리면 '원하는 것'에 영혼을 파는 아주 이상한 삶을 살게 될지도 모른다.  간절하게 원하는 것, 그게 바로 악마가 바쁠 때 대신 보내는, '자기계발서'라는 악마의 대리인이 내뱉는 첫 번째 속삭임이 아닐까 싶다."  (P.318)

 

나는 이 책을 가스통을 들고 설쳐대는 극단적 우파들에게 권하고 싶다.  자신의 조국에서 추방된 후에도 조국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 않았던 솔제니친을 존경한다면 우리는 한번쯤 그의 말을 음미해야 한다.  1978년 미 하버드대학 연설에서도 그는 "러시아는 서구의 민주주의나 공산주의와도 화합할 수 없는 독특한 문명을 지니고 있다. 때문에 역사와 전통을 고려한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했다.  진정한 우파라면, 그리고 사기꾼이 아닌 진정한 애국자라면 솔제니친과 같은 소신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우리는 좌파든, 우파든 서로 마음을 열고 대화할 수 있지 않겠나.  나의 바람은 그런 조국에서 단 하루만이라도 살아보고 싶은 것이다.

 

주류사회로부터 어느 날 갑자기 비주류의 저잣거리로 내려온 저자의 선택은, 그것이 그의 자발적 의사결정이었든, 등 떠밀려서였든, 그의 가치관에 비춰 보았을 때 최선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취해진 일련의 결과물이라고 본다.  그렇다고 그의 가치관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책을 사랑하는 독자라면 이념의 색안경은 벗어 던져야 하지 않을까?  우파이면서 좌파 인사의 책을 읽는다고 하여 자신의 신념이 더럽혀지고, 파랭이가 갑자기 빨갱이로 바뀌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래야만 최소한 좌,우의 균형을 갖춘 1인분의 인생을 살 수 있지 않겠는가.  그래야 우리는 지금과 같은 정치 괴물의 출현을 막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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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수레바퀴 - 죽음을 통해 삶을 배우고자 하는 이에게
엘리자베스 퀴블러-로스 지음, 강대은 옮김 / 황금부엉이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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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선이 있던 엊그제는 봄비가 촉촉히 내렸다.  잎샘추위도 꽃샘추위도 다 지난 듯한 이맘때쯤에 내리는 비는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그야말로 단비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자서전<생의 수레바퀴>를 읽으며 '죽음'을 생각했다.  언제부터인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내가 생각하는 '죽음'은 언제나 담담하고 평온한 것이었다.  시각적으로 보여지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은 그저 허상일 뿐, 실제는 많이 다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맑던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고 새 생명을 키우는 봄비가 내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현상, 그것이 '죽음'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모든 사람은 같은 근원에서 왔고 같은 근원으로 돌아간다.  우리는 모두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인생에서 만나는 모든 고난과 모든 악몽, 신이 내린 벌처럼 보이는 모든 시련은 실제로는 신의 선물이다.  그것들은 성장의 기회이며, 성장이야말로 삶의 유일한 목적이다."  (P.384)

 

<인생수업>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스위스의 중산층 가정에서 세 쌍둥이의 맏이로, 살아나리라고 기대하지도 않았던 900그램의 미숙아로 인생을 시작한 그녀가 인류에게 가장 큰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으려 했던 '죽음'이라는 주제에 인생의 대부분을 바쳤던 저자의 삶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문구 회사의 부사장으로 재직하던 그녀의 아버지가 자신의 회사에서 일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의사가 되겠다는 일념으로 집을 뛰쳐나갔던 당찬 소녀는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폴란드에서 봉사활동을 하던 중 나치스의 마이다네크 수용소를 방문한다.  사람들이 가스실로 끌려가기 전날 밤을 보낸 막사의 벽마다 가득 그려진 나비 그림을 보며 품었던 강한 의문은 그로부터 스물다섯 해가 지나서였다.

 

"우리 몸은 나비가 되어 날아 오를 번데기를 품은 고치처럼, 영혼을 감싸고 있는 허물이다.  때가 되면 우리는 몸을 놓아버리고. 고통도 두려움도 걱정도 없이, 아름다운 한 마리의 나비처럼 자유롭게 날아 하느님의 집으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우리는 절대 혼자가 아니며, 계속해서 성장하고 노래하고 춤춘다.  그곳에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상상할 수도 없는 커다란 사랑에 둘러싸인다."  (P.382)

 

선거를 앞두고 경쟁적으로 자서전을 쏟아내는 우리나라 정치인들의 행태에 신물이 난 나는 자서전이라면 지레 피하고 본다.  읽히지도 않는 쓰레기와 같은 책을 겉만 번지르르하게 꾸며 출판회를 갖는 모습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래서인지 기억에 오래 남는 자서전은 몇 권 되지 않는다.  내가 이 책을 만난 것도 우연이었다.  떠돌이 철학자로 유명한 에릭 호퍼의 자서전을 읽으려고 도서관에 들렀다가 눈에 띈 이 책을 나는 순간의 갈등도 없이 대출을 했다.  책을 다 읽은 지금, 그때의 선택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고 느껴진다.

 

여담이지만 내가 읽은 자서전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은 아리에 도르프만의 자서전 <남을 향하며 북을 바라보다>와 <스콧 니어링 자서전>, <간디 자서전>, 그리고 이 책 <생의 수레바퀴>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하게 밝힐 수는 없지만 이 책들 상호간에 어떤 연관성이 있을 것만 같다. 

 

호스피스 운동의 창시자이자 죽음학의 세계적인 대가인 저자가 말년에 이르러 뇌졸중으로 쓰러져 휠체어와 침대를 오가며 생활하는 악조건 속에서 생을 되돌아보며 심혈을 기울여 썼다는 이 책에서 의학자와 영성가로 평생을 살았던 저자의 분투와 노력이 가슴 깊이 느껴진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정신분석이나 심리학 분야에 있어 왜 스위스 출신들이 많은가? 하는 의문이 그것인데, 칼 구스타프 융이나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삶을 살펴 보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 보인다.  세계 어느 곳보다도 때묻지 않은 자연 속에서 살았던 그들에게 깊은 사색과 인간에 대한 사랑, 자연과의 친숙함이 원숙한 삶을 살게 한 원천이 아니었을까?

 

"우리가 성장하는 데 특별한 스승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삶의 스승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난다.  아이로, 말기 환자로, 청소부로......, 세상의 그 어떤 학설과 과학도 타인에게 마음을 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의 힘에는 미치지 못한다."  (P.189)

 

저자의 또 다른 책<상실수업>에는 이런 귀절이 있다.  "평화는 고통의 정중앙에 놓여있다."  나는 이 말을 참 좋아한다.  세상에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결국 부딪쳐 해결해야 하는 일이라면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수밖에는 달리 도리가 없다.  우리는 그럴 때 비로소 평화를 얻는다.  며칠 전 한 포털 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에 한 여배우의 이름이 오르내린 적이 있었다.  극심한 고난과 상실의 아픔 속에서 살았던 그녀의 얼굴에서 한줄기 햇살처럼 따뜻한 평화의 순간을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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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학자 시턴의 아주 오래된 북극]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동물학자 시턴의 아주 오래된 북극 - 야생의 순례자 시턴이 기록한 북극의 자연과 사람들
어니스트 톰프슨 시턴 지음, 김성훈 옮김 / 씨네21북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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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안도현은 그의 저서 <가슴으로도 쓰고 손끝으로도 써라>에서 "시인의 관찰은 과학자의 관찰에 버금가는 것이어야 한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어차피 인간의 삶이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관계맺기'에 지나지 않으니 더불어 사는 모든 것들을 세세히 살피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삶을 잘 꾸리고자 하는 사람의 첫번째 임무가 되어야 하며 좋은 시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세계적인 동물학자이자 에세이스트였던 시턴의 글을 읽었다.  화려한 치장이나 양념을 곁들이지 않은 담백하고 솔직한 글이 마치 한 편의 시를 읽고 있는 듯했다.  그의 마음속 깊은 곳까지 환하게 비춘다고나 할까.  아무튼 학자로서의 시턴은 그 이름의 무게에 걸맞게 글솜씨 또한 나무랄 데가 없었다.

 

"이곳은 숲의 최북단 지역으로, 숲이 끝나면서 나무들도 점차 왜소해지는 구역이다.  눈에 보이는 가문비나무들마다 이 척박한 곳에서 자라고 씨를 뿌리느라 평생 전쟁과도 같은 삶을 살아온 흔적들이 보였다.  추위와 역경 때문에 나무들이 모두 하나같이 잘았다.  하지만 그런 역경을 극복하고 살아온 결과는 무척 아름다웠다."  (P.236)

 

이 책에서 시턴은 1907년 캐나다 북서부의 삼림지대와 초원지대를 6개월 동안 카누를 타고 여행을 하며 그가 겪고 보았던 것들을 직접 그린 스케치와 더불어 꼼꼼히 기록하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이나 전의 기록이지만 그는 서문에서 시간의 흐름을 50년쯤 되돌려 1년 정도 살다 올 수만 있다면 어떤 수고인들 마다하지 않겠다고 아쉬워 한다.  한 세기를 앞서 살았고, 지금보다 훨씬 생생한 자연을 볼 수 있었을 텐데도 그 당시에 이미 사라져버린 자연과 풍경에 대해 안타까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따진다면 현대를 사는 우리는 파괴된 자연을 보며 애통함의 눈물을 흘려야 마땅할 터이다.  작가는 북극 지역을 둘러본 소회를 이렇게 적었다.

 

"나는 더 주체하지 못할 때까지 내 마음이 방랑벽에 흠뻑 젖어들게 내버려두었었고, 북풍이 뒤로 남긴 자취를 따라 먼 곳을 향해 길을 나섰었다.  나는 거대한 북쪽의 숲에서 붉은 살갗의 인디언과,버펄로, 무스, 늑대들과 함께 어울렸다.  나는 인간의 발자취와 총소리가 닿은 적 없고, 대초원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던 거대한 고독의 땅을 보았다.  (중략)  이 모두가 내가 열정을 불태워 해낸 일들이다.  그러니 이제 족한가?  족하다니!  세상 그 누가 그토록 오랜 꿈을 한 번 찔끔 맛본 것으로 만족할 수 있단 말인가?"  (P.400)

 

작가에게 6개월이라는 결코 짧지 않았던 여행은 그저 아쉬웠던 하루의 기억처럼 짧게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당연한 일이지만 자연의 일부인 인간은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동화되고, 그 모든 것들과 교감할 때 지상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을 맛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 소중한 가치를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헌신짝처럼 버리고 있다.

 

오늘 아침, 비바람이 몰아치던 어제와는 달리 한결 부드러워진 바람과 개인 하늘을 보며 언제나처럼 산을 올랐었다.  산책로에 쌓여있는 잔가지와 솔잎, 낙엽 등을 밟으며 을씨년스러웠던 어제의 날씨를 생각했다.  길어지는 상념을 깨우려는 듯 청설모 한마리가 인기척에 놀라 후다닥 달아난다.  그리고 까치 한 마리가 푸드덕 공중으로 날았다.  신선한 아침이었다.  이 상쾌한 기분을 아파트에 누워 어찌 맛볼 수 있으랴.   

 

자연에 대한 꼼꼼한 관찰자이자 기록자로서의 시턴의 묘사는 그가 좋은 화가이기도 하고, 좋은 에세이스트이기도 하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그가 직접 그린 스케치와 쉽고, 유머러스한 글은 아이와 같이 솔직 담백한 그의 성격과 잘 어우러져 100년 전 북극의 자연 속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생각해 보면 그 시대에 우리의 산천도 호랑이와 여우, 곰과 늑대가 뛰놀았던 에덴 동산이었을 것이다.  그 시대로 다시 거슬러 올라가 작가의 바람처럼 딱 1년만 살 수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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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브라이슨의 대단한 호주여행기]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빌 브라이슨의 대단한 호주 여행기
빌 브라이슨 지음, 이미숙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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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대학 시절, 어학연수차 갔던 호주에서 나는 1년을 살았다.  유학 알선 업체에 대행을 맡긴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호주에 친인척이 살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물설고 낯설은 그곳에 가고자 결심했던 것은 모험이나 다름없었다.  당시에는 호주로 가는 직항 노선이 없었다.  자카르타를 경유하여 시드니 공항에 내렸을 때, 막연했던 두려움이 공항 로비에 현실로 펼쳐진 모습을 보자 떠나기 전의 자신감은 온데간데없고 한참을 우두커니 서서 되돌아 가고 싶은 유혹과 싸워야만 했다.

 

은행에서 계좌를 개설하고, 광고지를 보며 집을 알아보고, 떠듬거리는 말로 집주인과 통화를 하고, 어찌어찌 약속을 잡아 집을 구경하고, 월세를 흥정하고...  지금 생각해도 그 숱한 난관을 뚫고 시드니 외곽에 세를 얻어 1년을 살았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아르바이트로 모은 얼마 되지 않는 돈으로 1년을 버텨야 했다.  시드니에서 차를 타고 가도 1시간 30분이나 걸리는 곳에 셋방을 얻고 보니 당장 급한 것이 교통편이었다.  국제면허를 취득하고 바퀴만 간신히 굴러가는 중고 자동차를 사서 통학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모든 게 젊은 날의 낭만처럼 느껴지지만 그때는 살아서 한국에 갈 수 있을까를 걱정해야 했다. 

 

'빌 브라이슨의 대단한 호주 여행기'를 읽는 내내 그때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라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었다.  호주에 다녀온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면 생경하고 이질적인 지명과 크기와 모양을 짐작할 수 없는 동식물에 반쯤 흥미를 잃고, 그곳에 펼쳐진 풍경과 거대한 고요는 더더구나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으리라.  몇 천 키로를 차로 여행한다는 것, 그 먼 거리를 달리면서도 단 한 사람도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 그리고 여행 도중에 닥칠 수 있는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호주 여행은 여행이 아니라 익스트림 스포츠에 가깝다.

 

작가가 호주 전역을 둘러볼 생각을 한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지만, 그가 20년 동안의 영국 생활을 정리하고 다시 미국에 돌아와 애팔래치아 트레일 종주를 감행했던 것을 떠올리면 대단하다는 생각은 금세 사라지고 만다.  이 책에서도 빌 브라이슨의 위트와 유머가 간간이 드러나지만 작가는 자신의 장점을 조금쯤 숨기고 그 대신에 미지의 영역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역사적 기록을 첨가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호주의 매력을 만끽할 기회를 제공하려는 듯하다.  작가의 이러한 배려는 곳곳에서 드러나지만 자칫 지루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낳게 한다.  '세계의 배꼽'이라 불리는 울루루를 작가는 이렇게 묘사했다.

 

"본인도 이해할 수 없고 정확히 설명할 수 없는 기묘한 방식으로 그 바위를 알고 있다고 느낀다(친밀하지 않은 친밀함이라고나 할까).  존재의 깊은 내면 어딘가에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원초적인 기억의 단편, 끊어진 DNA의 작은 꼬리가 꿈틀거렸다.  이해하거나 해석할 수 없을 정도로 미세한 움직임이지만 최면 상태에 빠진 듯한 거대한 존재가 종(種)의 단계에서 (어쩌면 올챙이 같은 수준의 단계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으며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여러분이 이곳을 찾은 게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는 일종의 확신을 느낀다."  (P.344) 

 

뉴욕타임스는 이 책의 소개에 있어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나기 전이나 향하는 도중에 꼭 읽어야 할 책이 있다면 이것이 바로 그 책이다."라고 썼지만 나는 그 반대다.  최소한 호주를 반쯤 둘러보았거나 호주 여행에서 돌아와 친구들과 떠들썩한 술자리를 갖은 다음날 화장실 바닥에 맘 속의 추억을 모두 토하여 검지 손가락 끝으로 하나하나 헤짚어 가며 혹시 잃어버린 기억이 없는지 찾아볼 때 꼭 권하고 싶은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호주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이라면 오히려 <박훈규 언더그라운드 여행기>를 읽어야 여행 전의 들뜨고 부푼 마음을 배가시키지 않을까 한다.

 

호주에서 어학 연수를 할 때 내가 자리를 잡고 일상의 쳇바퀴를 서툴게 돌리고 있을 즈음 퍼스로 어학 연수를 왔다는 대학 동기의 전화를 받았다.  나는 반가운 마음을 최대한 표현하고자 퍼스까지 당장 달려가겠다는 약속을 했다.  전화를 끊고 지도를 펼쳤을 때, 내가 한 약속이 얼마나 무모한 짓이었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시드니에서 장장 4000키로, 길이라도 잘못 들면 배가 될지도 모르는 그 길을 내 낡은 자가용을 타고 달려갈 생각을 했으니...  같은 집에 살던 모든 사람들(특히 주인집 아주머니)이 말렸지만 고집을 꺾지 않았다.  떠나는 날 아침 그들의 표정은 마치 장례식장에 참석한 사람들의 그것처럼 우울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그 길에서 어이없는 실수와 자동차 고장으로 고생을 사서 한 셈이었지만 그 덕분에 친구와 함께 이 책의 마지막장에 나오는 샤크만도 구경할 수 있었다.  작가는 여행을 끝내는 소감을 이렇게 적었다.

 

"큰 여행을 끝낼 때마다 나를 압도하는 우울한 심정으로 운전을 했다.  하루 이틀 후면 뉴햄프셔로 돌아가고, 이 모든 경험은 디즈니 영화에서처럼 내 머릿속의 먼지 나는 다락방으로 직행해 반세기 동안 혼란스러웠던 삶의 우스꽝스럽고 뒤죽박죽인 축적물 속에서 자기 자리를 찾을 것이다."  (P.404)

 

책은 아웃백과 더불어 시드니와 캔버라, 멜버른 등의 여러 도시들, 그리고 세계 최대의 산호 군락 '그레이트 배리어 리프' 등 다양한 여행 목적지들을 소개하고 있다.  낙천적인 그의 성격에 비해 책의 내용은 소심할 정도로 촘촘하고 세심하다.  호주를 여행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기 전에 한번쯤은 다시 찾고 싶은 꿈을 꿀 것이다.  지금의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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