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
김영민 지음 / 사회평론아카데미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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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 시절의 일이었으니 꽤나 오래전의 이야기이다. 강원도의 한 암자를 그곳에 계신 스님과 함께 올랐던 적이 있다. '그게 뭔 큰일이라고?' 하며 반문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암자는 상수원 보호구역에 위치해 있던 관계로 일반인의 출입이 엄격히 통제되는 곳이었고, 길게 이어진 철조망 사이에 난 엉성한 출입문조차 평시에는 늘 잠겨 있었다. 암자로 가는 유일한 통로였던 그 길을 사람들은 적잖이 궁금해하면서도 출입문에 붙은 경고문구 때문인지 감히 그곳에 발을 들여놓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나는 스님과 함께 출입문을 통과하여 두어 시간의 산행 끝에 암자에 닿을 수 있었다. 그때 산 정상에서 내가 느꼈던 첫 느낌은 내가 문명의 소음으로부터 완전히 멀어졌다는 생소한 느낌이었다. 바람소리와 새소리가 그렇게 선명하게 들렸던 적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 아니었나 싶다. 너무도 조용하다는 건 아마도 인간이 내는 백색 소음이나 평소 우리가 들리는 줄도 모른 채 간과하며 지냈던 온갖 문영의 소리, 예컨대 차소리, 앰프 소리, 특정할 수 없는 온갖 기계음 등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상태를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온갖 소음에 너무나 잘 적응이 되어온 탓에 자신이 듣고 싶은 소리만 선별적으로 들을 수 있는 기술을 아주 이른 나이부터 습득했다는 사실을 나는 그곳에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소리의 경우도 마찬가지 아닐까. 정말 아무 소리도 없는 정적 상태는 고요하기보다는 고요함이 시끄럽게 설치고 잇는 상태처럼 느껴진다. 차라리 백색소음이 있는 것이 어떨까. 아무 소리도 없는 것보다는 백색소음이 있어야 마음이 더 안정된다고 호소하는 사람들이 있다. 백색소음이 있어야 집중이 더 잘되고, 잠도 더 잘 온다는 사람들도 있다."  (p.41)


김영민 교수의 산문집 <인생의 허무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읽었던 것은 지난달 중순께였다. 2년 전쯤에 읽었던 저자의 다른 책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가 여전히 긍정적인 인상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스스럼없이 읽게 된 책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렇다 할 리뷰를 쓰지 못한 채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었다. 10.29 참사의 여파가 가슴 한켠을 차갑게 파고들었던 것도 한 이유였다. 산다는 것은 허방을 짚듯 허망한 일이지만 이태원의 뒷골목에서 아프게 스러졌던 젊은 영혼들이 그와 같은 삶의 진리를 깨닫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가 아니었을까. 우리가 끝내 안타까워하는 이유도 그런 까닭이다.


"공권력은 폐허를 감춘다. 폭력과 재난이 발생한 곳의 삶은 폐허일 수밖에 없지만, 공권력의 화장술은 폐허의 사금파리들을 시야에서 흔적도 없이 치워버린다. 공권력이 폐허를 가리고 덮어 사람들의 망각을 부추길 때, 예술가들은 사람들에게 폐허를 상기시킨다."  (p.30)


1 '허무의 물결 속에서', 2 '부, 명예, 미모의 행방', 3 '시간 속의 필멸자', 4 '오래 살아 신선이 된다는 것', 5 '하루하루의 나날들', 6 '관점의 문제', 7 '허무와 정치', 8 '인생을 즐긴다는 것'의 총 8개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어쩌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인생의 허무와 그것을 딛고 살아야 할 이유를 저자 나름의 철학으로 잘 정리하고 있다. 그럼에도 언뜻언뜻 저자의 숨은 의도가 엿보이는 문장들이 등장하곤 한다. 주제에서 벗어난 듯한 이러한 문장들을 통하여 독자들은 마치 숨은 그림 찾기를 하듯 책의 문장들을 꼼꼼히 훑으며 시간을 소일하게 된다.


"그러면 누가 미숙한 정치가인가? 선한 의도를 과신한 나머지 근거 없는 자신감이 충만한 정치인이 아닐까. 그런 사람이 큰 권력을 손에 쥐게 되면, 그 권력을 멍청하지만 과감하게 행사할 것이다. (......) 막대한 화재가 치밀한 악의를 가진 성인에 의해서만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막연한 선의를 가진 유아에 의해서도 일어날 수 있다. 모든 국민이 직업 정치인이 될 수는 없다. 그러나 유아에게 권력이라는 화염방사기를 쥐어줄 것인가의 문제는 결정할 수 있다."  (p.228~p.229)


최근에 우리나라의 시사 프로그램에서 흔히 듣는 말은 '정치가 실종됐다'는 것.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나라 국민들은 지난 대선에서 유아에게 권력이라는 화염방사기를 쥐어줬기 때문이다. 그런 엄청난 선택을 한 대가는 참으로 혹독하다. 여와 야의 대치는 물론 남과 북의 극한 대치로 한반도의 전쟁 가능성은 최대치로 높아졌고, 이를 반영하듯 해외 투자자들은 서둘러 자금을 빼고 있으며, 결과적으로 환율은 치솟고, 수입 물가가 오르고, 서민들의 생활고는 나날이 높아지고 있다. 문제는 본격적인 경기침체 상황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유아에게 권력이라는 화염방사기를 쥐어준 대가 치고는 너무 혹독한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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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김훈 지음 / 문학동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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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기원은 한순간의 '끌림'에 의해 소설가를 유도하고, 그 '끌림'에 의해 탄생한 소설 역시 '끌림'을 통하여 독자들을 유인한다. 양전하와 음전하에 의해 전기를 띠게 되는 대전체처럼 소설가의 열정과 상상력은 세상의 모든 낱낱의 '끌림'을 유도하는 '끌림'의 대전체. 나는 김훈의 소설 <하얼빈>을 읽는 내내 소설가가 이룩한 '끌림'의 대전체에 기꺼이 감전되고픈 한 마리 부나방이라는 생각을 했다.


"포수, 무직, 담배팔이, 이 세 단어의 순수성이 이 소설을 쓰는 동안 등대처럼 나를 인도해 주었다. 이 세 단어는 생명의 육질로 살아 있었고, 세상의 그 어떤 위력에도 기대고 있지 않았다. 이것은 청춘의 언어였다. 이 청년들의 청춘은 그다음 단계에서의 완성을 도모하는 기다림의 시간이 아니라 새로운 시간을 창조하는 에너지로 폭발했다."  (p.303 '작가의 말' 중에서)


일본의 천황 메이지가 대한제국의 황태자 이은을 접견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조선의 청년 안중근의 대의와 일본의 노련한 정치가이자 전략가인 이토 히로부미의 대의가 맞부딪히는 순간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안중근의 일대기가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일반의 전기문처럼 쓰인 게 아니라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이토를 쓰러트린 순간과 그 전후의 짧은 나날들을 조망한다. 말하자면 소설가 김훈의 눈에 비친 안중근의 삶은 응축된 에너지를 한순간에 폭발시키는 불꽃과도 같은 삶이었다. 그것은 다른 누군가의 명령이나 오랫동안 준비된 계획이 아니라 하나의 마음, 어떠한 논리로도 설득될 수 없는 붉은 마음이었음을 김훈은 말하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훈은 이러한 안중근의 마음을 우덕순의 그것으로 비껴가고 있다.


" - 그대는 안의 명령에 따른 것인가?

  - 아니다. 나는 안에게 명령을 받을 의무가 없다. 또 명령을 받을 의무가 있다 하더라도 이런 일은 명령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나는 내 마음으로 한 것이다."  (p.232)


우리는 시시각각 스스로 말을 짓고, 자신이 지은 말을 누군가에게 전달하면서 살아간다. 작가는 생활인이 아닌 직업인으로서 말을 짓고, 자신의 말을 일반 대중을 향해 던진다. 그것은 청년 안중근이 이토를 향해 총부리를 겨누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안중근은 인간 이토를 저격한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를 신봉하는 수많은 제국주의자들의 가슴을 향해 결연한 단절의 의지로써 총을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말이, 혹은 작가의 언어가 각자가 품은 의사를 표현하는 것처럼 안중근 역시 제국주의를 신봉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죽음을 통해 그것의 부당함을 알리고자 했을 터, 목숨이 자신의 의사표현을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쓰일 수 있었음에 안중근은 마지막까지 안도했는지도 모른다.


"앎이 통절한 자들은 세상을 바꿀 수 있는데, 앎이란 곧 사물의 실상을 보는 정신의 작용이다. 실상을 보는 자는 몸 둘 자리를 알고 몸 쓸 방편을 스스로 안다. 이 세계는 인간이 만드는 구조물이다. 이것이 우리의 앎이다. 우리의 앎은 사물을 향해 나아간다. 이것이 제국의 길이다."  (p.80)


그렇다면 소설가 김훈은 독자들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도마 안중근과 조국을 위해 살인도 불사하겠다는 속인 안중근의 갈등을 보여주려 했을까 아니면 일본의 제국주의론과 안중근의 동양평화론이 맞부딪히는 순간을 이토의 저격을 통해 현실화하고자 했던 청년 안중근의 야심과 그를 지지하고 응원했던 여러 인물들의 삶을 부각하려 했을까. 아니면 안중근에게 세례를 준 빌렘 신부와 그 당시 한국 교회를 통솔했던 뮈텔 주교의 갈등을 역사 속에서 다시 되살리려 했던 것일까. 사형을 선고받은 안중근은 죽음을 앞두고 신에게 자신의 죄를 고할 수 있기를 염원했고, 빌렘 신부는 뮈텔 주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안중근이 있던 뤼순 감옥을 향한다. 그리고 빌렘 신부는 안중근을 면회한다.


"빌렘은 주일미사 강론 원고를 쓰지 못했다.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는 알 수 있었으나, 그것을 말해도 되는 것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말은 하느님의 것이고 또 이 세상의 것이었다. 하느님의 나라와 이 세상 사이의 먼 길을 말은 건너가기 힘들었고 말하려는 것이 문장으로 엮어지지가 않았다. 새벽에, 빌렘은 원고 쓰기를 단념했다. 문장으로 엮지 말고, 말하여지는 대로 말하는 편이 오히려 진심에 가까울 것이라고 빌렘은 판단했다. 빌렘의 종이 위에는 죄, 살인, 생명, 영혼, 구원...... 같은 단어들이 문장으로 엮이지 못하고 흩어져 있었다."  (p.245)


작가에게 대전(帶電)되는 모든 단어들이 문장이나 책으로 엮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단어는 일필휘지로 순식간에 책으로 엮여 독자들에게 배포되기도 하고, 또 어떤 단어는 오랜 시간을 건너 어렵게 어렵게 그 생명력을 득하기도 한다. 그러나 작가에게 대전되었던 많은 단어들이 끝내 책이나 문장으로 엮이지 못한 채 조용히 소멸하고 만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인연이 닿지 않았던 수많은 단어들의 소멸을 누군가는 기억하고 또 기려야 한다. 역사의 한 순간을 김훈 작가가 기억함으로써 불꽃처럼 타올랐던 청년 안중근의 삶이 2022년을 사는 우리에게 되살아났던 것처럼 작가에게 이끌렸으나 끝내 소멸할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단어들의 운명을 기억함으로써 우리는 <하얼빈>보다 더 절절한 그들의 이야기를 제야의 종소리가 울리는 미래의 어느 해에 한 권의 책으로 엮을 수 있지 않을까. 소설 <하얼빈>은 내게 우연처럼 이끌렸던 몇몇 단어들이 한 권의 책으로 엮이는 기적으로, 그리고 그 기적에 부나방처럼 이끌렸던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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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하나 365일, 챌린지 인생 문장 - 1년은 사람이 바뀔 수 있는 충분한 시간
조희 지음 / 리텍콘텐츠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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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삶을 아무리 정교하게 계획하고 절제하며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향해 하루하루 나아간다고 해도 모든 게 자신이 처음 구상했던 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목표를 이루기도 전에 우리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돌발 변수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엉뚱한 방향으로 우리를 인도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삶의 신비는 바로 그 지점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자신의 삶을 아무런 계획도 없이 되는 대로 살라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삶이 계획한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서 실망할 필요도, 신을 원망할 필요도 없다는 뜻이지요. 살다 보면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어떤 부분은 그저 운명이려니 생각하면서 툭툭 털어버릴 필요가 있음을 자연스레 깨닫게 됩니다.


집 근처의 도서관을 시간이 날 때마다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듯 번질나게 드나들다 보니 도서관에 근무하는 직원들뿐만 아니라 나와 비슷한 유형의 사람들을 여럿 알게 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햇수로 십여 년 이상을 제집처럼 드나들었으니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도서관에서 만난 인연들은 저보다 한참 연배가 높은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다니던 회사에서 은퇴 후 도서관에서 책을 읽거나 취미 생활을 하면서 소일하는 것이지요. 그분들 중 한 분은 모 은행에서 교육을 담당하셨던 분인데 지금은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 자주 만날 수는 없지만 전에는 일주일에 적어도 한두 번을 만날 정도로 가깝게 지냈습니다. 그분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도서관에서 반나절을 보내곤 했습니다. 읽고 싶은 책을 꺼내 읽다가 기억해야 할 문구를 볼라치면 반드시 자신의 노트에 기록하여 간직하곤 했던 것이지요. 그렇게 모은 노트만 수십 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나와 만나기 시작했던 어떤 시점부터는 자신의 노트를 다시 읽으면서 새로운 노트에 다시 간추려 꼭 기억해야 할 문구를 기록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언젠가 자신이 세상을 떠났을 때 아들에게 물려주고 싶다는 뜻도 내비쳤습니다. 인문학자 조희가 쓴 <하루하나 365일, 챌린지 인생 문장>을 읽으면서 그분 생각이 났던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문학, 철학, 경영, 자기계발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책 한 권을 저술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독서를 하고 요약하는 일을 꾸준히 해왔습니다. 책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문장이 저에게 인생문장으로 다가왔습니다. 특히 큰 울림을 주었던 몇 문장들은 삶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지요."  (p.4 'prologue' 중에서)


SESSION 1 '운명에 맞서 개척하는 인생, 도전의 계절', SESSION 2 '달콤한 환상 꿈같은 사랑, 열정의 계절', SESSION 3 '어떨 때는 배반하는 인생, 인내의 계절', SESSION 4 '흐르는 시간 영원한 사랑, 이성의 계절'의 총 4부로 구성된 이 책은 저자가 읽고 발췌한 하나의 문장을 제시하고 그 밑에 저자의 코멘트를 다는 형식으로 제작되어 365개의 문장으로 꾸려져 있습니다. 말하자면 1년 365일을 이 책과 함께 하면서 결심을 굳히고 부록에서는 책에 실린 문장 중 20개를 선정하여 '나의 인생문장집'을 만드는 미션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공지영 작가의 산문집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에서 발췌한 '일어나 걷는 자는 동사하지 않는다.'는 문장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은 코멘트를 달았습니다.


"우리는 인생에서 주저앉고 싶은 순간을 종종 맞이합니다. 하지만 주저앉아 있으면 추운 날씨와 내리는 눈에 그대로 얼어붙어 죽고 말죠. 반면에 일어나 걷는 자는 땀이 나면서 체온이 올라가고, 그 체온에 눈이 녹아 동사하지 않습니다. 오늘은 단 10분이라도 밖으로 나가 걸어보세요. 주저앉고 싶었던 마음이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질 것입니다."  (p.213)


내가 도서관에서 만나 지금까지 관계를 지속하고 있는 분도 그렇게 오랜 시간 공을 들인 그분의 인생 문장집에 대해 그 노트를 물려받을 당사자, 이를테면 그분의 아들은 그것에 대해 딱히 관심이 없다고 내게 하소연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분의 아들 역시 결혼하여 슬하에 어린 아들을 두고 있지만 아버지가 했던 삶의 방식을 그대로 물려받아 자신의 아들에게도 고스란히 물려줄 생각은 없을 듯합니다. 물론 그렇게 될 리도 없겠지만 말입니다. 어쩌면 그분의 아들은 아버지의 노트에 대해 그저 고리타분한 구시대의 유물쯤으로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아들의 인생길이 남들보다 수월하고 편한 길이 되기를 바라는 아비의 마음은 십분 이해한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2022년의 마지막 남은 한 주를 보내는 오늘, 새해에는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며칠 지나기도 전에 금세 잊어먹기도 하겠지만, 설사 그렇더라도 새해는 언제나 설레는 마음으로 맞아야 하겠습니다. 인문학자 조희의 <하루하나 365일, 챌린지 인생 문장>을 읽었던 것도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다가오는 새해는 올해와 다를 것이라는 희망,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도 그럴 것이라고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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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 다녀왔습니다
신경숙 지음 / 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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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의 산문집을 읽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다. 소설가라는 책무를 다하기 위함인지 작가는 자신이 쓴 소설 작품에 비해 산문집은 작품 권수가 현저히 적다. 소설가로 등단한 어떤 작가는 소설보다는 에세이에 치중하는 탓에 소설가인지 에세이스트인지 도통 구분이 되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에 비하면 신경숙 작가는 소설가라는 자신의 본분을 명확히 지키고 있는 게 아닌가. 물론 불미스러운 일로 한동안 작품 활동을 중단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등단한 지 40년 가까운 작가가 그런 불미스러운 사건 사고 하나 없이 홀로 깨끗한 것도 이상한 일, 작가를 아끼는 팬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여전히 작가의 편을 들고 싶은 것이다. 표절을 옹호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표절을 통해 박사 학위를 받았으면서도 얼굴 똑바로 들고 나다니는 사람에 비하면 한동안 자숙의 시간을 가졌던 신경숙 작가는 꽤나 양심적인 게 아닌가.


"물론 나는 이보다 더 나빠져도 요가를 계속할 것이다. 왜냐하면 요가는 이제 나에게 한끼 식사 같은 것이 되었으니까. 계속 숨을 쉬듯이, 내가 작가이니 계속해서 글을 쓰듯이 요가는 이제 조건 없이 나의 일상이 유지되는 한 계속하는 그런 것이 되었다."  (p.122)


내가 신경숙 작가의 산문집 <우울한 그늘>을 읽었던 건 딱 10년 전이다. 작가의 소설 작품만 읽어오던 내가 산문집을 읽었을 때의 감회는 새로운 것이었다.(신경숙의 산문집을 읽는 것은 참으로 오랜만이다. 소설가라는 책무를 다하기 위함인지 작가는 자신이 쓴 소설 작품에 비해 산문집은 작품 권수가 현저히 적다. 소설가로 등단한 어떤 작가는 소설보다는 에세이에 치중하는 탓에 소설가인지 에세이스트인지 도통 구분이 되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에 비하면 신경숙 작가는 소설가라는 자신의 본분을 명확히 지키고 있는 게 아닌가. 물론 불미스러운 일로 한동안 작품 활동을 중단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등단한 지 40년 가까운 작가가 그런 불미스러운 사건 사고 하나 없이 홀로 깨끗한 것도 이상한 일, 작가를 아끼는 팬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여전히 작가의 편을 들고 싶은 것이다. 표절을 옹호하겠다는 건 아니지만, 표절을 통해 박사 학위를 받았으면서도 얼굴 똑바로 들고 나다니는 사람에 비하면 한동안 자숙의 시간을 가졌던 신경숙 작가는 꽤나 양심적인 게 아닌가.


"물론 나는 이보다 더 나빠져도 요가를 계속할 것이다. 왜냐하면 요가는 이제 나에게 한끼 식사 같은 것이 되었으니까. 계속 숨을 쉬듯이, 내가 작가이니 계속해서 글을 쓰듯이 요가는 이제 조건 없이 나의 일상이 유지되는 한 계속하는 그런 것이 되었다."  (p.122)


내가 신경숙 작가의 산문집 <우울한 그늘>을 읽었던 건 딱 10년 전이다. 작가의 소설 작품만 읽어오던 내가 산문집을 읽었을 때의 감회는 새로운 것이었다.(https://blog.aladin.co.kr/760404134/5263012) 그렇게 나는 강산이 한 번 바뀐 후에 제목도 생소한 작가의 에세이집을 손에 들었던 것이다. 책의 제목인즉 <요가 다녀왔습니다>. 요가라고는 해본 적 없는 나로서는 택의 표지에 '신경숙'이라는 이름 석자가 없었더라면 결코 쳐다보지도 않았을 제목 아닌가.


"나는 체력을 잃고 난 뒤에 자주 심각해지고 좌절에 빠지고 작은 일에도 화를 내고 물건을 사납게 내려놓고 문을 쾅쾅 닫고 기다림에 인색해졌다. 마구 날뛰는 말 한 마리가 심장 부근에 살고 있다가 어딘가로 내달리는 느낌이었다. 그래 놓고 내가 왜 이러나 싶어 자책하곤 했는데 요가를 시작하고는 그게 사라졌다."  (p.37)


15년 넘게 요가를 하며 몸과 마음을 들여다본 일상을 평이한 문장으로 기록한 이 산문집은 달라질 것 없는 우리네 일상처럼 지극히 편안하고 단조롭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신경숙의 산문집은 <우울한 그늘>이 거의 유일했던 까닭에 소설이 아닌 산문에서의 문체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소설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하면서 읽게 되는데 <요가 다녀왔습니다>는 너무나 평이한 문체와 마치 집안에서 입는 일상복의 느낌이어서 독자이자 팬의 한 사람으로서 조금 당황했던 것도 사실이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도 신경숙 작가도 그렇고 시나브로 나이가 들고 있음이다. 다름을 통하여 남보다 앞서가려 했던 젊은 시절의 마음은 이제 온데간데없고 다른 작가들과 하등 다를 게 없는 평이하고 소탈한 문체를 통하여 자신의 속마음을 독자들에게 전하려 하는 것이다. 작가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 중 1인일 뿐이라는 느낌이 글 전체에 배어 있는 것이다.


"소설은 결국 문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쨌든 시작부터 끝까지 한 문장 한 문장을 벽돌처럼 쌓으며 나아가야 소설이 완성된다. 앞 문장에 의해서 뒤 문장이 이루어지듯 숨쉬기도 들이쉬기가 있어야 내쉬기로 이루어진다. 복식 호흡을 익혀나가는 일은 숨쉬기가 요가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해주는 과정이기도 했다."  (p.141)


아침에 내리던 눈은 낮이 되자 비로 바뀌었다. 우산을 쓰고 하교를 서두르는 아이들이 보이고, 종일 어두웠던 하늘은 다가올 추위를 예고라도 하려는 듯 내내 깊고 우울하다. 요가를 통해 삶의 활기를 되찾으려는 게 아니라 한 해 한 해 나이가 들고 그에 비례하여 늙어가는 자신의 몸에 알맞게 적응하려는 작가의 태도는 오늘처럼 흐리고 우울한 날엔 나로 하여금 더더욱 많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매일 아침 오르는 아파트 뒷산도 이따금 힘에 겨울 때가 있는 걸 보면 나의 몸도 조금씩 기울어가나 보다. 작가처럼 나도 아파트 인근의 요가원을 알아봐야 할까? 그럴 나이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렇게 나는 강산이 한 번 바뀐 후에 제목도 생소한 작가의 에세이집을 손에 들었던 것이다. 책의 제목인즉 <요가 다녀왔습니다>. 요가라고는 해본 적 없는 나로서는 택의 표지에 '신경숙'이라는 이름 석자가 없었더라면 결코 쳐다보지도 않았을 제목 아닌가.


"나는 체력을 잃고 난 뒤에 자주 심각해지고 좌절에 빠지고 작은 일에도 화를 내고 물건을 사납게 내려놓고 문을 쾅쾅 닫고 기다림에 인색해졌다. 마구 날뛰는 말 한 마리가 심장 부근에 살고 있다가 어딘가로 내달리는 느낌이었다. 그래 놓고 내가 왜 이러나 싶어 자책하곤 했는데 요가를 시작하고는 그게 사라졌다."  (p.37)


15년 넘게 요가를 하며 몸과 마음을 들여다본 일상을 평이한 문장으로 기록한 이 산문집은 달라질 것 없는 우리네 일상처럼 지극히 편안하고 단조롭다.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신경숙의 산문집은 <우울한 그늘>이 거의 유일했던 까닭에 소설이 아닌 산문에서의 문체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소설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하면서 읽게 되는데 <요가 다녀왔습니다>는 너무나 평이한 문체와 마치 집안에서 입는 일상복의 느낌이어서 독자이자 팬의 한 사람으로서 조금 당황했던 것도 사실이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도 신경숙 작가도 그렇고 시나브로 나이가 들고 있음이다. 다름을 통하여 남보다 앞서가려 했던 젊은 시절의 마음은 이제 온데간데없고 다른 작가들과 하등 다를 게 없는 평이하고 소탈한 문체를 통하여 자신의 속마음을 독자들에게 전하려 하는 것이다. 작가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 중 1인일 뿐이라는 느낌이 글 전체에 배어 있는 것이다.


"소설은 결국 문장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쨌든 시작부터 끝까지 한 문장 한 문장을 벽돌처럼 쌓으며 나아가야 소설이 완성된다. 앞 문장에 의해서 뒤 문장이 이루어지듯 숨쉬기도 들이쉬기가 있어야 내쉬기로 이루어진다. 복식 호흡을 익혀나가는 일은 숨쉬기가 요가에서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해주는 과정이기도 했다."  (p.141)


아침에 내리던 눈은 낮이 되자 비로 바뀌었다. 우산을 쓰고 하교를 서두르는 아이들이 보이고, 종일 어두웠던 하늘은 다가올 추위를 예고라도 하려는 듯 내내 깊고 우울하다. 요가를 통해 삶의 활기를 되찾으려는 게 아니라 한 해 한 해 나이가 들고 그에 비례하여 늙어가는 자신의 몸에 알맞게 적응하려는 작가의 태도는 오늘처럼 흐리고 우울한 날엔 나로 하여금 더더욱 많은 생각에 잠기게 한다. 매일 아침 오르는 아파트 뒷산도 이따금 힘에 겨울 때가 있는 걸 보면 나의 몸도 조금씩 기울어가나 보다. 작가처럼 나도 아파트 인근의 요가원을 알아봐야 할까? 그럴 나이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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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모르는 이야기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황시운 지음 / 교유서가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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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9 참사 시민 분향소에 다녀왔다. 스산한 날씨였다.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나이의 청년들이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영정 사진에 걸린 검은 띠만 제거하면 금방이라도 싱그러운 생명력이 되살아날 것만 같은 얼굴, 얼굴들. 제단에 국화꽃을 놓으며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는 사람들과 그들 틈에 섞여 짧은 조문을 마쳤던 나는 '어떻게 이럴 수가?' 하는 의문만 가슴 한가득 품은 채 분향소를 벗어났다. 참사 후 달포가 지나는 동안 마치 비현실적 상상의 세계에서 머물고 있는 듯한 유가족들과 그럼에도 여전히 현실의 이쪽 편에서 달라지지 않은 일상을 꾸려가고 있는 시민들. 도로 건너편에는 '정치 선동꾼 물러나라'거나 '윤석열 잘한다'는 현수막을 걸고 유가족들을 향해 막말을 쏟아내고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였다. 타인의 슬픔을 마치 자신의 슬픔인 양 함께 슬퍼할 줄 모르는 사람들. 저들처럼 반사회성 인격장애를 지닌 사람들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보인다. 타인의 아픔을 조롱하고 위로는커녕 막말과 욕설을 퍼붓는 인간 말종의 모습을 우리는 그저 우리 사회의 슬픈 자화상으로 인식하고 있을 뿐이다.


분향소에서의 감정이 되살아나 도무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읽기 시작한 황시운의 산문집 <당신이 모르는 이야기>는 자정이 넘어서야 다 읽었다. 어쩌면 나도 장애를 가진 누군가의 고통을 그저 머리로만 인식하며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그런 인식의 저변에는 '나는 절대로 그런 삶을 살지 않을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나 오만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책을 읽으면서 깨달았다. 책에는 200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2011년 '제4회 창비장편소설상'을 받았던 작가가 같은 해 봄 추락 사고를 당하여 하반신 마비의 장애를 갖게 되면서 겪었던 여러 에피소드가 실려 있다.


"사고가 일어나던 순간을 전후해서 벌어졌던 일들 중 일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수술 후 일정 기간 동안의 일은 선별적으로 기억하고 잇다. 그러나 허방을 딛던 순간 벼락처럼 덮쳐왔던 공포랄지 불안이랄지, 무언가가 쑥 꺼지는 듯한 상실감이랄지, 아무튼 그 순간의 느낌만은 지금까지도 생생하다. 그 끔찍한 감각은 그로부터 꽤나 오랫동안 눈만 감으면 나를 휘감았다 깜빡 잠이라도 들라치면 찾아오는 추락의 악몽뿐만이 아니라, 깨어 있을 때도 수시로 찾아오는 그 감각 때문에 몸서리쳐야 했다."  (p.193)


책은 사고 이후 하반신 마비 장애인으로 살게 되면서 겼었던 여러 일들을 다룬 1부 '어쨌든 다시 봄', 조카들과 엄마 아빠 등 가족의 이야기를 쓴 2부 '그간에 밀린 이야기들', 사고 후 재활 치료를 받으면서 만났던 사람들과 여러 에피소드를 다룬 3부 '움직여라, 발가락', 그럼에도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며 살아가야 하는 이야기가 실린 4부 '다시 시작할 산책'과 '작가의 말'로 끝을 맺는다. 작가는 어쩌면 이 한 권의 에세이를 완성하기까지 사고 후 십여 년의 세월 동안 죽음보다 더한 낙담과 고통의 순간들을 일상처럼 반복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한 명의 독자인 나는 그 고통의 강도를 1/10도 체감하지 못한다.


"다음날이 되어서도 그 남자가 한 말이 귓전을 맴돌았다. 그제야 모멸감이 밀려왔다. 남자는 전날 밤의 일을 기억해냈을까. 만약 기억해냈다면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부끄러워했을까. 아니면 별일 아니었다고 생각했을까. 그것도 아니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을까. 나를 이토록 두려움과 모멸감에 빠트려놓고 저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면 그건 너무 억울한 일이었다. 병신이라니. 병신 같은 년이라니. 재수가 없다니. 시간이 흐를수록 내게 그런 끔직한 욕지거리를 한 남자는 물론 그 순간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나에게까지 화가 치밀었다."  (p.276)


우리 사회의 약자들은 언제나 시간의 변방에서 살아간다. 현실에서 살아 있지만 그들은 살아 있다는 티를 내지 못한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순간 그들에게 되돌아가는 건 받아들일 수 없는 조롱이나 욕설일 뿐이다. 그것은 어쩌면 21세기 대한민국의 현실인 동시에 최고 권력층으로부터 학습된 무언의 명령일지도 모른다. 단식을 하는 참사 유가족들 앞에서 폭식 투쟁을 하거나 동지섣달의 한파 속에서 자식을 잃고 울먹이는 유가족들을 향해 막말을 쏟아내는 사람들. 타인의 슬픔에 공감할 줄 모르는 반사회적 인격장애인들을 양산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이 오늘 우리가 경험하는 겨울 한파보다 더 시리게 다가온다.


"친구의 말은 정말이지 큰 위로가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좀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어째서 나를 아끼는 사람들은 항상 나와 함께 턱을 넘어야만 하는 것일까. 나도 그들도 턱을 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면 안 되는 것일까."  (p.84)


타인에 대한 공감의 폭이 가면 갈수록 줄어드는 이유를 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낮은 독서량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한 개인이 직접체험을 통하여 취득할 수 있는 공감의 폭은 무척이나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결국 독서 혹은 타인과의 대화를 통한 간접체험이 없다면 내가 겪어보지 못한 세상,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체험은 한낱 상상 속의 세상이자 그곳에 사는 외계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외계인과 마음을 열고 친구가 되는 모습은 영화 속에서나 가능한 일일뿐 현실을 사는 우리에게는 경계심 가득한 적일 수밖에 없다. 책을 읽지 않음으로써 반사회적 인격장애인만 양산하는 사회를 건강한 사회라고 말할 수 있을까. '당신의 아픔이 나의 아픔입니다.'라는 문구가 정언명령처럼 받아들여지는 사회, 나는 그런 사회를 꿈꾼다, 그렇게 되는 날 황시운의 산문집 제목은 <당신들이 모두 아는 이야기>로 바뀌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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