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그렇겠지만 나 역시 인생의 많은 굴곡을 겪으며 살아왔습니다. 실수도 많았고, 중요한 분기점에서 잘못된 판단으로 안 해도 될 고생을 사서 한 적도 있었습니다. 곰곰 되짚어 생각해 보면 그와 같은 판단의 이면에는 늘 개인의 욕심이 나 자신의 눈을 가렸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개인의 지나친 욕심은 판단을 흐리게 하고,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바르게 인도하지 못합니다.


요즘 친구들을 만나면 대화의 주제는 언제나 비슷합니다. 정년을 얼마 남기지 않다 보니 각자의 건강이나 은퇴 후의 계획 등이 주요 관심사가 됩니다. 때로는 정년이 없는 정치 쪽으로 기웃대는 친구도 있고, 사업이나 취업 쪽을 계획하는 친구도 있습니다. 이따금 지자체장 선거에 나서는 친구나 지인을 만날라치면 임명직 자리를 부탁하는 사람들도 더러 보게 됩니다. 젊은 사람들에게는 꽤나 부끄러운 일이지만, 지자체장이 임명하는 자리를 탐하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은 듯합니다. 그것은 여당이나 야당을 가리지 않고 비슷한 양태를 보입니다. 지자체장이 임명하는 자리가 생각보다 넓고 그 수가 많은 까닭에 나 하나쯤 부탁을 해도 크게 부담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까닭입니다. 지자체장이 이럴진대 대통령은 오죽하겠습니까. 여러 루트로 줄을 대고 인사청탁을 하는 사람들이 어디 한둘일까요.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최근 유시민 작가를 향해 막말을 쏟아냈던 오 모 씨만 하더라도 명예직인 청년재단 이사장직에 오르더니 연봉 3000만 원에 2년 임기인 캠코(한국자산관리공사) 비상임 이사에 더하여 금융발전위원회 위원으로 이름을 올려 세간의 놀라움을 자아낸 바 있습니다. 캠코나 금융발전위원회는 대개 금융이나 자산 전문가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의 금융 경력이라곤 수소차 기업 니콜라 주식에 투자하여 큰 손해를 본 것 외에는 딱히 없는 듯한데 그가 그런 자리를 꿰찼다는 건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유시민 작가가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크게 잘못된 말을 한 바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패륜에 가까운 막말을 쏟아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것도 벼슬이라고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까닭이겠지요. 나는 요즘 오선우 작가가 쓴 <우당탕탕 독일 여자 명상기>를 읽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어른으로 산다는 것이 나에겐 나에겐 너무나 버겁게만 느껴졌다. 난 누군가의 아내가 되기에도 또 엄마가 되기에도 너무나 부족한 철부지 같았다. 나중에 동생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우는 엄마를 달래기 위해 아빠가 옷 한 벌을 사주셨단다. 엄마는 그 이후에도 공항에서 매번 우셨다."  (p.51)


아침에 운동을 하기 위해 산에 올랐을 때, 1940년생인 멋쟁이 할아버지가 올해 80세인 소녀 할머니에게 오늘 데모하는 데 같이 가지 않겠냐며 은근히 같이 가주십사 부탁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선관위의 안일한 대처가 80이 넘은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도 주요 관심사가 되는 걸 보면 우리나라에서 어른으로 산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실감나게 하였습니다. 유시민 작가에게 막말을 쏟아냈던 오 모 씨는 아직 나이가 어린 탓일까요 뒷일 걱정은 하지 않은 채 상스러운 말을 쏟아내더군요. 말은 마음의 창이자 본인 심성의 거울입니다. 그런 인성의 소유자가 민주당을 지킨다는 걸 생각하면 민주당도 생명을 다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소나기 예보가 있었는데 비는 여전히 내리지 않고 쨍한 햇살만 선명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환승 - 목사, 택시 그리고 나
엘라임 손 지음 / 보민출판사 / 202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는 대전제를 수용하면서 부조리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다음의 세 가지로 압축되는 듯하다. 죽음 자체를 외면하면서 관습대로 살아가는 것, 내세의 허구를 확신하면서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을 기다리는 것,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이 그것이다. 인간은 대체로 첫 번째 방법을 선택한다. 스스로 선택한다기보다 관습적으로 그렇게 살아간다. 개인의 삶에 큰 변화를 요구할 만큼의 특별한 사건이나 사고가 없다면 대부분의 인간은 그동안 유지했던 첫 번째 방법을 굳이 바꿔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인생의 어떤 사건으로 인해 죽음 가까이에 다가갔던 경험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그와 같은 경험은 그동안 유지했던 가치관이나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흔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경험이 너무 어린 나이에 있었던 까닭에 변화시킬 가치관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의 내면에는 그 경험이 그림자처럼 남아 가치관의 정립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건, 사고를 경험한 이의 태도는 개인에 따라 크게 다른 방식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예컨대 예기치 못한 큰 교통사고를 당하여 죽음의 문턱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온 사람이 있다고 했을 때, 자신에게 남은 삶의 기간이 길지 않음을 인지한 그는 사고 이전의 안일하던 태도를 바꾸어 어떤 목표를 향해 치열하게 나아가거나 내세의 허구를 믿고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에 강력하게 매달리기도 한다. 이와 같은 사례는 암과 같은 치명적인 질병의 확진 판정을 받았을 때도 비슷한 양상을 띤다. 드문 경우이기는 하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담담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럴 만한 용기와 배짱이 모든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1983년 늦여름, 나는 노숙자 신세가 되었다. 집에 가면 돈 받으러 온 사람들이 기다렸다. 친구들에게 부탁했지만, 사업 실패 소문은 KTX보다 빨랐다. "사장님, 사장님" 하며 반기던 사람들도 눈치를 봤다. 내 존재감이 아니라 돈의 힘이었다. 시골집도, 친구도, 내가 살던 집도 갈 곳이 되지 못했다. 버스비가 없어 걸었다. 돈을 벌어 멋지게 살고 싶었다. 효도하고 결혼하고 싶었다. 이제 그 가능성마저 보이지 않았다. 죽는 것이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라 생각했다. 한강대교 난간에 섰다. 강물이 검게 흘렀다. 하지만 그마저도 용기가 필요했다. 나는 그 용기마저 없어 그냥 돌아섰다."  (p.22)


엘라임 손이 쓴 <환승> 역시 그 비슷한 경험을 적고 있다. 시카고 오헤어 공항에서 연결 편을 놓치고 방황할 때 저자는 자신의 지나온 삶을 떠올리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자판기라는 개념 자체가 낯설던 시절, 포클레인 인형 뽑기 자판기로 승승장구하던 저자는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날 번 돈을 그날 다 쓰면서 허송세월했던 대가로 모든 것을 잃고 한강대교에 서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서른도 되지 않았던 젊은 나이에 겪었던 혹독한 시련을 딛고 저자는 목회자의 길로 뛰어든다. 그것은 어쩌면 저자 자신의 선택이라기보다 운명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런 까닭에 41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설교단 위에 서 있었지만, 마음이 편했던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목회를 떠나던 날 새벽, 나는 혼자 차를 몰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수십 년 동안 강단에서 사람들의 방향을 가리켜 온 손이, 그날 새벽에는 핸들 위에서 떨렸다. 택시 핸들을 처음 잡던 날도 그랬다. 강단 대신 운전석, 성도 대신 낯선 승객. 나는 그 시간을 빨리 지나가고 싶었다. 고난이 유익이라는 걸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 고난 안에 제대로 머물지 않았다. 알고 있다는 착각이 경험을 막았다. 그녀가 "이제야 사람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고난을 흘려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강변 아파트가 사라지고, 사촌들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무너지는 그 자리에서, 그녀는 자신을 만났다. 소유로 가득했던 시절에는 보이지 않던 자기 자신이, 아무것도 없는 자리에서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70이 되어서야 그것을 몸으로 알았다. 강단에서 가르쳤던 그 말을, 운전석에서 처음으로 배웠다."  (p.191)


목회자로 섰던 시기에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지만, 아내의 유방암 판정과 함께 다시 원점에 선 저자. 강단을 떠난 저자는 미네랄을 팔기도 하고, 기독교방송 상담 일을 하는 등 프리랜서 생활을 하며 겨우 생계를 유지하다가 지금은 택시 운전자로 살고 있다고 한다. 택시 운전석에 앉아 처음 접하는 손님과의 짧은 대화와 침묵 속에서 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삶의 의미와 가치를 배운다. 실패냐 성공이냐를 가늠하기보다 지금 이 시간에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는 실존에 가깝다. 실존은 다만 하나의 현상에 지나지 않을 뿐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기준이 되지는 않는다.


"다섯 번 환승했다. 환승할 때마다 잃었다. 직함도, 수입도, 시선도. 그런데 잃을 때마다 가벼워졌다. 처음에는 그 가벼움이 두려웠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그 가벼움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는 것을. 손에 쥔 것을 놓을 때마다, 손이 아닌 내가 보였다. 빈손이 나의 철학이 되었다."  (p.206)


삶은 우리로 하여금 언제나 변화를 요구한다. 좋든 싫든 우리는 그것에 따를 수밖에 없다.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무난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정말 기적에 가까운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단 하나 명심할 것은 누구나 겪는 크고 작은 삶의 변화에서 자신이 지향하는 삶의 방향을 결코 잃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방향을 잃고 헤매는 순간 아주 오랜 시간을 허비한 후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기도 하지만, 자신의 삶을 통째로 날려버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라고 썼던 어느 책의 제목처럼 인생의 방향만 잃지 않으면 기회는 언제든 다시 오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가 인생의 방향을 잃었을 때, 그것은 어쩌면 삶의 모든 것을 삼켜버릴 수도 있다. 우리가 삶의 방향을 잃는 가장 큰 원인은 바로 개개인의 욕심이다. 욕심은 한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인생의 방향마저 잃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누군가의 무료한 손길이 슬쩍 닿기만 해도 휘청 중심을 잃고 쓰러질 것만 같은 주말의 오후. 일주일 동안의 누적된 피로가 어깨를 짓누릅니다. 지방선거가 있었던 수요일 하루를 쉬었는데도 체감하는 피로는 여느 주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바삭바삭하던 햇살이 숨이 턱턱 막히는 한여름의 수증기 속으로 서서히 가라앉고 있는 탓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름 한낮의 시간은 길고 미끈한 자신의 몸매를 한껏 뽐내려는 듯 유영하듯  아주 천천히 지나갑니다. 나처럼 성마른 인간은 그 흩어짐의 틈새도 진득하게 기다리거나  바라볼 수 없어 늘어지게 하품을 하면서 졸린 눈을 끔벅거릴 뿐입니다.


2026년의 시간이 은근슬쩍 6월로 접어들었을 때 사람들은 다들 아직 오지도 않은 여름휴가를 기다리면서 미래의 시간에만 집중하느라 자신도 모르게 훌쩍 지나버린,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시간에 미처 관심을 두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숨을 헐떡이며 미래를 좇아 헤매다가 2026년의 끝이 보이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한숨을 쉬며 후회를 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벌써 6월입니다. 나는 내게 할당된 임무를 완수하느라 내가 가진 체력을 지나치게 소진했는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나는 5개월 1주의 분량보다 더 무거운 피로를 체감하며 주말에 있을지도 모르는 달콤한 휴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알베르 카뮈의 에세이집 <결혼.여름>(녹색광선)을 읽고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사랑 자체를 회피하기 위해 삶을 사랑하는 체한다. 즐기려고 노력하고, '경험을 쌓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것은 고매한 정신의 관점이다. 쾌락주의자가 되려면 흔치 않은 자질이 있어야만 한다. 인간의 삶은 고매한 정신의 도움 없이 후퇴와 전진을 반복하면서, 고독과 동시에 존재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완성된다. 일을 해서 아내와 자식들을 부양하면서 대개는 아무 불평 없는 저 벨쿠르 사람들을 보노라면, 슬그머니 부끄러운 기분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분명 내가 착각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삶들엔 사랑이 많지 않다. 아니, 이제 더는 사랑이 많지 않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삶들은 적어도 아무것도 회피하지 않았다. 내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이 있는데 가령 죄란 단어가 그렇다. 그럼에도 나는 그 사람들이 삶을 거스르는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을 알 것 같다. 왜냐하면 삶을 거스르는 죄라는 건, 아마도 삶에 몹시 절망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다른 삶을 바라고 현생의 준엄한 위대함을 회피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그 사람들은 속임수를 쓰지 않았다. 그들은 여름의 신들이다. 스무 살의 그들은 삶에 대한 열정으로 여름의 신이었고, 모든 희망을 잃은 지금도 여전히 여름의 신이다. 나는 그들 중 두 사람이 죽는 것을 보았다. 그 두 사람은 공포로 가득 찼지만 말이 없었다. 차라리 그편이 낫다. 인류의 죄악이 우글거리는 판도라의 상자에서 그리스인들은 모든 악을 쏟아낸 후 그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악인 희망을 꺼내 들었다. 나는 이보다 더 감동적인 상징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희망은 통념과 달리, 체념과 동격이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스스로 체념하지 않는 것이다."  (P.54~P.55)


'희망은 체념과 동격'이라는 알베르 카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예전에 나는 블로그 포스팅 한 귀퉁이에 '희망은 생명이 유한한 인간의 조급함'이라고 쓴 적이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이 무한하다면 인간이 바라는 바는 아예 없거나 현저히 줄어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른한 시간의 경과를 무한대로 흘려보낸들 영생을 누리는 인간에게는 전혀 해가 되지 않는다는 건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생명이 유한한, 체념과 조급함만 가슴에 품고 있는 서글픈 존재입니다. 6월의 첫 주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이방인
알베르 카뮈 지음, 최정수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다소 철학적인 문제이지만 인간은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합리적인가? 경제학을 전공했던 나로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경제학의 이론 전반에서 내세우고 있는 이 전제를 실생활에서는 전혀 납득하지 못할 때가 많다. 예컨대 같은 물건일지라도 나와 가까운 사람이 판매한다는 이유로 더 비싼 가격을 지불하면서 물건을 구매하기도 하고, 더 비싼 가격을 제시한 인테리어 업자에게 공사를 맡기기도 한다. 단지 친하다는 이유로 말이다. 이처럼 인간은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다반사이고, 우리가 살아가는 삶도 부조리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모든 인간은 결국 죽는다는 명확한 사실이 존재하지만 그 사실을 알면서도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의 삶을 꾸역꾸역 살아가는 것이다. 아직 도래하지는 않았지만 언젠가 닥칠 이 명징한 사실을 대부분의 인간은 구체적을 인식하거나 걱정하지는 않는다. 그 사실을 헤어진 연인의 얼굴처럼 이따금 떠올릴 뿐이다. 그러나 자신에게도 어떤 특별한 일이 닥치면 미래에 맞이할 그 사실이 확실한 현실로 각인될 수도 있다. <이방인>에 나오는 뫼르소처럼.


"옷을 갈아입었을 때 내가 검은 넥타이를 맨 것을 보고 마리가 깜짝 놀란 표정을 하고는 상중이냐고 물었다. 나는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언제부터 상중인지 그녀가 알고 싶어 해서 나는 "어제부터"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약간 멈칫했지만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그녀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이미 사장에게 그 말을 했다는 것이 생각나서 그만두었다."  (p.35~p.36)


1부와 2부로 구성된 이 소설은 주인공인 뫼르소의 일상을 좇고 있지만, 독자는 그의 일상을 통해 언뜻언뜻 보이는 자신의 모습에 부끄러워하거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뫼르소의 행동에 분노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한 사람이 구축한 삶의 기억은 차곡차곡 쌓여만 간다. 쌓이는 기억들은 선악(善惡)이나 정오(正誤)와 같은 명확한 기준을 통해 선별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고, 기억 역시 일상에서 부딪히는 삶의 부조리처럼 아무런 기준도 없이 무작위로 쌓이는 것이다. 양로원에 있던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들었던 뫼르소는 크게 슬퍼하는 기색도 없이 무덤덤하게 장례를 치른 후 다시 일상으로 복귀한다. 같은 직장에 다녔던 여성 마리와 해수욕을 하고, 영화를 보고, 관계를 맺기도 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뫼르소와 그의 이웃들도 구질구질한 일상을 변함없이 이어가고 있다. 어떤 것 하나도 분명한 목적이나 이유도 없이 습관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손잡이의 볼록하고 매끈한 부분을 만졌다. 그때, 둔탁하고 귀를 먹먹하게 하는 소음과 함께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나는 땀과 태양을 제거했다. 내가 낮의 균형을, 행복해하던 해변의 예외적인 침묵을 깨뜨렸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하여 나는 움직임이 없는 시체 위에 네 발을 더 쏘았고, 총알들은 그럴 것 같지 않았는데 깊이 박혔다. 그것은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째의 짧은 노크 소리와도 같았다."  (p.97)


2부에서는 아랍인 살해 혐의로 체포된 뫼르소와 그의 행적과 태도가 주를 이루는 가운데 검사와 배심원은 살인이 있기 전 며칠 동안 보였던 뫼르소의 행적으로 볼 때 그는 사회적 통념과 동떨어진 사회 부적응자로 판단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뫼르소는 그가 주장했듯 햇볕이 눈부시고 머리가 아파서 행한 우연한 살인이 아닌, 계획적 살인을 저질렀다는 게 그들의 결론이었다. 뫼르소에게는 결국 사형이 선고된다. 뫼르소는 자신의 죽음이 확정된 이후에서야 모든 자신의 삶이 선명해진 듯하다. '모든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는 대전제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우리는 죽음으로부터 머리를 외로 꼰 채 모르는 척 살아갈 수도 있고, 죽음 이후의 허구적인 구원을 진실인 양 믿을 수도 있고, 뫼르소처럼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할 수도 있다. 어쩌면 그 선택은 각자에게 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 대한 확신이, 모든 것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그보다는 확신이 훨씬 강했고, 내 삶과 다가올 그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그렇다, 나에게는 오직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 진리가 나를 사로잡는 만큼 그 진리를 믿고 있었다. 내가 옳았고, 여전히 옳고, 늘 옳다. 나는 그런 식으로 살아왔다."  (p.188)


산에는 요즘 밤꽃 냄새가 진동한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는 결혼식에서 시어머니가 대추와 밤을 며느리의 치마폭에 던져줌으로써 다산을 기원했던 것처럼 우리는 어쩌면 밤꽃 냄새에서 생명과 에너지를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이따금 누군가의 결혼식에 다녀올 때마다 나는 모든 게 모호하고 부조리한 이 세상에 새로운 생명을 불러들인다는 게 과연 축복일까? 하는 의문이 문득 들기도 한다. 가뜩이나 출산율이 저조한데 다산을 기원하고 새 생명의 탄생을 축복하는 게 마땅하겠지만 나로서는 그런 의문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요즘처럼 밤꽃 냄새가 진동하는 시기에 나는 생명력이 넘쳐나기보다 부조리한 삶을 이어가는 게 무척이나 부담스러워진다. 뫼르소의 확신이 내게는 없는 까닭이다. 모든 게 모호할 뿐이고, 하루하루 새롭게 생성한 삶의 기억들이 아무런 선별 기준도 없이 그저 쌓여갈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든 것은 잠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간밤에 나는 어떤 이유인지 자다 깨다를 반복했고, 다른 날보다 일찍 눈이 떠지는 바람에 꿈지럭거리며 늦잠을 잘 수 있는 기회마저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누군가에게 실컷 얻어맞은 듯 온몸이 쑤시고 아파왔습니다. 자고 일어났다고는 하지만 머릿속은 여전히 꿈속을 헤매는 듯 몽롱하고 어지러웠습니다. 물에 젖은 솜처럼 늘어지는 몸을 이끌고 인근의 도서관에 나왔습니다. 공기가 맑은 탓인지 건조하고 쨍한 햇살이 피부를 뚫고 몸속 깊은 곳까지 침투할 듯 강하게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오가는 행인도 없는 인도에는 선거 유세 차량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듣는 이도 없이 멀리까지 퍼져나가고, 더위를 모르는 까치 몇 마리가 먹이를 찾아 총총 옮겨 다니고 있었습니다. 비둘기 모이 주기를 금지한 탓인지 그 많던 비둘기 떼가 한 마리도 눈에 띄지 않았던 건 꽤나 생경한 풍경이었습니다.


도서관에 들어서자 에어컨에서 나오는 서늘한 바람으로 인해 마치 딴 세상에 도착한 듯 느껴졌습니다. 책을 읽으려는 목적보다 더위를 피하는 게 더 큰 이유였는지 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사람들은 다들 휴대폰 화면을 보고 있거나 집에서 가져온 태블릿 화면에 눈을 고정한 채 오가는 사람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이따금 무인반납기에서 책을 반납하는 사람들 몇몇만이 바쁘게 손을 놀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어린 꼬마의 손을 붙잡고 나온 젊은 부부는 한껏 목소리를 낮춰 이것저것 설명하기에 바쁜 모습이었고, 나는 종합자료실에 빼곡하게 꽂힌 수많은 책들을 훑어보면서 읽은 책보다 아직 읽지 못한 책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너무 높다는 생각에 잠시 절망하기도 했습니다. 노르웨이 출신의 작가 욘 포세가 쓴 소설 <샤이닝>을 빌려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완벽한 침묵. 너무나 조용해서 손에 만져질 것 같은 침묵 속에서, 나는 발걸음을 멈춘다. 나는 제자리에 서서 침묵에 귀를 기울인다. 마치 침묵이 내게 말을 거는 것 같다. 하지만 침묵이 말을 거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아니, 어떤 면에서 보자면 침묵도 말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침묵에서 들리는 목소리, 그것은 누구의 목소리인가. 그것은 단지 목소리일 뿐이다. 그 목소리를 다른 말로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목소리는 그냥 거기 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거기 있는 것은 분명하다."  (p.49)


멀리 보이는 인도에는 반려견을 산책시키기 위해 완전무장을 하고 나선 몇몇 사람들이 지친 듯한 걸음으로 느리게 지나가고 있습니다. 말귀가 통하는 제 자식이라면 어쩌면 오늘처럼 햇살이 강한 한낮에 밖으로 나가자고 아무리 떼를 써본들 결코 들어주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어린애가 납득할 수도 없는 갖가지 핑계를 대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산책을 요구하지도 않았던 반려견을 위해서는 휴일의 달콤한 여유도 반납한 채 자발적으로 산책을 나서는 걸 보면 현대인들은 어쩌면 사람보다 동물에게 더 깊은 애정을 쏟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것이 사람에 대한 애정이 식은 탓인지, 아니면 이제껏 없던 동물에 대한 애정이 갑자기 높아진 것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지만 씁쓸한 입맛은 지울 수가 없는 게 현실입니다. 초여름 햇살이 시간이 갈수록 더 높은 열기를 뿜어내고 있습니다. 선거 유세 차량의 노래도 끊이지 않고 들려옵니다. 더위 탓인지 나는 여전히 식욕이 없고 나른하기만 합니다. 모든 것은 어쩌면 잠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