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과 강 그리고 안젤름 키퍼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 지음, 최정애 옮김 / 비트윈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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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관람이 웬만한 영화 관람보다 더 흥미로울 때가 종종 있다. 내가 그림이나 조각 등 미술 작품에 조예가 깊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전시실에 놓인 작품을 쭈욱 따라가다 보면 나도 모르게 발길이 멎게 만드는 작품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연적으로 말이다. 작가의 모든 작품에 빠져들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겠지만, 나의 시선을 사로잡는 한두 점의 작품 앞에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노라면 작가가 내게 건네는 수많은 말과 생각들을 내가 미처 주워 담지 못할까 봐 조바심을 치게 된다. 그럴 때 나는 시공간을 잊은 채 한없이 자유로워진다. 주변 관람객의 소곤거림도, 자리를 뜨는 여러 관람객의 발소리도, 이따금 들리는 안내 방송도 전혀 들리지 않고, 시간은 그 자리에서 멈추고 만다. 어릴 적 술래에게 '얼음'이라고 외쳤던 그 순간처럼.


얼만 전에도 나는 대전에서 열린 앤디 워홀 전시회를 다녀왔다. 10개의 섹션으로 구성된 전시회의 기획도 재미있었지만, 인쇄물로만 보았던 앤디 워홀의 작품을 실물로 직접 보게 되는 감흥은 왠지 모르게 신나고 반가웠었다. 앤디 워홀 전시회를 가벼운 마음으로 다녀왔다면 그 직후 읽기 시작한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가 쓴 <숲과 강 그리고 안젤름 키퍼>는 나의 가슴을 가볍게 짓눌렀다. 나는 숨소리마저 조심스러워 이따금 책을 손에서 놓고 베란다로 나가 깊은숨을 내쉬곤 해야만 했다. 그것은 어쩌면 안젤름 키퍼에 대한 나의 지식이 지나치게 빈곤했던 것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나에게 '안젤름 키퍼'는 늘 그런 이름이었다. 그의 이름은 우리 시대의 어떤 예술가의 이름보다 더더욱 그렇게 느껴졌는데, 그것은 그의 작품들이 극히 기념비적이며, 시간으로 가득 차 있고, 역사로 무겁게 짓눌려 있으며, 사적인 것, 하찮은 것, 개인적인 것이 전혀 반영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p.13)


어떤 예술이든 작가와 관객 혹은 작가와 독자 사이에 놓인 작품은 생소한 두 사람을 잇는 가교의 역할을 한다. 어떤 작가는 때로 작품 속에 자신의 전부를 드러내기도 하지만 또 어떤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사적인 어떤 것을 일절 담지 않는다. 작가 스스로의 개인적인 성향 탓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독자나 관객에 대한 배려나 예의 차원이라고 해야 할까. 2023년 국내에서 열린 안젤름 키퍼의 국내 첫 전시회에 나는 가지 못했었다. 무엇 때문이었는지 나는 그의 전시회 소식도 듣지 못했다. 당시에 나의 관심이 다른 데 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숲과 강 그리고 안젤름 키퍼>를 읽는 동안 나는 온라인에 떠도는 안젤름 키퍼의 작품과 그에 대한 정보를 열심히도 찾아봤다. 그러나 익히 알다시피 우리가 약간의 수고를 감수하면서 굳이 전시회를 찾는 까닭은 실물을 직접 보는 것과 영상이나 화면을 통하여 보는 것은 실로 하늘과 땅만큼의 격차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의 나무와 숲에 대한 집착은 1960년대 말부터 줄곧 지속되어 왔다. 그는 숲과 함께 육십 년을 보냈다. 나는 그가 그린 숲이 신화의 숲이라고 생각했다. 그림 형제의 동화 속에서 헨젤과 그레텔과 빨간 모자가 돌아다니던 숲, 게르만족이 로마인들과 싸워서 이겼던 숲, 나치가 '독일적인 것'을 연출하는 데 이용했던 숲, 그리고 절멸 수용소들이 위치했던 숲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키퍼 자신의 숲이라는, 그가 할아버지와 삼촌, 숙모, 사촌들과 어울려 살았던 곳의 숲이라는 생각은 미처 못했다."  (p.73)


20세기 후반 신표현주의 미술운동의 주요 인물로 자리매김한 그이지만 안젤름 키퍼는 사실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하던 법학도였다. 1966년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미술을 공부하기 시작한 그가 1970년 뒤셀도르프에서 요제프 보이스의 제자가 되면서 늦은 나이에 본격적인 화가의 길에 들어서기는 했지만 그가 이룬 성취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의 작품을 감상하는 관객은 우선 거대한 작품의 크기에 압도된다. 고흐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그이지만 키퍼는 짚, 납, 도료, 재, 점토 등을 이용하여 캔버스 위에 텍스처를 강조한 작품을 선보임으로써 자신이 드러내고자 하는 주제를 선명하게 부각한다.


"존재하는 것의 내면에 다가가 비밀을 밝히려는 예술 속에서 그 심연은 모습을 드러내고 우리를 압도한다. 아마도 다른 어떤 이의 그림에서보다 고흐의 그림에서 더욱 그렇다. 그리고 그것은 고흐에게는 재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림을 그릴 줄 몰랐기에 붓질 하나하나마다 사투를 벌여야 했고, 어떤 의미에서는 회화라는 예술을 바닥부터 다시 발명해야 했다. 그래서 그림과의 투쟁 자체가 가시화되는데, 키퍼는 그 투쟁을 예술의 핵심이자 모든 것의 기원으로 보았던 것 같다. 그것은 곧 보는 자와 존재하는 것 사이의 투쟁이었다. 존재하는 것은 포착될 수 없고, 그 비밀에는 결코 닿을 수 없기에, 모든 예술은 본질적으로 실패작이다. 예술은 오직 원래의 통찰력이나 비전의 일부만을 보여줄 수 있을 뿐이다. 이는 예술가가 사용할 수 있는 수단은 항상 그 비전을 거스르기에 비전은 결코 있는 그대로의 온전한 형태로 재현될 수 없기 때문이다. 창조라는 행위에는 언제나 파괴가 동반된다."  (p.170)


우리가 궁극적으로 예술작품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삶의 권태에서 벗어날 다른 대체수단을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운동 경기와 같은 육체적인 방식을 통하여 일시적으로 권태를 벗어날 수는 있지만, 우리의 육체가 20대의 젊음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우리는 결국 예술작품으로 회귀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에게 존재하는, 그러면서도 끝없이 유동하는 이 삶의 본질에 결코 닿을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존재를 부정하지 않은 채 끝없이 탐구할 뿐이다. 삶이 지속되는 한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5년 패전국 독일의 폐허에서 태어난 안젤름 키퍼는 나치 시대를 다룬 작품을 종종 선보이곤 한다. 그것은 어쩌면 자신이 나고 자랐던 독일의 숲과 강이 그에게 심어준 그의 정체성일지도 모른다. 책의 저자인 칼 오베 크나우스고르는 안젤름 키퍼와의 유대를 통하여 안젤름 키퍼 자신과 그의 작품에 대한 면면을 세밀하게 포착하고 있다. 키퍼의 그림에 빠져드는 것처럼 작가의 표현과 통찰력에 나도 모르게 빠져들고 만다. 어느새 3월도 다 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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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기온은 여전히 차고 건조하다. 나는 요 며칠 바쁘고 힘들었다. 삶의 언저리에서 맴맴 맴을 돌다가 아무런 맛도 감각하지 못한 채 맹탕의 날들을 흘려보내는 듯한 느낌. 그렇게 맴을 도는 사이 거리에는 목련의 봉오리가 벙글고, 매화도 해끗해끗 봉오리를 틀고 있다. 감각하지 못하는 여러 날들을 보내고 나면 건조한 삶에 거뭇거뭇 튼 흔적이 남는 것 같다. 손등이 터서 까슬해지는 것처럼.


며칠이면 끝날 것 같던 전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하루에 한 번씩 말을 바꾸면서 트럼프와 그의 측근들은 돈벌이에 여념이 없는 듯하고, 국가의 최고 권력을 철저히 자신의 부를 축적하는 데 사용했던 윤석열과 김건희의 방식을 먼 나라 미국의 대통령이 보고 배웠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구치소에 있는 윤석열은 트럼프로부터 교육비를 받아도 좋을 듯하다. 식탐이 많은 사람이니 사식이라도 넉넉하게 넣어 달라고 부탁을 할 수도 있겠지.


마쓰이에 마사시의 <거품>을 읽고 있다. 아주 오래전에 나는 그의 소설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를 읽고 진한 감동을 받았었다. 그 후에도 나는 작가의 소설 두어 권을 더 읽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와 같은 깊은 인상은 받지 못했다.


"나한테는 고정해줄 압정pin이 없다., 라고 가오루는 생각한다. 이 세상 어딘가에 자기를 움직이지 않게 고정해줄 것이 없다. 유치원에서 초등학교,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매일 학교를 다님으로써 임시로 압정이 주어졌었다. 체육 특별활동부에 들어가고 운동을 하며 날이 새고 날이 지고 녹초가 되면, 좀 더 나를 꽉 고정하는 압정이 되었다. 학교를 그만둬버리면 어떻게 될까? 압정이 빠진다. 나는 지금 어디에도 고정되어 있지 않다. 하늘하늘한 얇은 종이나 같다. 학교에서 박리되어 바람에 날리고, 강에 떨어졌다가 그대로 바다로 흘러가서 가라앉는다. 바닷물에 녹아서 가루가 된다."  (p.61)


한낮 기온은 빠르게 오르고 있다. 반소매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이들도 더러 목격된다. 일부러 과시하려는 태도일지도 모르지만, 한낮 기온은 그들의 허세를 받아줄 만큼 넉넉히 올라 있다. 어스름이 내리는 걸 보니 또 하루가 지는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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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ch 2026-03-26 2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본어 공부하면서 원서로 처음으로 읽었던 소설이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였어요.필사하면서 읽어서 1년이상 걸렸는데,그래서 더더욱 기억에 남는 소설이에요. 조금씩 따뜻해지고는 있지만 그래도 전 아직 추워요.
잘 지내고 계시죠? ^^

꼼쥐 2026-03-27 07:05   좋아요 0 | URL
march 님 반갑습니다. 예스 블로그에서는 자주 뵈었던 것 같은데 말이죠.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의 소설 분량이 꽤나 많은데 그걸 일본어 원서로 필사하면서 읽었다니 대단하세요. 보람도 있으셨겠지만 말이죠. 아침 저녁으론 아직 쌀쌀하죠.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비록 블로그를 통해서이지만 자주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계절의 변화는 언제나 갑작스럽게 찾아옵니다. 난데없는 꽃소식에 마음이 싱숭생숭하는 것도 잠시 계절은 금세 여름으로 넘어가곤 합니다. 아파트 화단에 핀 산수유꽃을 보면서 나는 옛 친구를 만난 듯 반가웠습니다. 어제는 광화문 광장에서 방탄소년단(BTS)의 컴백 공연이 있었습니다. 전 세계의 BTS 팬들이 모여 유례없는 성황을 이루었지만, 많은 사상자가 난 대전의 화재 참사와 3주째 이어지고 있는 중동 지역의 전쟁 참화 속에서 노래하며 웃고 즐겨도 되는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이번 전쟁을 보면서 몇몇 특별한 사람을 제외하면 현대인의 기본적인 속성이 극단적 이기주의와 황금만능주의 그리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목표 지상주의에 물들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간담이 서늘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수천 명의 무고한 시민이 목숨을 잃고 그들과 연관된 몇 배, 몇십 배의 사람들이 상실감에 시달리는 것은 물론 삶의 터전을 잃을 텐데, 그런 것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전쟁을 계속하는 트럼프와 네타냐후, 그리고 그의 추종자들을 우리는 과연 무엇이라 칭해야 할까요. 그들도 과연 정상적인 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요. 게다가 폴리마켓의 예측 도박 사이트에서는 이란 전쟁을 둘러싼 여러 사안을 놓고 각각 수천만 달러짜리의 내기가 진행되고 있다고 하니 이들을 정상적인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서울올림픽이 열렸던 1988년 여름, 그해 교통사고로 아들을 잃었던 박완서 작가는 자신의 일기에 부모로서 견딜 수 없는 슬픔과 고통을 숨김없이 씀으로써 상실의 고통이 얼마나 크고 깊은 것인지 독자들에게 알린 바 있습니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부모의 고통, 그 어떤 말로도 치유할 수 없는 참척의 아픔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그 처절한 기록이 담긴 <한 말씀만 하소서>를 읽는 독자라면 화재 참사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의 슬픔을,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먼 타국 유가족의 애끓는 심정을 조금쯤 느껴볼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차츰 정상적인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겠지요.


"내 아들이 죽었는데도 기차가 달리고 계절이 바뀌고 아이들이 유치원 가려고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까지는 참아줬지만 88올림픽이 여전히 열리리라는 건 도저히 참을 수 없을 것 같다. 내 자식이 죽었는데도 고을마다 성화가 도착했다고 잔치를 벌이고 춤들을 추는 걸 어찌 견디랴. 아아, 만일 내가 독재자라면 88년 내내 아무도 웃지도 못하게 하련만. 미친년 같은 생각을 열정적으로 해본다."  (p.18)


"그 애를 잃고 나서 아직 고기를 입에 넣은 적이 없다. 소화가 안 된다는 핑계였지만, 그 애가 죽던 날 밤, 집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유난히 맛있게 등심구이를 아귀아귀 먹은 생각을 하면 진저리가 쳐져서 생전 고기를 먹을 것 같지가 않다. 집에서처럼 따로 눌은밥을 좀 끓여달래서 먹었지만 누린내를 견디기가 힘들었다."  (p.87)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로 시작되는 김훈 작가의 소설 <칼의 노래>가 문득 떠오릅니다. 중동 전쟁이 끝나는 어느 시점에 이란의 어느 작가 역시 그렇게 쓰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잔인함과 속절없는 슬픔과 고통을 뒤로한 채 이란고원의 폐허 속에서도 이름없는 꽃이 피어나겠지요. 전쟁의 포화가 멎은 어느 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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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3-22 17: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6-03-26 17: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나의 프랑스식 서재 - 김남주 번역 에세이
김남주 지음 / 이봄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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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의 에세이가 독자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지 못하는 까닭은 지식의 편차 때문이 아닐까 싶다. 원작자의 작품을 번역하는 번역가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번역했던 어떤 작품에 대해서는 원작자 다음으로 많은 지식을 소유했을 것이라고 짐작이 되는 바, 그 책에 대해서 한 번쯤 읽어보았거나 전혀 읽어보지도 못한 채 다른 경로를 통해 그 책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을 갖고 있는 일반 독자를 고려할 때, 번역가와 일반 독자 사이의 지식 편차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번역가는 자신의 본업인 번역 이외의 다른 글쓰기에 익숙하지 않다는 데 있다. 그러다 보니 책에 대한 일반 독자의 지적 수준을 고려하지 않은 채(또는 고려하지 못한 채) 자신이 하고픈 말을 이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나온 에세이는 대개 일반 독자가 읽기에는 너무너무 어렵다. 물론 소수이겠지만 번역가와 지적 수준이 비슷하거나 오히려 높은 일반 독자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학술서가 아닌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에세이의 수준이 지나치게 높다는 건 한 번쯤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닐까.


"장 그르니에에 의하면 카뮈의 작품은 "그 작품에 대한 모든 주석을 쓸데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그런 어떤 것이다. 그런 만큼 역자는 이 글에서 또다시 그런 '쓸데없음'을 범하지 않으련다. "그런 작품은 하나의 호소와도 같아서 우리는 그것에 대답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독자로 하여금 결정을 강요하고 당혹시키며 자기변명을 하게까지 만든다. 그런 작품은 우리에게 어떠한 회피도 용납하지 않음으로써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다."  (P.76)


그럼에도 내가 자주는 아닐지라도 기회가 될 때마다 번역가의 에세이를 읽는 까닭은 그동안 내가 읽었던 책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한편 도움이 될 만한 다른 책이 뭐가 있을까?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을 얻고자 함이다. 때로는 한동안 책과 멀어졌던 까닭에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거나 시큰둥한 마음이 들 때, 혹여라도 나의 관심을 끌 만한 좋은 책이 있지나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번역가의 에세이를 읽게 된다. 일종의 추천 도서 목록을 구하고자 함이다. 김남주의 에세이 <나의 프랑스식 서재>를 읽었던 것도 그런 까닭이다. 프랑스 문학을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김남주 번역가의 저서가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없지 않았다.


"어린왕자는 과연 무사히 자기 별로 돌아갔을까? 가죽 끈이 없는 부리망 때문에 화자의 걱정대로, 우주 어딘가에서 양 한 마리가 장미꽃 한 송이를 먹어치우진 않았을까? 그리하여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면 어린왕자의 방울 같은 웃음소리 대신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것이 아닐까? 슬픔이 가라앉고 나면 어린왕자는 다시 이동하는 철새 떼를 타고 장미꽃 없는 자기 별을 떠나 자기가 길들인 여우도 있고, 화자도 있는 이 지구별로 돌아오지 않을까? 아아, 이 책의 내용을 적은 엽서를 교환하던 그 시절, 금빛 대신 푸른 머플러를 어린왕자처럼 꼭 그렇게 한 번만 목뒤로 넘겨 둘렀던 그 친구를 이 지구에서 바오밥나무가 있는 곳, 마다가스카르에 가면 만날 수 있을까?"  (P.169~P.170)


자신을 일러 '느린 번역가'라 칭하는 김남주 번역가는 <오후 네시>를 통해 아멜리 노통브를 <나를 보내지 마>를 통해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를 처음 국내에 소개한 번역가이자 내가 좋아하는 작가 장 그르니에, 알베르 카뮈, 로맹 가리, 생텍쥐페리 등 프랑스의 현대고전 작품 역시 번역해 왔다. 지금도 나의 기억에 남아 있는 추억 하나는 내가 군에 복무하던 당시, 모 여대 불어불문학과에 다녔던 아내가 졸업논문을 쓰지 못해 노심초사하는 것을 보고는 알베르 카뮈의 소설 여러 권을 부대로 가져와서 읽은 후 논문(이라고 할 수도 없는) 초고를 타자기로 쳐서 아내에게 주었었다. 아내는 내가 쓴 그 어설픈 논문 초고를 바탕으로 어찌어찌 살을 붙여 논문을 완성하였고, 무사히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김남주의 에세이를 읽는 내내 그때의 추억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20대 후반부터 30대, 40대를 살아오는 동안 번역은 내 밥벌이였다. 그러나 나는 줄곧 이 일을 내 삶의 징검다리 같은 것이라고 여겼다. 강 저편으로 가기 위해 딛고 가는. 오랫동안 내 시선은 내가 딛고 있는 그 징검다리가 아니라 내가 당도해야 할 강 저편 기슭에 고정되어 있었다고 고백한다. 문화와 정신을 전달한다는 감동과 자부는 대개는 무능과 게으름과 악조건 속에서 사그라들고, 표현과 내용의 좌충우돌 속에서 많은 밤들을 새웠다. 저울의 한쪽에 착실히 말들을 올려 놓으며 한 권의 번역을 마치고 나면 머릿속 말들이 모두 빠져나간 듯 일상적인 대화조차 더듬고 버벅대고 순서를 바꾸기 일쑤였다."  (P.9 '첫 책을 내면서' 중에서)


사실 이 책은 번역가가 쓴 리뷰에 가깝지만 작가의 삶이 책 속에 녹아있다는 점에서 에세이가 아닐 수 없다. 서두에 말했던 것처럼 전문 번역가가 지닌 지식과 일반 독자인 내가 소유한 지식 사이의 가늠할 수 없는 차이 때문에 이따금 어려운 문장에 갇혀 같은 문장을 여러 번 반복하여 읽기도 했지만, 번역가의 수고에 비하면 그와 같은 수고를 수고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수준이 아닌가. 오늘은 금요일, 나는 책에서 빼곡히 옮겨 적은 도서 목록을 뿌듯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다. 내일이면 나는 그 목록을 들고 가까운 도서관에 들러 가능한 범위에서 많은 책을 대출하여 기쁜 마음으로 돌아올지도 모르겠다. 기한 내에 다 읽지도 못하면서 잔뜩 욕심을 부릴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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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원의 두근두근 - 동물수상록
박찬원 지음 / 라의눈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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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예술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닌 무엇을 제외할 것인가로 귀결된다. 예컨대 음악은 이 세상의 많은 소리 중 어떤 소리를 제외할 것인가로 귀결되며, 사진이나 미술은 우리 시야에 들어오는 시시콜콜한 풍경 가운데 어떤 것들을 지울 것인가로 귀결되며, 문학은 주인공과 관계를 맺고 있는 많은 사람들 중 어떤 사람을 제외할 것인가로 귀결된다. 마찬가지로 글쓰기에서 퇴고 작업이 어려운 까닭은 문장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삭제하는 게 실생활에서 익숙한 습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디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한 노력은 게을리하지 않지만, 자신이 이미 갖고 있는 것 중 불필요한 것을 버리거나 너무 많이 소유한 것을 덜어내는 데에는 전혀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았음이다.


우리에게 '동물사진작가'로 잘 알려진 박찬원의 사진 에세이 <박찬원의 두근두근>에 실린 작가의 흑백사진을 보면서 그도 역시 렌즈 속에 놓인 피사체의 어떤 부분을 지울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무척이나 많은 고민을 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찍은 동물들은 말, 젖소, 돼지처럼 가축화되어 인간과 가까운 동물들도 있지만, 하루살이나 나비처럼 다소 하찮게 여길 수도 있는 곤충에 이르기까지 꽤나 다양하다.


"이 책은 동물에 대한 수상록이고, 한 주제에 100일 촬영 원칙을 정했다. 한 동물마다 약 3년 걸렸다. 실제 사진 찍는 시간은 얼마 안 된다. 동물을 관찰하고 생각하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동물에 대한 생각이었는데 나에 대한 생각으로 돌아온다. 동물에서 인간을 본다. 아니 나를 본다."  (p.4 '프롤로그' 중에서)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쯤 도올 김용옥 선생의 딸인 김미루 씨가 돼지우리에서 100시간 넘게 돼지들과 함께 지내며 '돼지우리 누드 퍼포먼스'를 펼친 적 있다. 뉴욕에서 사진작가 겸 행위예술가로 활동하고 있는 김미루 씨의 당시 사진은 국내 언론을 통해 크게 보도되었고, 가려지지 않은 젊은 여인의 신체와 오물이 묻은 돼지들의 모습과의 어우러짐은 보는 이들에게 다소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물론 자연에서 돼지는 절대 더러운 동물이 아니고, 인간이 인위적으로 사육하면서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을 비판하고자 했다는 김미루 작가의 설명이 있었지만, 김미루 작가의 사진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였던 일반인들의 관점에서 작가의 설명은 크게 납득이 되지는 못했다.


"돼지는 불쌍하고 슬픈 동물이다. 태어나서 한 번도 밖에 나가 놀지 못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기회도 없다. 친구를 사귀거나 연애도 못 한다. 돼지의 일생은 먹고 자고 자라서 도축장으로 가는 것이다. 짧게 살고 사회생활을 하지 않으니 돼지는 죄를 지을 겨를이 없다. 깨끗하고 신성하다."  (p.10)


박찬원 작가는 이 책에서 01. '동물과 인간, 02 '생명의 의미', 03 '동물의 언어', 04 '동물나라 풍경'의 주제로 그가 관찰했던 피사체에 대한 깊은 사유와 그 사유를 통해 건져낸 사진들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인식의 틀을 세울 것을 권고한다. 예술 전문 잡지 QUESTION의 사진문학 코너에 2022년 7월부터 2023년 6월까지 '동물 사진가 박찬원의 두근두근'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글과 사진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는 <박찬원의 두근두근>은 작가의 정제된 글과 렌즈에 포착된 압축된 사진만으로도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게다가 동물에 대한 관찰과 교감을 통하여 작가의 사유는 생명에 대한 경외로 확장되고,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철학적 사유에까지 이르게 된다.


"새벽에 나가 보니 젖소가 죽어 있다. 목을 뒤로 꼰 채 코를 땅에 박고 눈은 반쯤 뜨고 있다. 밤사이 안락사시켰다. 물통이 넘어져 있다. 물을 마시려다 힘이 없어 고개를 들지 못하고 물통을 쓰러트렸나 보다. 뒤에는 오줌을 싼 듯 물 자국이 흥건하다. 고개 숙여 명복을 빈다."  (p.175)


동물의 삶과 죽음에 대한 작가의 관찰은 작가 본인의 엄마에 대한 기억으로 이어진다. 모든 것을 다 주고도 늘 미안해하던 엄마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


어제의 메말랐던 기억을 지우려는 듯 지금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소리도 없이 내리는 비가 세상의 빛을 지우고, 소리를 지우고, 어렴풋하던 형체마저 지우고 있다. 흐릿하게 변한 세상 너머로 잊었던 봄의 기억이 되살아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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