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보면 별별 유형의 사람을 다 만나게 되지만 유독 나의 시선을 사로잡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매사에 거침이 없고, 자신이 마치 모든 분야에 정통한 듯 행동하는, 좋게 말하면 경력직 인생을 살고 있는 듯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특징은 자신의 말과 행동에 주저함이 없고, 자신이 하는 말이 진리인 듯 떠벌린다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어떠한 결과가 발생하고, 그 결과로 인해 혹시나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는 그들 머릿속에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도 면밀하게 팩트체크를 해보면 오류 투성이인 경우가 다반사이지만 신경 쓰지 않습니다. 물론 자신이 했던 말들에 대한 변명이나 사과는 있을 수 없습니다. 나처럼 매사에 노심초사하고 튼튼한 돌다리도 거듭하여 두드려보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에게는 그들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그저 신기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유형의 사람들이 별 영향력이 없는, 낮은 지위에 있을 때에는 우리 사회에 그닥 해가 되지 않겠지만, 만약 그들이 사회에 크나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고위직에 위치한다면 우리가 감당해야 할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어느 기업의 대표나 임원을 넘어 한 국가의 최고 권력자라면 어떻겠습니까? 상상하기도 싫을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지금 그와 같은 현실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트럼프라는 한 인간이 미국이라는 한 국가의 대통령인 동시에 세계 대통령으로 군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해도 아무런 죄책감이나 미안함을 느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게 뭐가 문제냐는 식으로 응대합니다. 게다가 자신의 섣부른 결정으로 인한 막대한 피해에 대해서도 사과 한마디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와 같은 유형의 대통령을 경험한 바 있고,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마치 경력직 인생을 살고 있는 듯한 사람들의 무례함은 도를 넘는 경우가 다반사이지만 그들에게 어떤 권력이 쥐어지는 한 반성이나 개선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억제하는 언론이나 제도에 대한 적개심만 증가할 뿐입니다. 윤석열이 그러했고, 트럼프나 네타냐후 역시 그렇습니다. 이와 같은 까닭에 그런 유형의 사람들에게 있어 민주주의 제도는 자신의 자유를 제약하는 커다란 걸림돌이자 타파해야 할 대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민주주의 제도를 실행하는 어떤 사회에 그들과 같은 유형의 사람들이 존재한다면 그들이야말로 반사회적 인물인 동시에 사회의 안정을 위해서는 반드시 격리해야 할 대상인 셈이지요. 그들은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인해 발생하는 어떠한 피해에 대해서도 사회 구성원에게 절대 사과하거나 반성하지 않을 테니까 말입니다.


나는 지금 권민수 작가가 엮은 <고요하고 단단하게, 법정의 말>을 읽고 있습니다. 법정 스님이 입적하신 게 엊그제 같은 데 벌써 1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나를 기준으로 삼지 않는 것이 '바르게' 보는 것이며,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고 생각하는 것을 멈춘다면 '바르고 완전하게 보기' 시작할 것입니다"  (p.69)


거침이 없고 머뭇거리지 않는 사람이 때로는 멋있게 보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는 우리가 사는 공동체를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인물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지금 그와 같은 인물의 대표적인 표상을 현실에서 마주하고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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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의 꿈
데니스 존슨 지음, 김승욱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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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가 시간의 평원 위에 골조를 세우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역사를 소재로 글을 쓰는 소설가는 그곳에 숲을 가꾸고, 물길을 틔워 생명을 가꾸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소설가는 자신의 성향에 따라 정물화를 그릴 수도 있고, 크로키를 그려낼 수도 있으며, 넓게 여백을 담아낸 수묵담채화를 그릴 수도 있다. 아무튼 우리는 지난 과거의 모습을 역사학자가 아닌, 역사를 소재로 쓰는 소설가에 의해 생생하게 그려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와 같은 소설이 영화로 재탄생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데니스 존슨의; 소설 <기차의 꿈>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140쪽의 짧은 소설이 어떻게 20세기 초반의 미국을 이토록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책을 덮고 한참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는다.


"그레이니어가 맡은 일은 초커였다. 기차 도착점 쪽이 아니라 숲 쪽에서, 숲에서 벌목꾼들이 둘씩 짝을 지어 톱으로 가문비나무를 쓰러뜨리면, 가지 담당이 도끼로 잔가지를 깨끗하게 쳐내고, 톱장이가 통나무를 18피트 길이로 잘랐다. 그다음에는 초커가 통나무를 밧줄로 감아 말이 운반할 수 있게 준비했다. 그레이니어는 이 일이 좋았다. 불끈불끈 힘을 쓰고 나면 탈진해서 도취한 것 같은 상태가 되고, 그렇게 하루 일을 끝낸 뒤에는 푹 쉬었다."  (p.19)


소설의 주인공인 로버트 그레이니어의 일대기를 절제된 언어와 통일된 구성으로 마치 전기문처럼 쓰고 있는 작가는 독자의 평가쯤이야 안중에도 없다는 듯 어떤 미사여구나 반전도 없이 그레이니어라는 인물이 살았던 당시를 아주 담담히 기록하고 있다. 대가의 작품은 이런 것이야,라고 말하려는 듯 소설은 너무도 평범하고 막힘이 없이 진행된다. 그렇다고 주인공의 사회적 위치나 명성이 특별하지도 않다. 오히려 대중 속에 섞이면 절대 눈에 띄지도 않을 듯한, 지극히 평범한 인물일 뿐이다. 현대인의 기준으로 보자면 오히려 하찮을 수 있는 존재이다. 거대한 시간의 평원 속에서 가장 낮은 위치의 한 사람에게 포커스를 맞춤으로써 우리는 지난 한 시대의 모습을 생생하게 포착할 수 있는 것이다.


"크레스턴에서 들은 소식은 끔찍했다. 모이 계곡 화재에서 아무도 그쪽으로 도망쳐 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레이니어는 사촌의 집에 여러 주 동안 머물렀다. 그 상황에서 당연한 슬픔과 혼란 때문에 병이 들어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는 아내와 어린 딸을 잃었음을 납득했지만, 가끔 폭풍이 자신을 엄습하는 것 같았다. 저항할 수 없는 군대처럼 그의 머릿속으로 폭풍이 밀려왔다."  (P.51)


19세기말에 태어난 로버트 그레이니어는 부모가 누구인지도, 출생지가 어디인지도 모르는 채 어린 시절 혼자 기차를 타고 고모가 있는 아이다호로 왔다는 기억만 갖고 있다. 10대 때 학교를 그만둔 이후 평생 막노동을 하며 생계를 꾸렸던 그는 교회에서 만난 글래디스와 결혼하여 산속 계곡에 오두막을 짓고 살아간다. 그렇게 딸 케이트가 태어났다. 벌목 현장에서 일하며 철도 부설 공사에도 참여했던 그는 어려서부터 그에게 각인된 고독의 그림자를 씻어내며 행복한 생활을 이어간다. 그러나 그의 행복은 오래 가지 않았다. 1917년 여름, 거대한 산불이 계곡 전체를 집어삼켰고, 그가 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땐 이미 모든 게 잿더미로 변한 후였다. 어렸을 때부터 외톨이였고 평생을 깊은 고독 속에서 살았던 그는 다시 숲속으로 들어가 오두막을 짓고 그곳에서 혼자 머문다. 그리고 반복되는 일상을 묵묵히 이어간다.


"그레이니어는 여든 살이 넘어서 1960년대까지 살았다. 살아 있는 동안 태평양에서 수십 마일 떨어진 서부까지 여행한 적도 있지만, 바다를 직접 본 적은 없었다. 동쪽으로 가장 멀리 간 곳은 몬태나주 경계선 안쪽으로 40마일 거리인 리비였다. 그가 사랑한 사람은 한 명, 아내 글래디스였으며, 재산은 땅 1에이커, 말 두 마리, 수레 한 대였다. 그는 술에 취한 적이 없고, 총기를 구매한 적도 없고, 전화기로 대화를 나눈 적도 없었다. 기차를 많이 탔지만 자동차도 많이 탔고, 비행기도 한 번 타본 적이 있었다. 말년의 10년 동안 그는 읍내에 나올 때마다 텔레비전을 보았다. 그는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지 전혀 몰랐으며, 자손을 남기지도 않았다."  (p.128~p.129)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마주치게 되는 작은 시련이나 불행조차 오직 자신에게만 일어나는 불운인 양 생각하여 누군가를 탓하고 불평불만에 휩싸이곤 한다. 살면서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상실의 고통 역시 '왜 나에게 이런...' 하는 마음으로 신을 원망하기에 이른다. 그 모든 것들이 누구에게나 있는 보편적인 삶의 과정임을 잘 알면서도 가슴으로는 결코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하루하루의 반복되는 일상과 그 속에서 보게 되는 작은 변화들. 그리고 시간의 풍화 속에서 자연스레 늙어가는 자신과 죽음을 향한 여정. 그레이니어의 평범한 삶이 감동으로 다가오는 까닭은 그 모든 변화에 부질없이 저항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저 담담히 받아들이고 남은 삶을 꿋꿋이 이어간다는 것이다. 20세기 초반의 미국 사회를 그린 이 한 편의 소설을 통해 나는 내가 경험하지 못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상상하는 한편 반복적인 일상을 불평 없이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다. 투명한 3월의 햇살이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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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날처럼 새벽에 집을 나서는데 바깥은 온통 젖어 있었습니다. 비는 그쳤지만 간밤에 내린 비의 양이 간단치 않았는지 낮은 곳에는 제법 물웅덩이가 고였습니다. 하늘은 우중충하니 잔뜩 흐린 채였고 이따금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어지간한 추위는 아닐지라도 으스스한 한기가 품속으로 파고들었습니다. 경칩도 지났는데... 산의 초입에 있는 계단을 다 오르자 가볍게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에는 새벽잠의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고 나온 노력이 아까워서 차마 그리 할 수 없었습니다. 후둑후둑 떨어지는 빗소리의 리듬에 맞춰 걸음은 평소보다 절반은 늦춰진 듯했고, 인적이 끊긴 등산로에는 적막이 감돌았습니다.


나는 며칠 전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숨진 이란의 초등학생들을 애도하며 걸었습니다. 어떤 이유로든 전쟁은 미친 짓입니다. 그 많은 민간인들이 아무런 잘못도 없이 처참하게 생명을 잃는다는 건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 정부는 이제 더 이상 히틀러의 만행을 비난할 권리가 그들에게는 없는 듯 보입니다. 그들 역시 히틀러의 만행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학살과 온갖 잔인한 전쟁 범죄를 저질러 왔고, 지금도 역시 그와 같은 만행을 저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신이 존재한다면 이처럼 참혹한 살상을 허락한 이스라엘과 미국의 권력자들에게 가장 먼저 지옥행 열차를 타도록 할 것입니다. 정말로 신이 존재한다면 말입니다.


희끄무레한 어둠에 싸인 등산로는 빗물에 질척거리고 미끄러웠습니다. 등산로 주변의 낙엽 위에는 비에 섞여 내린 진눈깨비가 녹지 않은 채 하얀 잔설로 덮여 있었습니다. 검게 드러나는 등산로와 잔설이 쌓인 숲의 대비는 마치 한 폭의 수묵담채화인 양 그려졌습니다. 비는 여전히 그치지 않고 입고 나갔던 운동복 상의도 비에 젖었습니다. 손전등 불빛이 한 뼘의 어둠을 쫓아낼 때마다 땅 위에 번지는 타원형의 불빛 속으로 작은 빗방울들이 다투어 모여드는 듯했습니다.


어제 했던 친구의 말이 떠오릅니다. "완벽하게 인간을 닮은 로봇이 출현하기 전에 우리 인간이 완벽하게 로봇을 닮는 게 순서적으로 더 먼저이지 않을까?"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정치인들을 보면 그들은 마치 인간이기를 거부하는, 어떤 연민이나 안타까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무감각한 인간들처럼 보입니다. '나는 심장이 없어. 나는 심장이 없어. 그래서 아픈 걸 느낄 리 없어.'라고 노래했던 어느 가수의 노랫말이 생각납니다. 오늘은 금요일이고 내게는 이틀간의 휴가가 주어졌습니다. 회사원이라면 대부분 그렇겠지만 말입니다. 가슴 아픈 소식은 이제 더 이상 들을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하기에는 지금 나의 몸 컨디션이 너무나 안 좋기 때문입니다. 경칩도 지났는데 날씨는 제법 쌀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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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빛 - 시인 리디 다타스가 모으고 되살린 크리스티앙 보뱅의 말들
크리스티앙 보뱅.리디 다타스 지음, 신승엽 옮김 / THE CIRCLE PRESS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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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수많은 소스와 향신료가 존재한다. 향수 역시 다르지 않다. 우리의 코와 입은 얕고 간사하기 이를 데 없어서 재료 본연의 맛과 냄새에 친숙해지기보다는 우리의 입과 코가 선호하는 쪽으로 발전시켜 왔다. 물론 그것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눈과 귀도 그런 식으로 자신의 선호를 발전시켜 왔던 까닭에 그림과 음악 등, 현대인들의 정서 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는 예술 작품이 등장했을 테니까 말이다. 문학작품에 대한 선호도 다르지 않은 듯하다. 이왕이면 잔소리보다 칭찬의 말이 듣기 좋은 것처럼 시간을 내어 글을 읽는 마당에 자신의 마음을 흡족하게 할 좋은 문장이 가득한 책을 선호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듯 보인다. 물론 우리의 입맛이 서로 다른 것처럼 책도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고 선호하는 장르가 각자 다 다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책을 많이 읽을수록 자신의 취향은 더욱 확고해지고 문장의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도 분명해진다.


"나는 자연을 간헐적으로만 보러 간다. 그 아름다움이 너무 커서 벅차기 때문이다. 금화와 보석으로 가득 찬 상자 앞에 오래 머무르는 것과도 같다. 그러다 보면 눈이 멀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나는 그저 두세 개의 보석만을 챙겨 돌아온다. 들판에서는 작은 작은 나무숲이 받는 것과 동일한 태양의 편지를 받을 수 있는데, 그것만으로도 이미 넘칠 정도로 충분하다."  (p.31)


언제부턴가 크리스티앙 보뱅의 글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차츰 늘고 있다. 욕심 같아서는 나만 알고 싶은 그런 작가인데 어디 그게 가당키나 할까. 프랑스 시인 리디 다타스가 보뱅의 말과 사유를 오랜 시간 경청하고 수집해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는 <세상의 빛>에는 작가가 문학·사랑·언어·삶·세계에 대해 직접 말한 문장들이 질문의 흔적 없이 이어지고 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에세이스트인 보뱅은 1951년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에서 태어나 2022년 11월 24일, 71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평생 그곳에서 글쓰기를 하며 문단이나 출판계 등 사교계와 동떨어진 삶을 살았다고 전해진다. 어쩌면 이 책은 자신의 고집스러운 삶에 대한 회고이자 자신의 문학적 태도와 세계관에 대한 해설서일지도 모른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방향이 필요하다. 모든 것이 가능해져 버린 시대에 어떻게 방향을 알 수 있을까? 북쪽은 북쪽이고 남쪽은 남쪽임을 다시 일깨워야 한다. 많은 이들에게 부족한 건 자신의 본능, 다시 말해 즉각적으로 아는 걸 붙잡는 아주 단순한 감각이다. 이는 마음에 기대어 보아야 할 것을 더 잘 가늠하는 일이다. 시골 언덕에 있는 전망 안내판에 기대어 지평선을 손님처럼 여기며 말을 걸듯이, 마음이라는 지지대 위에 기대어 보는 것이다."  (p.88)


보뱅의 글은 하나의 문장이 아닌, 맑고 시원한 하나의 목소리로 변하여 마음속 깊은 곳까지 전달된다.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것들, 이를테면 관습이나 종교나 지식이나 삶에서 늘 보게 되는 어떤 것들에 대해 그의 설명이나 해석을 듣고 있노라면 우리는 마치 갓 태어난 어린아이처럼 우리가 알거나 경험했던 모든 것들을 잊은 채 새로운 세상 속으로 지금 막 도착한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드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눈이 아닌 작가의 눈을 통해 또는 작가가 뿜어 내는 한 줄기 빛을 통해 빚어진 새로운 세상의 풍광을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렇게 새로운 세상 속에서 머물다 보면 출처를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낮게 울려 퍼지는 기쁨의 송가를 한동안 여운처럼 들을 수 있다.


"대부분의 시들은 성냥개비와 같다. 긁어 켜는 순간 아름다운 불꽃을 피우며 잠시 우리를 밝히지만, 이내 손에는 그을린 나무토막만 남는다. 나는 한 번도 빛을 본 적은 없으나, 그 빛을 온전히 알고 있다. 그리고 진정한 빛은 그런 식으로 쉽게 꺼지지 않는다는 것도. 가장  고귀한 빛을 주는 이는 시인들이 아니라, 시보다 더 아름다운 빛을 엿본 이들이다."  (p.161)


한 달 전쯤 몸살을 심하게 앓았던 탓인지 나는 예전 컨디션을 좀체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블로그에 글을 쓰는 것은 물론 책을 읽는 것조차 힘들어하고 있다. 날씨 변화가 심한 환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루 운동량을 과도하게 늘려 몸에 무리를 주었던 게 이 모든 결과의 원인이었음을 잘 알고 있다. 머리로만 알고 있던 '과유불급'의 의미를 몸을 통하여 배우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 얼마나 미련한 짓인가.


매일 조금씩 한낮 기온을 끌어올리더니 이제는 제법 봄기운이 감돈다. 금세라도 산수유꽃이 벙글 듯한 날씨인데 나는 이 아름다운 계절을 뒤로한 채 컨디션 회복에 골몰하고 있다. 휴가를 내고 잠시 쉬자니 꾀병인 듯 보이고, 꾸역꾸역 버티자니 힘이 들고...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일만 지나면 주말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주말 동안 푹 쉬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예전 상태로 회복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랬으면 좋겠다. 나는 오늘 하루도 조심조심 건너고 있다. 하루를 건너가는 게 이리도 힘든 일인가, 나는 새롭게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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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은 시간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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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투루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들 중 하나는 누군가의 단점을 나의 노력만으로 쉽게 고칠 수 있다는 착각에 자주 빠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비단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만 존재하는 커다란 실수 중 하나라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수십 년 결혼 생활을 이어 온 부부 사이에도 흔히 볼 수 있는 착각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에 대한 나의 사랑으로 혹은 (종교를 믿는 사람이라면) 신을 향한 자신의 기도를 통하여 상대방의 단점을 쉽게 개선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은 상대방의 단점을 능히 가리고도 남을 만한 다른 장점이 상대방에게 존재하거나 그와 헤어지는 것에 대한 불안이 자신의 이성을 마비시켰거나 그를 소유하고자 하는 자신의 욕구가 지나치게 강한 데서 비롯되는 게 일반적이지만, 사실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완전히 정리되기 전에 그와 같은 판단에 도달할 만큼 자기 객관화의 면모가 뚜렷한 사람은 흔치 않을 듯하다. 대부분의 사람은 타인에 대한 공감이나 배려에 익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역지사지의 태도는 숫제 경험조차 해 본 적 없을 수도 있다. 어쩌면 인간은 가장 이기적인 동물일지도 모른다.


"전시회를 본 두 사람은 버스를 타고 아클로에 있는 그의 집으로 가서 창문을 활짝 열어둔 채 침대에 누웠다. 따뜻한 바람과 이웃집의 금속 풍경 소리가 들어와 방을 가로질렀다. 사빈은 한 시간 정도 자고 일어나 테스코까지 걸어가서 장을 봐 온 다음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타임 줄기를 넣고 구운 닭고기와 마늘, 주키니 호박이었다. 이 여자는 요리를 할 줄 알았다. 카헐은 지금도 그것만큼은 인정했다. 하지만 설거짓감이 너무 많이 나와서 마음 한구석으로는 늘 화가 났는데, 그가 전부 헹궈서 식기세척기에 넣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보통 그녀가 밤새 불려야 한다고 말했던 오븐용 그릇만은 예외로, 그가 월요일에 퇴근하고 돌아올 때까지 싱크대에 그대로 있었다."  (p.21 너무 늦은 시간' 중에서)


클레어 키건의 소설집 <너무 늦은 시간>에는 표제작인 '너무 늦은 시간'과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 그리고 '남극' 등 단 세 편의 단편소설이 실린 얇은 책이다. 그렇다고 소설의 내용 또한 가볍고 쉽게 이해되는 건 아니다.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너무 늦은 시간'에서 주인공인 카헐은 어느 회의장에서 만난 사빈과 사귀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청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인색한 데다가 남성 우월주의적 환경에서 성장한 카헐은 자신의 집으로 짐을 옮긴 사빈과의 결혼 준비 과정에서 여러 번 충돌한다. 사빈은 카헐의 직장 동료인 신시아를 통해 카헐의 행동에 있어서의 문제점을 확인한다. 사빈은 카헐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지만 카헐은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한 채 그것들이 다만 아일랜드 남자들의 관습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대학 시절 부모님과의 식사 자리에서 남동생이 어머니가 자신의 접시를 들고 식탁에 앉으려 할 때, 의자를 홱 빼버리는 바람에 어머니가 바닥에 넘어졌던 것은 물론 접시가 깨지고 접시에 담겼던 음식이 흩어지는 것을 보고 남자들 세 사람이 크게 웃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카헐은 마음 한구석으로 아버지가 다른 남자였다면, 그때 그 모습을 보고 웃지 않았다면 자기가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오래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는 별 의미 없는 일이었다고, 못된 장난이었을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거나 하기 싫어져서 옆으로 누웠지만 적어도 한 시간은 지난 후에야 잠이 왔고, 그는 어느새 잠의 위안과 새로운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p.44~p.45 '너무 늦은 시간' 중에서)


한편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은 '뵐 하우스'라는 작가 레지던스에서 집필 작업을 하려던 여성 주인공이 다짜고짜 걸려온 전화를 받게 된다. 독문학 교수라고 소개한 남자는 집을 둘러보겠다며 무례하게 부탁한다. 글을 써야 할 귀중한 시간에 주인공은 마지못해 응한 남자의 방문이 영 못마땅하지만 준비한 케이크를 대접한다. 남자는 이를 게걸스럽게 먹고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오히려 주인공을 타박하기에 이른다.


"얼마나 끔찍한 남자인지! 정말 끔찍하고 불행한 남자야. 그녀가 문을 잠그며 생각했다. 정신이 나갔나? 게다가 얼마나 수고를 들였는지 생각하면...... 그녀는 케이크를 보면서 창밖으로, 그의 뒤에다가 던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는 대신 케이크를 냉장고 깊숙이 넣고 와인을 한 잔 따랐다."  (p.77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 중에서)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던 여자는 집을 떠날 때마다 다른 남자와 자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다.'로 시작하는 '남극'은 결국 이를 실행에 옮기는 여자의 경험을 다룬다. 그러나 작가는 독자들의 예상과 전혀 다른 결말을 준비하여 놀라게 한다. 이 세 편의 단편소설은 대략 10년씩의 시차를 두고 쓰였다지만 작가 특유의 문체는 비슷하고, 주제 역시 일관되게 흐른다. 2022년에 발표된 '너무 늦은 시간'과 2007년에 발표된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 그리고 1999년에 출간된 '남극'이 한 권의 책으로 묶여 작가의 생각과 문학적 표현의 변화를 보여주기 위한 시도로 보이지만, 특이하게도 클레어 키건은 시간의 추이에 다른 변화를 보여주기보다 하나의 주제를 각각 다른 소재로 선보이는 3인 3색의 색다른 매력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데이트 폭력과 남녀 간의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대두되고 있다. 클레어 키건은 이 책에서 결혼 전의 두 남녀의 갈등과 무례하고 자기중심적인 남자를 제삼자적 관점에서 보게 되는 여자와 경험해보지 못한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 위험한 상황에 직면하는 한 여자의 이야기를 압축적인 이야기로 담고 있다.


최근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모텔 살인 사건도 그렇지만 남녀 간의 관계는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사랑의 감정이 싹트기 시작하면 상대방의 단점이 아주 작게 보이거나 쉽게 개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그것이 잘못된 믿음이었음을 곧바로 알게 된다. 그럼에도 문제가 지속되는 까닭은 인간의 적응력 때문이 아닐까 싶다. 위중한 폭력 앞에서도 시간이 흐르고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인간은 그 상황에 적응한다는 점이다. 때로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클레어 키건은 각각의 상황을 여성의 입장에서 쓰고 있지만 비단 이것이 어느 한 편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남녀 간의 교제를 법으로 금할 수도 없고... 사랑에 이르는 길은 너무도 가깝고 사랑에서 벗어나는 길은 너무나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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