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트를 넣은 빵 - <장정일의 독서일기 1-7>에서 가려 뽑다
장정일 지음, 김영훈 엮음 / 마티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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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블로그를 읽는 일과 타인의 서평집을 읽는 일은 비슷한 동기에서 출발한다. 그것은 일종의 증상이 심하지 않은 관음증이라고 표현해도 좋다. 독서에 취미가 있는 나와 같은 사람이 어느 독서 블로거의 블로그를 방문하는 일과 책으로 출간된 타인의 서평집을 읽는 일은 그 형태만 다를 뿐 목적은 서로 동일하다. '다른 사람들은 과연 어떤 책을 읽고 있는가? 어떤 책에 감동하고, 또 어떤 책에 혐오를 느꼈는가? 내가 읽어보지 못한 책 중 그가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은 과연 어떤 게 있을까?' 이와 같은 목적의 범위를 책이 아닌 다른 일상으로 넘겨 보면 우리가 겪는 관음증의 징후는 훨씬 심각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다른 사람은 어떤 집에서 거주하고, 어떤 물건을 소비하고, 어떤 음식을 탐닉하고... 관음증의 끝판왕은 어쩌면 여행 관련 분야가 아닐까 싶다. 예전부터 가고 싶었지만 나는 갈 수 없었거나(제반 비용이나 기타의 여러 조건이 맞지 않아서), 그닥 가고 싶지는 않지만 타인의 경험은 몹시 궁금했던 어느 블로거의 사진과 여행기를 읽으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는 건 우리 안에 내재된 관음증의 발현이 아니고 과연 무엇이겠는가. 그런 까닭에 비슷비슷한 내용의 수많은 여행 에세이가 제목만 달리 하여 지금도 여전히 출간되고, 그와 같은 책을 읽는 독자가 여전히 줄어들지 않는 걸 보면서 나는 여행만큼 우리 안에 내재된 관음증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분야는 다시없겠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행위를 통하여 유익한 정보를 얻기도 하지만, 아무튼.


"이 책은 절판된 『장정일의 독서일기 1-7을 재가공해 만들었다. 지난 몇 달 이 책들을 천천히 여러 번 읽으며 새겨둘 문장에 줄을 쳤고 모아 문서로 정리했다. 애매한 표현이지만 이 작업은 온전히 『독서일기』를 읽은 나 개인의 판단만으로 이루어졌다. 중립적인 원칙과는 거리가 있다. 소설을 팠던 작가는 역사에 빠져들다가도, 현실사회나 인문.철학에서 서성이기도 한다. 그 세월 속에서 작가와 세상 사이 생긴 불화의 대목도 있다."  (p.7 '『이스트를 넣은 빵』을 엮으며' 중에서)


1994년 범우사에서 처음 출간된 『장정일의 독서일기』는 애초에 1년에 한 권씩 나올 예정이었지만, 출판사를 바꾸어가며 같은 제목으로 2007년 7권까지 출간되었다. 시인으로 등단하여 희곡작가로, 소설가로 변신했던 장정일은 '독서일기'를 통해 그의 독서가다운 면모를 여실히 드러냈다. 작가란 모름지기 책과 가까운 사람들이지만 자신이 선호하는 일정 분야의 책을 고집하게 마련인데, 장정일은 분야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책을 읽는 것은 물론 짧게나마 자신의 평을 남김으로써 다른 이의 독서 생활에 보탬이 되도록 한다. 『장정일의 독서일기』를 한 권이라도 읽어본 사람이라면 수긍하겠지만 장정일은 훌륭한 작가이기 이전에 훌륭한 독자였던 셈이다.


"마루야마 겐지는 나를 행복하게 하는 작가이다. 그의 소설도 좋지만 나는 그의 이력이 좋다. 그래서 뻔히 알고 있는 사항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책을 읽기 전에 번번이 그의 약력을 다시 읽는다. 그래서 몇 달 전에 읽었던 아쿠타가와 문학상 수상작품전집을 통해서는 그의 취미가 모던 재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개인적으로는 귀중하게 여겨지는 그 사실은 한국에 번역된 다른 책에는 소개되어 있지 않다. 뜻밖에도 이번에 읽은 『밤의 기별』에서는 재즈가 부정적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그건 소설적 정황에서고, 내가 생각하기에 그는 기질적으로 재즈와 잘 어울릴 사람이고 함부로 취미를 바꿀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p.180)


전에도 몇 번 말했었지만 이런 종류의 책을 읽는 것의 부정적 효과는 읽고 싶은 책의 목록이 한계치 이상으로 증가한다는 점이다. 아무리 추리고 추려도 일정 기간 내에 읽을 수 있는 책의 권수를 훌쩍 넘기고 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읽지도 못한 채 반납하는 소위 '책을 산책시키는 사람'으로 전락하고 만다. 서평집을 읽은 후에 찾아오는 깊은 후유증이다. 이러한 후유증은 단 한 번도 예외가 없었던 중증의 질병이다. 나에게는 말이다. 그럼에도 이 책에는 장정일의 독서 감상 외에 1996년 판매금지 처분을 받았던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에 대한 자신의 견해와 희곡과 소설 등의 작품 구상에 관한 글이 실려 있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내 소설은 쓰레기"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녔다(지금도 생각은 그렇게 한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한 10여 년쯤 하고 보니, 내 소설만 아니라 사람까지 쓰레기가 되는 거였다. 소설은 그 사람의 인격이고 평가 기준이 되는 건가, 아니면 자기 문학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인생을 총알받이로 삼는 건가?"  (p.355)


내가 유튜브에 올라오는 동영상을 자주 보는 건 아니지만 나는 아직도 먹방 동영상을 보는 사람들의 심리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타인이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면서 도대체 내가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무엇이며, 그것에서 어떤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것인지 도통 알 수 없는 것이다. 단순히 다른 사람들은 어떤 음식을 즐겨 먹는지 궁금한 것이라면 그가 많이 먹건 적게 먹건 상관이 없는 문제이니 굳이 많이 먹는 사람을 찾아볼 일도 아니지 않은가. 아무튼 이것만 보더라도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음을 실감하게 된다. 장정일의 글을 읽어 보면 그도 역시 다른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흥미로운 사람 중 한 명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어느새 4월도 끝을 향해 가고 있다. 한낮 기온이 초여름처럼 더워졌고, 연녹색의 새순이 차츰 색을 더하여 녹색으로 바뀌고 있다.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어렵게 맞은 이 한낮의 여유를 가만가만 느껴보고 있다. 아파트 공터에선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누군가의 한숨처럼 가늘게 흐르는 바람이 불고 있다. 아이들의 모습이 궁금해서 베란다 창문을 열고 내려다본다. 눌러두었던 관음증이 다시 도지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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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이 정말 많이 길어진 듯합니다. 나는 하루를 대개 새벽 5시 30분쯤에 시작하는데,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그 시각의 하늘엔 어둠이 채 가시지 않았기 때문에 집을 나설 때면 언제나 주머니에 손전등을 챙기곤 했습니다. 손전등은 산을 오르기 위한 필수품이었기 때문입니다. 1시간쯤 운동을 마치고 산을 내려올 즈음이면 그제야 도시 저쪽으로 오렌지색 햇살이 번져 잠에 취한 사람들을 깨우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며칠 전부터 나는 손전등도 없이 집을 나서게 되었습니다. 하늘은 이미 갓 돋은 햇살이 자르르 윤기를 더하고, 어슴푸레하던 건물의 윤곽이 반듯반듯 제 형태를 찾기 시작합니다. 푸르스름한 어둠의 흔적만이 그늘진 숲을 간간이 떠돌 뿐입니다.


사실 그닥 놀라운 일도 아닙니다. 내가 세상을 겨우 한두 해 산 어린애도 아니고, 낮이 짧아지고 다시 길어지는 계절의 순환을 적어도 수십 번 반복하여 경험한 터이지만, 나는 이렇게 어느 날 갑자기 손전등도 없이 등산로를 오를 수 있는 날이 도래하면 그것이 마치 내 인생에 있어 첫 경험인 양 놀라곤 합니다. 그것은 어쩌면 어제 있었던 일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낮은 기억력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요즘 아베 아키코의 장편소설 <카프네>를 읽고 있습니다. 삶을 살다 보면 어떤 계기로 우리는 이따금 손도 까딱할 수 없는 무기력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그와 동시에 집안은 온통 난장판으로 변하게 되고, 우리의 일상은 무너집니다. 때가 되면 낮이 길어지는 것처럼 우리는 새로운 일상을 살기 위해 지난 어둠을 몰아내야만 합니다. 어둠이 쌓이면 예전에 경험했던 가벼운 일상은 결코 돌아오지 않는 법이죠. 설거지, 청소, 빨래 등 반복적으로 해야 할 집안일을 한번 미루기 시작하면 금세 쌓이고 쌓여 자신의 한계를 훌쩍 넘어서게 마련입니다. 그럴 때 주변의 누군가가 손을 내밀어 주지 않으면 가벼웠던 일상은 쉽게 무너지고 맙니다. 단단하고 규칙적인 것으로만 보였던 우리의 일상은 그렇게 허술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냉장고 문을 닫은 세쓰나는 린카를 바라보며 말했다. "미래는 암울할지도 모르지만, 달걀과 우유와 설탕은 어지간한 일이 생기지 않는 한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아. 너는 너랑 엄마가 먹을 푸딩을 네 힘으로 언제든 만들 수 있어." 세상 전부가 싫다는 듯 짜증이 가득했던 소녀가 지금은 조용히 세쓰나를 바라보았다. 맑은 눈동자가 천천히 물기를 머금고 흔들리는 것을 가오루코는 바라보았다."  (p.133~p.134)


한 번의 게으름이 다음에 할 일을 두 배로 늘리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몸과 마음은 다음이 두려워 오늘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그때그때마다 빠릿빠릿하게 처리하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 번쯤 미루기도 하고, 느긋하게 게으름을 피우기도 합니다. 그러나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는 우리는 곧 제자리로 돌아오곤 합니다. 그렇게 일상은 다시 제자리를 찾게 됩니다. 다시 아침이 찾아오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내재된 마음의 회로가 일순 모든 것을 포기한 양 멈추는 순간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필요로 하는 순간입니다. 마음의 회로가 멈춘다고 해서 생존에 필요한 일상의 회로조차 멈추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입니다. 소설 <카프네>는 독자들에게 그것을 말하려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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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의 회고록 - 당신의 삶 쓰기
윌리엄 진서 지음, 신지현 옮김 / 엑스북스(xbooks)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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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일이든 이론에 강한 사람이 있고, 실전에 강한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나처럼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미리 이것저것 알아도 보고, 별 소용도 없는 것조차 찾고 또 찾는 바람에 정작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진이 빠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런 사전지식도 없이 대뜸 일부터 시작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둘 중 어떤 것이 좋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다만 개인의 취향이나 성격의 문제일 뿐이다. 이것저것 많이 준비한다고 해서 안 좋게 끝날 일이 좋은 결과로 이어질 리도 없고, 어차피 잘 될 일인데 아무런 사전지식도 없이 시작한다고 해서 결과가 나빠질 리도 없는 것이다. 인생이란 누구나 초보자이고, 다른 사람과 동일한 조건에서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어떤 일이든 일절 공부를 하지 말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미리 알게 된 약간의 지식이 나처럼 소심한 이로 하여금 처음 하는 어떤 일을 두려움 없이 시작할 수 있게 도와주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공부란 두려움을 없애는 방편이며, 두려움이란 그 분야를 전혀 모른다는 의미와 크게 다르지 않다.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을 품는 것과 실제로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쓰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글을 쓰려고 마음먹은 순간 걱정부터 밀려올지도 모른다. 뒤죽박죽 얽히고설킨 과거에서 어떻게 일관적인 내러티브를 끌어낼 수 있을까? 어떻게 내러티브를 시작해야 할까? 어디서 멈춰야 할까? 내 글을 읽고 기분이 상하는 사람은 없을까? 여러분의 머릿속에는 글로 남기고 싶은 기억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의심스러운 생각이 솔솔 피어오른다. 내가 제대로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이야기를 쓴다 한들 사람들이 관심이나 가져 줄까? 내 이야기가 재미있을 거라는 생각은 나만의 착각 아닐까? 자, 이제 이런 의심은 떨쳐버려도 좋다. 작가는 무언가를 추구하는 존재다. 여러분도 글을 통해 무언가를 추구할 자격이 있다. 내가 이 책을 집필하는 목적은 여러분에게 글을 쓸 자격과 그에 필요한 도구를 쥐어 주기 위해서다."  (p.19)


저널리스트이자 편집자였고, 대학에서 오랫동안 논픽션 글쓰기를 가르쳐 왔던 윌리엄 진서의 자전적 글쓰기 지침서 <스스로의 회고록>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던 글쓰기 작법서와는 결이 크게 다르다. 글쓰기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나탈리 골드버그의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나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가 글쓰기의 기초와 방법론을 제시하는 책이라면 <스스로의 회고록>은 우리들 각자가 살아온 기록을 글로 옮겨보라는 권유이자 그런 욕구를 지닌 이들에 대한 답신이다. 그러나 회고록이라 함은 단순히 자신의 삶의 기억에 대한 기록만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기록이 서사로 연결되지 않으면 아무도 나의 글을 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흥미로운 삶을 경험하면 흥미로운 회고록이 그냥 만들어질 거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우리네 삶에는 질서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월든 호숫가에서 술술 글을 썼을 거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는 무려 8년 동안 일곱 번이나 원고를 고쳐 썼다. 그는 독자들이 대화를 엿듣는 것처럼 편하게 이야기를 읽을 수 있는 글쓰기 기법 - 평론가 마가렛 풀러는 이를 '모자이크 방식'이라 규정했다 - 을 사용했다. 그는 나무꾼으로서 숲 속에 간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작가로서 숲 속에 가 불멸의 고전을 창작했다."  (p.214)


내 주변에도 은퇴자가 많다. 그들 대부분의 고민은 뭘 하면서 시간을 보내면 좋을까? 하는 문제이다. 물론 이따금 경제적 고민이 끼어들기도 한다. 모르는 사람들은 편하게 "여행이나 하면서 살아."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행도 하루이틀이지 자신에게 남겨진 긴긴 세월 동안 주야장천 여행만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체력이 받쳐주질 않는다. 젊은 시절에는 얼마든지 여행을 할 수 있는 체력이 있었지만 돈이 따라주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면, 은퇴자의 경우에는 이와 반대로 체력이 따라주지 않는 것이다. 물론 10년이고, 20년이고 여행만 다닌다면 경제적 문제가 부담이 될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렇다고 손에 잡아본 적도 없는 붓을 들고 그림 그리기에 매진할 수도 없다. 은퇴 이후의 사업이나 부업에 대해서는 은퇴 이전부터 많이 듣고 배워 보았으나 정작 자신을 돌보는 문제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는 것이다.


"나는 학생들에게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옳은' 길이 하나만 있는 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사람들 모두가 서로 다른 존재이며, 그들은 각자 출발점이 다르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도 다르다고 이야기한다. 나는 학생들에게 변화는 삶의 활력소이며, 꼭 정해진 길만 밟으라는 법도 없고, 세상에 한계는 없다고 말한다.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나는 매주 수요일 오후 학생들과 차를 함께하는 자리를 마련하고 있다. 그리고 그 자리에 학문 외적으로 성공을 거둔 사람들 - 예일대 학생들이 쉽게 접하기 어려운 사람들 - 을 초청해 그들의 이야기를 편하게 들어본다."  (p.176)


사실 이 책은 책의 저자인 윌리엄 진서 자신의 회고록에 가깝다. 그럼에도 작가는 자신의 회고록을 본보기로 삼아 책을 읽는 당신도 자신의 회고록을 써보라고 권한다. 그가 말했듯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그 사람이 갖고 있던 기억은 사라지지만, 글을 남기면 그 기억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이야기에는 각자의 진실이 있다.'라고 쓴 그의 문장 역시 곱씹어 생각해 볼 만하다. 은퇴 이후에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취미를 갖는다는 건 어쩌면 가장 저렴하면서도 가장 유익한 여가 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여가 생활이 마냥 답답하고 단조롭다고 느낄 사람이 대다수일 터, 훈련이 되지 않은 이에게는 어려운 선택일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지구상의 모든 삶에서 귀하지 않은 게 없는 까닭에 자신의 삶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는다는 것은 어쩌면 본인뿐만 아니라 다음 세대에게도 죄를 짓는 게 아닐까 싶다. 그것을 읽고 배울 기회마저 박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읽어볼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의 판단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쓴 책을 읽는 다른 누군가의 문제라는 걸 기억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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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하는 말과 글에도 어떤 생명력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종종 하게 됩니다. 이와 같은 나의 생각이 다소 불편한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마치 이것이 미신처럼 여겨질 테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노래를 하는 가수들도 자신의 인터뷰에서 이따금 '가수는 노래 따라 인생이 결정된다.'는 말을 종교와 상관없이 언급하곤 합니다. 물론 연기를 하는 배우도 '배우는 배역에 따라 인생이 결정된다.'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와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 또한 자신의 말에 대한 사실을 확신하거나 증거를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살다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주변 사람들 얘기를 들어 보니 그럴듯하다는 뜻으로 가벼이 하는 말일 테지요.


이와 같은 생각은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도 미신처럼 퍼져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이를 맹신하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말입니다. 변변한 의료 시스템이 갖추어지지 않았던 과거에는 이런 생각이 지금보다 훨씬 더 설득력을 얻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 까닭에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릴 수밖에 없는 이름의 경우에는 더욱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었을 테지요. 내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어느 정도 면역력이 갖춰지기 전까지는 자신의 이름 대신에 험한 이름으로 불려지곤 했습니다. 예컨대 개똥이, 말똥이 등의 이름 같지도 않은 이름이 아이들에게 붙여지곤 했었습니다. 이런 풍습은 비단 우리나라에만 있었던 것은 아닌 듯 베트남계 미국 작가인 오션 브엉의 소설 <지상에서 우리는 잠시 매혹적이다>에도 등장합니다.


"저한테는 예나 지금이나 별명이 많았죠. '리틀독'은 란 할머니가 부르시는 별명이었어요. 누가 당신 자신과 딸에게 꽃 이름을 지어주신 분으로 하여금, 그 손자는 '개'로 부르게 했을까요? 자신의 것을 경계하는 여인, 바로 할머니였죠. 아시겠지만 란 할머니가 자란 마을에서는 아이가 종종 무리에서 가장 작거나 허약하면, 저처럼요, 가장 경멸할 만한 것들을 따서 이름을 지었어요. 악마, 유령아이, 돼지코, 원숭이, 들소머리, 후레자식...... 리틀독은 그만하면 부드러운 축에 들었죠. 그렇게 한 것은, 건강하고 예쁜 아이들을 찾아다니는 악령이 저녁식사 자리에서 뭔가 흉측하고 섬뜩한 존재의 이름이 불리는 것을 들으면, 그 아이를 살려준 채 그 집을 지나칠 거라는 이유에서였어요. 무언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러니까, 너무 가치가 없어 건드리지 않고 살려둘지 모를 어떤 것을 딴 이름을 지어주는 것이죠."  (p.35)


나이가 들고 세상의 이치에 대하여 하나둘 깨우쳐 간다는 것은 경계하고 저어하는 일들이 그에 비례하여 늘어난다는 뜻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나 역시 해가 갈수록 남에게 하는 말 한마디조차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닙니다. 말이 씨가 될 수도 있고, 나의 말이 상대방에게 해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그런 것까지 모두 신경 쓰면 세상을 어떻게 살 수 있겠느냐'며 우려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좋은 말만 하고 살기에도 우리의 수명은 짧기만 할 뿐입니다.


황사의 영향인지 아침부터 뿌옇던 하늘은 오후가 되어서도 나아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뚝 떨어졌던 아침 기온은 낮이 되자 제법 오른 듯합니다. 변덕이 심한 봄 날씨. 유럽을 여행하고 있는 아들은 런던과 파리를 거쳐 스트라스부르에 도착했다고 알려왔습니다. 아들이 유럽을 향해 떠난 지 벌써 보름이 가까워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구라는 행성 위에서 건강하게 여행할 수 있는 것도 어쩌면 다른 누군가의 염려와 기도 덕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말과 글에도 보이지 않는 생명력이 존재하고, 그것이 서로에게 반복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믿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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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극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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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를 즐기지 않는 사람일지라도 맘에 드는 작가를 우연히 만나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리하여 예정에도 없던 '전작(全作) 읽기'라는 걸 하게 되는데, 여기까지는 뭐 그렇다 치더라도 하나 조심해야 할 게 있다. 작품을 읽는 순서를 어떻게 정하느냐에 따라 그 작가가 더 좋아질 수도 있고, 단박에 싫어질 수도 있다는 점이다. 진정으로 좋아하는 작가를 만났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못 믿겠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다른 작품은 어떻게 순서를 정하더라도 크게 상관은 없겠지만 데뷔작을 어떤 순서로 정하느냐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나의 경험으로는 그러하다. 누구에게나 데뷔작은 자신의 전체 작품 중에서 남에게 자주 내보이기 싫은 '아픈 손가락'인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아직 틀이 잡히지 않은 미숙한 문체와 과한 의욕으로 인한 비약적인 구성 등 돌이켜보면 당장이라도 그때로 되돌아가 바로잡고 싶은 결함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문제는 비단 작가 자신에게만 보이는 것은 아니고, 책을 읽는 독자들도 어떤 것이 문제라고 정확히 지적할 수는 없지만, 책을 읽는 내내 '뭔가 어색한데' 하는 느낌이 강하게 들게 마련이다. 물론 데뷔작부터 크게 인기를 끌기 시작하여 꾸준히 인기를 누리고 있는 작가라면 그런 문제점을 느끼기 어렵지만, 데뷔는 한참 전에 했었는데 그동안 인기작을 한 권도 내지 못하다가 어떤 한 작품으로 인하여 갑작스럽게 대중의 인기를 독차지하게 된 작가라면 데뷔작에 대한 독자의 낮은 평가를 피하기 어려울 듯 보인다는 게 내 생각이다. 글을 쓰는 일도 기술임을 감안할 때 연륜 또한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 클레어 키건의 작품을 한 번쯤 읽어본 독자라면 작가가 쓴 다른 작품이 뭐가 있는지 알아보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것이다. 나 역시 비슷한 경험을 거쳐왔다. 몇 권 되지도 않지만, 각각의 책들이 두껍지 않은 분량으로 엮인 까닭에 책을 선택하는 데 주저함이나 망설임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선택이 너무나 쉬웠던 게 문제라면 문제일 수 있었다. 정제된 문장과 다층적인 의미의 언어 선택, 그리고 절정과 결말의 순한 이어짐, 책을 덮은 후에도 길게 이어지는 여운 등으로 인해 나는 '이게 뭐지?' 하는 알 수 없는 감정과 도무지 정리가 되지 않는 주제의식, 하나로 귀결되지 않는 교훈 등 책을 읽은 후의 묘한 흔들림으로 인해 간단한 리뷰를 쓰는 일조차 힘에 겨웠다. 나는 여전히 내가 읽었던 작가의 다른 작품에 대한 리뷰를 미루고 있다. 기약도 없이 말이다.


"호흡이 차분해졌다. 옆방에서 커튼이 파닥거리는 소리가 났다. 남자가 창문을 열어놓고 갔다. 풀려나려고 애를 쓰느라 솜털 이불이 바닥에 떨어졌고, 그녀는 알몸이었다. 이불에 발이 닿지 않았다. 냉기가 들어와서 집 안에 퍼지며 방을 채웠다. 그녀가 몸을 떨었다. 차가운 공기는 밑으로 내려오지, 그녀가 생각했다. 결국 떨림이 멈추었다. 온몸이 무감각해졌다. 그녀는 혈관 속의 피가 느려지고 심장이 쭈그러드는 것을 상상했다. 고양이가 침대에 펄쩍 뛰어오르더니 매트리스 위를 돌아다녔다. 누그러진 분노가 공포로 변했다. 그 역시 지나갔다."  (p.37 '남극' 중에서)


그렇다. 표제작인 '남극'을 비롯하여 열다섯 편의 단편소설이 실린 이 책은 클레어 키건의 데뷔작이다. 그러나 많은 독자와 평론가들이 데뷔작에 내리는 박한 평가를 클레어 키건은 가뿐히 피해 가는 듯하다. 오히려 과분하다 싶은 칭찬과 돋보이는 추천사 등으로 인해 작가의 이름이 묻히는 느낌이다. 사실 빼어난 실력의 작가 곁에는 신랄한 평을 아끼지 않는 독한 평론가가 있어야 더 좋은 작품을 끊이지 않고 출간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클레어 키건의 애독자인 나로서도 그녀의 데뷔작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지만, 다소 비약적인 구성과 특이한 소재의 선택 등은 '역시 데뷔작은 데뷔작이구나.' 하는 느낌을 갖게 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데뷔하는 작가는 사실 다소 평이하다 싶은 소재와 구성, 그리고 웅숭깊은 문장 등을 가지고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데에는 한계가 존재한다고 느낄 수밖에 없고, 그와 같은 불안이 작가로 하여금 자극적인 소재나 특이한 구성으로 안내한다.


"하지만 나는 정신 병원을 계속 찾아간다. 복도에서 나는 소독약 냄새, 간호사들의 고무창 신발, 일요일 신문을 두고 다투는 소리가 좋다. 어머니는 광기가 핏줄에 흐르는 것이라고 항상 말했고 나는 양가에서 그것을 물려받았다. 내가 그곳에 가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나는 그곳에 익숙해지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주 약간, 나를 지키기 위해서 그곳을 아주 조금 받아들이는 것이다. 백신처럼 말이다. 최악의 시나리오를 직시해야 한다. 그러면 무엇이든 대비할 수 있다."  (p.124~p.125 '폭풍' 중에서)


표제작인 '남극'은 남편과 가정이 있는 여자가 다른 남자와 과감한 일탈을 시도하는 이야기로 술집에서 만난 남자의 집으로 가 욕망을 해소한 후 집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그녀의 의도와 전혀 다르게 사건이 전개되고 만다. 폭풍을 먼저 감지할 만큼 예민했던 어머니는 외할머니의 사망 이후 그 예민함이 광기로 변하여 가족 전체를 뒤흔들게 되고, 자신 역시 어머니를 닮았다는 사실을 인지한 딸은 불안을 관리하며 최악의 상황을 대비한다는 내용의 '폭풍'과 오래 살던 집을 철거하고 개발을 진행하려는 시에 맞서던 할머니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집을 처리한다는 내용의 '불타는 야자수' 등 클레어 키건의 문학적 특징과 섬세함이 드러나는 단편들이 줄곧 나의 시선을 붙잡는다.


"소년은 바깥으로 나가서 별을 올려다보았다. 어머니는 별이 우리를 내려다보는 천사라고 말했다. 엄마는 하느님을 믿었다. 사람들은 엄마가 천국에 갔다고 했다. 소년은 집으로 다시 들어갈 수 없었다. 집은 꽉 차 있으면서 동시에 텅 비어 있었다. 엄마가 꽃병에 꽂아둔 스노드롭이 있고, 아버지를 위해 다려서 나무 옷걸이에 걸어둔 셔츠도 있고, 안락의자 밑에 엄마의 털 슬리퍼도 있었다."  (p.317 '불타는 야자수' 중에서)


지금은 대한민국의 인기 작가 중 한 명이 된 정유정 작가의 데뷔작인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를 작가의 다른 작품 몇몇을 읽고 한참 시간이 흐른 뒤에서야 겨우 읽었던 게 문득 떠오른다. 나는 지금도 ' 그 책은 차라리 읽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종종 한다. 작가가 글을 쓰다 보면 때로는 독자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평균 이하의 작품을 쓸 때도 있고, 인생작이라고 할 만큼 기대 이상의 멋진 작품을 세상에 내놓을 때도 있다. 그러므로 어떤 작가가 맘에 든다고 해서 예정에도 없던 '전작 읽기'를 시도한다는 건 꽤나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작가가 항상 나의 취향에 맞는 작품을 내놓을 거라는 기대는 얼마나 황당하고 어리석은가. 설령 나의 취향에 맞지 않는 작품이 나왔다 할지라도 조용히 다음 작품을 기다려주는 게 독자로서의 성숙한 자세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이제 나이가 들어 그가 쓴 글이 예전처럼 에너지가 넘치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 세월의 무상함을 함께 느끼며 슬퍼하는 것도 현명한 독자로서의 바른 태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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