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메모 - 이것으로 나의 내일이 만들어질 것이다 아무튼 시리즈 28
정혜윤 지음 / 위고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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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생각하는 메모란 지극히 사적이면서 다분히 비밀스러운 행위가 아닐 수 없다. 다만 수첩이나 노트에 수기로 작성하던 메모의 장소 혹은 영역이 스마트폰으로 옮겨 갔을 뿐이다. 그러나 글씨 쓰는 일이 갈수록 줄어드는 현대인에게 있어 메모 장소의 변화는 단순한 행위에서 그치지 않고 우리의 감각에서 사각거리는 손글씨의 느낌마저 사라지게 했다. 건조한 종이 위를 연필 혹은 볼펜의 검은 선이 '글자'라는 추상적 문양을 그리며 미끄러져 나아가는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 버리기에는 아까운 자태인 것이다. 물론 때에 따라서는 붉은색 혹은 파란색 선이 그려지기도 하지만.


사라져 가는 듯 보였던 메모의 풍경이 최근 들어 되살아나고 있다. 맘에 드는 문장이나 책을 한 장소에 여럿이 모여 필사를 하는 모임이 생겨나고 있으니 말 다했지 뭔가. 물론 혼자가 아닌 여러 명이 모임으로써 나태해지려는 자신을 붙잡을 수 있고, 필사에 좋은 여러 아이디어를 취합할 수도 있고, 필사를 핑계로 친목 모임도 이어갈 수 있는 등 여러 장점이 있겠지만 자신의 손으로 노트에 글씨를 쓰고 자신이 기록한 문장의 의미를 곰곰 되짚어 생각해 본다는 건 디지털 전환의 시기에 아날로그 감성을 되살리는, 이른바 시대를 역행하는 시도일 수도 있다.


"그때의 노트들은 이제 어디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메모들은 지금의 내 삶과 관련이 깊다. 나였던 사람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당시 노트에 쓴 것들이 무의식에라도 남아 있으리라, 나는 믿는다. 어느 날 무심코 한 행동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 믿는다. 이게 메모를 하는 가장 큰 이유인지도 모른다. 무심코 무의식적으로 하는 행동이 좋은 것이기 위해서. 혼자 있는 시간에 좋은 생각을 하기 위해서. 그런 방식으로 살면서 세상에 찌들지 않고, 심하게 훼손되지 않고, 내 삶을 살기 위해서."  (p.35~p.36)


CBS 라디오 피디이자 작가인 정혜윤 피디의 <아무튼, 메모>를 읽으면서 중간중간 책장을 덮은 채 한동안 이런저런 상념에 빠져들곤 했다. 나는 그동안 몇 권의 아무튼 시리즈를 읽어 보았지만 출판사의 기획 의도에 맞게 작가는 자신의 취향이나 기호에 어울리는 제목을 뽑아 친구에게 수다를 떨듯 가볍게 풀어가는 게 일반적인지라 책이 출간될 때를 기다려 모두 읽어왔던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던 것이다. 그랬던 내가 정혜윤 피디가 쓴 <아무튼, 메모>를 꼭 읽어봐야지, 하고 생각했던 건 꽤나 특별한 사건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정혜윤 작가의 열혈 애독자라고 말할 수도 없는 내가.


"인생에 대한 수많은 정의가 있지만 이런 정의는 어떨까? '말과 몸'이 협력해서 빚어내는 이야기. 몸은 여러 모로 신비한 요소가 있다. 몸은 노화를 겪으며 낡는데 그 낡은 몸이 겨로 낡을 수 없는 기억을 담고 있다. 나쓰메 소세키는 인간의 몸을 가리켜 피를 담는 자루가 시간을 담는다고 했다. 시간은 어디론가 우리를 데리고 간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우리가 가는 공간은 자신의 몸이다. 쿤데라의 말대로 우리는 반드시 자신의 몸과 단둘만이 남겨진 시간을 마주한다. 몸에 관한 한 우리는 시작과 끝을 먼저 알고 중간 부분을 나중에 아는 이야기 속으로 들어간다."  (p.115)


사람들이 메모를 하는 데는 '잊지 않기 위해서'라는 전제가 따라붙는다. 그러나 그 전제가 모든 메모의 동기를 설명하지는 못한다. 어쩌면 메모를 하는 모든 주체의 동기는 '자신이 원하는 미래를 위해서'가 될지도 모른다. 밤낮으로 성경을 필사하는 사람들의 유일한 동기는 잊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바라는 어떠한 미래, 그 간절한 소망이 지난한 작업의 동기였을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이의 메모는 그 행위 자체가 결코 사소하거나 가볍지 않다. 메모에 실린 간절함의 무게는 기도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메모장이 꿈의 공간이면 좋겠다. 그 안에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이 있다면 더 좋다. 그 안에서 나는 한 해 한 해 나이 들고, 곧 잊힐 상처와 결코 잊히지 않을 슬픔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 알게 된다. 내가 무엇 때문에 슬펐는지 어떻게 버텼는지 알게 되고, 나를 살피고 설득하고 돌보고 더 나아지려 애쓴다. 반대로 내가 언제 행복한지 언제 심장이 뛰는지도 알게 된다."  (p.162~p.163 '에필로그' 중에서)


지금 불행한 사람들은 훗날의 행복을 기약하기 위해 아무리 사소한 일에도 온 마음을 담을 수밖에 없다. 퇴근 후에 갖는 필사 모임도 그런 것이라고 믿는다. 더 나은 자신의 미래를 위해 시간과 노력을 쏟아붓는 것, 그것이 비록 허위에 그칠지라도 우리의 몸 어느 구석에는 그때의 흔적이 지문처럼 남아 있을 것이다. 이제껏 단 한 번도 필사를 해본 적 없는 나로서는 그런 모임이 꽤나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지지만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부딪히는 대부분의 일들이 그렇지 않을까. 모든 사람이 자신의 삶은 처음이니까.


한바탕 비가 쏟아지려는지 하늘이 어둡다. 에어컨 바람을 쐬며 책을 읽다가 문득 그리운 얼굴들을 하나둘 떠올려 본다. 호사스러운 시간이 빠르게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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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 사이에 있을 수 있는 흔한 농담 중 하나는 "양심이 밥 먹여주냐?"라는 말이다. 예컨대 친구 몇몇이 어울려 밥을 먹거나 술을 먹고 계산을 해야 할 때, 미리 자신이 사겠다고 큰소리쳤던 친구 왈, "이런, 어쩌지. 지갑을 놓고 왔네."라고 할라치면 다른 친구가 슬쩍 나서서 대신 계산을 마친 후 "야, 너는 양심 좀 있어라."농을 섞은 타박을 하게 된다. 지갑을 놓고 왔다는 친구는 이에 지지 않고 "양심이 밥 먹여주냐?"며 싱긋 웃는 것으로 멋쩍은 상황은 종료되고 만다. 양심. '어떤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 선과 악을 구별하는 도덕적 의식이나 마음씨'라는 사전적 의미를 떠나서 내가 생각하는 양심은 적어도 인간 누구에게나 삶의 밑천으로 깔고 있는, 아무리 나쁜 인간도 회개만 하면 원래의 상태로 되돌아오는, 하느님이 부여한 선물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 정권의 길지 않았던 지난 시간을 되돌려보며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개인의 양심이란 인류 보편의 산물이 아니며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의 스펙트럼을 갖는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천성적으로 나쁜 양심의 소유자가 아무리 회개하고 용서를 구한다고 해도 결코 선한 양심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의미에서 양심이란 하느님의 선물이 아니다. 종교에 감화되어 조변석개하거나 없던 선함이 더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들에게 종교는 하나의 동호회가 갖는 역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내가 알고 있던 양심은 사회 구성원의 보편적 상식에 기초하고, 사회 구성원들의 결속과 자부심을 증가하며, 결과적으로 구성원 개개인이 삶의 가치를 음미하면서 희망을 품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순기능적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우리의 양심에 기초한 도덕은 한낱 희망사항일 뿐 양심이 악한 인간들에게 있어 도덕이란 지킬 필요조차 없는, 그렇다고 해서 부끄러움을 느끼거나 양심에 거리낌이 있는 것도 아닌, 어찌 보면 결코 지켜서는 안 되는 허망한 구호이자 장식용의 표어일 뿐이었다. '법은 도덕의 최소한'이라는 말이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이 정도는 지켜야 한다는 게 법률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조문에 있는 법 조항만 지키면 우리가 할 도리는 다한 것이라는 의미였음을 현 정권의 수뇌부를 통하여 깨닫게 되었다.


명백한 주가조작과 명품백 수수가 사실로 입증되었음에도 어떠한 사과의 말도, 양심에서 우러나오는 부끄러움도 없는 사람과 법인카드를 사적 용도로 마구 사용하였음에도 그게 뭐가 문제냐는 식의 적반하장식 뻔뻔함을 드러내는 사람, 한 해 상속세 최고세율 적용 대상자가 2980명 선에 그치는 고액 자산가를 돌보기 위해 상속세 인하가 마치 국민 전체를 위한 정책인 양 포장하는 사람, 아빠가 빌려준 돈으로 주식을 사서 아빠가 다시 비싼 값으로 그 주식을 구매하는 수법을 통하여 편법 상속을 하였다는 비난이 있음에도 돌반지 대신 주식을 사줬을 뿐이라고 우기는 사람 등 현 정권의 수뇌부는 우리가 믿어왔던 양심을 전면적으로 재인식하게 만들었다.


참으로 어이없는 현실은 이러한 사람들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현 정권이 집권하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MB정권이나 박근혜 정권 시절만 하더라도 정권의 수뇌부에 오르려는 자들은 자신의 잘못이 드러나면 그것에 대해 순순히 인정하고 사과하면서 부끄러워하는 척이라도 했었다. 그러나 현 정권에서는 그마저도 사라졌다. 법을 어긴 것도 아닌데, 혹은 법적으로 기소가 된 것도 아닌데 내가 왜 부끄러워해야 하느냐는 식의 뻔뻔함을 그들 전체의 무기인 양 한결같이 외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보고 있노라면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놀라게 된다. '세상에, 저런 인간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종일 맴돈다. 5.18 민주화운동 폄훼 글에 좋아요를 누른 당사자에게 비난이 이어지자 앞으로는 손가락 운동에 신경을 쓰겠다고 말한 후안무치의 인간에게 인간의 보편적 양심이 있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 장마가 그친 대기는 그저 무덥다. 무더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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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4-07-26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사에서 정의와 부정의 비율은 어느 시대든 큰 차이는 없는 것 같아요. 다만 부정이 표면으로 올라오지 못하도록 자정작용을 하는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인 것 같아요. 지금은 그 자정작용이 무너져 구더기 끓듯 마구 올라오고 있네요.

꼼쥐 2024-07-27 15:05   좋아요 0 | URL
암튼 요즘은 뉴스를 보는 것 자체가 싫어서 눈 감고 귀 닫고 살아가는 듯합니다. 이런 생활을 앞으로 3년이나 더 해야 한다는 사실이 끔찍하기도 하고 말이죠. 어떻게 현 정부의 고위직 인사들은 하나같이 다 똑같은 걸까요. 그 뻔뻔함이란 정말...ㅜㅜ
 
언젠가 찾아올 그날을 위하여
이토 히데노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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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은 또 다른 슬픔으로 상쇄되지 않는다. 더구나 가족을 잃은 극단의 슬픔은 인간의 모든 감정을 압도한다. 결국 적절한 애도의 과정과 시간의 경과만이 그 거대한 슬픔의 회오리로부터 조금씩 벗어날 수 있도록 도울 뿐이다. 그렇다고 슬픔의 잔해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이토 히데노리가 쓴 <언젠가 찾아올 그날을 위하여>와 같은 상실의 고통과 애도의 전 과정을 담은 책을 읽고 있노라면 잊었던 슬픔이 장마철의 먹구름처럼 몰려오곤 한다. 물론 이 책은 사람이 아닌 반려견이나 반려묘 등 반려동물과의 영원한 이별, 말하자면 펫 로스를 경험한 이들에 대한 설문 조사와 그들의 특별했던 경험담 그리고 다양한 경험과 전문가의 조언을 통해 빠른 치유와 정상적인 삶으로 복귀를 돕는 방법을 모색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지만 말이다. 가족이나 친인척 등 가까웠던 사람을 잃고 깊은 슬픔에 빠진 사람을 애도하고 그들을 다시 정상적인 삶으로 안내하는 책은 무수히 많이 나왔지만 펫 로스와 상실의 고통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동등한 무게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그런 까닭에 펫 로스를 경험한 반려인들의 슬픔이 사회 구성원 전반의 지지와 위로를 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를 처리하는 제반 시설 역시 체계적으로 준비되지 못한 게 사실이다. 저자는 이러한 환경에서 펫 로스를 경험한 반려인 중 한 사람으로서 자신이 사랑했던 반려동물의 죽음을 수용하고 슬픔을 극복하기 위한 친절한 안내서가 필요했음을 절감했다.


"반려동물을 키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언젠가 찾아올 '그날'을 생각해 볼 것이다. 나도 그랬다. 그런데 정작 '그날'을 맞고 나서야, 충분히 예상하고 있다 여겼던 충격에 실제로는 아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p.7 '프롤로그' 중에서)


책의 구성은 꽤나 길고 복잡하다. 프롤로그에 이어 제1장 ''펫 로스'란 무엇인가?', 제2장 '첫 준비는 '좋은 홈닥터'', 제3장 '실록-나의 펫 로스', 제4장 '펫 로스에 관한 설문 조사 45인의 이야기', 제5장 '마지막 '준비'는 '이별의 의식'', 제6장 '반려동물을 잃으면 꽃으로 장식하자', 제7장 '미국 '펫 로스'의 최전선' 제8장 '탤런트 가미누마 에미코 씨의 경우', 제9장 '배우 단 미쓰 씨의 경우', 제10장 '슬픔을 다독일 방법은 있는가?', 제11장 '새로운 반려동물을 맞는다'를 끝으로 '에필로그'가 이어진다. 책에서 재미있는 부분은 8장과 9장에서 연예인의 펫 로스 경험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늘 대중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연예인에게 있어 자신이 사랑하던 반려동물의 죽음에서조차 마음껏 슬퍼하지 못한다는 건 다른 일반인들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비극이다.


"가미누마 씨는 '새로운 개를 키우는' 것을 '치사한 방법'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펫 로스에 관한 취재를 계속하면서, 한 가지 깨달은 바가 있다. 그것은 펫 로스로 고생하는 사람은 거의 예외 없이 죽은 반려동물을 깊이 사랑했고, 그들을 객관적으로 보았으며 온 힘을 다해 행복하게 한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p.213)


내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개나 고양이는 주로 목줄을 하지 않은 채 풀어놓고 키우는 게 일반적이었다. 동물을 키우는 용도가 달랐기 때문이다. 개는 주로 가족이 남긴 음식물을 처리하는 것은 물론 성장한 후에는 식용으로 팔기 위한 목적이었고, 고양이는 무엇보다도 집 안팎에 들끓는 쥐를 퇴치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지금처럼 온전히 사람과 동물 사이의 친밀한 관계가 목적이 아니었다. 그런 까닭에 길에서 개의 배설물을 밟는 일은 다반사였고, 우리 집 개와 다른 집 개가 길에서 흘레붙는 장면을 보는 일도 자연스러운 일상이었다. 그러나 산업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가구의 소득이 증가하는 것과 비례하여 반려동물을 키우는 집이 급격히 증가했다. 애견인, 애묘인이 증가하면서 동물의 권리도 빠르게 신장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인간에 비해 수명이 짧은 반려동물과의 동거는 필연적으로 펫 로스로 인한 상심과 그리프 워크 과정 및 그에 필요한 제반 시설과 제도 정비가 절실한 시점에 이르고 말았다. 그것은 이제 일부 반려인만의 문제가 아닌 사회 전체의 문제로 부각하고 있는 것이다. 저자 역시 이를 지적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민트의 죽음을 계기로 3년에 걸쳐 펫 로스에 대해 취재했는데, 지금 뜻하지 않은 곳에 착지한 기분이다. 처음에는 펫 로스를 '극복'하는 방법을 찾을 생각이었지만, 애당초 펫 로스는 '극복'해야 할 것, 즉 끝내야 하는 것이 아니었다. 로쿠뇨의 말대로, 오히려 앞으로 걸어가야 할 길의 '시작'으로 파악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펫 로스는 극복되지 않는다. 펫 로스와 공존하면서 그 슬픔까지 자기 인생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것 - 그것이 반려동물과 행복한 인생을 산 주인이 걸어야 할 길이라고 생각한다."  (p.277 '에필로그' 중에서)


비가 갠 하늘엔 잠자리 몇 마리가 날고 있다. 무더위를 예감하려는 듯 말이다. 인간이든 동물이든, 심지어 식물까지도 생명이 있는 한 서로서로 감정을 교류하면서 외로움을 달랜다. 그러나 습관처럼 주고받던 어떤 행위가 멈추고, 감정의 교류마저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 인간의 상심과 우울은 대체할 수 없는 좌절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신에게 남겨진 삶을 이어가야만 한다. 땅속에서 6~7년 동안 유충으로 살다가 지상으로 올라와 2~3주일의 번식활동 후 죽음을 맞는 매미에 비하면 우리가 키우는 반려동물은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의 곁을 지켜주는가. 곧 있으면 매미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겠지. 우리의 깊은 상심을 이해한다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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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단의 마술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8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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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기억력이 떨어진다. 약해진 기억력은 독서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것도 중대한 영향을. 전에도 사람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했던 나는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의 이름 때문에 번번이 곤욕을 치르곤 했었다. 그나마 소설 읽기에 약간의 열정이 남아 있었을 때만 하더라도 인물의 이름과 그들 사이의 관계를 나타낸 인물 구성도를 자체적으로 그려 소설을 읽는 내내 옆에 놓고 시시때때로 들여다보며 참고를 하곤 했었는데 이젠 그런 노력을 기울이는 일마저 귀찮고 시들해져 모르면 모르는 대로 소설의 전체 내용을 파악하는 데 급급하고 있다. 그런 형편이고 보니 장편소설, 특히 외국의 장편소설을 읽을라치면 입에 붙지 않는 어렵고 복잡한 여러 이름들 탓에 소설의 재미는 한껏 떨어지고 만다. 아무리 재미있는 소설일지라도 인물 구성이 복잡하면 일단 흥미는 반감되고, 소설의 전반부를 지나기도 전에 숫제 책을 덮어버리지나 않을까 전전긍긍 애를 태우게 된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금단의 마술> 역시 그와 같은 고난과 역경(?)의 과정을 겪고 읽기에 간신히 성공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을 읽은 사람 중 몇몇은 나의 앓는 소리에 대해 공감하지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도 따지고 보면 많은 편이 아니고, 추리소설의 특성상 줄거리나 주제 역시 간단한 편인데 뭐가 그렇게 어렵다고 죽는소리를 한담... 그러나 기억력이 약한 나로서는 소설을 다 읽은 지금도 전체 내용만 개략적으로 떠오를 뿐 중심인물의 정확한 이름도, 소설의 초반부도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잠시 후면 기차가 역에 도착한다. 오후 5시가 조금 지난 시각. 차창 밖을 내다본다. 해는 많이 길어졌지만, 두꺼운 구름이 넓게 퍼져 있어 하늘이 어둡다. 돌아갈 때 비가 쏟아지지 않으면 좋겠는데, 하고 우카이 가즈오는 생각했다. 5월 황금연휴가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장맛비를 걱정해야 하는 시기였다. 세월 참 빠르다."  (P.24)


소설의 전체적인 얼개는 유명 정치가인 오가 진사쿠를 담당하던 기자 고시바 아키호의 죽음에서 시작된다. 물리 분야에 재능이 있는 고시바 신고의 하나뿐인 누나이기도 했던 아키호는 데이토 대학에 갓 입학한 신고의 유일한 혈육이자 후견인이었다. 호텔 스위트룸에 여자 혼자 입실하였다는 점도, 옷도 벗지 않은 채 자궁외 임신으로 인한 과다출혈로 숨졌다는 사실도 못내 의심스러웠던 신고는 누나의 휴대폰에 남아 있던 문자 메시지를 통해 누나가 죽던 날 밤 오가 의원이 그 방에 있었고, 피를 흘리는 누나를 홀로 두고 자리를 피했다고 확신하게 된다. 신고는 어렵게 들어간 데이토 대학을 그만두고 기계공장에 입사한다. 그곳에서 그는 자신의 고등학교 선배이자 유명한 물리학자인 유가와 교수에게서 전수받았던 레일 건 제작을 서두른다. 누나의 복수를 다짐하면서...


"나가오카 오사무의 시신이 발견된 지 꼬박 열흘이 지났다. 수사는 난항을 겪고 있다. 슈퍼 테크노 폴리스 프로젝트 쪽을 공략하면 뭔가 수확이 있지 않을까 했던 수사본부의 기대는 완전히 빗나갔다. 추진파 중에 나가오카를 못마땅해했던 사람이 많은 것은 사실이었다. 프로젝트가 좌절될 경우 크게 손실을 볼 기업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조사 결과로 보건대 나가오카가 그럴듯한 특종을 잡은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P.118)


오가 진사쿠 의원에 의해 추진되던 슈퍼 테크노 폴리스 프로젝트는 과학 발전을 위한 대규모 개발 계획이었다. 그러나 어떤 개발 사업도 그렇지만 찬성하는 측과 반대하는 측이 늘 있게 마련이어서 환경보전을 명목으로 개발을 반대하는 측의 르포라이터인 나가오카 오사무가 변사체로 발견되면서 사건은 엉뚱한 쪽으로 전개된다. 오가 의원의 비리를 추적하던 나가오카는 고시바 신고와 가까운 사이였던, 기계공장의 사장의 딸인 유리나를 통해 신고의 누나 아키호와 오가 의원이 불륜 곤계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 사실을 폭로하려고 했던 나가오카는 결국 반대파에 속해 있으면서 추진파에게 정보를 제공하던 자에 의해 살해된 것이다.


레일 건의 성능과 정확도를 개선하기 위해 실험을 거듭하던 신고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 레일 건을 실험하던 중 오토바이 한 대를 파괴했던 신고는 경찰들에 의해 재물손괴와 살인 예비음모 혐의로 수배된다. 그러던 와중에 오가 의원의 시구 행사가 잡히고, 신고를 뒤쫓던 경찰들은 바짝 긴장하게 되는데...


"어느새 4월에 들어섰다. 비번이었던 구사나기 팀은 꽃구경을 나서기로 했다. 우쓰미 가오루가 유가와도 초대하자고 했다.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레일 건 사건 이후 구사나기는 유가와를 만난 적이 없다. 사적인 감정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참고인 조사를 다른 수사관이 담당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유가와는 공무집행 방해 혐의로 입건되었지만 결국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고시바 신고는 기물 손괴 혐의로 기소되었다. 대신 살인 예비죄에 관해서는 무혐의 처리되었다. 구사나기는 타당한 판단이라고 생각했다."  (P.342)


오전에 쏟아지던 비는 언제 그랬냐는 듯 맑게 개었다. 쏟아지는 햇살이 마치 찜질방의 열기를 방불케 한다. 언론에서는 요즘 '극한 호우'라는 생소한 단어를 통해 급격하게 변한 최근의 장마 현상을 설명하고 있다. 좁은 면적에 무섭게 쏟아지는 빗줄기. 짧은 시간에 한 달치에 맞먹는 비가 쏟아짐으로써 수해에 대한 대비는 갈수록 어려워지는 듯하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이로 인한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을 게 뻔한 일. 멀리 지구 환경을 말할 것 없이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의 환경 역시 갈수록 척박해진다. 이렇듯 환경이 나빠지는데 자연의 일부인 인간의 마음 역시 좋아질 리는 없을 터, 홍익인간의 정신은 이제 원시 사회의 구호처럼 들린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의 상층부에 있는 그들은 '삼부 내일 체크하고'와 같은 말과 짬짬이를 통해 자신들의 배를 불린다. 나는 갈수록 기억력이 떨어져 소설 한 권을 읽어내는 데도 이렇게나 힘이 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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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철의 도시는 거대한 수영장과 비슷하다. 콘크리트와 아스팔트로 뒤덮인 도시의 지면은 잠깐 동안의 폭우에도 금세 물이 차오른다. 도시를 흐르는 빗물은 어디로 흘러야 하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한 채 우왕좌왕 헤매고 부딪히다가 조금 낮은 곳으로 사정없이 쏟아져 내리곤 한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 물길을 막았다가 작정한 듯 일부러 한꺼번에 물을 쏟아붓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약자만을 골라서 괴롭히는 폭군의 모습을 띠기도 한다. 우리가 흔히 개발이나 편리로 치부하는 어떤 것이 시퍼런 칼날이 되어 우리의 목을 죄는 경우를 최근 들어 자주 목격하게 된다. 우리는 이따금 '자연의 대반격'이라는 얼토당토않은 말로 우리의 잘못을 인간이 아닌 자연의 탓으로 돌리곤 하지만 사실 모든 잘못은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한다. 다만 이런 자연재해가 발생할 때마다 안전한 곳에 사는 주민과 그렇지 못한 주민 사이의 극명하게 드러나는 계급이 우리를 슬프게 할 뿐이다. 그러나 내년에도, 후년에도 이와 같은 현상은 결코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세금을 적게 내는 서민들은 전혀 인식하지 못한 채 생활한다.


낮에 지인을 만나기 위해 차를 운전하여 잠깐 외출했었다. 앞이 보이지 않는 폭우가 쏟아졌고, 바깥쪽 차선을 달리는 차량들이 도로변에 모인 빗물을 튀겨 하얀 물보라를 일으켰다. 그때마다 인도를 지나는 행인들은 물길에 젖지 않으려고 우산을 들어 이리저리 방어하느라 애를 쓰곤 했다. 차나 사람이나 이런 날씨에 싸돌아 다닌다는 건 괜스레 미안해지는 일이었다. 차에서 내려 몇 발자국 걷지도 않았는데 바짓단이 흠뻑 젖고 말았다.


우리는 주로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것에 화를 내거나 불만을 표하곤 한다. 게다가 나와 반대되는 성향의 사람들에 대해 적대감을 갖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인격적으로 덜 성숙한 사람들일수록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예컨대 오늘처럼 폭우가 오락가락하는, 우리가 제어할 수 없는 자연 현상에 대해 괜스레 화를 내기도 하고, 자신은 늘 술에 취해 있거나 상스러운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인격적으로 반듯한 사람을 못 잡아먹어 안달을 하기도 한다. 그뿐이랴. 자신의 외모가 맘에 들지 않는 어떤 이는 누가 보아도 잘생겼다고 인정하는 어느 배우를 '좌파'로 낙인찍기도 한다. 어찌 보면 이러한 일련의 행위가 자신의 단점을 드러내는, 일종의 누워서 침 뱉는 격이라고 할 수 있지만 머리에 든 게 없는 그들이 어찌 알 수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가수 양희은이 사람들의 어떤 행동에 대해서도 "그럴 수 있어."라고 인정하는 태도는 인간의 다양성을 존중하는 성숙한 인간의 표본처럼 여겨진다.


하늘은 여전히 어둡고 비는 이따금 잦아들었다가 다시 쏟아지곤 한다. 안전 안내 문자가 쉬지 않고 들어온다. 뭐, 그럴 수 도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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