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선 속도가 누군가에게는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걸 나는 꽤나 어린 시절에 배웠던 듯합니다. 아침에 눈만 뜨면 밭에 일을 하러 가거나 학교나 직장으로 뿔뿔이 흩어지던 시절이었습니다. 누구에게나 생존이 절실했었고, 삶의 목표 역시 생존에 근접한 것들로 채워지던 시기였습니다. 전기도, 전화도 없던 그 시절에 죽음은 일상처럼 가까웠고, 사람들은 각자의 생존을 위해 어느 한 곳에 소속이 되고자 필사적이었습니다. 반드시 번듯한 직장일 필요는 없었습니다. 동네의 작은 식당일 수도 있고, 동네 인근의 공장일 수도 있고, 두어 평 남짓의 작은 밭뙈기일 수도 있었습니다. 학교나 직업훈련소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곳에도 소속될 수 없었던 어린애나 노인은 예외였습니다. 그들은 죽음에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들이었음에도 말입니다. 그 시절의 죽음은 대개 집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집은 우리의 생명을 지켜주는 가장 안전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죽음의 그림자가 집 안 곳곳을 낮게 떠다녔기 때문입니다. 이런 까닭에 나는 엄마가 외출할 때마다 집 안에 혼자 남는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 기를 쓰고 엄마의 뒤꽁무니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엄마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가던 걸음을 재촉할 뿐이었습니다. 곧 있으면 형과 누나가 학교에서 돌아온다는 말만 남긴 채 말입니다. 더디기만 했던 나의 걸음 속도로 당시에는 젊었던 엄마의 걸음을 따라잡는다는 건 애시당초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엄마의 걸음을 늦추거나 멈출 수 있는 방법은 거리가 멀어진 엄마의 귀에 들릴 수 있도록 악을 쓰고 울거나 크게 넘어지는 방법밖에는 달리 도리가 없었습니다. 앞선 속도가 누군가에겐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걸 나는 대략 그 시절에 배웠던 듯합니다.


한낮 기온이 초여름 날씨처럼 더위를 느끼게 하는 요즘, 계절이 걷는 속도는 인간의 인식 속도를 한참이나 앞서가는 듯합니다., 냉정한 자연의 속도가 무감각한 인간의 속도를 앞서기 시작한 건 어쩌면 꽤나 오래전에 비롯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클레어 키건의 단편집 <남극>에 나오는 문장을 옮겨봅니다.


"우리는 새벽까지 그곳에 있었고, 건초 냄새가 바람에 실려 올라왔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손이 어떻게 15년 동안 어머니를 멍들게 했는지,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의 차이가 무엇인지 말해주었다. 내가 똑같이 잔인한 눈을 가졌기 때문에 나도 아버지만큼 싫다고 했다."  (p.121 '폭풍' 중에서)


당시의 아버지는 언제나 어머니를 한참이나 앞질러 걸었고,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같은 속도로 걷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 세월이 한참이나 지난 지금,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그의 걸음 속도에 보조를 맞추는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어머니의 품과 같았던 자연은 이제 우리 인간의 속도를 한참이나 앞질러가고 있습니다. 앞선 속도가 누군가에겐 무기가 될 수 있다는 걸 나는 아주 오래전에 깨달았던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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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4-16 17: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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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말씀대로 살아보니 - 인생이 가벼워지는 15가지 불교 수업
토니 페르난도 지음, 강정선 옮김 / 윌마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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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기본 교리라고 하면 사성제(四聖諦)와 팔정도(八正道)로 집약될 수 있다. 고집멸도(苦集滅道)로 대표되는 사성제에서 고제(苦諦), 즉 삶이 곧 괴로움(生卽苦)으로 이해되는 까닭에 태어나고(生苦), 늙고(老苦), 병들고(病苦), 죽고(死苦), 이별하고(愛別離苦), 함께하고(怨憎會苦), 획득하지 못하고(求不得苦), 오음에 집착하는(五陰盛苦) 고통은 삶 전체로 이어지는 것으로 파악한다. 이른바 팔고(八苦)라고 일컫는 이 고통은 원인이 있으며(集諦), 대중은 이 원인을 알지 못한다. 이른바 무명(無明)이라고 하는 '알지 못함'의 상태를 벗어나는(滅諦) 것을 열반이라고 하며 이것이 곧 멸성제(滅盛諦)이다. 괴로움의 원인이 '알지 못함'인 반면 이것에서 벗어나면 괴로움을 없앨 수 있다는 것이다. 괴로움을 멸하기 위한 길(道諦)로 제시되는 8가지의 바른 수행방법, 즉 팔정도(八正道)가 그것이다. 올바른 견해(正見), 올바른 생각(正思惟), 올바른 말(正語), 올바른 행동(正業), 올바른 생활방식(正命), 올바른 노력(正精進), 올바른 마음가짐(正念), 올바른 집중(正定)을 통하여 인간의 고통을 소멸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삶에는 필연적으로 고통이 존재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함으로써 이를 따르는 대중 누구나 열반에 들 수 있게 하겠다는 불교의 원대한 꿈은 일견 타당하고 논리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를 엄격히 지키고 따를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을 뿐이다. 그러므로 불교의 수행방식은 우리네 삶을 원숙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는 하나의 지침서인 동시에 누구나 알아야 할 생활 철학인 셈이다. 이러한 인식으로 인해 나는 불교가 부처님에게 각자의 소원이나 빌고 의식에 필요한 제문으로서 경전을 읊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여타의 종교와 같은 것으로 보지 않아 왔다. 그리하여 나는 비록 나의 종교이자 신앙으로 천주교 세례를 받은 몸이지만, 고등학교 시절부터 가까이 지내던 스님과의 유대를 지금까지 유지할 수 있었고, 시간이 날 때마다 불교 서적을 뒤적일 수 있었다. 그와 같은 일에 대하여 마음의 부담이나 거리낌이 없었던 것이다.


"이 책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꼭 불교 신자가 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불교 신자도 이 책을 통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당신이 기독교나 이슬람교, 힌두교, 유대교 신자이든 무신론자이든 상관없다. 이 책에 담긴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은 당신의 믿음을 전혀 위협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여기에 제시된 가르침을 실천하다 보면 이전보다 더 친절하고 침착해진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p.15 '머리말' 중에서)


<부처님 말씀대로 살아보니>의 저자인 토니 페르난도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을 지닌 분인 듯하다. 정신과 의사이자 수면의학 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이면서 네 차례나 임시 출가하여 승려로 수행한 경력이 있다고 하니 불교에 대한 지식으로만 따진다면 나와는 비교가 되지도 않겠지만 말이다. 앞에서 말했던 팔정도는 다시 세 가지 범주인 계(戒), 정(定), 혜(慧)로 나뉜다. 윤리적 행위를 나타내는 계(戒)에는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이 속하고 정신집중을 나타내는 정(定)에는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 그리고 지혜를 나타내는 혜(慧)에는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가 포함된다. 저자 역시 이를 염두에 두고 목차를 정한 듯하다. 1부 '正見----바른 견해', 2부 '戒----계', 3부 '布施----보시', 4부 '定----정', 5부 '慧----혜', 6부 '慈悲----자비'의 총 6부로 구성된 이 책에서 저자는 부처님 말씀과 더불어 이에 알맞은 저자의 상담 사례를 곁들여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취하지 말아야 한다. 맑은 정신에서 신중한 생각과 말, 행동이 나온다. 이는 타인에게 안전이라는 선물을 줄 수 있다."  (p.132)


우리나라의 문화가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템플스테이를 하기 위해 찾아오는 외국인의 수가 부쩍 늘었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뿐만 아니라 불교라면 체머리를 흔들던 젊은이들에게도 그 이미지가 눈에 띄게 개선되었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시쳇말로 우리나라의 사찰이 힙한 장소로 거듭난 것이다. 이와 같은 성과의 이면에는 물론 불교계의 노력이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나날이 복잡해지는 현대인의 삶에서 부처님의 가르침만큼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것도 더는 없겠다는 인식이 넓게 퍼져나간 게 아닌가 싶다.


"크든 작든, 충격적이든 사소하든, 우리는 모두 고통과 시련을 겪는다. 병을 겪고, 외로움을 느끼고, 오해받기도 하며, 걱정과 불확실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가 누군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는 상관없다. 육체와 정신을 갖고 있기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필연적으로 고통을 겪게 되어 있다. 그 고통과 시련을 받아들일 때 비로소 인간다움이란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  (p.310~p.311)


해가 길어지면서 한낮 기온도 빠르게 오르고 있다. 한낮 기온은 벌써 초여름을 방불케 한다. 봄인가 싶던 계절은 저만치 앞선 여름을 기웃거리는 듯하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짐짓 걱정이 되는지 '올여름은 얼마나 더우려고 벌써부터 이래?' 하면서 어두운 표정을 짓는다. 더위도 더위지만 더위로 인한 불쾌지수가 걱정이 되는 것이다.


오늘은 점심 식사를 친한 친구와 함께했었다. 오전에 자신의 초등학교 동창 장례식장에 다녀왔다는 친구는 표정이 어두웠다. 그의 친구는 한밤중에 심장마비로 병원 응급실을 찾았지만 순서를 기다리는 도중에 사망했다고 했다. 전에도 사고로 죽은 친구는 있었지만 병으로 죽은 친구는 이번이 처음이라고도 했다.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드는 생각은 겉보기에 우리의 삶이 단단하게 유지되는 듯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허약한가 하는 것이다. 자신의 삶만큼은 그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리 없다고 굳게 믿고 사는 우리는 또 얼마나 허황된 생각으로 오늘을 살고 있는가. 기우는 햇살이 사무실로 짓쳐 들고 있다. 블라인드를 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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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인지 다행인지 내 주변에는 직업적인 정치인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깝게 지내는 친구나 이웃, 혹은 가족이나 친척 중에도 정치인은 단 한 명도 없는 듯합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고등학교 동창 중 한 명이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도와 당선시킨 후 그의 특별보좌관인가 뭔가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엔 그 친구마저 연락이 뜸한 상태가 되는 바람에 주변에서 정치를 하는 사람은 숫제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다 보니 정치인에 대한 직접적인 정보는 전무한 상태에서 언론과 카더라 통신에 의존하여 형성된 정치인에 대한 나의 고정관념과 이미지는 온갖 부정적인 정보로 도배가 된 조악한 것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를테면 나에게 고착화된 그들의 이미지는 사기꾼과 동일하거나, 비슷한 부류이거나, 적어도 선량한 일반 시민의 이미지와는 상반된, 뿔만 달리지 않았을 뿐 도깨비와 진배없는 형상이었습니다. "선거 때 무슨 얘기를 못하나. 표가 나온다면 뭐든 얘기하는 것 아닌가"라고 했던 MB의 본심이 담긴 명언(?)을 듣고서 나는 '정치인=사기꾼'이라는 등식을 더욱 굳건히 믿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그들 부류와 조금쯤 다른 정치인이 있었다면 아마도 고인이 되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특정 정치인을 완벽히 신뢰하거나 신뢰를 넘어 존경의 차원으로 발전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저분은 정치를 할 분이 아닌데...' 하는 식의 안타까움을 느꼈을 뿐입니다. 정치인들 대부분이 유권자들 앞에서는 아주 환한 미소를 보이다가도 뒤돌아서는 순간 인상을 쓰기도 하고, 선거 때면 가장 낮은 자세로 악수를 청하다가도 당선이 되자마자 가장 뻣뻣한 자세로 고개를 쳐드는 그런 인간들이라는 믿음을 내 머릿속에서 지웠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에 이번 중동전쟁을 보면서도 미국과 이스라엘의 지도자의 태도가 그닥 놀랍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한 국가의 최고책임자는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의무가 있을 텐데 미국과 이스라엘의 정치 지도자는 그들의 사적인 이익에만 몰두할 뿐 국민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을 때 그들 국가의 국민이 한편으론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입니다.


전쟁이란 모름지기 명분이나 정당성이 확보되어야 하는데 미국과 이스라엘은 그런 정당성은 뒷전으로 한 채 '내가 하고 싶다는데 니들이 어쩔 건데?' 하는 식의 제국주의 논리에 의거한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미국과 이스라엘 국민 전체를 테러 대상자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여행과 통신이 자유로운 현대에 있어 그들 국가의 국민은 언제든 테러에 노출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미국과 이스라엘의 정치 지도자는 국민의 안전을 방기한, 헌법을 정면으로 위배한 범법자라고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그들 국가의 국민이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는다면 국민의 의식 수준이 아주 낮거나 민주주의를 포기한다는 선언이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이재명 대통령의 행보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이스라엘의 깡패 짓거리에 대해 비판이나 논평의 글 또는 대담이나 인터뷰를 하는 것을 단 한 차례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국격에도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 국민을 비겁한 자의 품에 숨게 만드는 비열한 짓이었습니다. 국민 대다수가 이스라엘의 전쟁범죄를 규탄함에 있어서도 정작 이를 발언해야 할 대통령이 침묵함으로써 대한민국 국민 전체가 겁을 먹고 뒤로 숨는다는 인상을 전 세계에 알려왔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대한민국 국민은 정의의 편에 서지 않는 비겁한 족속으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이재명 대통령은 지난 10일 엑스에 이스라엘 방위군인 팔레스타인 아동을 고문한 뒤 옥상에서 떨어뜨렸다고 주장하는 게시글과 영상을 공유하면서 "유대인 학살이나 전시 살해는 다를 바가 없다"고 썼던 것입니다. 해당 영상이 2024년 9월 촬영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논란이 되기는 했지만 이재명 대통령은 "어떤 상황에서도 국제인도법은 준수돼야 하며 인간의 존엄성 역시 타협할 수 없는 최우선 가치로 지켜져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입니다. 물론 이에 반발하는 이스라엘 외무부의 논평과 찌질하기 짝이 없는 국민의힘 지도부의 논평이 있었지만 그것은 세계인의 상식과 논리에도 맞지 않는, 그리고 정의에도 부합하지 않는 부적절한 발언이었습니다.


내가 이재명 대통령의 대응을 높이 평가하는 까닭은 우리가 세계인의 관점에서 언제나 정의와 평화의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국민 전체의 안위가 지켜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과 미국 국민은 이번 사태로 인해 자유로운 해외여행이 제한될 수도 있으며 언제든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것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이번 전쟁을 촉발시킨 정치 지도자가 져야 할 것입니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 먼저 명분과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는 비단 금세기에 들어 시작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익히 아는 바와 같이 고려의 문신 서희와 거란의 장수 소손녕의 담판에서도 전쟁의 명분이 주된 논지였습니다. 소손녕이 싸움도 하지 않고 군대를 물린 것도 명분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역사는 세계사에서도 자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과 이스라엘의 이번 전쟁은 어떤 명분도 없이 당사국인 이란은 물론 세계 여러 나라 국민들에게 피해와 고통만 안겨주었을 뿐입니다. 엑스에 올린 이재명 대통령의 의견 표명으로 인해 '정치인=사기꾼'이라는 오래된 믿음에 약간의 균열이 생겼던 것 같습니다. 이재명과 같은 정치인이라면 적당한 신뢰를 표명해도 크게 무리가 없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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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소담 고전 명작 시리즈
헤르만 헤세 지음, 김희상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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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수록 가까운 과거보다 먼 과거에 더 집착하게 된다. 물론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나는 그렇다. 이 사실에 대해 '왜 그럴까?' 하고 이따금 생각할 때가 있다. 어차피 되돌아갈 수 없는 시간에 대한 반감이랄까 아니면 세월의 역류에 대한 호기심이랄까, 젊은 시절에는 인지하지 못했던 먼 과거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나 회상이 좀 씁쓸하게 여겨지곤 한다. 어쩌면 나는 내가 살아왔던 지난시절을 되돌아보며 나를 성장시켰던 단계단계마다의 성과와 실수를 되짚어보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 시절로 다시 되돌아가서 나의 실수를 바로잡을 수는 결코 없겠지만 말이다.


단 한 번뿐이라는 일회성의 인생에 대한 인식은 젊은 시절에는 잘 와닿지 않는다. 자신에게 남겨진 시간이 무한대인 듯 여겨지기 때문이고, 죽음이란 그 형태마저 알 수 없는 아주 희미한 흔적쯤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차츰 나이가 들수록 죽음은 더욱 선명해지고 남은 시간에 대한 어렴풋한 인식 또한 구체적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먼 과거에 대한 집착이 시작되었던 건 아마도 그쯤이지 싶다. 이 시기가 되면 독서 취향도 크게 변하는 듯하다. 우리가 이른바 성장소설이라고 부르는 어린 주인공이 커가는 과정을 다룬 소설에 관심이 가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동화나 그림책에 큰 관심이 가기도 한다. 성장소설로 분류되는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 크게 관심을 가진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체험담 가운데 이 순간이 가장 선명하게 뇌리에 남았다. 그것은 신성한 하늘처럼 우러러 온 아버지의 이미지에 처음으로 생긴 균열이었다. 나의 어린 시절을 떠받친 기둥에 쩍 하니 금이 간 순간이었다. 인간은 누구나 독립적 인격체로 성장하기 위해 이런 기둥을 무너뜨려야만 한다. 이 체험으로 우리 운명의 중요한 윤곽이 그려진다는 점을 읽어 낼 줄 아는 사람은 아쉽게도 많지 않다. 그런 상처와 균열은 대개 봉합되고 잊히지만, 인간의 가장 내밀한 가슴 속에서 계속 피를 흘리며 아픔을 호소한다."  (p.31)


싱클레어의 삶을 단계별로 뒤쫓고 있는 이 소설은 이미 그 시절을 거쳐온 까닭에 자신의 삶과 견주어 볼 수 있는 독자에게 꽤나 흥미롭게 읽힌다. 청소년기에 우리는 얼마나 하찮은 계기로 자신의 삶을 변화시켰으며, 얼마나 큰 계기가 있었음에도 자신의 삶을 고집스럽게 지켜왔던가. 그런 의미에서 인생은 얼마나 유약하며, 인생은 또 얼마나 단단한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린 시절, 프란츠 크로머로부터 괴롭힘을 당했던 싱클레어. 그 괴롭힘은 성인이 된 후에도 큰 상처로 남지만 괴롭힘의 발단은 참으로 어처구니없다. 아이들이 노골적으로 거리를 두었기 때문에 그들과 어울리려는 목적으로 거짓말을 하였던 것이다. 기숙 학교에 진학한 후에도 외톨이 신세는 달라지지 않았다. 기숙사 선배인 알폰스 베크나 같은 외톨이 신세인 크나우어와도 가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길가에서 우연히 본 소녀의 그림을 그려 베아트리체라고 명명하며 숭배하는 싱클레어. 싱클레어를 유일하게 일깨우는 존재인 데미안은 그가 어려움에 부닥칠 때마다 나아갈 길을 제시한다. 알 속에서 안주하지 말고, 깨고 나오려 분투하라고.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 분투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고자 의지를 불태우는 사람은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을 향해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p.147)


학창시절의 우리는 관념의 세계에서 산다. 관념의 세계에서 바라보는 실존의 세계는 마냥 하찮고 낮게 보인다. 온갖 부조리와 악과 부정이 판치는 세상. 그러나 학업을 마친 우리가 실존의 세계로 접어들었을 때, 과거 자신이 높은 곳에서 바라보던 실존의 세계에서 생존을 위해 분투해야 하는 자신의 삶은 '우리가 갈급하는 삶의 요구와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비로소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명제를 깊이 깨닫게 된다.


"인간은 자기 자신과 합일을 이루지 못할 때에만 두려움을 품지. 자기 자신이 대체 누구인지 알 수 없을 때 사람들은 두려워해. 자신 안의 알 수 없는 무엇인가 도사리고 있다고 두려워 떠는 사람들의 공동체! 그들은 느끼지. 그동안 굳게 믿어 온 삶의 법칙이 더는 맞지 않음을. 종교도, 풍습도, 윤리도 우리가 갈급하는 삶의 요구와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을. 그런 건 낡은 석판에 새겨진 케케묵은 계명이라는 사실을. 그런 건 인간다운 삶을 살고자 하는 우리의 진정한 욕구와 부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p.221~p.222)


인간은 본질적으로 외로운 존재다. 운이 좋게도 자신의 곁에서 필요할 때마다 조언을 아끼지 않는 데미안과 같은 친구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죽을 때까지 함께한다는 보장은 없다. 결국 우리들 각자는 자신의 고민을 스스로 해결하고, 자신의 세상에서 자신의 알을 깨고 나오려 분투할 뿐이다. 그리고 삶의 후반부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되돌아볼 때, 어쩌면 그런 하찮은 계기로 인해 자신의 삶이 그토록 크게 변할 수 있었는지 새삼 놀라게 된다. 그런 과정 과정이 아름답지 않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음을 깨닫게 된다.


유럽 여행 중인 아들은 경유지인 뮌헨 공항에서 연결 편을 놓치는 바람에 다른 비행기로 리부킹을 하느라 예정보다 늦게 런던 숙소에 도착했다고 알려왔다.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여행하는 우리도 어쩌면 경유하는 어느 공항에서 잠시 길을 잃고 헤매게 될지도 모르지만, 결국 자신이 목적했던 어느 숙소에서 피곤한 몸을 쉬게 될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우리가 꿈꾸는 희망은 비행기를 날게 하는 항공유처럼 우리들 각자가 원하는 곳으로 안전하게 데려다줄 것이다. 그리고 다음 기착지를 향해 새로운 희망을 품어야 한다. 그러나 다음 기착지에서 누구와 조우할지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는 너에게 다음에 만날 때까지 안녕을 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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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시작된 비는 오후가 되어서도 여전히 그쳤다 내리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사무실 앞 화단에 핀 목련도 이제 제 역할을 마쳤다는 듯 흐물흐물 생기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꽃이 진 벚나무 가지에선 연녹색 새순이 피어나고 있습니다. 반복되는 계절의 순환이지만 가까스로 봄이 피어날 때마다 나는 여전히 자연의 경이로움에 감탄하게 됩니다. 마치 태어나서 처음 맞는 봄인 것처럼 말입니다. 주택가보다 기온이 낮은 산에는 지금도 여전히 꽃의 난장입니다. 산벚꽃, 진달래, 조팝꽃, 복숭아꽃...


군을 제대한 아들은 오늘 아침 드디어 유럽을 향해 여행을 떠났습니다. 공항버스를 타고 인천공항으로 이동하였던 아들은 무사히 비행기를 탔다는 메시지를 카톡 문자로 남겼습니다. 건강하게 잘 다녀오라는 답글을 남기면서도 나는 내심 걱정이 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행이란 언제나 계획하지 않았던, 자질구레한 사건 사고들의 연속이라는 걸 잘 알면서도 그런 일들로 인해 혹여라도 아들에게 어떤 문제가 생기지나 않을지 별별 걱정으로 속을 끓이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지만 모든 게 우리가 의도한 대로 진행된다면 우리는 굳이 자신이 유지하고 있던 삶의 태도나 습관을 변경할 이유가 없겠습니다. 여행도 이와 같아서 미리 계획한 대로 착착 진행된다면 여행은 그야말로 장소만 달라진 일상이 될 수밖에 없겠지요. 조금 고생스럽기는 하지만 계획에서 벗어난 일상을 마주함으로써 우리는 진정한 여행을 경험하고, 그것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이 끝나가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덧없어진다. 죽음이라는 차가운 현실 앞에서 소유와 명성, 권력, 외모, 학위 등 집착하던 모든 것은 의미를 잃는다. 나는 이 사실을 죽어가는 환자와 인터뷰하며 배웠다. 인터뷰에 참여했던 환자는 모두 '함께하는 것'이 얼마나 값진 선물인지 이야기했다. 그들은 의사나 간호사가 함께한다고 느낄 때 따뜻함을 느꼈다."  (p.150 <부처님 말씀대로 살아보니> 중에서)


무사 앗사리드가 쓴 <사막별 여행자>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등장합니다. '여행은 자기 자신에게로 떠나는 것이며, 또한 그 여행은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진다. 여행을 하는 동안 사람들은 삶이 아름답다고 느낀다. 그 순간에는 소유해야 할 것도 잃을 것도 없기 때문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외할머니는 아들에게 선물은 절대 사 오지 말라시며, 사 와봐야 쓰지도 않는다는 말씀을 여러 차례 하셨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그래도 어찌 그리 야박하게 할 수 있느냐며 가급적 쓸 수 있는 선물을 사 오겠노라는 말로 인사를 대신했습니다. 한 달이 조금 넘는 유럽 여행을 통하여 아들은 어쩌면 한 뼘 성장한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늘은 여전히 어둡고 자맥질하듯 비가 오락가락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내일 아침에는 어쩌면 먹이를 찾아 나무를 쪼는 딱따구리의 경쾌한 소리를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숲에 사는 모든 생명들에게도 오늘의 비가 단비로 기억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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