셰익스피어, 인간심리 속 문장의 기억 Shakespeare, Memory of Sentences (양장) - 한 권으로 보는 셰익스피어 심리학 Memory of Sentences Series 3
윌리엄 셰익스피어 원작, 박예진 편역 / 센텐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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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추울수록 몸속 세포 하나하나의 감각이 되살아난다. 말하자면 추위는 세포 감각을 일깨우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면 글의 느낌을 되살리는 건 무엇일까?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그것은 바로 슬픔이다. 슬픔은, 전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문장 하나하나의, 낱글자 하나하나의 의미를 생생하게 되살린다. 그럴 때의 슬픔은 비가 내려서 혹은 낙엽이 져서 일시적으로 느끼는 낭만적인 슬픔이 아니라 깊은 고통 속에서 맛보는 처연한 슬픔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삶에서 깊은 슬픔을 체험한 작가의 글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넓은 공감력을 갖게 된다.


고전문학 번역가이자 작가이며 북 큐레이터로도 활동하고 있는 박예진 작가의 신작 <셰익스피어, 인간심리 속 문장의 기억>을 읽는 내내 나는 영국의 대문호 셰익스피어에 대해 생각했다. 16세기말에서 17세기초를 살았던 그에 대해 기록으로 남겨진 단편적인 사실 외에 작가의 삶에 대한 전모를 나는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의 글 속에는 언제나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가장 깊은 슬픔으로부터 건져 올린 보편적 깨달음의 경구를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다만 슬픔이 슬픔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깨달음을 통한 작은 기쁨으로 재탄생하는 감정의 탈피를 경험하도록 한다.


"sentence 114

I have done penance for contemning Love, whose high imperious thoughts punish'd me with bitter fasts, with penitential groans, with nightly tears, and daily heart-sore sighs; for in revenge of my contempt for love, love hath chased sleep from my enthralled eyes and made them watchers of my own heart's sorrow.

나는 사랑을 경시한 것을 속죄하네. 사랑의 높은 오만한 생각들이 나를 비통한 금식, 참회하는 신음, 밤마다 흐르는 눈물, 매일의 마음 아픈 한숨으로 벌하였네. 사랑은 내 흘린 눈에서 혼돈의 잠을 빼앗아가고, 내 마음의 슬픔을 지켜보게 만들었네."  (p.92~p.93)


우리는 간혹 위대한 고전문학의 힘을 간과하거나 그 필요성을 잊곤 한다. 그러나 깊은 슬픔에서 비롯된 글과 문학은 시대를 불문하고 살아남게 마련이다. 인간의 보편적인 감성은 시대에 상관없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먼 나라 영국에서 수백 년 전에 쓰인 셰익스피어의 문장이 시대와 장소를 건너뛰어 21세기 대한민국의 독자를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이 책을 엮은 박예진 작가는 오늘날까지도 사랑받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엄선하여 간략한 스토리와 함께 작품 속 명문장에 대한 해석을 덧붙이고 있다.


"sentence 218

I am very proud, revengeful, ambitious, with more offences at my beck than I have thoughts to put the in, imagination to give them shape, or time to act them in. What should such fellows as I do crawling between earth and heaven? We are arrant knaves, all. Believe none of us.

나는 매우 교만하고, 복수심에 차 있고, 야망이 가득하며,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죄를 마음에 품고 있소. 그 죄를 구체적으로 상상할 수 있는 상상력도, 그것을 실행할 시간도 없소. 나 같은 자들이 땅과 하늘 사이에서 기어다니며 무엇을 해야겠소? 우리는 모두 철저한 악당이오. 누구도 믿지 마시오."  (p.10~p.161)


오전에 인근 공원을 가볍게 산책했다. 아침 특유의 날카롭고 쨍한 냉기가 온몸의 세포를 살아나게 하는 듯했다. 반려견과 함께 산책을 나온 사람들, 여러 운동 기구에 매달려 가볍게 몸을 푸는 사람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빠르게 걷는 사람 등 제각각 목적하는 바와 행동은 달랐지만 이 추운 겨울 아침에 공원에 나와 온몸의 세포 감각을 일깨웠던 기억은 오래도록 비슷한 장면으로 남지 않을까. 그리고 박예진 작가의 책 <셰익스피어, 인간심리 속 문장의 기억>을 읽는 독자들 역시 그 추구하는 바도 다르고 읽는 장소도 다를 테지만 셰익스피어가 느꼈던 인간 존재의 슬픔과 삶의 여정에서 겪는 온갖 감정에 대한 물음표를 각자의 가슴 속에 오래도록 간직하지 않을까. 2024년의 마지막 주말 아침, 그 냉랭한 한기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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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처럼 부어라 마셔라 하는 송년 모임은 사라진 지 오래되었지만 이맘때의 거리는 여전히 송구영신의 기치로 들썩인다. 가는 세월이 아쉬운 건 늙다리 기성세대나 MZ세대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일 뿐 어느 한 세대에게 국한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모임의 내용이나 형식은 많이 달라졌다 할지라도 '송구(送舊)'하고 '영신(迎新)'하려는 마음은 여전히 남아 오페라의 유령처럼 거리를 배회하고 있다. 물론 뜬금없이 계엄령을 선포하는 바람에 시국이 뒤숭숭하고, 가뜩이나 어려운 경기에 찬물을 끼얹은 측면이 없지 않으나 나처럼 모임을 회피하는 '피회족(避會族)'들에게는 이맘때의 송년 모임마저 취소하고 나면 참가할 만한 모임이 거의 사라지고 마는 까닭에 모임 취소를 극구 뜯어말리는 기현상을 연출하게 되었다.


어제는 인근에 사는 초등학교 동창 몇몇과 송년 모임을 가졌다. 몇 순배 술잔이 돌고,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대화 주제, 이를테면 건강이나 정년, 자녀의 학업이나 취업 또는 결혼 등 나올 만한 주제는 모두 지나고 나자 꺼낼까 말까 입이 간지럽기는 하지만 좀처럼 꺼내지 않는 정치가 도마 위에 올랐다. 그 시발점은 서울의 모처에서 오래전부터 점집(당사자는 언제나 철학관이라고 우기지만)을 운영하고 있는 친구의 입을 통해서였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윤석열이 대통령이 된 것은 대한민국 무속신앙의 승리였어. 그렇게 생각하지 않냐? 개신교 목사든, 조계사 승려든 이 사실을 모른다고 할 사람은 아마 없을 거야. 그들 역시 다 알고 있었지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윤석열에게 머리를 조아렸을 뿐이야. 그러니 나처럼 철학관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윤석열 부부가 얼마나 고마웠겠냐? 천공이니 건진법사니 하는 사이비 무속인들도 당당히 어깨를 펼 수 있었고 말이야. 윤석열 부부가 아니었다면 그게 가당키나 했겠어?"


반쯤 혀가 꼬부라진 친구의 말에 이렇다 저렇다 반론을 펴는 친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친구의 일방적인 주장이 길게 이어지자 한 친구 왈, "목사님들을 싸잡아 비난하면 안 되지. 대부분의 목사님들은 윤석열 부부가 무속에 심취했다는 사실을 몰랐을 거야. 알았다면 그를 지지할 리가 없지. 그거야 말로 우상숭배나 다름없으니까 말이야." 하며 화를 냈다. 모태신앙의 독실한 신자답게 그의 반론 역시 진지했다. 그러자 철학관을 운영하는 친구 왈, "야, 말은 똑바로 하자. 그걸 몰랐다고?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알던 사실을? 목사님들은 어디 북한 출신만 있냐?" 하며 대드는 바람에 술자리는 온통 정치와 종교가 뒤섞인 난장판으로 변하고 말았다. 뒷수습은 물론 종교가 없는 무교인들 차지였다. 우리는 그렇게 '송구(送舊)'하고 '영신(迎新)'하자는 다짐을 하고 밤 늦게 헤어졌다.


못 먹는 술을 한 잔 받아 마신 탓인지, 윤석열의 대통령 당선이 대한민국 무속신앙의 승리라는 친구의 말이 충격적이었던 탓인지 어제부터 있었던 두통이 지금도 사라지지 않는다. "아이고 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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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
진은영 지음 / 마음산책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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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끝이 찡한 추위가 가슴속까지 얼얼하게 하는 아침. 거실 문을 열자 베란다 창문을 통해 쏟아지던 겨울 햇살이 냉랭한 한기와 함께 부엌 입구까지 짓쳐들었다. 온전한 느낌이란 언제나 한 발 늦게 도착하는 법, 나는 잠옷 위에 패딩 조끼를 껴입고 베란다로 나섰다. 아파트의 동과 동 사이 주차장에는 녹지 않은 눈이 여전히 주차된 차량 위에 소복이 쌓여 있고, 이른 외출이 불만인 어린아이의 뻗대는 소리가 휴일 아침을 깨우고 있었다. 잠자리가 편하지 않았는지 뒷목이 뻐근했다. 나는 속절없이 푸른 하늘을 향해 긴 숨을 토해냈다. 하얀 입김이 방충망 틈새를 빠져나가는 동안 문득 들었던 생각, '아, 책을 읽어야지.' 하는 강박이 편집증 환자처럼 나의 뇌를 흔들었다.


"내가 다 기억할 수 없는, 죽고만 싶었던 숱한 순간에 나를 살린 누군가의 문장들이 있었을 것이다. 고통의 순간도 회복의 과정도 전부 잊었지만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나는 지금 여기에 살아 있다. 나는 위대한 책들을 읽고서 혁명을 일으키지도 못했고 인류를 구원하지도 못했다. 어쩌면 나처럼 평범한 대부분의 독자에게 독서란 위대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p.8 '책머리에' 중에서)


진은영 시인의 산문집 <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은 그렇게 자기 고백적인 시인의 넋두리로 시작된다. 많은 책을 읽었고, 지금도 늘 무언가를 읽고 있지만 삶이 바뀌기는커녕 읽었던 책의 제목마저 기억나지 않을 때가 많다고 하소연하는 시인. 책에 대해서만 논하자면 나의 삶도 시인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무언가 열심히 읽고 기록하지만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고, 하루의 지난 삶에 또 하루를 더하는 기계적인 일상이 지겹도록 이어져 왔다. 그리고 죽고만 싶었던 어떤 순간을 견디게 했던 것이 있다면 끝없이 읽고 쓰는 무용한 행동 덕분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무엇을 꿈꾸며 싸우든 그 꿈을 이루는 일은 어렵다. 조금 전진한 기분이었는데 도로 제자리라는 걸 깨닫게 된다. 인간은 실패하려고 태어난 '훼손된 피조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카뮈 덕분에, 우리는 어려운 싸움을 계속 이어가는 이들을 어리석다고 말하는 대신 위대한 용기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우리가 진정 사랑하는 이들은 승리하는 이들이 아니라 진실과 인간적 품위를 지키기 위해 어쩌면 패배할지도 모를 싸움을 시작하는 이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p.143)


시인의 독서일기와도 같은 이 책에서 시인이 열거하는 작가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카프카, 버지니아 울프, 한나 아렌트, 모르스 블랑쇼, 바흐만, 실비아 플라스, 카뮈, 시몬 베유, 바슐라르, 존 버거, 앤 카슨, 릴케... 한동안 책에 빠져 살다 보면 내가 책이나 작가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책이 나를 지목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말하자면 독자의 취향이나 성향이 어떤 작가에 의해 지배되고, 그것이 결국 생각지도 않았던 책을 선택하도록 이끌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시인 역시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독서에 대한 취향이나 성향이 자신이 좋아하는 한 작가에 의해 시나브로 굳어지게 되는 체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터, 따지고 보면 지금의 시인을 만든 것도 결국 시인이 읽었던 책이 아닐까 싶다.


"2022년 우리가 거리에서 많은 젊은이를 잃고서 치러야 했던 사회적 제의가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핵심이 전부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위패도 사진도 없는 분향소에서 고인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하지 못하고 듣지 못한 채 누군지도 모르는 고인을 애도하고 추모했다. 세상을 떠난 당신이 누구였는지 알고 기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바로 그 제의에서 말이다."  (p.188~p.189)


이 책에서 시인은 자신이 사랑하는 작가들의 책을 통하여 그 속에 깃든 삶의 의미를 살피고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문학의 힘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삶에서 겪는 어떤 위기의 순간에도 자신과 같은 상황에 놓였던 문학 작품 속 어느 주인공의 이야기를 떠올릴 수만 있다면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는, 이른바 문학의 유용성이랄까 독서의 힘이랄까 하는 문제를 반복하여 되새긴다. 우리의 삶은 어쩌면 정작 삶에서 꼭 필요하다고 느껴지지도 않는, 팔 할의 딴짓으로 구성되는지도 모른다.


한낮이 되어서도 기온은 크게 오르지 않았다. 시인의 산문집 한 권을 반나절 만에 뚝딱 읽어치운 나는 며칠 지나지 않아 책의 제목마저 아득해질 것임을 잘 알고 있다. 나의 독서는 이렇게 무심하다. 그럼에도 나는 짬이 날 때마다 책을 읽고 문장이나 내용을 곱씹고 음미할 만한 시간도 갖지 못한 채 서둘러 잊곤 한다. 나의 기억 어딘가에 두어 줄의 문장쯤 남아 있겠지, 하는 믿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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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집스러운 시간이 묵묵히 흘러가는 동안 나와 당신의 틈새를 메웠던 삶의 질료가 과연 무엇이었을까 이따금 생각하곤 합니다. 말하자면 그런 것이지요. 조급하거나 성마른 성격의 내가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사소한 이유로 당신과의 관계를 무 자르듯 싹둑 단절하거나 데면데면 멀어지지 않은 채 그토록 오랜 세월을 한결같이 지켜올 수 있었던 원동력이랄까 원천이랄까 뭐 그런 게 궁금했던 것이지요. 우정이나 공감 또는 배려와 같은 추상적인 단 어로 대답을 갈음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뭔가 미진한 부분이 남는 게 사실입니다. 우리는 헤어지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쓴 것도 아니요, 남녀 간의 사랑과 같은 본능적 관계에 의지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최근에 나는 우르술라 누버가 쓴 책 <나는 ‘아직도’ 내가 제일 어렵다>에서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당신과 내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오랜 세월 서로의 우정을 확인하며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에 대한 작은 단서가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게 했습니다. 저자는 자신의 책 서문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습니다.

 

“만약 아무것도 숨길 수 없다면 우리는 ‘발가벗은’ 채로 다른 사람과 마주해야 한다. 이마에 적혀 있기라도 한 것처럼 타인이 내 생각을 훤히 읽을 수 있다면, 우리의 감정이나 희망사항, 계획을 호기심 가득한 낯선 사람의 시선에서 지켜낼 수 없다. 비밀이 없다면 무방비 상태로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의도, 희망, 욕구에 휘둘리기 쉽다. 즉 비밀은 우리 인생에 어떤 권한도 없는 사람이 우리 삶에 함부로 기웃거리지 못하게 막아주는 울타리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으로도 비밀은 윤활제 역할을 한다. 모든 것을 밝히고 드러내야 한다면 사회 공동체는 제대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절대적 진실’만 존재하는 사회는 스스로를 감당하기 힘들다. 긍정적인 비밀에는 절대 과소평가해서는 안 되는 매력적인 사회적 가치가 있다.” (p.13)

 

그렇습니다. 나는 지금 당신과 나 사이에 존재했던 ‘비밀’에 대해 말하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관계를 발전시키겠다는 어떤 특별한 목적도 없이 서로의 비밀을 조금씩 공유해 왔던 것입니다. 삶의 고통을 견뎌야 하는 어떤 순간에도 우리는 기회가 찾아올 때마다 언제나 자신이 간직해 온 비밀을 조금씩 조금씩 상대방에게 주입했던 것이지요.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각자가 정한 삶의 테두리 속으로 상대방의 출입을 무시로 허락하게 되었고, 서로가 서로의 손을 맞잡지 않았어도 우리는 단단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언제였는지 확실한 시점은 떠오르지 않지만 내가 언제부터 책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어떤 계기로 책을 좋아하게 되었는지 당신 은 내게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던 적이 있습니다. 나는 그때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한 채 우물쭈물 얼버무렸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의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비밀’이 내 인생에 있어 하나의 전기로 작용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책을 좋아하게 된 계기나 특정 시점을 명시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나에게도 하나둘 비밀이 생겨나면서부터 책과 자연스레 가까워졌음은 분명한 듯합니다. 독서란 결국 타인의 비밀을 공유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에게 밝힐 수 없는 어떤 비밀을 끌어안게 된 어느 날, 나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다른 누군가의 비밀도 궁금해지는 법이니까 말입니다. 어쩌면 타인의 ‘비밀’을 정당한 방법으로 엿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독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최은영의 소설집 <쇼코의 미소>에도 ‘비밀’이 가득합니다. 소설에서 고등학생이던 ‘나’는 한국을 찾은 일본의 자매학교 학생인 쇼코를 일주일간 집에서 재우게 되지요. 일제 강점기에 일본어를 배웠던 할아버지는 언어가 잘 통하지 않는 ‘나’보다 더 살뜰히 쇼코를 살피며 잘 지내게 됩니다. 이후 쇼코는 할아버지에게는 일본어로, ‘나’에게는 영어로 편지를 꾸준히 써서 보내지요. 대학에 가고 바빠지면서 ‘나’와 쇼코는 연락도 끊기고 관계도 멀어집니다. 소설 속 주인공인 ‘나’가 쇼코와 멀어지는 동안에도 할아버지와 쇼코는 자신의 비밀을 서로에게 내보이며 한동안 관계를 이어갔습니다. 한편 <쇼코의 미소>에 실린 또 다른 단편 소설 ‘씬짜오, 씬짜오’에는 마음으로 공감할 수 없는 두 가족의 비밀이 소설 전반에 드러납니다. 말하자면 비밀을 공유할 수 없다는 건 관계를 지속할 수 없다는 걸 의미하기도 하지요.

 

“시간이 지나고 하나의 관계가 끝날 때마다 나는 누가 떠나는 쪽이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생각했다. 어떤 경우 나는 떠났고, 어떤 경우 남겨졌지만 정말 소중한 관계가 부서졌을 때는 누가 떠나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알 수 없었다.” (p.89 '씬짜오, 씬짜오‘ 중에서)

 

<쇼코의 미소>에서 작가 최은영은 표제작인 ‘쇼코의 미소’를 비롯하여 7편의 이야기를 이 책에 싣고 있지만 결국 작가는 ‘비밀’이 들려주는 여러 변주를 독자들에게 말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애란의 소설집 <바깥은 여름>에도 가슴 아픈 ‘비밀’이 등장합니다. 어린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고 상실감으로 어찌할 바 모르던 부부는 찬바람이 부는 입동의 자정 무렵, 복분자의 붉은 물이 튄 벽에 도배를 다시 하기로 합니다. 어쩌면 부부에게 도배는 죽은 아들을 잊고 새 출발을 다짐하자는 의미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도배를 하기 위해 가구를 치웠을 때 그 밑에서 아들의 삐뚤빼뚤한 낙서가 나옵니다. 말하자면 시간이 가면 자연스럽게 잊혔을지도 모르는 아들의 비밀 한 조각이 부부에게 드러난 셈이지요. 부부는 마지막 남은 한 장의 벽지를 마저 붙이지 못한 채 오열합니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가슴이 저릴 정도로 무고한 얼굴로 잤다. 신기한 건 그렇게 짧은 잠을 청하고도 눈뜨면 그사이 살이 오르고 인상이 변해 있다는 거였다. 아이들은 정말 크는 게 아까울 정도로 빨리 자랐다. 그리고 그런 걸 마주한 때라야 비로소 나는 계절이 하는 일과 시간이 맡은 몫을 알 수 있었다. 3월이 하는 일과 7월이 해낸 일을 알 수 있었다. 5월 또는 9월도 마찬가지였다.” (p.18 '입동‘ 중에서)

 















‘비밀’은 글로 쓰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말하여지기도 합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비밀’은 때로는 마음의 병이 되어 한 사람을 쓰러트리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비밀을 들어주고 그 아픔을 다른 누군가에게 토로하지 못한 채 자신의 가슴에만 담아야 하는 이도 있습니다. 정신과의사가 바로 그런 사람이지요. 정신과의사 김진세가 쓴 <길은 모두에게 다른 말을 건다>는 정신과의사의 고충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김진세의 산티아고 순례기이기도 한 이 책은 개인이 만들어가는 ‘비밀’을 우리는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삶은 음미하는 것이다. 급하게 보내면 언제 갔는지도 모르게 지나가버리는 삶, 비록 지긋지긋한 삶이라도 그 고통에서 헤어나오고 싶은 것이지, 실제로 인생이 빨리 흘러가길 바라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인생을 즐기려면, 마치 음식을 천천히 씹으며 참맛을 느끼듯, 천천히 살아가야 한다.” (p.31)















나는 요즘 내가 좋아하는 작가 최진영의 산문집 <어떤 비밀>을 읽고 있습니다. 일부러 작정한 것은 아니지만 나의 삶도 희끗희끗 탈색이 되고,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의 경계가 점점 선명해지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내가 알던 당신은 어떤 힘든 일에도 몸을 사리는 법이 없었고, 얼굴에는 늘 미소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세월의 무게를 감당하기에는 당신이나 나나 이미 버거운 나이가 된 게 아닌지요. 나를 만날 때마다 이따금 내뱉는 당신의 옅은 한숨이 나를 슬프게 합니다. 그것은 차마 당신에게 말할 수 없었던 나만의 비밀이었습니다. 최진영의 산문집 중 '대한의 편지'라는 소제목으로 쓴 작가의 문장을 옮겨보겠습니다.


"좋은 사람에게 얼룩처럼 나를 묻히고 다닌 적이 있습니다. 묻어 있으면 나도 그처럼 좋아질 것 같았거든요. 그래요, 아마도 나는 기억되고 싶었나 봅니다."  (p.344~p.345)

 

오늘은 동지(冬至). 악귀를 쫓기 위해 팥죽을 쑤어먹는 집은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지만 당신에게 뜨끈한 팥죽 한 사발 보내고 싶은 날입니다.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는 살풍경한 느낌의 오늘 하루를 영원히 기억하고픈 까닭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나와 당신은 각자의 ‘비밀’을 짓고, 기억하고, 편집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그렇겠지요. 만들어진 ‘비밀’은 차후 당신과 나의 만남에서 서로 교환될 수도 있고, ‘비밀’로 숨겨질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나는 당신의 비밀을 언제든 응원한다는 사실을 당신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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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사슴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장편소설 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24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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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서 시간의 퍼즐이 완성되기까지 우리는 아무도 그 결과를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어떤 이의 운명을 함부로 예단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단순한 논리 구조로 쉽게 예측할 수 있을 만큼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도, 인간의 직선적인 사고방식으로 점칠 수 있을 만큼 분명한 방향성을 갖는 것도 아닌 까닭에 우리 삶의 결과는 때로 기적처럼 부풀려지기도 하고 농담이나 조롱처럼 무시되기도 한다. 그러나 전체로서 개개인의 삶이 비록 하찮고 무의미할지라도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그 과정은 오직 한 개인에게 귀속된 유일한 것이기에 우리는 이따금 다른 이의 입을 통해 누군가의 삶을 전해듣기도 하고, 한 권의 책 속에서 어떤 이의 삶을 발견하기도 한다. 우리는 그렇게 자신의 삶도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오랫동안 살아남기를 바라며 사는 동안 다른 누군가의 삶을 끝없이 궁금해하는지도 모른다.


한강의 첫 장편소설인 <검은 사슴>은 등장하는 인물이 그리 많지 않은 반면 분량은 꽤나 길고 두꺼운 까닭에 인물 상호 간의 관계와 그에 따른 인물 개개인의 심리를 비교적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소설이다. 물론 사람의 심리라는 게 형식화된 틀 안에서 정형적으로 작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작가가 설정한 인물 개개인의 성격이나 지나온 삶의 이력을 대입하면 소설 속 인물 개개인의 행동이나 심리를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겠다 싶은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에 대한 일반 독자의 리뷰에서 종종 왜?라는 의문부호를 목도하게 되는 것은 아마도 소설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탄광 지대라는 낯선 환경이 독자들로 하여금 생경한 느낌을 불러일으킨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소설 속 중심인물인 의선의 성장 배경이 그곳이었다는 것도 독자들의 호기심을 부추겼을 테다.


"의선의 생감새는 평범했다. 조그맣고 마른 얼굴에 코와 광대뼈는 평면적이었다. 긴 외까풀 눈이 유달리 맑기는 했다. 인중이 약간 짧아 웃을 때면 입술이 유아적인 동그란 모양으로 벌어졌고, 그 안으로 오종종한 옥니가 보였다. 애써서 찾아보려 해도 남다르게 예쁜 구석이라고는 없는, 누군가 후천적인 매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식의 질문을 던진다면 그때서야 어렴풋하게 떠오를 법한 얼굴이었다. 그러니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도 아닌 내가 이따금씩 그녀를 아름답다고 느꼈던 것은 의아스러운 일이다."  (p.81)


각 인물의 복잡한 심리에 비해 소설의 얼개는 비교적 단순하다. 작은 제약회사에서 근무하던 의선이 알몸으로 거리를 내달리는 황당한 사건으로 인해 실종되자 인영과 명윤이 의선을 찾아 그녀의 고향인 황곡으로 향한다. 같은 건물에 위치한 잡지사에서 근무하는 인영은 의선이 살던 반지하방의 침수로 오갈 데 없어진 그녀를 자신의 집으로 이끌었고 진심을 다해 의선을 돌봐준 인물이다. 인영의 후배이기도 한 명윤은 의선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한편 의선의 고향인 황곡에서 만난 장종욱은 탄광 사진작가로서 의선과 관련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그러나 이들 모두의 공통점은 고통 속에서 성장했던, 혹은 고통과 함께 현실을 살고 있는, 그럼에도 어둠을 박차고 밝은 햇빛을 향해 나아가려고 하는 상상 속의 동물 '검은 사슴'과 닮아 있다는 점이었다.


"한 사람의 정신이 폭발했을 때 그 사건은 얼마만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일까. 더이상 의선은 병원에서 진정제를 맞을 필요가 없었다. 내장에 든 것을 모두 토한 뒤의 마르고 쓸쓸한 얼굴로 웃지도 않았다. 극도로 말을 아끼다가도 매우 이따금, 마치 오랫동안 글로 써서 다듬은 문장 같은 말들을 천천히 독백하던, 나이에 비하여 성숙해 보였던 스물다섯 살의 여자애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p.201)


한때는 번성했지만 이제는 사라져가는 탄광촌 황곡에서 의선을 찾아 헤매는 인영과 명윤의 과거가 허물을 벗듯 하나씩 드러난다. 어쩌면 의선은 인영과 명윤이 겪고 있는 어둠의 트라우마를 벗겨줄 작은 희망, 밝은 침묵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둠에서 태어나 어둠을 벗어나고자 발버둥쳤던 의선이 제풀에 지쳐 쓰러져 다시 어둠 속으로 도피하는 것을 방관한다면 잠시나마 의선과 연이 닿았던 인영과 명윤 역시 어둠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은 불안감이 되돌리려던 그들의 발길을 끝내 황곡에 묶어두었던 것이다.


"사람들이 흑백사진에 친밀감을 갖는 것은 밤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했다. 또한 누구나 태중의 어둠 속에서 태어났으므로, 그 열 달 동안의 어둠에 대한 기억을 몸 어딘가에 저장해두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거기서 몸부림치며 빛 속으로 뛰쳐나오려 했던 마지막 순간의 기억 역시 그 안에 숨겨져 있을 것이다."  (p.320)


잔뜩 흐렸던 하늘에는 조금씩 빛이 되살아나고 있다. 다행이었다. 인간의 연약함과 깊은 어둠을 탐색하는 이와 같은 소설을 읽은 날에는 빛이 들지 않는 캄캄한 어둠 속으로 끝없이 추락하는 느낌이 들곤 한다. 벗겨진 구름 사이로 언뜻언뜻 햇살이 비친다. 헤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좌절과 고통 속에서도 아주 이따금 희망의 웃음을 볼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어둠에서 태어나 어둠에 익숙한 사람들의 강인한 연대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생각한다. 혼자가 아니라는 믿음, 내가 쓰러지면 다른 누군가가 즉시 나를 일으켜줄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가 고통 속에서도 우리를 살게 하는지도 모른다. 구름 사이로 드러나는 저 햇살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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