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 위에 피는 꽃
이순실 지음 / 밀알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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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국적을 가진 남자에게 있어 병역은 피할 수 없는 의무이자 비교적 긴 시간에 걸쳐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하는 골치 아픈 문제이기도 하다. 현역으로 군에 입대하여 제대하는 것만으로 모든 병역이 끝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제대와 동시에 동원 예비군(1년차~4년차)에 편성되었다가 다시 일반 예비군(5년차~8년차)으로, 그리고 민방위대원(8년차 이후~40세)을 끝으로 비로소 병역의 의무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복무 연한은 과거에 비해 대폭 줄어들기도 했고 처우와 보상 역시 크게 향상되어 그럭저럭 할 만하다고 말하는 이들도 더러 있다. 그런 이들 중 나이 마흔을 넘겨 민방위대원으로서의 역할도 제외되는 순간, "나는 이제 대한민국 남자로서의 생명이 끝났다."며 자조 섞인 농담을 하기도 한다.


학창 시절부터 교련 과목을 배워왔던 나로서는 군에서 제대한 후 예비군 훈련을 받는 게 딱히 이상할 것도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과는 다르게 대학의 교련 과목은 운동장에서 하는 실기보다는 이론과 정신교육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고, 제대 후 대학교의 학생 예비군에 편성된 후에도 군에 다녀오지 않은 후배 대학생에 비해 교육 시간이 조금 더 길다고 느꼈을 뿐 교육 내용에 있어서는 달라진 게 없는 듯 여겼다. 물론 당시에 초빙된 강사들의 강의라는 게 특별히 재미있거나 귀에 쏙 들어오는 내용이 아니었기에 따분한 강의 시간을 견딘다는 게 그야말로 고문에 가까운 수준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보란 듯이 대놓고 책상에 엎드려서 잘 수는 없었다. 기껏해야 교묘한 자세로 턱을 괴고 꾸벅꾸벅 졸거나, 고개를 외로 꼬고 대담하게 잠이 들어 코를 심하게 골다가 지적을 받는 학생들도 더러 있었지만 말이다. 예비군 훈련이나 교련 시간에 다녀갔던 수많은 강사들의 강의 중에 비교적 많은 학생들이 눈을 똘망똘망 뜬 채로 강의에 집중했던 경우는 손에 꼽는 수준이었다. 세월이 한참 지난 지금도 기억나는 건 당시 동독 유학생으로 있다가 탈북한 탈북 대학생의 강의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길거리에서 북한 이탈 주민을 만날 수 있는 확률은 극히 낮거나 불가능에 가까웠던 까닭에 그들은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를 구경하는 것처럼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신기한 대상이었다. 좀처럼 들을 수 없었던 어눌한 북한 사투리와 학생들의 장난기 어린 질문에 대한 우리와 다른 방식의 반응과 답변,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북한 사회의 실상에 대한 궁금증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그들의 강의는 늘 인기가 높았다. 오죽하면 그들을 텔레비전 코미디 프로그램에 참여시켜 대중의 웃음거리로 만들었을까. 물론 그들도 역시 방송 출연료와 강의료를 받은 돈으로 음식 프랜차이즈 사업에 뛰어들어 크게 성공할 수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3만 명이 넘는 북한 이탈 주민이 살고 있는 요즘, 북한 출신이라는 건 그들의 경쟁력이 될 수는 없는 게 현실이다. 더구나 텔레비전의 영향력이 날이 갈수록 약해지는 시대에 방송 출연으로 생계를 이어간다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텔레비전을 거의 보지 않는 나와 같은 사람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북한 이탈 주민 이순실이 쓴 <돌 위에 피는 꽃>을 읽으면서 예비군 훈련장에서 만났던 오래 전의 기억이 떠올랐던 건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그녀의 삶이 내가 예비군 훈련장의 강사로 접했던 동독 유학생의 삶과 겹쳐져 긴 여운을 남겼기 때문이다.


"참으로 춥고 추웠던 날, 양강도 혜산 역전에서 진통을 맞았다. 배를 끌어안고 출산할 자리를 찾았지만, 아기 낳을 변변한 자리가 없어 발만 동동 굴렀다. 짐승들도 새끼를 낳기 전에 둥지를 튼다고 하는데, 하물며 사람이 아기 낳을  자리 하나 없다는 처지가 그렇게 서글플 수 없었다. 진통의 아픔으로 몸부림쳐도 그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았다. 역전 승무원들은 행여나 역전 안에서 아이를 낳을까 봐 당장 나가라고 내쫓기 바빴다. 역전 보일러 아궁이 옆에 쓰러져 있자니 이미 양수가 터져  다리 밑으로 물이 흥건했다. 지나가는 길손에게도 도와달라고 요청해 보았지만, 꽃제비 따위에게 손을 잡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p.163)


공병부대 장교였던 아버지와 군단장 요리사로 근무했던 어머니 덕분에 저자의 어린 시절은 비교적 유복했던 듯하다. 그러나 저자가 군대 의무 복무 기간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부터 비극적인 삶이 시작되었다. 연락도 받은 적 없지만 저자가 군에 있었을 때 두 분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셨고, 형제자매들은 뿔뿔이 흩어졌으며, 소위 '고난의 행군'이라 일컫는 극심한 경제난이 겹치면서 저자는 한순간에 꽃제비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생존을 위한 북한 탈출이 시도되었고, 번번이 잡혀 되돌아가서 고초를 겪었음에도 끝내 탈출에 성공하여 대한민국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철조망을 넘자 하나같이 약속이나 한 듯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이 탈출의 길이 살길이 될지, 죽을 길이 될지 그 누가 장담할 수 있었겠는가. 그저 목숨 걸고 저지르는 도박과도 같았다. 이 길을 걸으려고 얼마나 수많은 탈북자들이 매 순간 목숨을 내걸고 모질게 버텨 왔을까. 살았다는 안도감 저편으로 북한에 남겨져 있을 가족들 생각에 이내 서러움이 북받쳐 올랐다."  (p.254))


무사히 우리나라에 정착한 저자는 여러 방송이나 유튜브에 출연도 하고, 김치와 냉면, 만두 등을 판매하는 식품사업도 운영하면서 나름의 성공을 거둔 듯하다. 텔레비전을 보지 않는 나로서는 그녀의 얼굴이 그저 낯선 아줌마 중 한 사람일 뿐이지만 그녀는 어쩌면 3만 명이 넘는 북한 이탈 주민에게는 성공의 표상이자 고난 극복의 이정표로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지난 몇 년 남과 북의 적대적 관계가 가속화됨으로써 매년 증가하던 북한 이탈 주민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자유를 갈망하는 북한 주민의 염원은 결코 줄어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곧 6월이다. 인도의 보도블록 위에는 까맣게 익어 떨어진 버찌 열매가 오가는 행인의 발길에 밟혀 얼룩얼룩 검은 반점을 남기고 있다. 우리가 살다 간 흔적도 그와 같을 것이다. 어느 노인의 얼굴에 핀 검버섯처럼 우리는 각자가 걸어온 삶의 흔적을 그저 어렴풋이 기억할 뿐이다. 그리고 그 기억들은 서서히 잊힐 테다. 선명하던 버찌 열매의 흔적이 행인들의 발길에 서서히 지워지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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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하루가 어떻게 가는지 모를 만큼 바쁜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렇게 정신없던 시간이 지난 후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여유가 찾아오면 '사는 게 뭔지...'하는 허탈감이 밀려오곤 합니다. 우리가 지나 온 시간들을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자신이 적어도 무엇을 하고 있는지, 하면서 어떤 기분이 들었는지, 일을 끝낸 후 만족하거나 아쉬움이 남지는 않았는지 생각하고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할 텐데 그마저도 찾지 못할 정도로 바쁘게 몰아친다는 건 꽤나 슬픈 일입니다. 혹자는 그런 말들도 합니다. 그래도 바쁜 게 낫다고 말입니다. 물론 은퇴를 하고 딱히 해야 할 일이 없는 사람들에겐 하루가 무척이나 길게 느껴질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길게 느껴지는 그 시간에 무엇을 하며 보낼지 선택할 수 있다는 건 인생을 주도적으로 살고 있다는 의미인 까닭에 하루가 마냥 지루하게 느껴진다는 건 자신의 무계획성과 게으름을 한번쯤 되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나 싶습니다.


오늘부터 내일까지 지방선거 사전투표가 있는 날입니다. 지방자치의 역사도 길고 민주주의 모범이라고 여겨지는 미국 지방자치의 현실을 생각할 때 나는 사실 지방자치의 무용론을 주장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미국은 현재 시민들의 무관심으로 인해 무투표 당선지가 늘고, 투표율 또한 낮아서 선거 비용이나 후보자의 열정에 상관없이 기괴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 당선되기도 하고, 이로 인하여 지방자치는 갈수록 퇴보하고 있는 듯합니다. 결과적으로 엉망이 된 지방자치로 인해 지역 주민들의 불만은 나날이 높아지게 될 테고 말입니다. 그러한 불만은 다시 지방선거에 대한 무관심으로 나타나면서 악순환은 끝없이 계속될 수밖에 없는 구조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지방자치가 갖는 특색이 있기는 하지만 미국과 비슷한 전철을 밟고 있다는 게 저의 생각입니다.


느긋하게 점심을 먹고 가까운 사전투표소에 들렀습니다. 투표를 하려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고, 덕분에 나는 기다리거나 지체하는 시간 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투표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궂은 날씨 탓에 며칠 선선하던 대기는 다시 쨍한 열기로 대체되었습니다. 이따금 바람이 불어와 오가는 행인들의 몸에 쌓인 열기를 조금씩 덜어내고 있었습니다.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2026,소담출판사)을 다시 읽고 있습니다.


"나는 땀과 태양을 제거했다. 내가 낮의 균형을, 내가 행복해하던 해변의 예외적인 침묵을 깨뜨렸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하여 나는 움직임이 없는 시체 위에 네 발을 더 쏘았고, 총알들은 그럴 것 같지 않았는데 깊이 박혔다..  그것은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의 짧은 노크 소리와도 같았다."  (p.97))


한 주가 다 흘러가면서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도 아쉽게 그 끝을 향해 치닫고 있습니다. 머지않은 시기에 장마가 지고 우리는 또다시 긴 우울에 빠져들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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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한지 인생 공부 - 오만과 냉정 사이, 천하를 가른 심리전 인생공부 시리즈
김태현 지음, 사마천 원작 / PASCAL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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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를 거듭하는 사람이든 성공을 거듭하는 사람이든 누구에게나 삶은 어렵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경험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삶이 조금씩 쉬워질 것 같지만 오히려 그 반대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삶은 예나 지금이나 어렵긴 마찬가지이거나 전에 비해 훨씬 더 어렵기만 한 것이다. 오늘 아침에도 그 비슷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새벽 시간에 내가 즐겨 찾는 '산스장'에서 매일 마주치는 할아버지 한 분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는 사실 몇 년 전부터 거의 매일, 거의 같은 시각에, 같은 장소에서 만나 왔던 까닭에 그분의 얼굴은 잘 알고 있지만 그분의 이름도, 사는 곳도, 살아온 이력도 전혀 알지 못한다. 게다가 그저 가볍게 인사만 하고 헤어질 뿐이니 그분과 나는 완벽하게 남남일 뿐 결코 가까운 사이는 아닌 게 확실하다.


오늘 아침에도 나는 반갑게 인사를 하고 '산스장'에서 하는 기초적인 운동을 마친 후 조금 더 걷기 위해 돌아서는데, 자주는 아니지만 잊을 만하면 이따금 만나곤 하는 할머니 한 분과 우연히 동행을 하게 되었다.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가다가 그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로 옮겨가게 되었는데, 할머니는 이 지역 토박이인 듯 그동안 내가 등산로에서 만났던 분들 중 모르는 사람이 없는 듯했다. 할머니는 자신이 40대 때 이 동네로 이사를 왔으며 지금 나이가 80이라고 했다. 할머니가 말씀하시길, "그 할아버지가 절에 다니셔서 나는 처사님이라고 부르는데 처사님이 우리 나이로 올해 87세일 거예요. 그 집 할머니가 6년 전에 쓰러지셔서 거동을 잘 못하세요."라고 하셔서 "맞아요. 할아버지가 저한테도 1940년생이라고 하셨어요."라고 맞장구를 쳤다.


"할아버지가 불편한 할머니를 씻기고, 옷 입히고, 밥 차려 주고, 간식이며 시간 맞춰 과일도 깎아 주고 온갖 수발을 6년째 하고 있어요. 자식들이 다 직장에 다니고 있어서 할머니가 쓰러지고 1년쯤 지났을 때, 할아버지 힘들다며 요양원에 보내자고 했는데 할아버지가 죽어도 못 보낸다고, 할머니 죽으면 자신도 죽겠다며 올해로 6년째 할머니를 돌보고 있어요. 그래서 내가 그 할머니는 복도 많다고 했어요. 몸도 불편한 노인을 그 연세에 한다는 게 보통일 아니에요. 그 할아버지 상 줘야 돼요. 요양원에 보내면 누가 그렇게 정성스럽게 해 주겠어요." 할머니는 등산로를 걷는 내내 할아버지 칭찬을 이어갔다. 산을 내려오면서도 나는 마음 한켠이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


"그 밤, 항우는 더 이상 천하의 패왕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은 한 남자였습니다. 명예와 사랑이 충돌한 그 순간, 그의 세상은 이미 무너졌고, 오직 한 사람의 이름만이 남아 있었습니다. 우희. 그 이름은 그의 마지막 노래처럼, 패왕의 가슴속에서 조용히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새벽녘, 항우는 남은 800여 명의 정예기병을 추려 포위선 한 모서리를 찢는 돌파전을 감행했습니다. 단기에는 몇 겹을 뚫었으나, 외곽에 또 다른 포위선이 있어 기세를 충분히 살리지 못했습니다. 추격과 재포위가 반복되며 탈출 병력은 급감했습니다."  (p.221)


'삶을 바꾸는 실천적 지식'을 전하는 데 매진하고 있는 인문학자 김태현의 저서 <초한지 인생 공부>를 다 읽었던 건 며칠 전의 일이었다. 꽤 오래전에 사마천의 <사기열전>을 무척이나 재미있게 읽었던 나로서는 <초한지>의 모든 부분이 예사로 보이지 않았던 게 사실, 저자인 김태현의 해설이 곁들여진 이 책을 읽고 있노라니 총 70편에 이르는 사마천의 <사기열전>이 얼마나 대단한 책이었나 생각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초한지 인생 공부>의 리뷰를 어떻게 써야 할지 전혀 감도 잡지 못한 채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오늘 아침, '산스장'에서 매일 만나는 할아버지 한 분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었고, 어떻게든 <초한지 인생 공부>의 리뷰를 마무리지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초한지 30년의 역사는 기록 속에 멈췄지만, '당신'이라는 주인공이 써 내려갈 '인생 초한지'는 매일 아침 장기판의 돌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듯 다시 시작됩니다. 때로는 예상치 못한 외통수에 절망할 수도, 때로는 단 하나의 묘수로 전세를 역전시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는 결국 가장 강한 돌을 가진 자가 아니라, 판이 끝날 때까지 자신을 다스리며 묵묵히 이어간 자의 이름을 마지막에 기록합니다."  (p.357)


나는 사실 나이가 들어 마땅히 갈 곳이 없어진, 그리하여 하루라는 긴 시간을 보내기 위해  탑골공원에 모이곤 했던 할아버지들의 바둑, 장기판을 보면서 젊은 시절을 보낸 추억이 있다. 매일매일 그들을 보아왔던 건 아니지만 광화문 교보문고로 향하는 날이면 시선을 남이 두는 장기나 바둑판에 고정한 채 우두커니 서 있던 그들의 모습을 자주 목격하곤 했다. 그들이 두는 장기판에서는 한(漢)이 이기기도 하고, 때로는 초(楚)가 이기기도 하지만 불변하는 역사의 기록에서 초나라의 패왕 항우는 언제나 패자의 위치에 있는 것이다. 강인한 무예와 용맹한 기질을 가진 항우가 어찌 보면 유약하고 건달 기질마저 있는 유방에게 진다는 게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지만 우리의 삶도, 이해할 수 없는 역사도 때로는 기적처럼 이를 어기고 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초한 전쟁의 거대한 서사를 칼날과 함성으로만 기억한다면, 우리는 그 역사의 절반만을 보는 것입니다. 유방과 항우의 싸움이 눈에 보이는 칼과 병력의 전쟁이었다면, 소하와 역이기가 벌인 싸움은 보이지 않는 머리와 혀의 전쟁이었습니다."  (p.187)


'인간사의 빛과 그림자를 꿰뚫는 통찰의 기록'으로 평가되는 <사기열전>을 읽다 보면 초나라의 항우도, 한나라의 유방도 결국에는 인간의 보편적인 욕망과 고뇌 속에서 살다 갔음을 알게 된다. 고전을 읽는다고 해서 자신의 운명이 갑자기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고전 속에서 우리는 인간이 존재하는 한 변하지 않는 불변의 진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아침에 만나는 할아버지 역시 만 86세라는 연세가 결코 적은 나이는 아니지만 거동이 불편한 아내를 돌보며 그 속에서 하루하루 달라지는 삶의 의미를 깨우쳐가는 게 아닐까 싶다. <초한지 인생 공부>를 읽고 있노라면 부귀와 공명이 하룻밤의 꿈에 불과하다는 걸 깊이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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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덕분인지 한동안 지속되던 낮더위는 제법 누그러진 듯 기분 좋은 선선함이 우리를 들뜨게 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연녹색 새순이 돋던 가로수들도 이제는 완연한 초록의 자태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비에 젖은 바깥 풍경을 감상하면서 나는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달달한 믹스커피의 맛에 길들여진 나의 촌스러운 입맛은 한여름에도 언제나 따뜻한 커피를 찾을 뿐, 아이스커피의 이가 시리도록 차고 목을 넘기기도 힘들 만큼 쓰디쓴 맛에는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나는 젊은 친구들이 외출에서 돌아올 때마다 건네는 부담스러운 양의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차마 거절하지 못한 채 억지웃음과 함께 벌컥벌컥 들이켜곤 합니다. 그런 날이면 언제나 여러 차례 화장실 신세를 져야 하지만 말입니다.


우리는 언제부턴가 주변에서 커피가 없는 일상을 상상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도로변을 따라 걷고 있노라면 한 집 건너 카페가 들어선 풍경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은 물론 저렇게 많은 카페들이 다들 어떻게 먹고살 수 있는지 참으로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제가 근무하는 사무실 근처에도 많은 카페와 가게들이 서로 경쟁하며 영업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물론 젊은 사람들의 단골 카페인 스타벅스도 있습니다. 드라이브 스루 방식과 매장 내 판매 형식으로 운영되는 이 카페를 젊은 사람들은 무척이나 선호하는 듯 보였습니다. 나도 물론 그곳에서의 약속 때문에 몇 번 다녀온 적은 있습니다. 그러나 며칠 전 우리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탱크 데이 이벤트 이후 사무실의 젊은 친구들에게도 그곳의 출입을 금지시켰고, 나 역시 다시는 그곳에 가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내가 이와 같은 결정을 내린 이유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의 유지와 번영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공동체를 위협하는 여러 요소들 가운데 인적요소만큼 관리와 통제가 어려운 것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발전에 가장 중대한 기여를 하는 것 역시 인적요소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구성원이 서로 반목하고 뿔뿔이 흩어진다면 그 동동체의 미래는 불을 보듯 뻔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공동체든 각각의 구성원이 100퍼센트 같은 생각을 하고, 100퍼센트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경우는 있을 수 없습니다. 90퍼센트의 구성원이 동의하는 일일지라도 이를 반대하는 사람은 반드시 존재하게 마련입니다. 마치 정신병자와 같은 그들의 생각을 강제적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전무합니다. 5.18 민주화운동 희생자에 대한 추모와 애도는 못 한다 할지라도 그들을 조롱하고 이를 희화화하는 이벤트를 진행한다는 건 우리나라 국민 대다수의 의견과는 상충될 뿐만 아니라 인류애적 차원에서도 용납되지 않는, 반인륜적인 행위라고 하겠습니다. 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바퀴벌레와 같은 이런 정신병자의 의견에 동조하는 자들이 반드시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스스로를 정신병자로 인증하는 것임에도 그들은 과감히 자신의 실체를 내보이곤 합니다.


나는 오늘 몇 장 남지도 않은 스타벅스 상품권을 환불받기 위해 마지막으로 매장을 방문하였습니다. 전과 다르게 매장 안은 비교적 썰렁한 분위기였지만 우리나라 대다수 국민의 의견에 반하는 정신 나간 인간들 몇몇이 매장 한켠에서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며 낄낄대고 있었습니다. 어제부터 내리는 비는 지금도 여전히 그치지 않고, 이따금 굵어지거나 가늘어진 빗줄기만이 심심하고 나른한 오후를 비껴가고 있었습니다. 그 시각에도 우리 공동체를 위협하는 바퀴벌레 몇 마리가 숨 죽인 채 배회하고 있습니다. 또는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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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직접 몸으로 겪어보지 않으면 체감할 수 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가족이나 이웃의 사랑이 그렇고, 추위나 더위 역시 그렇습니다. 우리나라의 자연경관이나 치안, 행정 서비스 등도 외국에 나가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비교가 불가능합니다. 말로만 들어서는 실감할 수 없는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김수환 추기경의 조언을 곱씹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추기경 님은 "머리와 입으로 하는 사랑에는 향기가 없다.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데 칠십 년 걸렸다."라고 하셨지만, 수도자로 살았던 추기경 님도 이럴진대 나처럼 평범한 이는 오죽할까, 생각하면 아득해지곤 합니다.


유럽 여행을 마치고 귀국한 아들도 자신이 당한 소매치기의 경험을 어렵게 털어놓았습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유럽의 치안을 걱정하는 많은 이들이 '소매치기 조심해라'라는 말을 수도 없이 했었고, 나 역시 아들에게 그와 같은 말을 하면서 각별히 조심하라는 당부를 떠나기 전날까지 반복하였습니다. 사진이 취미인 아들은 비교적 고가의 카메라까지 들고 여행을 떠났기 때문에 나로서는 더욱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아들의 전언에 따라 사건을 재구성하면 다음과 같았습니다.


그날 아들은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여행하고 있었습니다. 오후에 미술관 관람을 하고자 했던 아들은 숙소를 나와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할 요량으로 햄버거 하나를 테이크 아웃하여 가까운 공원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겉옷으로 바람막이 하나를 걸치고 그 위에 크로스백과 카메라를 X자로 겹쳐 메고 있었던 아들은 햄버거를 먹기 위해 공원의 의자에 앉았는데, 어떤 남자가 다가와서 아들의 등을 만지더니 등에 뭐가 묻었다고 하더랍니다. 영어는 그럭저럭 잘하는 편이지만 스페인어는 할 줄 모르는 까닭에 그런가보다 생각하며 다시 햄버거를 먹으려는데 자전거를 탄 다른 사람이 물병을 들고 나타나서 등에 뭐가 묻었으니 자신이 물로 닦아주겠다며 옷을 벗어보라고 권했답니다.


대낮이었고, 크게 경계심을 느끼지 않았던 아들은 그의 권유대로 옷을 벗기 위해 크로스백과 카메라를 벗었는데, 카메라는 조금 위험한 듯싶어 다시 어깨에 메고 크로스백은 옆 의자에 놓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바람막이에 묻은 것을 물로 씻고 있는데 자전거를 탄 그 사람이 아들에게 물병을 넘겨주고는 떠나더랍니다. 그 순간 옆에 벗어 놓은 크로스백으로 눈길을 돌리자 크로스백은 이미 사라지고 없더랍니다. 자전거를 쫓아 따라가 보았지만 맨몸으로 자전거를 따라잡을 수는 없고, 공원에 다시 돌아와 보니 바람막이마저 사라져 버렸더랍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허리에 차고 다녔던 휴대폰 커버 안쪽에 카드를 넣어두었던 까닭에 카드와 휴대폰은 잃어버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결국 그날 예약했던 미술관은 가지도 못했고, 현지 경찰서에 도난 신고를 하고 폴리스 리포트((Police Report)를 받은 후 영사관에 들러 긴급여권을 발급받았다고 합니다. 분실한 크로스백 안에는 운전면허증과 여권, 선크림과 세안 도구, 텀블러, 보조배터리 등이 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아들은 여권과 운전면허증을 재발급 신청하였으며, 여행자보험사에 제반 비용을 보상 청구하였습니다.


사실 아들의 경험은 여행지에서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가벼운 해프닝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그렇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말도 몸으로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방심하게 됩니다. 다행인 것은 아들이 그 사람들로부터 어떠한 신체적 위해도 받지 않고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시차적응으로 힘들어하던 아들은 이제 정상으로 돌아온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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