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프랑스식 서재 - 김남주 번역 에세이
김남주 지음 / 이봄 / 201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번역가의 에세이가 독자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지 못하는 까닭은 지식의 편차 때문이 아닐까 싶다. 원작자의 작품을 번역하는 번역가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이 번역했던 어떤 작품에 대해서는 원작자 다음으로 많은 지식을 소유했을 것이라고 짐작이 되는 바, 그 책에 대해서 한 번쯤 읽어보았거나 전혀 읽어보지도 못한 채 다른 경로를 통해 그 책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을 갖고 있는 일반 독자를 고려할 때, 번역가와 일반 독자 사이의 지식 편차는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번역가는 자신의 본업인 번역 이외의 다른 글쓰기에 익숙하지 않다는 데 있다. 그러다 보니 책에 대한 일반 독자의 지적 수준을 고려하지 않은 채(또는 고려하지 못한 채) 자신이 하고픈 말을 이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나온 에세이는 대개 일반 독자가 읽기에는 너무너무 어렵다. 물론 소수이겠지만 번역가와 지적 수준이 비슷하거나 오히려 높은 일반 독자도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학술서가 아닌 일반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에세이의 수준이 지나치게 높다는 건 한 번쯤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닐까.


"장 그르니에에 의하면 카뮈의 작품은 "그 작품에 대한 모든 주석을 쓸데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그런 어떤 것이다. 그런 만큼 역자는 이 글에서 또다시 그런 '쓸데없음'을 범하지 않으련다. "그런 작품은 하나의 호소와도 같아서 우리는 그것에 대답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독자로 하여금 결정을 강요하고 당혹시키며 자기변명을 하게까지 만든다. 그런 작품은 우리에게 어떠한 회피도 용납하지 않음으로써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다."  (P.76)


그럼에도 내가 자주는 아닐지라도 기회가 될 때마다 번역가의 에세이를 읽는 까닭은 그동안 내가 읽었던 책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한편 도움이 될 만한 다른 책이 뭐가 있을까?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을 얻고자 함이다. 때로는 한동안 책과 멀어졌던 까닭에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거나 시큰둥한 마음이 들 때, 혹여라도 나의 관심을 끌 만한 좋은 책이 있지나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번역가의 에세이를 읽게 된다. 일종의 추천 도서 목록을 구하고자 함이다. 김남주의 에세이 <나의 프랑스식 서재>를 읽었던 것도 그런 까닭이다. 프랑스 문학을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김남주 번역가의 저서가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없지 않았다.


"어린왕자는 과연 무사히 자기 별로 돌아갔을까? 가죽 끈이 없는 부리망 때문에 화자의 걱정대로, 우주 어딘가에서 양 한 마리가 장미꽃 한 송이를 먹어치우진 않았을까? 그리하여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면 어린왕자의 방울 같은 웃음소리 대신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지는 것이 아닐까? 슬픔이 가라앉고 나면 어린왕자는 다시 이동하는 철새 떼를 타고 장미꽃 없는 자기 별을 떠나 자기가 길들인 여우도 있고, 화자도 있는 이 지구별로 돌아오지 않을까? 아아, 이 책의 내용을 적은 엽서를 교환하던 그 시절, 금빛 대신 푸른 머플러를 어린왕자처럼 꼭 그렇게 한 번만 목뒤로 넘겨 둘렀던 그 친구를 이 지구에서 바오밥나무가 있는 곳, 마다가스카르에 가면 만날 수 있을까?"  (P.169~P.170)


자신을 일러 '느린 번역가'라 칭하는 김남주 번역가는 <오후 네시>를 통해 아멜리 노통브를 <나를 보내지 마>를 통해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를 처음 국내에 소개한 번역가이자 내가 좋아하는 작가 장 그르니에, 알베르 카뮈, 로맹 가리, 생텍쥐페리 등 프랑스의 현대고전 작품 역시 번역해 왔다. 지금도 나의 기억에 남아 있는 추억 하나는 내가 군에 복무하던 당시, 모 여대 불어불문학과에 다녔던 아내가 졸업논문을 쓰지 못해 노심초사하는 것을 보고는 알베르 카뮈의 소설 여러 권을 부대로 가져와서 읽은 후 논문(이라고 할 수도 없는) 초고를 타자기로 쳐서 아내에게 주었었다. 아내는 내가 쓴 그 어설픈 논문 초고를 바탕으로 어찌어찌 살을 붙여 논문을 완성하였고, 무사히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다. 김남주의 에세이를 읽는 내내 그때의 추억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20대 후반부터 30대, 40대를 살아오는 동안 번역은 내 밥벌이였다. 그러나 나는 줄곧 이 일을 내 삶의 징검다리 같은 것이라고 여겼다. 강 저편으로 가기 위해 딛고 가는. 오랫동안 내 시선은 내가 딛고 있는 그 징검다리가 아니라 내가 당도해야 할 강 저편 기슭에 고정되어 있었다고 고백한다. 문화와 정신을 전달한다는 감동과 자부는 대개는 무능과 게으름과 악조건 속에서 사그라들고, 표현과 내용의 좌충우돌 속에서 많은 밤들을 새웠다. 저울의 한쪽에 착실히 말들을 올려 놓으며 한 권의 번역을 마치고 나면 머릿속 말들이 모두 빠져나간 듯 일상적인 대화조차 더듬고 버벅대고 순서를 바꾸기 일쑤였다."  (P.9 '첫 책을 내면서' 중에서)


사실 이 책은 번역가가 쓴 리뷰에 가깝지만 작가의 삶이 책 속에 녹아있다는 점에서 에세이가 아닐 수 없다. 서두에 말했던 것처럼 전문 번역가가 지닌 지식과 일반 독자인 내가 소유한 지식 사이의 가늠할 수 없는 차이 때문에 이따금 어려운 문장에 갇혀 같은 문장을 여러 번 반복하여 읽기도 했지만, 번역가의 수고에 비하면 그와 같은 수고를 수고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수준이 아닌가. 오늘은 금요일, 나는 책에서 빼곡히 옮겨 적은 도서 목록을 뿌듯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다. 내일이면 나는 그 목록을 들고 가까운 도서관에 들러 가능한 범위에서 많은 책을 대출하여 기쁜 마음으로 돌아올지도 모르겠다. 기한 내에 다 읽지도 못하면서 잔뜩 욕심을 부릴지도 모를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박찬원의 두근두근 - 동물수상록
박찬원 지음 / 라의눈 / 202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든 예술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닌 무엇을 제외할 것인가로 귀결된다. 예컨대 음악은 이 세상의 많은 소리 중 어떤 소리를 제외할 것인가로 귀결되며, 사진이나 미술은 우리 시야에 들어오는 시시콜콜한 풍경 가운데 어떤 것들을 지울 것인가로 귀결되며, 문학은 주인공과 관계를 맺고 있는 많은 사람들 중 어떤 사람을 제외할 것인가로 귀결된다. 마찬가지로 글쓰기에서 퇴고 작업이 어려운 까닭은 문장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삭제하는 게 실생활에서 익숙한 습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본디 더 많은 것을 갖기 위한 노력은 게을리하지 않지만, 자신이 이미 갖고 있는 것 중 불필요한 것을 버리거나 너무 많이 소유한 것을 덜어내는 데에는 전혀 훈련이 되어 있지 않았음이다.


우리에게 '동물사진작가'로 잘 알려진 박찬원의 사진 에세이 <박찬원의 두근두근>에 실린 작가의 흑백사진을 보면서 그도 역시 렌즈 속에 놓인 피사체의 어떤 부분을 지울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 무척이나 많은 고민을 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가 찍은 동물들은 말, 젖소, 돼지처럼 가축화되어 인간과 가까운 동물들도 있지만, 하루살이나 나비처럼 다소 하찮게 여길 수도 있는 곤충에 이르기까지 꽤나 다양하다.


"이 책은 동물에 대한 수상록이고, 한 주제에 100일 촬영 원칙을 정했다. 한 동물마다 약 3년 걸렸다. 실제 사진 찍는 시간은 얼마 안 된다. 동물을 관찰하고 생각하는 시간이 대부분이다. 동물에 대한 생각이었는데 나에 대한 생각으로 돌아온다. 동물에서 인간을 본다. 아니 나를 본다."  (p.4 '프롤로그' 중에서)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쯤 도올 김용옥 선생의 딸인 김미루 씨가 돼지우리에서 100시간 넘게 돼지들과 함께 지내며 '돼지우리 누드 퍼포먼스'를 펼친 적 있다. 뉴욕에서 사진작가 겸 행위예술가로 활동하고 있는 김미루 씨의 당시 사진은 국내 언론을 통해 크게 보도되었고, 가려지지 않은 젊은 여인의 신체와 오물이 묻은 돼지들의 모습과의 어우러짐은 보는 이들에게 다소 충격으로 다가왔었다. 물론 자연에서 돼지는 절대 더러운 동물이 아니고, 인간이 인위적으로 사육하면서 그렇게 되었다는 사실을 비판하고자 했다는 김미루 작가의 설명이 있었지만, 김미루 작가의 사진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였던 일반인들의 관점에서 작가의 설명은 크게 납득이 되지는 못했다.


"돼지는 불쌍하고 슬픈 동물이다. 태어나서 한 번도 밖에 나가 놀지 못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을 기회도 없다. 친구를 사귀거나 연애도 못 한다. 돼지의 일생은 먹고 자고 자라서 도축장으로 가는 것이다. 짧게 살고 사회생활을 하지 않으니 돼지는 죄를 지을 겨를이 없다. 깨끗하고 신성하다."  (p.10)


박찬원 작가는 이 책에서 01. '동물과 인간, 02 '생명의 의미', 03 '동물의 언어', 04 '동물나라 풍경'의 주제로 그가 관찰했던 피사체에 대한 깊은 사유와 그 사유를 통해 건져낸 사진들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인식의 틀을 세울 것을 권고한다. 예술 전문 잡지 QUESTION의 사진문학 코너에 2022년 7월부터 2023년 6월까지 '동물 사진가 박찬원의 두근두근'이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글과 사진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는 <박찬원의 두근두근>은 작가의 정제된 글과 렌즈에 포착된 압축된 사진만으로도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게다가 동물에 대한 관찰과 교감을 통하여 작가의 사유는 생명에 대한 경외로 확장되고,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철학적 사유에까지 이르게 된다.


"새벽에 나가 보니 젖소가 죽어 있다. 목을 뒤로 꼰 채 코를 땅에 박고 눈은 반쯤 뜨고 있다. 밤사이 안락사시켰다. 물통이 넘어져 있다. 물을 마시려다 힘이 없어 고개를 들지 못하고 물통을 쓰러트렸나 보다. 뒤에는 오줌을 싼 듯 물 자국이 흥건하다. 고개 숙여 명복을 빈다."  (p.175)


동물의 삶과 죽음에 대한 작가의 관찰은 작가 본인의 엄마에 대한 기억으로 이어진다. 모든 것을 다 주고도 늘 미안해하던 엄마는 이제 이 세상에 없다.


어제의 메말랐던 기억을 지우려는 듯 지금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다. 소리도 없이 내리는 비가 세상의 빛을 지우고, 소리를 지우고, 어렴풋하던 형체마저 지우고 있다. 흐릿하게 변한 세상 너머로 잊었던 봄의 기억이 되살아나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흘러가는 것엔 언제나 애틋함이 묻어납니다. 흘러가는 세월, 흘러가는 강물, 흘러가는 구름, 흘러가는 이야기, 그리고... 흘러가는 모든 것에 대한 애틋함은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불가역성에 있습니다. 지금의 나는 과거 청소년기의 나나 청년기의 나와 한 몸이지만 엄연히 다른 존재, 그러나 세월을 거슬러 지금의 내가 청년기의 나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영원히 오지 않습니다. 강물 위에 떠가던 지난가을의 단풍잎을 그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와 같은 애틋함을 잊어버리거나 순간순간 지우기 위해 우리는 파편화된 시간을 살아가곤 합니다. 에크하르트 톨레와 같은 선지자는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흘러간 거리가 멀면 멀수록 흘러가는 것에 대한 애틋한 감정은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속절없이 떠밀려가는 그 과정이 서글프고 애틋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3.15 의거 기념일입니다. 1960년 3월 15일 마산에서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민.학생의 평화적 시위가 있었고, 시위대를 강제 해산시키려는 경찰에 맞서 격렬한 투석전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소위 '마산 데모 사건'이었습니다. 당시에 경찰의 무차별 발포와 체포.구금으로 희생자가 속출하자 이에 맞서 저항했던 시위대 중 8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던 바, 당시 시위에 참가했던 17세의 마산상고 신입생 김주열 열사는 행방불명되었다가 27일이 지난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왼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처참한 모습으로 발견되었던 것입니다. 4.19 의거의 도화선이 되었던 이 사건과 많은 이들의 희생으로 인해 결국 이승만 독재정권이 붕괴되었습니다만, 희생자들에 대한 감사와 추모의 마음은 해가 갈수록 약해지는 듯합니다.


캐나다 작가 에밀리 세인트존 맨델이 쓴 <고요의 바다에서>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등장합니다.

"그것이 현실 아닐까? 우리 대부분은 상당히 비(非)클라이맥스적인 방식으로 죽지 않을까? 우리가 떠났다는 사실이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눈에 띄지 않고, 우리의 죽음은 주변 사람들의 서사에서 하나의 플롯 포인트가 될 뿐인 것 아닐까?"  (p.143)


흘러가는 것엔 언제나 속절없는 안타까움과 애틋함이 묻어납니다. 출발점으로부터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애틋함의 강도는 더욱 높아져 삶의 마지막에 이르러서 최고점에 도달하겠지만, 우리는 여전히 '지금 이 순간을 살라'는 말에 현혹되어 조각조각 파편화된 시간을 바쁘게 살아가면서 그 애틋함을 못 본 체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또는 그 애틋함을 일부러 회피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흘러가는 것엔 언제나 애틋함이 존재합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잉크냄새 2026-03-15 2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흘러가는 것, 하면 서유석의 <가는 세월>이 그냥 떠오르네요.

꼼쥐 2026-03-18 14:53   좋아요 0 | URL
저도 그 노래는 왠지 익숙합니다.
 
고요하고 단단하게, 법정의 말 - 내려놓음의 마음 공부 고요하고 단단하게
권민수 엮음 / 리텍콘텐츠 / 202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법정스님이 입적하신 지 벌써 16년이 흘렀다. 2010년 3월 11일의 느낌을 나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내가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나는 스님의 말씀이 담긴 여러 저서를 읽으며 청소년기를 보냈었고, 언론을 통해 접하는 스님의 소식을 가까운 이의 근황인 양 귀를 쫑긋 세운 채 듣곤 했었던 나로서는 텔레비전을 통해 접했던 그날의 소식을 믿을 수가 없었다. 충격이 컸던 탓인지 나는 한동안 가슴이 텅 빈 듯한 허전함으로 인해 매사에 의욕이 떨어졌었다. 그때 우연히 읽었던 책이 <법정 스님의 내가 사랑한 책들>이었다. 덕분에 나는 스님이 추천한 책 50권 대부분을 읽을 수 있었다. 허전함을 달래기 위한 목적이 더 컸었지만 책의 권수가 더해질수록 스님의 뜻이 새록새록 전해지는 듯했다. 스님이 아니었더라면 결코 알지 못했을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 예찬>이나 쓰지 신이치의 <슬로 라이프>, 아베 피에르의 <단순한 기쁨>, 존 프란시스의 <아름다운 지구인 플래닛 워커> 등 뻐근한 감동과 교훈으로 남았던 여러 책들이 스님의 말씀처럼 가슴을 채웠다. 물론 나의 지식이 부족하여 이해가 어려웠던 책들도 더러 있었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가 쓴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나 에크하르트 톨레의 <NOW-행성의 미래를 상상하는 사람들에게>와 같은 책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스님의 추천 도서 대부분이 나의 인생책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지금도 나는 스님의 추천 도서를 기회가 될 때마다 꺼내 읽곤 한다.


역사 콘텐츠 전문 작가 권민수가 엮은 <고요하고 단단하게, 법정의 말>을 읽었던 것도 어쩌면 그 연장선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PART 1 '나는 어떻게 가벼워질 수 있을까? - 비움과 자유', PART 2 '불안은 왜 자꾸 올라올까? -두려움과 신뢰', PART 3 '일은 삶을 어떻게 바꿀까? - 일.돈.시간', PART 4 '관계는 왜 어려울까? - 가족.사랑.갈등', PART 5 '슬픔은 어떻게 치유될까? - 상실.병.죽음', PART 6 '자연은 왜 스승일까? - 숲.바람.침묵', PART 7 '어떻게 계속 걸을까? - 단련과 실천' 등 총 7부로 구성된 이 책은 우리에게 도움이 될 만한 스님의 말씀을 단순히 옮겨 적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이를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녹여내고 실천할 것인가를 묻게 하는 잠언집의 성격을 띠고 있다.


"법정의 말은 읽을 때는 아름답지만 삶으로 옮기지 않으면 금세 잊히기 쉽습니다. 우리는 멋진 문장을 읽는 데 익숙하지만, 그 문장대로 살아내는 데는 서툽니다. 그래서 이 책은 법정 스님의 단순 저서 문장에만 기대지 않고, 대표 저서들뿐 아니라 강연집과 법문 기록, 정기 법회에서 실제로 건넨 말씀, 여러 자리에서 회자되어 온 핵심 문장들까지 폭넓게 엮어, '법정의 말'을 하나의 총체적인 흐름으로 만날 수 있도록 구성했습니다."  (p.8 '프롤로그' 중에서)


내가 스님의 추천 도서를 읽으면서 느꼈던 스님의 중심 생각은 생명 존중과 공생이었다. 스님은 우리들 각자가 그 생각을 중심에 두고 어떻게 하면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가꾸어 갈 수 있을까를 궁리하셨던 듯하다. 수도자로서 생명을 귀히 여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하겠지만 모든 생명체가 더불어 잘 살 수 있도록 궁리하고 연구하는 학자와 사상가와 사회운동가마저 떠받들고 우리와 같은 장삼이사에게 그들의 사상을 이해시키려 노력했다는 점에서 스님의 특별한 면모를 살필 수 있었다. 권민수 작가 역시 스님의 말씀을 우리들 삶에서 녹여내려 했다는 점에서 스님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는 듯하다.


081 오늘을 선택하는 연습

"나누는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마십시오. 내일은 기약할 수 없습니다. 내가 그곳에 있지 않을 수도 있고, 내 마음이 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 지금 이 순간에 해야 합니다."  (P.108)


세상이 갈수록 험악해지는 까닭은 가진 자의 욕심이 끝도 없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대인과 작금의 정치 세력은 그들의 욕심을 펼칠 자유를 무한대로 허용하는 게 미덕인 양 포장하고 있다. 스님을 비롯한 옛 지성인들이 주장하던 '공생'은 이제 잊힌 단어가 되고 말았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함께 잘살자는 생각이 우리 인간끼리라도 함께 잘살자는 생각으로 쪼그라들더니 이제는 숫제 그마저도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각자도생의 길을 걷고 있는 현실 속에서 개인의 불안은 가중될 수밖에 없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듯하다. 그러나 파편화된 개인이 서로 손을 내밀면 또 다른 어느 누가 내게 손을 내밀지 않을까? 인간 내면의 순수 감정을 건드리면 누군가의 목소리가 내 목소리에 응답하지 않을까? 인간은 본디 그렇게 태어나고 그렇게 자라왔으니까 말이다.


241 관심이라는 이름의 간섭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는 그 자신의 방식으로 그 자신의 삶을 살아갈 권리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만의 편의나 이익을 위해 남을 간섭하고 통제하고 지배해서는 안 된다."  (P.274)


생명이 되살아나는 이 계절에 지구 한편에서는 생명을 죽이는 일이 날마다 자행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악행에 대한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함께 잘 사는 방법을 모색하기보다는 타인의 생명과 재산을 빼앗아 나만 잘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가득하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는 까닭에 그들 역시 제 수명을 다하면 지구상에서 사라지겠지만, 그들이 치러야 할 죄업은 사후에도 계속하여 청구되지 않을까? 살아 있는 동안 우리가 이웃을 사랑으로 돌보아야 하는 이유는 역사의 단죄가 더욱 가혹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남쪽으로부터 봄을 알리는 꽃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어느덧 봄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침 산행길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마치 단골식당의 주인아주머니와의 관계만큼이나 뭐라 한마디로 규정지을 수 없는 애매한 측면이 있다 하겠습니다. 오랫동안 자주 만나던 사이이니만큼 가깝고 익숙하지만 서로 사는 곳도, 이름도 알지 못하는(알려고도 하지 않는) 까닭에 언제든 관계를 좁힐 수 있는 여지만 남겨둔 채로 기존의 관계를 무한정 연장하는 그런 사이라고나 할까요. 매일 새벽 남들이 다 잠에 취해 있는 시각에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산에 올라 늘 마주치는 장소에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때로는 짧은 덕담을 건네기도 하고, 일 년에 한두 번쯤 넋두리 삼아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기도 하면서 불편하지 않은 관계를 수 년째 이어오고는 있지만 서로의 이름도, 연락처도, 사는 곳도 모른 채 지내왔던 것입니다.


내가 요즘도 매일 아침 오르는 아파트 뒤편의 야산에서 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또 많은 사람들과 악수조차 없이 헤어졌습니다.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2년쯤 전에 욕쟁이 할머니가 등산로에서 사라지더니 네댓 달 전쯤에는 언제나 말을 곱게 하시던 소녀 할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난달 중순께부터는 멋쟁이 할아버지마저 나타나지 않으십니다. 겨우내 추위 속에서도 서로를 격려하며 거르지 않고 산에 오를 수 있도록 힘을 북돋워주던 분이셨는데... 1940년생이라고 하셨던 멋쟁이 할아버지는 얼마 전에 올린 나의 블로그 포스팅에서도 언급이 있었지만 지난해 여름까지만 하더라도 정정하셨는데 언제부턴가 한 손에 지팡이를 짚으신 채 나타나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운동에 열심이셨는데, 이제는 숫제 나타나지 않으시는 걸 보면서 나는 운동을 마치고 산을 내려오는 순간까지 이상한 상상에 빠지곤 합니다. '그렇지 않을 거야. 갑자기 이사를 가게 된 것일 테지.' 나는 애써 그런 생각을 하며 나쁜 생각을 떨쳐내곤 합니다.


나는 요즘 내가 좋아하는 작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 <이야기를 들려줘요(Tell Me Everything)>를 읽고 있습니다.


"내 요점은, 이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아주 복잡하다는 거예요. 밥, 우리는 모두 아주 복잡하고, 우리가 누군가와 한 순간이라도 - 어쩌면 평생 - 같이 한다는 건 우리가 그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연결되어 있어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연결되어 있지 않죠. 왜냐하면 누구도 다른 사람의 마음속 깊은 틈으로는 들어갈 수 없으니까요. 심지어 그 사람 자신도 자기 마음의 깊은 틈으로는 들어가지 못해요. 하지만 우리는 - 우리 모두는 - 그럴 수 있는 것처럼 살아가요. 그리고 난 그걸 존중해요, 밥. 정말로 존중해요. 하지만 우리 누구도 단단한 땅에 서 있지 않아요. 우리는 그저 우리가 그렇다고 스스로 말할 뿐이에요. 그리고 그래야 하고요. 나는 그걸 알 것 같고, 앞서 말했듯 존중해요. 나는 단지......" 그러고는 말을 멈추고 그를 쳐다보았는데,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p.306~p.307)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속 깊은 틈으로는 들어갈 수 없지만, 그럴 수 있는 것처럼 살아가는가 하면 우리는 단단한 땅에 서 있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스스로 말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며칠 미세먼지로 탁하던 대기는 다시 깨끗해졌습니다. 열흘을 넘겨 계속되고 있는 중동 지역의 전쟁은 지금도 포화가 그치지 않고 이어지는가 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것은 물론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잃고 있는데 그들을 조롱하고 아무일 아니라는 듯 지껄이는 미친 작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자들을 일러 '악마' 또는 '사탄'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고, 누군가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트리는 순간 그 절망의 화살이 복수의 칼날이 되어 나에게 향한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말입니다. 우리에게는 달콤한 휴식이 주어질 테지만 전쟁의 포화 속에 있는 그들은 불안과 공포 속에서 밤잠을 설칠 테지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