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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
진은영 지음 / 마음산책 / 2024년 9월
평점 :
코끝이 찡한 추위가 가슴속까지 얼얼하게 하는 아침. 거실 문을 열자 베란다 창문을 통해 쏟아지던 겨울 햇살이 냉랭한 한기와 함께 부엌 입구까지 짓쳐들었다. 온전한 느낌이란 언제나 한 발 늦게 도착하는 법, 나는 잠옷 위에 패딩 조끼를 껴입고 베란다로 나섰다. 아파트의 동과 동 사이 주차장에는 녹지 않은 눈이 여전히 주차된 차량 위에 소복이 쌓여 있고, 이른 외출이 불만인 어린아이의 뻗대는 소리가 휴일 아침을 깨우고 있었다. 잠자리가 편하지 않았는지 뒷목이 뻐근했다. 나는 속절없이 푸른 하늘을 향해 긴 숨을 토해냈다. 하얀 입김이 방충망 틈새를 빠져나가는 동안 문득 들었던 생각, '아, 책을 읽어야지.' 하는 강박이 편집증 환자처럼 나의 뇌를 흔들었다.
"내가 다 기억할 수 없는, 죽고만 싶었던 숱한 순간에 나를 살린 누군가의 문장들이 있었을 것이다. 고통의 순간도 회복의 과정도 전부 잊었지만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나는 지금 여기에 살아 있다. 나는 위대한 책들을 읽고서 혁명을 일으키지도 못했고 인류를 구원하지도 못했다. 어쩌면 나처럼 평범한 대부분의 독자에게 독서란 위대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p.8 '책머리에' 중에서)
진은영 시인의 산문집 <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은 그렇게 자기 고백적인 시인의 넋두리로 시작된다. 많은 책을 읽었고, 지금도 늘 무언가를 읽고 있지만 삶이 바뀌기는커녕 읽었던 책의 제목마저 기억나지 않을 때가 많다고 하소연하는 시인. 책에 대해서만 논하자면 나의 삶도 시인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무언가 열심히 읽고 기록하지만 크게 달라지는 건 없었고, 하루의 지난 삶에 또 하루를 더하는 기계적인 일상이 지겹도록 이어져 왔다. 그리고 죽고만 싶었던 어떤 순간을 견디게 했던 것이 있다면 끝없이 읽고 쓰는 무용한 행동 덕분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무엇을 꿈꾸며 싸우든 그 꿈을 이루는 일은 어렵다. 조금 전진한 기분이었는데 도로 제자리라는 걸 깨닫게 된다. 인간은 실패하려고 태어난 '훼손된 피조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카뮈 덕분에, 우리는 어려운 싸움을 계속 이어가는 이들을 어리석다고 말하는 대신 위대한 용기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우리가 진정 사랑하는 이들은 승리하는 이들이 아니라 진실과 인간적 품위를 지키기 위해 어쩌면 패배할지도 모를 싸움을 시작하는 이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p.143)
시인의 독서일기와도 같은 이 책에서 시인이 열거하는 작가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카프카, 버지니아 울프, 한나 아렌트, 모르스 블랑쇼, 바흐만, 실비아 플라스, 카뮈, 시몬 베유, 바슐라르, 존 버거, 앤 카슨, 릴케... 한동안 책에 빠져 살다 보면 내가 책이나 작가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책이 나를 지목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말하자면 독자의 취향이나 성향이 어떤 작가에 의해 지배되고, 그것이 결국 생각지도 않았던 책을 선택하도록 이끌었다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시인 역시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독서에 대한 취향이나 성향이 자신이 좋아하는 한 작가에 의해 시나브로 굳어지게 되는 체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터, 따지고 보면 지금의 시인을 만든 것도 결국 시인이 읽었던 책이 아닐까 싶다.
"2022년 우리가 거리에서 많은 젊은이를 잃고서 치러야 했던 사회적 제의가 공허하게 느껴지는 것은 이 핵심이 전부 생략되어 있기 때문이다. 위패도 사진도 없는 분향소에서 고인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하지 못하고 듣지 못한 채 누군지도 모르는 고인을 애도하고 추모했다. 세상을 떠난 당신이 누구였는지 알고 기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바로 그 제의에서 말이다." (p.188~p.189)
이 책에서 시인은 자신이 사랑하는 작가들의 책을 통하여 그 속에 깃든 삶의 의미를 살피고 사람을 살아가게 하는 문학의 힘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삶에서 겪는 어떤 위기의 순간에도 자신과 같은 상황에 놓였던 문학 작품 속 어느 주인공의 이야기를 떠올릴 수만 있다면 스스로 삶을 포기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는, 이른바 문학의 유용성이랄까 독서의 힘이랄까 하는 문제를 반복하여 되새긴다. 우리의 삶은 어쩌면 정작 삶에서 꼭 필요하다고 느껴지지도 않는, 팔 할의 딴짓으로 구성되는지도 모른다.
한낮이 되어서도 기온은 크게 오르지 않았다. 시인의 산문집 한 권을 반나절 만에 뚝딱 읽어치운 나는 며칠 지나지 않아 책의 제목마저 아득해질 것임을 잘 알고 있다. 나의 독서는 이렇게 무심하다. 그럼에도 나는 짬이 날 때마다 책을 읽고 문장이나 내용을 곱씹고 음미할 만한 시간도 갖지 못한 채 서둘러 잊곤 한다. 나의 기억 어딘가에 두어 줄의 문장쯤 남아 있겠지, 하는 믿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