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당탕탕 독일여자 명상기 - 명상과 마음 경영이 내 삶을 바꾸기까지
오선우 지음 / 보민출판사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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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에는 언제나 한아름의 슬픔과 아쉬움이 남는다. 영원한 이별이건 잠깐 동안의 이별이건 이별의 감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우리는 '세월이 약'이라는 말을 주문(呪文)처럼 외며 쓸쓸한 날들을 견딘다. 오선우 작가의 에세이 <우당탕탕 독일여자 명상기>는 시종일관 유쾌한 문체로 이어지지만 사실 그 많은 맑음 속에는 언뜻언뜻 흐림의 글자들이 어른거린다. 아무리 성격이 좋고 유쾌한 사람일지라도 타고난 성격이 그러할 뿐 삶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살다 갈 수는 없는 일, 우리의 삶에는 언제나 저마다의 무늬처럼 제각각의 아픔이 똬리를 틀고 앉아 있게 마련이다. 대학을 마치고 20대 중반에 독일로 떠났던 작가는 40대 후반이 되어 귀국한다. 실은 3주간의 휴가를 가족과 함께 보낼 요량으로 귀국한 것이었지만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한때 모델로도 활동했던 예쁜 동생에게 암이라는 중병이 찾아온 것이다.


""엄마, 내가 가도 나 때문에 울지 마셔, 난 뒤도 안 돌아보고 갈 거야. 신나게 갈 거야. 난 하늘에 뜬 달이 꼭 눈 같아. 내가 엄마를 하늘에서 보며 늘 보호해 줄게. 엄마 고마워." 그것이 동생의 마지막 인사일 줄은 엄마도 몰랐다. 그렇게 너무 어이없게 동생이 가버렸다. 암 투병 5년을 넘겨 가족들이 모두 한숨 놓은 상태였다. 어제까지 말하고 함께 웃던 동생이 없다. 갈 것을 알고 있었는지 다음날, 동생이 주문한 옷이 택배로 도착했다. 검은색의 상하의로 한 벌이다. 동생에게 그 옷을 입혀 보냈다."  (p.22)


안 좋은 일은 한꺼번에 온다고 했던가, 동생이 떠나고 5개월 만에 아빠도 떠나셨다. 이젠 낯선 곳이 되어버린 대한민국으로 한순간에 공간 이동을 한 작가는 몸과 마음이 폐허가 된 채로 하루하루를 견뎌야 했고, 이것이 힘들어 독일로 떠나려던 작가를 다시 눌러 앉힌 건 "너까지 가면 어떡하니..."라는 엄마의 한마디였다. 그리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시작한 것이 명상이었다.


"이젠 일상 속 마음 경영을 통해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을, 욕망을 타인 보듯 객관적으로 흥미롭게 바라보는 연습을 한다. 화나는 내가 그 화에 휘둘리지 않고, 그 화나는 나를 지켜보는 것이다. 흥미롭게 나를 바라볼 때 여유롭게 대응해 가는 나를 만난다. 스톱! 하고 멈추면 습관적으로 내려던 짜증과 불만을 다룰 수가 있게 된다. 이건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를 이해하는 일이었고, 무의식 속에서 올라오는 익숙한 반응들과 패턴들은 나도 모르게 실행되는 자동 재생 목록 같은 거였다."  (p.106)


나를 포함하여 내 주변의 모든 생명체는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치솟는 화를 어찌하지 못한다. 나의 뜻에 반한다는 것, 나의 의견과 다르다는 건 언제나 화를 유발한다. 나의 의도와 다르게 행동한다는 이유로 내가 화를 내는 것처럼 상대방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부딪히면서 작디작았던 화는 증폭되고 확대된다. 이 세상은 마치 저마다가 배출하는 화의 쓰레기장으로 변하고 마는 것이다. 결국 세상이 온전하게 굴러가게 하려면 누군가는 화를 멈추어야 한다. 배턴 터치를 하듯 건네받은 화를 다음 주자에게 넘겨주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화를 내는 자신을 보면서 '그럴 수 있어' 하고 쿨하게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명상이다. 나의 마음을 들여다 보고 그것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나를 올바르게 파악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법이다. 오선우 작가의 <우당탕탕 독일여자 명상기>는 명상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던 작가 자신의 경험을 솔직하게 쓴 책인 동시에 자신처럼 위기에 처한 다른 누군가를 살리기 위한 마음 처방전이기도 하다.


"생각해 보면, 삶이란 게 유독 나만 힘든 것도 아닌데, 그때는 참 사는 게 버거웠습니다. 곰곰이 나를, 그리고 내가 살아온 방식을 보니 감정이 나를 불태웠고, 냉랭하게 했으며, 가끔은 이 삶에서 사라지고 싶은 마음을 만들었음을 알았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불쑥 올라오는, 또는 욱하고 올라오는 그 감정에 묶여 이리저리 끌려다니다, 관계가 끝이 나 버렸고,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고, 천 년 동안 빛이 비추지 않았을 것 같은 어두운 동굴에 혼자 있는 것처럼 절망스러웠을 때, 그때 명상과 마음 경영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p.120~p.121)


명상은 타인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동시에 소원하던 나 자신과의 관계도 나아지게 한다. 자신에게 한없이 엄격하던 사람이 '뭐, 그럴 수도 있지' 하고 적당히 눙치고 넘어갈 수만 있다면 타인과의 관계 역시 좋아질 것은 분명하다. 짜증이나 화가 쌓이지 않는 까닭이다. 그렇게 변할 수 있는 첫걸음은 역시 나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이도 완벽하지 않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각자의 삶을 꾸려가기 위해 불완전한 나와 불완전한 당신이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메꾸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아야 한다. 또다시 찾아온 주말, 누군가로 인해 당신에게 내재되었던 화가 불끈 치솟는 일 없이 평온한 날들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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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그렇겠지만 나 역시 인생의 많은 굴곡을 겪으며 살아왔습니다. 실수도 많았고, 중요한 분기점에서 잘못된 판단으로 안 해도 될 고생을 사서 한 적도 있었습니다. 곰곰 되짚어 생각해 보면 그와 같은 판단의 이면에는 늘 개인의 욕심이 나 자신의 눈을 가렸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개인의 지나친 욕심은 판단을 흐리게 하고, 자신이 나아가야 할 길을 바르게 인도하지 못합니다.


요즘 친구들을 만나면 대화의 주제는 언제나 비슷합니다. 정년을 얼마 남기지 않다 보니 각자의 건강이나 은퇴 후의 계획 등이 주요 관심사가 됩니다. 때로는 정년이 없는 정치 쪽으로 기웃대는 친구도 있고, 사업이나 취업 쪽을 계획하는 친구도 있습니다. 이따금 지자체장 선거에 나서는 친구나 지인을 만날라치면 임명직 자리를 부탁하는 사람들도 더러 보게 됩니다. 젊은 사람들에게는 꽤나 부끄러운 일이지만, 지자체장이 임명하는 자리를 탐하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은 듯합니다. 그것은 여당이나 야당을 가리지 않고 비슷한 양태를 보입니다. 지자체장이 임명하는 자리가 생각보다 넓고 그 수가 많은 까닭에 나 하나쯤 부탁을 해도 크게 부담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까닭입니다. 지자체장이 이럴진대 대통령은 오죽하겠습니까. 여러 루트로 줄을 대고 인사청탁을 하는 사람들이 어디 한둘일까요.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최근 유시민 작가를 향해 막말을 쏟아냈던 오 모 씨만 하더라도 명예직인 청년재단 이사장직에 오르더니 연봉 3000만 원에 2년 임기인 캠코(한국자산관리공사) 비상임 이사에 더하여 금융발전위원회 위원으로 이름을 올려 세간의 놀라움을 자아낸 바 있습니다. 캠코나 금융발전위원회는 대개 금융이나 자산 전문가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의 금융 경력이라곤 수소차 기업 니콜라 주식에 투자하여 큰 손해를 본 것 외에는 딱히 없는 듯한데 그가 그런 자리를 꿰찼다는 건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유시민 작가가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크게 잘못된 말을 한 바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패륜에 가까운 막말을 쏟아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것도 벼슬이라고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까닭이겠지요. 나는 요즘 오선우 작가가 쓴 <우당탕탕 독일 여자 명상기>를 읽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어른으로 산다는 것이 나에겐 나에겐 너무나 버겁게만 느껴졌다. 난 누군가의 아내가 되기에도 또 엄마가 되기에도 너무나 부족한 철부지 같았다. 나중에 동생에게 들은 이야기지만, 우는 엄마를 달래기 위해 아빠가 옷 한 벌을 사주셨단다. 엄마는 그 이후에도 공항에서 매번 우셨다."  (p.51)


아침에 운동을 하기 위해 산에 올랐을 때, 1940년생인 멋쟁이 할아버지가 올해 80세인 소녀 할머니에게 오늘 데모하는 데 같이 가지 않겠냐며 은근히 같이 가주십사 부탁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선관위의 안일한 대처가 80이 넘은 할머니, 할아버지에게도 주요 관심사가 되는 걸 보면 우리나라에서 어른으로 산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실감나게 하였습니다. 유시민 작가에게 막말을 쏟아냈던 오 모 씨는 아직 나이가 어린 탓일까요 뒷일 걱정은 하지 않은 채 상스러운 말을 쏟아내더군요. 말은 마음의 창이자 본인 심성의 거울입니다. 그런 인성의 소유자가 민주당을 지킨다는 걸 생각하면 민주당도 생명을 다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소나기 예보가 있었는데 비는 여전히 내리지 않고 쨍한 햇살만 선명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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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승 - 목사, 택시 그리고 나
엘라임 손 지음 / 보민출판사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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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반드시 죽는다'는 대전제를 수용하면서 부조리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다음의 세 가지로 압축되는 듯하다. 죽음 자체를 외면하면서 관습대로 살아가는 것, 내세의 허구를 확신하면서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을 기다리는 것,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이 그것이다. 인간은 대체로 첫 번째 방법을 선택한다. 스스로 선택한다기보다 관습적으로 그렇게 살아간다. 개인의 삶에 큰 변화를 요구할 만큼의 특별한 사건이나 사고가 없다면 대부분의 인간은 그동안 유지했던 첫 번째 방법을 굳이 바꿔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인생의 어떤 사건으로 인해 죽음 가까이에 다가갔던 경험을 겪어본 사람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죽음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그와 같은 경험은 그동안 유지했던 가치관이나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흔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경험이 너무 어린 나이에 있었던 까닭에 변화시킬 가치관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의 내면에는 그 경험이 그림자처럼 남아 가치관의 정립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와 같은 사건, 사고를 경험한 이의 태도는 개인에 따라 크게 다른 방식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예컨대 예기치 못한 큰 교통사고를 당하여 죽음의 문턱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온 사람이 있다고 했을 때, 자신에게 남은 삶의 기간이 길지 않음을 인지한 그는 사고 이전의 안일하던 태도를 바꾸어 어떤 목표를 향해 치열하게 나아가거나 내세의 허구를 믿고 죽음으로부터의 구원에 강력하게 매달리기도 한다. 이와 같은 사례는 암과 같은 치명적인 질병의 확진 판정을 받았을 때도 비슷한 양상을 띤다. 드문 경우이기는 하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담담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럴 만한 용기와 배짱이 모든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1983년 늦여름, 나는 노숙자 신세가 되었다. 집에 가면 돈 받으러 온 사람들이 기다렸다. 친구들에게 부탁했지만, 사업 실패 소문은 KTX보다 빨랐다. "사장님, 사장님" 하며 반기던 사람들도 눈치를 봤다. 내 존재감이 아니라 돈의 힘이었다. 시골집도, 친구도, 내가 살던 집도 갈 곳이 되지 못했다. 버스비가 없어 걸었다. 돈을 벌어 멋지게 살고 싶었다. 효도하고 결혼하고 싶었다. 이제 그 가능성마저 보이지 않았다. 죽는 것이 자존심을 지키는 일이라 생각했다. 한강대교 난간에 섰다. 강물이 검게 흘렀다. 하지만 그마저도 용기가 필요했다. 나는 그 용기마저 없어 그냥 돌아섰다."  (p.22)


엘라임 손이 쓴 <환승> 역시 그 비슷한 경험을 적고 있다. 시카고 오헤어 공항에서 연결 편을 놓치고 방황할 때 저자는 자신의 지나온 삶을 떠올리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자판기라는 개념 자체가 낯설던 시절, 포클레인 인형 뽑기 자판기로 승승장구하던 저자는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날 번 돈을 그날 다 쓰면서 허송세월했던 대가로 모든 것을 잃고 한강대교에 서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서른도 되지 않았던 젊은 나이에 겪었던 혹독한 시련을 딛고 저자는 목회자의 길로 뛰어든다. 그것은 어쩌면 저자 자신의 선택이라기보다 운명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런 까닭에 41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설교단 위에 서 있었지만, 마음이 편했던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목회를 떠나던 날 새벽, 나는 혼자 차를 몰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수십 년 동안 강단에서 사람들의 방향을 가리켜 온 손이, 그날 새벽에는 핸들 위에서 떨렸다. 택시 핸들을 처음 잡던 날도 그랬다. 강단 대신 운전석, 성도 대신 낯선 승객. 나는 그 시간을 빨리 지나가고 싶었다. 고난이 유익이라는 걸 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오히려 그 고난 안에 제대로 머물지 않았다. 알고 있다는 착각이 경험을 막았다. 그녀가 "이제야 사람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고난을 흘려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강변 아파트가 사라지고, 사촌들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무너지는 그 자리에서, 그녀는 자신을 만났다. 소유로 가득했던 시절에는 보이지 않던 자기 자신이, 아무것도 없는 자리에서 비로소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70이 되어서야 그것을 몸으로 알았다. 강단에서 가르쳤던 그 말을, 운전석에서 처음으로 배웠다."  (p.191)


목회자로 섰던 시기에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지만, 아내의 유방암 판정과 함께 다시 원점에 선 저자. 강단을 떠난 저자는 미네랄을 팔기도 하고, 기독교방송 상담 일을 하는 등 프리랜서 생활을 하며 겨우 생계를 유지하다가 지금은 택시 운전자로 살고 있다고 한다. 택시 운전석에 앉아 처음 접하는 손님과의 짧은 대화와 침묵 속에서 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삶의 의미와 가치를 배운다. 실패냐 성공이냐를 가늠하기보다 지금 이 시간에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하는 문제는 실존에 가깝다. 실존은 다만 하나의 현상에 지나지 않을 뿐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기준이 되지는 않는다.


"다섯 번 환승했다. 환승할 때마다 잃었다. 직함도, 수입도, 시선도. 그런데 잃을 때마다 가벼워졌다. 처음에는 그 가벼움이 두려웠다.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그 가벼움이 나를 여기까지 데려왔다는 것을. 손에 쥔 것을 놓을 때마다, 손이 아닌 내가 보였다. 빈손이 나의 철학이 되었다."  (p.206)


삶은 우리로 하여금 언제나 변화를 요구한다. 좋든 싫든 우리는 그것에 따를 수밖에 없다.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무난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정말 기적에 가까운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단 하나 명심할 것은 누구나 겪는 크고 작은 삶의 변화에서 자신이 지향하는 삶의 방향을 결코 잃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방향을 잃고 헤매는 순간 아주 오랜 시간을 허비한 후 다시 원점으로 돌아오기도 하지만, 자신의 삶을 통째로 날려버리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라고 썼던 어느 책의 제목처럼 인생의 방향만 잃지 않으면 기회는 언제든 다시 오게 마련이다. 그러나 우리가 인생의 방향을 잃었을 때, 그것은 어쩌면 삶의 모든 것을 삼켜버릴 수도 있다. 우리가 삶의 방향을 잃는 가장 큰 원인은 바로 개개인의 욕심이다. 욕심은 한 사람의 눈을 멀게 하고 인생의 방향마저 잃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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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무료한 손길이 슬쩍 닿기만 해도 휘청 중심을 잃고 쓰러질 것만 같은 주말의 오후. 일주일 동안의 누적된 피로가 어깨를 짓누릅니다. 지방선거가 있었던 수요일 하루를 쉬었는데도 체감하는 피로는 여느 주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바삭바삭하던 햇살이 숨이 턱턱 막히는 한여름의 수증기 속으로 서서히 가라앉고 있는 탓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름 한낮의 시간은 길고 미끈한 자신의 몸매를 한껏 뽐내려는 듯 유영하듯  아주 천천히 지나갑니다. 나처럼 성마른 인간은 그 흩어짐의 틈새도 진득하게 기다리거나  바라볼 수 없어 늘어지게 하품을 하면서 졸린 눈을 끔벅거릴 뿐입니다.


2026년의 시간이 은근슬쩍 6월로 접어들었을 때 사람들은 다들 아직 오지도 않은 여름휴가를 기다리면서 미래의 시간에만 집중하느라 자신도 모르게 훌쩍 지나버린, 이미 과거가 되어버린 시간에 미처 관심을 두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숨을 헐떡이며 미래를 좇아 헤매다가 2026년의 끝이 보이는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한숨을 쉬며 후회를 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벌써 6월입니다. 나는 내게 할당된 임무를 완수하느라 내가 가진 체력을 지나치게 소진했는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나는 5개월 1주의 분량보다 더 무거운 피로를 체감하며 주말에 있을지도 모르는 달콤한 휴식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알베르 카뮈의 에세이집 <결혼.여름>(녹색광선)을 읽고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사랑 자체를 회피하기 위해 삶을 사랑하는 체한다. 즐기려고 노력하고, '경험을 쌓으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것은 고매한 정신의 관점이다. 쾌락주의자가 되려면 흔치 않은 자질이 있어야만 한다. 인간의 삶은 고매한 정신의 도움 없이 후퇴와 전진을 반복하면서, 고독과 동시에 존재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완성된다. 일을 해서 아내와 자식들을 부양하면서 대개는 아무 불평 없는 저 벨쿠르 사람들을 보노라면, 슬그머니 부끄러운 기분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분명 내가 착각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삶들엔 사랑이 많지 않다. 아니, 이제 더는 사랑이 많지 않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삶들은 적어도 아무것도 회피하지 않았다. 내가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이 있는데 가령 죄란 단어가 그렇다. 그럼에도 나는 그 사람들이 삶을 거스르는 죄를 짓지 않았다는 것을 알 것 같다. 왜냐하면 삶을 거스르는 죄라는 건, 아마도 삶에 몹시 절망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다른 삶을 바라고 현생의 준엄한 위대함을 회피하는 것일 테니 말이다. 그 사람들은 속임수를 쓰지 않았다. 그들은 여름의 신들이다. 스무 살의 그들은 삶에 대한 열정으로 여름의 신이었고, 모든 희망을 잃은 지금도 여전히 여름의 신이다. 나는 그들 중 두 사람이 죽는 것을 보았다. 그 두 사람은 공포로 가득 찼지만 말이 없었다. 차라리 그편이 낫다. 인류의 죄악이 우글거리는 판도라의 상자에서 그리스인들은 모든 악을 쏟아낸 후 그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악인 희망을 꺼내 들었다. 나는 이보다 더 감동적인 상징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희망은 통념과 달리, 체념과 동격이기 때문이다. 산다는 것은 스스로 체념하지 않는 것이다."  (P.54~P.55)


'희망은 체념과 동격'이라는 알베르 카뮈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예전에 나는 블로그 포스팅 한 귀퉁이에 '희망은 생명이 유한한 인간의 조급함'이라고 쓴 적이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이 무한하다면 인간이 바라는 바는 아예 없거나 현저히 줄어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른한 시간의 경과를 무한대로 흘려보낸들 영생을 누리는 인간에게는 전혀 해가 되지 않는다는 건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생명이 유한한, 체념과 조급함만 가슴에 품고 있는 서글픈 존재입니다. 6월의 첫 주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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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알베르 카뮈 지음, 최정수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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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철학적인 문제이지만 인간은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합리적인가? 경제학을 전공했던 나로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경제학의 이론 전반에서 내세우고 있는 이 전제를 실생활에서는 전혀 납득하지 못할 때가 많다. 예컨대 같은 물건일지라도 나와 가까운 사람이 판매한다는 이유로 더 비싼 가격을 지불하면서 물건을 구매하기도 하고, 더 비싼 가격을 제시한 인테리어 업자에게 공사를 맡기기도 한다. 단지 친하다는 이유로 말이다. 이처럼 인간은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판단을 내리는 경우가 다반사이고, 우리가 살아가는 삶도 부조리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예컨대 모든 인간은 결국 죽는다는 명확한 사실이 존재하지만 그 사실을 알면서도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의 삶을 꾸역꾸역 살아가는 것이다. 아직 도래하지는 않았지만 언젠가 닥칠 이 명징한 사실을 대부분의 인간은 구체적을 인식하거나 걱정하지는 않는다. 그 사실을 헤어진 연인의 얼굴처럼 이따금 떠올릴 뿐이다. 그러나 자신에게도 어떤 특별한 일이 닥치면 미래에 맞이할 그 사실이 확실한 현실로 각인될 수도 있다. <이방인>에 나오는 뫼르소처럼.


"옷을 갈아입었을 때 내가 검은 넥타이를 맨 것을 보고 마리가 깜짝 놀란 표정을 하고는 상중이냐고 물었다. 나는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말했다. 언제부터 상중인지 그녀가 알고 싶어 해서 나는 "어제부터"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약간 멈칫했지만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내 잘못이 아니라고 그녀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이미 사장에게 그 말을 했다는 것이 생각나서 그만두었다."  (p.35~p.36)


1부와 2부로 구성된 이 소설은 주인공인 뫼르소의 일상을 좇고 있지만, 독자는 그의 일상을 통해 언뜻언뜻 보이는 자신의 모습에 부끄러워하거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뫼르소의 행동에 분노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한 사람이 구축한 삶의 기억은 차곡차곡 쌓여만 간다. 쌓이는 기억들은 선악(善惡)이나 정오(正誤)와 같은 명확한 기준을 통해 선별적으로 이루어지지는 않고, 기억 역시 일상에서 부딪히는 삶의 부조리처럼 아무런 기준도 없이 무작위로 쌓이는 것이다. 양로원에 있던 어머니의 사망 소식을 전해 들었던 뫼르소는 크게 슬퍼하는 기색도 없이 무덤덤하게 장례를 치른 후 다시 일상으로 복귀한다. 같은 직장에 다녔던 여성 마리와 해수욕을 하고, 영화를 보고, 관계를 맺기도 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뫼르소와 그의 이웃들도 구질구질한 일상을 변함없이 이어가고 있다. 어떤 것 하나도 분명한 목적이나 이유도 없이 습관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손잡이의 볼록하고 매끈한 부분을 만졌다. 그때, 둔탁하고 귀를 먹먹하게 하는 소음과 함께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나는 땀과 태양을 제거했다. 내가 낮의 균형을, 행복해하던 해변의 예외적인 침묵을 깨뜨렸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하여 나는 움직임이 없는 시체 위에 네 발을 더 쏘았고, 총알들은 그럴 것 같지 않았는데 깊이 박혔다. 그것은 내가 불행의 문을 두드리는 네 번째의 짧은 노크 소리와도 같았다."  (p.97)


2부에서는 아랍인 살해 혐의로 체포된 뫼르소와 그의 행적과 태도가 주를 이루는 가운데 검사와 배심원은 살인이 있기 전 며칠 동안 보였던 뫼르소의 행적으로 볼 때 그는 사회적 통념과 동떨어진 사회 부적응자로 판단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뫼르소는 그가 주장했듯 햇볕이 눈부시고 머리가 아파서 행한 우연한 살인이 아닌, 계획적 살인을 저질렀다는 게 그들의 결론이었다. 뫼르소에게는 결국 사형이 선고된다. 뫼르소는 자신의 죽음이 확정된 이후에서야 모든 자신의 삶이 선명해진 듯하다. '모든 인간은 반드시 죽는다'는 대전제 앞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우리는 죽음으로부터 머리를 외로 꼰 채 모르는 척 살아갈 수도 있고, 죽음 이후의 허구적인 구원을 진실인 양 믿을 수도 있고, 뫼르소처럼 죽음을 정면으로 응시할 수도 있다. 어쩌면 그 선택은 각자에게 달려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 대한 확신이, 모든 것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그보다는 확신이 훨씬 강했고, 내 삶과 다가올 그 죽음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그렇다, 나에게는 오직 그것뿐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 진리가 나를 사로잡는 만큼 그 진리를 믿고 있었다. 내가 옳았고, 여전히 옳고, 늘 옳다. 나는 그런 식으로 살아왔다."  (p.188)


산에는 요즘 밤꽃 냄새가 진동한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는 결혼식에서 시어머니가 대추와 밤을 며느리의 치마폭에 던져줌으로써 다산을 기원했던 것처럼 우리는 어쩌면 밤꽃 냄새에서 생명과 에너지를 떠올렸는지도 모른다. 이따금 누군가의 결혼식에 다녀올 때마다 나는 모든 게 모호하고 부조리한 이 세상에 새로운 생명을 불러들인다는 게 과연 축복일까? 하는 의문이 문득 들기도 한다. 가뜩이나 출산율이 저조한데 다산을 기원하고 새 생명의 탄생을 축복하는 게 마땅하겠지만 나로서는 그런 의문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요즘처럼 밤꽃 냄새가 진동하는 시기에 나는 생명력이 넘쳐나기보다 부조리한 삶을 이어가는 게 무척이나 부담스러워진다. 뫼르소의 확신이 내게는 없는 까닭이다. 모든 게 모호할 뿐이고, 하루하루 새롭게 생성한 삶의 기억들이 아무런 선별 기준도 없이 그저 쌓여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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