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기부여란 때론 어떤 간절함에서 오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 사람이 지닌 준법정신에 의존하는 경향이 더 크지 않을까 싶습니다. 준법정신이란 이를테면 법을 잘 지킨다는 절대적 통념도 있겠으나 사회적 관습이나 자신이 세운 어떤 규칙 또는 가까운 사람들이 나에게 갖는 기대나 바람 등을 무시하지 않고 잘 지키려고 애쓰는 마음 역시 넓은 의미에서의 준법정신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어떤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한 사람이 미루지 않고 실행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간절함에서 오는 개인의 의지라기보다 한 사람에게 어려서부터 주입된 준법정신과 그에 따른 실천 연습이 훨씬 더 많은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싶은 것입니다. 소위 '밥상머리 교육'으로 불리는 유아기적 훈련은 개인의 준법정신을 함양하고 이를 실천으로 연결시키는 훈련을 강화함으로써 그가 성인이 되었을 때 자신의 생각과 실천 사이의 간극을 꽤나 좁혀주는 듯합니다. 이것은 비단 자신의 생각이나 계획에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변 사람들이 자신에게 거는 기대를 감지하고 그 기대에 부응하고자 노력하는 것 역시 그와 같은 훈련 덕분이라 하겠습니다.


물론 이와 같은 교육이 장점만 있고 단점은 없는, 이른바 완벽한 교육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고 했던 자크 라캉의 말처럼 우리는 자신의 판단 기준이 서기도 전에 타인에 의해 형성된 옳고 그름의 기준을 무척이나 많이 습득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성인이 된 후에도 우리는 그 기준에 의해 자신의 욕망을 결정하고 이를 실천하는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다 나쁘다고는 말하기 어렵겠지요. 공동체 생활을 이어가야 하는 우리가 이 사회에서 용인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기준, 사회 생활에서 유리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구별 등을 미리 습득함으로써 사회에 진출했을 때 크게 당황하지 않고 적응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더 유리한 선택을 취할 수도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우리나라의 출산율이 세계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떨어지면서 자신의 자녀를 자유분방하게 키우겠다는 부모들이 늘고 있는 듯합니다. 시쳇말로 '금쪽이'로 키우겠다는 뜻이지요. 제 주변에서도 그런 부모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 자녀에 대해 곰곰 생각해보면 자녀가 자라 어른이 되었을 때, 또는 인생의 고비마다 자신의 내부에서 어떤 간절함이 발현되기를 기다리며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는 의미인데, 과연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간절함에 기대어 의지를 불태웠던 적이 몇 번이나 있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일입니다. 우리는 대개 자신에게 고비가 찾아올 때마다 간절함보다는 보이지 않는 어떤 의무감과 같은 준법정신을 바탕으로 수많은 고비들을 넘어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렇지 않은 분들도 물론 있겠지만 말입니다.


부모의 자녀 교육에 있어 오롯이 자녀의 선택에 맡겨두고자 하는 부분은 그 영역이 많고 적음의 차이는 있겠으나 어느 부모에게나 있을 테지요. 천주교를 믿는 우리 부부도 아들이 아무것도 모른 채 세례를 받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습니다. 적어도 자신의 종교만큼은 본인이 알아보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선택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아들은 종교가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언젠가 필요하다고 믿게 되면 스스로 하나의 종교를 선택하겠지요. 이와 같은 결정은 우리나라의 종교 중 일부가 정치세력화한 데서 기인했는지도 모릅니다. 자아가 형성되기 이전의 아이들을 상대로 혐오와 차별의 언어를 주입하고 그와 같은 행동을 강요함으로써 그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에도 자신들의 수족처럼 부리겠다는 발상은 마치 그루밍 범죄를 연상케 합니다. 심지어 어느 목사는 공공연히 종교는 그루밍일 수밖에 없다고 떠벌리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종교를 강요할 수 있겠습니까.


얼마 전 나는 뉴욕에 사는 여동생의 가족들과 전화 통화를 했었습니다. 안부를 묻는 게 대부분이었습니다만 대학원에 다니는 큰조카와의 통화는 지금도 여전히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조카는 비록 힘이 약한 여성의 입장이지만 이스라엘의 잔인성을 목격하면서 뜻을 같이 하는 시민들의 시위에 시간이 날 때마다 종종 참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시위에 참여하는 젊은이들은 최근 들어 점점 늘어나는 추세이며 대학생은 물론 고등학생이나 그보다 어린 학생들도 많이 볼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믿는 정의는 어쩌면 학교나 종교단체에서 가르칠 수 있는 게 아닐지도 모릅니다. 거친 아스팔트 위에서, 뜻을 같이 하는 이들과의 연대 속에서 정의와 사랑이 싹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성인이 된 당신이 일어나야 할 시간에 일어나고, 잠들어야 할 시간에 잠들지 못한다면 그것은 어쩌면 준법정신의 부족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실천력은 의지나 간절함에서 비롯되는 게 아니라 준법정신의 발현에 가깝다고 믿는다면 당신의 어릴 적 밥상머리 교육이 어떠했는지 한 번쯤 되돌아볼 듯합니다. 어쩌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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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에 시린
김보겸 지음 / 사람과가치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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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다'는 말은 감정의 폭의 크지 않다는 걸 의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 볼 때 정서적으로 안정된 사람은 자신의 감정 표현에 솔직한 사람일 수도 있다. 예컨대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마음껏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를 두고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와는 반대로 아름다운 노을에 하염없이 빠져들거나 일출의 장관에 감동의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은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부분의 예술가가 느끼는 감정의 진폭을 다른 정상인의 기준으로 판단할 때 일반적으로 정상의 범주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그 기준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술인은 예외로 한다는 규정 또한 갖고 있지 않다.


김보겸 작가의 에세이 <서른에 시린>을 읽는 내내 나는 그와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그것은 MBTI 성격유형검사에서 T나 F로 분류되는 것처럼 그렇게 단순한 문제는 결코 아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T로 분류되는 모든 사람은 어떤 예술가도 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정서란 다소간의 성향적 특성은 있을지언정 칼로 무 자르듯 그렇게 명확하게 나눌 수는 없다. 누구나 같은 인간이라는 공통의 범주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말로 표현되면 현실을 정의하는 것 같아 숨을 쉴 수 없던 것을 나는 시로 썼고, 시를 쓰며 살아 있다는 것을 느꼈다. 시간이 한참 지나 시를 쓴 까닭은, 내 마음을 움직였던 여운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은 마음이 크다. 시가 주는 언어로 삶을 바라보는 노력은 사람들이 쉼을 갖고 싶을 때 하나의 답이 될 거라고 전하고 싶었던 마음도 있다."  (p.52)


제목에 나이를 뜻하는 어떤 단어가 포함된 책이나 노래를 만날 때가 더러 있다. 그럴 때 나는 그 제목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한다. 나의 기억 회로가 제목이 의미하는 정확한 나이대로 되돌아갈 수 없는 까닭에 텅 빈 머릿속이 한동안 멍한 상태로 유지되기 때문이다. 김보겸 작가의 <서른에 시린>도 다르지 않았다. 나이에 'ㄴ' 받침이 들어가는 첫 순서이기도 한 '서른'이라는 나이가 아득히 멀게 느껴지기도 했다. 서른, 마흔, 쉰, 예순... 우리는 그렇게 나이가 들고 시나브로 성숙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서른이 넘어가면서부터 잔잔한 파동을 좋아한 것 같다. 사람들로 가득 찬 술집보다는 테이블이 몇 안 되는, 사장님의 손때가 묻은 식당이 편하고 정이 간다. 직접 담근 된장으로 끓인 찌개와 아침에 새로 한 듯한 김치, 사장님만의 특수 간이 되어 있는 삼겹살을 지글지글 구우면 술을 마시기 전인데도, 그 정경이 참 맛있게 느껴진다. 식당을 오고 간 지 십여 년은 되었는지, 자연스럽게 주방을 드나들며 반찬을 가져가는 단골손님의 넉넉한 웃음마저 정겹다."  (p.133~p.134)


사람의 마음도 나이가 듦에 따라 수분을 잃고 푸석푸석 건조해지게 마련, 다들 동안의 육체를 부러워하는 것처럼 촉촉한 감성을 유지하는 동심의 마음을 부러워했으면 좋겠다. 천천히 늙는다는 건 그 사람의 정서에 여전히 생명의 물기를 머금고 있다는 뜻이기도 한 까닭이다. 젊은 사람들이 매우 논리적이거나 바른말만 하는 어른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사람의 정서 역시 타인의 감정에 녹아들지 못한 채 점점 메말라가는 것이다.


"때마침 노을이 졌고, 노을 끝에 닿은 아내의 표정이 맑아 마음에 담았다. 생각해 보니 맑은 사람을 꿈처럼 담는 일에도 여러 감정이 요동쳤고, 그럼에도 그 감정의 끝에는 아내가 있었다. 시간에 무뎌지면 마땅히 느껴야 할 계절조차도 사전에 박힌 이름처럼 건조하게 지나갈 때가 있는데, 아내를 만나 마르지 않은 계절들을 보냈다. 한 사람을 내 안에 담는 일이, 한 세상을 담는 일만큼이나 소중하다는 것을 안 후로 한 걸음씩 하루를 놓는 일에 늘 다정하려 애쓴다. 시린 마음의 끝에서도 변하지 않고 아내의 손을 잡는다. 그대 잇기에 한순간 꿈처럼 빛날 수 있었다."  (p.45~p.46)


지난 3월에 군을 제대한 나의 아들은 4월 9일에 출국하여 유럽 전역을 돌고 있다. 서른의 끝자락에 선 작가가 이렇게 흔들렸던 것처럼 홀로서기를 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 아들 역시 유럽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복학 준비를 하고 멀지 않은 미래에 '서른'이라는 나이를 경험하겠지만, 그것 역시 남들과 다르지 않은 통과의례라고 말해주고 싶다. '서른을 아끼고 싶은 마음에 서른이 시리다'고 썼다는 작가는 어쩌면 10년이 훌쩍 지난 어느 시점에 '마흔에 시린'을 쓰게 될지도 모른다. 지나고 나면 모든 것이 그리워진다. 우리는 그렇게 불가능한 어떤 것에 끝없이 매달린다. 우리의 삶이 다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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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제법 불고 있습니다. 사무실 인근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돌아오는데 가로수의 잔가지며 삭정이들이 인도에 널브러져 어지러웠습니다. 바람이 강하게 불겠다는 일기예보를 엊저녁 뉴스 시간에 얼핏 들었던 것도 같습니다. 이런 날, 건물과 건물 사이에서 부는 도시의 골바람은 마치 한여름에 부는 태풍처럼 그 세기가 대단합니다. 강한 바람이 부는 탓인지 쏟아지는 햇살은 더없이 맑고 강렬하여 오가는 행인들의 얼굴을 금세라도 벌겋게 태워 놓을 듯했습니다. 선명하게 푸른 하늘과 하얗게 반짝이는 뭉게구름이 온종일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던 하루, 오늘은 54번째 맞는 어버이날이었습니다.


낮에 점심을 먹으면서 우연히 듣게 된 친한 친구의 사고 소식에 깜짝 놀랐습니다. 올해 초 두 분 부모님을 모두 떠나보냈던 친구는 부모님이 살던 시골집을 정리하여 정년 퇴임 후 그곳에 가서 노후를 보낼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친구는 짬이 날 때마다 그곳에 가서 집 주변을 정리하고, 쓰레기를 버리고, 동네 사람들과 어울려 시간을 보내기도 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난 어린이날도 친구는 혼자 그곳에 가서 낡은 가구를 정리하던 중 의자의 쇠붙이 부분을 떼어내기 위해 그라인더를 사용하다가 그만 그라인더를 놓쳐서 다리에 심한 상처를 입었고, 워낙 출혈이 심했던 탓에 119 구급차를 불렀지만 봉합 수술을 받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흘렀었나 봅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동맥이 다치지 않음으로써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피를 많이 흘린 때문인지 친구는 지금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고 하소연하고 있습니다. 사고는 정말 한순간에 벌어지는 일인가 봅니다. 유시민 작가가 기록한 강순희 여사의 인터뷰집 <사랑이 있으니 살아집디다>를 읽고 있습니다.


"중학교 다닐 때였는데 공책에 '인생이란?' 하고 써놓은 적이 있어요. 담임 선생님이 그거 보고 놀렸어. '야, 순희, 벌써 인생을 생각하냐?' 인생이 뭘까요?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자기한테 주어진, 자기 앞에 펼쳐진 운명을 열심히 살아가는 거, 그게 인생이다.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과 현실을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해서 극복하며 사는 거, 그게 인생이다. 어려운 문제가 생겨도, 장애물이 닥쳐도, 원망 같은 거 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살아가는 거다. 그런 게 쌓여 인생이 된다. 애들한테 늘 그렇게 얘기했어요. 나도 그렇게 살았고."  (p.259)


중간에 하루의 휴일이 있었던 까닭인지 다른 주에 비해 한 주가 빠르게 흘러간 듯합니다. 나는 나는 내가 보냈던 시간의 갈피를 접어 얼굴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어집니다. 내가 살았던 과거의 한 순간을 가감없이 뚝 잘라내어 인생 별거 없음을 솔직하게 말하고 싶어집니다. 그렇게 나는 내가 보냈던 시간의 갈피로 그의 등을 토닥이고 싶은 것입니다. 삶이 힘들다고 느끼는 다른 누군가에게 말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동시대를 살아가는 삶의 동지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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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우리를 인간으로 살게 하는가
김종구 지음 / 위커리어북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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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알고 있는 '나'와 타인이 파악하는 '나' 사이에는 상당한 괴리가 존재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하다. 예컨대 '나'는 성격이 급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타인이 바라보는 관점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분류될 수 있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괴리는 개인의 경험이 축적됨에 따라, 관계가 넓어짐에 따라 그 폭이 점차 축소될 수는 있지만 나의 관점과 타인의 시선이 완벽하게 일치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나'에 대한 정의는 그 기준이나 조건에 따라 매우 가변적일 수밖에 없음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최근 우리는 이마저도 극심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AI의 발전이 가져온 이러한 혼란으로 인해 우리는 존재에 대한 믿음마저 뿌리째 흔들리게 되었다.


"만약 '나'를 내 행동 패턴, 선호, 반응의 총합으로 정의한다면, AI는 분명 나보다 나를 더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만약 '나'를 지금 이 순간 경험하는 것, 무언가를 의미있다고 느끼는 감각, 무엇을 위해 살겠다고 선택하는 의지로 정의한다면 AI는 나를 예측할 수 있을지 몰라도 알 수는 없다."  (p.26)


파사컨설팅그룹 대표이사이자 20년간 산업 현장의 변화 한가운데에서 영업, 마케팅, 조직 리더십의 본질을 탐구해 온 김종구 작가는 자신의 저서 <무엇이 우리를 인간으로 살게 하는가>를 통하여 AGI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부상하는 기술에 매몰되거나 그 기술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은 채 나를 지키고. '나다움'을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하여 우리는 스스로에게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하며, 어떤 과정을 거쳐야만 굳건한 '나'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가에 대해 쓰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AI의 출현 이전부터 제시되었어야 할 문제이지만, 언제부턴가 기술의 발전이 우리의 예상을 늘 앞서가는 까닭에 AI가 보편화된 이 시점에 문제를 직시하고 그 해결책을 찾기 위해 나섰던 것인지도 모른다. 한참 뒤늦은 감은 있지만 말이다.


"효율성이 최고의 가치가 되는 세계에서, 효율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사는 것을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필요해진다. 빠르게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천천히 하는 것, 최적화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를 깊이 돌보는 것, 생산적이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허용하는 것. 이것들이 비효율이 아니라 인간적인 삶의 조건이 된다."  (p.302)


인간은 기본적으로 욕심이 많고, 게으르며, 끝없이 편한 것을 추종한다. 우리가 구축한 자본주의 체계는 이러한 인간의 기본 정서를 끝없이 이용한다. 자본주의 윤리는 근본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인간의 욕구를 이용하여 부를 창출하는 과정에서 넘지 말아야 할 한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편안함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구에 부응하여 가상현실(VR)이나 검색 기술은 이미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지 오래되었고, 언제든 명령만 내리면 AI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판단을 내리는 것은 물론 실제와 같은 영상도 뚝딱 만들어내는 시대가 되었다. 그에 비례하여 인간의 가치는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AGI가 완전히 실현된 세계에서, 모든 것이 편리해졌는데도 여전히 직접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AI가 더 잘해줄 수 있는데도 굳이 스스로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잃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알았다면, 지금 당장 그것을 더 많이 살아가는 것이다. 잃지 않기 위해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삶의 중심이 되도록.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그 중심이 단단한 사람은 휩쓸리지 않는다."  (p.102)


경쟁이란 오직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만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인식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세계 최고의 바둑기사가 인공지능 알파고와의 대결에서 연전연패하는 모습을 보고 크나큰 충격을 받았던 시점부터 우리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경쟁보다 더 위험한 경쟁이 존재한다는 걸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인간의 능력이란 게 참으로 보잘것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토록 추락한 인간 가치를 고양하고 AGI 시대에도 변함없이 '인간다움'의 자부심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저자는 이 책에서 38개의 질문을 던지고 있다. 저자가 제시하는 질문을 따라가다 보면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은가?' 하는 궁극적인 질문에 닿게 된다. 어쩌면 우리는 갈수록 패턴화되는 대중 속의 '나'가 아니라 나만의 특성을 지닌 '1/80억'의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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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네 - 2025 일본 서점대상 1위 수상작
아베 아키코 지음, 이소담 옮김 / 은행나무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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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달 5월을 맞는 사람들의 심리는 복잡하다. 차라리 어지럽다고 하는 편이 옳을지도 모른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은 물론 스승의날까지 모두 5월에 몰려 있는 것은 물론 기념일로 정해지기는 했지만 성대한 행사 없이 지나가는 바람에 국민 대다수가 모르는 성년의날이나 부부의날까지 포함하면 5월은 그야말로 가정의달이 아니라 기념일의 달이 되고 만다. 이렇게 많은 기념일이 있으니 5월은 매일매일이 기쁨으로 가득해야 하겠지만 사람들의 속내는 복잡하기만 하다. 얄팍한 지갑에 비해 지출해야 할 돈은 꽤나 버겁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나 몰라라 하기에는 왠지 낯 뜨거운 시선이 부담이 될 듯하다. 물론 지나고 나면 모든 게 추억이 될 수 있겠으나 현실은 그리 녹녹지 않은 게 사실이다. 그래도 5월을 맞는 마음만큼은 언제나 따뜻하다. 아베 아키코의 소설 <카프네>처럼.


"저기, 카프네라는 회사 이름의 의미를 아시나요?" "포르투갈어로 '사랑하는 사람의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넣어 빗겨주는 행위'를 나타내는 말이죠. 일본어로 번역하기 어려운 뉘앙스라고 하던데요."  (p.268)


소설은 사십 대의 중년 여성 가오루코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남들처럼 자식을 낳고 평범한 가정을 꾸리는 것을 소망했지만, 거듭된 불임치료에도 불구하고 끝내 실패하였던 그녀는 결국 남편인 기미타카로부터 이혼 제안을 받게 되고 끝내 이혼하고 만다. 이혼 후의 일상은 쉽게 무너져 내렸다. 매일 저녁 술에 의지하여 잠이 들었고, 집안은 온갖 쓰레기로 점령당했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그토록 다정했던 12살 차이의 남동생 하루히코마저 갑자기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하루히코가 죽기 전에 유언장을 남김으로써 상속이 복잡해졌다는 점이었다. 한때 결혼까지 거론되었던 하루히코의 여자친구 세쓰나에게 상속 재산의 일정액과 아가베 베네수엘라 화분을 남겼던 것. 가오루코는 동생의 유언을 수행하기 위해 세쓰나를 만났지만 어쩐 일인지 그녀는 한사코 상속을 거부한다. 가오루코와 세쓰나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된다.


"5월이 됐다. 설명서에 적힌 대로 비료를 주고 흙이 마르면 물을 듬뿍 주면서 돌본 아가베 베네수엘라가 여러 겹 포개진 통통한 잎 사이로 빛깔이 옅고 소박한 새잎을 피웠다. 돌봐도 아무 변화가 없었던 식물이 갑자기 보여준 생명의 힘을, 가오루코는 쪼그리고 앉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p.259)


일상이 무너진 사람들에게 청소와 요리 등 가사 대행 서비스를 제공하고 그에 대한 대가를 받는 업체 '카프네'에서 요리를 담당하고 있는 세쓰나는 갑작스러운 이혼과 남동생을 잃고 일상이 흐트러진 가오루코의 집에 우연히 들렀다가 먹음직스러운 요리를 뚝딱 해놓고 떠난다. 겉으로는 마냥 무뚝뚝하지만 마음은 더없이 따뜻한 세쓰나에게 감동한 가오루코는 '카프네'에서 주말마다 하고 있는 가사 대행 봉사 활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어려서부터 책임감이 강했던 가오루코는 다른 건 몰라도 청소와 정리정돈만큼은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을 정도로 그 실력을 인정받는 사람이었다. 그 덕분에 가오루코와 세쓰나는 환상의 호흡을 자랑하며 일상이 무너진 여러 가정을 방문하여 그들에게 다시 살아갈 힘을 북돋워 준다.


"집은 청소해도 금방 지저분해지고 음식도 먹으면 사라지죠. 그래도 괜찮아요. 고작 이삼일 정도라도 평소보다 집이 지내기 편해지고, 애써 뭘 만들지 않아도 이미 맛있는 밥이 준비되어 있으니까. 그런 환경만 있다면 사람은 아주 조금이라도 회복할 수 있어요. 살아가기 위해 행동할 기력을 가질 수 있어요. 이게 카프네를 시작한 이유예요."  (p.103)


수수께끼로 남았던 하루히코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세쓰나의 기억과 하루히코가 봉사활동을 하면서 방문했던 몇몇 가정의 가족들을 통하여 그 윤곽이 어렴풋이 드러난다. 하루히코 역시 가오루코처럼 '카프네'에서 봉사활동을 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쓰나와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새롭게 알게 된 세쓰나의 성장 배경과 삶의 고단함으로 인해 가오루코가 단단히 마음먹게 된 결심은 독자들로 하여금 감동의 눈물을 자아내게 한다. '블루데님 작업복에 투박한 블랙 컴뱃 부츠를 신고 머리는 만두처럼 묶은 채 화장기 없는 얼굴'로 나타나는 세쓰나는 '전투기 정비사가 일을 마치고 기지에서 훌쩍 나온 듯한 분위기'이지만 그 마음은 누구보다도 따뜻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독자들 역시 세쓰나의 매력에 풍덩 빠져들게 된다. 사람은 겉모습만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자기 힘으로 과거의 자신을 구하며 어떻게든 살아갈 수밖에 없다. 도키코가 일상을 살아가는 데 질식할 것 같은 사람들을 구하려는 것처럼, 기미타카가 상처받은 아이들을 구하는 것을 자기 사명으로 삼는 것처럼."  (p.331)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과거에 저당을 잡힌 채, 때로는 과거라는 쥐덫에 갇혀 옴짝달싹 못한 채 현재를 살아가는 경우가 더러 있다. 과거의 그림자가 현재의 내가 갖고 있는 생명력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꼴이 되는 것이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라고 물었던 한강 작가의 질문처럼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지도 모른다. '나의 과거가 나의 현재를 돕고 있는가?' 이에 대한 대답은 어쩌면 자신의 의지가 빚은 하나의 선택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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