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날처럼 새벽에 집을 나서는데 바깥은 온통 젖어 있었습니다. 비는 그쳤지만 간밤에 내린 비의 양이 간단치 않았는지 낮은 곳에는 제법 물웅덩이가 고였습니다. 하늘은 우중충하니 잔뜩 흐린 채였고 이따금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어지간한 추위는 아닐지라도 으스스한 한기가 품속으로 파고들었습니다. 경칩도 지났는데... 산의 초입에 있는 계단을 다 오르자 가볍게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렇다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에는 새벽잠의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고 나온 노력이 아까워서 차마 그리 할 수 없었습니다. 후둑후둑 떨어지는 빗소리의 리듬에 맞춰 걸음은 평소보다 절반은 늦춰진 듯했고, 인적이 끊긴 등산로에는 적막이 감돌았습니다.


나는 며칠 전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숨진 이란의 초등학생들을 애도하며 걸었습니다. 어떤 이유로든 전쟁은 미친 짓입니다. 그 많은 민간인들이 아무런 잘못도 없이 처참하게 생명을 잃는다는 건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 정부는 이제 더 이상 히틀러의 만행을 비난할 권리가 그들에게는 없는 듯 보입니다. 그들 역시 히틀러의 만행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학살과 온갖 잔인한 전쟁 범죄를 저질러 왔고, 지금도 역시 그와 같은 만행을 저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신이 존재한다면 이처럼 참혹한 살상을 허락한 이스라엘과 미국의 권력자들에게 가장 먼저 지옥행 열차를 타도록 할 것입니다. 정말로 신이 존재한다면 말입니다.


희끄무레한 어둠에 싸인 등산로는 빗물에 질척거리고 미끄러웠습니다. 등산로 주변의 낙엽 위에는 비에 섞여 내린 진눈깨비가 녹지 않은 채 하얀 잔설로 덮여 있었습니다. 검게 드러나는 등산로와 잔설이 쌓인 숲의 대비는 마치 한 폭의 수묵담채화인 양 그려졌습니다. 비는 여전히 그치지 않고 입고 나갔던 운동복 상의도 비에 젖었습니다. 손전등 불빛이 한 뼘의 어둠을 쫓아낼 때마다 땅 위에 번지는 타원형의 불빛 속으로 작은 빗방울들이 다투어 모여드는 듯했습니다.


어제 했던 친구의 말이 떠오릅니다. "완벽하게 인간을 닮은 로봇이 출현하기 전에 우리 인간이 완벽하게 로봇을 닮는 게 순서적으로 더 먼저이지 않을까?"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정치인들을 보면 그들은 마치 인간이기를 거부하는, 어떤 연민이나 안타까움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무감각한 인간들처럼 보입니다. '나는 심장이 없어. 나는 심장이 없어. 그래서 아픈 걸 느낄 리 없어.'라고 노래했던 어느 가수의 노랫말이 생각납니다. 오늘은 금요일이고 내게는 이틀간의 휴가가 주어졌습니다. 회사원이라면 대부분 그렇겠지만 말입니다. 가슴 아픈 소식은 이제 더 이상 들을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하기에는 지금 나의 몸 컨디션이 너무나 안 좋기 때문입니다. 경칩도 지났는데 날씨는 제법 쌀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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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빛 - 시인 리디 다타스가 모으고 되살린 크리스티앙 보뱅의 말들
크리스티앙 보뱅.리디 다타스 지음, 신승엽 옮김 / THE CIRCLE PRESS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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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수많은 소스와 향신료가 존재한다. 향수 역시 다르지 않다. 우리의 코와 입은 얕고 간사하기 이를 데 없어서 재료 본연의 맛과 냄새에 친숙해지기보다는 우리의 입과 코가 선호하는 쪽으로 발전시켜 왔다. 물론 그것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의 눈과 귀도 그런 식으로 자신의 선호를 발전시켜 왔던 까닭에 그림과 음악 등, 현대인들의 정서 생활에 많은 도움을 주는 예술 작품이 등장했을 테니까 말이다. 문학작품에 대한 선호도 다르지 않은 듯하다. 이왕이면 잔소리보다 칭찬의 말이 듣기 좋은 것처럼 시간을 내어 글을 읽는 마당에 자신의 마음을 흡족하게 할 좋은 문장이 가득한 책을 선호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듯 보인다. 물론 우리의 입맛이 서로 다른 것처럼 책도 사람마다 취향이 다르고 선호하는 장르가 각자 다 다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책을 많이 읽을수록 자신의 취향은 더욱 확고해지고 문장의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도 분명해진다.


"나는 자연을 간헐적으로만 보러 간다. 그 아름다움이 너무 커서 벅차기 때문이다. 금화와 보석으로 가득 찬 상자 앞에 오래 머무르는 것과도 같다. 그러다 보면 눈이 멀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나는 그저 두세 개의 보석만을 챙겨 돌아온다. 들판에서는 작은 작은 나무숲이 받는 것과 동일한 태양의 편지를 받을 수 있는데, 그것만으로도 이미 넘칠 정도로 충분하다."  (p.31)


언제부턴가 크리스티앙 보뱅의 글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차츰 늘고 있다. 욕심 같아서는 나만 알고 싶은 그런 작가인데 어디 그게 가당키나 할까. 프랑스 시인 리디 다타스가 보뱅의 말과 사유를 오랜 시간 경청하고 수집해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는 <세상의 빛>에는 작가가 문학·사랑·언어·삶·세계에 대해 직접 말한 문장들이 질문의 흔적 없이 이어지고 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에세이스트인 보뱅은 1951년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에서 태어나 2022년 11월 24일, 71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평생 그곳에서 글쓰기를 하며 문단이나 출판계 등 사교계와 동떨어진 삶을 살았다고 전해진다. 어쩌면 이 책은 자신의 고집스러운 삶에 대한 회고이자 자신의 문학적 태도와 세계관에 대한 해설서일지도 모른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방향이 필요하다. 모든 것이 가능해져 버린 시대에 어떻게 방향을 알 수 있을까? 북쪽은 북쪽이고 남쪽은 남쪽임을 다시 일깨워야 한다. 많은 이들에게 부족한 건 자신의 본능, 다시 말해 즉각적으로 아는 걸 붙잡는 아주 단순한 감각이다. 이는 마음에 기대어 보아야 할 것을 더 잘 가늠하는 일이다. 시골 언덕에 있는 전망 안내판에 기대어 지평선을 손님처럼 여기며 말을 걸듯이, 마음이라는 지지대 위에 기대어 보는 것이다."  (p.88)


보뱅의 글은 하나의 문장이 아닌, 맑고 시원한 하나의 목소리로 변하여 마음속 깊은 곳까지 전달된다.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것들, 이를테면 관습이나 종교나 지식이나 삶에서 늘 보게 되는 어떤 것들에 대해 그의 설명이나 해석을 듣고 있노라면 우리는 마치 갓 태어난 어린아이처럼 우리가 알거나 경험했던 모든 것들을 잊은 채 새로운 세상 속으로 지금 막 도착한 것 같은 착각에 빠져드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눈이 아닌 작가의 눈을 통해 또는 작가가 뿜어 내는 한 줄기 빛을 통해 빚어진 새로운 세상의 풍광을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렇게 새로운 세상 속에서 머물다 보면 출처를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낮게 울려 퍼지는 기쁨의 송가를 한동안 여운처럼 들을 수 있다.


"대부분의 시들은 성냥개비와 같다. 긁어 켜는 순간 아름다운 불꽃을 피우며 잠시 우리를 밝히지만, 이내 손에는 그을린 나무토막만 남는다. 나는 한 번도 빛을 본 적은 없으나, 그 빛을 온전히 알고 있다. 그리고 진정한 빛은 그런 식으로 쉽게 꺼지지 않는다는 것도. 가장  고귀한 빛을 주는 이는 시인들이 아니라, 시보다 더 아름다운 빛을 엿본 이들이다."  (p.161)


한 달 전쯤 몸살을 심하게 앓았던 탓인지 나는 예전 컨디션을 좀체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블로그에 글을 쓰는 것은 물론 책을 읽는 것조차 힘들어하고 있다. 날씨 변화가 심한 환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루 운동량을 과도하게 늘려 몸에 무리를 주었던 게 이 모든 결과의 원인이었음을 잘 알고 있다. 머리로만 알고 있던 '과유불급'의 의미를 몸을 통하여 배우고 있다는 느낌이다. 이 얼마나 미련한 짓인가.


매일 조금씩 한낮 기온을 끌어올리더니 이제는 제법 봄기운이 감돈다. 금세라도 산수유꽃이 벙글 듯한 날씨인데 나는 이 아름다운 계절을 뒤로한 채 컨디션 회복에 골몰하고 있다. 휴가를 내고 잠시 쉬자니 꾀병인 듯 보이고, 꾸역꾸역 버티자니 힘이 들고...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일만 지나면 주말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 주말 동안 푹 쉬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예전 상태로 회복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랬으면 좋겠다. 나는 오늘 하루도 조심조심 건너고 있다. 하루를 건너가는 게 이리도 힘든 일인가, 나는 새롭게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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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은 시간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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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투루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들 중 하나는 누군가의 단점을 나의 노력만으로 쉽게 고칠 수 있다는 착각에 자주 빠지게 된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비단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만 존재하는 커다란 실수 중 하나라고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수십 년 결혼 생활을 이어 온 부부 사이에도 흔히 볼 수 있는 착각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에 대한 나의 사랑으로 혹은 (종교를 믿는 사람이라면) 신을 향한 자신의 기도를 통하여 상대방의 단점을 쉽게 개선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은 상대방의 단점을 능히 가리고도 남을 만한 다른 장점이 상대방에게 존재하거나 그와 헤어지는 것에 대한 불안이 자신의 이성을 마비시켰거나 그를 소유하고자 하는 자신의 욕구가 지나치게 강한 데서 비롯되는 게 일반적이지만, 사실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완전히 정리되기 전에 그와 같은 판단에 도달할 만큼 자기 객관화의 면모가 뚜렷한 사람은 흔치 않을 듯하다. 대부분의 사람은 타인에 대한 공감이나 배려에 익숙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역지사지의 태도는 숫제 경험조차 해 본 적 없을 수도 있다. 어쩌면 인간은 가장 이기적인 동물일지도 모른다.


"전시회를 본 두 사람은 버스를 타고 아클로에 있는 그의 집으로 가서 창문을 활짝 열어둔 채 침대에 누웠다. 따뜻한 바람과 이웃집의 금속 풍경 소리가 들어와 방을 가로질렀다. 사빈은 한 시간 정도 자고 일어나 테스코까지 걸어가서 장을 봐 온 다음 저녁 식사를 준비했다. 타임 줄기를 넣고 구운 닭고기와 마늘, 주키니 호박이었다. 이 여자는 요리를 할 줄 알았다. 카헐은 지금도 그것만큼은 인정했다. 하지만 설거짓감이 너무 많이 나와서 마음 한구석으로는 늘 화가 났는데, 그가 전부 헹궈서 식기세척기에 넣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보통 그녀가 밤새 불려야 한다고 말했던 오븐용 그릇만은 예외로, 그가 월요일에 퇴근하고 돌아올 때까지 싱크대에 그대로 있었다."  (p.21 너무 늦은 시간' 중에서)


클레어 키건의 소설집 <너무 늦은 시간>에는 표제작인 '너무 늦은 시간'과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 그리고 '남극' 등 단 세 편의 단편소설이 실린 얇은 책이다. 그렇다고 소설의 내용 또한 가볍고 쉽게 이해되는 건 아니다. 아일랜드 수도 더블린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너무 늦은 시간'에서 주인공인 카헐은 어느 회의장에서 만난 사빈과 사귀게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청혼을 하게 된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인색한 데다가 남성 우월주의적 환경에서 성장한 카헐은 자신의 집으로 짐을 옮긴 사빈과의 결혼 준비 과정에서 여러 번 충돌한다. 사빈은 카헐의 직장 동료인 신시아를 통해 카헐의 행동에 있어서의 문제점을 확인한다. 사빈은 카헐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지적하지만 카헐은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한 채 그것들이 다만 아일랜드 남자들의 관습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의 대학 시절 부모님과의 식사 자리에서 남동생이 어머니가 자신의 접시를 들고 식탁에 앉으려 할 때, 의자를 홱 빼버리는 바람에 어머니가 바닥에 넘어졌던 것은 물론 접시가 깨지고 접시에 담겼던 음식이 흩어지는 것을 보고 남자들 세 사람이 크게 웃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카헐은 마음 한구석으로 아버지가 다른 남자였다면, 그때 그 모습을 보고 웃지 않았다면 자기가 어떤 사람이 되었을까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오래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는 별 의미 없는 일이었다고, 못된 장난이었을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거나 하기 싫어져서 옆으로 누웠지만 적어도 한 시간은 지난 후에야 잠이 왔고, 그는 어느새 잠의 위안과 새로운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p.44~p.45 '너무 늦은 시간' 중에서)


한편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은 '뵐 하우스'라는 작가 레지던스에서 집필 작업을 하려던 여성 주인공이 다짜고짜 걸려온 전화를 받게 된다. 독문학 교수라고 소개한 남자는 집을 둘러보겠다며 무례하게 부탁한다. 글을 써야 할 귀중한 시간에 주인공은 마지못해 응한 남자의 방문이 영 못마땅하지만 준비한 케이크를 대접한다. 남자는 이를 게걸스럽게 먹고 고맙다는 인사도 없이 오히려 주인공을 타박하기에 이른다.


"얼마나 끔찍한 남자인지! 정말 끔찍하고 불행한 남자야. 그녀가 문을 잠그며 생각했다. 정신이 나갔나? 게다가 얼마나 수고를 들였는지 생각하면...... 그녀는 케이크를 보면서 창밖으로, 그의 뒤에다가 던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러는 대신 케이크를 냉장고 깊숙이 넣고 와인을 한 잔 따랐다."  (p.77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 중에서)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던 여자는 집을 떠날 때마다 다른 남자와 자면 어떤 기분일까 궁금했다.'로 시작하는 '남극'은 결국 이를 실행에 옮기는 여자의 경험을 다룬다. 그러나 작가는 독자들의 예상과 전혀 다른 결말을 준비하여 놀라게 한다. 이 세 편의 단편소설은 대략 10년씩의 시차를 두고 쓰였다지만 작가 특유의 문체는 비슷하고, 주제 역시 일관되게 흐른다. 2022년에 발표된 '너무 늦은 시간'과 2007년에 발표된 '길고 고통스러운 죽음', 그리고 1999년에 출간된 '남극'이 한 권의 책으로 묶여 작가의 생각과 문학적 표현의 변화를 보여주기 위한 시도로 보이지만, 특이하게도 클레어 키건은 시간의 추이에 다른 변화를 보여주기보다 하나의 주제를 각각 다른 소재로 선보이는 3인 3색의 색다른 매력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데이트 폭력과 남녀 간의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대두되고 있다. 클레어 키건은 이 책에서 결혼 전의 두 남녀의 갈등과 무례하고 자기중심적인 남자를 제삼자적 관점에서 보게 되는 여자와 경험해보지 못한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 위험한 상황에 직면하는 한 여자의 이야기를 압축적인 이야기로 담고 있다.


최근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모텔 살인 사건도 그렇지만 남녀 간의 관계는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사랑의 감정이 싹트기 시작하면 상대방의 단점이 아주 작게 보이거나 쉽게 개선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그것이 잘못된 믿음이었음을 곧바로 알게 된다. 그럼에도 문제가 지속되는 까닭은 인간의 적응력 때문이 아닐까 싶다. 위중한 폭력 앞에서도 시간이 흐르고 반복적으로 노출되면 인간은 그 상황에 적응한다는 점이다. 때로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착각하기도 한다. 클레어 키건은 각각의 상황을 여성의 입장에서 쓰고 있지만 비단 이것이 어느 한 편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남녀 간의 교제를 법으로 금할 수도 없고... 사랑에 이르는 길은 너무도 가깝고 사랑에서 벗어나는 길은 너무나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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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그렇겠습니다만 자신의 노력에 비해 과도한 칭찬을 받을 때가 더러 있습니다. 오늘 새벽 산행길에서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날씨가 풀리면서 산을 찾는 등산객이 늘어난 탓에 등산로에 버려지는 쓰레기의 양이 겨울에 비해 배는 증가한 듯합니다. 어차피 빈 손으로 내려올 바에는 쓰레기라도 주워서 내려오는 게 환경에도 좋고, 기분도 좋고 여러 모로 나쁠 게 없으니 나는 꽤나 오래전부터 등산로에 버려진 쓰레기를 줍자고 생각했었고, 아침 운동을 마치고 산을 내려올 때면 양손 가득 쓰레기를 들려 있는 게 습관처럼 굳어졌습니다.


오늘도 여느 날처럼 작은 골판지 박스며, 페트병이며, 사탕 껍질이며, 사용한 화장지 등을 두 손에 나눠 들고 내려오는데 오늘 처음 본 아저씨 한 분이 나를 향해 과도한 칭찬을 쏟아내는 것이었습니다. 훌륭하시다는 둥 너무나 좋은 일을 하신다는 둥 온갖 칭찬을 늘어놓는 바람에 얼굴이 화끈거리고 민망하여 서둘러 그 자리를 피하려고 하는데, 이번에는 줍는 사람 따로 있고, 버리는 사람 따로 있느냐며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에 대한 성토를 이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가까스로 그분을 진정시키고 산을 내려오는데 절로 웃음이 났습니다. 그러나 기분은 전혀 나쁘지 않았습니다. 온종일 즐거운 마음으로 보낼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요?


"우리는 섬광처럼 스쳐 지나가는 아름다움을 통해서만 삶에서 벗어난다. 그때 우리는 시간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어떤 지속을 느끼지만, 곧바로 한층 더 불투명해진 세계와 마주하게 된다. 그토록 아름다운 자연조차 실은 무심하다. 들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시골길 한가운데에서도 인간은 살해될 수 있다. 그러니 피난처는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그건 그다지 두려운 일은 아니다. 진정 두려운 일은 우리에게 주어진, 그 안에서 모두가 어느 정도 길을 잃고 있는 이 삶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크리스티앙 보뱅의 <세상의 빛> 중에서)


크리스티앙 보뱅의 지적처럼 우리는 모두 자신의 삶에서 어느 정도 길을 잃고 있지만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는 않는 듯합니다. 엊그제 시작한 듯한 2026년도 벌써 두 달을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다가오는 3월을 어떻게 보낼지 막막할 따름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시시각각 길을 잃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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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윤 : 하나코는 없다 The Last of Hanak'o 바이링궐 에디션 한국 대표 소설 13
최윤 지음, 브루스 풀턴.주찬 풀턴 옮김 / 도서출판 아시아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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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등산로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등산로뿐만이 아니었다. 도시 전체가 안개에 점령당한 듯했다. 어제 내린 습설이 밤새 낮아진 기온에 서릿발처럼 얼어붙어 있었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서걱서걱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낮에는 기온이 꽤 오르겠는걸' 속으로 생각하면서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눈길을 조심스레 걸었다. 안개에 대한 서술로 시작하는 최윤 작가의 소설이 떠올랐지만 끝내 제목은 생각나지 않았다. 알듯 알듯 하면서도 결국 포기하게 되는 순간의 답답함이란... 이런 경험이 전에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닌데 때로는 입에 붙었던 책의 제목마저 어느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아 얼버무리게 될 때, '나의 기억력도 이제 옛날 같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곤 한다. 깊은 한숨과 함께. 운동을 마치고 산을 내려오자마자 책의 제목부터 확인했다. 그래, 맞아. <하나코는 없다>였지. 왜 그게 떠오르지 않았을까.


"폭풍이 이는 날에는 수로의 난간에 가까이 가는 것을 금하라. 그리고 안개, 특히 겨울 안개에 조심하라...... 그리고 미로 속으로 들어가라. 그것을 두려워할수록 길을 잃으리라."  (p.8)


하나코는 별명이었다. 코가 예뻐서 붙여진 별명.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던 모임의 어느 한 사람이 하나코에게 전화를 걸면 그녀는 혼자 또는 늘 똑같은 여자 친구 한 명을 대동하고 흔쾌히 나와주었다. 그런데 '공기나 혹은 적당한 온기처럼 늘 그들 곁에 있던 하나코가 갑자기 사라졌다. 그렇게 자주 어울렸으면서도 그들이 하나코의 신상에 대해 아는 것은 많지 않았다. 세월이 흐른 뒤 그는 하나코가 살고 있다는 이탈리아로의 출장에 자원한다.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어 가면서, 그는 안개처럼 모호한 하나코의 실체를 되살리려 한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를 파탄시킨 '그 사건'의 실체에 대해서는 지금도 역시 떠올리기 싫다는 듯 자꾸만 머뭇거린다.


"그 자신을 포함해 무리들 중의 누구도 하나코에게 자신들의 결혼 날짜를 알리지 않았다. 딴 친구들은 어떤 이유에서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그로서는 그저 단순한 부주의였다. 물론 그는 청첩장을 준비하던 때만 해도 그녀에게 보낼까 하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분주한 일정에 밀려 그만 잊어버리고 말았다."  (p.62)


남자들의 모임에 홍일점으로 참여했던 하나코. 그녀는 어쩌면 그들 무리 개개인이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일종의 어장 관리 차원에서, 모임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유지하려는 차원에서 어떤 장신구처럼 이용한 듯 여겨진다. 유쾌하지 않은, 어쩌면 회피하고 싶은 기억을 안고 그는 하나코와의 전화 통화에 성공한다. 서울이 아닌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그는 갑자기 힘이 조금 빠지는 것을 느꼈다. 그녀를 보러 기차를 타고, 그녀가 말해 준 이름의 거리를 찾아 헤매고, 그녀가 일하는 사무실을 찾아 안으로 들어가고, 그녀의 책상 옆에 앉아 일이 끝나기를 기다려, 그녀의 생활공간으로 초대되고, 이 나라에서 하듯이 집에서 준비한 식사를 하고 환담을 할 엄두가 나지를 않는 것이다."  (p.74)


그는 하나코와의 통화에서 모임 멤버였던 J나 P도 그저 전화만 하고 방문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모임의 어느 누구도 하나코와 사적으로는 연락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도 역시 하나코를 만나지 않은 채 로마행 열차에 몸을 싣는다. 출장에서 돌아온 후 그는 분주한 나날을 보냈고, 어느 날 이탈리아 상공회의소에서 외국 바이어들에게 보낸 홍보 잡지에 실린 하나코의 인터뷰 기사를 보게 된다. 하나코를 만나지 않고 출장에서 발길을 돌렸던 그는 그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이삼 년 한 후 그를 포함한 다섯 명의 모임 멤버와 하나코와 그녀의 친구가 차 두 대에 나눠 타고 낙동강 근처의 어느 식당으로 놀러 갔던 기억을 떠올렸다. 노래를 부르지 않겠다는 하나코와 윽박지르듯 노래를 강요하는 그들 무리가 뒤엉켜 아수라장이 되었고, 그날 이후 그녀는 감쪽같이 사라졌었다.


"잠시 머무르다 떠나는 도시. 이제 기차는 불빛이 점점 드물어지는 인적 없는 어두운 풍경 속을 달리고 있었다. 아래 좌석의 승객들도 등받이를 올려 침대를 만드느라 부산하다가 언제부터인가 갑작스러운 침묵이 왔다. 복도의 소음도 점점 더 줄어들고 기차는 짙은 밤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렸다. 여전히 세 개의 침대는 비어 있었다."  (p.82)


스가 아쓰코가 쓴 <밀라노, 안개의 풍경>도 떠오른다. 안개, 하면 습관적으로 떠오르던 김승옥의 <무진기행>도 언젠가 내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 제목이 뭐였더라, 하는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스가 아쓰코의 에세이 한 대목을 옮겨 본다.


"저녁 무렵 창밖을 내다보고 있노라면 문득 안개가 자욱이 깔리곤 한다. 창에서 5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플라타너스의 가지 끝이 눈 깜짝할 사이 자취를 감추고, 끝내 굵은 줄기까지 짙은 안개 속으로 사라진다. 가로등 밑을 생물처럼 달려가는 안개를 본 적도 있다. 그런 날에는 몇 번이고 창으로 달려가 짙은 안개 너머를 내다본다."


낮에는 기온이 제법 올랐었다. 산책을 하기에 더없이 좋았던 날씨. 늦은 점심을 먹었던 나는 사무실 근처의 공원을 천천히 걸었고, 봄 햇살에 눈이 녹는 풍경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모이를 찾는 비둘기떼가 이리저리 날아 올랐다 다시 내려앉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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