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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 너머 - 돌아올 수 없는 여행의 문
다비드 디옵 지음, 목수정 옮김 / 희담 / 2025년 11월
평점 :
사랑 이야기는 넘어야 할 장애물이 있을 때 더욱 애틋해진다. 순탄하고 무난한 사랑이 당사자들에게는 물론 그것을 전해 듣는 사람들에게도 더불어 행복을 안겨줄 텐데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그런 이야기는 오히려 부러움이나 질투의 대상이 되고 마니 말이다. 그런 까닭에 무난한 사랑 이야기는 귀를 쫑긋 세우고 빠져들 만한 대상은 되지 못한다. 사람 심리가 이상한 것인지 아니면 지구상의 모든 인간은 죄다 나쁜 마음의 소유자들로만 구성된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나 역시 무난한 사랑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다. 어찌어찌 만나서 연애를 하고, 날 잡아 결혼을 하고, 원하는 만큼 자식을 낳아 평생 동안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이야기는 그 이야기를 듣거나 읽는 이에게 더없이 큰 기쁨과 행복을 안겨줄 만도 한데 인간의 심성은 다소 표독스러운 데가 있어서 그런 이야기에는 도무지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다. 다비드 디옵의 소설 <작별 너머>를 읽게 된 동기 이면에는 어쩌면 그런 이유가 포함되었을지도 모른다. 소설의 주인공인 미셸 아당송과 마람의 사랑 이야기를 읽는 독자는 그리스 신화 <오르페우스와 유리디스>의 비극적인 사랑을 떠올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나의 종교적 원칙과 이토록 위험하고도 아름다운 모습으로부터 멀찌감치 거리를 두어온 나의 강력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나는, 완전히 벗은 몸으로 빗물이 가득 채워졌는지 보려 모든 항아리를 하나하나 살피느라 여념이 없는 마람을, 그녀를 향한 내 시선을 거둘 수 없었다. 그녀는 비에 젖어 움직임을 방해하는 옷을 던져 놓고, 마치 신이 아직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지 않은 검은 이브처럼, 완전한 나신으로 자유롭고 아름답게 움직이고 있었다." (p.177~p.178)
유럽 절대왕정 시대인 1700년대 세네갈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소설을 접한 독자는 책을 읽기도 전에 노예무역의 중심지였던 세네갈의 고레 섬을 문득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프랑스의 식물학자였던 미셸 아당송은 인생의 유일한 목표였던 <자연백과사전>을 저술하고, 그 저작을 통하여 식물학계 최고봉에 오르는 꿈을 지닌 야망가였다. 그는 새로운 식물을 발견하기 위해 프랑스 파리를 떠나 세네갈의 생루이 섬으로 향했다. 그의 나이 스물세 살 때였다. 그렇게 세네갈에서 연구를 이어가던 아당송은 노예로 팔려갔다가 기적적으로 돌아온 한 여인에 대한 소문을 우연히 듣게 된다.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던 아당송은 '돌아온 여인'을 반드시 만나야겠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길을 떠났고, 천신만고 끝에 마람을 만난다. 사막을 건너면서 낙마사고를 당하여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던 아당송이 결국 늙은 치유사에게 맡겨졌던 것, 그리고 아당송을 맡았 치유사가 바로 '돌아온 여인' 마람이었다. 마람은 소문만 듣고 자신을 찾아왔다는 백인 아당송을 처음엔 무척이나 경계했지만, 그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신뢰가 싹튼다.
"마람이 이 빛을 발하는 소금물을 가져다, 밤에 그녀의 오두막을 밝히는 불로 사용했다는 사실은 그녀에 대한 나의 애틋함을 더욱 증폭시켰다. 나는 그녀가 표현하는 방식의 세계관을 갖지 않았고, 그녀가 말하는 수호천사의 존재도, 인간과 자연이 하나의 몸을 이루고 있다는 고대 종교의 반인 반수의 존재도 믿지 않았지만, 그것들이 쓸모없는 것일지라도,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같은 매력을 느낀다는 사실이 나를 흥분시켰다. 바닷물로 채워진 물 단지로부터 번지는 빛은 촛불보다 밝지 않았고, 기름 램프보다 약했지만, 그것은 감동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p.205~p.206)
마람은 아당송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삼촌에게 맡겨져 온갖 학대를 당하며 성장했던 마람은 결국 노예로 팔려갔었지만, 가까스로 도망쳐서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자신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늙은 치유사의 모습으로 변장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야생의 아프리카처럼 원시의 아름다움을 지닌 마람이 아당송에게 들려준 고난의 인생사는 당시 유럽 열강들이 세네갈을 수탈했던 수난의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람을 깊이 이해하게 된 아당송은 마람에게 점차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나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그녀를 죽음으로 이끌 형벌을 방관하기에는 그녀를 향한 나의 사랑이 너무 커졌고, 혹여 그녀가 나와 헤어져 멀리 떨어져 산다고 해도 그녀가 어딘가에 살아있기를 바랄 만큼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우리가 그녀를 구하기 위해 취한 행동 때문에 그녀가 나를 증오하게 된다고 해도, 나는 그녀의 가족의 명예보다 마람이 살아있는 것을 원한다고 은디악에게 답했다." (p.269~p.270)
다시 붙잡혀 흑인 노예로 팔려갈 위기에 처한 마람을 구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던 아당송은 결국 자신의 눈앞에서 연인의 죽음으로 목도하고 만다. 연인을 잃은 후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던 아당송은 결국 프랑스로 귀국하여 식물 연구에만 몰두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를 초대한 어느 파티에서 마람을 닮은 초상화를 보게 되고, '오르페우스와 유리디스'의 한 대목이 연주되는데...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는 누가 높고 누가 낮은 곳에 위치하는 위계질서나 서열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다. 그러나 두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고 사랑이 파탄에 이를 듯한 위기에 처한 순간 둘 사이의 서열은 극명하게 드러난다. 낮은 곳에 위치한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잃더라도 사랑을 선택하는 반면 우위에 있는 사람은 대개 자신의 생명을 구하는 쪽을 선택하게 된다. 그렇게 살아남은 사람은 결국 연인을 향한 그리움과 죄책감에 시달리겠지만 인간의 이기심은 대개 사랑보다는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쪽으로 움직이게 마련이다. 아당송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마치 참회록처럼 기록하여 자신의 딸에게 남겼다.
한낮에도 바람이 어찌나 차던지 도통 외출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크리스마스가 코앞으로 다가왔고, 거리를 오가는 행인들의 코는 마치 루돌프의 코처럼 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인간의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아마도 그 끝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속이 빈 것에 대해,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우리는 막연한 기대를 품곤 한다. 그것이 때로는 아름다움으로 포장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