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이란 말 따위 - 딸을 빼앗긴 엄마의 마약 카르텔 추적기
아잠 아흐메드 지음, 정해영 옮김 / 동아시아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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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칙적인 삶을 살아간다고 해서 남은 삶도 규칙적으로 흘러갈 것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삶이란 언제나 우리의 예상을 깨고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운전을 시작하면서 자주 듣게 되는 말 중 하나가 '나만 조심한다고 해서 사고가 안 나는 것은 아니야.'인 것처럼 자신의 삶을 열심히, 앞만 보고 성실하게 살아간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결과가 주어진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삶이란 나뿐만 아니라 나를 둘러싼 수많은 관계와 이어짐에 의해 이루어지는 공동작업이기도 하고, 그와 같은 관계를 나 역시 나 몰라라 하고 외면할 수만은 없는 경우가 허다하게 발생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냉정한 사람일지라도 가족에게 발생한 끔찍한 사고를 어찌 외면할 수 있단 말인가. 그로 인하여 나의 삶이 180도 달라질 수 있음을 어찌 계산할 수 있단 말인가.


얼마 전 뉴욕타임스의 국제 탐사보도 특파원인 아잠 아흐메드가 쓴 르포르타주 <두려움이란 말 따위>가 출간되었다. 무너진 공권력과 이 틈을 비집고 성장한 마약 카르텔이 멕시코 지역사회를 어떻게 붕괴시키는지 그 과정을 생생하게 묘사한 범죄 르포르타주 <두려움이란 말 따위>는 마약 카르텔 조직에 의해 납치된 딸을 찾기 위해 범인을 직접 추적해야 했던 미리암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멕시코 타마울리파스주(州) 산페르난도 지역에 살고 있던 미리암 로드리게스와 루이스 살리나스 부부에게는 큰딸 아잘리아와 아들 루이스 엑토르, 막내딸 카렌을 둔 평범한 가정이었다. 그러나 남편의 고질적인 외도와 그 반작용으로 대학생이었던 카렌이 엇나가기 시작하면서 가족들의 걱정이 시작되었다.


"2년 전이었던 2014년 1월, 플로리스트를 비롯한 세타스 일당이 카렌을 납치했다. 미리암은 애걸복걸하며 세타스의 모든 지시에 따랐고, 감당하기 힘든 수준의 몸값까지 지불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전혀 없었다. 그들은 카렌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조차 알려주지 않았다. 정부 당국에서는 탄원을 무시하고, 무관심하고 형식적인 대응으로 일관하는 등 미리암을 외면했다."  (p.12)


평범한 주부에 지나지 않았던 미리암은 현실을 직시한 후 딸을 납치한 자들에게 복수를 다짐했다. 추적에 나선 지 2년 만에 추적 명단 속 6명은 교도소에 수감됐고, 4명은 세타스의 거점을 습격한 해병대에 사살됐다. 이 모든 과정에 미리암이 관여했다. '아마추어 수사관'으로 활약했던 것은 물론 딸의 유골을 수습하기 위한 DNA 검사 역시 그녀의 몫으로 남았다. 딸의 복수를 위한 집요한 추적 과정에서 가족들의 도움이 있었던 것은 물론이다. 카렌의 유골을 수습하고 납치범을 잡아 법정에 세우면 그 위험한 범죄 조직에 맞서는 행위를 그만두겠다던 미리암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공권력의 부패와 범죄조직과의 유착으로 인해 자신과 같은 납치 피해자 가족은 수를 파악할 수 없을 만큼 증가하였고, 그들의 고통을 차마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실종 피해자 가족들은 굴하지 않았다. 피해자 가족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살았다고도 죽었다고도 할 수 없는 경계에서 살아간다.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 못지않게 불확실함에 시달린다. 상실감이라는 유령과 살며 가족이 돌아올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고문당한다. 희망은 자식이나 남편, 동생, 사촌의 유해라도 찾겠다는 열정이 되기도 하고, 피해자 가족들을 소진시키기도 한다."  (p.208)


4년간 관련 인물을 수백 시간에 걸쳐 인터뷰하고 2만 쪽이 넘는 사건 파일과 재판 기록을 입수해 사건을 재구성했던 저자의 노력 때문인지 범죄 현장을 취재한 논픽션이라는 느낌보다는 범죄 스릴러 소설처럼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멕시코 혁명 이후 탄생한 '걸프 카르텔'이라는 마약 범죄조직의 역사·지역적 배경을 다루면서 걸프 카르텔 조직이 약화되는 과정에서 성장한 신흥 범죄조직 '세타스 카르텔'을 다루고 있다. 세타스는 미국과 멕시코의 접경지역에 있는 작은 마을인 산페르난도를 중심으로 말할 수 없이 잔인한 범죄를 수시로 저질렀고, 이들을 두려워한 마을 주민들 역시 그들을 신고하거나 증언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오직 딸의 복수를 위해 나섰던 미리암은 실종 피해자 가족 모임을 이끌면서 범죄조직에 맞서 싸웠다. 자신의 안위를 등한시한 채 말이다.


"죽음과 시신 훼손이 일상이 된 곳에서는 당국의 무능함과 냉담함과 무관심도 일상이 된다. 너무 지친 피해자 가족들은 더 이상 당국에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고, 그 사실이 폭력으로 엉망이 된 상황을 수습할 책임이 있는 자들을 더욱 둔감하게 만들었다. 죽음의 악순환이었다."  (p.318)


한 국가의 치안은 오직 그 나라의 공권력에 의존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민주주의의 성숙과 국민 전체의 의식 수준이 그 나라의 치안과 질서 수준을 결정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국민의 안전을 책임져야 할 국가의 공권력은 시민의 감시나 재촉이 없다면 너무나 쉽게 무너지기 때문이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고 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말처럼 범죄조직에 대한 시민의 두려움이 크면 클수록 범죄는 활개를 치고 이에 맞서야 할 공권력은 더욱 움츠려들게 마련인 것이다.


길었던 겨울도 끝이 보이고 있다. 친위 쿠데타라는 가장 무시무시한 악의 카르텔을 맨몸으로 막아냈던 우리 국민의 용기는 세계인의 귀감이 되고 있다. 군부독재 치하에서 자행되었던 내란과 이를 극복했던 경험이 우리에게 맨몸으로 저항할 용기를 심어주었는지도 모른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면서도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로 대접받을 수 있는 까닭도 불의에 굴하지 않는 국민의 용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와 같은 용기는 우리 국민 전체의 높은 시민의식에서 비롯된다. 보이는 것은 언젠가 닳아 없어질 수 있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 국민 각자의 시민의식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 다시 봄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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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명절 연휴가 끝난 엊그제 오후의 께느른한 시간에는 국민 전체의 눈과 귀가 지귀연 재판부로 쏠렸었습니다. 명절이나 여행은 기다리는 시간이 설레고 두근거릴 뿐 막상 닥치면 피곤함과 이런저런 스트레스로 인해 어서 빨리 끝났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는 점에서 서로 유사한 측면이 있습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명절 후에 맞는 출근 첫날은 저마다의 사정을 터놓고 말하지 않아도 얼굴에 덕지덕지 붙은 피곤의 그늘과 느린 발걸음만으로도 힘듦의 강도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하겠습니다. 가뜩이나 힘든 하루를 꾸역꾸역 버티고 있던 사람들에게 내란 우두머리 혐의를 받는 윤석열 피고인에 대한 1심 선고 생중계는 더없이 좋은 핑곗거리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사실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어 재판정은 낯선 공간일 뿐만 아니라 사는 동안 단 한 번도 가보고 싶지 않은 기피의 공간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느닷없는 비상계엄 선포와 끊이지 않는 선전 선동으로 다수의 국민을 공포에 떨게 했던 윤석열에 대한 사법부의 판단을 지켜보는 것은 일반 형사재판을 보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지귀연 재판부가 내린 형량에 비해 그가 읊었던 판결문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판결문 곳곳이 논리에 맞지 않았던 것은 물론 그가 썼던 비유나 역사적 사실의 언급에 있어서도 상황에 맞지 않거나 일반인도 그 오류를 쉽게 지적할 수 있는 문장들이 여럿 등장했습니다. 국민적 관심사가 집중된 재판의 재판장으로서 그처럼 형편없는 판결문을 낭독한다는 건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부끄러워 낯을 들 수 없게 만든 장면이었습니다. 재판을 지휘하고 판결문을 쓰는 일을 한두 번 해본 것도 아닐 텐데 어쩌면 그렇게 부실한 판결문을 대중 앞에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그는 어쩌면 부끄러움을 모르는 인간이거나 사법적 정의는 지나가는 개에게나 줘버린 못난 사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한나 아렌트의 인터뷰집 <한나 아렌트의 말>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등장합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집필한 의도 중 하나는 악惡이 위대하다는 통설을, 악마 같은 세력이 위대하다는 통설을 깨뜨리고, 사람들이 리처드 3세 같은 엄청난 악인들에게 품고 있는 존경심을 걷어내는 것이었어요."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우리에게는 대체로 '악마 같은 세력이 위대하다'고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비상계엄을 선포했던 윤석열과 그의 추종자들에 대해 우리 사회 곳곳에서는 여전히 '윤어게인'을 외치며 그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세력이 존재하는 걸 보면 한나 아렌트의 말이 전적으로 옳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비상계엄이 성공하고 그들의 계획이 순서대로 착착 진행되었더라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을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내란의 우두머리인 윤석열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고는 하지만 '악惡이 위대하다는 통설'은 여전히 유효한 듯 보입니다. 어쩌면 우리 사법부의 일부 재판관들도 '악마 같은 세력이 위대하다는 통설'을 믿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명절 연휴 뒤에 맞는 첫 번째 주말, 계절은 이제 겨울을 벗어나 봄으로 향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여전히 '악惡이 위대하다'고 믿는 내란의 잔존 세력에 의해 정치적 겨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합니다. 그럼에도 비상계엄을 저지했던 대한민국 국민이 노벨평화상 후보로 선정되었다는 사실이 우리를 기쁘게 합니다. 우리나라 국민이 노벨평화상을 받게 된다면 '윤어게인을' 외치던 일부 몰지각한 사람들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선善이 위대하다는 통설'을 믿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정치적 겨울의 한파가 그때 이후에는 조금 풀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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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앙스 - 성동혁 산문집
성동혁 지음 / 수오서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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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진실된 면모는 감동을 향해 나아가는 데 있다. 그러므로 대작(大作)은 언제나 큰 고통을 경험한 이의 몫이며, 고통에 대한 진정한 대가는 물질적 보상이 아니라 울림과 감동으로 주어진다. 그와 같은 원칙은 세대가 바뀌어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고통에 친숙하거나 우리네 삶의 대부분이 고통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은 아니다. 인간은 고통을 통해서만 스스로 겸손해지는 법을 터득하고, 거듭되는 고통을 통하여 가장 넓은 폭의 이해력을 획득한다. 고통이 없다면 타인의 삶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의 삶에서 일부러 고통 속으로 뛰어들 필요는 없지만, 자신의 고통이 유일한 것인 양 불평할 필요도 없다.


소아 난치병 환자로 어린 시절 다섯 번의 대수술을 받았고, 지금도 여전히 투병 중에 있는 성동혁 시인의 산문집 <뉘앙스>를 읽었던 대부분의 독자가 큰 감동을 느끼는 까닭도 거기에 있다. 시인의 산문집을 좋아하는 나의 특별한 기호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는 고통 속에서 끌어올린 시인의 아름다운 문장과 인간 본연의 보편적 감성이 책을 읽는 독자 모두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것은 육체의 고통이 아름다움을 지향하는 영혼의 행로를 결코 방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고통이 지배하는 육체 안에서도 의지만 있다면 얼마든지 우리의 영혼은 언제나 아름다움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정적 속에서 사뿐하게 상대를 이해해야 할 때가 있다. 상대를 감싼 모든 것이 그의 언어임을 알고 풍경을 눈여겨볼 때가 있다. 세계엔 손잡이가 없다. 그래서 쥐자마자 델 수 있다. 손이 닿기 전에 알아야 하는 것이 있다. 사랑할수록 작은 뉘앙스에 휘청거린다. 시 또한 그러지 않을까. 무엇을 쓰려고 할 때, 그것 앞에서 바들바들 떠는 일, 그것 앞에서 눈치를 보는 일, 사소한 움직임 하나에도 나의 생활이 엉망이 되는 일. 사랑할 때 무심히 넘겨야 할 말은 아무것도 없다. 뉘앙스, 말하지 않아도 들어야 하는 말. 당신이 쓰고 내가 읽는 마음. 뉘앙스."  (p.67 '뉘앙스' 중에서)


혹자는 성동혁 시인이 이동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간다기보다 타인의 삶을 그저 관찰하는, 관찰자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게 아니냐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모험과 도전만으로 구성되는 것은 아니기에 비록 이동은 불편하지만 그에게는 남들이 볼 수 없는 아주 작은 부분까지 관찰하고, 이를 통하여 깨닫고, 공감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개발되었으니 그도 역시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겠다. 게다가 그의 곁에는 시월이 왔음을 알려주는 다정한 이웃이 있고, 그를 등에 업고서라도 산 위에서의 멋진 풍광을 보여주고 싶어하는 친구도 있다. 그의 병상을 지키는 가족이 있고, 하트 모양 스티커를 건네는 같은 병동의 어린이가 있다. 그로부터 시작된 아름다움이 화선지의 먹물처럼 번져가는 것이다.


"어린이 병동을 다니며 한동안 스티커를 챙겨 다니곤 했다. 간호사 선생님의 명찰에 아이들이 붙여 준 스티커를 자주 본다. 아이들에겐 스티커가 사랑의 표현 방법이다. 감사하게도 내 노트북엔 같은 병실에 있던 아이가 붙여 준 두 개의 스티커가 있다. 은색 별과 파란 하트. 작고 반짝이는 내 부적."  (p.102)


흩어져 있던 십여 년의 기록들 속엔 문득문득 회색빛 슬픔이 그려지기도 하고, 가눌 수 없는 절망이 비틀대기도 한다. 때로는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애틋함이 무거운 삶을 짓누르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는 걷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장담할 수 없는 희망이 있는 것처럼 시인에게도 결코 포기할 수 없는 게 있는 것이다. 그를 도와준 의료인들 덕분에 십 대와 이십 대를 지나 삼십 대의 삶도 이어올 수 있었지만 남들과 다른 불공평한 자신의 삶에 대해 어찌 분노가 없었을까.


"미워하는 마음이 사랑하는 마음을 이기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곤 했다. 우울하지 않고 유쾌한 내가 될 수 있기를 기도했다. 슬픔이나 분노, 우울은 이윽고 사라지지 않고 몸이나 영혼 어디에 남았다. 그것들이 삶을 망칠 때가 있기도 했다. 방치하듯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사람들이 도왔지만 결국 그곳에서 빠져나오는 건 스스로의 몫이기도 했다. 쓴다는 건 뭘까라는 질문보다 산다는 건 뭘까라는 질문이 선행되어야 했다. 그렇게 일 년 정도 시를 쓰지 않고 휴식을 가졌다. 휴식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 년 후엔 시를 다시 쓰기 시작했고 다시 살아갔다. 누군가에겐 일 년은 아무것도 아닐 수 있겠지만 내게 그 시간은 시를 쓰기 시작하고 처음으로 시를 쓰지 않던 긴 시간이었다."  (p.179 '일부' 중에서)


몸이 건강하다는 건 타인의 아픔을 세심히 살필 수 없는 , 영혼의 시력 저하를 야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통 속에서도 끝없이 아름다움을 찾는 성동혁 시인과 같은 이의 글을 반복해서 읽어야 한다. 그리고 그때마다 마음속 다짐을 되새겨야 한다. '나는 타인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겠다'라고. 오늘은 민족 최대 명절인 설날. 많은 사람들이 오랜만에 가족과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가족을 잃고 거리에서 명절을 맞는 유가족들도 있었다. 텔레비전 뉴스에서 잠깐 보았던 그들의 모습을, 그 아픔을 우리는 모르는 체 방치해서는 안 된다. 애써 숨겼던 당신의 아픔을 우리가 보았노라고 그들을 응원해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영혼의 시력을 높여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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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위가 풀린 것까지는 좋았는데 미세먼지가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기다렸다는 듯 말입니다. 최근 감기 몸살을 심하게 앓았던 탓인지 대기질이 조금만 나빠져도 금세 반응이 나옵니다. 전에는 하지 않던 기침과 가슴이 답답해지는 느낌 등이 그런 것입니다. 이럴 바에는 차라리 한겨울 추위가 다시 찾아오는 게 오히려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언제부터 우리는 미세먼지의 공습에 이렇듯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되었는지... 풀리지 않는 과제를 강제로 떠안은 듯 한숨이 절로 터져 나옵니다. 명절 연휴 이틀째인 오늘, 하늘은 여전히 뿌옇고 흐릿합니다.


크리스티앙 보뱅의 에세이 <세상의 빛>을 읽고 있습니다. 사실 내가 크리스티앙 보뱅을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비교적 최근의 일이라고 해야겠지요. 작가의 명성이나 지적 깊이보다 작가의 문장력에 쉽게 빠져드는 나로서는 크리스티앙 보뱅이라는 작가의 매력에 단박에 빠져들지 않을 재간이 없었습니다. 이런 훌륭한 작가의 글을 그동안 어떻게 외면하고 지낼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들 정도였습니다.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예찬>을 읽었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사회학자인 다비드 르 브르통의 글은 문학적 글쓰기를 주업으로 하는 웬만한 시인이나 소설가의 문장력 이상이었습니다. 나의 시선을 단박에 사로잡는 이런 작가들은 도대체 어떤 경로로 나와 연결되는 것일까요.

"글쓰기는 보편적으로 자폐적인 성향을 지닌다. 시인은 말을 하는 자폐인이다. 텅 빈 방 안의 헐벗은 인간. 그는 자신의 빛을 붙잡고 있기에 무엇도 밝히지 못한다. 그러나 글을 쓰면서 자신의 피부를 뒤집어 놓는데, 피부의 안쪽은 눈부신 색채들로 수 놓여 있다. 자폐는 빛줄기들이 안쪽을 향해 있는, 뒤집힌 태양이다. 겉은 매끄럽고 아무런 감각도 매력도 없지만, 그 안에는 전례 없는 장엄함이 깃들어 있다. 한 사람이 자기 안에 갇혀 있는 한, 아무것도 - 혹은 거의 아무것도 - 밖으로 발산되지 않는다. 그러다 마침내 자신을 표현하게 되면, 그 내면에서 쏟아져 나오는 광채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눈부시다. 침묵하는 자폐인처럼, 시인은 글을 쓰며 자신을 묻는다. 그는 자기 안의 영광 속에서 살며, 세상으로부터는 죽은 존재다."  (p.18~p.19)

얼마나 아름답고 탁월한 시선인지요. '시인은 말을 하는 자폐인'이라는 표현도, '시인은 글을 쓰며 자신을 묻는다'는 문장도, '그는 자기 안의 영광 속에서 살며, 세상으로부터는 죽은 존재다'라는 결론도 문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듯한 지식이지만, 이렇게 단정적으로 또는 적확한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을 우리는 내심 수긍하게 됩니다. 세상에는 이미 많은 작가들이 있고, 여전히 더 많은 작가들이 새롭게 유입되고 있지만 독자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작가는 한정적입니다. 그런 작가들의 면면 속에는 어쩌면 깊은 사유와 끊이지 않는 발견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설 연휴 이틀째인 하루가 조용히 흐르고 있습니다. 나는 딱히 한 일도 없이 미세먼지를 핑계로 제 몸의 살집만 불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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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refox 2026-02-17 0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도 행복한 한해 되세요~

꼼쥐 2026-02-17 20:27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firefox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마힐 2026-02-17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쥐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 늘 편안하고 무탈한 한 해 되시길 기원드립니다. .

꼼쥐 2026-02-21 15:45   좋아요 0 | URL
늦었지만 마힐 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행복하고 건강한 하루하루가 이어지기를~~
 
너의 좋은 날을 살아봐 - 제주 사는 미술치료사의 마음, 예술, 자연 이야기
정은혜 지음 / 아라의정원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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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에 비해 비교적 고단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운명'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곤 한다. 좋아하고 잘한다고 생각하는 일을 따라 이 일 저 일 안 해본 게 없지만, 어떤 이유에선지 하는 일마다 진득하니 오래 버티지를 못하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그만둘 수밖에 없었던 경험이 손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아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횟수가 많아질수록 스스로의 삶에 대한 의문과 혼란이 가중된다. 그들 중 어떤 이는 혼란과 동요 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의 길을 발견하기도 하지만, 많은 이들이 자신의 혼란한 삶을 끝내 극복하지 못한 채 그저 운이 없었을 뿐이라고 자위한다. 영문도 모르는 채 말이다. 우리는 그것을 '운명'이라 부른다. 그리고 운명에 거스르는 길을 선택했던 많은 이들이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는 혼란한 삶을 살다 갔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를 썼던 엘리자베스 길버트와 같은 삶을 살았던 이는 어쩌면 몇 안 되는 행운아 중 한 명이었을지도 모른다.


미술치료사이자 생태예술가로서 제주에서 살고 있는 정은혜 작가 역시 그런 행운아 중 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비록 그녀의 삶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지만 결국 자신이 좋아하고 운명에 거스르지 않는 길을 스스로 찾아냈으니 말이다. 작가의 산문집 <너의 좋은 날을 살아봐>는 그와 같은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방탕한 삶을 살아왔거나 길을 잃고 헤맸던 것도 아닌데 작가는 힘들고 고단했던 길을 돌고 돌아 지금에 이르렀다. 청소년기에 캐나다로 이민 가서 퀸스 대학교 미술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미술사를 공부했던 작가가 한국에 와서 미술관 큐레이터를 경험한 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 예술대학(SAIC) 석사학위를 받고 미국 공인 미술치료사가 되었던 작가. 그와 같은 이력만으로도 순탄하고 편안한 삶을 꾸려갔을 듯한데 그렇게 되지 않았다.


"나는 지금의 삶을 사느라 많은 것을 포기해왔다. 미술치료사가 되기 위해서 미술관 큐레이터 일을 포기했고, 한국에 돌아오기 위해서 캐나다와 미국에서의 삶을 포기했고, 서울에서 제주로 올 때는 안정적인 직장과 돈을 벌 기회를 포기했다. 나는 지금의 삶을 위해서 얼마나 많은 것들로 값을 치렀는지를 잊은 적이 없다. 내 삶에 만족하는 이유가 어쩌면 '잠정적 손해'로 비싸게 값을 치르고 선택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p.153)


선택의 가능성이 열려 있는 상황이라면 누구나 갈등과 혼란은 피하기 어렵다. 갈등을 최소화하고 확신을 강화할 수 있는 방법은 그 일을 통해 추구할 수 있는 삶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일인지 몇 번이고 되짚어보는 것이다. 작가 역시 다르지 않았다. 자신의 삶에서 원하는 것 세 가지(친구, 자연, 카페)가 제주에 있었기 때문이다. 작가는 제주의 자연 속에서, 제주에서 새롭게 형성한 관계 속에서 안정을 찾고 있는 듯했다. 그렇게 안정된 삶을 기반으로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그리고, 모래사장을 기어 다니며 주운 작은 플라스틱 알갱이로 설치 작품을 만들고, 시간을 내어 글을 쓴다.


"상처 없는 이가 없고, 스크래치 없이 어른으로 성장한 이는 없음을 깨달았다. 나만 그랬던 것이 아니었다. 우리의 경험이 다르고, 문화와 나라가 다르고, 전혀 다른 가족 안에서 있었던 일인데도 내 아픔의 계곡과 다른 이들의 아픔의 계곡 사이에 연결된 다리가 있고, 이 다리를 통해 연민으로 이어지는 것 같았다."  (p.207)


작가는 이 책의 원고를 처음 쓰기 시작한 시점이 '삶이 무너지고 관계들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듯한 때'였다고 회상한다. 누구에게나 자신의 인생 전체에서 그런 시기는 한두 번쯤 찾아오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그 상황에 처한 모든 사람이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것은 아닐 터, 삶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기 위한 발버둥의 방식은 서로 비슷한 듯 조금씩 다를 것이다. 누군가는 시간을 내서 글을 쓰고, 누군가는 신발이 닳도록 숲을 거닐고, 또 누군가는 모든 관계를 끊고 침묵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비록 각자의 방식으로 삶의 협곡을 벗어났을지라도 자신의 경험만큼은 필요로 하는 다른 누군가에게 소중히 전달하고, 자신도 역시 오래도록 잊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우리 모두 죽어서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이 은유적으로도 실제적으로도 괜찮게 여겨진다면 우리가 맺는 자연과의 관계가 좀 달라질까? 자연의 일부인 우리는 누구나 이 순환의 어느 단계 안에 놓여 있다. 이 순환을 잘 받아들이면, 자연을 파괴하고 영원히 살고픈 욕망을 좀 내려놓고 우리가 죽이는 다른 생명들에게 연민을 더 가질 수 있을까. 사는 것도 죽는 것도 약간은 덜 무서워지지 않을까."  (p.284)


설 명절 연휴가 시작되는 첫날, 나는 밀린 숙제를 하듯 리뷰를 쓴다.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지난 추억을 되새김하는 것처럼 우리는 명절을 핑계 삼아 삶의 순환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뜬 사람들과 다음은 내 차례라는 듯 '아이고' 소리를 달고 사는 친척들과 갓난쟁이를 앞세우고 나타난 젊은 부부며 제법 어른 티가 나는 학생들 그리고... 명절이 아니면 같은 자리에서 한꺼번에 만날 수 없는 여러 얼굴들이 지난해에 비해 크게 달라진 모습을 하고 나타났다. 삶의 순환이란 바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렇게 타인을 통해 나의 변화를 감지하고 왠지 모를 슬픔에 숙연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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