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내린 겨울비 탓인지 새벽의 등산로는 흠뻑 젖어 있었다. 비에 젖은 낙엽이 손전등 불빛에 반사되어 보석처럼 빛났다. 나뭇가지에 고여 있던 빗물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후드득후드득 떨어지는 것이 마치 빗소리처럼 들렸다. 등산로에 드러난 나무뿌리는 물에 젖어 몹시 미끄러웠다. 기온은 크게 떨어지지 않았지만 산을 찾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지레 겁을 먹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들고양이 한 마리가 나를 피해 빠르게 달아났다. 온 산이 비에 젖어 축축한데 고양이는 도대체 어디서 잠을 잤던 것일까.


매년 이맘때쯤이면 늘 고민하는 문제가 하나 있다. 내 삶에 영향을 줄 만큼 심각한 문제는 아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블로그의 유지 문제이다. 어처구니없게도 나는 매년 연말이면 이 문제를 두고 씨름을 한다. 내년부터 블로그를 접을 것인지 말 것인지 자본주의 논리로 저울질을 해보는 것이다. 블로그를 유지하는 것의 이점은 수박 겉핥기식으로 대충 하는 독서이지만 이따금 리뷰를 쓰는 바람에(때로는 출판사에서 책을 기증받은 까닭에 의무적으로 리뷰를 써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가뜩이나 게으른 내가 읽었던 책에 대한 기록을 종종 남길 수 있다는 것과 마음이 심란할 때 짧게나마 한 편의 글을 쓰고 나면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을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반면에 블로그를 유지함으로써 얻는 불이익은 시간을 많이 빼앗긴다는 게 가장 크고, 일이 바쁠 때 출판사로부터 받은 책의 리뷰를 기한 내에 써야 한다는 부담감이 꽤나 크다. sns에서 일체의 상업적 영리 활동을 하지 않기로 결심에 결심을 하고 있는 나로서는 언제나 블로그를 유지하는 것이 득보다 실이 많다는 결론에 이르고 마는데 그럼에도 10년 넘게 블로그를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어쩌면 다른 데 그 원인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랬다. 나는 매년 연말이 다가올 때마다 '올해로 블로그는 끝내고 내년부터는 일기장이나 한 권 쓰자'는 생각을 늘 했었다. 그러나 그때마다 나를 붙잡았던 건 시답잖은 나의 글을 꼼꼼히 읽고 따뜻한 댓글을 남겨주는 이웃 때문이었다. 나는 사실 나와 가까운 이에게는 내가 블로그를 한다는 사실을 철저히 숨기고 함구하고 있다. 친분이 있는 누군가가 내 글을 읽고 있다고 생각하면 정작 내가 쓰고 싶은 말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걸림돌을 나는 애시당초 원하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내 블로그는 나만의 놀이터인 동시에 속을 터놓을 수 있는 정신적 분출구였던 셈이다. 말하자면 내 블로그의 글을 읽고 댓글을 남기는 사람은 모두 나와는 친분이 없는, 얼굴도 이름도 알지 못하는 익명의 제삼자일 뿐이다. 그럼에도 내 글을 읽었던 어떤 이웃은 내가 만약 책을 출간한다면 가족 열 분을 제외하고 열한 번째 독자가 되겠노라 약속하신 적도 있었고, 비밀 댓글로 감사의 마음을 전해온 이웃들도 적지 않았다. 나는 사실 책을 낼 정도로 글재주가 있는 사람도 아니고, 그 정도의 지적 능력이 있는 사람도 아니지만, 진심을 담은 그런 댓글을 읽을 때마다 블로그를 1년만 더 유지하자는 쪽으로 못 이기는 척 기울었던 것이다.

오늘은 성탄절 이브. 하늘은 종일 어둡고 칙칙했지만 만났던 사람들의 표정은 더없이 밝았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인사가 툭툭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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쎄인트 2025-12-24 16: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역시 저와 한번이라도 얼굴을 대면했던 사람들은 제가 올리는 글을 못 볼 것입니다. 그럼에도 제가 꾸준히 글을 남기는 것은, 나 자신에게 “당신 아직 살아있어. 아직 숨 잘 쉬고 있어.”하는 격려이자 메시지입니다. 때로 출판사 증정도서 의무방어전에 힘들 때도 있지만, 그것 역시 감사할 따름이지요. 새해에도 꼼쥐님의 글을 계속 만날 수 있게 되길 소망합니다. 몸과 마음 늘 강건하시고 평안하셔요.

차트랑 2025-12-24 17: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감탄사가 절로나오는 꼼쥐님의 글을 읽을때마다
작가가 빙의했구나 싶어 무척이나 경도되었습니다.
글 솜씨가 빛을 발하는 날이 오기를 기다려봅니다!

그나저나,
PC 버전으로 보니 금메달이 주렁주렁 열렸군요 꼼쥐님!!
이정도면 알라딘 은퇴하시기 쉽지 않으실듯요~

잉크냄새 2025-12-24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따뜻한 글을 읽고 시답잖은 댓글을 남기는 1인입니다. ㅎㅎ
시간을 쪼개어 쓰시는 이 글들이 누군가에게 꾸준히 읽히고 있다는 연대와 응원의 표시겠지요.

호시우행 2025-12-24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도 한 이웃합니다. 건강한 2026년도 응원합니다.
 
작별 너머 - 돌아올 수 없는 여행의 문
다비드 디옵 지음, 목수정 옮김 / 희담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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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이야기는 넘어야 할 장애물이 있을 때 더욱 애틋해진다. 순탄하고 무난한 사랑이 당사자들에게는 물론 그것을 전해 듣는 사람들에게도 더불어 행복을 안겨줄 텐데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그런 이야기는 오히려 부러움이나 질투의 대상이 되고 마니 말이다. 그런 까닭에 무난한 사랑 이야기는 귀를 쫑긋 세우고 빠져들 만한 대상은 되지 못한다. 사람 심리가 이상한 것인지 아니면 지구상의 모든 인간은 죄다 나쁜 마음의 소유자들로만 구성된 것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나 역시 무난한 사랑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다. 어찌어찌 만나서 연애를 하고, 날 잡아 결혼을 하고, 원하는 만큼 자식을 낳아 평생 동안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이야기는 그 이야기를 듣거나 읽는 이에게 더없이 큰 기쁨과 행복을 안겨줄 만도 한데 인간의 심성은 다소 표독스러운 데가 있어서 그런 이야기에는 도무지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다. 다비드 디옵의 소설 <작별 너머>를 읽게 된 동기 이면에는 어쩌면 그런 이유가 포함되었을지도 모른다. 소설의 주인공인 미셸 아당송과 마람의 사랑 이야기를 읽는 독자는 그리스 신화 <오르페우스와 유리디스>의 비극적인 사랑을 떠올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나의 종교적 원칙과 이토록 위험하고도 아름다운 모습으로부터 멀찌감치 거리를 두어온 나의 강력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나는, 완전히 벗은 몸으로 빗물이 가득 채워졌는지 보려 모든 항아리를 하나하나 살피느라 여념이 없는 마람을, 그녀를 향한 내 시선을 거둘 수 없었다. 그녀는 비에 젖어 움직임을 방해하는 옷을 던져 놓고, 마치 신이 아직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지 않은 검은 이브처럼, 완전한 나신으로 자유롭고 아름답게 움직이고 있었다."  (p.177~p.178)


유럽 절대왕정 시대인 1700년대 세네갈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소설을 접한 독자는 책을 읽기도 전에 노예무역의 중심지였던 세네갈의 고레 섬을 문득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프랑스의 식물학자였던 미셸 아당송은 인생의 유일한 목표였던 <자연백과사전>을 저술하고, 그 저작을 통하여 식물학계 최고봉에 오르는 꿈을 지닌 야망가였다. 그는 새로운 식물을 발견하기 위해 프랑스 파리를 떠나 세네갈의 생루이 섬으로 향했다. 그의 나이 스물세 살 때였다. 그렇게 세네갈에서 연구를 이어가던 아당송은 노예로 팔려갔다가 기적적으로 돌아온 한 여인에 대한 소문을 우연히 듣게 된다.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던 아당송은 '돌아온 여인'을 반드시 만나야겠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길을 떠났고, 천신만고 끝에 마람을 만난다. 사막을 건너면서 낙마사고를 당하여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던 아당송이 결국 늙은 치유사에게 맡겨졌던 것, 그리고 아당송을 맡았 치유사가 바로 '돌아온 여인' 마람이었다. 마람은 소문만 듣고 자신을 찾아왔다는 백인 아당송을 처음엔 무척이나 경계했지만, 그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신뢰가 싹튼다.


"마람이 이 빛을 발하는 소금물을 가져다, 밤에 그녀의 오두막을 밝히는 불로 사용했다는 사실은 그녀에 대한 나의 애틋함을 더욱 증폭시켰다. 나는 그녀가 표현하는 방식의 세계관을 갖지 않았고, 그녀가 말하는 수호천사의 존재도, 인간과 자연이 하나의 몸을 이루고 있다는 고대 종교의 반인 반수의 존재도 믿지 않았지만, 그것들이 쓸모없는 것일지라도, 아름다운 것들에 대해 같은 매력을 느낀다는 사실이 나를 흥분시켰다. 바닷물로 채워진 물 단지로부터 번지는 빛은 촛불보다 밝지 않았고, 기름 램프보다 약했지만, 그것은 감동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p.205~p.206)


마람은 아당송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삼촌에게 맡겨져 온갖 학대를 당하며 성장했던 마람은 결국 노예로 팔려갔었지만, 가까스로 도망쳐서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자신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늙은 치유사의 모습으로 변장한 채 살아가고 있었다. 야생의 아프리카처럼 원시의 아름다움을 지닌 마람이 아당송에게 들려준 고난의 인생사는 당시 유럽 열강들이 세네갈을 수탈했던 수난의 역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람을 깊이 이해하게 된 아당송은 마람에게 점차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나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그녀를 죽음으로 이끌 형벌을 방관하기에는 그녀를 향한 나의 사랑이 너무 커졌고, 혹여 그녀가 나와 헤어져 멀리 떨어져 산다고 해도 그녀가 어딘가에 살아있기를 바랄 만큼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우리가 그녀를 구하기 위해 취한 행동 때문에 그녀가 나를 증오하게 된다고 해도, 나는 그녀의 가족의 명예보다 마람이 살아있는 것을 원한다고 은디악에게 답했다."  (p.269~p.270)


다시 붙잡혀 흑인 노예로 팔려갈 위기에 처한 마람을 구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던 아당송은 결국 자신의 눈앞에서 연인의 죽음으로 목도하고 만다. 연인을 잃은 후 마음의 안정을 찾지 못하던 아당송은 결국 프랑스로 귀국하여 식물 연구에만 몰두한다. 그러던 어느 날 그를 초대한 어느 파티에서 마람을 닮은 초상화를 보게 되고, '오르페우스와 유리디스'의 한 대목이 연주되는데...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는 누가 높고 누가 낮은 곳에 위치하는 위계질서나 서열이 존재한다고 믿지 않는다. 그러나 두 사람의 생명을 위협하고 사랑이 파탄에 이를 듯한 위기에 처한 순간 둘 사이의 서열은 극명하게 드러난다. 낮은 곳에 위치한 사람은 자신의 생명을 잃더라도 사랑을 선택하는 반면 우위에 있는 사람은 대개 자신의 생명을 구하는 쪽을 선택하게 된다. 그렇게 살아남은 사람은 결국 연인을 향한 그리움과 죄책감에 시달리겠지만 인간의 이기심은 대개 사랑보다는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는 쪽으로 움직이게 마련이다. 아당송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마치 참회록처럼 기록하여 자신의 딸에게 남겼다.


한낮에도 바람이 어찌나 차던지 도통 외출을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크리스마스가 코앞으로 다가왔고, 거리를 오가는 행인들의 코는 마치 루돌프의 코처럼 빨갛게 물들고 있었다. 인간의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아마도 그 끝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속이 빈 것에 대해,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 우리는 막연한 기대를 품곤 한다. 그것이 때로는 아름다움으로 포장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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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은 언제나 발치에서부터 시작된다. 하루 중 내가 가장 아끼는 시간. 새벽의 등산로에서 밟히는 흙의 감촉은 뒤꿈치에서 시작되어 가슴을 거쳐 정수리에 이른다. '오늘 아침 기온은 어제보다 조금 더 떨어졌나 보네. 흙이 꽁꽁 얼어 딱딱해진 걸 보니.'라거나 '오늘은 기온이 많이 올랐네. 흙이 부드러워졌어.', '비가 많이 왔나 보네. 여전히 길이 미끄러운 걸 보니.' 등 산을 오르는 내내 발밑에 밟히는 흙의 감촉을 매 발걸음마다 생생하게 느끼곤 한다. 그것은 곧 계절에 대한 감각이다. 매일매일 이어지는 이와 같은 탐색은 내가 살아있다는 증거요, 계절의 변화를 오롯이 즐기는 나만의 의식이기도 하다.


오늘 아침은 어제에 비해 기온이 낮았던 탓인지 등산로의 느낌은 딱딱하고 거칠었다. 서리가 내려앉은 낙엽도 꽤나 미끄러웠다. 새벽의 고요를 탁한 어둠이 짓누르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어제 낮에는 많은 등산객이 오고 갔는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쓰레기가 눈에 띄었다. 코를 풀고 버린 화장지며, 일회용 마스크며, 단골손님처럼 보이는 사탕껍질이며, 심지어 스포츠 용품 홍보 팸플릿에 이르기까지 등산로에는 정말 온갖 종류의 쓰레기가 버려진다. 나는 누군가 버린 쓰레기를 주워 내려오느라 때로는 생각지도 않은 시간을 허비하곤 하지만 다음날 깨끗해진 등산로를 다시 걷고 있노라면 괜스레 뿌듯해지곤 하는 것이다.


정혜윤 PD의 에세이 <책을 덮고 삶을 열다>를 읽고 있다. 나는 유명 작가의 신작을 남들보다 늘 한 박자 늦게 읽는 편이지만 때로는 그것이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작용할 때가 많아서 평소에 내가 선호하는 작가라 할지라도 세간의 평이 그닥 좋지 않으면 구매를 미루거나 숫제 읽지 않고 지나치는 경우도 없지 않은 것이다. 물론 그 반대의 경우라면 구매를 서두르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나는 정혜윤 PD의 글을 즐겁게 읽어왔던 사람으로서 <책을 덮고 삶을 열다> 역시 바쁜 업무 틈틈이 아껴가며 읽고 있는 것이다.


"생명이 신비롭다는 생각이 어찌나 강력하게 가슴에 박혔던지 나는 이제 얼핏 본 낯선 사람의 피로에 절은 등판, 축 늘어진 어깨, 실망에 익숙해져가는 얼굴, 문 닫힌 가게, 언제나 약간씩 잘못되는 우리들의 이야기에 슬픈 자매애를 느낀다. 나는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이 삶을 견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충만히 '누리기'를 바라게 되었다. 그것만 바라는 것이 아니다. 위축되어 초라함에 떨지 않기를, 고개를 떨구고 혼자 어둠 속에 있지 않기를, 혐오에 빠져들지 않기를, 웃음과 유머를 잃지 않기를, 너무 고통받지 않기를, 힘을 잘못된 데 쓰지 않기를, 존엄성과 생명을 잃지 않기를, 자신의 능력과 기쁨을 찾기를, 사랑하고 사랑받을 기회를 가지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되었다."  (p.56~p.57)


나는 이 대목을 여러 번 반복하여 읽었다. 마치 어떤 종교의 탄트라와 같은 이 구절에 나는 깊이 공감했고, 생각할수록 경건해지는 느낌이었다. 내가 새벽의 등산로에서 키 큰 나무들에게 아침 인사를 건네는 것처럼 정혜윤 PD는 독자들을 향해 가슴과 가슴으로 벅찬 인사를 건네는 것 같았다. 나날이 혐오가 많아지는 세상, 전에는 없던 가상의 적도 새로이 만들어 혐오를 부추기고 내 편이 되어 달라고 서로를 향해 함성과 욕설을 내뱉는 세상, 주일에는 하느님의 사랑을 외치면서도 평일에는 온갖 욕설과 악담으로 종교인의 민낯을 여실히 보여주는 이 세상을 향해 작가는 뭔가 하고픈 말이 있었나 보다. 바람이 차다. 내일 아침 등산로는 꽁꽁 얼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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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쓰기 위하여 - 글쓰기의 12가지 비법
천쉐 지음, 조은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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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잘 쓴다는 건 타인과의 교감이나 소통이 원활하다는 의미일 테다. 물론 여타의 다른 재능도 필요할 테지만 말이다. 그러나 유명한 작가나 배우 중에는 의외로 낯을 심하게 가리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작가가 살아가는 실제 생활과 그가 작품 속에서 펼치는 가상의 공간 사이에 존재하는 이와 같은 괴리는 과연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그것은 아마도 현실 공간과 가상공간 중 어느 곳에 더 많은 비중을 두느냐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내가 만약 가상의 공간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그곳에 머무는 시간이 많아진다면 현실 공간에서의 나는 아마도 갓 전입한 이등병마냥 어리바리한 모습의 연속일지도 모른다. 말하자면 익숙한 곳과 익숙하지 않은 곳의 차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내 생각은 그렇다.


<오직 쓰기 위하여>를 쓴 천쉐 작가 역시 자신이 현실에서 사교성이 없다고 말한다. 1970년생인 작가가 연륜이 짧거나 경험이 부족해서 그랬던 것은 아닐 터, 작가는 오직 글을 쓰는 일에 몰두하였거나 삶의 비중을 글쓰기에 두고 살아왔기 때문일 것으로 여겨진다. 중문학과 대학생이 된 스무 살에 소설을 쓰기로 작정했다는 작가는 '가장 존경한 친구'로부터, 대학 문예 동아리 선생님으로부터 '창작의 소질 내지 소양이 없다'는 말을 들었었다고 고백한다. 그럼에도 작가는 어떻게 하면 남들보다 글을 더 잘 쓸 수 있을까 궁리했고, 경제적 어려움과 현실의 고난 속에서도 글쓰기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시간을 훔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됐다. 습관이 들고 나니까 쓰지 않으면 불편해졌다. 나중에는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만 쓰는 것이 아니라 저녁 시장에서 노점을 벌일 때도 노트를 들고 한쪽에서 쓸 수 있게 됐다. '습관'은 어떤 선언으로 변했다. 나는 소설을 쓰는 사람이다. 겉보기에는 야시장 행상인이지만 글쓰기는 내 마음속에 심어져 있고 내 생활에서 표현되고 있다. 때가 되면 나는 소설을 쓸 것이다. 돈을 충분히 모으지 못한다 해도 소설을 쓰겠다는 뜻을 나는 행동으로 여자친구에게 증명해 보였다."  (p.38)


출간은 '10년 뒤에나 생각하자'면서도 1년에 한두 편씩을 계속 썼던 작가는 친구가 자신의 작품을 신인상에 응모하는 바람에 출간의 기회는 의외로 빨리 찾아왔다. 그러나 작가의 작품 '악녀서'가 대만은 물론 홍콩에서까지 판매되는 중에도 작가는 타이중 야시장에서 옷을 팔았다. 혹여라도 독자가 알아보는 날이면 아니라면서 외면하곤 했다. 재능은 없고, 대학 졸업 뒤 빚더미 가족을 돕느라 시간은 더 없었던 작가는 서빙, 점원, 노래방 도우미, 대필 작가, 여행·모텔·인터뷰 기사 등 가리지 않고 처리하는 프리랜서 등을 하면서 가난하고 힘든 시기를 겪었다.


"장편소설 집필은 노동이라 할 수 있다. 오랜 시간 집중할 수 있는지, 긴 시간 한 글자 한 글자 두드릴 수 있는지, 그리고 구상해놓은 모든 생각이 진짜가 될 수 있는지 시험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예측하지 못한 갖가지 상황이 닥치지만, 모든 시련을 통과해야만 작품이 완성된다. 내 가장 큰 장점은 잘 버틴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그리 큰 기대가 없다. 그리하여 내 초고가 언제나 못 봐줄 만큼 끔찍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용감하게 쓰고, 고치고 또 고치며 나아간다."  (p.79)


우리는 종종 자신의 재능 없음만 탓하고 열정이나 노력의 부재에 대해서는 너그럽게 대하곤 한다. 예술 분야에 대해서는 특히 더 그러하다. 글을 쓰는 일이든, 그림을 그리는 일이든, 혹은 악기를 연주하는 일이든 그 분야의 타고난 천재보다는 긴 시간을 들여 끝없이 노력한 이가 그 분야에서 인정을 받는다는 사실을 때때로 잊어버리곤 한다. 꿈은 있지만 자신에게 타고난 재능이 없다고 풀이 죽어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을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1부 '내가 걸어온 창작의 길', 2부 '창작자에게 건네는 열 가지 조언', 3부 '프리랜서 업무 지침서' 등 3부로 구성된 이 책은 천쉐 자신의 회고록인 동시에 재능은 없고 열정만 가득한 모든 꿈쟁이들에게 건네는 희망가라고 할 수 있다.


"친구 말로는 내가 의지력이 강하다지만, 나는 의지력이 아니라 적응력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하고 싶은 일을 계속할 수 있게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내는 능력이랄까. 나는 인내심이 대단하고 온갖 좌절을 딛고 일어서고자 온 힘을 쥐어짤 수 있다. 갖가지 질병과 함께해왔기 때문에 고통 속에서도 글을 쓸 수 있는 갖가지 방법을 개발했다. 우리는 반드시 가장 강해질 필요가 없다. 그러나 더 멀리 걸어가기를 기대할 수는 있다."  (p.147)


천쉐 작가와 같은 노력형 인간의 성공기를 읽고 나면 갑자기 없던 힘이 치솟고 주먹에도 불끈 힘이 들어가지만, 그것도 잠시 열정 생성의 유효기간은 생각처럼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나는 천쉐처럼 의지력이 강한 사람도 아니요, 어떤 분야에 특별한 재능을 갖고 태어난 사람도 아니기에 그저 타인의 성공을 부러워하거나 때로는 누군가의 열정을 응원할 뿐 내가 직접 나서서 추진하지는 않는, 말하자면 나는 지극히 평범하고 때로는 가벼운 인간에 속한다. 그럼에도 나는 이따금 금세 지칠 듯한 거창한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분수에 맞지도 않는 큰 성공을 욕심내기도 한다. 그래도 하나 잘하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바로 반성을 잘한다는 것. 그리하여 나는 오늘도 어떤 거창한 계획을 하나 세울까 고민 중에 있다. 멀지 않은 시점에 통렬한 반성이 이어질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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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오전의 바깥공기를 체크하는 일은 휴일 일정에서 언제나 중요한 관심사 중 하나이다. 날아갈 듯 가벼운 꼬마가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뽀송뽀송 마른 보도 위를 사뿟사뿟 걷는 모습만 보아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가볍게 걷고 있는 사람들의 머리 위로 하얗게 부서지는 아침 햇살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서둘러 아침 산책을 나가야 할 것 같아 마음이 급해지곤 한다. 이와는 반대로 아스팔트가 온통 축축한 물기로 젖어 있고, 비가 쏟아질 듯 아침부터 하늘이 끄물끄물하는 날에는 뭉그적뭉그적 게으름을 피우게 마련이다. 세수도 한껏 미룬 채 뒹굴거리다 보면 시간이 훌쩍 지난 사실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게 된다. 그런 날에는 이상하게도 쇼팽의 녹턴에 마음이 끌린다. 셰레시 레죄의 '글루미 선데이'를 듣지 않는 것만으로도 꽤나 대견하다 생각하면서.


오늘 아침은 어제 내린 비와 진눈깨비로 도로는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하늘은 여전히 어두웠고, 사람들의 발걸음도 무거웠다. 영하의 날씨라고는 해도 추위는 잘 느껴지지 않았다. 내 주위에 게으름의 더께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던 까닭인지도 모른다. 며칠 전부터 대만 작가 천쉐가 쓴 <오직 쓰기 위하여>를 읽고 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천쉐'라는 작가를 알지 못했다. 대만에서는 잘 알려진 작가라는데 말이다. 자신의 삶을 간략하게 써 내려간 듯한 이 산문집을 읽으면서 나는 작가의 매력에 흠뻑 빠져들었다.


"잘 쓰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것은 계속 쓰는 것이다. 그래야만 내 마음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에 다가갈 수 있다. 완벽주의를 추구하며 꾸무럭거리거나 펜을 놓지 말자. 오로지 글로 써낸 원고만이 나의 것이다. 끊임없이 써나가야만 글쓰기가 우리 삶의 핵심이 된다. 계속해서 쓸 능력이 있어야만 글쓰기가 우리의 전문이 된다. 쉬지 않고 써야만 우리는 비로소 결승점에 이를 수 있다."  (p.35)


50대 중반의 작가는 글쓰기에 진심인 듯했다. 그 열정과 치열함이 부러웠다. 내가 블로그를 처음 시작했을 때 나는 내가 머리로 생각했던 글의 내용과 막상 글로 써서 완성했을 때의 글의 내용이 천양지차로 다르다는 사실에 절망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내가 의도했던 주제나 글의 내용은 전혀 이게 아닌데... 내가 모르는 다른 사람이 몰래 와서 나의 글을 대신 썼던 것도 아닌데 어쩜 이럴 수가...' 나의 생각과 글 사이에 존재하는 크나큰 차이를 1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여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글쓰기에 재능이 없는 탓일 테지만 열정과 노력이 부족한 게 근본 원인인 듯하다.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이 전혀 없으니 노력할 이유도 찾기 어렵지만 말이다.


여린 겨울 햇살이 자맥질하듯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가 금세 사라지곤 한다. 내게 허용된 게으름은 이 정도인가 보다. 오후에 약속이 한 건 있으니 서두르지 않으면 그마저도 취소해야 할지 모른다. 그건 예의가 아닐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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