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하고 단단하게, 법정의 말 - 내려놓음의 마음 공부 고요하고 단단하게
권민수 엮음 / 리텍콘텐츠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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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이 입적하신 지 벌써 16년이 흘렀다. 2010년 3월 11일의 느낌을 나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내가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나는 스님의 말씀이 담긴 여러 저서를 읽으며 청소년기를 보냈었고, 언론을 통해 접하는 스님의 소식을 가까운 이의 근황인 양 귀를 쫑긋 세운 채 듣곤 했었던 나로서는 텔레비전을 통해 접했던 그날의 소식을 믿을 수가 없었다. 충격이 컸던 탓인지 나는 한동안 가슴이 텅 빈 듯한 허전함으로 인해 매사에 의욕이 떨어졌었다. 그때 우연히 읽었던 책이 <법정 스님의 내가 사랑한 책들>이었다. 덕분에 나는 스님이 추천한 책 50권 대부분을 읽을 수 있었다. 허전함을 달래기 위한 목적이 더 컸었지만 책의 권수가 더해질수록 스님의 뜻이 새록새록 전해지는 듯했다. 스님이 아니었더라면 결코 알지 못했을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 예찬>이나 쓰지 신이치의 <슬로 라이프>, 아베 피에르의 <단순한 기쁨>, 존 프란시스의 <아름다운 지구인 플래닛 워커> 등 뻐근한 감동과 교훈으로 남았던 여러 책들이 스님의 말씀처럼 가슴을 채웠다. 물론 나의 지식이 부족하여 이해가 어려웠던 책들도 더러 있었다. 지두 크리슈나무르티가 쓴 <아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나 에크하르트 톨레의 <NOW-행성의 미래를 상상하는 사람들에게>와 같은 책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스님의 추천 도서 대부분이 나의 인생책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지금도 나는 스님의 추천 도서를 기회가 될 때마다 꺼내 읽곤 한다.


역사 콘텐츠 전문 작가 권민수가 엮은 <고요하고 단단하게, 법정의 말>을 읽었던 것도 어쩌면 그 연장선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 PART 1 '나는 어떻게 가벼워질 수 있을까? - 비움과 자유', PART 2 '불안은 왜 자꾸 올라올까? -두려움과 신뢰', PART 3 '일은 삶을 어떻게 바꿀까? - 일.돈.시간', PART 4 '관계는 왜 어려울까? - 가족.사랑.갈등', PART 5 '슬픔은 어떻게 치유될까? - 상실.병.죽음', PART 6 '자연은 왜 스승일까? - 숲.바람.침묵', PART 7 '어떻게 계속 걸을까? - 단련과 실천' 등 총 7부로 구성된 이 책은 우리에게 도움이 될 만한 스님의 말씀을 단순히 옮겨 적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이를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녹여내고 실천할 것인가를 묻게 하는 잠언집의 성격을 띠고 있다.


"법정의 말은 읽을 때는 아름답지만 삶으로 옮기지 않으면 금세 잊히기 쉽습니다. 우리는 멋진 문장을 읽는 데 익숙하지만, 그 문장대로 살아내는 데는 서툽니다. 그래서 이 책은 법정 스님의 단순 저서 문장에만 기대지 않고, 대표 저서들뿐 아니라 강연집과 법문 기록, 정기 법회에서 실제로 건넨 말씀, 여러 자리에서 회자되어 온 핵심 문장들까지 폭넓게 엮어, '법정의 말'을 하나의 총체적인 흐름으로 만날 수 있도록 구성했습니다."  (p.8 '프롤로그' 중에서)


내가 스님의 추천 도서를 읽으면서 느꼈던 스님의 중심 생각은 생명 존중과 공생이었다. 스님은 우리들 각자가 그 생각을 중심에 두고 어떻게 하면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가꾸어 갈 수 있을까를 궁리하셨던 듯하다. 수도자로서 생명을 귀히 여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하겠지만 모든 생명체가 더불어 잘 살 수 있도록 궁리하고 연구하는 학자와 사상가와 사회운동가마저 떠받들고 우리와 같은 장삼이사에게 그들의 사상을 이해시키려 노력했다는 점에서 스님의 특별한 면모를 살필 수 있었다. 권민수 작가 역시 스님의 말씀을 우리들 삶에서 녹여내려 했다는 점에서 스님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는 듯하다.


081 오늘을 선택하는 연습

"나누는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마십시오. 내일은 기약할 수 없습니다. 내가 그곳에 있지 않을 수도 있고, 내 마음이 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 지금 이 순간에 해야 합니다."  (P.108)


세상이 갈수록 험악해지는 까닭은 가진 자의 욕심이 끝도 없이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대인과 작금의 정치 세력은 그들의 욕심을 펼칠 자유를 무한대로 허용하는 게 미덕인 양 포장하고 있다. 스님을 비롯한 옛 지성인들이 주장하던 '공생'은 이제 잊힌 단어가 되고 말았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가 함께 잘살자는 생각이 우리 인간끼리라도 함께 잘살자는 생각으로 쪼그라들더니 이제는 숫제 그마저도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각자도생의 길을 걷고 있는 현실 속에서 개인의 불안은 가중될 수밖에 없다. 거대한 역사의 흐름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듯하다. 그러나 파편화된 개인이 서로 손을 내밀면 또 다른 어느 누가 내게 손을 내밀지 않을까? 인간 내면의 순수 감정을 건드리면 누군가의 목소리가 내 목소리에 응답하지 않을까? 인간은 본디 그렇게 태어나고 그렇게 자라왔으니까 말이다.


241 관심이라는 이름의 간섭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존재는 그 자신의 방식으로 그 자신의 삶을 살아갈 권리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만의 편의나 이익을 위해 남을 간섭하고 통제하고 지배해서는 안 된다."  (P.274)


생명이 되살아나는 이 계절에 지구 한편에서는 생명을 죽이는 일이 날마다 자행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악행에 대한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함께 잘 사는 방법을 모색하기보다는 타인의 생명과 재산을 빼앗아 나만 잘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으로 가득하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는 까닭에 그들 역시 제 수명을 다하면 지구상에서 사라지겠지만, 그들이 치러야 할 죄업은 사후에도 계속하여 청구되지 않을까? 살아 있는 동안 우리가 이웃을 사랑으로 돌보아야 하는 이유는 역사의 단죄가 더욱 가혹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남쪽으로부터 봄을 알리는 꽃소식이 전해지고 있다. 어느덧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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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산행길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는 마치 단골식당의 주인아주머니와의 관계만큼이나 뭐라 한마디로 규정지을 수 없는 애매한 측면이 있다 하겠습니다. 오랫동안 자주 만나던 사이이니만큼 가깝고 익숙하지만 서로 사는 곳도, 이름도 알지 못하는(알려고도 하지 않는) 까닭에 언제든 관계를 좁힐 수 있는 여지만 남겨둔 채로 기존의 관계를 무한정 연장하는 그런 사이라고나 할까요. 매일 새벽 남들이 다 잠에 취해 있는 시각에 하루도 거르지 않고 산에 올라 늘 마주치는 장소에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때로는 짧은 덕담을 건네기도 하고, 일 년에 한두 번쯤 넋두리 삼아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기도 하면서 불편하지 않은 관계를 수 년째 이어오고는 있지만 서로의 이름도, 연락처도, 사는 곳도 모른 채 지내왔던 것입니다.


내가 요즘도 매일 아침 오르는 아파트 뒤편의 야산에서 나는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또 많은 사람들과 악수조차 없이 헤어졌습니다.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2년쯤 전에 욕쟁이 할머니가 등산로에서 사라지더니 네댓 달 전쯤에는 언제나 말을 곱게 하시던 소녀 할머니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난달 중순께부터는 멋쟁이 할아버지마저 나타나지 않으십니다. 겨우내 추위 속에서도 서로를 격려하며 거르지 않고 산에 오를 수 있도록 힘을 북돋워주던 분이셨는데... 1940년생이라고 하셨던 멋쟁이 할아버지는 얼마 전에 올린 나의 블로그 포스팅에서도 언급이 있었지만 지난해 여름까지만 하더라도 정정하셨는데 언제부턴가 한 손에 지팡이를 짚으신 채 나타나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운동에 열심이셨는데, 이제는 숫제 나타나지 않으시는 걸 보면서 나는 운동을 마치고 산을 내려오는 순간까지 이상한 상상에 빠지곤 합니다. '그렇지 않을 거야. 갑자기 이사를 가게 된 것일 테지.' 나는 애써 그런 생각을 하며 나쁜 생각을 떨쳐내곤 합니다.


나는 요즘 내가 좋아하는 작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소설 <이야기를 들려줘요(Tell Me Everything)>를 읽고 있습니다.


"내 요점은, 이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아주 복잡하다는 거예요. 밥, 우리는 모두 아주 복잡하고, 우리가 누군가와 한 순간이라도 - 어쩌면 평생 - 같이 한다는 건 우리가 그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연결되어 있어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연결되어 있지 않죠. 왜냐하면 누구도 다른 사람의 마음속 깊은 틈으로는 들어갈 수 없으니까요. 심지어 그 사람 자신도 자기 마음의 깊은 틈으로는 들어가지 못해요. 하지만 우리는 - 우리 모두는 - 그럴 수 있는 것처럼 살아가요. 그리고 난 그걸 존중해요, 밥. 정말로 존중해요. 하지만 우리 누구도 단단한 땅에 서 있지 않아요. 우리는 그저 우리가 그렇다고 스스로 말할 뿐이에요. 그리고 그래야 하고요. 나는 그걸 알 것 같고, 앞서 말했듯 존중해요. 나는 단지......" 그러고는 말을 멈추고 그를 쳐다보았는데,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p.306~p.307)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마음속 깊은 틈으로는 들어갈 수 없지만, 그럴 수 있는 것처럼 살아가는가 하면 우리는 단단한 땅에 서 있지도 않으면서 그렇다고 스스로 말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며칠 미세먼지로 탁하던 대기는 다시 깨끗해졌습니다. 열흘을 넘겨 계속되고 있는 중동 지역의 전쟁은 지금도 포화가 그치지 않고 이어지는가 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것은 물론 삶의 터전을 송두리째 잃고 있는데 그들을 조롱하고 아무일 아니라는 듯 지껄이는 미친 작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자들을 일러 '악마' 또는 '사탄'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고, 누군가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트리는 순간 그 절망의 화살이 복수의 칼날이 되어 나에게 향한다는 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말입니다. 우리에게는 달콤한 휴식이 주어질 테지만 전쟁의 포화 속에 있는 그들은 불안과 공포 속에서 밤잠을 설칠 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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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스크
레이 네일러 지음, 김항나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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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피 헌팅(Trophy Hunting) 문제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시청한 적이 있다. 인간의 생존을 위해서 또는 방어적 목적으로 동물을 살해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재미와 사냥을 통한 전시물 획득과 다른 이들로부터의 인정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때로는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아프리카를 찾는 사람이 매년 9,000여 명에 달한다고 하니 인간보다 잔인한 동물은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코끼리 상아를 얻기 위한 코끼리 밀렵 역시 줄어들지 않고 있다. 심지어 밀렵 단속을 피하고 총알을 아끼기 위해 코끼리의 척추를 끊어 움직이지 못하게 한 다음, 살아 있는 상태에서 얼굴을 전기톱으로 잘라낸다고 하니 인간의 욕심과 인간성 상실이 과연 어디까지 갈 것인지 참담하기만 하다. 그와 같은 관점에서 레이 네일러(Ray Nayler)의 소설 <터스크>는 우리가 과연 잃어버렸던 인간성을 회복하고 주변의 다른 생명체들과 평화롭게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타이가를 기어다니는 밀렵꾼이나 영구동토층에 호스로 구명을 뚫는 매머드 엄니 사냥꾼이 모두 부자가 될 수는 없었다. 둘은 모두 어떤 식으로든 너무 일찍 죽음을 맞이했다. 다들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 땅에 묻혔다."  (p.29)


코끼리 행동을 연구하면서 야생 아프리카코끼리들을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다미라 키스무툴리나 박사는 결국 밀렵꾼들에 의해 살해된다. 그와 동시에 코끼리도 멸종되었다. 그렇게 한 세기가 흘렀다. 'SF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휴고상의 지난해 수상작인 <터스크>는 죽었던 다미라를 불러내는 것으로 시작된다. 인간이 아닌 암컷 털매머드의 몸에 이식된 채로 복원된 것이다. 여기에는 사연이 있었다. 코끼리와 유전학적으로 가장 가까운 매머드를 연구하는 알마스 아슬라노프 박사는 시베리아 동토층이 녹으면서 드러난 털매머드 사체에서 얻은 유전체 정보를 배합하여 8,000년 전 멸종한 털매머드 복원에 성공한다. 그렇게 복원된 매머드 떼를 시베리아 툰드라 지대에 방사하는 게 그의 목표였지만 야생에 방사되는 족족 죽어버리는 바람에 그의 목표는 허사가 되고 만다. 복원된 매머드는 스스로 생존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아슬라노프 박사는 야생 코끼리를 연구하며 그들과 함께 생활했던 다미라를 되살리기로 마음먹었다.


"우리는 당신이 암컷 우두머리가 되어주길 제안합니다. 당신의 의식체를 암컷 매머드에게 옮기길 원해요. 당신이 그들을 이끌게 될 거예요. 매머드로 살아남는 법을 가르치는 겁니다. 당신의 지도를 받고 그들은 번창할 거예요."  (p.72)


극비리에 주요 인사들의 기억을 스캔해 저장해 두는 마인드 뱅크 프로젝트에 의해 살해당하기 전에 백업된 다미라의 의식체는 암컷 털매머드의 몸에 이식되었고, 다미라는 시베리아 보호구역 내 매머드 무리를 이끌게 된다. 그러나 다미라가 인간으로 살았던 한 세기 전과 달라진 건 없었다. 호시탐탐 매머드를 노리는 밀렵꾼들의 활동뿐만 아니라 보호구역 내에서 아슬라노프와의 공모 아래 합법적인 매머드 사냥이 버젓이 자행되고 있었다. 보호구역 자립에 필요한 돈이 필요하다는 명분하에 이른바 '트로피 사냥'이 성행하는 것이다. 억만장자 앤서니는 비밀경매를 통해 매머드를 사냥할 수 있는 '특권'을 매입한다. 사냥에는 보호구역 관리 책임자인 콘스탄틴이 동행한다.


"자기 안의 어떤 것도 무너졌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리고 앤서니 안에 잇는 어떤 것도 무너졌다. 어쩌면 우리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가슴속에 있던 무언가가 무너져 내렸지만, 그 모든 게 원래 그렇다는 듯, 그게 정상이라는 듯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치 머리가 잘린 벌레들이 계속해서 숨기 위해 그림자를 향해 기어가는 것처럼. 우리를 망쳐놓은 그 어떤 것에 따라잡혀 결국 우리가 스스로 멈출 때까지."  (p.178)


요즘 우리는 인간 살육의 현장을 방송을 통해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것은 물론 온라인 게임처럼 광고를 하는 인간 동물(Human Animal)들을 최고 권력자로 떠받들고 있다. 그들은 수많은 민간인들에 대한 일방적인 학살을 자신들이 믿는 신의 뜻인 양 '성전(聖戰)'이라며 떠벌리기도 한다. 그런 모습을 보며 자라는 다음 세대는 어떨까. 어쩌면 다음 세대의 사람들은 재미 삼아 아프리카의 맹수를 사냥하는 대신 인간을 사냥감으로 풀어놓고 그들을 사냥하면서 즐길지도 모르겠다. 자신들과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자국민보다 못산다는 이유로 인간 사냥감이 되어 사냥꾼들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아나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금찍하다. 그런 세상이 우리 앞에 펼쳐질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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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보면 별별 유형의 사람을 다 만나게 되지만 유독 나의 시선을 사로잡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매사에 거침이 없고, 자신이 마치 모든 분야에 정통한 듯 행동하는, 좋게 말하면 경력직 인생을 살고 있는 듯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특징은 자신의 말과 행동에 주저함이 없고, 자신이 하는 말이 진리인 듯 떠벌린다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어떠한 결과가 발생하고, 그 결과로 인해 혹시나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는 그들 머릿속에 전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는 말도 면밀하게 팩트체크를 해보면 오류 투성이인 경우가 다반사이지만 신경 쓰지 않습니다. 물론 자신이 했던 말들에 대한 변명이나 사과는 있을 수 없습니다. 나처럼 매사에 노심초사하고 튼튼한 돌다리도 거듭하여 두드려보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에게는 그들이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그저 신기하기만 합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유형의 사람들이 별 영향력이 없는, 낮은 지위에 있을 때에는 우리 사회에 그닥 해가 되지 않겠지만, 만약 그들이 사회에 크나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고위직에 위치한다면 우리가 감당해야 할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가 어느 기업의 대표나 임원을 넘어 한 국가의 최고 권력자라면 어떻겠습니까? 상상하기도 싫을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지금 그와 같은 현실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트럼프라는 한 인간이 미국이라는 한 국가의 대통령인 동시에 세계 대통령으로 군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해도 아무런 죄책감이나 미안함을 느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게 뭐가 문제냐는 식으로 응대합니다. 게다가 자신의 섣부른 결정으로 인한 막대한 피해에 대해서도 사과 한마디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미 그와 같은 유형의 대통령을 경험한 바 있고,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마치 경력직 인생을 살고 있는 듯한 사람들의 무례함은 도를 넘는 경우가 다반사이지만 그들에게 어떤 권력이 쥐어지는 한 반성이나 개선은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억제하는 언론이나 제도에 대한 적개심만 증가할 뿐입니다. 윤석열이 그러했고, 트럼프나 네타냐후 역시 그렇습니다. 이와 같은 까닭에 그런 유형의 사람들에게 있어 민주주의 제도는 자신의 자유를 제약하는 커다란 걸림돌이자 타파해야 할 대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민주주의 제도를 실행하는 어떤 사회에 그들과 같은 유형의 사람들이 존재한다면 그들이야말로 반사회적 인물인 동시에 사회의 안정을 위해서는 반드시 격리해야 할 대상인 셈이지요. 그들은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인해 발생하는 어떠한 피해에 대해서도 사회 구성원에게 절대 사과하거나 반성하지 않을 테니까 말입니다.


나는 지금 권민수 작가가 엮은 <고요하고 단단하게, 법정의 말>을 읽고 있습니다. 법정 스님이 입적하신 게 엊그제 같은 데 벌써 1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나를 기준으로 삼지 않는 것이 '바르게' 보는 것이며,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입니다. 내가 말하고 생각하는 것을 멈춘다면 '바르고 완전하게 보기' 시작할 것입니다"  (p.69)


거침이 없고 머뭇거리지 않는 사람이 때로는 멋있게 보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는 우리가 사는 공동체를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인물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지금 그와 같은 인물의 대표적인 표상을 현실에서 마주하고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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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의 꿈
데니스 존슨 지음, 김승욱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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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자가 시간의 평원 위에 골조를 세우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역사를 소재로 글을 쓰는 소설가는 그곳에 숲을 가꾸고, 물길을 틔워 생명을 가꾸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소설가는 자신의 성향에 따라 정물화를 그릴 수도 있고, 크로키를 그려낼 수도 있으며, 넓게 여백을 담아낸 수묵담채화를 그릴 수도 있다. 아무튼 우리는 지난 과거의 모습을 역사학자가 아닌, 역사를 소재로 쓰는 소설가에 의해 생생하게 그려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그와 같은 소설이 영화로 재탄생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데니스 존슨의; 소설 <기차의 꿈>을 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140쪽의 짧은 소설이 어떻게 20세기 초반의 미국을 이토록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책을 덮고 한참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는다.


"그레이니어가 맡은 일은 초커였다. 기차 도착점 쪽이 아니라 숲 쪽에서, 숲에서 벌목꾼들이 둘씩 짝을 지어 톱으로 가문비나무를 쓰러뜨리면, 가지 담당이 도끼로 잔가지를 깨끗하게 쳐내고, 톱장이가 통나무를 18피트 길이로 잘랐다. 그다음에는 초커가 통나무를 밧줄로 감아 말이 운반할 수 있게 준비했다. 그레이니어는 이 일이 좋았다. 불끈불끈 힘을 쓰고 나면 탈진해서 도취한 것 같은 상태가 되고, 그렇게 하루 일을 끝낸 뒤에는 푹 쉬었다."  (p.19)


소설의 주인공인 로버트 그레이니어의 일대기를 절제된 언어와 통일된 구성으로 마치 전기문처럼 쓰고 있는 작가는 독자의 평가쯤이야 안중에도 없다는 듯 어떤 미사여구나 반전도 없이 그레이니어라는 인물이 살았던 당시를 아주 담담히 기록하고 있다. 대가의 작품은 이런 것이야,라고 말하려는 듯 소설은 너무도 평범하고 막힘이 없이 진행된다. 그렇다고 주인공의 사회적 위치나 명성이 특별하지도 않다. 오히려 대중 속에 섞이면 절대 눈에 띄지도 않을 듯한, 지극히 평범한 인물일 뿐이다. 현대인의 기준으로 보자면 오히려 하찮을 수 있는 존재이다. 거대한 시간의 평원 속에서 가장 낮은 위치의 한 사람에게 포커스를 맞춤으로써 우리는 지난 한 시대의 모습을 생생하게 포착할 수 있는 것이다.


"크레스턴에서 들은 소식은 끔찍했다. 모이 계곡 화재에서 아무도 그쪽으로 도망쳐 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레이니어는 사촌의 집에 여러 주 동안 머물렀다. 그 상황에서 당연한 슬픔과 혼란 때문에 병이 들어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는 아내와 어린 딸을 잃었음을 납득했지만, 가끔 폭풍이 자신을 엄습하는 것 같았다. 저항할 수 없는 군대처럼 그의 머릿속으로 폭풍이 밀려왔다."  (P.51)


19세기말에 태어난 로버트 그레이니어는 부모가 누구인지도, 출생지가 어디인지도 모르는 채 어린 시절 혼자 기차를 타고 고모가 있는 아이다호로 왔다는 기억만 갖고 있다. 10대 때 학교를 그만둔 이후 평생 막노동을 하며 생계를 꾸렸던 그는 교회에서 만난 글래디스와 결혼하여 산속 계곡에 오두막을 짓고 살아간다. 그렇게 딸 케이트가 태어났다. 벌목 현장에서 일하며 철도 부설 공사에도 참여했던 그는 어려서부터 그에게 각인된 고독의 그림자를 씻어내며 행복한 생활을 이어간다. 그러나 그의 행복은 오래 가지 않았다. 1917년 여름, 거대한 산불이 계곡 전체를 집어삼켰고, 그가 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땐 이미 모든 게 잿더미로 변한 후였다. 어렸을 때부터 외톨이였고 평생을 깊은 고독 속에서 살았던 그는 다시 숲속으로 들어가 오두막을 짓고 그곳에서 혼자 머문다. 그리고 반복되는 일상을 묵묵히 이어간다.


"그레이니어는 여든 살이 넘어서 1960년대까지 살았다. 살아 있는 동안 태평양에서 수십 마일 떨어진 서부까지 여행한 적도 있지만, 바다를 직접 본 적은 없었다. 동쪽으로 가장 멀리 간 곳은 몬태나주 경계선 안쪽으로 40마일 거리인 리비였다. 그가 사랑한 사람은 한 명, 아내 글래디스였으며, 재산은 땅 1에이커, 말 두 마리, 수레 한 대였다. 그는 술에 취한 적이 없고, 총기를 구매한 적도 없고, 전화기로 대화를 나눈 적도 없었다. 기차를 많이 탔지만 자동차도 많이 탔고, 비행기도 한 번 타본 적이 있었다. 말년의 10년 동안 그는 읍내에 나올 때마다 텔레비전을 보았다. 그는 자신의 부모가 누구인지 전혀 몰랐으며, 자손을 남기지도 않았다."  (p.128~p.129)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마주치게 되는 작은 시련이나 불행조차 오직 자신에게만 일어나는 불운인 양 생각하여 누군가를 탓하고 불평불만에 휩싸이곤 한다. 살면서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상실의 고통 역시 '왜 나에게 이런...' 하는 마음으로 신을 원망하기에 이른다. 그 모든 것들이 누구에게나 있는 보편적인 삶의 과정임을 잘 알면서도 가슴으로는 결코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다. 하루하루의 반복되는 일상과 그 속에서 보게 되는 작은 변화들. 그리고 시간의 풍화 속에서 자연스레 늙어가는 자신과 죽음을 향한 여정. 그레이니어의 평범한 삶이 감동으로 다가오는 까닭은 그 모든 변화에 부질없이 저항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저 담담히 받아들이고 남은 삶을 꿋꿋이 이어간다는 것이다. 20세기 초반의 미국 사회를 그린 이 한 편의 소설을 통해 나는 내가 경험하지 못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상상하는 한편 반복적인 일상을 불평 없이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다. 투명한 3월의 햇살이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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