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 인디언의 방식으로 세상을 사는 법
류시화 지음 / 김영사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을 접하기 전까지 나에게 '아메리카 인디언'에 대한 인식은 일찍이 신석기~청동시 시대에 아시아에서 얼어붙은 북해 바다를 넘어 이주해간 사람들, 유럽의 이주자들에게 무참하게 살해당하고 자신의 땅 거북이섬(아메리카)에서 쫒겨난 사람들, 소규모 공동체를 이루어 자급자족한 원시공동체 정도에 그쳤다. 미국을 중심으로한 서구의 책과 영화, TV 드라마 등 서구문화는 아메리카의 역사를 잘 모르는 우리들에게 '아메리카 인디언'은 '머리가죽'이나 '귀'를 잘라서 보관하는 흉폭한, 짐승같은 종족, 문화와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미개인이라고 주입시켜 왔다.
 
나 역시 어려서부터 [O.K 목장의 결투]류의 서부영화나 각종 오디오, 비디오물을 통해 그렇게 '의식화' 되었다. 대학에 들어간 후 내 눈에 보이고 들리는 것과 사실, 진실이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고 유럽의 역사나 미국의 역사가 피로 점철된 정복과 만행의 역사임을 알아가면서도 아메리카 인디언에 대한 인식이 크게 바뀌지는 못했다. 영화 <늑대와 춤을>을 본 후에도 그랬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인 [라스트 모히컨]을 10번 이상 보면서도 '서유럽 이민자들이 아메리카를 지옥으로 만들었다'라거나 '좋은 인디언도 있고 나쁜 인디언도 있다'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책은 나의 뇌 세포와 마음 속에 자리잡고 있던 '아메리카 인디언'에 대한 많은 선입관과 불확실한 생각들을 서서히 깨트려 주었다. 내가 어설프게 알고 있었던 상황은 대부분 서유럽과 미국 정치가들과 지식인들이 조작하여 퍼트린 거짓에 불과했고 원주민, 즉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지구상 어느 종족이나 민족보다 뛰어난 정신문명과 사회제도, 도덕과 문화를 이룩하면서 살고 있었다. 아메리카의 학살과 수탈을 거쳐 이룩한 서유럽 국가들과 미국의 '문명'은 그들 스스로 '반문명'과 '비문명'을 감추기 위한 허세와 선전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나는 역사에서 가정을 하는 것이 무척이나 어리석다는 것을 알면서도 서유럽 이주자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아메리카 원주민이 이주민들을 쫒아낼 수 있었다면, 서유럽 제국들이 원주민들의 문화와 제도를 받아들이거나 보호했다면 인류 역사는 지금 엄청나게 달라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원 전 수 천년 전부터 20세기까지 동서양의 인류역사가 보여준 착취와 학살, 탐욕과 폭력, 전쟁과 정복, 계급과 노예, 빈곤과 부패, 거짓된 종교와 정치, 과잉생산과 자연파괴, 소외 등으로 점철되었다면,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은 그와 정반대의 생활과 문화를 보여준다.
 
그들의 정신과 문화는 이 책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애틀 추장의 연설문 중 일부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제목은 "어떻게 공기를 사고 판단 말인가"...

 "우리가 어떻게 공기를 사고팔 수 있단 말인가? 대지의 따뜻함을 어떻게 사고판단 말인가? 부드러운 공기와 재잘거리는 시냇물을 우리가 어떻게 소유할 수 있으며, 또한 소유하지도 않은 것을 어떻게 사고팔 수 있는가? 햇살 속에 반짝이는 소나무들, 모래사장, 검은 숲에 걸린 안개, 눈길 닿는 모든 곳, 잉잉대는 꿀벌 한 마리까지도 우리의 기억과 가슴속에서는 모두가 신성한 것들이다. 그것들은 우리 얼굴 붉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고스란히 살아 있다. 우리는 대지의 일부분이며, 대지는 우리의 일부분이다……."  

'인디언 연설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수콰미쉬족과 두와미쉬족의 대표인 시애틀 추장의 연설이다. 이 연설은 1854년 미국 땅을 점령한 백인들이 그곳에 살던 원주민들을 강요된 보호구역으로 밀어 넣기 위해 시애틀의 '퓨젓 사운드'에 도착했을 때 행해진 것으로, 세계가 그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짐작케 해준다.(미국의 도시 이름인 시애틀 Seattle은 시애틀 추장의 원래 이름인 씨앨트 Sealthe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미국의 지명과 인명 중에는 원주민의 언어에서 따온 것들이 많다.) 그들에게 세계/자연이란 사고 팔거나 혹은 소유하는 대상이 아닌 함께 하는 존재였다. 
 
이처럼 이 책에는 인디언 추장들의 이러한 연설문 41편과 저자 해설과 어록 그리고 100여 점의 사진 등이 실려 있는데, 그들의 연설은 매우 단순한 반면 호소력 또한 강하다. 모두 몇 백년 전의 글들이지만 오히려 오늘날에 더욱 절실한 말들이기도 하다. 시애틀 추장, 조셉 추장, 앉은 소, 구르는 천둥, 빨간 윗도리, 검은 새, 열 마리 곰... 이들은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싸운 위대한 인디언 전사들이다. 그들의 연설은 단순하면서도 매우 시적일 뿐만 아니라, 문명인임을 자랑했던 당시 백인들, 그리고 몇백년이 지난 지금에 사는 우리들의 위선에 찬 삶과 공허한 정신세계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또한 41편의 연설문 속에는 자신들의 세계와 생명의 근원인 대지가 여지없이 파괴되는 것을 지켜보던 인디언들의 슬픔과 지혜, 그리고 비굴하지 않은 당당한 종말이 그대로 녹아 있어, 읽는 이의 가슴에 진한 감동을 준다.
 
저자 류시화 시인이 15년 동안 매년 미국으로 날아가 도서관에 잠자고 있던 수백 점의 자료를 뒤져가며 완성한 920페이지라는 방대한 분량의 이 책은 인디언의 역사책이자 '대지는 곧 어머니'라는 그들의 믿음체계에 관한 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날, 대지를 갈아엎은 오만한 문명들에 내쫓겨 그들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은 인류의 희망이 그 만큼 멀어져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많은 것들을 알게 되었고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먼저, 사실 관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유럽에서 신세계를 찾아 떠나온 이주자들이 처음부터 북아메리카 대륙에 이르렀을 때 그들이 신대륙을 '발견'한 것이 아니라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살고 있는 대륙에 이방인으로 표류하다 '도착'한 것이다. 거북이섬 아메리카에는 유럽만큼 오래 전부터 또 다른 인류가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학자들은 처음 서유럽 사람들이 아메리카에 도착했을 무렵 수 천개의 부족으로 나누어진 500만 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지만, 서유럽 국가들의 학살과 전염병으로 1910년에는 그 수가 22여 만명으로 줄어들었다.
1620년 12월 21일, 왐파노그족 마을 폴리머스 해안으로 유럽에서 떠내려온 '메이플라워호'가 떠내려 왔다. 배 안에는 120명의 승객(청교도)이 발 디딜 틈도 없이 타고 있었다. 4개월간 배 안에서 살다가 절반이 죽었고 남은 일부 사람들은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식량과 약초, 주거지와 경작지를 나누어주는 덕택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유럽인들이 아메리카 대륙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은 월등한 성능을 갖춘 무기와 군대가 아니라 인디언들이 면역력을 채 키우지 못한 전염병, 속임수와 거짓 덕분이었다.
운디드니 대학살(Wounded Knee Massacre) : 1890년 12월 29일 기관총 등으로 무장하고 있던 제7기병대 500여명은 수족을 무장해제하던 중 1명의 수족 용사가 칼을 놓지 않는다는 이유로 총격을 가해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 200명 이상의 수족을 죽이는 대량 학살을 감행했다.
이 이외에도 책 속에는 1500년대 이후 북아메리카 및 중남미 아메리카에서 실제로 일어난 많은 일화와 사건들이 속속들이 들어있다.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많은 유럽인, 미국인들이 거짓을 일삼고 금과 피에 굶주렸는지, 얼마나 많은 원주민들이 고통을 당해왔는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책에서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삶과 철학과 종교를 알았고 배웠다.
그들은 자연을 존중했다. 동물과 식물은 위대한 정령이 주신 선물이며, 인간은 감사한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야 한다. 그들은 인간에게 음식과 옷이 되어주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약초를 캘 때도 먼저 그 약초의 추장인 그 지역의 가장 큰 약초에게 선물을 바치고 허락을 구했다. 만일 부탁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그 지역을 떠났다. 허락을 받는다 해도, 처음 발견하는 일곱 개의 약초는 손대지 않았다. 약초들이 계속 번성하고 다음 세대가 그것을 이용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자신이 믿는 신과 곧바로 얼굴을 맞대고 살았다. 그들에게는 자신들과 영적인 세계 사이에 따로 성직자가 필요 없었다. 누구나 홀로, 그리고 침묵 속에서 신과 만났다. 신이 주는 계시는 오직 그 사람 자신만이 받을 수 있다. 따라서 각자 신가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해야 한다. 또한 누구도 다른 사람의 개인적인 믿음을 침범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음식은 신성한 것이지만, 필요 이상으로 많이 먹는 것은 죄악이다. 사랑은 좋은 것이지만, 탐욕은 사람을 망치는 것이다.
이른 아침에 일어난 인디언은 모카신을 신고 물가로 걸어나간다. 그곳에서 맑고 시원한 물 한 웅큼을 얼굴에 뿌리거나 물 속에 몸 전체를 담근다. 몸을 씻고 난 후 밝아오는 새벽을 향해 똑바로 서서 지평선 위로 춤추며 떠오르는 태양에게 말없이 기도한다.
그들엑 침묵은 위대한 신비 그 자체이다. 성스런 침묵은 신의 목소리이다. 침묵의 열매는 자신을 다스리는 힘, 진정한 용기와 인내, 위엄, 그리고 존경심이다. 침묵은 인격의 받침돌이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강한 자기 존중과 함께, 가족과 부족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절제된 생활에 대한 훈련을 받는다.
그들은 소유에 칩착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가장 큰 약점이라고 믿는다. 물질적인 길을 뒤쫒으면 머지않아 영혼이 중심을 잃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려서부터 아이들에게 자비심의 미덕을 가르치고 자기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남에게 주도록 가르침을 받으며, 그래서 일찍부터 주는 것을 기쁨을 안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세계관은 한마디로 '미타쿠예 오야신'으로 정의할 수 있다.
"미타쿠예 오야신", 이것은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또는 모두가 나의 친척이다’라는 뜻의 다코타 족 인디언들 인사말이다. 매우 간결하면서도 심오하게 우주에 대한 이해를 표현하고 있는 말로서, 인디언들의 정신과 삶의 방식을 한마디로 잘 나타내주는 가장 핵심적인 말이다. 몇 글자밖에 안 되는 짧은 단어 속에는 생명 가진 모든 존재가 다 담겨 있다.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인디언들의 그 인사말 속에 포함되어 있다.
 
[ 연설문 목록 ]
- 어떻게 공기를 사고판단 말인가 : 시애틀 추장
- 이 대지 위에서 우리는 행복했다 : 빨간 윗도리
- 연어가 돌아오는 계절 : 시애틀 추장
- 미타쿠예 오야신 : 오히예사
-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 : 오히예사의 삼촌
- 고귀한 붉은 얼굴의 연설 : 조셉 추장
- 평원에서 생을 마치다 : 열 마리 곰
- 내 앞에 아름다움, 내 뒤에 아름다움 : 상처 입은 가슴
- 말하는 지팡이 :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추장
- 이 대지가 존재하는 한 : 테쿰세
-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 : 텐스콰타와
- 대지를 사랑한 것이 죄인가 : 검은 매
- 콜럼부스의 악수 : 쳐다보는 말
- 말과 침묵 : 서 있는 곰
- 우리는 가난하지만 자유롭다 : 앉은 소
- 당신들은 결코 만족할 줄 모른다 : 메테아
- 나비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 나비에 대한 인디언들의 이야기
- 나는 왜 거기에 있지 않고 여기에 있는가 : 어느 인디언 여자
- 이름으로 가득한 세상 : 느린 거북
- 우리는 언제나 이곳에 있어 왔다 : 샤리타리쉬
-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 붉은 구름
- 자유롭게 방랑하다가 죽으리라 : 사탄타
- 겨울 눈으로부터 여름 꽃에게로 : 구르는 천둥
- 시간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 제임스 페이티아모
- 부족의 어른이 말한다 : 방랑하는 늑대
- 나는 왜 이교도인가 : 붉은 새
- 내가 흘린 눈물만 모아도 가뭄은 없다 : 후아니타 센테노
- 나는 노래를 불렀다, 인디언의 노래를 : 단 조지 추장
- 집으로 가는 길 : 파란 독수리 깃털들
- 좋은 약은 병 속에 담겨 있지 않다 : 미친 곰
- 기억하라, 이 세상에 있는 신성한 것들을 : 토머스 반야시아
- 마음과 영혼과 육체 : 비키 다우니
- 나는 인디언이지 캐나다 인이 아니다 : 홀로 서 있는 늑대
- 꽃가루를 뿌리면 비가 내렸다 : 아사 바즈호누다
- 인디언들이 아메리카에 전하는 메시지 : 이로쿼이 인디언 선언문
- 아메리카는 언제 재발견될 것인가 : 브루키 크레이그
- 여기 치유의 힘이 있으니 : 라모나 베네트
- 야생이란 없다, 다만 자유가 있을 뿐 : 오렌 리온스
- 독수리의 여행 :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인디언
- 아메리카 인디언 도덕률 : 인터트라이벌 타임스
- 인디언 남자들의 일곱 가지 철학 : 아메리카 원주민 남자들 모임
- 인디언 달력 : 열두 번의 행복한 달들
- 인디언 이름 : '빗속을 걷다'와 '상처 입은 가슴 
 
연설문 모두가 하나 같이 가슴을 울리고 전율을 느끼게 한다. 오히려 문자와 문장이 말과 연설을 방해하는 듯 하다. 그들의 삶과 문화는 세계 어느 민족이나 종족보다 더 위대하고 심오하다. 우주는 무엇이고 인간이란 무엇인지, 왜 우리가 살아가는지, 어떻게 살아야할 지에 대한 질문과 의문들에 대한 대답과 깨우침이 들어 있다. 세계화와 빈부격차, 전쟁과 학살, 기후변화와 자연파괴 등 현대 문명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제기와 해답의 열쇠가 인디언의 삶과 세계관에 담겨 있는 것 같다.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의 품안으로 돌아가는 진정한 현자들인 얼굴 붉은 사람들(아메리카 원주민)은 우리에게 문명인 아니 인간들이 알아야 할 모든 것들의 근본과 삶의 교훈을 가르쳐 준다. 또한 우리가 진정 누구이며 무엇을 잃고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가 왜 이번 생에 왔는지, 이 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도 주고 있다. 아메리카 인디언의 오랜 침묵의 목소리는 단순한 외침이 아니라 우리가 잃어버린 삶의 방식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들의 오래된 지혜의 목소리, 대지의 그 소리 없는 목소리는 몇백 년이 지난 지금 다시금 우리 삶의 자연성을 회복시켜 줄 귀중한 나침반이 될 것이다.
 
머리 맡에 두고 두고 자주 읽고 싶다...^^
 
* 인디언 언어의 뿌리 : 미네소타 - 하늘에 비친 물 / 토론토 - 만남의 장소, 토론 장소 / 나이아가라 - 천둥처럼 구르는 물 / 마이애미 - 학처럼 우는 자들 / 아이오와 - 졸린 친구들 / 오타와 - 물물교환하는 자들 /
 
* 책 속의 문장 :
- 형제여! 신은 당신과 나 모두를 만들었지만 우리 둘 사이에 큰 차이를 두었다. 얼굴도 다르게 만들고 관습도 다르게 만들었다. 당신들에게는 기술 문명을 주었지만, 우리에게는 그것에 대한 눈을 틔워 주지 않았다. 형제여! 우리가 우리 아버지들의 삶의 방식을 따를 때 위대한 정령이 더 기뻐하리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축복을 받았으며, 사냥할 힘과 기운을 받아 왔다. 위대한 정령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베풀었다. 배가 고플 때 우리는 사냥감으로 가득한 숲을 발견할 수 있었고, 목이 마를 때면 주위 어디에나 흐르고 있는 순결한 시냇물과 샘물들로 갈증을 풀 수 있었다. 지쳤을 때는 나뭇잎사귀들이 우리의 잠자리가 되어 주었다. 밤이 되면 만족스런 기분으로 휴식했고, 아침에는 위대한 정령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깨어났다. 팔다리에는 힘이 솟고, 가슴에는 즐거움이 넘쳤으며, 언제나 축복과 행복을 느꼈다. 그 어떤 사나운 욕심도 우리의 평화와 행복을 방해하지 못했다. 우리는 위대한 정령이 얼굴 흰 자식들보다 우리 얼굴 붉은 자식들을 보면서 더 기뻐하리라는 것을 안다. 그분은 당신들보다 우리에게 몇 배의 축복을 더 내려 주셨다. 우리에게 평화와 풍요를 주었다.
형제여, 우리가 이 지상에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면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라. 우리를 더 이상 혼란에 빠뜨리지 말라. 우리는 지금 숫자가 적고 약하지만, 우리 아버지들의 삶의 방식을 지킬 수 있다면 우리는 오랫동안 행복하리라. 우리는 당신에게 악수를 청하는 바이다. 그리고 당신의 형제들에게로 돌아가는 여행길에 위대한 정령께서 당신을 잘 보호해 주실 것을 진심으로 기원한다. : 빨간 윗도리(사고예와타)
 
[ 2011년 5월 2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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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이론의 한국경제
김광수경제연구소 엮음 / 김광수경제연구소 / 2003년 5월
평점 :
절판


[김광수경제연구소]는 지난 2000년 5월에 "객관성과 고도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민간 전문 Think Tank가 되는 것을 목표"로 설립된 민간 연구소, 컨설팅 회사다. 처음 김광수 소장을 비롯하여 몇 명으로 출범한 연구소는 10년이 지난 지금 국내에서 연구능력, 정책개발능력을 널리 인정받고 있다. 매주 경제시평, 연구소의 주요 고객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 공무원, 대학, 기업, 금융기관, 학자, 정당, 시민단체, 개인들이다. 연구소에서는 2003년부터 매년 경제보고서, 지역경제동향, 경제단신, 시사경제 등을 회원들에게 전달하고 있으며, 온라인 활동도 활발하여 다음 카페(http://cafe.daum.net/kseriforum)에는 경제연구소 규모로는 제법 큰 규모인 9만3천명이 넘는 회원이 가입되어 있다. 오프라인에서도 지역별 모임과 세미나, 강연 등이 회원 중심으로 자발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작년 가을 우연한 기회에 [김광수경제연구소]를 접하게 되었고 그 후로 연구소에서 발간한 책을 읽고 있고 연구소가 정기적으로 발표한 자료를 받아보고 있다. 특히 연초에 2011년 경제전망을 다룬 여러 개의 연구소 서적을 비교하면서 읽은 후 [김광수경제연구소]에 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때 The Economist의 <2011 세계경제대전망>와 삼성경제연구소의 <SERI 2011 경제전망>, 재정경제부와 한국은행, KDI의 경제전망 발표 자료, 그리고 '미네르바' 박대성의 <2011 경제 대전망>을 읽었다. 정부부처는 부실한 내용과 과장장된 수치로 포장되어 있고 경제연구소들은 객평가의 객관성, 책임성과 대안이 부족해 보였다. 오로지 [김광수경제연구소]만이 평가의 객관성을 유지하고 책임성을 분명히 하면서 적절한 대안을 제시함과 동시에 한국 경제와 국민들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이 책은 연구소가 지난 2003년 연구소 창립 3주년을 기념하여 3년 간에 걸쳐 발표된 주요 보고서들 가운데 13개 주제를 엄선하여 재정리한 후 발간한 것이다. 연구소가 발간한 책을 시기적으로 읽음으로써 연구소의 연구,분석의 관점과 역사, 보고서의 객관성과 품질, 평가와 전망에 대한 흐름을 알고 싶어서 이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이다.
 
제1부. [경제위기 분석]
001. 동아시아 외환위기 분석(한국 등 5개국 대상) : 연구소는 1997년 동아시아 왼환위기의 원인을 내적,외적 원인으로 구분하고 있다. 외적원인으로는 1990년대 세계적인 금융자유화,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서구 은행들이 1995~1996년 2년 동안 동아시아 5개 국가에 9백억 달러에 달하는 순대출을 한 후 1997년부터 1999년까지 1,220억 달러에 달하는 자금을 무차별적으로 회수한 것이고, 내적 원인으로는 1990년대 금융자유화 과정에서 금리 및 환율결정에 관한 시장 기능의 중요성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정책적 실패라 할 수 있다.(연구소는 말레이지아의 경우 당시 거시경제 지표로 볼 때 외환위기로까지 확대될 만큼 위기적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마하티르 수상이 제기한 투기적 헤지펀드에 대한 비난은 설득력이 있가고 평가함..)
 
연구소는 동아시아 외환위기에 대한 IMF의 구제금융 대책을 대체로 부적한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IMF의 고금리, 긴축재정 정책은 시장을 통하여 부실기업 및 부실금융기관을 효과적으로 선별 추출해 냈다는 성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내외금리차를 확대시켜 재정거래 기회를 촉진하는 결과를 가져왔고 급격한 신용경색을 초래하여 디플레를 가져왔다. IMF의 시장개방과 환율자유화 정책은 국제무역이 한국경제에서 차지하는 규모를 고려할 때 적절할 수 있으나 대신 대외적인 종속성과 동조화 현상이 심화되었다. IMF의 구조조정 정책은 적절한 방향이었으니 실제로는 부실 대기업에 대한 구조조정이 과감하게 이루어지지 않았고 구조조정과 병행해야 하는 사회적 안정망을 등한시한 결과 IMF 이후 대량 실업과 노사분규 심화, 빈부격차 확대를 촉진시켰다.
 
002. 국가채무 문제 논쟁 : 연구소는 정부가 채무 지급보증을 선 공기업 등의 보증액 전체를 국가채무로 간주할 지 여부는 실질적으로 IMF와 같은 국게지구가 그것을 인정하느냐 여부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해당 기업의 기업가치에 따라 정부의 채무 지급보증이 어느 정도까지 국가채무로 간주될 것인지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공기업의 구조개혁의 중요성이 커지게 된다. 공기업의 기업가치는 경영의 효율성과 합리적인 가격설정에 크게 의존하기 때문에 2가지에 대한 정책 추진이 중요하다.
 
연구소는 서울지하철공사(현 서울메트로)의 1995~1999년 손익계산서와 현금흐름을 토대로 분석한 결과 서울지하철공사의 만성적인 적자는 구조적으로 초기 투자비용이 막대한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 주요 원인으로 판단한다. 공사의 수지균형은 개통 이후 26년째에 달성할 수 있고 누적흑자는 50년 후에 가능하다고 분석한 것이다.(물론, 방만한 경영이 매년 적자를 줄이고 수지균형과 누적흑자 시기를 앞당길 수 있기 때문에 무시할 수 있는 요인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이 때 서울시지하철공사의 경우 수지균형을 달성하게 되면 채무가 전혀 문제되지 않기 때문에 합리적인 지하철 요금을 책정하는 것이 중요함을 제안한다.
 
서울시 지하철이 개통한 시점(2호선 순환선)이 1984년이고 26년째가 작년 2010년이지만 서울메트로는 2011년 3,472억원의 손실을 예상하면서 하반기에 요금 인상을 추진하고 있다. 1984년 이후 계속 3,4호선을 추가로 개통시켰기 때문에 1~4호선의 평균 수지균형 시점을 언제로 정하는지 지금은 알 수 없기에 요금인상 요인에 대해 쉽게 평가할 수 없다. 다만, 서울메트로의 요금인상 추진은 종합적인 경영평가를 통해 서울메트로 자체의 비용절감 대책을 수립함과 동시에 향후 수지균형 계획과 목표를 시민들에게 솔직하게 공개하고 협의한 후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용하는 시민들의 신뢰와 협조를 앞당길 수 있을 것임을 서울메트로의 경영진과 직원들은 알아야 한다.
 
003. 국민연금 재정의 문제 : 2001년 기준으로 한국의 연금제도는 정책홍보 차원에서 먼저 연금지급액을 확정시켜 놓고 거기에 맞추어 연금보험료를 산정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 결과, 연금 지급액과 납입 보험료 사이에는 구조적인 미스매칭이 존재한다. 즉, 표준소득 등급이 낮을수록 연금지급액은 연금보험료보다 훨씬 커지는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러한 구조는 연금가입자들의 불신과 부정을 확산시킴과 동시에 예상 운용수익율이 낮아지는 경우 국민연금의 재정이 빠르면 2028년, 늦어도 2049년이면 고갈된다고 분석된다. 따라서 연구소는 수익자 부담의 원칙에 따라 납부한 보험료에 비례하여 연금을 지급받는 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연금의 공익성 실현은 모든 연금가입자가 지급받는 연금에 대해 '노후 기초생활 보장세'의 형식으로 일정비율을 부과하여 기금을 조성하여 최소한의 노후 기초생활 수준 이하의 연금대상자에게 보조금으로 지급하는 방식으로 제안한다.
 
제2부. [노사문제 분석]
004. 발전노조 파업으로 본 상생적 노사협력 방안 : 연구소는 2001년 한 토론회에서 전력산업 민영화에 대한 발표를 통해 장기적인 전력수요 증대에 따라 발전능력 제고가 필요함을 인정하고, 현재의 한국전력의 재정구조상 부채(31조원)와 지급이자가 과다하여 추가 차입 대신 일부 발전소를 민영화하여 자금을 조달하는 것(그리고 부수적인 효과로 경영효율성과 전기요금 안정화)에 동의한다. 그리고 전력산업 민영화에 따라 일반적으로 우려하는 전기요금 급등 가능성과 무리한 인력감축에 따른 전기공급사고 가능성에 대해 정부가 통제할 수 있다는 점과 설비투자에 따른 기술직의 대폭적인 고용증가가 예상된다는 점에 비추어 기우임을 주장한다. 또한, 발전노조와 노총이 전력산업 민영화에 대해 반대하는 근거가 미약하고 중장기 전략과 목표가 없음을 비판한다.
 
하지만 나는 연구소의 분석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다. 전기요금 급등 가능성에 대해 연구소는 정부의 통제력이 남아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했지만, 서구국가들에 비해 정부 설립 이후 한국정부의 '통제력 행사'는 낙제점에 가깝기 때문에 국민들이 동의하기는 쉽지 않다고 본다. 그나마 공무원들은 '경영효율성'은 부족하지만 '자리 보전'에 대한 위기의식이 작용하여 전기요금 급등 요인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민간업자가 전력산업에 참여할 경우 로비와 뇌물, 조작과 선동 등 물불 가리지 않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이용하여 전기요금 인상을 추진할 것이고 이번 부산저축은행 사태나 삼성의 파렴치한 로비, 정유사들의 담합 등의 수 많은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을 것이다. 인력감축과 실업에 대해서도 민영화를 통한 발전소 건설이나 공기업에 의한 발전소 건설 모두 동일하게 기술직 인력의 증가는 동일하기 때문에 문제의 본질을 비켜난 처방으로 보인다. 결국 전력산업 민영화 문제는 (당장 나도 대안은 없지만...) 한전의 재무구조와 경영방안, 효율성, 재원조달 등에 대해 전국민적이고 장기적인 공론화와 합의가 필요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005. 경쟁과 규제, 공기업 민영화 방안 : 연구소는 전력산업 민영화 문제를 대함에 있어 공기업 체제를 고수하여 막대한 부채부담으로 인한 전기요금 상승을 택할 것인지 아니면 한전의 민영화를 통해 민간자본을 유치하여 부채를 줄임으로써 안정적인 전기요금을 택할 것인지의 선택의 문제라고 확신한다.
 
연구소의 분석에 대해 먼저 문제제기하고 싶은 것은 '전력이 지속적으로 증가'한다는 미리 전제한다는 것과 한전의 매출 및 원가구조와 개선방안에 대한 검토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력산업의 민영화가 부채를 줄여줄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도 전기요금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현재 시점에서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고 본다. 다만, 단기적으로 한전의 부채와 전기요금의 문제에 대처하는 방법은 부채를 자기자본으로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의 구상, 전기요금 할인혜택 축소와 전기요금의 단계적 인상, 한전의 경영효율성 제고를 통한 비용절감, 전기절약을 위한 대대적인 범국가적 & 국민적 노력, 신재생 에너지와 분산 에너지원의 확대와 에너지 자립도의 증대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제3부. [동북아 경제공동체 구상]
006. 한중일 3국의 교역구조와 경제공동체 구상 : 연구소는 한중일 3국간 교역구조의 특성을 살펴보고 주요 품목별로 무역특화 공간상에서의 비교우위를 분석한 후, 3국간 FTA 형성의 전제조건에 관해 검토한다. 한일 FTA 추진을 위해서는 일본측이 자유투자보장협정 체결과 5년~10년 단위로 일정액 수준 이상의 대한국 직접투자를 보장하는 것이 필요하고 중국과의 FTA 체결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이다.
 
007. 중국위협론과 안행형 경제발전 가설 검증 : 연구소는 한중일 3국간에는 품목별 부가가치도를 고려한 국별 경쟁력 측면에서 여전히 안행형 형태가 뚜렷이 나타나고 있어 이른바 중국 IT 산업의 급속한 발전을 근거로 한 안행형 붕괴론 주장이 없음을 주장한다. 그리고 한국은 고부가가치 산업에서 일본과의 격차가 확대되고 있고 중국으로부터는 강력한 도전을 받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화학 관련 재료, 소재 산업과 첨단 광학장비 산업을 중점적으로 육성해 나가는 등 전략적 산업정책이 시급히 요구된다고 밝힌다.
 
008. 환율변동과 한국의 주요 업종별 경쟁력 변화 : 연구소는 변동환율과 주요 업종별 수출-환율 상관분석 결과 환율변동이 한국 주요 산업 경쟁력 원천의 가장 중요한 요인임을 제시한다.
 
제4부. [투기와 버블]
009. 부동산 투기와 주택정책 : 이 절은 연구소측이 2002년 정부에 부동산 가격 안정에 관한 정책을 제언한 보고서를 토대로 작성되었다. 연구소는 2001년 아파트 가격과 전세가격이 급등한 이유는 정부의 금융정책의 실패(저금리, 대출규제 완화)와 잘못된 시그널, 그리고 구조적인 수급불균형과 잘못된 규제(주택청약제 유지)에 기인한 것으로 분석했다. 그에 따라 부동산 가격 안정화 방안으로 주택수급 장기(30년 단위)계획 수립, 주택보급율 목표 110% 설정, 구조적 수급불균형 해소, 금리정책과 통화정책의 신중한 결정, 행정수도 이전 대상 확대, 부동산 담보대출 규제, 부동산 거래 투명화, 초과이득 차단, 청약제도 폐지, 사후 분양제 도입을 제안한다.
 
이 절에서는 주택가격과 전세가격 안정화를 위한 공공분양주택과 공공임대주택 건설 확대, 그리고 보유세 강화를 강하게 제안하지 않은 것이 아쉽다.
 
010. 신용카드 버블의 경제적 영향 분석 : IMF 이후 카드사와 은행이 카드를 남발하고 미성년자 및 무소득자에 대해서도 무분별하게 카드대출 행위를 진행하는데 대해 강력하게 문제제기하면서 정부의 규제를 강화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연구소는 신용카드 사용이 신용구매보다 편법대출에 더 많이 이용됨을 지적하면서신용카드 버블에 따른 비용이 결국 공적자금 투입으로 인해 전사회적으로 전가될 수 있음을 경고한다. 신용카드 버블은 단기적으로 GDP를 2~3% 증가시키지만 결국 버블이 꺼지게 되면 GDP는 그만큼 하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제5부. [경제분석 방법론과 경제정책]
011. 경제분석 방법론 : 경제분석의 패러다임을 자본경제와 자산경제, 실물경제와 금융경제로 구분하여 4개 영역으로 나눈 후, 경제를 분석하는 방법론을 설명한다. 그리고 일본의 장기불황과 디플레이션, 일본정부의 잘못된 정책대응 등에 대해 논평한다.
 
012. 한국경제의 불확실성 요인과 경제정책 : 연구소는 IMF 이후 한국경제의 구조적 불확실성의 증가 요인으로 구조조정을 둘러싼 노사간 불신과 고위험 첨단산업으로의 이행에 있어 리스크로 제시한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책으로 기업과 정부 모두가 최소 10년 단위의 장기적 관점에서 방향성과 전략성, 집중성을 가지고 고위험형 첨단 기술개발을 위해 근본적인 정책대응 수립과 시행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제6부. [이 책을 마치며]
013. 합성의 오류와 개혁 : 연구소는 한국사회가 정치, 언론, 정부, 시민의식, 노사문제 등 사회 전분야에 걸쳐 합성의 오류 현상이 극에 달해 있음을 진단하고 이로 인해 각 부문의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거나 붕괴함을 주장한다. 이를 제거하기 위해 개인적 우선순위와 사회적 우선순위 간에 괴리가 있을 경우 사회적 우선순위 기준의 원칙에 따라 개혁을 추진해야 함과 가치 중립적 행위와 관련된 합성의 오류는 공익적 관점에서 사회적 우선순위를 중심하는 공익기준 대응 원칙의 확립이 필요함을 이야기한다. 또한 원인자 부담 원칙에 따라 개혁을 추진하고 합성의 오류로 인한 사회적 비용 전가를 차단하기 우해 책임소재를 명확하게 가려야 한다.
 
결론적으로 연구소는 정부부문 개혁의 5대 실천과제를 제시한다. 1) 감사제도의 개혁 : 형식이 아닌 결과에 대한 감사 지향, 2) 정부조직의 개혁 : 정책기획, 조사, 심의연구, 성과평가와 정책집행 조직의 분리, 3) 정부출연 연구기관의 통폐합과 민간이양, 4) 조세제도의 개혁, 5) 양적 사고의 지양
 
제1부 [경제위기 분석]에서 '동아시아 외환위기 분석'은 객관적이고 냉정한 분석이라고 평가된다. 다만, 서구 금융권의 동아시아 대출이 미국과 영국 중심의 신자유주의 금융산업의 세계화라는 차원까지 점검, 분석하지는 못했고 IMF의 처방이 동아시아의 서로 다른 환경과 조건의 국가들에게 공통적으로 부과됨으로 인하여 정책 효과를 배가하지 못했고 그로 인해 'IMF 음모론'까지 확대된 것에 대한 평가로 나아가지 못한 것은 아쉬운 점이다.
 
'국가채무 논쟁'과 '국민연금 재정의 문제'는 10년 가까이 경과된 지금도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문제인 것 같다. 국가 채무를 섣불리 단정짓는 것과 국민연금 재정의 문제에 대한 검토는 적절했지만, 공기업의 채무와 경영, 적정요금 등에 대한 진단은 종합적인 검토와 논의가 더 필요하고 국민연금 재정에 대한 해결책은 끈질기고 광범위한 사회적 합의를 요구하는 문제로 보인다. 전력산업 뿐 아니라 전체적으로 공기업에 대한 문제는 더 많은 분석과 대책에 대한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제3부 [동북아 경제공동체 구상]에서는 한중일 산업부문의 현황과 경쟁력에 대해 많이 알게 되어 신선했고 제4부 [투기와 버블]에서 부동산 버블을 제기하지 못한 것은 당시 연구소의 한계라고 보인다. 결국 10년 지난 지금 '버블'로 인해 부동산 경기가 위축되고 버블이 꺼지고 있으며, 금융기관의 부실채권 문제가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되었다. 
 
제5부 [경제분석 방법론과 경제정책]에서는 경제분석과 정책판단의 연관성과 주의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연구소 창립 3주년 기념으로 발간된 이 책은 [김광수경제연구소]의 성과와 한계를 그대로 보여준다. 10년이나 된 오래전 경제상황과 사건들에 대한 보고서이지만, 지금도 참고하거나 도움을 받을 것들이 많다. 이 책의 성과가 쌓여 지금의 연구소가 되었으니 10년 간 꾸준히 이어져 왔을 연구원들의 땀과 노력이 보이는 듯 하다.
 
[ 2011년 5월 2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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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을 멈춰라! - 자율적 공생을 위한 도구, 이반 일리치 전집 4
이반 일리히 지음, 이한 옮김 / 미토 / 2004년 6월
평점 :
절판


"과학과 기술이 만든 문제는 한 단계 심오한 과학과 더 나은 기술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을 유행처럼 만들어 버렸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잘못된 관리를 해결하는 법은 더 적극적이고 더 많은 양의 관리라고 여긴다. 이는 마치 오염된 강을 치료하는 길은 더 비싸고 강력한 청정합성세제를 사용하는데 있다고 결론 짓는 것과 같다. 더 많은 지식과 정보를 쌓고 더 많은 과학과 기술을 도입함으로써 현재의 문제를 억누르려고 하는 것은 그 근본 원인에 대한 성찰없이 그저 가속페달만 밟으면 모든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것과 같다."  

이 책은 법정스님의 저서 < 내가 사랑하는 책들 >에 소개된 책 50권 중 <소로우의 무소유, 월든>, <농부철학자 피에르 라비>, <오래된 미래>, <무탄트 메시지>에 이어 다섯 번째로 읽은 책이다.

저자가 처음 이 책을 발간한 시기는 1973년이다. 아직 소련과 동구권 체제가 무너진 시기도 아니었고 신자유주의가 도래하기도 10년 이상 남아있던 시기에 산업생산양식과 성장의 폐해에 대해 일갈하고 정치적 전환을 주장한 저자는 인류역사의 선각자이자 사상가라 인정받을 만 하다. 특히 학교와 의료, 수송, 에너지에 대한 그의 통찰력 넘치는 분석과 비판은 세대를 뛰어넘는 시기임에도 우리에게 여전히 울림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래서 법정스님께서 추천하셨으리라...
 
먼저, 출판사 서평을 읽어보자...
1949년, 미국의 대통령으로 재선된 트루먼은 취임 연설에서 “미국에는 새로운 정책”이 있다고 선언했다. 이 새로운 정책이란 다름 아닌, 미개발의 나라들에 대해 기술적 & 경제적 원조를 실시하고 투자를 확대한다는 것이었다(여기에는 당연히 한국도 포함).
이 연설에서는 향후 산업생산양식을 이끌어갈 중요한 단어가 사용됐는데, 바로 ‘미개발 국가(under-development country)’라는 단어가 그것이다. 이전에는 백과사전에서조차 찾아볼 수 없었던 ‘미개발국가’, ‘근대화’는 금새 경제학과 사회학에서 사용되는 전문용어로 정착됐다. 발전경제학이나 발전사회학이 대학의 정규과목이 된 것도 이 무렵이다.
트루먼의 취임 연설 이후 ‘개발’은 미국과 미국의 원조를 받는 제3세계의 국정지표 그리고 급기야 유엔의 정책이 되었다. 

‘발전’과 ‘성장’은 구래의 지반을 가지고 있는 ‘역사적’인 단어가 아니라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단어다. 마치 요즘 사용하고 있는 세계화가 그런 것처럼…
더욱 흥미로운 건 소련의 스탈린 역시 비슷한 시기에 자국민들을 ‘개발’의 바다로 노저어 가게 했다는 것이다. ‘개발’ 혹은 ‘성장’은 이때부터 신화가 되어버렸다. 누구도 ‘성장’에 이의를 달지 않았다. 러시아의 예에서 보듯이 성장보다는 분배의 정의를 요구하는 자들조차 ‘성장’을 부정하지 못했다. 이처럼 ‘경제발전’에 대한 사고방식에는 이데올로기로서의 측면을 찾아볼 수 없다. 자유주의자나 보수주의자, 민족주의자나 파시스트 그리고 나치나 레닌주의자 혹은 스탈린주의자들 역시 ‘성장’이라는 코드를 공유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상식대로 ‘성장’은 모든 가치를 뛰어넘는 선(善)인가? 이건 뜬금 없는 질문이 아니다. 최근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성장과 분배의 논쟁 역시 ‘성장’이라는 코드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정부와 주류경제학자 그리고 재야 간의 대결구도로 형성되었던 성장과 분배의 논쟁은 이제 급기야 제도권 안으로까지 진입했다. 하지만 이 논쟁구도 역시 ‘성장’을 배제하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성장’의 가치를 추구하던 세력뿐 아니라 소위 진보진영 역시 ‘진보적 경제발전론’이나 ‘분배를 통한 성장’을 주장하며 ‘성장’에 힘을 보태고 있다. 하지만 일리히는 명쾌히 주장한다. “성장을 멈춰라!”
 
40여년 전에 경고했음에도 우리의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성장’만을 위해 질주해온 미국과 유럽, 일본과 한국,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대부분의 지구상 국가들에서 지금 나타나는 모습은 어떠한가? 과연 ’학교’가 우리에게, 그리고 우리의 아이들에게 진정한 ’배움’을 줄 수 있는가? 과연 ’병원’이 우리에게 건강과 치유력을 제공하는가? 과연 자동차와 비행기가 우리에게 시간적, 공간적, 정신적, 육체적 여유와 시간을 제공하는가?
 
저자는 봉건시대에서 근대로 넘어오는 시기에 교육과 건강, 통행과 에너지라는 미명하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산업생산양식이 ’학교’와 ’병원’과 ’수송’을 상품산업으로 탈바꿈시키고 교육과 건강, 통행과 에너지를 산업생산양식으로 탈바꿈시켰는지 알려준다.
 
산업생산양식은 ’교육’이라 불리는 상품을 제조해내면서 처음으로 완전히 합리화 되었으며, 교육은 과학적 마술이 창조한 환경에 맞는 새로운 유형의 인간을 탄생시키는 연금술적 과정을 추구하게 되었다. ’교육’이라는 상품과 ’학교’라는 제도는 서로를 필수적인 것으로 만들어 주었다. 배움을 학교교육으로 재정의해버린 후 사람들에게 학교를 필수적인 것으로 보이게했을 뿐만 아니라, 학교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이 가난의 고통에 더하여 교육을 받지 않은 자에 대한 차별까지 겪게 만들었다는 것... 사람들이 지식의 수준을 정의하고 측정하는 학교의 권위를 받아들이게 되면, 사람들은 적절한 건강 수준이나 수송 수준에 대해서도 해당 분야의 제도기관의 권위를 쉽게 더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것이 작금의 현실이다.
 
저자는 의료의 경우, 1913년을 하나의 분수령으로 본다. 그때부터 환자들은 구체적으로 효과적인 치료를 제공해주는 의대 졸업자를 만날 확률이 반반이 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의학이 병과 치료를 ’정의’하게 되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의사들은, 스스로 만들어낸 기준으로 치료의 효과를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시기를 전후하여 과학과 기술의 발전으로 물은 정화되었고 유아 사망율은 낮춰질 수 있었고 쥐를 통제하여 역병을 물리치고 매독균을 현미경으로 보고 살바르산으로 매독을 제거할 수 있게 되었다. 저자는 사망율과 발병율의 눈부신 감소는 위생, 농업시장, 그리고 삶에 대한 일반적인 태도 변화 덕분에 일어난 것이며, 이들 변화 중 일부는 의학이 발견해낸 사실에 건축토목기사가 주의를 기울였기 때문에 생겼다고 말한다. 그러나 의사가 직접 개입하여 나타난 변화라 말할 수 있는 것은 대단히 드물다라고...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치료를 위한 도구가 간단하면 간단할수록 의료전문가들은 그 도구를 자신들만 독점적으로 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에 소요되는 훈련기간은 더욱 길어져만 갔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급기야는 모든 사람들이 의사를 더 의존하게 되었다. 

저자는 의사들에 의해 생긴 질병 중에서 가장 심각한 질병은 바로, 의사들이 환자에게 더 나은 건강을 안겨주는 척하는 허풍이라고 단언한다. 엄청난 돈이 의학적 치료에 의해 생긴, 샐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손해를 메우기 위해서 사용되었고 의료가 병을 고쳐서 얻은 이득은, 의료가 새로이 아프게 만든 사람들의 비용에 비하면 난장이만큼이나 작아보인다고... 물론, 내가 보기에 이런 흐름은 의료 뿐 아니라 교육, 법률, 과학, 건설, 회계 등 과학과 기술을 통해 새롭게 정의된 모든 분야에서 공통적으로 적용될 것이다.
 
저자의 이야기는 내가 지금까지 전혀 생각해보지 못한 관점이고 접근방식이었다. 우리사회는 저자가 비판하는 산업생산양식과 제도들을 기초로 하여 헌법과 법률, 제도와 정책, 규범과 문화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적지않게 당황할 수 밖에 없었다.
 
저자는 산업생산양식의 발전과 장악에 따라 인류가 위협받게 되는 여섯 가지 경로를 규명한다.
1) 과잉성장은 인간이 진화해온 환경의 물리적 기본구조에 대한 권리를 위협한다.
2) 산업화는 공생적인 일을 할 권리를 위협한다.
3) 새로운 환경에 맞추어 인간을 과잉 프로그래밍하는 일은 인간의 창조적인 상상력을 죽인다.
4) 새로운 생산성 수준은 참여정치의 권리를 위협한다.
5) 기존의 신화, 도덕, 판단을 참고할 수 있는 권리를 위협한다.
6) 강제적이지만 인공적으로 실현된 만족을 주는 수단이 불러일으키는, 만연된 좌절은 보다 미묘한 위협을 구성한다.
 
그리고 저자는 산업생산양식을 가져온 ’도구’를 재정의하면서 지나치게 효율적인 도구가 물리적 환경과 인간이 맺는 관계를 촉진하는 일에 적용되면 결국 인간과 자연의 균형을 파괴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 파괴의 모습은 ’생태계의 파괴’, ’근본적인 독점’, ’과잉계획’, ’양극화’, ’노후화’, ’좌절’이다. 이 모든 저자의 주장과 예상은 30년이 지난 후 인류에게 본 모습을 적나라하게 나타나고 있다. 
 
어느 날 숲의 나무를 잘라내고 그곳을 주차장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걸 흔히 ‘발전’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장소에 전혀 다른 것을 설치하는 것. 그것을 보고 우리는 숲의 ‘발전’이라고 부르지 말아야 한다. 그는 이 책에서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까지 무한 성장하는 산업사회의 생산방식 대신 자율적, 공동적 도구 사용과 인간의 자율적 행위의 상호교환을 중심으로 하는 공생의 사회를 주창하고 있다. 그는 공생공락 하는 데 필요한 세 가지 - 시, 자전거, 도서관 - 가 있다고 말한다.
 
그가 성장에 반대하는 이유는 명쾌하다. 사회구성원 모두가, 다른 사람들이 최소한도로만 통제하는 도구를 사용하여 가장 자율적인 활동을 할 수 있는 사회가 만들어질 때 우리는 공생적(Conviviality)인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37년 전의 저자의 비판과 대안을 인류사회는 거부하였다. 물론, 역자(이훈)의 말대로 저자가 제시한 세 가지 방안(과학의 탈신화화, 언어의 재발견, 법 절차의 회복)는 실천적이기 보다 상징적이었다. 하지만 저자가 줄기차게 주장하는 ’균형’과 ’도구의 한계를 정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산업생산양식이 인류사회를 지배하게 된 기간은 300년 가까이된다. 그렇다면 그것을 극복하는 기간 역시 짧은 시간 내에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일이 한 걸음씩 이루어지는 것을 감안하면 ’성장의 한계’나 ’도구의 한계’를 정하는 것이 인류에게 출발점이 될 것이고 새로운 관점과 대안에 대한 계기로 주어질 것이다. 그 ’균형’을 위해서는 아주 자그마한 구멍 만들기부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산업생산양식’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고 근본에서부터 인류사회에 공론화시키는 것이라 생각한다.
 
* 책 속의 문장
- 공유된 배움과 개인간의 비판적 상호작용을 높은 수준으로 진작시키려는 사회는 교육산업의 성장에 한계를 설정해야만 한다.(p.09)
- 대단히 현대적이면서도 산업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미래사회에 대한 이론을 정식화하기 위해서는 자연적 규모와 한계르 파악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우리는 오직 이 한계 안에서만 기계가 노예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 한계를 넘어서면 기계 자체가 새로운 노예주가 된다.(p.12)
- 1970년 미국의학협회 총회에서 회장은 신생아의 건강상태가 양호하다고 증명될 때까지는 모든 신생아를 환자로 간주하도록 소아과 의사들에게 권고하였다.(p.22)

- 정보를 저장하고 지식을 쌓아나가고 더 많은 과학을 도입함으로써 현재의 문제를 억누르려는 것은, 궁극적으로 가속화를 통해 위기를 해결하려는 시도이다.(p.28)
- ’공생’이라는 단어는 사람들 사이의 그리고 사람과 환경 사이의 자율적이고 창조적인 상호작용을 뜻한다. 공생이란 개인의 자유가 사람들 간의 상호 의존성으로 실현된 것이며, 그 자체로서 하나의 윤리적 가치이기도 하다.(p.33)
-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현재의 제도를 뒤집어 엎어 산업적 도구를 공생적 도구로 대체하지 않으면 효과적으로 실현될 수 없다.(p.33)

- 대안적 정치질서는 모든 사람들이 각각 그들 자신의 미래를 정할 수 있도록 한다는 목표를 가진다. 그러한 정치는 생존, 정의, 그리고 일의 자율성이라는 가치를 보호하기 위해 도구의 사용범위를 제한할 것이다.(p.34)
- 에너지의 노예가 되지 않고 사람들끼리 의존하는 법을 다시 배워야만, 사람들 스스로 절제의 즐거움과 검소의 해방감을 재발견하게 될 것이다.(p.35)

- 나는 ’도구’라는 용어를 드릴, 전화기, 빗자루, 건축자재와 같은 단순한 기재에서부터, 자동차와 발전소같은 거대한 기계, 콘플레이크나 전류와 같은 유형의 상품을 생산하는 공장과 같은 생산적 기관, 그리고 교육, 건강, 지식, 결정과 같은 무형의 상품을 생산하는 기관까지 포함시키는 넓은 뜻으로 쓴다.(p.45)

- 공생적 사회에 근본이 되는 것은 조작적 제도와 중독적 재화나 서비스를 전부 다 제거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구체적인 욕구를 생산하고 그 충족을 위해 전문화된 도구와 자아실현 능력을 보충하고 발현시키는 도구 사이에 균형을 이루는 것이다.(49)
- 치유될 수 있는 대부분의 질병은 오늘날 평범한 사람들이 처방하고 치료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기 매우 힘들어한다. 왜냐하면 의료가 지닌 의례가 너무 복잡해서 그 기본적 과정이 단순하다는 사실을 숨기기 때문이다.(p.64)
- 나이별로 학년이 나뉘어진 채 이루어지는, 일생을 결정짓는 특권을 따느냐 마느냐를 결정짓는 강제적인 경쟁은, 평등을 진작시키기는 커녕, 남보다 빨리 시작하거나, 더 건강하거나, 교실 밖의 자원이 더 많은 사람에게만 유리한 결과를 낳을 뿐이다.(p.74)

- ’근본적인 독점’이란, 하나의 브랜드가 지배하는 상태가 아니라 한 가지 유형의 생산물이 지배하는 상태다. 근본적인 독점은 산업생산의 과정이 절실한 필요의 충족에 대한 배타적인 통제를 행사하며 비산업적인 활동을 경쟁에서 축출하는 상태다.(p.90)
- 현대 의료의 근본적인 독점은 아픈 사람이 의사가 처방하지 않고 치료할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한 상태다.(p.91)
- 근본적인 독점은 강제적 소비를 부과함으로써 개인의 자율성을 제약한다.(p.92)

- 보건전문가의 통제 아래 쓰이는 돈이 더 늘어난다는 것은 더 많은 사람들이 환자의 역할, 스스로는 아프다 말다를 결정할 권한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주어지는 역할을 수행하도록 조작됨을 뜻한다.(p.93)

- 도로, 학교, 병원으로 온통 뒤덮인 사회에서 독점으로부터 보호받는 일은 어렵다. 왜냐하면 이런 사회에서 독립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능력은 기능이 감퇴되고 단순한 대안마저도 상상력이 미치는 범위 밖에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필요한 행동이 마비되어 왔기 때문이다. 독점이 물리적 세계를 형성할 뿐만 아니라 상상력과 행동의 범위까지도 결정할 때 독점을 제거하는 것은 힘들다. 근본적인 독점은 일반적으로 너무 늦었을 때 발견된다.(p.96)
- 제어되지 않는 산업화는 가난을 근대화한다. 가난의 수준이 높아지고 부자와 빈자의 간극이 커진다. 이 두 측면은 함께 이해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파괴적인 양극화의 본질을 놓치게 된다.(p.114)

- 개인은 각자가 소유한 물건의 영수증이 얼마나 철 지난 것인가에 따라 사회적 등급이 매겨진다. ... 경제가 대규모로 생산물을 새로 고안하고 기존 기본 상품 묶음을 노후화시키는 과정 위에 건설된 곳은 어디에서나, 가장 최신의 서비스와 재화에 대한 접근권을 가진 자는 특권층뿐이다. (p.122)
- 재화와 도구를 정기적으로 혁신하게 되면, 무엇이든 새롭기만 하면 더 나은 것이라는 신념을 낳게 된다. 이 신념은 현대 세계관의 핵심적인 부분이 되었다.(p.123)
- 공동체가 과학에 대한 과잉확신을 가질 때, 사람들은 성장의 상한선을 설정하는 일을 전문가에게 맡겨버린다. ... 그러나, 폐쇄적인 전문가 집단이 전문적 지식을 추구하는 일에 자기제약을 가하리라고 신뢰할 수 없다.(p.142)

- 산업화된 국가의 언어는 창조적인 작업과 인간노동의 결실을 산업의 산출물로 파악한다. 의식의 물질화는 서구 언어에 반영되어 있다. ... 명사로 이루어진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have) 일(work)이라는 식으로 소유권적 표현을 쓴다. ... 그들은 지식, 이동성, 심지어 감성과 건강까지도 획득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들은 일뿐만 아니라 사랑도 가진다.(have sex) p.145

[ 2010년 11월 26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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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 중력의 세 가지 길 - 리 스몰린이 들려주는 물리학 혁명의 최전선 사이언스 마스터스 13
리 스몰린 지음, 김낙우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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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자 중력 이론이 인류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은, 우주가 존재한다는 기적과도 같은 사실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이 불가사의한 사실의 적어도 일부나마 파악할 수 있다는 새로운 신념일 것이다."
 
이 책은 < 섹스의 진화 >, <원소의 왕국>, < 마지막 3분 >, <인류의 기원>, <세포의 반란>, <휴먼 브레인>, <에덴의 강>, <자연의 패턴>, <마음의 진화>, <실험실 지구>, <여섯 개의 수>, <생각의 탄생>에 이어 ’사이언스 마스터스 시리즈’의 열 세번째 책으로, ’양자 이론과 상대성 이론을 통합하고 있는 양자 중력 이론(중력의 양자이론)의 현황과 전망’을 소재로 삼고 있다.  
 

브라이언 그린이나 리차드 파인만 등 내가 지금까지 읽어오던 우주론과 우주론 관련 물리학  관련서적이 대부분 ’초끈이론’ 중심이었는데 이 책은 그동안의 내가 편협하게 알고 있던(초끈이론 주창자들의 일방적인 주장만 들었던) 것을 교정시켜 주었다.
내용이 많이 어려운 책이었으나 우주론의 최신 동향, 초끈이론과 다른 이론을 알아볼 수 있는 기회라서 읽는 내내 흥미를 잃지는 않았다.
 
17세기 후반 아이작 뉴턴은 수학과 물리학, 천문학 등 많은 분야에서 천재적인 업적을 이루었다. 특히 그의 절대적 시공간 개념과 중력, 행성운동 개념은 동 시대의 다른 과학자들의 업적과 함께 인류사회에 ’물질주의’, ’절대성’과 ’기계론’을 인식시켜 놓았다.
뉴턴의 영향은 21세기인 현재에까지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양자역학은 입자이기도 하고 파동이기도 한 빛(이중성)과 소립자의 세계를 확률론적(확률파동함수)으로 설명하고 인간이 소립자의 위치와 속도를 모두 알아낼 수 없다는 것(불확정성의 원리)을 밝혀냈다.
200년 넘게 서구사회를 지배해온 뉴턴역학을 넘어 우주론과 자연과학에 커다란 획을 그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말년에 수 십년 동안 해결하려고 애쓴 분야가 ’대통일이론’이었다. 

아인슈타인은 특수상대성이론과 일반상대성이론을 통해 ’광속의 유한성’과 ’상대적 시공간’ 개념을 탄생시켰고 물리학계에 양자역학의 토대도 제시한 바 있었다.
중력, 시간, 공간, 그리고 물질에 대한 기존의 관점을 뒤흔든 상대성이론과 양자 역학은 20세기에 물리학 혁명을 일으켰다.

아인슈타인이 이루어놓지 못한 대통일이론은 현재 ’양자 중력 이론(Quantum Gravity Theory)’라는 이름으로 현대 물리학자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이 책은 현재 이론 물리학의 최전선에서 어떤 혁명적인 이론들이 만들어지고 다시 사라지고 있는지 보고하고 있다.
저자는 양자 중력 이론에 이르는 길로 초끈 이론(super string theory)의 길, 고리 양자 중력 이론(loop quantum gravity)의 길, 그리고 블랙홀의 열역학의 길의 세 가지를 제시한다.
 
또한 저자는 지금까지 우리를 지배해오던 자연과 우주현상에 대한 "존재론적 세계관"을 ’진화하는 관계들의 네트워크’로 보는 "관계론적 세계관"으로 전화하게 되면, 언젠가는 우주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돌파구를 마련하게 될 것이라고 희망 어린 전망을 내놓는다. 

[양자중력이론]

 
1. 초끈 이론(super string theory) :
초끈 이론은 세상 만물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존재가 점(0차원)처럼 생긴 입자가 아니라 일차원적인 끈이라고 주장한다.
이 끈은 1차원 시간과 9차원 공간 속에서 진동한다.
끈마다 진동하는 방식이 다 다른데, 이 진동 방식에 따라 그 끈은 전자, 쿼크, 뉴트리노, 혹은 중력자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다.
다시 말해 우리가 보는 세상의 모든 입자는 모두 다 진동 방식만 다른 끈인 것이다.
그러나 이 초끈 이론에는 약점이 있다.
초끈 이론을 연구하다 보면 수학적으로 아무런 이상이 없는, 다시 말해 모순없는 이론이 다섯 가지나 존재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최근의 이론적 연구에 따르면 무수히 많을 수도 있다.
이것은 초끈 이론이 완전하지 않을 수도 있음을 뜻한다.
 초끈 이론의 문제점 중 하나는 절대 시공간이라는 뉴턴 역학적 낡은 배경을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다.
 

2. 고리 양자 중력 이론(loop quantum gravity) :
초끈 이론의 강력한 경쟁자인 고리 양자 중력 이론은 공간에도 최소 단위가 있다는 놀라운 주장을 한다.
전자 현미경으로 관찰하면 매끄러워 보이는 표면이 자잘한 원자와 분자들로 거칠거칠한 것처럼, 물질이 불연속적인 원자들로 이뤄지듯이, 공간 역시 아주 작은 규모까지 쪼개다 보면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최소 단위의 공간이 있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상대성 이론을 가지고 거둔 최대의 업적, 다시 말해 시공간이 그 자체로 존재하는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라 사물들의 관계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관계론적 존재임을 보여 준 것에 바탕을 두고 있다.
따라서 이 이론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우주가 가만히 있는 정적인 존재가 아니라 끊임없이 요동하는 동적인 존재임을 보여 준다.
그리고 이것은 우주의 생성 과정, 평행 우주, 다중 우주, 양자 블랙홀 이론 등 현대 우주론의 수많은 난제들을 해결해 준다.
그러나 이 이론 역시 수많은 비판을 받는다.
기존에 나와 있는 이론들을 수학적으로 다르게 표현하는 방법을 다루는 단순한 수리 물리학적 테크닉이 아니냐는 비판에서 시작해서, 고리 양자 중력 이론이 바탕에 놓고 있는 이론들에 대한 철저한 검토가 부족하다는 비판까지 다양한 공격이 나오고 있다. 
[양자시공간의 컴퓨터 모형]



3. 블랙홀의 열역학
블랙홀의 열역학은 우주론 연구에서 출발했다.
그리고 이 이론은 양자 중력 이론과 관련해서 실험적으로 의미가 있는 예측을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이다.
왜냐하면 10차원의 끈과 플랑크 길이의 공간 원자와는 달리 블랙홀의 열역학은 우주 공간에 존재할 것이라고 추측되는(거의 존재하는 것이 확실시되는) 블랙홀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직 우리는 어떤 천체가 블랙홀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조만간 블랙홀임이 확실한 천체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블랙홀의 열역학 이론이 예언한 호킹 법칙, 베켄슈타인의 한계, 운루의 법칙 같은 이론적 예측들을 실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게 되며,
블랙홀의 열역학에 바탕을 두고 세운 양자 중력 이론은 앞의 두 후보들에 비해 최종적 양자 중력 이론에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된다.
그리고 블랙홀의 거대한 중력에 의해 극단적으로 늘어나 있는 블랙홀 주변 시공간에 대한 관측을 통해 우리는 고리 양자 중력 이론과 초끈 이론의 예측과 제안이 얼마나 타당한지도 검증할 수가 있다. 
[ 블랙홀의 특이점과 지평선]



현재 이론 물리학계의 주류는 초끈 이론이다.
전 세계 수천 명의 이론 물리학자들이 초끈 이론에서 새로운 발견을 꿈꾸며 치열하게 연구를 하고 있다.
그러나 소수이기는 하지만 고리 양자 이론가들은 초끈 이론이 가지고 있는 한계점들을 지적하며 고리 양자 중력 이론을 제안하고 있다.(저자는 고리양자중력이론 전문가...)
현대 이론 물리학계는 이 두 이론가 집단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다.
 
이 책에서 발견한 재미있는 사실은 물리학계나 기타 자연과학계 역시 통상적인 학문분야와 비슷한 분위기와 문화라는 것이다.
저자는 초끈이론 전문가들과 고리양자이론 전문가들이 상대방의 논문이나 학회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자신들의 이론만이 옳다는 독선에 빠져있다고 비판한다.
저자는 세 가지 길이 하나의 현상을 보는 세 가지 다른 창이라고 주장한다.
저자의 말에 의하면 과거 16~17세기에도 (동시대를 살았지만) 케플러의 행성 법칙을 알아 보려고 하지도 않았던 갈릴레오와 갈릴레오의 투사체 법칙을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은 케플러가 손을 잡았다면, 갈릴레오와 케플러의 업적을 통일해 근대 물리학의 기초가 된 뉴턴 역학이 그들의 시대에 탄생할 수 있었다며 사례를 든다.

저자는 책 후반에 양자중력이론으로 가는 ’세가지 길’ 이외에 블랙홀의 열역학에 영감을 받은 ‘홀로그래피 원리’, ‘비가환 기하학’, ‘블랙홀의 엔트로피 이론’을 소개한다.
그러한 새로운 이론적 아이디어에서 나온 공통의 문제를 초끈 이론가들과 고리 양자 중력 이론가들이 함께 풀다 보면 두 이론이 궁극적으로는 하나인 최종 이론의 부분들이거나, 어느 하나가 다른 이론과 비슷할 것이라 예상한다. 
[양자중력 공간이론 - 웜홀]

 
저자는 이 책의 결론을 과감하게 내린다.(이 책은 영문판 발간은 2000년이다.)
첫째는 2010년대까지는 초끈 이론과 고리 양자 중력 이론의 안개 속 논쟁이 깔끔한 최종적 이론으로 정리되어 양자중력이론의 기본 틀이 마련된다는 것
둘째는 21세기 중반에는 고등학생이 중력에 대한 양자 중력 이론을 배우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첫째 결론은 2010년대가 지나려면 아직 9년이 남아있으니 지켜볼 일이고 둘째 결론은 우리 후손들이 알 수 있으리라...^^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 내 나름대로 의미를 발견한 부분은 서구의 주류 물리학계에서 자연과 우주의 원리를 ’독립된 존재’를 파고들어 가는 방식 뿐 아니라 ’상호간의 관계’와 ’상호작용’의 측면을 바라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현상은 서구에서 물리학이나 우주론에서 출발하여 생물학이나 화학과 같은 자연과학 뿐 아니라 인문학이나 사회과학에서도 관점과 방법론이 전환될 것이라는 예감을 준다.


* 책 속의 문장
- 우주에 실재하는 것과 무관한 공간은 의미가 없다. 공간은 비어 있거나 꽉 차 있으며, 어떤 것들이 그저 오고 가는 무대가 아니다. 공간은 존재하는 것들을 제외하면 아무 의미도 없다. 즉, 우주는 사물들 사이에 성립하는 관계들의 한 측면일 뿐이다.(p.49)
- 공간은 문장과 비슷한 것이다. 단어가 하나도 없는 문장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 우주의 기하학은 문장의 문법 구조와 무척 흡사하다.(p.49)
- 나는 상대성 이론고 양자이론이 주는 교훈은 우주가 진화하는 관계들의 네트워크임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p.52)
- 중력의 양자이론을 세우는데 그토록 오래 걸린 이유 한 가지는 이전의 모든 양자이론이 배경 의존적이었기 때문이다.(p.60)
- 근본적으로 생각하려 한다면 우리는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환상이라는 중요한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새 물리학의 언어로 말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과정이 상태보다 중요한 어휘 체계를 배워야만 한다.(p.111)

- 우주는 많은 ’사건’들로 구성된다. ... 사건들의 우주는 ’관계론적인 우주’다. 즉, 모든 성질들은 사건들 사이의 관련성을 통해서 기술된다. 두 사건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관계는 ’인과 관계’다. (p.112)
- 인과적 구조는 모든 시간에 대해서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동적이며 법칙에 따라 진화한다. 우주의 인과적 구조가 시간에 따라 어떻게 변해 가는가를 결정하는 법칙을 ’아인슈타인 방정식’이라고 부른다. (p.121)

- 세계의 불연속 구조가 명백해지는 시간과 공간의 규모를 ’플랑크 규모’라 부른다. 그것은 중력과 양자현상의 효과가 동등해지는 규모로 정의된다.(p.123)
- 공간의 한 영역을 0도까지 냉각시켜서 그것이 에너지를 갖지 않게 해도, 여전히 무작위적으로 요동치는 전기장과 자기장이 존재할 것이다. 이것을 진공의 ’양자 요동(quantum fluctuations)’이라고 부른다. (p.158)
- 물리학은 다른 과학과 마찬가지로 가능성의 예술이다.(p.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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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자중력과 상대성이론의 경합 ] 2009. 11. 03 한겨레 기사


73억광년 날아온 빛의 속도 아인슈타인 상대성이론 살려


양자중력이론 예측 일부 틀려
‘아인슈타인이 옳았다.’
미국 항공우주국(나사)의 ‘페르미 감마선 우주망원경’이 73억 광년의 거리를 날아온 감마선 빛을 관측해 분석해보니 빛속도는 에너지나 파장과 무관하게 늘 일정하다고 보았던 아인슈타인의 이론이 여전히 옳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천체물리학자들이 밝혔다. 이 연구논문은 국제학술지 <네이처> 최근호에 실렸다.

1905년 아인슈타인은 시간과 공간이 관측자에 따라 달라진다는 뜻에서 ‘시공간’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며 모든 빛은 진공의 시공간에서 늘 초속 30만㎞로 날아간다는 ‘광속 불변의 법칙’을 특수 상대성이론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이후에 양자이론과 상대성이론을 통합해 ‘만물의 이론’을 만들려는 물리학자들은 미시의 양자세계에선 시공간의 진공에서 ‘양자요동’이 일어나며 고에너지와 만날 때 상호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에 빛의 에너지가 클수록 빛속도는 느려진다는 예측을 내놓았다.

이 분야의 연구자인 김상표 군산대 교수(천체물리학)는 “바다가 멀리서 보면 평탄하지만 가까이 보면 물거품을 일으키며 요동하는 것처럼 양자세계에선 시공간이 요동한다는 게 ‘양자요동’의 의미”라며 “아인슈타인 이론에선 에너지와 파장에 관계없이 빛속도는 일정하지만, 양자중력이론에선 빛속도가 양자요동의 영향을 받는 것으로 예측돼 왔다”고 말했다.

두 가설이 맞서 있는 가운데, 페르미 감마선 우주망원경이 73억 광년 떨어진 곳에서 두 중성자별의 충돌로 생긴 엄청난 에너지의 감마선 입자들이 지구 쪽으로 날아오는 것을 지난 5월 처음 포착했다. 포착된 감마선 입자 하나는 다른 것에 견줘 무려 100만배가량 큰 에너지를 지니고 있었기에, 아인슈타인에 도전한 새로운 양자중력이론이 맞다면 두 입자의 도착 시각은 몇 분가량 달라야 했다. 하지만 결과는 0.9초 차이에 불과했다. 여러 분석 방법을 동원해 연구팀은 두 빛 입자가 73억 광년 떨어진 곳에서 ‘동시에’ 출발했음을 입증했다.

김 교수는 “빛이 무려 73억 광년이나 날아오는 동안에 불과 0.9초 차이만을 나타냈다면 이는 사실상 에너지 차이가 빛속도에 영향을 끼친다는 양자이론의 일부 예측이 틀렸음을 뜻한다”고 말했다. 감마선 폭발은 평균적으로 석탄 3×10³³t을 태우는 것과 같은 에너지를 발산하지만, 우주 공간에서 감마선이 방출되는 원리는 아직 분명하게 규명되지 못했다.

김 교수는 “지난해 다른 연구에선 감마선 빛 입자의 도착 시각이 4분가량 차이를 나타내 양자중력이론 쪽이 의기양양했는데 이번엔 지난해의 분위기를 뒤엎었다”며 “이번 연구의 분석은 매우 신뢰할 만하고 결정적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한편, 아시아태평양이론물리센터와 양자시공간연구센터는 2일부터 4일까지 한국과 이탈리아의 천체물리학자들이 모인 가운데 감마선 폭발과 상대론적 천체물리학에 관한 심포지엄을 서강대 마태오관에서 열고 있다.

오철우 기자

[ 2010년 11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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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농장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
조지 오웰 지음, 도정일 옮김 / 민음사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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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초에 오웰의 <1984>와 이 책 <동물농장>을 읽었을 때 그다지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난 2008년 초 <1984>를 다시 읽어 보았고 이명박 정권이 들어선 후 한국사회의 전체주의적 경향과 최근 공부모임 세미나에서 20세기 유럽의 사회민주주의에 대해 다루면서 다시 읽고 싶어졌다.
 
이 책은 스탈인 시대의 소비에트의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소설이다. 소설의 내용을 생각해보면 알겠지만, 농장주인 ’존즈’는 러시아 혁명 당시 러시아 황제였던 니콜라스 2세이고 미래의 동물 혁명을 제시하고 죽은 ’메이저’는 칼 마르크스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나폴레옹’은 스탈린, ’스노볼’은 트로츠키, ’돼지들’은 볼셰비키, ’복서’는 프롤레타리아트, 동물들의 반란은 러시아 혁명, ’개들’은 비밀경찰, ’스퀼러’는 공산당 기관지인 프라우다, ’필킹턴’은 영국, ’프레드릭’은 독일, 동물 학살은 스탈린 시대의 재판, ’외양간 전투’는 1928~1919년 연합군 침공, ’풍차 전투’는 1941년 독일의 러시아 침공, ’풍차’는 소비에트의 5개년 계획들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시대 상황을 보면 히틀러의 독일이나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도 <동물농장>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웰의 <동물농장>이 영국에서 처음 출간된 것은 일본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사실상 끝나고 조선반도가 해방되던 1945년 8월 15일로부터 이틀이 지난 8월 17일 이었다. 실제 오웰이 이 책을 탈고한 것은 1944년 2월이었다고 한다. 오웰은 1년 6개월 동안이나 책을 발간해 줄 출판사를 찾지 못했다. 영국과 미국의 출판사들이 <동물농장>의 출판에 동의하지 않은 이유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지 않은 상황에서 소련은 서방 연합국들에게는 사실상의 동맹이었기 때문에 소비에트 체제에 대한 통렬한 비판물(정치 풍자)이 출판된다는 것은 당시의 영국과 미국 정치사회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소설을 읽지 못한 사람들이라 하더라도 마르크스와 러시아 혁명, 소련 체제, 1950년대까지의 소련 역사를 대충이라도 알고 있다면 역으로 <동물농장>의 전개를 역으로 추측할 수 있을 정도로 오웰은 정확하고 분명하게 소련 소비에트 체제에 대한 정치풍자 소설로 <동물농장>을 쓴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인 조지 오웰은 소위 자본주의 찬양가이거나 자유민주주의 수호자였을까? 그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 책에는 <동물농장> 이외에 두 개의 오웰의 글이 실려 있다. 그 중 <나는 왜 쓰는가>를 읽어보면 오웰이 스스로를 ’민주적 사회주의자’라고 밝히고 있다. 당시 유럽의 정치사상사를 돌이켜 보면, ’민주적 사회주의’라 함은 자본주의에 반대되는 사상으로 ’사회주의’를 추구하되, 그 방식과 주요 내용이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현재의 여러 정치사상과 비교해보면 ’사회민주주의’에 가까운 것이다.
 
* 저자인 ’조지 오웰(George Orwell)’은 누구인가? -----------------------
본명은 ’에릭 아서 블레어(Eric Arthur Blair)’이고 조지 오웰은 필명이다. 영국인으로 1903년 인도 동북부 벵갈에서 태어났다. 인도 세관 아편과의 하급 관리였던 아버지처럼 식민지 관료의 길을 선택하여, 인도제국 경찰국 소속 경찰관으로 미얀마에서 5년 동안 근무했다. 그러나 제국주의 관료가 되어 피식민지 주민을 무자비하게 짓밟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낀 그는 1927년 사표를 제출하고 그 뒤 몇 년 동안 런던과 파리를 떠돌아다니며 부랑아 같은 생활을 했다. 이 무렵의 생활을 기록한 책이 [런던과 파리에서의 밑바닥 생활]이다. ’에릭 아서 블레어’라는 본명을 버리고 ’조지 오웰’이라는 필명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1936년 스페인 내전에 참전하며, 사회주의에 대한 신념은 더욱 굳어졌으며 소설가로서의 역할과 임무를 새롭게 다짐하게 되었다. 그는 ’소비에트 신화’의 실상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줄 작품을 구상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동물농장]이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BBC와 <트리뷴타임스>에서 일하며 창작에 몰두, 6년 만에 비로소 [동물농장]의 탈고를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소비에트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탓에 책을 출판해줄 출판사를 찾을 수 없어 어려움을 겪었다. 18개월 뒤 ’세컨드 앤드 워버그’라는 작은 출판사를 통해 1945년 8월 17일 비로소 세상 빛을 보게 되었다.
[동물농장]의 성공 후 디스토피아 소설 [1984]를 탈고하나, 그 책의 출간 다음 해인 1950년 1월 유니버시티 병원에서 지병인 폐결핵으로 각혈한 뒤 갑작스레 숨을 거두었다. 4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한 그는 옥스퍼드셔 서튼 코트네이에 묻혔다.
조지 오웰은 정치가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정치적 인물로 평생을 살아왔다. 그는 또한 진리가 아무리 불편해도 그 ’불편한 진리’를 서슴지 않고 말하는 용기 있는 도덕가이기도 하다. 그는 시대와 불화를 겪으면서 20세기 전반기에 양심을 용기 있게 대변한 작가였다. 더불어 [동물농장]은 그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출간된 지 5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그 힘을 간직한 채 전 세계 68개국 언어로 출간되는 등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
 
단순하게 생각하면 이 작품은 소련 체제에 대한 풍자와 비판으로 받아들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그 이유는 작품이 출간된 지 6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전 세계에서 계속 독자들이 끊이지 않는 사실 때문이다. 왜 이 책이 지금까지 ’명작’이나 ’고전’의 대열에 끼어 있을까?
 
번역자인 도정일은 그 이유를 "소비에트 체제라는, 한 시대의 권력형식만을 재현대상으로 한느 역사적 정치풍자의 수준을 넘어 [독재 일반]에 대한 우의적 정치풍자로 넓어지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소설 속의 ’나폴레옹(스탈린)’은 모든 시대에 있을 수 있는 독재자의 알레고리이고 돼지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을 수 있는 교활한 정예주의 권력집단의 알레고리라는 것이다. ’복서’나 ’클로버’ 같은 우직하고 성실한 동물들도 반드시 프롤레타리아트로 제한되지 않는 광의의 피착취 대중을 포괄하는 의미로 읽을 수 있다. 즉, 소비에트 체제의역사적 실체가 소멸하고 없는 지금 이 시대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동물농장>이 강한 적절성과 호소력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 정치사회의 권력 현실을 부패시키는 근본적 위험과 모순에 대한 항구적인 알레고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웰의 알레고리를 현재로 확대하여 해석할 경우 미국도, 중국도, 일본도, 한국도, 중동 아랍국가도, 중남미 아메리카나 아프리카의 어느 국가도 <동물농장>일 수 있고 앞으로 <동물농장>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물농장>의 가능성은 어느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고 어디에서 촉발되어 올 수 있을까?
여러가지 요소들이 있겠지만, 나는 그 중에서도 ’대중의 각성과 참여 수준’으로 보았다. 소설 속으로 돌아가서 살펴보면, 동물 반란이 성공하여 ’동물 공화국’을 선포한 후 초기에 ’나폴레옹’이 새끼 강아지 교육을 자신이 책임진다며 골방으로 강아지들을 옮겨 격리한 것에 대해 동물들이 아무런 의문과 관심을 표하지 않은 것, 새끼들이 젖을 뗀 후 남은 우유들이 사라져 돼지들에게만 제공된 것과 과수원의 사과들을 돼지들에게만 분배된 것에 대해 ’스퀼러’가 동물들에게 논리 비약을 일삼고 위협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며 윽박지를 때 동물들이 별다른 항의나 이의제기를 하지 못한 것을 말한다. 동물들이 자신들의 지도부인 ’나폴레옹’과 ’돼지들’의 일방적인 정책과 분배에 대해 대응하지 않은 것이 역으로 ’나폴레옹’과 ’돼지들’의 독재와 전횡을 점점 더 심하게 만든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동물농장’의 전체주의는 그 독재를 추진한 ’나폴레옹’과 ’돼지들’에게 가장 중요한 과오와 책임이 있지만, 역으로 일반 동물들이 스스로 생각하고 각성하고 참여하지 않아 스스로 자초한 측면도 크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나무가 ’저항의 피’를 먹고 자란다면 ’전체주의’라는 나무는 개인주의, 이기주의의 피를 먹고 자란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전체주의와 개인(이기)주의가 ’동전의 양면’이라 생각한다.
 
(한국사회의 처지를 <동물농장>과 일대일로 대응하는 것이 너무 확대해석이라 생각하지만,) 이명박 정권의 등장을 전후로 한 한국사회의 흐름과 한국의 대중, 민중들의 생각과 대응도 비슷하게 전개된 개연성이 있다고 본다. 그리고 2011년 작금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사회의 주류 문화로 자리잡게 되면, 언제든지 전체주의와 독재라는 암은 그 속에서 싹이 틀 수 있게 될 것이다.

* 오늘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31주년이다. 삼가 고인들의 명복을 빌며, 다시는 그와 같은 학살이 재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앞으로 해야 할 과제들이 아직 산적해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 2011년 5월 1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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